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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외출 (5/14)

5장. 외출

설연은 성샛골 신의 외동딸로, 월궁항아에 견줄 만한 미색과 고드름처럼 차갑고 단단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성샛골의 화려한 누각에 올라앉아 유모가 전해 준 편지를 읽는 중이었다.

“가금산에서 초대장에 대한 답장을 보냈어. 애기 신부님이 온다네.”

산수유 열매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소식을 전했다. 옆에 서 있던 유모가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됐네요. 아가씨께서 꼭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가금산 신령의 신부가 궁금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잘됐다면서 표정은 왜 그래?”

“아이, 그게…… 소문을 좀 들었거든요.”

“무슨 소문?”

설연의 모양 좋은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곶감으로 유명한 성샛골에는 그만큼 일꾼도 많아서, 유모는 여기저기서 많은 소문을 듣곤 했다. 틀린 것도 있지만 맞는 것도 있었다.

“말해 봐. 무슨 소문인데?”

“그게, 가금산 애기 신부님이 인간이라는 얘기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연이 픽 웃었다.

“유모는 무슨 그런 헛소문을 믿어.”

“그렇지만,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가금산에는 워낙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많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가금산 신이 제정신이라면 천하고 지저분한 인간이 자기 신부라 불리는 걸 두고 봤겠어? 괜한 소문 신경 쓰지 말고 손님 대접 준비나 잘해 줘.”

“예에, 그러지요. 저는 그냥 신경이 쓰여서요. 아무래도 예전에 아가씨 벗이었던 그 인간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에게 접근해서 성샛골 곶감을 훔치고…….”

“유모.”

옛 벗 이야기에 설연의 아름다운 눈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뱉은 말을 주워 담지도 못하고 입만 턱 막은 유모를 노려보았다.

“그 인간은 내 벗이 아니야. 인간을 벗으로 둔 적 없어.”

“예, 그렇지요. 제가 참, 이 입이 참, 어휴.”

자기 입을 몇 번이나 두드린 유모가 서둘러 누각에서 내려갔다. 설연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에게 접근해서 성샛골 곶감을 훔치고…….’

괜한 말 때문에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기억나고 말았다.

벗이라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후로 설연은 누구도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퍼지는 소문을 듣고 있으면 가금산 애기 신부님만큼은 다를 것 같았다.

그녀의 성품은 꼭 하늘을 어머니 삼은 듯 다정하고 명랑하다 했다. 가온산맥의 가신들은 밖에만 나오면 그들의 애기 신부님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삼백 년 동안 죽어 있던 땅을 살려 낸 공은 또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 검에 깃든 혼을 발견하여 대무신의 아들들을 도와준 데다,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인 낯선 이들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하니 성정을 짐작할 만했다.

게다가 수많은 여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도 여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 진사해의 신부라니.

성샛골의 외동딸로서의 삶은 호화롭고 윤택했지만 외로움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 설연은 쓸쓸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가금산 애기 신부님이 자신과 마음 맞는 벗이 되기를 바라 보았다.

* * *

도란이 혼자 가금산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진사해의 발정기를 피해 만년설산으로 갈 때도 늘 소야와 함께였고, 지난번에 우담화 잔치에 갈 때도 일행이 있었으니까. 혼자만의 외출이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이제 그녀도 어엿한 어른이었다. 진사해와 소야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로 날아오를 때, 그녀의 가슴은 설렘으로 부풀었다.

‘석춘 님은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지.’

계획은 완벽했다. 감을 깎아 곶감도 꿰어 보고, 연도 날려 보고,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새 벗도 사귀고, 저녁이 되어 돌아오기 전에는 곶감도 잔뜩 살 것이다. 그래서 가금산 가신들에게 전부 나눠 줘야지. 도란은 소야가 새로 만들어 준, 단풍잎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한없이 들떴다.

학은 금세 성샛골에 다다랐다. 그러나 도란은 뜻밖의 문제에 부딪혔다. 그녀는 학에 탄 채 하늘을 빙빙 돌며 고심했다.

‘대체 입구가 어디지?’

입구임을 알리는 솟대가 여러 개 보이긴 했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솟대가 너무 여러 개라는 사실. 성샛골은 무척이나 넓고 농장도 꼭 그만큼 컸는데 어디가 입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석춘도 도란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으니 ‘입구’가 얼마나 막연한 약속 장소인지 몰랐다. 일하는 사람, 놀러 온 사람이 골고루 바글거리는 성샛골에서 그들이 우연히 만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도란은 일단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학을 타고 내려앉았다. 조금 어색하고, 또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땅을 밟은 그때.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말끔한 무명옷을 입은 아낙이 도란을 붙들었다. 도란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저, 가금산에서 왔어요.”

“어머, 어머, 어머!”

그 한마디에 아낙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심지어 그녀는 도란과 친근하게 팔짱을 끼기까지 했다. 어머니뻘 되는 그녀를 보니 계수 생각이 났고, 또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도란도 순순히 끌려갔다.

“소문의 가금산 애기 신부님이시구나! 이렇게 예쁜 분인 줄 몰랐네. 신령님은 왜 같이 안 오시고?”

아낙은 솟대를 지나쳐 엄청난 인파를 헤치고 거침없이 나아가며 말을 쏟아 냈다. 발을 디딜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던 입구를 지나 그들은 점점 더 조용하고 호젓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석춘 님을 만나야 하는데, 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데, 저희 지금 어디로…….”

“아가씨, 누가 왔는지 보세요! 가금산 애기 신부님이래요!”

갑작스러운 아낙의 외침에 도란이 정면을 살폈다. 어느새 주위의 소란은 싹 사라진 뒤였다.

입구와는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하고 호젓한 누각이 보였다. 난간과 기둥마다 색을 칠하고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심지어 지붕의 기와에까지 금을 발라 휘황찬란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성샛골의 부를 짐작하게 하는 호화로움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난간을 등지고 앉았다가 살포시 뒤를 돌아보는 선녀였다.

“와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곱게 땋은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물결 같았고, 비단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손목은 꽃대처럼 가늘고 연약해 처연한 미가 있었다. 옅은 화장기가 그녀의 또렷한 눈과 산마루처럼 곧은 콧대, 산딸기를 베어 문 듯 붉은 입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도란이 넋을 놓고 감탄하고 있던 그때, 여자의 아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유모, 사람을 잘못 데려왔어. 그건 가금산 애기 신부님이 아니야.”

“네? 하지만 분명…….”

“딱 보면 몰라?”

유모의 말을 끊은 여자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도란을 위아래로 훑었다. 난데없이 끌려와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된 도란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어지는 말 역시 채찍 같았다.

“천한 인간 계집애잖아.”

도란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모욕과 멸시에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자기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나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라 오히려 꿈 같았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일은 이것이 생생한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왜 거짓말을 했지?”

높은 누각에서 도란을 내려다보던 여자, 설연이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추궁했다.

“왜 가금산 애기 신부님인 척했느냐고 물었어.”

내려다보는 한 쌍의 눈이 도깨비불처럼 무서웠다. 도란은 순식간에 거짓말쟁이로 오해받은 상황이 당황스러워 눈만 깜빡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초대를 받고 왔어요. 성샛골에서 절 초대했다고…….”

“그 초대장은 내가 보낸 거야.”

초대장을 보낸 게 저 사람이라고?

도란의 눈이 충격에 젖었다. 그렇다면 설연이라 불린 저 사람은 성샛골의 신이거나 혹은 그 딸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네게 말고, 가금산 애기 신부님에게 보낸 거지.”

“……제가 그 사람이라니까요.”

“끝까지 거짓말이네.”

“…….”

“인간은 원래 입만 열면 거짓말이긴 하지.”

설연이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유모가 도란을 누각의 계단까지 억지로 끌고 갔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귀힘이 어찌나 센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잡힌 팔뚝에 피멍이 들 것 같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도란의 당혜 한 짝이 벗겨져 바닥에 굴렀다.

도란은 거친 손길에 밀려 누각 가장자리에 던져졌다. 두 무릎을 쿵 찧어 아팠지만 괜찮으냐고 묻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시선, 차가운 시선뿐이다.

가을 경치와 바쁜 일터, 손님들의 모습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누각에 홀로 앉은 설연은 품종 좋은 꽃 같았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서 도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매듭으로 장식한 합죽선 끝이 도란의 턱에 닿았다. 손조차 대지 않고 물건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태도가 오만하고 싸늘했다.

“하지 마세요.”

도란은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그렇게 말한 뒤 부채를 탁 쳐 냈다. 아까는 선녀 같던 설연의 얼굴이 이제는 전혀 달리 보였다.

도란의 반응이 우스웠는지 설연의 입술 끝에 비소가 맺혔다.

“뻔뻔하구나. 가금산의 신부라고 거짓말을 친 주제에.”

“거짓말한 적 없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억센 손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유모가 도란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도란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하던 설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네가 정말 가금산의 애기 신부라고?”

“그래요. 초대장도 보냈잖아요. 초대해 놓고 사람을 이렇게 대접해요?”

도란을 살피는 설연의 시선이 집요했다. 그녀는 좋은 옷감으로 정성껏 지어진 도란의 옷을, 사랑받고 자란 티가 물씬 나는 복숭앗빛 뺨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고운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인간 여자를 신부랍시고 데리고 있을 줄이야. 가금산 신령의 총기도 이제 다 됐구나.”

도란의 호흡이 뚝 멎었다.

이제껏 당한 어떤 수모보다 저 한마디가 더 참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사해가 가금산을 다스려 나가는 방식을, 그의 강철 같은 인내와 끝없는 기다림을, 단호함과 정성을, 마을 사람들을 죽여 달라 비는 맹랑한 여자애의 기원 하나도 쉬이 지나치지 않는 상냥함을 떠올렸다.

작은 두 손이 단단한 조약돌처럼 말렸다. 도란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매서운 눈길로 설연을 노려보았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령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요. 자기가 직접 초대한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당신보다 그분이 훨씬 더…….”

“정말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네.”

설연은 도란을 캥캥대는 잡종 강아지 보듯 했다. 털을 잔뜩 세우고 짖는데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아 오히려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강아지.

“본래대로라면 인간은 신령의 그림자도 볼 수 없어. 신령뿐인가, 그가 거느리는 가장 하찮은 가신의 옷자락조차 잡을 수 없지. 하물며 인간 신부?”

“…….”

“가금산의 명예를 더럽히는 건 내 입이 아니라 네 존재 자체다. 더럽고, 거짓말이나 치고, 도둑질을 일삼는 인간인.”

합죽선 끝이 도란의 왼쪽 가슴팍을 쿡 찔렀다. 심장이 뛰고 있는 그곳을.

“너.”

도란은 이를 사리물었다.

여기서 이렇게 조롱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연의 폭언과 적의는 정도가 지나쳤다.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도란은 지금 가금산에서 온 유일한 손님이었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란은 순한 눈을 애써 매섭게 치떴다.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손마디가 뻐근했다. 이런 식으로 누구와 대립해 본 일이 처음이라 몸속까지 덜덜 떨렸지만 이 긴장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인간인 게 뭐 어때서요?”

“뭐?”

“나는 가금산 화원을 맡아서 꽃을 피웠어요. 더럽지도 않고, 거짓말한 적도 없고, 남의 물건을 탐낸 적도 없어요.”

설연의 눈썹이 구겨졌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도란은 자기 가슴에 닿은 합죽선을 꽉 움켜쥐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신령님과 가금산의 명예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건방진 것!”

움켜쥐었던 합죽선이 확 빠져나가더니 허공으로 치솟았다. 설연은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둘렀다. 도란은 다가올 통증을 직감했다.

툭.

예상한 아픔은 없었다.

날카로운 부챗살이 뺨을 스칠 줄 알았는데 맥없는 소리만 났다. 도란과 설연, 유모 모두 동그래진 눈으로 반으로 갈라진 부채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반쪽과 손잡이 부문만 덜렁 남은 나머지 반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는 모두의 머리 위로, 낮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귀를 의심하게 하십니다.”

도란의 어깨를 우악스레 잡고 있던 유모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빈 어깨를 사내의 굳은 손이 감쌌다.

진사해는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합죽선 반쪽을 들어 올렸다. 설연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끓는 얼음 같았다.

“눈도 의심하게 하시고.”

설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꼬리를 마는 대신 애써 입을 열었다.

“예의를 모르고 곱게만 자란 것 같아 가르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인들 대화에 어찌 참견하시는지요.”

“성샛골에서는 사람을 때려서 가르치는 모양입니다.”

진사해가 손에 들린 부채 조각을 짐짓 흥미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낭자도 이렇게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신령님, 말씀이 과하십니다!”

“과한 건.”

“…….”

“낭자의 행동입니다.”

진사해는 잠시 도란을 살폈다. 억지로 끌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당혜가 벗겨진 한쪽 발, 우악스럽게 붙잡혀 구겨진 저고리까지. 그의 눈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인간이든 아니든 도란이 화원을 살려 낸 가금산의 귀중한 가신임을 모르지 않았을 테고.”

“그건……!”

“또한 가금산의 꽃다운 신부임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

“그러니 진정 과한 게 누구입니까.”

설연이 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를 보는 진사해의 눈에는 동정조차 없었다.

“성샛골의 낭자와 인간 사이의 악연을 나도 풍문으로 들어 모르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설연의 숨이 뚝 멎었다. 도란도 고개를 돌려 진사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란이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냉혹한 표정으로 설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는 안타까우나 이래서는 동정도 이해도 아깝지 않겠습니까.”

“대체 제 마음에 대해 뭘 아신다고……!”

“힘없는 이에게 화풀이한 것을 알지요.”

설연이 멈칫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두 눈이 신까지 한 짝 벗겨진 도란에게 닿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자신보다도 키가 작았다.

“감정이 가라앉으면 오늘 일이 수치스러울 겁니다.”

탁, 무언가가 설연의 발치로 던져졌다. 진사해가 아까 주운 부채 조각이었다. 도란의 뺨을 갈길 뻔했던.

진사해가 도란의 어깨를 더욱 다정하게 감쌌다. 그녀를 누각 아래까지 데려간 진사해가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모래 묻은 당혜를 주워 맨손으로 탁탁 털었다. 도란이 직접 하겠다고 말할 틈도 없이, 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신을 신겨 주었다. 앙증맞은 발볼과 가는 발목에 닿는 온기가 선명했다.

“도란아, 가자.”

진사해가 다정히 그녀를 이끌었다. 시달린 어깨를 감싸 주는 손은 조심스럽고도 굳건했다. 도란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심장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나아갔다. 뒤에서 설연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찌…… 어찌 오셨어요?”

누각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도란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무신의 막내아들이 내게 연락을 줬다. 여기서 너와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고. 느낌이 좋지 않아 학을 타고 네가 어디 있나 살핀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많았고, 또 누각에는 지붕도 있어서 절 발견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쉬웠다.”

“…….”

“조금도 어렵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진사해 본인도 몰랐다. 그저 하늘을 한 바퀴 휘돌자마자 도란이 보였다. 아마 이보다 열 배, 백 배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곧바로 도란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매서운 부채가 그녀의 뺨을 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조여들었다.

“처음부터 내가 함께 올 것을 잘못했구나. 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저.”

진사해를 따라 자박자박 걷던 도란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천한 취급을 당하며 폭언을 들은 직후니 기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당차고 맑았다.

“근데 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뭐?”

“못 들으셨어요? 제가 막, 이렇게 그 사람이랑 마주 보고 서서.”

폴짝 진사해의 손을 벗어난 도란이 맞은편에 섰다. 그러더니 아까 설연과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과장된 자세로 팔짱을 꼈다. 턱까지 치켜든 모습이 제법 야멸찼다.

“인간인 게 뭐 어때서요? 우리 신령님이랑 가금산 명예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

“이랬다고요. 엄청 큰 소리로!”

사실 목소리를 발발 떨지 않는 게 최선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송곳 같은 얼굴로 잔인한 말을 해 대니 놀라고 긴장했다. 부채가 얼굴로 날아올 때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렇지만 도란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상대가 자신을 함부로 대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내가 잘못했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도란은 뱀말의 밥버러지 취급받는 노비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금산의 당당한 일원이었고 진사해와 가신들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들의 사랑이 도란을 지탱하여, 자신을 짓밟으려는 상대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맞서게 했다.

“잘했죠?”

도란이 진사해를 보며 생긋 웃었다.

“거기서 아무 말 못 했으면 도망치고 싶었을 거예요. 저도 제 할 말 다 했고, 신령님도 와 주셨으니까, 전 성샛골에 좀 더 있다가 갈게요.”

기가 죽어 어서 가금산으로 돌아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심지어 도란은 어깨를 감싼 손을 벗어나기까지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절 다시 부르기야 하겠어요?”

“도란아.”

“네?”

활달하게 앞서가려던 도란이 빙글 반 바퀴를 돌았다. 치마가 연꽃처럼 펼쳐졌다.

“그럼 함께 가자.”

“함께요?”

“그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거짓말이었다. 한껏 모욕당한 설연이 도란을 다시 부르지 않을 것은 진사해가 더 잘 알았다. 그러니까 또 이런 일이 있을까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입술은 멋대로 움직여 도란과 함께 있을 핑계를 만들어 냈다. 안 그래도 대무신의 막내와 어울릴 모습이 아른거려 힘들던 참이다. 애초에 여기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얼굴을 봤는데 그냥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진사해의 복잡한 마음을 모르는 도란이 다시 폴짝 뛰어 다가왔다.

“그럼 그럴까요? 석춘 님은 이미 가셨을 테고, 저도 신령님이랑 있으면 좋으니까요.”

잠시의 사이 후, 진사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도란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나도 성샛골에는 자주 오지 않아 낯설어서.”

“…….”

“서로 놓치면 큰일이니까, 잡아라.”

도란의 뺨이 확 붉어졌다.

아까 어깨를 감싼 건 보호의 느낌이었다면 이건, 이건 좀 달랐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축제의 거리를 걷는 내내 손을 잡고 있자니. 손바닥에 땀이라도 나면 어쩌지. 도란은 무척 부끄러워하며 진사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어째 평소보다 더 경직된 얼굴이었다. 긴장한 듯 보이기도 했으나.

‘신령님이 내 손 잡으면서 긴장하실 리가 없잖아. 내가 미아가 될까 봐 이러시지.’

도란은 조금 낙심하여, 그러나 설렘 역시 감추지 못하고, 작은 손을 진사해의 손에 얹었다.

진사해는 새처럼 날아든 도란의 손을 조심히 잡아 보았다. 따뜻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 한 마리를 쥔 듯 조심스럽고 간지러웠다.

“신령님, 오늘 저 때문에 와 주셔서 감사해요.”

도란은 쑥스러워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때 진사해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당연히 와야지.”

“…….”

“너는 내 애기 신부님이니.”

어째서일까, 마주친 눈이 평소와는 달랐다. 어디가 다르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더 깊고 좀 더 뜨거운 느낌이었다.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진사해의 옷자락을 한 방향으로 흔들었다.

그날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 다복하고 풍성한 가을 하늘 아래를 거닐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든 적은 곳에서든 얽힌 손은 풀리지 않았다. 진사해는 도란을 잃어버릴까 염려가 되어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해맑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까지는 생각해 내지 못했다.

* * *

먹음직한 곶감을 집어 들며 입맛을 다시던 소야가 갑자기 뭐 씹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곶감을 찬합으로 홱 던져 넣었다.

“성샛골 딸한테 그런 취급을 당하고도 거기 곶감을 가져오셨어요?”

“왜요? 성샛골 곶감은 원래 맛있기로 유명하니까 선녀님도 드셨으면 해서요.”

“지금 맛있는 게 문제예요?”

“음식은 죄가 없잖아요, 선녀님.”

도란은 소야가 집어 던진 곶감을 다시 그녀의 입 가까이 대 주었다. 소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도 곶감을 받아먹었다. 실제로는 몇 살이든, 일곱 살 아이 모습으로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귀여워 도란은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선녀님은 아세요? 성샛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일이요?”

소야가 곶감을 꿀꺽 삼켰다.

“네. 성샛골 따님이랑 인간 사이에 악연이 있다고, 신령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소문을 들으셨대요.”

“아휴, 그거. 말도 마세요, 말도 마.”

소야는 말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러더니 새 곶감을 하나 들어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그게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성샛골의 외동딸 설연은 외로운 처지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세상을 유람한답시고 딸을 돌아보지 않았다. 설연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유모들의 손에 자랐다.

유모들이 살갑다 해도 어찌 부모를 대신할까. 게다가 성샛골은 곶감 때문에 그러잖아도 바쁜 곳이라 늘 손이 모자랐다. 자연 설연은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애가 무료하니까 몰래 인간 세상에 나간 거예요. 근데 그때 딱!”

마주친 인간은 그 해에 막 성년을 맞이한, 꽃다운 여염의 처녀였다. 아픈 어머니 드릴 약재를 찾아 골짜기 깊은 곳을 헤매던 여자는 범상치 않은 자태의 설연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고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배신은 금방이었다. 설연의 벗이었던 여자는, 몰래 설연의 뒤를 밟아 성샛골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신들이 먹는 귀한 곶감을 잔뜩 도둑질해 꽁무니를 뺐다.

“난리가 난 거죠. 성샛골 곶감은 워낙 귀해서 서로 가져가려고 안달인데 인간이 그걸 훔쳐 갔으니 말이에요. 게다가 신들의 공간으로 통하는 길을 들킨 게 어디 작은 일인가요? 성샛골 신령님까지 돌아와서 딸에게 불호령을 내렸으니, 아마 그 아가씨도 한동안 눈물바람을 했을 거예요.”

그 뒤로 성샛골과 인세를 잇는 길은 완전히 막혔다. 성샛골의 신이 직접 힘을 써 막아 버려서, 설연은 다른 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세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벗과 터놓고 대화할 시간조차 얻지 못한 채 그녀는 집에 갇혔고, 거기서 인간에 대한 미움과 불신을, 애증을 키워 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애기 신부님한테 함부로 한 건 잘못이에요. 인간이라고 다 똑같은가? 왜 괜히 화풀이야?”

말하다 보니 또 성이 났는지, 소야가 곶감 꼭지를 홱 내던졌다. 방구석으로 날아가는 꼭지를 보던 도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나 보네요.”

분화구 화원의 지신이 떠올랐다. 벗이라는 이야기에 얼굴까지 붉히며 좋아하던 그녀를, 말 몇 마디에 오래된 서러움을 풀고 땅을 열어 준 그녀를 생각하면 설연도 안쓰러웠다. 소야도 화내는 것을 멈추고 탄식했다.

“오죽했겠어요? 다른 땅의 신을 욕할 필요는 없지만, 제일 나쁜 건 성샛골 신령님이에요. 딸을 얼마나 내버려 뒀으면 그 귀한 신의 딸이 인세까지 나갔다가 그런 일을 당…….”

“흠, 흠.”

소야의 말이 뚝 멎었다.

둘은 동시에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아침상을 물리고 곶감을 나눠 먹던 참인데, 이 이른 시간에 누가 왔단 말인가?

“안에 있느냐?”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도란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알아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재촉하듯 또 한 번의 부름이 닿았다.

“안에 없느냐?”

“누구길래 우리 애기 신부님 간식 드시는데……!”

“선녀님, 성샛골 따님인 것 같아요!”

“네?”

속삭이듯 전한 말에 소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양 소매를 걷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여긴 또 왜 왔대요? 애기 신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머리끄덩이를 확!”

“서, 선녀님!”

도란은 소야의 허리를 안다시피 해 그녀를 뜯어말렸다.

한편 밖에 선 설연은 몸을 꼿꼿하게 편 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무언가 소란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앞장서서 나온 사람은 소야였다.

“흥!”

손님을 노려보던 그녀는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내면서 설연 옆을 스쳐 갔다. 찬바람이 씽씽 불 정도로 냉랭한 태도였다.

“어, 어서 오세요.”

밖으로 나온 도란만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설연은 아름답게 그린 눈썹을 치켜세웠다.

“들어가도 되겠어?”

“……네?”

“들어가도 되느냐고.”

“네, 뭐, 어…….”

도란은 일단 문가에서 비켜섰다. 설연이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밖에 세워 두는 것보단 안에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듯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덕일까, 어제 일을 책잡아 박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설연은 방금까지 소야가 앉아 있던 방석에 자리를 잡았다. 도란은 그녀가 가져온 작은 보따리를 한쪽에 잘 내려놓는 걸 지켜본 후에야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저, 곶감 드실래요?”

소야와 먹던 곶감이 육각 소반에 조금 흐트러진 채로 놓여 있었다. 설연은 거기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됐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야, 성샛골에서 매일 먹는 게 곶감이려나. 도란은 음식 권하기를 그만두었다.

“혹시 신령님 만나러 오셨나요? 신궁까지 모셔다드려요?”

찾아와 놓고 별다른 말이 없기에 혹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물은 것인데, 설연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모로 팩 돌렸다. 벽을 하도 뚫어지게 노려봐서, 도란이 거기 무슨 얼룩이라도 있나 같이 쳐다봤을 정도였다.

“거기 뭐라도 묻…….”

“미안하게 됐어.”

깜빡, 한 차례 눈을 깜빡인 도란이 설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애꿎은 벽만 쏘아보는 중이었다.

“네?”

“어제는 미안하게 됐다고 했다. 생각을 해 보니 가금산 신의 말이 옳아. 너한테 함부로 한 건 잘못이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설연의 귀뿌리가 시뻘겠다. 도란은 그제야 앞뒤 상황이 이해가 갔다. 사과를 하고 싶어서 아침부터 찾아왔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어제는 그냥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도산(선물)도 가져왔다.”

설연은 가져온 보따리를 쓱 밀었다. 도란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분홍색 매듭을 달아 장식한, 앙증맞은 합죽선이 들어 있었다.

“와아.”

도란에게도 부채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부채는 조금 달랐다. 또래 여자가 골라 준 것인 만큼 아기자기하고 고우면서 실용적이기까지 했다. 부채를 쫙 펼치자, 세련된 화풍으로 그려진 탐스러운 매화가 보였다. 여백이 많아 답답하거나 촌스럽지도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어제 일은 저도 잊을게요. 부채가 마음에 들어서만은 아니고요!”

도란의 티 없는 웃음에, 부끄러움에 밀려 도망치려던 설연조차 멈칫했다.

어떤 이들은 설연을 가리켜 고드름처럼 차가운 여인이라 하지만 그녀의 속은 무르고 연약했다. 사과를 하러 오면서도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마음을 졸였는데, 도란이 흔쾌히 웃으니 크게 안심이 되고 또 고맙기까지 했다. 달아나려던 마음이 가시며 더욱 부끄러워졌다.

설연이 자세를 고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마 내 과거 얘기를 들었겠지. 내가 괜한 편견으로 너한테 분풀이를 했다.”

“저, 그거 말인데요…….”

도란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살짝 시선을 들었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각난 것은 전하고 싶었다.

“혹시 가금산에서 인세로 가는 길을 알려 드릴까요?”

“뭐?”

“아니, 그때 만났던 그 사람이랑 대화라도 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싫어.”

설연의 대답은 의외로 또렷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도란은 그 단단함 너머의 동요를 읽었다. 설연은 붉은 입술을 몇 번이나 괴롭히다가 애써 야멸찬 어조를 꾸며 냈다.

“이제 지난 일이야. 지나간 일 다시 들추고 싶지 않다.”

“그래도, 서로 오해가 있었을 수도…….”

“그럼 네가 다녀오든지.”

아까의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쏘아붙이는 기세가 매몰찼다.

“삼백 년 동안 죽어 있던 화원을 되살린 대단한 가신이라며? 어디로 이거(移去)했는지 아니면 콱 죽었는지 모를 인간을 찾아서 얘기라도 들어 봐.”

“…….”

“넌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설연은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괜한 말을 해 버린 것일까. 도란은 아쉬운 얼굴로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찼다.

* * *

“인세로 나가는 길?”

“네!”

숲길을 거니는 진사해 앞에서 도란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인세로 이어진 길이 어디인지 곧장 알려 줄 것 같았는데 의외의 침묵이 이어졌다.

“저, 신령님?”

“인세로 가는 길은 왜 묻느냐.”

어쩐지 탐탁잖은 어조에 도란의 마음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진사해의 손이 살며시 다가왔다. 반묶음으로 단장한 머리카락 끝을 무심한 듯 어루만지는 손이, 도란을 다른 의미로도 긴장시켰다.

“돌아가고 싶어서?”

“네?”

“가는 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립겠지.”

그렇게 속삭이는 진사해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은 착각에 불과할까. 아니다, 지금까지 가금산에서 자랐는데 대뜸 인세로 간다고 했으니 오해하고 마음이 상하실 만도 해. 도란은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 때문에 심장이 심하게 뛰었지만, 입을 다물어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그리운 게 아니라 가서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찾아보고 싶은 사람?”

“소야 선녀님께 들었는데, 성샛골 따님의 옛 벗이…….”

진사해는 이어지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도란이 기어코 멀리 떠나려는 것인가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자, 새로운 도전을 할 생각에 들뜬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러나 정체 모를 긴장과 서운함은 가셔도 의아함은 여전했다.

“네가 나서려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성샛골에 가서 그런 모욕을 당했고, 사과를 받았다 해도 이렇게 나설 이유는 없는데.”

“어…….”

도란이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는 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진사해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요, 그냥 성샛골 따님이 외로워 보여서요. 오해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새, 생각만큼 나쁜 분도 아닌 것 같고!”

대답 없는 진사해를 보던 도란의 시선이 바닥에 깔렸다.

“너무 참견하는 것 같죠?”

“아니.”

진사해는 말하고 싶었다.

너는 지독히도 외로운 시절을 겪어 다른 이의 외로움에 반응하는 거라고. 분화구 화원의 지신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석춘이 듣지 못하던 검의 노래를 들은 것도, 타인의 고독을 알아차리고 애써 위로하려는 성정 때문이라고. 너는 너 자신의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함께 살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된 거라고.

그러나 진사해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을.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냐?”

“아니요. 전 여기가, 신령님과 가신님들 옆이 좋아요.”

“……그래.”

도란 앞으로 불쑥 진사해의 손이 내밀어졌다. 아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바로 그 손이었다.

“가금산에는 인세로 나가는 길이 없다. 예전에 널 데려올 때, 다시는 인세로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한 것도 그것 때문이지.”

“아…….”

“하지만 나는 가금산과 인세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니, 너를 데려다주마.”

도란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쓰며 진사해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기보다 한참 작은 도란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권했다.

“어릴 때처럼 안겨 보겠느냐?”

“……그, 그게…….”

결국 귀까지 빨갛게 물든 도란이 머리를 푹 숙였다. 진사해는 농담이었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 다른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신의 땅과 인세를 오가는 혼란스러운 길에서 그녀를 놓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한 연꽃 속에서 피어난 후부터 그의 시선을 이상하리만치 사로잡는 애기 신부님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몸이 살짝 떠오르는가 싶더니 도란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린 시절과 똑같이. 잠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지만 피곤과는 달라서, 도란은 별다른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작은 몸이 온전히 진사해의 품에 안겼다. 어린 시절처럼 따뜻했고…… 그때보다 좀 더 심장이 뛰었다.

* * *

눈을 떴을 때, 도란은 아름다운 산 풍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호젓한 정자의 난간 너머로 넋을 잃도록 아름다운 추경(秋景)이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단풍과 멀리까지 파도치듯 이어지는 산맥, 톡 건드리면 푸른 물이 쏟아질 듯 짙게 물든 하늘까지.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온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등과 어깨를 감싼 온기를 느끼며 잠시 기대앉아 있다가, 뒤에서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시, 신령님!”

그녀는 진사해의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 있었다.

진사해는 가을 풍경을 등진 채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단풍보다 붉고 향기로웠고, 도란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눈길은 어딘지 모르게 농염했다.

게다가 눈. 그의 눈이 인간처럼 검은빛이었다.

“……!”

도란이 후다닥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미친 듯 뛰는 심장을 들킨 걸까 조마조마했다. 그때 진사해가 도란을 부드럽게 감싸 일으켰다.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깨우지 않았다. 이제 갈까?”

“네……. 그런데 신령님 눈이…….”

“인세로 나왔으니 이 정도 위장은 해야지.”

도란은 더듬더듬 그렇겠다고 대답하며 두 발로 섰다. 정자에서 내려갈 때가 되어서야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평범한 산 초입의 정자였지만 이곳이 인세임이 느껴졌다. 어쩌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저잣거리의 소음 때문인지도 몰랐다. 도란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진사해를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둘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어서, 헤어질 정도로 멀어지지는 않았다.

“궁금한 모양이구나.”

장터의 소리를 향해 가는 도란에게 진사해가 말을 걸었다. 그의 말대로, 도란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뱀말에 살 때부터 아랫마을 장터에 가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거기 사람들은 제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해서 한 번도 못 가 봤지 뭐예요.”

“…….”

“오늘 이렇게 신령님이랑 오게 되니까 너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자가 시작되었다.

편안한 적막은 단숨에 사라졌다. 대신 수많은 사람이 우글거리는 장소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부산스러움이 둘을 감쌌다.

“산삼이오, 산삼! 사기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 저기 윗마을에서 유명한 심마니인 걸 참말 모르오?”

“그거 만지면 안 돼요! 이 댕기가 얼마짜린데 자꾸 만지작만지작, 손때라도 묻으면 어쩌려고?”

“점심 드셨나? 일하러 가는 것 같은데 국밥 뜨끈하게 말아 드시고 가시지, 응? 술은 안 시키셔도 돼!”

덜컹덜컹, 소달구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진사해가 그녀를 품으로 깊이 끌어당기며 길에서 비켜나게 했다.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저, 여긴 어디쯤인가요?”

뱀말 근처 같지는 않았다. 도란이 알기로 뱀말 아랫마을도 이렇게 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성샛골로 통하던 길이 있던 마을 근처인데, 이렇게 큰 장이 열리는 줄은 나도 몰랐구나. 이래서 네가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지.”

나란히 걸음을 옮긴 순간, 갑자기 도란 앞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쑥 내밀어졌다. 엉겁결에 멈춘 그녀의 귀로 무지막지한 설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아가씨, 정인과 나오셨어요? 이 단풍 머리 장식 하나 사 달라 하셔요!”

방금까지 댕기를 만지작거리던 손님을 호되게 내쫓던 그 상인이었다. 단풍잎 모양으로 가다듬은 붉은 보석 여러 개를 겹쳐 그럴듯하게 가을 느낌을 낸 머리 장식을 내민 그의 표정이 무척 익살스러웠다.

‘정인이 아닌데…….’

진사해의 얼굴을 살피는 그녀의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진사해는 정인 운운하는 말보다 장식에 더 관심이 있는 듯 상인을 보고 있었다. 그의 관심을 알아차린 상인이 재빨리 장식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자세히 보여 주었다.

“여기, 여기 이 부분도 전부 진짜 은입니다. 가격은 좀 있지만, 크흠, 그래도 정인에게 줄 선물로 이 정도는 되어야 훌륭하다 할 수 있죠!”

두 사람의 차림새가 고아하고 분위기가 심상찮으니 대뜸 비싼 물건을 팔아 보려는 수작이었다. 도란은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금산에서 바로 온 길이고 신령님이 딱히 짐을 챙기는 것도 본 적 없으니, 저만한 물건을 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저희는 그냥…….”

“받아라.”

어디서 났는지, 진사해가 엽전 꾸러미를 내밀었다. 화색이 되어 냉큼 꾸러미를 손목에 걸친 상인이 두 손으로 머리 장식을 내주었다. 진사해는 꽤 큰 돈일 게 분명한 꾸러미를 곁눈질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도란의 머리에 장식을 꽂아 주었다. 진정 정인과 나들이를 나온 듯한 행동에 상인이 냉큼 아부를 덧붙였다.

“사내의 손으로 솜씨가 좋으십니다.”

“워낙 어여쁘니, 서툴게 꽂아도 그림이구나.”

순백색 저고리와 동백처럼 붉은 치마를 두르고 선 도란은 그림에서 걸어 나온 아씨 같았다. 조금 허전하던 머리에 붉디붉은 단풍 장식까지 꽂으니,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보석이 빛을 반사해 눈부셨고 은장식이 차르르 흘러내리며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도란은 부끄러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해 진사해를 앞질러 갔다. 마음을 거절당한 후인데 이런 일로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진사해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딱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따라와 주었다. 보폭의 차이가 커, 도란이 부지런히 걷는 것에 비해 그는 제법 느긋했지만.

“도란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시끄럽고 소란스러운데, 그의 음성만큼은 또렷하니.

“어디까지 달아날 것이냐.”

매번 놀리시고 정말 너무해. 불쑥 오기가 난 도란은 가장 가까이 있는 좌판에서 손에 집히는 물건을 들었다.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장신구까지 머리에 꽂은 손님을 눈여겨보던 아낙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아이고,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 장죽(긴 담뱃대)은 물부리가 수정으로 되어서 까다로운 분들도 탐내는 물건이지요. 우리 가게에 딱! 딱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정인에게 줄 거예요.”

맹랑한 말에 느긋하던 진사해의 걸음이 뚝 멎었다. 도란은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춘 그를 돌아보며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저분이 제 정인이신데, 이걸 선물하면 좋아하실까요?”

신령님처럼 자연스럽게 놀리고 싶은데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옆에 선 상인이 노련한 것은 도란에게 축복이었다.

“아, 그야 당연하지요. 이렇게 아리따운 정인이 주는 선물을, 설령 그게 길가의 돌멩이라 한들 마다할 사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사내가 아니고 고자입니다, 고자!”

“고…….”

진사해가 쿨럭 기침했다. 좀 더 자신감을 얻은 도란은 그와의 거리를 좁혀 장죽을 내밀었다.

“들어 보세요. 우리 정인님께 어울리는지 보려고요.”

얼굴이 발갛게 된 채로 자신만만한 척해도 소용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사해가 동요했다.

아까의 여유는 어디에 두고 왔는지, 그는 몇 번을 주저하다가 도란의 손에서 장죽을 받아 들었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그인지라 든 자세가 영 어설펐지만, 수려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고급스러운 장죽을 손가락 사이에 걸치자 고혹적인 분위기마저 살아났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검은데도, 뱀말이 불타던 날 마주쳤던 요요한 금빛 눈이 떠오를 정도였다.

“아이고, 잘 어울리시네!”

상인의 호들갑이 오묘하게 변한 분위기를 깼다. 홀린 듯 진사해를 보던 도란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거 살게요. 정말 제 ‘정인’에게 딱이네요!”

거듭된 정인 타령에 진사해는 반쯤 허둥거리며 값을 치렀다. 거기까지였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엽전 꾸러미를 받아 들던 상인이 덧붙인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그런데 아가씨가 회임하시면 담배는 꼭 끊으셔야 합니다? 예쁜 아가에게 안 좋다는 거 아시죠?”

“콜록, 콜록!”

진사해는 마른 입에 사레라도 들린 듯 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뜻밖의 아군을 만난 듯 흐뭇하게 웃는 도란과 걸음을 서두르는 진사해 뒤로, 요란스러운 외침이 따라붙었다.

“꼭 끊으세요! 꼭!”

애초에 담배를 태우지도 않는 진사해는 희미한 원망마저 담긴 눈으로 도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유를 되찾은 그녀는 모르는 척 콧노래를 부르며 척척 앞서 나갔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신령님이 왜 자꾸 놀리시는지 알 것 같아.’

능청스럽게 걸어가는 그녀의 머리에서 단풍잎과 은실이 반짝거렸다. 진사해는 아무 쓸모도 없는 장죽 대신, ‘정인’을 입에 담던 그녀를 바라보며 민망한 듯 부끄러운 듯 웃음 지었다. 도란은 물론 그 자신도 보지 못할, 달콤한 표정이었다.

* * *

어수선한 장터를 벗어난 둘은 기와지붕들이 머리를 맞댄 주거 지역으로 들어섰다. 가까운 곳에 큰 장이 서는 마을인 만큼 사람도 많았다. 마을 앞을 지키는 서낭나무조차 무척이나 커다랬다. 도란은 그쪽을 힐끔거리며 마을 풍경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새로 지은 집 같았다. 기와는 깨진 데 없이 매끈했고 벽도 기둥도 깨끗해서, 수리하며 오래 살아온 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란은 성샛골 따님과 연이 있던 이의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서낭나무 아래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아낙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두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좀…… 이상하네요?”

장터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는 삭막했다. 깨끗한 새 집만 우뚝우뚝 들어서 있어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아니면 떠들썩하게 말을 붙이는 사람뿐이던 장터에서 막 벗어났기 때문에 공연히 허전한 것일까.

“조용하구나.”

진사해도 도란의 말에 동의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 한동안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던 도란이 서낭나무로 성큼 다가갔다. 가지에 묶인 오색 천이 바람에 흐늘거렸다.

“신령님, 여기서 무슨 소리가…….”

“어이쿠, 깜짝이야!”

머리 위에서 떨어진 고함에 도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수염 성성한 맨발의 노인이 가까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도 수염도 하얗고 옷도 백색이었다. 도란은 방금까지 없던 노인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놀라는 대신 얼굴빛을 공손하게 바꾸었다.

“이 마을 서낭신이세요?”

“그러는 너는 인간이면서 어찌 나를 봤을꼬? 저 신령님도 날 못 알아차렸는데.”

진사해도 새삼스럽게 도란을 살폈다.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 그는 서낭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도란이 보이지 않는 것의 기척을 잡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진사해의 놀라움을 모르는 도란은 가지에 앉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희는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요.”

“사람? 이 마을에서 누굴 찾는지는 몰라도 다 멀리 가 버려서 없어.”

“네? 왜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짐짓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나이가 드니 이유가 생각이 안 나는구먼?”

도란은 그가 뭘 원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진사해가 도란 옆으로 나왔다. 진사해가 무슨 수로 이 할아버지 서낭신을 설득할까 궁금해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그가 몸을 굽혔다. 그러더니 바닥에서 조약돌 서너 개를 찾아 나무 앞 돌탑에 툭툭 던져 놓았다.

“서낭신은 마을 사람의 기원을 듣고 도움을 준다. 인간은 이렇게 서낭신을 부르지.”

고작 돌무더기에 돌 세 개 더 쌓고 싶어서 말하기를 거절했다고? 도란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역시 신령님이 뭘 알기는 하시네. 거, 이 마을 사람들은 다들 새로 와서 그런가 통 뭘 비는 법이 없으니.”

진짜 돌 세 개로 만족한 이 순박한 서낭신은 팔짱을 풀고 다시 도란과 마주했다. 짧게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이곳은 장수마을로, 예로부터 이곳에 산 사람은 전부 장수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터무니없는 미신만은 아니었다. 땅의 정기가 워낙 맑고 마을 너머의 산이 신령스러워 다들 장수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이야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좋은 것만은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그러나 도성의 왕도 쩔쩔맨다는 유명한 풍수쟁이가 이 마을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풍수쟁이는 장수마을을 가리켜 하늘도 탐낼 명당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살기만 하면 대대손손 부귀를 누릴 것이라고도 했다.

돈다발을 싸 들고 온 거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땅과 집을 모조리 사들였다. 원래 살던 사람들은 전부 큰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아, 그런데 새로 온 놈들은 영 공경을 몰라. 날 이렇게 내버려 두고 오며 가며 인사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 말이야.”

돌 세 개라도 더 쌓였으면 하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계속해서 봐 오던 사람들이 떠나고 새 얼굴들이 왔는데 자신을 모시지도 않는다면 서운할 만도 했다.

“그럼 한 사람도 안 남고 다 떠난 거예요?”

“뭐, 남은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근데 어디서들 오셨나. 뭐, 저기, 성샛골에서 오셨나?”

“……네?”

뜻밖의 성샛골 얘기에 도란은 물론 진사해도 주의를 빼앗겼다. 노인은 놀라는 둘을 보더니 고개를 홰홰 저었다.

“아닌 모양이네. 한동안 귀한 신이 인간과 어울리느라 이 마을에 드나들었는데, 난 또 그 신이 보냈나 했지.”

도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노인은 확실히 뭔가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내내 마을을 지킨 서낭신이니 성샛골과의 일을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어쩌면 딸의 벗에게 분노한 성샛골 신이 인간을 해치려는 걸 막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여자 혼자 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그 큰돈 다 마다하고 여기서 기다리는데, 성샛골은 어찌 그리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에잉, 매정하다, 매정해.”

도란과 진사해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란은 눈을 빛내며 노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집이 어디예요?”

* * *

여자의 집은 산문(山門)에 있었다. 울울창창한 숲이 지척인 곳에 외로운 조약돌처럼 던져진 집이었다. 군데군데 부러지고 먼지가 낀 싸리울, 때가 덕지덕지 묻은 벽과 기둥, 쥐가 파먹기라도 한 듯 곳곳이 상한 초가지붕이 세월을 증명했다.

‘여기가 맞나?’

도란은 울타리 밖을 기웃거리며 목을 길게 뺐다.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서낭신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여자도 그녀의 어머니도 어디론가 외출한 것일까.

그때, 굳게 닫혔던 창호문이 덜그럭 열렸다.

“아이고, 아이고…….”

열린 문 너머에서 무릎을 짚고 한 노인이 일어나고 있었다. 높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까 긴장이 되는지, 시선은 바닥에만 박은 채였다. 엉거주춤 움직이는 모습이 거동조차 어려운 듯했다.

도란은 싸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노인을 부축했다. 이대로 두면 쓰러질 것 같아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 누구신가…….”

노인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란에게 의지해 마루에 앉는 내내, 노인은 그녀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흐리던 눈에 마치 기다리던 이를 만난 듯한 총기가 돌았다. 노인은 마루에 앉자마자 도란의 팔을 꽉 쥐었다. 검불처럼 마른 몸 어디에 이런 힘이 있었는지. 노인은 도란과 진사해를 번갈아 보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혹시…… 혹시 우리 딸애 벗이신가?”

“네?”

“성샛골인가 뭔가 하는 데서 오셨는가? 딸애가 내내 기다렸는데……. 거기서 왔다는 사람 있으면, 자기 없을 때라도 꼭 붙들어 놔 달라고…….”

도란은 일단 노인 옆에 앉았다. 진사해는 혹 노인의 딸이 안에 있는지 보고자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샛골에서 온 건 아닌데, 따님 벗이랑 아는 사이예요.”

“아이고……. 우리 딸애가 그 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노인이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쭈글쭈글 주름진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란 도란이 말을 잃은 사이, 노인은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만 기다렸다는 듯 말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노인은 남편을 잃고 혼자 늦둥이 딸을 길렀다. 부유하지는 못해도 귀하게 키웠고 딸이 시집갈 나이까지 자랐지만, 적당한 혼처도 없고 또 딸도 노모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둘이서 소박하고 조촐한 살림을 꾸려 가며 지내던 중, 늘 어둡던 딸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산에 드나들더니 나중에는 어두운 밤에도 산에 가고 싶어 했고, 돌아오면 늘 표정이 밝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저 좋은 벗이 생겼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집 뒤편의 산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던 노인은, 딸이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걸까 두려웠다. 그러나 딸이 정말 좋은 벗을 사귄 듯 점점 활달해지고 환해지자 의심을 거두었다.

평화롭던 하루하루를 깬 건 자신의 입이라고, 노인은 한탄했다.

“내가 곶감 먹고 싶다는 말만 안 했어도…….”

나이가 들었으니 아픈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때는 정도가 심했다. 물 한 모금 못 넘기는데 어찌 곶감 생각이 났는지 모르지만, 겨울바람이 들이닥치니 말랑한 곶감 한입이 간절했다. 곶감이 먹고 싶다, 그것만 먹으면 벌떡 일어날 것 같아, 혼몽 중에 그런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다음 날, 딸이 곶감 다섯 개를 치마폭에 싸 가져왔다.

정말이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맛있고 신비로운 곶감이었다. 이 세상 음식 같지가 않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우리 형편에 어디서 이런 걸 구했느냐고 물으니, 딸은 힘겹게 웃으며 벗이 주었다고 했다. 준 걸 받아 온 거라고. 그러나 노인은 직감했다. 자기 입으로 들어간 곶감은 ‘받아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 뒤로도 딸은 자주 산으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늘 운 것처럼 눈이 붉었다. 오늘은 그 벗을 만나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이제 못 만날 거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딸은 산에 가지 않았다. 대신 멍하게 산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돈다발을 내밀며 집을 사려는 거부들이 왔을 때도 딸은 산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돈이라도 받아 네 혼처를 알아보고 혼례를 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말은, 딸을 도둑으로 만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에는 내가 너무 속상해서 물으니, 그냥 나중에 성샛골에서 왔다는 손님이 있으면 꼭 붙들어 달라고만 했네. 낮에는 내내 마을에서 삯일을 하느라 바쁘니…….”

“네…….”

“그리고 우리 애가 저, 편지, 편지도…….”

노인은 기다시피 방으로 들어갔다. 마른 손으로 장판을 들자 그 아래서 봉투가 하나 나왔다. 이곳에 몇 년을 넣어 둔 것인지 겉면이 누렇게 변색된 상태였다. 하찮은 물건처럼 보였으나, 그것을 내미는 노인의 몸짓은 간절했다.

“어려서부터 날 돌보며 사느라고 벗이라고는 그 사람 하나였는데, 그 후로 딸애가 남몰래 가슴을 치며 얼마나 울었는지. 밤마다 나 잔다고 생각하면 이 편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면서 울고…….”

도란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무거운 사연까지 만나게 될 줄 몰랐기에, 뭐라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남의 물건 도둑질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게 다 나이 들어 죽지도 않고 곶감이나 먹고 싶다 한 내 잘못이네……. 내 대신 가서 빌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 처자나 총각은 몰라요, 자식이 몰래 울면 부모 가슴은 갈래갈래 찢어져…….”

“하, 할머니.”

노인이 다시 눈물을 보이자 도란이 허둥지둥 편지를 받아 들었다.

“제가 꼭 전해 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보란 듯 편지를 자신의 품에 간직했다. 노인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울음 섞인 한숨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 도란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부탁한다고, 부탁한다고 되뇌었다.

도란은 얼떨떨한 심정이 되어 싸리울 밖으로 나왔다. 진사해는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마을 입구로 터덜터덜 걷던 도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설연 님은 성샛골의 딸이니 곶감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을 텐데.”

“글쎄. 우리는 둘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니 추측하기 어렵지. 어머니가 심하게 앓는 상황이라 판단력이 흐려졌을 수도 있고.”

당시 상황이 대강 짐작 갔다. 어머니를 구완하느라 산에 오지 않는 벗을 찾아왔을 설연. 어머니 옆을 떠날 수 없다는 벗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졌을 것이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벗은, 언젠가 그녀의 고향에 곶감이 쌓여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산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설연이 인간이 아님은 벗도 눈치챘을 터. 눈이 쏟아지는 겨울, 아픈 어머니를 잠시 홀로 두고 설연의 뒤를 따라 비틀비틀 설산을 오르는 인간 여자……. 힘겹게 성샛골의 입구를 지난 여자의 눈앞에, 어머니가 그토록 먹고 싶다던 곶감이 풍성히 쌓인 게 보였다면?

“편지는 꼭 전해 줘야겠어요. 설연 님도 사정을 알면 친구를 용서할 거예요.”

도란은 외롭고 서툰 두 소녀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산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깊은 우정과 애정을 나누었겠지만 벗을 사귄 것이 처음이라 모든 점에 있어 미숙했다. 사정을 설명하는 법도, 듣는 법도, 또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하는 법도 몰랐을 것이다.

“개운한 표정이 아니구나.”

가만히 건너온 말에 도란이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요?”

“그래, 속상한 얼굴이야.”

그녀는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러 보았다. 신령님 말대로 마냥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을까. 아니면 그저 신령님이 잘 알아차리신 것일까.

“성샛골의 일이 그토록 마음 쓰이느냐?”

“그것보다는…… 저분을 보니까 저희 부모님 생각이 나서요.”

“…….”

“저희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그분들도 절 위해서 많이 울어 주셨을까 싶어서……. 편찮으셔도 좋으니 살아 계시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조용한 마을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나직하게 깔렸다. 발끝을 보고 걷던 도란이 애써 기운차게 고개를 들었다.

“에이, 오랜만에 인세에 왔더니 괜히 기분이 그런가 봐요.”

진사해는 슬픔과 외로움이 새겨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뜻밖의 행동에 도란이 목을 움츠렸다.

“어.”

“잠시 가만히.”

말대로 가만히 기다리니 큰 손이 머리에 닿았다. 머리 장식이 빠지고, 반만 묶었던 머리카락이 풀려 뺨으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목을 간지럽혔다.

“머리가 흐트러져서.”

아까 노인을 부축하다가 헝클어진 모양이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빗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감각이 생생했다. 진사해의 손은, 이따금 도란의 둥근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의 손으로 건너가니 마치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는 머리 장식의 은실이 찰랑찰랑 흔들며 빛을 반사했다.

어느 밤, 장의의 매듭을 고쳐 주던 그때와는 무척 달랐다. 턱 바로 아래를 오가면서도 맨살에 닿는 일이 없던 손은, 이제 제법 스스럼없이 도란의 귀와 목에 닿았다. 따뜻하고 선뜻했다. 질척한 매만짐도 아니고 진득한 접촉도 아니고, 그저 온화한 손이 살짝살짝 스쳐 지나갈 뿐인데도 기분이 오묘해졌다.

“이만 돌아갈까.”

“…….”

“네가 슬프지 않은 곳으로 가자.”

잔잔한 위로에, 도란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가금산의 풍경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곳으로 간 후에는 슬픈 일이 거의 없었다. 진사해의 말이 옳았다. 그곳은 도란이 슬프지 않을 수 있는, 또 다른 집이었다.

신령님 눈에 늘 어른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지금만큼은 달랐다. 너른 품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고픈 마음이 앞서, 도란은 진사해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안아서 데려가 주세요.”

인세로 올 때 진사해가 했던 말이 그대로 그에게 돌아갔다. 그때는 도란이 얼굴을 붉혔지만, 이번에 당황한 건 진사해였다. 아까 장죽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한 일이 떠올라, 그녀는 슬픔을 떨치고 놀리듯 덧붙였다.

“어릴 때처럼은 말고요.”

진사해가 졌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작고 여린 몸을 감싸는 팔이 단단했다. 웃음 섞인 숨결이 도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래, 집으로 가자.”

집으로.

도란은 올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더는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 * *

가금산으로 돌아오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한 번도 화원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란은 진사해와 헤어지자마자 화원으로 향했다. 지지 않는 연꽃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까딱거리던 지신이 팍 인상을 썼다.

“어딜 돌아다니다 지금 와?”

“인세에 좀 다녀왔어요.”

“인세?”

도란은 종종걸음을 쳐 연꽃 아래로 갔다. 그늘에 몸을 숨기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크고 작은 이파리와 꽃들이 하늘하늘 몸을 흔들어 그녀를 맞아 주었다. 지신도 연꽃에서 훌쩍 뛰어내려 도란 옆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여인 위로 따스한 노을과 긴 그림자가 덮였다.

“거긴 왜 갔는데?”

도란은 성샛골에서 겪은 일과 인세에 간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지신이 감동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녀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냉랭했다.

“흥. 뭐 하러 남의 일에 신경을 써?”

“선물도 받았는데요.”

부채를 내밀어 보여 주었지만 지신은 그런 건 선물도 아니라는 투였다.

“물건이 중요한 게 아니지. 자고로 마음 넓은 벗을 사귀어야 탈이 없다고. 나처럼 말이야.”

은근히 자랑이 심하다니까. 도란은 마음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냥 웃었다. 지신의 자랑이나 괜히 툭툭거리는 행동도 싫지 않고 마냥 좋기만 하니, 이게 바로 우정인가 싶었다.

그 후로도 수다가 이어졌다. 학을 통해 인세의 편지를 전달했다는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던 지신은, 도란의 머리에 꽂힌 장식을 보고서야 인세 방문에 흥미를 보였다.

“그 장식은 뭐야? 못 보던 건데.”

“아, 이건…….”

도란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진사해가 머리 모양을 고쳐 주었을 때의, 기묘한 떨림과 긴장이 잔물결처럼 살아나 마음을 적셨다.

어물거리는 반응을 곧장 알아차린 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 선물이구나?”

“그냥…… 신령님이 사 주신 거예요.”

“그냥 사 준 건데 얼굴은 왜 붉어져?”

“아니, 이거 파는 사람이 저희보고 정인이라고……. 그리고 신령님이 나중에 머리 다시 만져 주셨는데 그때 기분이 좀…….”

“좀?”

“몰라요.”

“모르긴 뭘 몰라? 설렜나 본데.”

“그런 거 아니에요!”

“왜 아니야? 같이 돌아다니다 물건 사고 정인입네 하고. 사랑 놀음 하는 것 같아서 설렜지, 뭘.”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도란은 무릎을 안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지신을 바라보았다.

“저만 그러면 소용없잖아요.”

“응?”

“신령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셨을 텐데 저 혼자 그래 봤자 의미 없다는 거죠.”

지신은 가슴을 퍽퍽 쳤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마음도 없는데 정인이라는 농에 맞장구를 쳐 주고 선물까지 사 주고 그걸 직접 머리에 꽂아 주기까지 하겠느냔 말이다. 자신은 화원이 살아나던 그 달밤에 곧바로 알아차린 걸, 도란은 가을이 깊어 가도록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아니, 아니지.’

지신은 혼자 고개를 홰홰 저었다.

너는 아름답지만 내게 여자는 아니라는 말까지 들으며 거절당한 도란이니, 어떻게 진사해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이건 도란이 둔한 탓이 아니었다. 이건 다!

‘그 괘씸한 놈이 늦게 반한 탓이야!’

지신은 덥석 도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그놈도 흔들렸을 거야.”

“네? 아니에요, 신령님은 그냥 맞춰 주신 거죠.”

“아무리 착한 놈이어도 마음도 없이 그런 농담을 받아 주진 않아. 오라비와 누이라 해도 되는데 왜 정인 운운에 장단을 맞춰 주겠어? 게다가 연꽃이 피던 날에…….”

지신이 하던 말을 멈추고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도란은 호기심과 의구심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고 있던 지신이 괜히 딴청을 피웠다.

“아무튼, 마음 없이 정인인 척하는 놈은 없다고! 그것만 알아 둬!”

선언 같은 말을 남긴 지신은 흰 새처럼 휙 솟구쳤다. 도란은 방금까지 지신이 있던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사라지는…….

“도란아, 여기 있었구나.”

도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연잎을 살짝 들며 진사해가 나타났다. 저물어 가는 하늘을 등진 그의 얼굴로 붉은 노을이 흘러내렸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하루의 마지막 햇빛 아래 단정하게 빛났고, 윤이 나는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아까 인세에서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도란은 문득, 세상이 붉게 물든 지금이라면 자신도 평소보다 더 어여뻐 보일지 궁금했다. 진사해가 자신을 그렇게 봐 주었으면 싶었다.

‘지신님이 괜한 얘길 하셔서 더 의식되잖아.’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부러 입을 열었다.

“신령님. 찾으셨어요?”

“그래.”

해는 빠르게 서산으로 넘어갔다. 이제 붉은빛은 하늘 끝자락에밖에 남지 않았다. 게으름을 부리는 구름들만 느릿느릿 흘러갔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 아래, 진사해가 다가왔다.

“줄 게 있어서.”

익숙한 향기가, 신궁 전체에 감도는 향기가 코끝에 내려앉았다. 도란은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낮에도 선물을 받았는데 뭘 주시려는 걸까.

얌전히 손을 모으고 기다리는 그녀 앞에 낯익은 물건이 내밀어졌다.

“자.”

“…….”

“진작 돌려주려 했는데 늦었구나.”

매끈한 손바닥에 얹힌 것은 나무 비녀였다.

투박하고 짧고 잔 흠집이 많은, 가난한 집의 아낙들이 쓸 법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손때까지 묻어 반질반질했다. 모르는 이의 눈에는 낡고 가치 없는 흔한 물건에 불과하겠지만 도란에게는 달랐다.

“이건 왜…….”

버려진 뱀 신당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 달라 소원을 빌던 날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바친 공물이 바로 저 나무 비녀였다.

“유품이 아닐까 해서, 네게 돌려주고 싶었다.”

진사해를 담은 도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말대로 저 나무 비녀는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혼자였던 도란에게 남겨진, 부모님의 유일한 흔적. 뱀말 남자애들이 괴롭힌답시고 뺏어 가려 들 때는 악귀처럼 고함을 지르고 깨물어 지켜 냈던 소중한 물건.

“유품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의 너는 머리를 올릴 나이가 아니었으니 비녀가 필요 없었을 테지. 세월의 흔적이 보이니 오래된 물건인데 그렇다면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애가 바친 공물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셨을까.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아까 부모님 이야기를 하기에, 생각이 나서.”

진사해가 도란의 손을 잡아 펼쳤다. 흰 손바닥에 놓이는 비녀는 진사해의 체온을 간직한 듯 따뜻했다.

“늦었지만 돌려주고 싶었다. 네게 훨씬 더 소중한 물건이니까.”

도란은 단단한 비녀를 꼭 쥐어 보았다.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의 유품을 쓰다듬으며 견뎌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그녀는 성년이 되었고, 악몽으로 찾아오던 과거는 까마득하게 멀어진 후였다.

모두 진사해 덕이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른 도란이 애써 웃음 지었다.

“그럼 저는 신령님께 뭘 드리죠? 소원을 들어주셨으니까 저도 비녀 대신 뭔가 드려야죠.”

이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진사해가 멈칫했다. 도란은 선뜻 답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소야 선녀님이 수놓는 법을 알려 준다고 하셨는데, 배워서 옷에 수를 꽂아 드릴까요? 매일 아침 침방에 새 꽃을 놓아 드릴까요? 아니면 심부름을 시키셔도 돼요. 전 이제 어리지도 않고 뭐든 잘할 수 있으니까요.”

“도란아.”

말을 막는 어조가 부드러웠다.

“아무것도 줄 필요 없다.”

“네? 하지만…….”

“너를 알며 수많은 기쁨도 함께 알았으니, 이미 차고 넘치도록 준 셈이야.”

진사해는 진심이었다.

그의 세상은 뱀말에서 재투성이 아이를 만난 후부터 성큼성큼 넓어졌다. 굶주림을 증명하는 앙상한 손목을 처음 쥔 순간의 충격. 무릎을 찧으며 꽈당꽈당 넘어지는 아이를 볼 때의 안타까움. 소야와 가신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날이 갈수록 밝아지고 자신감을 찾아가는 도란을 확인할 때의 안도.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힘차게 현재를 살아 나가는 발걸음을 보고 느낀 기쁨.

그리고 연꽃 속에서 피어난 애기 신부님과 마주쳤을 때의, 그 뜨거운 동요. 달빛에 희게 물든 머리카락이 마음 어딘가를 간질이는 듯해 어쩔 줄 몰랐던…….

“그러니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

진사해가 긴 머리카락 끝을 잡았다. 우아한 손가락 사이로 은실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느낌이 아찔했다. 그는 홀리기라도 한 듯 머리칼 끝에 살짝 입술을 댔다. 맹세코 의도치 않은, 충동적인 짓이었다.

시간이 멎었다.

도란이 순한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을 보는 금빛 눈이, 어둠 속에서 교교하였다. 너울거리는 금빛 파도가 꼭 저와 같을까. 지금 이 행동의 의미가 대체…….

마음도 없이 정인 놀이에 장단을 맞춰 주는 사내는 없다던 지신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러나 뒤이어, 너는 내게 여인은 아니라 선언했던 진사해가 떠오르고 말았다.

사로잡힌 듯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머리카락이 진사해의 손을 떠났다. 실바람 같은 속삭임이 머리카락 대신인 듯 그에게 건너갔다.

“신령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저를 여인으로 보지도 않는다 하셨으면서.”

그는 홍련처럼 붉어진 도란의 뺨을, 눈가를, 꽉 쥔 자그마한 손을 속절없이 응시했다. 그도 방금 자기가 한 짓에 당황하여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머물던 도란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착각할 것 같아…….”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진사해를 지나쳐 갔다. 추풍에 춤추는 꽃대 사이로 달아나듯 멀어지는 모습이 환영 같았다. 달빛이 그녀의 걸음을 뒤따랐고, 머리 장식의 단풍이 꼭 진짜 단풍잎처럼 보였다.

진사해는 도란의 머리카락을 쥐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란이 떠나고, 이제 그의 손에 남은 건 풀 냄새와 꽃향기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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