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세세토록
진사해는 침방 창문을 열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따뜻하고 맑은 햇살이 쏟아졌다. 눈부신 아침이었다. 어쩌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도란 때문에 더 눈이 부셨는지도 모른다.
도란은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 화원을 찾았다. 그녀의 애정과 성실을 양분 삼은 화원은 이제 아름다운 휴식처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화초를 정리해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자갈을 뿌려 길을 냈다. 길 곳곳에 놓은 반원형 구조물을 타고 덩굴 식물도 자랐다. 그렇게 해 놓으니 애쓰지 않아도 꾸민 것처럼 보기 좋았다. 작은 의자도 여러 개 놓아 방문객을 배려하고 정돈된 느낌을 더했다.
삼백 년 동안 죽어 있던 분화구 화원은, 이제 가금산 가신들 모두의 쉼터였다. 일을 마친 가신들은 낮이나 저녁에 피로를 풀러 화원을 찾았다. 도란은 꽃을 몇 송이 꺾어 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방문객을 즐겁게 해 주었다.
지금은 아침이라 도란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람이 올 것이다. 화원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다른 곳에서도 손님이 찾아와, 도란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나를 피하는 이유는 될 수 없지.’
소야까지 나서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정도로, 도란은 진사해를 피했다. 마주치면 인사는 하지만 애초에 마주칠 일 자체를 잘 만들지 않았고, 재잘재잘 말을 붙여 오는 대신 허리만 숙여 보이고 지나갔다. 말을 걸어 보아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몇 마디 대답하고 멀어졌다.
그날 밤의 일 때문이다.
진사해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도란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춘 그 밤. 자신을 바라보던 도란의 얼굴이 놀라움과 당혹에 젖었던 그 순간.
‘착각할 것 같아…….’
그녀의 고백을 조곤조곤한 말로 전부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엉뚱한 짓을 했으니, 그런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하다.
창틀에 놓인 진사해의 손이 천천히 말렸다. 스스로도 행동의 이유를 모르는데 도란에게 그날 일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서먹하게 멀어져 가는 관계를 두고 봐야만 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도란이 하늘 어딘가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설연 님!”
백학을 탄 설연이 사뿐하게 지상에 발을 디뎠다. 도란을 향해 인사하는 얼굴이 무척 밝았다. 성샛골의 화려한 누각에 외로이 앉아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도란과 설연의 교류는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 도란이 전한 편지를 받은 설연이 인세로 가 오래된 벗을 만나고 마음을 푼 모양이었다. 그 후 도란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가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된 듯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도란이 먼저 찾아와 이야기를 해 주었을 텐데. 그녀가 나누는 일상 얘기를 꽤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색해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들아.”
한줄기 찬바람이 생각을 깼다. 진사해는 설연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 도란에게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만년설산의 신, 백청요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서 있었다. 그녀는 도란과 처음 조우했을 때처럼 눈부신 설조를 어깨에 앉히고 있었는데, 설조조차 뭔가 불만이 있는 듯 부리를 딱딱거렸다.
“세 번을 불렀다.”
“죄송합니다.”
“옷까지 다 갖췄으면서 아직 침방에 있는 이유가 무어냐. 창밖에 뭐가 있는데 그리 넋을 잃었어?”
백청요가 창가에 섰다. 몰라볼 정도로 아늑하게 변한 화원과 그곳에 앉은 도란을 본 그녀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하늘님이라 해도 우리 신령님을 욕하면 안 된다고 대거리를 하던 맹랑한 꼬마가 어느새 어엿한 가신이 되어 저리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기특했다.
“만년설산의 또래들과도 벗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너무 가금산에 갇혀 지내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만.”
“…….”
“전부 내 기우였구나. 꽃도 피우고 벗도 사귀고, 진짜 어른이 되었어.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 할 텐데 너도 가신들도 아쉽겠구나.”
“…….”
“그래서 도란을 보고 있었느냐? 아쉬워서?”
반쯤은 농담조였으나, 아들의 옆얼굴을 살피는 백청요의 눈은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단순한 아쉬움으로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는 일은 드물다. 백청요는 그것을 잘 알았다.
“모르겠습니다.”
진사해는 어머니의 시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도란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자꾸 보게 되는데, 이유를 모르니 저도 답답합니다.”
백청요가 입을 꾹 다물며 안 그래도 치켜 올라간 눈썹을 더욱 위로 올렸다. 시선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었고, 또 그의 눈빛에서 읽히는, 말랑말랑하고 간지러운 감정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백청요는 벗과 어깨를 겯고 화원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도란에게 주의를 돌렸다. 도란이 늘 진사해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연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도란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아들의 성품을 믿기는 하지만, 그가 혹 도란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거나 험한 짓을 하게 된다면?
게다가 진사해의 발정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러모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도란이 곧 만년설산으로 오겠구나. 이번에는 좀 일찍 보내겠느냐?”
태연을 가장하여 슬쩍 떠보았는데 아들의 반응이 전과는 달랐다. 평소라면 도란에게 묻고 가능하면 일찍 보내겠다고 대답했을 텐데, 이번에는 조용했다. 백청요의 표정이 굳었다.
“왜 답이 없어.”
진사해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도란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도란이 이곳 가금산에, 자신 옆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마치 발정기를 맞이한 수컷이 자신의 암컷을 영역 안에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래서 도란을 일찍 만년설산으로 보내라는 백청요의 말이 듣기 싫었다.
“도란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해야 할 대답을 내놓은 후에도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그는 화원을 보러 간다는 어머니를 배웅하면서도 내내 자신의 망설임을 생각했다. 발정기에 도란을 곁에 두어 뭘 하려고. 대체 뭘?
아무래도 찬물에 목욕이라도 해야지 싶었다.
* * *
첫인상과 달리 설연은 좋은 사람이었다. 인세로 내려가 오래된 벗과 대화한 설연의 얼굴색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어딘지 냉랭하던 기세도 동풍처럼 누그러졌다. 세상 곳곳을 경계하며 보초를 서는 듯 날카로웠던 눈도 상냥한 빛을 되찾았다.
도란은 새로 사귄 이 벗이 좋았다. 또래 여자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의외로 먹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진미(珍味)로 꼽히는 곶감을 만드는 성샛골의 외동딸이라 그런가, 설연은 음식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졌다. 새침한 아가씨처럼 보이고 또 실제로도 그러한데, 먹는 얘기를 할 때만큼은 달랐다.
“사실 곶감은 주전부리지 식사는 아니잖아? 그래서 성샛골에서는 곶감을 다 꿴 다음에 꼭 국수를 말아. 마른 김 가루를 뿌리고 고명을 얹은 다음 참깨까지 톡톡 뿌리고, 아직 뜨거워서 김이 펄펄 날 때 먹으면 몇 그릇이든 먹을 수 있지.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국수는 원래 그런 맛으로 먹는 거잖아?”
“우와, 저도 국수 좋아해요. 말만 들어도 맛있을 것 같아요!”
설연은 국수 얘기에 너무 열을 올렸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늦가을을 맞아 활짝 핀 국화를 보는 척했다.
“다음에 초대해 줄 테니 오든지.”
“정말요? 정말 약속하는 거죠? 소야 선녀님이랑 같이 가도 돼요?”
“뭐, 특별히 허락해 줄게.”
도란이 배시시 웃었다. 내심 좋으면서 아닌 척하는 설연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했다.
‘지신님이랑 잘 맞을 것 같아.’
이른 아침이라 지금은 잠들어 있는 모양이지만, 나중에라도 지신이 몸을 얻게 되어 사람들 눈에 보이게 되면 설연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도란이 한참 그런 생각을 할 때, 설연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녀가 도란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일러 주었다.
“누가 오는데. 설조가 함께 있는 걸 보니 만년설산 신령님이 오시는 모양이야.”
설연의 말대로 눈부신 백의를 걸친 여인이 설조를 거느리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널 보러 오시나 보다.”
설연은 백청요를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혀 보인 뒤 화원을 벗어났다.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배려해 준 덕분에, 도란은 백청요와 둘이서만 마주할 수 있었다.
“신령님, 오셨어요?”
“그래. 저 애는 성샛골의 딸이니?”
“네, 화원을 보려고 오셨대요.”
“널 보러 온 거겠지. 좋은 벗을 사귀었구나.”
부드러운 정정에 도란은 수줍게 웃기만 했다. 백청요는 그 어여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신들이 어려워서 달달 떨던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웃을 줄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된 도란을 앉혀 두고 여자들이 하는 절을 알려 주었을 때는 마치 딸 가진 부모처럼 흐뭇하기도 했다. 얼마 보지 않은 자신도 괜히 애틋한데 진사해와 가금산의 가신들은 어떠할까. 도란이 더 자라 사내를 마음에 품게 되면 다들 섭섭해하리라, 그런 짐작도 했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진사해가 도란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을 줄은.
“요즘 별달리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고?”
“네? 네.”
잠깐 진사해를 떠올리긴 했지만 도란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미 모를 행동을 백청요 앞에서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백청요는 진사해의 어머니가 아닌가.
“네 신령님에게서 들은 말도 없느냐?”
“네?”
“정표처럼 받은 물건은?”
“정표요……?”
도란은 점점 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백청요는 그것만으로도 능히 상황을 짐작해 냈다. 아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아 염려했는데, 그 염려대로 도란과 진사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백청요가 아들의 어리석음에 탄식하던 그때, 도란은 뭔가 생각난 듯 소맷부리로 손을 집어넣었다.
“정표는 아니지만 이걸 주셨어요.”
도란이 내민 것은 오래된 나무 비녀였다.
오래 간직한 물건인 듯 겉면이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다. 장식도 세공도 없는, 언뜻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백청요는 그 비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인데요, 예전에 신령님께 공물로 바쳤거든요. 제게 소중한 물건일 거라고 하시면서 돌려주셨어요.”
비녀를 담은 백청요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란도 진사해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지만, 비녀에서는 뭔가 영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력을 갈고닦은 백청요는 그 신이한 기운을 곧바로 느꼈다.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네.”
백청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렬한 감정은 물건에 힘을 깃들게 한다.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 어머니의 슬픔, 이 비녀를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삼켰을 도란의 외로움과 그리움, 또 이 비녀를 돌려줄 때 진사해가 느꼈을 가없는 애정과 연민. 그런 것들이 모두 이 물건에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걸로 네 부모님의 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도란이 멈칫했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만년설산 신령님의 모습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나온 부모님의 혼 얘기도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백청요는 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게 비녀를 빌려준다면 한번 찾아보마.”
“……부모님의 혼을요?”
“그래. 물론 네가 원한다면.”
도란은 비녀를 꼭 쥐었다. 부모님의 혼을 찾는다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기억에도 없는 부모님의 혼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부모님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신령님께 드릴게요.”
볼품없는 비녀가 비단처럼 고운 백청요의 손으로 건너갔다. 백청요가 곱게 웃으며 도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 목적은 이게 아니었다만.”
진사해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도란의 진심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 생각해 보니, 어린애들 연애에 기웃거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들의 성품은 믿을 만하니 도란을 강제하지 않을 테고, 도란도 여린 듯하지만 심지가 곧으니 휘둘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백청요는 도란을 위한 다른 일을 해 주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도 어린 도란의 성장을 뿌듯하게 지켜봐 온 보호자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머잖아 소식을 가져다주마.”
비녀를 챙긴 백청요가 우아하게 돌아섰다. 도란은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얼떨떨하긴 했지만 부모님의 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무작정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시간이 흘러 가을이 끝나고 누렇게 변한 잎이 하나둘 바닥에 융단처럼 깔렸다. 백청요는 소식을 보내지 않았고, 도란과 진사해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도란은 의도적으로 진사해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괜한 착각으로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싫었고, 헷갈리게 행동하는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일단은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분화구 화원의 지신, 대무신의 아들 석춘, 성샛골의 외동딸 설연, 그새 꽤 많은 인연이 생겼기에 외롭거나 심심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석춘이 오기로 했다. 소야는 단장하는 도란의 손에서 빗을 빼앗았다.
“요즘 우리 애기 신부님 머리를 못 빗겨 준 것 같아서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이 머리 만지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말리지 마세요.”
애정이 듬뿍 담긴 말에 살며시 웃은 도란이 순순히 면경 앞에 앉았다.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면서 소야가 넌지시 물었다.
“애기 신부님, 신령님이랑 무슨 일 있어요?”
사실 소야는 도란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한동안 신령님 옆에 딱 붙어 다녀 이상한 소문까지 돌았는데, 이제는 둘이 함께 있는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따금 함께하는 아침 식사 때도 둘은 어색해 보였다.
“네?”
“아니, 그냥요. 얼마 전엔 신령님이 애기 신부님 얘기를 물으시기에.”
“뭐라고 하셨는데요?”
면경에 비친 도란의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소야는 어제 아침을 떠올리느라 그 동요를 보지 못했다.
“그냥 식사는 많이 하는지, 요즘 지내는 벗들과는 어떤지, 그런 것들이요. 대무신령님 아들 얘기도 물으셨고.”
“아…….”
“직접 물으시면 되지 왜 제게 대신 물으시느냐고 했더니 말이 없으셔서, 신령님이 애기 신부님한테 뭐라도 잘못하셨나 했죠.”
“네에?”
도란이 놀란 듯 말꼬리를 올렸다. 신령님이 자신에게 뭘 잘못하다니, 그런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요?”
소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얘기하다가는 진사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게 될 것 같아, 도란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때부터 함께한 소야지만 진사해의 가신인 그녀에게 이 말 저 말을 떠들 수는 없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석춘 님이 기다리실 거예요.”
“네, 재밌게 놀다 오세요.”
소야는 어렴풋한 미소를 대답처럼 남기고 사라지는 도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니 이상했다.
‘신령님이 정말 무슨 큰 잘못을 했나?’
도란의 성격상 대단찮은 일을 이렇게 숨기지는 않을 것이다. 큰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고민하며 도란의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소야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신령님!”
찬 기운이 맴도는 뜰에 진사해가 서 있었다. 초겨울 하늘을 한 아름 품은 연못을 바라보면서.
소야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애기 신부님 보러 오셨어요? 대무신령님 아들 만난다고 나갔어요.”
“석춘을?”
“네. 애기 신부님도 방금 나갔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네요.”
“석춘이 유독 자주 오는구나.”
“성샛골 따님과 비슷하게 오는 것 같은데…….”
소야가 말끝을 흐리며 진사해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애기 신부님에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돌아오면 신령님께 가 보라고 전해 드릴게요.”
“아니, 되었다. 만년설산에 조금 일찍 가야 할 것 같아 의사를 물으러 온 것뿐이야. 네가 나중에 대신 전해라.”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평소의 진사해라면 도란과 직접 마주하고 그녀의 의견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소야가 슬쩍 그를 떠보았다.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요.”
“……불편해할 것 같아서.”
찰나의 망설임, 머뭇거리는 대답. 분명한 신호에 소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령님, 정말 애기 신부님에게 뭐 잘못하셨어요?”
“뭐?”
“두 분이 요즘 서먹해 보이니 이상해서요. 애기 신부님 성격에 신령님과 다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신령님이 실수하셨다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진사해의 침묵에 소야가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복잡한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직접 얘기하는 게 좋을 텐데.
“애기 신부님 오시면 신령님께 가 보라고 할게요. 그래도 되죠? 해범 님이 오신다고 해서 저도 맞이하러 나가 봐야 하고요.”
“그래.”
진사해는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소야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더는 대화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직접 온 참이었다. 이번에는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지만, 불러들이면 될 일이었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라.”
소야는 등을 돌려 멀어지는 진사해의 뒷모습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퐁퐁 솟아오르는 자그마한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로.
‘뭐지? 이 묘한 분위기는?’
담장을 타고 오른 능소화처럼 보얗게 피어난 애기 신부님, 그런 그녀와 언젠가부터 어색해진 신령님. 성샛골의 설연과 비슷한 빈도로 방문하는 석춘을 경계하는 듯한 그의 수상한 태도까지.
설마…….
“에이, 아니겠지.”
소야는 홱홱 고개를 가로젓고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 * *
달이 높이 떠오른 밤, 도란은 진사해의 처소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려 쉽게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소야로부터 신령님의 부름에 대해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내내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가 직접 자신을 불러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긴장이 되는 한편 한 줄기 기대도 피어올랐다. 이제는 기대를 멈추자고 다짐해도 어쩔 수 없었다.
뛰는 가슴을 안고 여기까지 왔다. 어차피 도란 쪽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스르르 열린 문과 갑작스러운 음성에,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펄떡거렸다. 진사해가 은은한 빛을 품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어른거리더구나.”
“네……. 저,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는 들어오라는 듯 문가에서 비켜섰다. 그를 지나치는 도란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신령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마음이 물오른 꽃봉오리처럼 부풀었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았다.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만 만지작거리는 도란과 호롱불 너머에서 그녀를 살피는 진사해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사해가 가벼운 인사로 그 침묵을 쓸어 냈다.
“대무신의 아들과 오래 어울린 모양이구나.”
“네. 그게, 갑자기 설연 님도 오셔서요.”
“많이 늦어지기에 걱정했다.”
도란이 조심스럽게 창밖을 보았다. 달이 떠오르긴 했지만 ‘많이 늦었다’고 표현할 만큼 야심한 시각은 아니었다.
“찾으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왔을 텐데요. 죄송해요.”
“책망한 게 아니라…….”
진사해가 난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내 그가 자세를 고쳤다.
“지난번 일로 네게 이를 말이 있어 불렀다.”
“……말씀하세요.”
도란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리는 호롱불 너머에 앉아, 진사해는 머릿속으로 가다듬은 말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일단 지난번에 화원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사과할 작정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너까지 헷갈리게 했다고, 너를 자주 생각하고 또 자주 심중에 그려 본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도란아.”
“…….”
“지난번 연잎 아래서의 일은 내 실수다.”
도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대가 생각보다 컸음을 깨달았다. 어떤 소리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귓속으로 다음 말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나도 내 마음을 몰라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내가 부족해 너까지 헷갈리게 했구나.”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연잎 아래서 보인 흔들림은 달빛 아래서의 충동에 불과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 기대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묵직한 동통을 호소했다. 이대로 듣고만 있다가는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도란이 두 주먹을 말아 쥐며 애써 고개를 들었다. 다음 말을 이어 가려던 진사해가 멈칫했다.
“이번 겨울에는 만년설산이 아니라 바리원에 가 있고 싶어요. 오늘 석춘 님이 초대해 주셨거든요.”
진사해의 숨이 멈추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발정기에 도란을 만년설산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만년설산도 아니고 대무신이 다스리는 땅으로 가겠다고? 친밀하게 어울리는 사내가 있는 그곳으로?
“하실 말씀 끝나셨으면 저도 이만 갈게요.”
우두망찰한 진사해를 두고 도란이 차갑게 일어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감추고자 머리는 푹 숙인 채였다. 꾸벅 인사한 그녀는 진사해에게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달리듯 사라졌다. 순식간에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게 된 그녀의 뒷모습을 그리며 진사해가 탄식을 뱉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뒤쫓아 평소처럼 만년설산으로 가라고, 아니, 자신의 품에 머물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듯 달려 나가던 도란이 떠올랐다. 겨울이 올 때까지 내내 서먹하게 굴던 모습도. 망설임 없이 바리원으로 가겠다고 선언하던 그 입술까지.
‘더는 나를…….’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는데 헛웃음이 났다.
달라진 심회를 알리기만 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으니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나. 연모한다고 고백했던 도란의 마음이 여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우담화 나무 아래서 고백하던 그날 이후 몇 달이나 흘렀다. 마음이 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
짧은 헛웃음과 함께 그가 제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이 금빛으로 번뜩였다.
같은 시간에 합해지지 못해 어긋난 연정이라 해도 발정기에 도란을 다른 사내의 땅에 보낼 수는 없었다. 절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 * *
한편 연못 별채로 돌아간 도란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한참을 뒤척거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연잎 아래서의 일을 실수라고 일축했던 진사해만 떠올리면 가슴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자신을 고작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내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태우는 일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종잇장처럼 접을 수도 없으니 너무나 괴로웠다.
‘정말 너무해…….’
차라리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시지.
내가 착각하고 헷갈리도록 내버려 두시지. 혼자만의 상상이라도 달콤했는데. 닫힌 문 앞에 서서 신령님이 나를 왜 부르셨을까 고민할 때는 우담화 아래에서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이대로는 도저히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창문을 흔드는 겨울바람의 기세도 사나웠다. 도란은 귀를 막으며 고개를 이불에 파묻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뒤척거리던 도란이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누워서 울적한 생각만 하느니 화원에라도 나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신을 만나 속을 털어놓으면 마음도 조금 가벼워질 것이다.
도란은 두툼한 털옷을 챙겨 입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옷을 단단히 갖추고 연못 별채를 나선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이…….”
새하얀 눈송이가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낙하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동안 함박눈이 쏟아졌는지, 세상은 이미 아득한 흑백이었다.
사락.
사락.
문가에 서서 침묵하니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도란은 잠시 눈을 감고 겨울 특유의 차가운 내음을 음미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맑은 밤공기 속에 꽃처럼 피어올랐다.
손을 내밀어 바람을 느끼자 아까 침상에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도 잠시 눈에 덮인 듯 잊혔다. 어서 빨리 눈 덮인 화원을 보러 가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분화구 화원에 도착하자마자 지신을 보았다. 지신은 도란이 피어났던 연꽃 가지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눈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곧 지신 역시 도란을 발견했다.
“눈꽃이 엄청나게 피었어. 이걸 보러 온 거지?”
오랜 벗의 얼굴을 보니 잠시 잦아들었던 감정이 또 울컥 올라왔다. 도란은 애써 감정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너무 예뻐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슬픔에 잠긴 눈에 비친 화원의 설경은 말 그대로 황홀했다. 마른 가지에 탐스러운 눈꽃이 매달렸고, 순백의 눈 속에서 흐드러진 빨간 동백꽃은 앙증맞은 장식 같았다. 아직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때 지신이 연꽃 줄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히고 도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표정이요?”
“울 것 같은 얼굴이잖아.”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자 정말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엉엉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도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돌렸다.
“안 그래요. 저, 우리 산책할까요? 가금산 전체를 돌아다니면 어때요?”
지신은 도란이 일부러 말을 돌렸음을 알아차렸다. 채근해서 진심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눈 오는 거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왜?”
“그야…… 전에는 지신님이랑 다닌 적이 없잖아요.”
슬픔을 감춘 얼굴로도 도란이 배시시 웃었다. 지신은 괜한 부끄러움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차, 참 나. 그래, 내가 특별히 같이 다녀 준다!”
좋으면서 한 번씩 꼭 아니라고 주장하는 성정대로 지신은 괜히 새침하게 대답했다. 부끄러운지 휙 앞서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는 도란의 얼굴도 아까보다는 조금 밝아졌다. 역시 벗을 보러 오길 잘했다 싶었다.
“같이 가요!”
둘은 진사해가 자주 돌보는 숲까지 달려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우아한 겨울 철새들을 보았다.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에 무리를 지어 앉은 기러기 떼였는데, 머잖아 일제히 날아올라 달밤의 하늘에서 춤을 추듯 노닐었다. 새들이 흔히 하는 행동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경과 어우러지니 진정 장관이어서, 도란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서늘한 바람을 낳는 골짜기로, 살얼음이 끼긴 했지만 여전히 졸졸 흐르는 개울가로, 다시 넓게 펼쳐진 초원 지대로, 둘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지신은 육체가 없으니 발자국이 남지 않아, 새하얀 눈에 새겨진 발자국은 도란의 것뿐이었다. 줄지어 날아가는 나비 같은 흔적은 계속해서 내리는 눈에 덮여 금세 사라졌다.
도란은 계속해서 발자국을 찍으며 연못가로 향했다. 꽁꽁 언 연못은 하늘을 담은 커다란 거울 같았다.
“와아…….”
도란은 난간을 짚고 하늘이 고스란히 비치는 매끈한 얼음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얼굴도 제법 또렷하게 맺혔다.
문득 이 안에 빠졌다가 뱀 형상의 진사해와 마주쳤던 게 떠올랐다. 그때, 옆에 나란히 선 지신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말해 봐. 너 무슨 일 있지?”
묻는 어조가 평소답지 않게 진지했다.
도란은 마음을 털어놓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했다는 얘기를 하는 건 왠지 부끄러웠다. 대답하지 않는 도란을 보던 지신이 슬쩍 그녀를 찔러보았다.
“왜, 진사해 그놈이 또 속상하게 하던?”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지신은 그길로 달려가 진사해의 이마에 딱밤이라도 먹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도란이 때맞춰 말을 걸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신님이랑 있으니까 좋아요. 오늘은 혼자 못 있을 것 같았거든요.”
흰 눈에 달빛이 튀어 눈부셨고, 도란은 환한 설경 속에서 더욱 빛났다. 지신은 눈에 묻힌 꽃가지 같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진사해에게 딱밤을 먹이는 일은 미루기로 했다. 지금으로서는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벗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는 게 더 중요할 성싶었다.
“그래, 같이 놀면서 잊어버리자.”
지신이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더니 신나게 얼음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겨울엔 역시 이거지! 너도 남자 놈 따위는 신경 쓰지 마!”
몸이 없는 지신은 넘어질 걱정도 없이 한 발로, 두 발로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공중제비까지 돌았다. 흰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카락도 흔들려서 꼭 곡예를 선보이는 커다란 새 같았다. 그녀는 커다란 연못을 춤추듯 빙글빙글 돌다가 도란에게 다가왔다.
“들어와. 엄청 재밌어.”
“그러다가 얼음이 깨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소야 선녀님이 겨울마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안 깨져. 얼마나 꽝꽝 얼었는데?”
“그래도…….”
“움직이면 기분도 한결 나아져. 계속 죽상만 짓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겠어?”
듣고 보니 지신의 말도 옳았다. 눈 내리는 하늘 아래 멀뚱히 서 있어 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계속 징징거리며 지신에게 속풀이를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무엇보다도 지신이 자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요. 같이 해요!”
애써 활기차게 대답한 도란이 난간을 넘었다. 가장자리의 얼음은 두꺼우니 깨지지 않겠지 싶었다. 무엇보다도 지신 말대로 연못은 제법 단단하게 언 것 같았다. 눈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추운 날이니 겁낼 필요 없을 듯했다.
조심조심 첫발을 딛고 몇 걸음 걷자 그나마 남아 있던 두려움도 사라졌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운 법이었다. 그래서 도란은 지신 흉내를 내며 어설프게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
지신은 어디서 무얼 봤는지, 뒷짐을 지고 양발을 번갈아 미끄러뜨리며 허공에서 빙빙 돌았다. 지신처럼 날 수 없는 데다 이런 장난이 처음인 도란은 고작해야 그녀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지만, 지신의 말이 옳았다.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어둡고 무거운 잡념도 잊혔다.
“손잡아!”
지신이 내민 손을 잡자, 지신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란은 그녀의 속도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제어할 수 없는 썰매에 탄 듯 무서웠는데, 가장자리에서부터 연못 중앙까지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들어가는 동안 두려움이 가셨다.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자 속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찬 바람이 뺨을 저며 피부에 감각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도란은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목화솜 같은 눈이 쏟아지는 밤하늘, 경쾌하게 춤추며 흘러가는 구름과 총총한 별들, 허공으로 마법처럼 날아가는 흰 눈가루, 흑백으로 물든 가금산,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풍경.
얼어붙은 연못을 미끄러지는 동안에는 진사해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때? 재밌지?”
“네, 정말 너무…….”
쩌억―.
갑자기 아래서 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란은 본능처럼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신이 난 지신은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 도란의 당혹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신은 도란을 이끌고 연못 중앙으로 달려갔다. 도란은 무섭게 번지는 굵은 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비명처럼 외쳤다.
“지신님, 잠깐……!”
쩌저적!
연못 중앙의 얇은 얼음이 요란하게 갈라졌다.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지신이 도란의 손을 꽉 쥔 순간.
퍽,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도란의 몸이 쑥 꺼졌다.
“도란아!”
도란은 지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귀와 코로 물이 들어왔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물이 너무, 너무, 너무 차가워서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나친 냉기가 몸의 감각을 앗아 갔다. 코가 찡해 기침을 하자 입과 목으로 물이 들이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이 빠진 구멍이 보였다. 도란은 그쪽으로 나아가려고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젖은 옷이 몸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설상가상으로 구멍이 너무 작았다. 분명 빠질 때 저 구멍으로 빠졌을 텐데, 도저히 그곳에 정확히 머리를 갖다 댈 수가 없었다.
도란은 연못에서 죽을 듯 몸부림쳤다. 맨손으로 단단한 얼음을 할퀴며 얼음 너머 탁한 세상을 간절히 바랐다. 호흡은 이미 진작에 끊어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한겨울 연못 속에서 도란의 의식은 빠르게 사라졌다.
쾅!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망치가 연못을 내리친 듯 얼음이 단번에 조각났다. 유리 파편처럼 깨진 얼음 사이로, 익숙한 손이 들어와 도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강한 힘이 도란을 연못 밖으로 끌어냈다.
“콜록! 콜록, 콜록!”
도란은 미친 듯 기침하고 물을 토하며 구역질을 했다. 연못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이 너무 순간이라, 살아난 일마저 환상 같았다. 가슴이 뻐근했고 곧 죽을 것처럼 추웠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며 고통을 호소했고, 입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쏟아졌다. 찬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손가락 발가락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도란아.”
그녀의 옷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완전히 젖은 데다 반쯤 제정신을 잃은 그녀를 감싸 안은 진사해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도란아, 정신 차려라.”
“추워…….”
도란의 입술은 새파랗다 못해 시꺼멨다. 정말 곧 숨을 놓칠 것만 같았다. 진사해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 연못 별채에 다다랐다. 소야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부르고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도란아, 옷을 벗어야 한다. 어서.”
도란은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였다. 진사해는 하는 수 없이 억센 힘으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가슴 앞에 모은 팔을 치우고 옷고름을 푼 다음에는 저고리와 속곳을 거의 뜯어내야 했다. 다리에 감긴 치마까지 찢듯이 벗겼을 때쯤에는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거의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진사해는 젖은 옷을 대충 던져둔 다음 도란을 눕혔다. 두툼한 이불을 덮어 주었는데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너무 심하게 떨어서 떤다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괴롭게 신음했다.
“추워……. 너무, 추워…….”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 도란이다. 가을비에 젖은 것만으로도 얼굴이 창백해지지 않았나. 진사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아무나 화로를 가져와라!”
급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허약해진 도란이 경기하듯 크게 움찔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그녀를 본 진사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이불을 걷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도란아, 괜찮다. 괜찮아…….”
도란은 온기를 찾아 진사해에게 매달렸다. 벗은 몸으로 간절히 진사해의 체온을 갈구했다. 진사해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다른 팔로는 이불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목련 꽃잎처럼 보얗던 피부는 지독한 한기에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진사해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감싸 안은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신령님, 화로를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소야가 올 줄 알았는데 나타난 이는 해범이었다. 어디 있는지 모를 소야 대신 화로를 들고 온 그는 안의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멈칫했다. 진사해가, 누구도 안은 적 없는 가금산의 신이 도란을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불에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진사해는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본능처럼 도란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해범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두고 나가라.”
“네, 그럼…….”
“소야를 불러. 아니.”
진사해는 도란을 단단히 안아 감추었다. 해도 달도 도란의 벗은 몸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라.”
해범은 창백하게 질린 도란의 얼굴과 흉흉한 기세의 진사해를 번갈아 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매서운 살기가 어깨를 덮쳐, 달아나듯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도란아.”
사위가 조용해진 후 진사해는 도란을 고쳐 안았다. 따뜻한 체온에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의 떨림은 한결 잦아든 상태였다. 진사해는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 넣었다. 신이라 해도 인간을 단숨에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온기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신령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진사해를 알아본 듯, 도란이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숨결이 뜨겁게 부서졌다.
“놓지 마세요……. 저 추워요…….”
춥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도란이 더욱 가깝게 몸을 붙였다. 진사해의 옷자락을 붙드는 손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누구라도 두 뺨이 하얗게 질린 그녀를 혼자 침상에 두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사해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도란의 이마에 입술을 댄 그대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놓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자거라.”
“…….”
“깰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
그 말을 믿고 마음이 놓였을까. 도란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추상같은 명령 때문인지 누구도 연못 별채로 오지 않았다. 사위는 눈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진사해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도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 *
따뜻했다.
그리고 무척 포근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도란은 넉넉한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이 등을 다독거려 주었고, 가끔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손길이라 도란은 어리광을 부리듯 작게 신음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 한 조각이 떨어졌다. 나뭇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수면으로 떨어지듯, 톡.
‘어?’
웃음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눈꺼풀이 무겁고 몸도 천근만근이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끙끙거리자 아까부터 등을 토닥이던 손이 고개를 감싸듯 눌렀다.
“더 쉬어야지.”
너무 놀라서 눈이 번쩍 뜨였다.
도란은 머리를 들고 눈앞의 사내를 확인했다. 난감한 듯, 또 조금은 기꺼운 듯 엷게 웃고 있는 사내는 진사해였다. 꿈을 꾸나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려 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신령님……? 왜…….”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진사해의 말이 도리어 기억을 일깨웠다.
지신과 얼음 위에서 놀던 일, 갑자기 얼음이 깨지며 몸이 아래로 쑥 꺼졌던 사건, 도저히 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어 버둥거리며 죽어 가던 순간, 일순간에 박살 난 얼음 사이에서 나타나 자신의 손목을 잡아 주던 뜨거운 손까지.
그 뒤의 일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랐다. 무작정 춥다고 매달리는 자신의 옷을 진사해가 벗겨 주었다. 그는 체온을 나눠 주기 위해 함께 침상에 오르기까지 했다. 가지 말라고 졸랐던 일까지 떠오르자 도란의 낯이 붉어졌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는지 자신은 지금 확실하게 나신이었다. 이 상태로 신령님에게 계속 안겨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얼굴이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색했다. 그와 다투다시피 하고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니 민망하기도 했다.
“많이 놀랐을 테니 좀 더 쉬어야 한다. 춥지는 않고?”
도란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때 진사해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기분 탓일까, 그도 주저하는 것 같았다.
“열은 없구나.”
“네, 아프진 않아요…….”
“곧 발정기가 다가와 가금산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을까.”
염려 어린 음성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방에는 호롱불 하나 없이 달빛뿐이었다. 쓰러져 있는 동안 그새 밤이 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만 않을 뿐 몸이 피로하고 무거워서 바리원이나 만년설산은커녕 연못 별채 밖으로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다정한 진사해의 품에서 포근한 이불을 둘러쓰고 며칠이고 잠만 자고 싶었다.
막막한 마음에 대답을 미루던 도란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너무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가야겠죠?”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은은한 달빛이 흐르는 한밤, 진사해의 금빛 눈은 교교히 빛나고 있었다.
도란은 숨을 멈췄다. 지금까지는 당황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눈이 평소와 달랐다. 계속 바라보다가는 이대로 삼켜질 것만 같은 농밀한 빛이었다. 요사스러운 존재에게 홀린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가금산을 떠나야 할 때라는 말의 의미는.
‘지금은 신령님의 발정기…….’
인지하지 못했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도란은 이 향기를 기억했다. 침의 차림을 한 채 맨발로 가금산을 헤매게 만들었던, 마침내 진사해가 웅크린 깊은 연못으로 스스로 몸 던지게 했던 바로 그 향기였다.
어릴 때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네가 힘들다면 여기 머물러도 된다.”
진사해의 손이 검은 머리카락 위를 미끄러졌다. 분화구 화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둘의 시선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음성은 속삭이듯 낮았다.
“그런데 내가 널 위험하게 만들 것 같구나.”
그의 손이 그대로 이불 안까지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아주 천천히. 도란은 호흡까지 멈춘 채 맨살에 닿는 그의 손을 느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머리카락 끝에, 나긋한 등허리에 머물렀다. 조금 간지러웠다. 아니, 화인이 찍힌 듯 뜨거웠다.
곧 그가 주먹을 꾹 쥐며 손을 거두었다. 무언가를 무던히도 참아 내는 것처럼.
“네가 잠들어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
“가야겠다.”
진사해가 달아나듯 침상을 벗어났다. 그의 옷자락이 도란의 맨살을 스치며 스르르 멀어졌고, 방금까지 옆을 지키던 체온도 환각인 듯 사라졌다. 이불 안에 혼자 남은 도란은 자기도 모르게 그 환각의 소매를 붙들었다.
“신령님.”
발정기를 맞이한 신의 향이 도란을 홀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사로잡은 진사해의 금빛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가지 마세요.”
진사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발정기에 이렇게 괴로웠던 일이 없다. 열기가 지나쳐 차가운 연못 바닥에 웅크리곤 했지만 이렇게 힘겹지는 않았다.
“또 실수여도 좋으니까…… 옆에 있어 주세요…….”
소매를 붙든 여린 손을, 여전히 추위를 느끼는 듯 떨리는 연약한 육신을, 우담화 나무 아래서 마음을 거절당했을 때처럼 울 것만 같은 커다란 두 눈을.
그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도란아.”
그는 도란의 손을 잡았다. 산새처럼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심장이 크게 뛰었고 입이 바짝 말랐다. 처음 느껴 보는 생경한 감각이 그를 저몄다. 그는 묵직하고 뻐근한 아래를 느끼며 어느 때보다도 당혹했다.
“너는 내 기운에 홀려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몰라.”
“저 알아요.”
둘의 시선이 강하게 얽혔다. 도란은 진사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홀린 사람답지 않게 또렷했고, 그 또렷함이 진사해를 뒤흔들었다.
이불로 가리지 못한, 긴 목과 둥글고 흰 어깨가 진사해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란이 예전부터 말해 왔듯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붉은 연꽃처럼 만개한 그녀의 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진사해 자신에게 있었다.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도란이 직접 내주었다.
“신령님. 저 다 알아요.”
길어지는 정적에 도란이 낙담한 그때.
진사해의 손이 작은 얼굴을 감쌌다. 그는 어쩐지 힘겹게 웃고 있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도란이 두 손을 꽉 쥐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만큼 떨리기도 했다. 진사해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최후의 용기를 쥐어짰다.
“알아요……. 그냥 하룻밤인 것도, 이번에도 실수라고 하실 것도…….”
진사해의 눈가가 희미하게 이지러졌다. 대화를 하다 말고 바리원 얘기를 꺼내며 달아나던 도란이 떠올랐다. 이런 식의 오해를 했던 것이구나. 입이 쓴 한편 이제라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냥 하룻밤도, 실수도 아닐 것이다. 어제도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럼…….”
“가지 말라는 말을…….”
진사해의 엄지가 도란의 붉어진 눈가를 쓸었다. 복숭아처럼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찔하도록 어여쁘고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치미는 욕망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너를 마음에 두었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도란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가 곧 맹렬한 두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달래기 위한 허언 같았다. 그러나 도란은 잘 알고 있었다. 진사해는, 그녀가 사랑하는 신령님은 허언이나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연심을 고백하는 진사해의 음성은 너무나 뜨거워 델 것만 같았다.
“왜 바리원으로 가겠다고 했느냐.”
“…….”
“이제는 내가 싫어져 네 마음에 없을까.”
“그런……!”
“그렇다 해도 너를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폭압적인 말과는 달리, 그는 느릿하게 다가왔다. 도란의 이마에, 그 희디흰 살결에 입을 맞추기 위해서. 도란은 언제든 고개를 돌려 피할 수 있었고 몸을 뒤로 물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는 대신 터질 듯한 심장을 붙들고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에의 입맞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온기가 스몄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듯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배 속이 타는 듯 활활거렸다.
“도란아.”
둘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두 쌍의 눈은 하나인 듯 똑같이 떨리고 있었다. 도란은 어쩐지 신령님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긴장한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내 전부를 네게 준다고 약속하면.”
“…….”
“나와 혼인하겠느냐.”
도란의 숨이 뚝 멎었다.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아름다운 눈을 들여다보며 진사해가 미소 지었다. 순결한 달빛이 도란의 얼굴에 쏟아지자 마치 분칠한 것처럼 보였다. 혼례는 치르지도 않았는데, 화촉을 앞에 두고 단장한 신부 같았다.
싫다 하여도 그는 도란에게 겹겹의 혼례복을 입혀 붙잡을 테지만.
그래도 좋다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
“세세토록 나의 신부가 되어서, 함께 영원을 살자.”
도란의 두 눈에 은방울꽃 같은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발정기의 열을 앓는 신령님을 보며 딱 하룻밤뿐이라도 좋다고 여겼다. 짧은 밤이 지난 후 그가 다시 실수라 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붙잡았다. 그런데 지금 진사해는 영원을 말하고 있었다.
거절의 대답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래 품어 온 연정에 대한 보답이 꿈만 같았다.
“네…….”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을까 봐, 그녀는 지저귀듯 다시 화답했다.
“좋아요, 신령님…….”
진사해의 체온이 보드라운 구름처럼 밀려와 도란을 덮었다. 둘은 마음을 확인하듯 몸을 끌어안았다. 도란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달콤한 체향을 들이마셨다.
진사해는 밤 내내 그녀의 곁에 머물렀고 도란도 그의 품에 안착한 새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빛이 아스라이 스민 가금산의 밤은 길고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