소설리스트

4장. 전해지지 않는 마음 (4/14)

4장. 전해지지 않는 마음

이튿날 아침 식사 자리의 주인공은 도란이었다.

삼백 년 내내 죽어 있던 땅이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가신들이 기쁜 낯빛으로 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궁으로 모여들었다. 먼 땅을 다스린다는 이유로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이들조차 특별히 시간을 내어 가금산을 찾았다. 식사 자리에 모인 후에도 그들은 스스럼없이 도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애기 신부님이 해낼 줄 알았어요.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땅을 되살리다니, 소문에는 지신이 있었다면서요?”

“한 땅에 오래 박힌 지신들은 성질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데. 애기 신부님이 워낙 사랑스러우니 마음이 풀렸나 봐요.”

“혹시 애기 신부님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아무도 못 본 지신을 다 봤다니!”

도란은 그들의 야단스러운 인사에 하나하나 겸양의 말로 답했다. 오히려 소야가 화원을 살린 당사자보다 더 신이 나서 활개를 쳤다.

“지신이 아무리 까다로워도 우리 애기 신부님한테 안 넘어가고 배기겠어요? 애기 신부님 자란 것 좀 보세요. 사내는 물론이고 여인도 길 가다가 돌아볼 정도인데 땅에 뿌리박힌 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어요? 어휴, 애기 신부님이 이렇게 곱게 자란 게 다 누구 덕인지 모르겠네? 누가 매일 머리를 빗어 주고 얼굴도 씻겨 줬을까요? 응?”

소야의 호들갑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이 요란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성한 도란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어여쁠 뿐 아니라 상냥하기까지 했다. 풍부한 표정과 새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경청하는 자세, 조심스럽고 신중한 듯하면서도 이따금 보여 주는 애교스러운 눈짓.

“아휴, 누가 우리 애기 신부님을 채 갈까 몰라.”

소야의 한탄에 도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사실 다른 가신들의 마음은 모두 소야와 같았다. 오죽하면 계수와 해범이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애기 신부님이 꽃가마 타고 멀리 갈 걸 생각하면 벌써 잠이 안 와요. 아무래도 데릴사위가 낫겠죠?”

“계수 님 말이 옳습니다. 영험함으로는 가금산에 견줄 곳이 없으니 신혼방을 차리기에도 안성맞춤일 겁니다.”

“아니, 아니에요. 아예 사내를 만나지 말아요, 애기 신부님. 사내 그까짓 거 만나서 무엇 한담?”

진사해는 도란을 둘러싼 모두가 충분히 수다를 떨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는 도란이 충분히 칭찬받았으면 했다. 그조차도 손대지 못했던 땅을 되살린 공은 오직 도란만의 것이니까. 도란의 혼사에 대한 언급이 어째서인지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소야가 구체적인 인물을 입에 올리기 전까진.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바리원 막내 도령이 갑자기 저한테 연통을 보냈지 뭐예요?”

바리원의 막내라면 지난번 우담화 잔치 때 도란과 술잔을 나눈 사내였다. 술을 처음 마셔 보는 그녀를 만취하게 했던. 도란도 나름대로 그 술자리를 즐긴 것 같았다.

진사해는 자기도 모르게 소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야는 많은 이들의 재촉을 받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대로 만난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서한을 보냈나 했더니…… 애기 신부님 안부를 묻는 거예요! 다른 내용 없이 딱 그것만!”

“어머, 어머, 어머!”

방금까지 사내 따위는 만나지 말라고 했던 계수가 가장 호들갑이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변했다. 나이 지긋한 가신들은 젊은이들의 풋풋한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다. 정작 도란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자기가 연락했다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어찌나 부탁하던지! 그래서 제가 의리를 지켜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예요.”

“소야 님, 지금 말했잖아요?”

“그야 여러분과의 의리가 더 중요하니까요! 어때요? 대무신령님의 막내! 서체는 아주 가지런하고 단정하니 꼭 선비 같던데.”

“서, 선녀님.”

도란은 귀까지 붉어진 채 더듬거렸다. 아까부터 이쪽을 빤히 보는 진사해 때문이었다. 도란만의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그는 눈도 거의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에게 분명히 거절당했음에도 뜨거운 시선에 괜히 얼굴이 뜨거웠다.

“저는 그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소야나 가신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진사해에게 하는 말이었다. 신령님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긴, 애기 신부님한테 직접 편지하지 않고 소야 님한테 연락한 이유가 있겠죠.”

계수는 대무신의 막내에게 금세 흥미가 식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도란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들 쪽을 계속 바라보는 진사해의 존재는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했다.

“그럼 내가 아는 훤칠한 청년이 하나 있는데…….”

“다들 그만.”

들뜬 음성이 싹둑 잘려 나갔다. 도란의 시선이 제일 먼저 진사해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별히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분화구 화원의 일로 도란을 축하하는 자리다. 사내 이야기는 이 정도로 충분해.”

다들 민망한 듯 시선을 주고받으며 헛기침을 했다. 소야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재빨리 풀어냈다.

“오늘따라 애기 신부님이 연꽃처럼 고우니 그런 얘기가 나왔나 봐요. 뭔가 달라 보이지요?”

가신들이 웅성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진사해가 어젯밤 화원 가운데의 도란을 보고 느낀 것을, 다른 이들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성장과 개화는 마법적인 밤공기와 아른아른한 달빛이 만들어 낸 착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하나의 통과 의례였을 분화구 화원의 일이 해결되어서일까. 도란은 한고비를 넘어 더욱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해사하게 꽃잎을 펼친 듯 보였다. 혼인이니 사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당연했다.

“식사하자.”

진사해는 소야의 물음을 피하며 가신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흩어지기 전에 저마다 도란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의 뜻을 전했다. 도란은 말간 웃음으로 모두의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자기 몫의 상 앞에 앉으면서 도란은 살그머니 진사해의 눈치를 살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그의 기분을 풀어 줄 만한 일을 하면 어떨까. 진사해의 혼란을 모르는 도란은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혼자 고민을 곱씹었다.

* * *

“투기하나 보지.”

화원에서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꺾으며 신령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일을 털어놓으니, 흙바닥에 앉아 있던 지신이 그런 말을 툭 뱉었다. 도란은 그녀의 말을 아예 이해하지 못해 꽃을 꺾던 손을 잠시 멈춰야 했다.

“투기요? 뭘요?”

“아니, 이 당연한 걸 왜 몰라?”

잘 듣고 있다가 갑자기 사내들 이야기가 나오니 표정이 안 좋아졌고, 심지어 소개해 준다는 말을 꺼낸 가신을 막아섰다고 했다. 그 자리에 가지 않아 정확한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지신은 딱 감이 왔다. 어쩌면 어젯밤, 연꽃 속에서 피어난 도란을 바라보던 진사해의 표정을 본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너 이 꽃은 왜 꺾는 거야?”

“신령님 방에 놓으려고요. 향기가 좋아서 기분도 좋아지실 거예요.”

“아주 지극정성이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신령님이 투기라뇨?”

“그거야 당연히…….”

지신은 어제 자신이 본 진사해의 모습을 하나하나 읊어 주려고 했다. 그가 도란을 얼마나 넋 놓고 눈에 담았는지, 예쁘다고 속삭일 때는 서툰 청년이라도 된 양 얼마나 떨었는지, 그런 것들을.

그러나 아침을 먹자마자 화원으로 달려와 그놈 줄 꽃을 꺾고 있는 도란을 보니 왠지 사실을 알리기가 싫어졌다. 그놈이 너한테 반한 것 같았다는 말을 하면 도란은 속도 없이 헤실거리며 그놈에게 달려갈 것이다. 도란은 몇 년 동안 가슴앓이를 했는데 그놈은 애태우는 일도 없이 애를 홀랑 데려가다니, 그 꼴만은 보기 싫었다.

“크흠, 나도 잘 모르겠네. 말이 헛나왔나 봐.”

“뭐예요, 싱겁게.”

사랑스럽지만 널 여인으로 좋아하진 않는다는 말로 도란을 거절한 놈도 이제 속 좀 끓여 보라지. 지신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을 돌렸다.

“그 대무신 아들한테는 정말 관심 없고?”

“그분 잘 알지도 못해요. 술 몇 잔 했을 뿐이라서.”

“너도 참 요령도 없다.”

“요령이요?”

흰 구절초 꽃잎을 하나하나 다듬던 도란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지신은 오늘따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것 같았다.

“마음 없어도 다른 사내도 만나 보고 그래.”

“왜요?”

“진사해 그놈한테 위기감을 줘야 할 거 아니야.”

“뭐 하러 그런 짓을 해요.”

도란이 푸스스 웃었다. 새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리고 이제 정리하고 있어요.”

“뭘 정리하는데?”

“음…… 마음?”

도란은 파릇파릇한 이파리를 다듬으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신령님이 그렇게 확실하게 말씀하셨고……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아직은 힘들긴 한데 저도 조금씩 정리해야죠.”

“전혀 정리 안 된 것 같은데?”

정곡을 찔린 느낌에 도란이 움찔했다.

진사해에게 안겨 바위산에서 내려올 때도 그녀는 대책 없이 설레는 가슴을 억눌러야 했다. 이만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대답 없는 도란의 마음을 읽은 지신은 분한 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면서 한 발을 바닥에 쾅쾅 굴렀다.

“얄미운 놈. 얄미운 놈 같으니라고! 그래, 너도 이참에 확 접어. 그놈이 치맛자락 붙잡고 매달릴 때까지 쳐다도 보지 마!”

뭘 또 그렇게까지 흥분을……. 그래도 도란은 고마움이 더 컸다. 소야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을 지겨워하지 않고 전부 들어 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지신이었으니까. 또 전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서 버럭버럭 성을 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사해나 다른 가신들과는 다른, 진짜 친구 같은 느낌.

“있잖아요, 지신님.”

“응?”

“전 어릴 때 혼자 자라서 막 바위나 나무를 친구처럼 부르면서 지냈거든요.”

지독한 외로움과 학대를 견디며 살아남은 도란은 그렇게라도 사랑할 대상을 찾으려 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사랑할 대상이 전혀 없는 것이었으므로.

“개울에 있는 징검다리 하나하나에도 이름이 있었어요. 웃기죠?”

그동안 도란의 얘기를 들어 그녀의 과거를 아는 지신은 가만히 경청하며 침묵을 지켰다. 도란도 특별히 슬픈 기색 없이 꽃 손질을 계속했다.

“근데 저한테 진짜 말을 걸어 준 건 지신님이 처음이에요.”

“으흠. 그래?”

“네. 그래서 참 좋아요.”

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던 땅에는 지신이 살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친구로 여겼던 돌과 나무에도 정말 누군가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실 나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지 않았을까. 도란은 지신을 보며 그런 위로를 받기도 했다.

바꿀 수 없으므로 극복하거나 치유할 수도 없다고 여겼던 과거가, 가금산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워진다. 진사해의 묵묵한 기다림과 끈질긴 다정함, 소야와 가신들의 애정, 선물처럼 나타난 지신의 존재, 도란에게는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어휴, 이 어린것이…….”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묘한 눈빛으로 도란을 보던 지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 진사해가 도란을 쉽게 데려가는 꼴은 못 보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다 됐다. 이제 꽂으러 가야겠어요.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난 생각 좀 해야겠어.”

“무슨 생각이요?”

무슨 생각이긴. 어떻게 해야 진사해 그놈을 더 애태울까 하는 생각이지!

지신은 계략을 감춘 채 총총 멀어지는 도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까맣게 모르는 그녀의 치맛자락이 명랑하게 흔들렸다.

* * *

쑥부쟁이와 구절초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향기나 생김새가 화려한 꽃들은 아니지만 이렇게 모아 놓고 보면 산뜻한 빛깔이 무척 정답고 예뻤다. 신령님도 좋아하시면 좋겠다. 앞으로 이렇게 화원에서 꽃을 꺾어다 방을 장식해 드려야지. 도란은 설레는 마음으로 다짐하며 진사해의 방으로 향했다.

“신령님, 저 도란이에요.”

허락을 받고 들어간 방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소야가 밝은 얼굴로 폴짝 뛰듯이 도란에게 다가왔다.

“애기 신부님! 어쩐 일이에요?”

“저, 꽃을 드리고 싶어서요. 병에 꽂아 놓으면 기분이 좋아지실 것 같아서.”

도란은 조심스럽게 진사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고맙다는 듯 빙긋 웃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꽃을 반기는 듯도 했고 도란을 반기는 듯도 했다.

도란은 창가에 놓인 빈 화병에 꽃을 꽂았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꼭 쥐고 왔는데도 조금도 시들지 않은 꽃들이 방 한쪽을 환하게 밝혔다. 그러는 사이 소야가 도란 뒤로 조용조용 다가왔다.

“애기 신부님, 이거 봐요!”

불쑥 튀어나온 두루마리가 주르르 펼쳐졌다. 도란은 소야의 뜻대로 그 서찰의 내용을 읽었다. 잘 정돈된 서체로 적힌 방문 요청이었다. 분화구 화원이 아름답게 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한 번쯤 볼 기회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보내는 이의 이름은 석춘. 모르는 이름인데 왜 이 편지를 자신에게 보여 준 것일까 의아해지려는 찰나.

“이름을 모르시나? 우담화 잔치에서 만난 대무신령님 막내예요!”

“정말요?”

흐릿하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한 번 술을 나눴다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달갑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을, 진사해가 빤히 바라보았다.

“화원이 살아난 게 어제인데 이렇게 득달같이 연락해 오다니 행동이 엄청 빨라요. 무인 집안이라 그런가? 저랑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인사 정도만 했는데 냅다 편지부터 부치다니 붙임성도 좋고.”

“네에…….”

“애기 신부님한테 안내를 부탁했는데, 오라고 할까요?”

도란은 난감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지금 이건 아까 아침에 들은 얘기의 연장선인 것 같다. 대무신의 막내아들이 도란에게 호감을 품은 게 분명하다던 그 이야기. 도란은 전에 그랬듯 진사해를 의식하며 그의 표정을 살짝 훔쳐보았다. 내내 도란만 보고 있던 그와 정확히 눈이 마주치고 말았지만.

“네가 원하면 불러도 좋다.”

더없이 모범적이고 다정한 대답이었는데 도란은 어쩐지 조금 낙담하고 말았다.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그때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졌으니까, 다시 만나면 반가울 것 같아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얼른 답신을 보내야겠네요!”

“저는 화원에 할 일이 남아서…….”

소야는 먼저 자리를 뜨는 도란의 뒷모습에 대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그런 다음 들뜬 얼굴을 진사해에게 돌렸다.

“그럼 언제쯤 오라고 할…….”

“…….”

“……신령님, 기분 안 좋으세요?”

“아니.”

소야는 거침없는 편이었지만 눈치까지 없지는 않았다. 아까 도란이 꽃을 들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던 진사해의 낯이 어쩐지 다른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불쾌함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운, 낯선 감정이 엿보였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임을 알기에 소야는 더 깜짝 놀랐다.

“그, 석춘 님에게 방문은 안 될 것 같다고 답신할까요?”

대강 넘겨짚은 것인데 진사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모호한 망설임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란이 기다릴 텐데 실망시킬 필요는 없지. 정중히 초대해라.”

“네에…….”

소야는 미심쩍은 기색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진사해는 낯선 감정을 끌어안고 창가로 다가갔다. 도란이 손수 꺾어 온 꽃들이 바람을 맞이하여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춤추는 꽃에 진득하게 시선을 주며 진사해는 자신의 마음에 조금 놀랐다.

대무신의 막내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도란에게 그를 갖다 붙이는 가신들의 언행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온당치 못한 생각이었다. 우담화 잔치 때까지만 해도 도란에게 또래 사내와 어울리라는 조언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아무래도 도란의 성장이 실감 나 섭섭한 모양이다. 연꽃 속에서 활짝 피어나던 도란을 봤을 때의 묘한 파동도 그 섭섭함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런 것이다. 애정으로 지켜봐 온 이가 날개를 펴고 멀리 갈 준비를 할 때의 아쉬움 같은 것이다. 언젠가 도란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기쁘고 조금은 섭섭한 마음으로 떠나는 그녀를 배웅할 것이라고.

진사해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러나 도란이 꺾어 온 꽃에서 정말이지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 * *

도란은 멀리서 날아오는 학 한 마리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기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날아오는 백학 위에 만난 적 있는 풍채 좋은 사내가 올라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을 가로질러 구름을 뚫고 날아온 그는, 대무신의 막내아들 석춘이었다.

“낭자.”

우담화 잔치 때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낯선 호칭이 귓전에 부딪혔다. 도란은 덩치 큰 사내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영광이네요.”

석춘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었다. 워낙 악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그런가, 왕에게 절하듯 과장되게 몸을 숙여 보이는 짓궂은 짓도 밉지가 않았다. 술자리에서 느낀 것처럼 그는 밝고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소야 선녀님은 안 보이시네요?”

“아, 다른 할 일이 있다고 저한테 안내를 부탁하셨어요. 괜찮으시죠?”

“당연하죠. 저야 낭자를 뵈러 온걸요.”

“……네?”

“그러니까, 그, 낭자의 화원을요!”

석춘이 드물게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 별다른 대답 없이 살풋 웃은 도란이 그의 손에 들린 보따리에 시선을 주었다.

“짐이 무거우면 신궁에 두고 갈까요?”

“아니요,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나중에 쓸 일이 있기도 하고.”

“네, 그럼…….”

도란이 가자는 듯 먼저 몸을 틀었다. 석춘이 재빠른 걸음으로 그녀 옆에 붙어 섰다.

분화구 화원까지 가는 동안 이런저런 수다가 이어졌다. 석춘은 꼭 술자리가 아니어도 말이 많고 또 상대의 말을 끌어낼 줄 알았다. 금세 어색함을 지워 낸 도란은 분화구 화원에서 만난 지신 얘기까지 몽땅 털어놓았다. 석춘은 그녀의 능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지신들은 변덕이 심해 설득하기 어렵다던데.”

“그래도 좋은 분이세요.”

“하긴, 화원에 사는 지신이니 마음이 강퍅할 리는 없죠. 화원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가 되네요.”

“정말 예뻐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하필 오늘 날이 흐려서 아쉽네요. 조금 추운 것도 같고.”

점심을 먹은 후부터 하늘이 꾸물꾸물 심상치 않더니 지금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화원은 모름지기 해가 비칠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고, 또 비가 많이 내리면 손님의 옷이 젖을 게 분명해서, 도란은 차라리 하늘이 맑아지기를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춘은 시원스럽게 그녀의 고민을 풀어 주었다.

“비가 내리면 더 운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겠죠?”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들은 마침내 분화구 화원에 도착했다. 도란은 지신에게 인사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손님이 싫어서 숨은 건 아니겠지. 그런 염려가 든 그때.

“우와.”

석춘의 순수한 감탄에,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흐린 하늘 아래서도 분화구 화원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여름에 만개하는 연꽃은 지신의 신비스러운 힘 덕분인지 아니면 가금산의 정기 덕분인지, 여전히 꽃잎 한 장 마르지 않고 활짝 피어 하늘을 우러렀다. 도란이 피어났던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펼쳐진 둥근 연잎들, 그리고 그 주위를 에워싼 순백의 나리꽃과 들장미, 하늘을 물들일 듯 짙은 보랏빛을 띤 붓꽃 여러 송이와…….

“배추도 있네요!”

석춘은 꽃 사이에 모습을 감춘 배추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신기한 것을 본 듯 신이 난 것 같아서, 도란도 그의 곁에 가까이 붙어 섰다.

“제가 예전에 혹시나 하고 심었던 건데요, 땅이 살아나니까 죽은 줄 알았던 씨앗까지 전부 싹을 틔웠어요. 정말 대단하죠?”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멋지네요.”

“지금은 이렇게 무성하기만 한데, 곧 길을 만들고 가금산 가신들과 손님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다듬을 거예요. 이쪽에 길을 내고 의자를 놓고요, 이쪽에 반달 모양 구조물을 놓은 다음에 장미를 심어서 줄기가 타고 올라가도록…….”

첫 손님을 맞이한 도란은 생각 이상으로 들떴다. 석춘은 꽃과 풀 사이를 즐겁게 오가며 상기된 얼굴로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그녀를 웃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꽃도 풀도 정말 많은데, 도란은 그것들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었으며, 화초 하나하나에 진정한 애정을 품고 있는 듯했다. 바리원의 달빛 아래서보다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우리 조금 쉴까요? 아직 앉을 곳은 없지만요.”

도란은 의자 하나 없는 흙바닥을 내려다보며 조금 우물쭈물했다. 석춘은 머리 위까지 자란 커다란 연잎 아래로 들어가 먼저 철퍼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귀한 신령의 막내아들이 맨바닥에 앉으려 할까 고민하던 도란도 마음을 놓고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저는 땅에 앉는 것도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다음에 의자를 놓은 후에도 놀러 오세요.”

“다시 초대해 주시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즐겁게 대답하던 도란이 멈칫했다.

그가 소야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던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애기 신부님에게 마음이 있는 게 틀림없다던 가신들의 수군거림도. 처음 그가 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신나게 대화하는 동안 잊고 말았다. 연잎 그늘 아래 둘만 앉은 지금, 갑자기 그런 얘기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잠깐 대화했을 뿐이지만 석춘은 좋은 사람 같았다. 점잔을 빼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나 덜 다듬어진 화원을 지적하거나 괜한 말로 부담을 안기는 대신, 솔직하게 감탄하고 진실하게 웃었다. 친구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당연히, 오시면 좋죠.”

가까스로 말을 맺은 도란이 화제를 돌렸다.

“그 보따리는 계속 들고 다니시네요. 옷을 가져오신 거예요?”

“아, 아니요. 이건…….”

석춘이 얼른 보따리를 풀었다. 수수한 보자기에 싸인 물건은 버들가지로 엮은 찬합이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 과자가 가득했다.

“와아.”

이번에는 도란이 감탄할 차례였다.

뽕잎을 넣어 만든 연두색 유과, 호두와 현미를 섞고 꿀을 타 뭉친 네모반듯한 강정, 떡가루를 조물조물 묻혀 고소한 냄새가 나는 인절미, 백년초로 불그스름한 빛을 낸 다식, 어릴 때 소야가 직접 먹여 주곤 했던 동글동글한 약과까지. 색색의 한지로 싸여 있는 간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달고 맛있었다.

“이걸 다 싸 오셨어요?”

“소야 님께 여쭤봤죠. 낭자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요.”

“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석춘이 조심스러운 권유로 도란의 당황을 지워 주었다.

“여기 앉아서 같이 먹을까요?”

그녀는 잠깐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챙겨다 준 마음이 고마웠다. 가신들이 말한 것처럼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제안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요.”

그래서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달콤한 간식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소소한 이야기가 오가고 웃음도 오갔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대무신령의 아들인 석춘이 무예나 수련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란은 그저 무술을 모르는 자신을 위한 배려이려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찬합이 삼분지 일 정도 비었을 때였다.

“어.”

도란이 손등으로 뺨에 튄 물방울을 닦아 냈다. 석춘도 찬합 뚜껑을 닫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심상찮던 먹구름이 본격적으로 비를 쏟아부을 모양이었다. 급격히 차가워진 공기에 도란이 목을 움츠렸다.

“빨리 돌아갈까요?”

우장도 챙겨 오지 않아 비를 만나면 곤란했다. 도란이 허겁지겁 일어난 순간,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낭자!”

손을 뻗은 석춘이 도란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커다란 연잎 아래 숨은 덕에 쫄딱 젖는 꼴은 피할 수 있었지만, 퍼붓는 비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둘은 눈앞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몰아치는 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연잎이 빗물을 완벽히 차단하지는 못해서, 둘의 옷자락은 이미 젖어 가고 있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자 기온도 뚝 떨어져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에취, 저절로 기침이 나왔다. 희미한 한기가 심상치 않았다. 옷을 따뜻하게 입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서 있다간 고뿔에 걸릴 것 같아 도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쩌죠?”

“어쩌긴. 연잎 하나 꺾어서 우산처럼 쓰고 가.”

불쑥 들린 목소리에 도란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타난 지신이 보였다.

“지신님! 석춘 님, 지신님이 왔어요. 혹시 보이세요?”

“아니요, 저는 안 보이네요.”

“오호라, 이놈이 그놈이야? 뭐, 좀 우락부락하긴 해도 나쁘지 않네.”

지신은 석춘 근처를 기웃기웃 돌아다니며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도란의 등을 떠밀었다.

“자, 연잎 하나 줄 테니 어서 쓰고 돌아가.”

“그럼 석춘 님 것까지 두 개…….”

“뭐? 안 되지, 안 돼. 하나로 둘이 같이 써!”

“네? 왜요?”

왜긴 왜야, 진사해가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지신은 진사해가 자신의 침방 창문을 열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환히 알고 있었다. 도란이 외간 사내와 어깨를 붙이고 숨결을 나누며 한 우산 안에서 종종거리는 걸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주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거다. 지신은 흥흥거리며 적당한 핑계를 주워섬겼다.

“몰라서 물어? 연잎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데 두 개나 끊어 간다고 그래? 소중히 여겨야지!”

“그건…… 지신님 말씀이 맞아요.”

그냥 핑계였는데 도란은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신은 작은 손으로 연잎 줄기를 꺾는 도란을 지켜보았다. 석춘은 보이지 않는 지신의 존재가 신기한지 엉뚱한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팔짱을 꼈다.

순진한 놈을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본래 사랑과 전쟁에는 반칙이고 뭐고 없는 법이다.

“석춘 님, 우리 이거 같이 쓰고 돌아가요! 지신님이 연잎 두 개나 꺾는 건 안 된대요.”

도란은 이미 젖어 들기 시작한 어깨로 명랑하게 석춘을 불렀다. 연잎이 크다 해도 덩치 큰 사내와 도란을 전부 숨겨 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 불편할 텐데, 석춘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그럼 연잎은 제가 들게요. 저 주세요, 낭자.”

지신은 척 팔짱을 끼고 가까이 붙은 채 걸어가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회색으로 변할 정도로 비가 퍼붓고 있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지신이 뒤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줄도 모르는 도란은 한쪽 어깨를 적시는 빗물에 몸을 움츠렸다.

‘추워…….’

가을 장대비는 바늘처럼 아팠다. 게다가 화원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트여 있어 싸늘한 바람이 쌩쌩 불었다. 우산 안으로 비가 들이쳐 연잎은 있으나 없으나였다. 차라리 화원에 가만히 숨어서 날씨가 순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앞은 하나도 안 보이고, 연잎은 계속 흔들리고, 어깨는 차츰차츰 젖어 축축하고,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연잎이 쑥 기울어지며 어깨를 적시던 비가 차단되었다. 도란은 추위 때문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석춘을 바라보았다. 우산을 그녀 쪽으로 깊이 기울여 준 그가 걱정 어린 눈을 깜빡거렸다.

“낭자, 많이 추우세요?”

무인이라 그런지 석춘은 멀쩡해 보였다. 그에 비해 도란은 혈색까지 나빠져 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그러나 밖에서 온 손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애써 의연하게 몸을 똑바로 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빨리 갈까요?”

“네, 그럼 어서…….”

남은 길을 살피던 석춘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걸음도 함께 멎어서, 도란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우장도 없이 비를 뚫고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란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겨우 달싹거렸다.

“신령님?”

멀리 있었던 것 같은데, 진사해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달려오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석춘이 인사하기도 전에 그가 도란을 향해 팔을 뻗었다.

“도란아.”

푹 젖어 추위에 시달리던 도란의 눈에, 진사해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또 안전해 보였다. 그는 퍼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으면서도 옷자락 하나 젖지 않고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주는 안정감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품은 감정 때문이었을까.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석춘과 꼭 붙어 있던 도란이 진사해 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스스럼없이 도란을 껴안고 붉은 겉옷으로 감싸 주었다. 그러자 도란의 몸을 두드리던 빗줄기도 사라졌다. 날씨는 여전한데 진사해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만 차가운 빗방울로부터 보호받는 것만 같았다.

“신령님. 죄송해요, 추워서…….”

자기도 모르게 젖은 채 안겨 들었던 도란이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진사해는 추위에 시달리느라 안색까지 나빠진 도란을 고쳐 안았다. 아예 발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무릎 아래 손을 넣어 안아 들자, 도란은 작게 신음하면서도 얌전히 몸을 맡겼다. 평소라면 한사코 거절했을 텐데, 가을비에 시달려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진사해는 그녀의 작은 몸을 좀 더 따뜻하게 품으며 둘러 준 겉옷을 제대로 여며 주었다. 핏기가 가신 뺨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그녀는 더 창백하고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진사해는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져 주었다.

“저, 신령님.”

연잎 우산 아래 홀로 선 석춘이 말을 붙였다. 진사해는 손님을 일별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짤막한 통보였지만 말씨는 제법 부드러웠다. 그런데 왜 괜히 목덜미가 차가운 것 같지. 석춘은 도란을 소중히 안아 들고 돌아서는 진사해의 뒷모습을 보며 목덜미를 쓱쓱 문질러 보았다.

바리원의 술자리에서 도란을 데려가던 진사해가 떠올랐다. 그런데 전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그때는 집안의 막내를 챙기는 듯했는데 지금은…….

‘잘못 느낀 건가?’

석춘은 아직도 한기가 안 가시는 목덜미에 손을 얹어 보았다. 비는 한동안 계속 쏟아질 모양이었다.

* * *

“추워…….”

도란은 진사해의 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손이 시린지 자꾸 두 손을 모아 가슴팍으로 당기는 몸짓이 새처럼 애처로웠다. 진사해는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신궁으로 돌아왔다. 가신들이 따뜻하게 불을 넣어 둔 침방에 다다라 도란을 내려놓으려는데, 그녀가 추위에 곱은 손가락으로 진사해의 가슴팍을 잡아 왔다.

바로 내려놓는 대신 시선을 맞대자 도란이 입술을 움직였다. 진사해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고스란히 끼쳐 왔다.

“저 비 맞아서, 이불 젖을 텐데…….”

그런 걸 걱정했던가.

진사해는 괜찮다고 답한 뒤 도란을 침상에 내려 주었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비바람에 시달려 엉망이었다. 적실로 꽃을 수놓은 흰 저고리가 어깨에 달라붙었고, 짙푸른 치맛단도 전부 젖어 발목에 감겨 있었다. 진사해는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젖은 살결에 손이 미끄러지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안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가 화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소야를 불러 이곳으로 욕조를 들이라고 해야겠다. 자칫하다간 고뿔이 들겠어.”

“제 방으로 가도 되는데. 신령님 쉬셔야 하잖아요.”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조금 정신이 드는지 도란이 예의 바른 말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도란을 이리 데려온 진사해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으나, 추워서 떨고 있는데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잠시 기다리거라.”

진사해는 밖으로 나가 소야를 불렀다. 가신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소야는 자기 침방 앞에 손님처럼 우두커니 선 신령님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기 신부님이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연못 별채로 모셔 갈까요?”

“안에서 씻고 자게 해라. 추워서 떨고 있는데 괜히 이리저리 움직이다가는 큰일이 날 테니.”

“그래도 신령님 침방에서…….”

소야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렸으나, 장지문 너머로 도란의 기침 소리가 넘어오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도란의 상태를 살피더니 미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곧 그녀의 부탁을 받은 가신들이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나무 욕조를 들고 진사해의 침방에 들었다.

소야는 장지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고 신신당부했다.

“들어오지 마세요. 아셨죠?”

졸지에 자기 방을 내주게 된 진사해는 그렇게 문밖에 남았다.

찰박거리는 물소리, 소야가 지친 도란을 어르고 달래 욕조로 이끄는 소리, 젖은 옷이 사르르 사르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도란이 죄송하다고 웅얼웅얼 사과하자 소야가 아픈데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타박하기도 했다. 진사해는 굳게 닫힌 장지문 앞에 우뚝 서서 한참 그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연잎 우산을 운치 있게 나눠 쓰고 다가오던 도란이 떠올랐다. 건장한 사내와 한 우산을 쓰고 재게 걸으면서,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거센 빗줄기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도란이 나란히 있는 사내를 외면하고 곧장 자신의 품으로 산새처럼 안겨 들었을 때 마음을 가득 채우던, 기묘한 만족감은 또 왜…….

진사해는 낭하에 기대 눈을 감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했다.

* * *

도란은 어렴풋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살결을 씻어 주는 온화한 손길에 마음을 맡기자 저절로 눈이 감긴 것까지만 떠올랐다. 소야가 피곤하면 어서 자라고 말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주었던 일도 아득히 기억나는 듯했다. 결국 도란은 욕조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소야가 옷을 입혀 줄 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깊은 잠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지금도 정신이 맑게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밤인가 보네…….’

가물가물한 시야에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굳게 닫힌 창의 창호지를 희게 물들인 달빛만이 환했다.

그 밝은 창을 바라보며 선 이의 뒷모습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신령님.’

부르려고 했는데 잠에서 막 깬 탓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기운 때문에 힘이 없어 부르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소리가 되지 못한 부름을 듣기라도 한 듯 진사해가 천천히 돌아섰다.

은은한 달빛에 젖은 그를 보던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부르려고 했으면서 왜 자는 척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그저 놀라서일까. 결론을 내릴 틈도 없이 진사해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하아…….”

긴 한숨이 도란의 귓가에 닿았다.

그러나 도란에게 닿은 것은 소리만이 아니었다. 온기. 눈을 꼭 감은 그녀의 뺨 위에서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어루만져 주던 아까와 똑같이. 진사해는 그때의 일을 재현해 보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속절없이 이끌린 것 같기도 했다.

나긋한 온기가 관자놀이 가까이에서 둥근 턱까지 천천히 이어졌다. 말도 안 된다는 건 잘 알지만, 그의 손이 지나간 모양 그대로 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참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었다.

“신령님.”

반짝 뜨인 두 눈이 별 같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진사해가 딱 굳었다. 도란이 깨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게 분명했다.

“도란아.”

그가 곧바로 손을 거둬들였다. 마치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

“내가 깨웠구나.”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도란이 반쯤 몸을 일으키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눌러 주었다.

“누워 있어라. 열이 나는지 걱정이 되어서 잠깐…….”

진사해의 말끝이 드물게 흐려졌다. 도란은 쿵쿵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누운 채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 행동을 어찌 해석했는지 진사해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는 도란을 안심시키려는 듯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럼 푹 쉬고.”

“…….”

“내일 보자.”

진사해가 돌아설 때, 옷자락이 펄럭이며 바람이 일어났다. 도란은 마법에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가슴팍에 모은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조금 서두르는 몸짓으로 밖으로 나간 후, 도란은 천천히 자기 뺨을 문질러 보았다. 진사해가 귀한 보옥처럼 어루만져 준 곳이었다.

신령님이 왜 그러셨을까.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도란은 처음 연정을 알았던 그날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참을 뒤척거려야 했다.

* * *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성큼성큼 낭하를 가로지르며, 진사해는 몇 번이나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손에는 여전히 도란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잠든 얼굴을 보다가 홀린 듯 이끌린 기억이 생생했다. 달빛이 번진 보얀 뺨을 쓰다듬으며 여인의 살결을 어루만지듯 긴장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도란은 어릴 때부터 가금산 모두의 막내처럼 여기서 지냈고, 그러니까…….

아무튼 안 된다.

턱 막힌 듯 뚜렷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진사해는 정신을 붙들어야 한다고 스스로 못을 박았다. 긴 세월 대체로 평온하게 흘러온 마음이 태풍이 들이닥친 바다처럼 혼란스럽게 파도쳤다.

진사해는 그날 자신의 침방 근처에도 가지 않고 밤을 지새웠다. 도란은 물론 다른 가금산 가신들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헝클어진 표정으로.

* * *

비 개어 유난히 맑고 푸른 다음 날 아침, 도란은 연못 별채로 돌아갔다. 신령님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그는 내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석춘이 아침 일찍부터 연못 별채에 방문해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비 때문에 열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해서 어쩌죠?”

“그게 왜 석춘 님이 죄송할 일이에요. 오래 앓지도 않았고 잠깐이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다음에 화원이 다듬어지면 그때 또 보러 와 주세요.”

석춘의 시선이 물끄러미 이어졌다. 대답 없는 눈길의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진 도란에게 조심스러운 음성이 닿았다.

“실은 낭자와 벗이 되고 싶어 왔습니다.”

“벗이요?”

애기 신부님에게 마음이 있어 자꾸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겠냐고 호들갑을 떨던 소야가 떠올랐다. 석춘은 자신의 마음이 연정이 아닌 우정이었다 고백하고 있는데, 그게 아쉽거나 싫지는 않았고 그냥 조금 의아하기만 했다.

“제게는 또래의 벗이 하나도 없거든요. 대무신의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사내들은 저를 불편해하거나 검술(劍術) 비기만 알려 달라 해서요.”

그 조곤조곤한 고백을 들으니 바리원에서 형들과만 앉아 있던 석춘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란과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기뻐하던 것도. 도란은 사려 깊은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날 낭자와 어울린 건 정말 즐거워서, 낭자와라면 벗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벗이 많지 않아요. 우리 서로 친구 하면 되겠네요.”

도란도 석춘의 정성과 성정이 좋았다. 또 그녀도 벗을 원했다. 지신 말고도 다른 벗이 생긴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그들은 벗이 된 기념으로 한참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가금산 부엌에서 준비한 달콤한 간식을 나눠 먹고 맑은 차를 마시면서. 둘은 의외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도란은 석춘이 들려주는 형제들 이야기를 재밌어했고, 석춘은 다른 곳과 교류가 잦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가금산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혹시, 가금산 신령님과 혼약한 사이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석춘이 재빠르게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면 죄송해요. 괜히 물어봤나?”

“죄송할 건 없지만…… 신령님이랑 저는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래요?”

“오해할 수도 있죠. 다들 절 애기 신부님이라고 부르니까.”

석춘이 민망한 듯 턱을 긁적거렸다.

“그것 때문에 오해한 건 아닌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마주친 진사해의 기세가 워낙 기묘했어서 물은 것이었다. 그는 석춘 옆에 붙어 선 도란을 망설임 없이 데려갔고 자신의 겉옷으로 보물처럼 감싸 주었다. 그뿐인가, 작은 몸을 소중하게 들어 품듯이 안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일별하던 그 눈빛. 헤어진 후에도 한참이나 목덜미가 써늘하던…….

착각이었나. 도란이 딱 잘라 아니라고 하니 석춘도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럼 곶감 꿰러 같이 갈 수 있겠어요!”

“곶감?”

“네.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성샛골에 곶감 농장이 있는데요…….”

성샛골 곶감 농장에서는 이맘때마다 주황빛으로 익은 감을 따 껍질을 둘둘 벗겨 실에 꿰곤 한다. 꿰어야 하는 감의 개수가 수천 개에 이르니 일손도 그만큼 많이 몰리는데, 수많은 이들이 모이는 만큼 축제 분위기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들만 참여할 수 있어 자신은 이제껏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잘 알지는 못해도 두 형님은 전부 그곳에서 인연을 만났으니 분명 선남선녀만 모이는 곳일 테다. 어른이 되면 꼭 가 보고 싶었는데 형님들은 이제 안 간다고 하고 혼자 가기는 민망해서 고민이었다…….

도란은 신나게 이어지는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들었다. 사실 그녀가 가장 집중해서 들은 부분은 ‘성샛골 곶감이 얼마나 맛있는가’였다.

“전에 형님들이 주셔서 딱 한 번 먹어 봤는데, 쫀득쫀득하고 달기가 다른 곶감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언젠가 가신인 계수가 가져다준 곶감이 떠올랐다. 그때도 언뜻 성샛골 곶감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무척 맛있어서 더 먹고 싶었지만, 구하기 어려운 음식인 것 같아 한 번도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벗을 만들고 싶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데다 성샛골에 함께 갈 약속까지 잡은 석춘은 개운한 얼굴로 떠났다. 도란 역시 기쁘고 뿌듯한 마음으로 그를 전송한 뒤 곧장 진사해에게 달려갔다.

진사해는 분화구 화원을 보며 서 있었다. 그는 몰랐겠지만 지신도 함께였는데, 그녀는 커다란 이파리를 어루만지며 정성껏 살피는 진사해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도란은 그녀에게 눈인사한 후 곧장 신령님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아.’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낯선 긴장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달빛을 등지고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생각하면, 감출 수도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결국 진사해가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

“도란아.”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 같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다 꿈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몸은 괜찮으냐?”

도란은 자신이 진사해를 찾아온 이유를 뒤늦게 상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 붙어 섰는데 진사해가 보일 듯 말 듯 몸을 살짝 떨어뜨렸다. 이유를 몰라 멈칫한 도란과는 달리 지신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 괜찮아요. 석춘 님도 아까 가셨어요.”

“학이 떠나는 걸 봤다.”

“그런데요, 석춘 님이 성샛골 곶감 얘기를 하셨는데요…….”

진사해는 그녀의 말을 차분하게 들었다. 그러더니 엉뚱한 대답을 해 왔다.

“너도 지난번에 바위산에서 받은 서한을 기억하겠지.”

“네? 네.”

어떻게 그날 일을 잊겠는가. 신령님의 품에 안겨 산에서 내려온 날인데. 도란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성샛골에서 보낸 소식이다. 가금산에 성년을 맞은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초대한 것이지. 아마 대무신도 막내아들 때문에 그 서한을 받았을 것이다.”

“네…….”

“초대도 받았으니 가고 싶다면 가도 좋다. 대신 꼭 대무신의 막내와…….”

진사해는 무언가를 참아 내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같이 다녀야 한다. 꼭.”

연잎에 앉아 있던 지신이 허공에 헛웃음을 쏘아 보냈다.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약속할 수 있겠지?”

지신님에게 신경 쓰랴 신령님에게 대답하랴 도란은 왠지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일단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럴게요.”

“그래.”

한숨처럼 답한 진사해의 손이 도란의 머리로 다가왔다. 쓰다듬으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더니 가는 어깨를 짚었다. 지신의 탄식이 더 커졌지만, 진사해는 그대로 도란을 스쳐 멀어져 갔다.

도란은 그의 온기가 남은 어깨에 살짝 손을 대 보았다. 가신을 격려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손길 같아 괜히 속상했다. 어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구나. 이제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망감은 처음처럼 쓰라렸다.

“흥, 어디 두고 보자.”

진사해는 들을 수 없는 지신의 빈정거림만이 분화구 화원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 * *

그 뒤로 석춘은 자주 가금산에 방문했다. 성샛골에 가기 전까지 도란과 더 깊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모두의 눈에 환히 보였다. 석춘의 감정이 연심이 아니라 해도, 또래끼리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신들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도란 역시 석춘의 방문을 반겼다. 석춘은 큰 신의 아들답지 않게 소탈하고 스스럼없어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그의 재주가 그거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와.”

그가 도란의 청으로 자신의 재주 중 하나인 검을 가져와 보여 주었을 때, 도란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춘이 연못 별채까지 가져와 준 검은 겉모양부터 신비로웠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검은색 검집에 새겨진 섬세한 무늬는 검에 무지한 사람의 눈도 사로잡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검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면 파도 무늬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는데 꼭 정말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검이에요. 제가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더 짧았는데 점점 길어졌어요.”

“신기하네요. 대무신령님의 능력이겠죠?”

“네, 뭐…….”

겸손하게 대답한 석춘이 검을 뽑아 보여 주었다. 스르릉, 청아한 소리와 함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도 벨 수 있을 것처럼 예리한 검이었다. 도란이 다시 한번 탄성을 터뜨렸다. 무기가 아니라 예술품 같았다.

“만져 보시겠어요?”

안 그래도 한 번쯤 손을 대 보고 싶었던 도란은 사양하지 않고 손잡이를 살짝 쥐어 보았다. 그런데 무게가 뜻밖이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보다 가볍네요?”

“맞아요. 제 생각대로 검의 무게를 조절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일도 가능해요?”

“당연하죠. 무겁게도 만들어 볼 수 있어요.”

그의 말대로 곧 검이 무거워졌다. 도란은 연신 감탄하며 검을 매만졌다. 거듭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석춘이 어깨를 으쓱했다.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도란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어.”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낭자, 왜 그러세요?”

“잠깐만요.”

도란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분명 노랫소리가 들렸다. 분명한 노랫말이 있다기보다는 흥얼거리는 소리에 가깝긴 했지만. 그 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시냇물의 재잘거림 같기도 하고 참새들의 수다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긴 연못 별채 안이고,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이렇게 선명히 들릴 리 없는데.

무언가 퍼뜩 깨달은 듯 도란이 검을 내려다보았다.

노랫소리는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춘 님, 들리세요? 검이 노래하고 있어요!”

흥분에 찬 도란의 속삭임에 석춘도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검의 노래는 오직 도란의 귀에만 들렸다. 석춘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도란이 좀 더 집중해서 들어 보라고 말하려던 그때.

“넌 내 노래가 들리는 모양이지?”

검이 말을 걸었다.

이미 지신을 한 번 겪어 본 덕에 도란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도란이 놀란 건 검이 말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이렇게 아름다운 검에서…….

“젊은 처자, 내 노래가 들리느냐고!”

걸걸한 아저씨 목소리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좀 당황스럽긴 했다.

“네, 들려요.”

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석춘은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하는 도란을 보고 말을 잃었다. 도란이 분화구 화원의 지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녀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아를 가진 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대무신령이 직접 만들어 준 검이니 혼이 깃들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석춘은 도란과 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도란의 말뿐이었지만.

“참 좋네. 좋아! 주인도 못 듣는 노래를 처자가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어, 선생님? 선생님은 원래부터 이 검에 사셨던 건가요?”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검이 크흐흐, 하고 웃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이 조금 진동했다. 그 떨림을 알아차린 석춘의 입이 벌어졌다. 아주 어릴 때 한두 번 느낀 떨림이 가만히 앉아 있는 지금 전해진 것이다.

“그래, 난 선생님이지. 처자가 보는 눈이 있네. 흠, 흠. 난 이 검에 깃들어 있으니 처음부터 검에 살았다고 해도 되겠지.”

“정말요? 대무신령님이 넣어 주신 건가요?”

“그렇지 않아. 난 신들이 함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하찮은 잡귀가 아니라고!”

“…….”

도란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 지신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놈이 어렸을 때 검에 대한 열의가 있어 보여서 들어왔더니 말이야. 어째 날이 갈수록 수련을 게을리하니, 쯧쯧……. 하여튼 요즘 젊은 놈들은 끈기도 없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던 일도 팩 팽개쳐 버리고, 아주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야 큰일을 할 수 있겠어?”

이 말을 그대로 석춘에게 전할 수 없었던 도란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석춘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어 왔다.

“뭐래요?”

“그게…….”

“뭘 망설여? 빨리 전달해.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해도 모자랄 판에 허구한 날 놀러만 다니고 풍류나 쫓으니 실력이 늘지를 않는 거라고!”

도란이 어색하게 웃으며 괜히 검의 옆면을 쓰다듬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도란에게서 대답을 읽어 낸 석춘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알아요. 저 열심히 안 한다고 그러죠?”

“여, 열심히 안 한다기보다는…….”

“열심히 안 한다 뿐이야? 요즘 검은 아예 내팽개쳤잖아!”

검이 얼마나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석춘을 대신해 변명했다.

“저희는 아직 어리고, 검 말고 배울 것도 많고요. 석춘 님도 얼마나 바쁘신데요.”

“저놈 하나도 안 바빠. 쯧, 어른이 되었으면 방황도 그만해야지.”

“방황……?”

검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이 다시 웅웅 떨렸다.

“형들의 실력은 날로 늘어 가고 본인은 뒤처지니 실망한 게지. 안 그래도 의욕이 떨어져 가는데, 동무하자고 다가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검술 비기나 물어보고.”

도란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석춘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대무신령의 아들치고는 무술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검을 보여 준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검을 다루는 모습은 아예 보지 못했다.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도 수련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검을 아예 도려낸 사람처럼 말이다.

“회의감이 들 만도 해. 그걸 이해 못 한다는 건 아니야. 그렇게 꽉 막힌 늙은이는 아니라고, 내가. 하지만 방황만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이놈은 새로운 걸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니고, 매일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미련만 남기고 정작 연습은 안 한다고. 차라리 검이 싫다고 내버리고 갔으면 또 몰라. 미련은 한 보따리면서 어물쩍거려 봐야 뭐해?”

“…….”

“재능이 없었으면 내가 이 검에 오지도 않았어. 하지만 재능이 많아도 자기가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라고. 젊은 처자는 내 말이 무슨 소린지 알지?”

“네…….”

“이 답답한 놈도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처자가 말 좀 전해 봐.”

말을 전하라고 해도 뭐라고 한단 말인가. 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석춘의 반감만 살 것이다. 그런 말들이 압박으로 다가와 오히려 검을 정말 포기할지도 모른다.

“뭐래요? 뭐라고 해요?”

도란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재차 물어 오는 석춘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덕이었다.

“석춘 님이 검을 엄청 잘 다룬다고, 저한테 보여 주래요.”

“……네?”

놀라서 되물은 석춘이 곧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연습 안 한 지도 오래됐는데.”

연습 안 한 지 오래라면서도 석춘은 검을 만지작거렸다. 단순한 물건을 만지는 손길은 아니었다. 검신을 매만지고 손잡이를 쓰다듬는 몸짓에서 떨치지 못한 애정이 느껴졌다. 검에 깃든 혼이 왜 ‘미련은 한 보따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란은 좀 더 가벼운 음성으로 졸라 보았다.

“그래도 잘하실 거라는데요. 저한테 한 번만 보여 주세요. 저 다른 사람이 검 다루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가금산 신령님도 검을 쓸 줄 아실 거예요. 그분한테 보여 달라고 하세요.”

정말 자신이 없는지 석춘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도란은 진사해가 검을 다룰 줄 안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지만, 검이 재촉하듯 헛기침을 한 덕분에 원래의 목적을 기억해 냈다.

“기본 동작이라도 좋아요. 한 번만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실력이 녹슬었을 텐데……. 엉성하게 하면 대무신령의 아들이 엉망으로 한다고 웃을 거잖아요.”

도란의 눈이 커졌다. 왜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냥 밝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대무신령의 아들로서 받아 온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어쩌면 그가 오래 검을 수련하지 않은 이유가 그 부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왜 웃겠어요? 그리고 전 검을 잘 몰라서 엉성하게 하는지 잘하는지도 몰라요.”

“정말 잘 못하는데…….”

거듭된 부탁에 못 이긴 석춘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함께 연못 별채 밖으로 나갔다. 분화구 화원이 멀지 않은, 잔디가 깔린 넓은 땅으로.

그러나 그곳에 가서도 석춘은 쉽게 검을 움직이지 못했다. 편안하고 명랑한 모습을 잃어버린 그는, 검이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듯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도란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둘 다 침묵하는 가운데 검의 목소리만 울렸다.

“으하하하!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겠구나. 이놈아, 어서 가자!”

검이 거세게 진동했다. 도란은 움찔 놀라는 석춘에게 검의 상태를 전해 주었다.

“신이 나나 봐요. 어서 시작하자고 하는데요.”

석춘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검이 좋았다. 아버지 곁에서 놀다가 검 쥐는 법을 깨쳤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놀이하듯 훈련을 했다. 자신을 늘 아이 취급하는 형들이 직접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아버지도 많이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대무신령의 아들이라고 하면 무술의 천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거듭 청해서 즐겁게 보여 주면, 모두가 은근히 자신의 검술을 평가하고 이러쿵저러쿵 청하지 않은 말을 해 댔다.

그때부터 검이 무거워졌다. 얼마든지 가볍게 만들 수 있는데도 무쇠처럼 묵직하게만 느껴졌다. 의욕은 돌처럼 굳고, 바람을 노래 삼아 검무를 즐기던 몸은 나무토막처럼 변하고, 나중에는 형들의 조언마저 듣기 싫었다. 방황하는 아들을 보던 대무신령은 네 마음이 검을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 않다면 차라리 그만두고 다른 즐거움을 찾으라고 충고했다. 아들을 압박하고 싶지 않은 배려심에 한 말이었지만, 석춘에게는 체념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석춘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석춘 님. 들리세요?”

도란이 숨죽여 감탄했다.

“검이 바람 소리를 내고 있어요…….”

그녀가 너무나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어서, 차마 못 하겠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석춘은 나는 검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검을 세로로 한 차례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가볍게 도약하고 대각선으로 내리긋고, 옷자락이 펄럭이고 잔디밭이 물결치고 햇빛이 맹렬히 튀었다. 마지못해서나마 몸을 움직이자 숨이 가빴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실로 오랜만의 수련이었다. 석춘은 몇 걸음을 재게 나아가 휙 돌아서며 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적당히만 보여 주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몸에 열이 오르자 없던 기운도 솟아났다. 그는 어릴 적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며 높이 도약했다.

태양이 가까워졌고, 검이 기쁘게 울었다.

그 순간, 석춘의 귀에도 들렸다.

검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가.

그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마음 어귀에서 태어난 열정이, 잡념의 갈대밭과 부담의 늪을 지나 석춘에게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소리는 아직 지평선 너머에 있는 듯 멀고 아득했지만 석춘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는 춤추는 듯한 움직임으로 땅에 내려섰다. 큰 손안에서 검이 자유자재로 뛰놀았고 휙휙 돌아가며 형체 없는 적들을 쓰러뜨렸다. 수련하는 자가 쓰러뜨려야 하는 적은 다른 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처음 검을 때 아버지가 해 준 얘기가 떠올랐다. 전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그 조언이 석춘의 검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와…….”

도란은 넋을 놓고 홀린 듯 석춘의 움직임을 좇았다. 펄럭이는 옷자락 너머로 시린 검날이 번뜩였다. 빛으로, 바람으로 엮은 춤 같았다. 그것은 도란이 난생처음 본 초식이었다.

“뭐 하는 거야?”

화원에서 낮잠을 자던 지신이 나타났다. 금방 갈 것처럼 서 있던 지신은 곧 슬그머니 도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 도란처럼 말없이 연결된 동작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애기 신부님, 저도 봐도 돼요?”

지나가다 본 것일까. 소야도 말을 걸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연못 별채가 아닌, 탁 트인 곳에서 하다 보니 눈에 띈 모양이었다. 석춘은 소야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구슬땀을 흘리며 검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석춘을 방해하지 않도록 침묵하며 은근슬쩍 한 자리씩 차지했다. 석춘이 높이 날아올랐다가 검 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다시 솟구칠 때는 나지막한 탄성도 터졌다. 그러나 무아지경인 석춘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하고 검과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헉, 헉…….”

기분 좋게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석춘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잊고 있던 현실이 시야를 채웠다. 족히 열 명은 될 법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경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초식이 끝났음을 알자마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석춘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얼떨떨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부담스러워 숨이 막히던 남들의 평가가, 지금은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린 순간의 생생한 기쁨과 해방감만이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란이 다가왔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검의 말을 전해 주었다.

“지금처럼 해 달래요.”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요. 아무도 상관없이, 두려움 없이.”

도란은 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잠시 조용해졌다. 석춘은, 마치 조용히 하면 도란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듯 침묵했다. 그런다고 검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검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아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뭐라고 전하려던 도란이 멈칫하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데요?”

석춘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크게 웃은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는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낭자. 다 낭자 덕분이에요.”

“석춘 님?”

“낭자와 벗이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얼떨떨하게 안겨 있던 도란은 살며시 웃으며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때만큼은 주위에 있는 가신들의 시선도 중요하지 않았다. 벗의 고민을 알고 그와 마음을 나누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 * *

물론 그건 진사해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깜짝 놀랐지 뭐예요. 석춘 님이 갑자기 애기 신부님을 이렇게 끌어안는데!”

“대무신령님 아들이라 그런가. 시원시원하고 사내답지 않아요?”

“애기 신부님이 그렇게 누구 안아 주는 건 처음 봤어요. 부러워라, 나도 안아 달라고 할까?”

아침 식사 자리가 도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자리에 도란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사해에게는 그마저도 낯선 일이었다.

“소야 님이랑 바리원에 갔대요. 석춘 님이 형들 검에도 혼이 깃들어 있는지 봐 달라고 했다나?”

“석춘 님이 얼마나 얘기를 하고 다녔는지 벌써 소문이 쫙 깔렸어요. 검뿐 아니라 무술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애기 신부님에게 몰려들 게 뻔해요.”

“화원에 꽃을 피울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능력이 굉장한 모양이에요.”

“나도 빨리 나가서 자랑해야지.”

아침 식사 자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해범이 진사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신령님도 초식을 보셨습니까?”

“아니, 못 보았다.”

“저도 지나가다 잠시 보았는데, 연소한 나이에 굉장하더군요.”

“맞아요. 애기 신부님이 그 모습에 홀딱 반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어요.”

수다를 떠느라 아예 수저를 내려놓은 계수가 냉큼 끼어들었다. 도란과 석춘이 정말 벗인 것을 아는 가신들은 마음 편히 웃음을 터뜨리며 농을 즐겼지만, 진사해는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또래와 어울리라고 한 건 자신인데, 또 석춘과 함께 성샛골에 다녀오라고 허락한 것도 자신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개운치 못한 것일까.

진사해의 속을 까맣게 모르는 도란은 밤이 늦어서야 가금산으로 돌아왔다. 가신들의 말대로 온갖 사람이 자기 무기도 봐 달라며 찾아오는 바람에 조금 지친 상태였다.

“선녀님, 어서 쉬세요.”

“이부자리만 봐 드리고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선녀님도 오늘 힘드셨잖아요.”

종일 도란을 따라다니며 챙겨 준 소야도 확실히 피로에 절어 있었다. 도란은 미련이 남은 듯 연못 별채를 힐끔거리는 소야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돌아가서 간단히 씻은 후 포근한 이불에 몸을 묻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피곤한 몸만큼이나 마음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친 다리를 이끌고 연못 별채로 돌아왔다.

그런데 달을 품은 연못가에 뜻밖의 존재가 서 있었다.

“신령님!”

도란은 피로마저 잊고 그에게 달려갔다. 붉은 치맛자락이 연잎처럼 풍성하게 펼쳐졌다.

“저 기다리셨어요?”

“그래. 할 얘기가 있어서.”

도란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진사해 옆에 나란히 섰다. 거울처럼 매끈한 수면에 둘의 모습이 거꾸로 비쳤다. 도란은 물에 비친 신령님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그가 할 말이 무엇일까 짐작해 보았다. 떠오르는 게 아주 없지는 않았다.

“혹시 검을 보여 주러 오셨나요?”

“검?”

“석춘 님에게 들었어요. 신령님도 검을 쓰신다고. 혹시 혼이 깃들어 있는지 알고 싶으신 거면 봐 드릴게요.”

진사해가 엷은 웃음으로 부정의 뜻을 표했다.

“종일 남들의 검을 봐 주고 왔을 네게 그런 일을 청할 마음은 없다.”

“저 안 피곤한데…….”

막 가금산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무척 피로했는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연정은 하루 내내 쌓인 피로마저 말끔히 지워 버리는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봐 드릴게요. 신령님이 오래 쓰신 검이면 혼이 있을지도 몰라요.”

“검에 혼이 머물고 있다 해도, 기다리면 언젠가 나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그러니 네가 수고롭게 봐 주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면.

분화구 화원의 일을 상의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진사해는 수련 역시 묵묵한 기다림과 인내로 해 나가는 모양이었다. 무술가로 이름난 대무신령의 아들들도 자기 검의 목소리를 빨리 들으려고 안달하는데, 그는 고요 속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었다.

‘나도 기다리면 신령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그때, 진사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곧 그의 백옥 같은 얼굴이 도란을 향했다.

“화원의 지신을 발견했을 때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너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신들의 세상에도 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이는 드물지.”

“…….”

“그게 네 근심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도란은 그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바리원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도란과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어떤 이의 무기에는 혼이 있었고 어떤 이의 무기에는 혼이 없었다. 점잖게 대화하고 돌아가는 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신의 무기에 혼이 없음을 알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무기의 혼으로부터 원하는 말을 듣지 못해 상심하는 사람도 보았다. 아마 오늘의 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낯선 상황을 겪어 낸 탓인지도 몰랐다.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도란은 석춘을 향한 호의만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못 한다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순간도 있었다.

신령님은 보지 않고도 얼마나 많은 것을 짐작하시는지. 어릴 때도, 지금도.

도란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오늘 힘들었어요.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고요. 다음에는 안 갈 것 같아요.”

진사해는 고개 숙인 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이 몹시 저려 왔다.

“다음에 곤란한 부탁을 받으면 내 핑계를 대라.”

“네?”

“내가 귀한 능력을 쉽게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면, 아무도 더 청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제가 힘들어서 안 하는 건데 신령님이 그랬다고 하면…….”

진사해가 부드럽게 웃었다. 도란은 미풍에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홀린 듯 바라보았다.

“소야는 매번 내 이름을 판다.”

“소야 선녀님이요?”

“다른 이의 초대를 부드럽게 거절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시킨 일을 하느라 바빠서 못 간다고 하지. 사실 소야가 가금산에서 하는 일은 많지 않은데 말이다.”

진사해는 그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해범도 가끔 그러는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내게 꼬박꼬박 알리긴 하지만.”

소야야 그렇다 쳐도 고지식하고 단단한 해범이 신의 이름을 판다니 의외였다. 눈만 동그래진 도란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진사해가 둥근 어깨를 한 차례 다독여 주었다.

“너도 내 가신이니, 얼마든지 내 이름을 팔 수 있지.”

나직한 음성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에 잠겨 도란도 그를 따라 웃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감사해요, 신령님. 그거 때문에 여기서 기다려 주시고.”

감미로운 미소에 진사해가 멈칫했다.

이 한 가지 때문에 도란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오래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된 것도 사실이고, 해 줄 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목적이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웠다.

“초식을 재미있게 보았다고 들었다.”

“초식이요?”

“대무신의 아들이 보여 준 검술 동작 말이다.”

“아아.”

확실히 즐겁게 보았는지, 답하는 도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기했어요. 꼭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진짜 춤은 아니었지만, 왠지 석춘 님이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석춘의 초식이 무척 훌륭해 도란이 홀딱 반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던 어느 가신의 말이 떠올랐다. 진사해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지나가듯 운을 띄웠다.

“초식이 마음에 들었다면 검무도 좋아할 것 같구나.”

“궁금하긴 한데…… 가금산에는 검을 쓰는 분들이 별로 없잖아요? 저는 한 번도 못 봤어요.”

“보고 싶다면 보여 줄 수 있지.”

도란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진사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붉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웃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란이 그의 얼굴에서 한 번도 발견한 적 없는 낯선 표정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모든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도, 심지어 침을 삼키는 것도.

검무를 보여 줄 수 있다는 신령님의 말은 계획된 것일까. 아니면 충동적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도란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흰 달빛이 그녀의 뺨을 덧칠해 주지 않았다면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보고 싶어요.”

진사해가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의 일부가 스르르 녹아내리며 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공기로 만들어 낸 것 같았다.

그의 검은 석춘의 것보다 길었다. 검집은 똑같이 검은색이었지만, 장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곧 진사해가 능숙한 솜씨로 검을 뽑았다. 차갑고 매서운 검신에 구불구불한 한 줄짜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도란은 그게 가온산맥의 험준하고 수려한 산세(山勢)를 묘사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도란은 마루로 물러나 앉았다. 그런 다음 그의 검에 혼이 깃들었는지 관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에 품은 사내의 검무가 시작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늘한 검이 신의 손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가볍게 몸을 푸는 동작인 줄 알았는데, 물 흐르듯 나아가 정면을 찌르고 하늘을 갈랐다. 반 바퀴를 돌자 옷자락이 스스로 바람을 만드는 듯 펄럭였고,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았을 때 검은 다른 손으로 움직인 뒤였다.

정해진 순서에 맞춰 움직이던 석춘과는 달랐다. 진사해는 고요한 밤공기를, 젖은 풀잎 사이에 몸을 감춘 풀벌레의 울음을, 달을 옹위하는 별들의 적막을 음악 삼아 춤을 펼쳤다. 낮아지는가 하면 솟구쳤고 높아지는가 하면 쏟아지니, 오를 때는 새매 같고 내려올 때는 폭포의 절경이었다.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달빛이 튀었다. 서느런 칼날에 반사된 빛은 눈을 찌르고 마음을 태우는 차가운 불꽃 같았다.

두 팔을 펼치고 휘돌자 긴 소맷자락이 힘 있게 나부꼈다.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씩씩했는데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빠르게 달려간 그가 공중을 가르고 검을 높이 던졌다. 검이 느리게 돌며 허공에 수 개의 원을 그리는 동안 그가 돌면서 나아갔다. 뻗은 손에 검이 안착했다.

연못에 춤추는 진사해의 그림자가 비쳐 흔들렸다. 도란은 완전히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검무를 보여 주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모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춤의 신묘함 때문이기도 했다.

마침내 춤이 천천히 잦아들었을 때, 도란은 자기가 숨조차 죽이고 진사해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얀 두 손은 어느새 가슴 앞에 모여 있었다.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렸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진사해가 도란을 향해 다가왔다.

옷자락이 날개처럼 나부낄 때, 미소 지은 얼굴은 너무나 청청해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랜만이라 서툴렀는데.”

진사해는 혼을 빼앗긴 듯 감탄하여 말조차 잊은 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춘에게도 이런 얼굴을 보여 주었을까. 순수한 감탄이 가득한 얼굴에 달빛이 번져 분칠한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렇게 보니 민망하구나.”

“아니에요. 최고였어요!”

도란은 서툴렀다는 자평(自評)이 거짓말이라도 된다는 듯 강하게 부인했다. 흥분이 어려 있지만 솔직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정말 대단했어요. 정말이요. 정말로 춤추는 것 같았어요.”

한 번만 더 서툰 솜씨였다고 했다간 고함이라도 칠 기세였다. 진사해는 검을 허공으로 돌려보내며 조금 웃었다.

“즐겁게 봤으니 오늘은 피로를 잊고 잘 자야 할 텐데.”

“꿈에서도 나올 것 같아요…….”

“저런.”

진사해가 마루에 걸터앉은 도란을 일으켰다.

“깊이 자야지, 도란아.”

이만 가라는 뜻인 줄 알았지만 짙은 아쉬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에 품은 사내가 눈앞에서 검무를 선보여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냉큼 가서 자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진사해는 들어가기 싫은 듯 머뭇거리는 도란을 알아차렸다.

“싫으면 여기 잠시 앉아 있을까?”

“네!”

환해진 도란이 얼른 먼저 자리를 잡았다. 진사해 역시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편히 앉았다. 둘은 고요하고 고즈넉한 공기 속에서, 몸과 마음의 열기를 식히며 나란히 달빛을 받았다.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편안하고 다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검무를 보여 주신 거지?’

도란은 의문을 품고 진사해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어 질문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보고 싶다 하니 부탁을 들어준 거라고 좋을 대로 믿고 싶었다.

물론 그녀가 정말 진사해에게 이유를 물었다 해도 답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진사해 스스로도, 자신이 왜 달밤에 때아닌 검무를 췄는지 잘 몰랐으니 말이다.

그들은 각자의 심회를 품은 채 연못에 비친 달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따금 서로에게 시선을 두었지만, 공교롭게도 눈이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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