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영원한 선택 (7/14)

7장. 영원한 선택

소야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해범의 입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라더니!’

지난번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때 진사해의 태도가 어떠했나. 입을 경솔하게 놀리지 말라며 드물게 화까지 내지 않았던가. 심지어 총애하는 가신인 해범도 질책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해범에게 전해 들은 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두 분이?”

소야는 정자에 앉은 해범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해범 역시 얼떨떨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먼 산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분명합니다. 제가 화로를 들고 갔을 때, 신령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떻게……!”

소야는 충격을 받아 혈색까지 달라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우리는 모를 수도 있지요. 소야 님도 애기 신부님과 내내 붙어 다닌 것은 아니고, 저도 가끔 가금산에 들르는 정도이니.”

소야도 아주 가끔 도란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다. 진사해 앞에서는 유난히 허둥거리고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도란이 진사해를 어려워하는 것이 한두 해 일이었던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가온산맥의 신령님을 어려워해서, 괜한 긴장에 실수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소야도 특별히 그녀의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애기 신부님이 저한테 마음을 얘기 안 했을 리 없어요!”

“그럼 애기 신부님이 마음 없이 신령님의 발정기를 함께 보내고 있단 말입니까?”

“그건…… 그거야…….”

소야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진사해가 그럴 성품이 아님은 잘 알지만, 그래도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도란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혹은 딸처럼 돌본 존재였다.

귀하게 키운 딸이 자신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사내의 손을 잡고 떠난 듯한 섭섭함마저 일어났다.

“소야 님.”

해범이 서투르게나마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일단은 기다려 보지요. 발정기가 끝나면 신령님도 애기 신부님도 뭐라고 말씀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소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바람 부는 정자에 앉아 침묵만 나누는 둘 위로, 눈부신 해가 밝아 오기 시작했다.

* * *

환한 햇볕이 도란의 잠을 깨웠다. 밤이 다 가도록 진사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른 품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리자, 새날의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일어났구나.”

햇살보다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자신을 품은 진사해와 눈이 마주쳤다. 미소 띤 얼굴을 본 순간 어째서인지 귓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발정기 때문에 괴로울 신령님 앞에서 잠이나 쿨쿨 잤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사해는 얼굴을 붉히는 도란이 사랑스럽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이제 춥지는 않고? 고뿔에라도 드는 건 아닐까 염려했는데.”

“네, 춥지는 않아요…….”

지신과 놀다가 연못에 빠진 일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사해의 손이 뺨을 덮어 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약차를 들이라 했으니, 마셔 보련.”

혼자서도 마실 수 있는데, 진사해는 먹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쑥스러워하는 도란의 입술에 따뜻한 잔이 닿아 왔다. 사레에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진사해의 손길이 무척 섬세해서, 또 그가 지금의 행동을 즐기는 것 같아서 도란도 잠자코 입을 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차가 입 안을 적셨다. 목이 말랐던 참이라 몇 모금 달게 삼켰는데, 거짓말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따뜻해요…….”

도란은 온기를 옮겨 오려는 듯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러자 어깨를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며 맨살이 드러났다. 진사해가 이불을 끌어 올려서 보얀 살결을 가려 주었다.

“소야가 좋아하겠구나.”

“……네? 소야 선녀님이요?”

“그래. 소야가 달인 약차다.”

“설마…… 설마 선녀님이 여기 오셨던 거예요?”

예상 밖의 반응에 진사해가 멈칫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말인데 도란은 얼굴빛까지 달리하며 놀라고 있었다. 그러더니 새삼스럽게 이불을 당겨 이미 다 가려진 몸을 가리기까지 했다. 어차피 소야는 아무것도 못 보았고, 가끔 도란의 목욕도 도와주었으니 설령 벗은 몸을 보였다 해도 상관없는 일인데도.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니 도란의 걱정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떡해요? 선녀님이 놀라셨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저희가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도란이 살짝 눈을 굴렸다. 어젯밤의 그가 허언을 했다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먼저 혼례 이야기를 꺼내는 건 망설여졌다. 진사해는 그녀의 심중에 박힌 염려를 읽어 내고 말을 수월하게 풀어 주었다.

“혼례를 올린다 하면 소야가 놀랄까 봐 이러느냐?”

“……네.”

진사해가 모호하게 웃었다. 약차를 들이던 소야의 행동이 떠올라서였다. 진사해가 연못 별채를 차지한 밤 내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신령을 보는 눈이 불손했었다. 꼭 외동딸 뺏어 간 불한당을 보는 눈빛이었다고나 할까.

안절부절못하는 도란이 귀여워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장난을 치고 말았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까 차를 가져올 때도 너무 놀라서 혼절하려고 하던데.”

“네에?”

도란의 눈이 놀란 다람쥐처럼 동그래졌다.

“얼마나 서운해하던지. 한동안은 소야의 원망을 들어 주느라 힘들겠구나.”

“선녀님이…….”

도란은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진사해에 대한 마음을 소야에게 숨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는 도란의 선녀님이기 이전에 진사해의 가신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 해도 소야 입장에서는 섭섭할 만도 했다. 지신보다, 석춘보다, 설연보다 훨씬 더 오래 도란을 알아 온 그녀가 아니었던가.

“화가 나신 건 아니겠죠……?”

“글쎄.”

모호한 대답에 도란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진사해를 보았는데, 그는 웃음을 꾹 참는 낯이었다. 도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웃으세요? 전 진지하다고요, 신령님.”

“소야의 일도 소야의 일이지만.”

진사해가 도란의 머리카락을 톡 건드렸다. 꽃봉오리를 어루만질 때처럼 조심스럽고도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우리 얘기도 해야지.”

“우리 얘기요? 저랑 신령님이요?”

“그래, 너와 신령님 얘기.”

장난스럽던 음성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나와 혼인해도 신령님이라고 부를 건지 궁금하구나.”

소야 걱정으로 어두웠던 도란의 안색이 꽃피듯 바뀌었다. 그녀는 진사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괜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

“나는 너를 부인이라 부를 텐데.”

“…….”

“말도 높일 텐데요, 부인.”

나긋한 존대에 도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진사해를 밀어 냈다. 물론 잎사귀 같은 손으로 그를 멀리 밀어 낼 수는 없어서, 그 몸짓은 작은 투정에 불과했다.

“하지 마세요!”

“왜, 싫어서?”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온몸이 간지러웠다. 가슴은 물론이고 깊은 배 속, 가는 목덜미, 심지어 가지런한 치아까지 간질거려 견디기 어려웠다. 심장이 지나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색하단 말이에요…….”

솔직한 고백에 진사해가 빙긋 웃었다. 그는 자신을 밀어 내려는 도란의 팔을 상냥하게 치우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익숙해져야지.”

“…….”

“혼인하면 뭐라고 부를지는, 네가 차차 고민해 보렴.”

꽃 도장 같은 입술이 도란의 이마에 닿았다. 도란은 그의 품에 만개한 연꽃처럼 발그레해졌다.

“그럴게요…….”

진사해의 낮은 웃음소리가 도란의 마음 깊은 곳으로 흘러들었다. 따뜻한 물처럼 고인 웃음은 오래도록 도란을 적셔 주었다. 그녀를 감싼 공기가 무척 포근해서, 도란은 창밖에서 기웃거리던 누군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새 걱정했더니.”

남몰래 그들을 지켜보던 지신은 안도 어린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진사해를 보는 눈은 곧 세모꼴로 변했다.

“뭘 잘했다고 웃어? 따지고 보면 애가 빠진 건 다 자기 탓인데.”

그녀는 흥흥 콧방귀를 뀌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언젠가 저놈의 이마에 정말로 딱밤을 먹이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말이다.

* * *

도란은 밥상을 앞에 두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깨를 솔솔 뿌린 잡채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아직 한 입도 먹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젓가락질 대신 상 너머에 뾰로통하게 앉은 소야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어, 선녀님.”

소야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턱을 얹었다. 그렇게 토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도 도란이 안 먹는 게 걱정되긴 하는지, 소야가 상을 힐끔 바라보았다.

“빨리 드세요, 애기 신부님.”

“선녀님은 같이 안 드세요?”

“전 입맛이 없네요.”

“저 때문에요……?”

도란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괜히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시, 신령님의 발정기에 함께 있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이요?”

“그, 그, 운우지락 같은…….”

도란이 뭐라고 하나 가만히 듣고 있던 소야는 자기도 모르게 콧숨으로 웃고 말았다. 애기 신부님이 저런 해명을 할 줄이야. 진사해와 도란이 신의 발정기 내내 함께하긴 했지만, 둘이 교합했다고 생각하는 가신은 하나도 없었다.

“알아요. 신령님이 혼례도 전에 몸을 합할 리 없으니까요.”

“그렇죠…….”

도란이 눈치를 살피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을 풀어 주려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소야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도란과 제대로 마주 앉았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왜 저한테는 얘기가 없었나, 제가 애기 신부님한테 별로 의지가 안 됐었나, 괜한 생각이 많아서 그래요.”

“의지가 안 된 게 아니에요! 전 그냥…….”

도란이 소야의 말을 황급히 부인했다. 그녀는 이제 젓가락에서 아예 손을 뗐다.

“짜, 짝사랑이어서 말하기 더 힘들었어요.”

소야가 아닌 화원에 자기 마음을 털어놓은 것도 그래서였다. 신령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닌데, 속상함을 토로하면 꼭 그를 험담하는 것 같으니까. 듣는 이 없다 여겼던 화원에 가서 이 말 저 말을 쏟아 내고 나면, 화살촉처럼 날카롭고 아픈 짝사랑도 조금 둥글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녀님이 의지가 안 된 게 아니에요…….”

도란에게 있어 소야는 지신보다, 설연보다, 석춘보다 각별했다. 처음 가금산에 왔을 때 가장 가까이 있어 준 사람도 소야였고, 머리를 빗겨 주고 아낌없이 칭찬해 주고 만년설산까지 함께 가 준 이도 소야였다.

어쩔 줄 몰라 눈물까지 글썽이는 도란을 보며 소야는 졌다는 듯 웃고 말았다.

“애기 신부님.”

“……네?”

“전 사실 애기 신부님이 언제까지나 우리 어린아이일 줄 알았어요. 아니, 그러길 바랐나 봐요.”

가금산에서 달리 맡은 일이 없어 지루하던 소야에게, 갑자기 맡겨진 도란은 무척 소중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할 일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도란을 사랑하게 되면서 일상이 특별해졌다. 그녀의 티 없는 웃음과 다정한 마음, 꾸밈없는 솔직함은 매일 보아도 고맙고 기특했다.

그렇게 함께한 도란이 다 자라 진사해와 맺어진다 생각하니 어린 딸이 떠나는 것처럼 서운했다. 그녀가 영원한 소녀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런 것을 바랐던가.

“자녀가 떠나면 부모는 괜히 마음이 허전하다고 하잖아요. 애기 신부님이 떠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더는 제가 젓가락질을 알려 주던 소녀가 아닌 것 같아서…….”

“…….”

“나도 참 주책이네. 제가 애기 신부님 엄마는 아닌데 말이에요.”

애써 가볍게 한 말에 도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심을 전하려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는 정말 선녀님을 가족처럼 생각했어요. 물론, 물론 선녀님은 신이고 저는 그냥 인간일 뿐이지만, 그래도요.”

“애기 신부님…….”

“미리 말 못 해서 죄송해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소야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자그마한 아이였던 도란이 언제 이렇게 자랐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야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가를 비벼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런 다음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써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말고도 아무도 몰랐던 거죠?”

“네?”

“신령님과의 관계요. 성샛골 따님도 몰랐죠?”

“네, 설연 님께 말한 적 없어요.”

“바리원 대무신령님 아들도?”

“석춘 님한테는 더 말한 적 없고요.”

“그럼 제가 처음으로 알게 된 거네요! 분화구 화원 지신도 몰랐을 테니까!”

“아, 지신님은…….”

도란이 어물어물 말을 흐리자 소야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알았던 거예요?”

“그게, 제가 화원에서 혼잣말을 많이 해서요. 지신님이 계신 줄 몰랐을 때부터.”

“그럼 제가 두 번째네요?”

“그, 그렇게 되나요?”

소야가 단단히 팔짱을 끼더니 홱 돌아앉았다. 짐짓 다시 토라진 척을 하는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너무해요, 애기 신부님.”

“아이, 선녀니임.”

도란이 밥상을 지나 소야의 팔에 매달렸다. 어깨에 뺨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듯 채근하자, 소야도 더 견디지 못하고 웃음 짓고 말았다.

“앞으로 신령님이 못되게 굴면 꼭 저한테 얘기해야 해요? 제가 가서 혼내 줄 테니까.”

소야는 도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매일 옥빗으로 빗기고 동백기름을 발라 주던 결 좋은 머리카락이 꼭 밤하늘처럼 고왔다. 이 까만 머리카락만큼은 도란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그리고 전 애기 신부님을 영원히 애기 신부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괜찮죠?”

도란이 소야를 꼭 끌어안았다. 기쁨 섞인 음성이 만개한 안개꽃처럼 소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네, 좋아요, 선녀님.”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 가는 밥상이 소야의 시야에 걸렸다. 소야는 도란의 팔을 풀어내며 큰일 났다는 듯 재촉했다.

“얼른 밥 먹어야죠! 우리 애기 신부님 배고플라.”

성화에 못 이겨 자리로 간 도란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소야는 잡채를 맛있게 먹는 애기 신부님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도란에게 처음 상을 차려 주었던 그날 같았다. 도란이 평생 애기로 남아 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행복하게 밥을 먹고 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싶었다.

* * *

[도란과 부부의 연을 맺으려고 합니다.]

진사해는 방금 쓴 문장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엇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새 종이를 꺼냈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 먹물을 듬뿍 머금었다.

[도란과 혼례를 올리려 합니다.]

한 획 한 획에 정성을 들였지만, 이 문장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사해는 쓰기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 어머니인 백청요에게 보낼 서한을 쓰는 중이었다. 도란과의 혼인을 준비하려면 어머니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하니 종이와 붓을 꺼냈는데, 막상 문장을 풀어 가려 하니 쉽지가 않았다.

등 뒤에서 고상한 음성이 들린 건 그때였다.

“무얼 그리 궁리하느냐?”

진사해가 낮게 웃었다. 매번 말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도무지 마중할 틈을 주는 법이 없었다. 글로 전하기에는 어려운 소식이 있었으니 차라리 이렇게 와 준 것에 고마워해야 할까.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어머니를 마주 보았다.

“어머니께 보낼 서신을 적고 있었습니다.”

“그래? 왜 네 발정기에 도란이 만년설산에 오지 않았는지 말해 주려 한 모양이지.”

“……그렇군요, 그것도 관련이 있습니다.”

백청요의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침묵이 이어졌다. 진사해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도란과 혼인을 약조했습니다.”

“뭐?”

“다가오는 봄에 혼례를 올리려 합니다. 만년설산에 이 소식을 전하려 했습니다.”

백청요의 턱이 뚝 떨어졌다. 그녀로서는 드문 감정의 동요였다.

진사해의 마음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갑자기 혼인을 약조했다니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도란이와 얘기가 된 거냐?”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 혼자 혼약한 건 아니고?”

“……어머니.”

진사해는 기가 차서 웃지도 못했다. 혼자 혼약한 게 아니냐니, 자신이 그런 바보 같은 사내로 보였던 것인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해 도란을 상처 입히고 멀리 보낼 뻔했으니 우둔한 짓을 많이도 하였다. 진사해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도란과 함께 약속한 겁니다.”

“그래서 발정기도 함께 보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걱정하지. 도란이가 워낙 작아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주 굶주린 탓일까, 도란은 열다섯 살 이후로 거의 크지 못했다. 신들의 세계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지금만큼도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와 진사해가 나란히 있으면 키 차이도, 덩치 차이도 상당했다. 백청요의 염려도 기우는 아니었다.

잠시 도란의 모습을 그려 보던 백청요가 품에서 비녀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에 도란에게 빌린 나무 비녀였다. 그게 도란의 물건임을 알아본 진사해의 미간이 좁아진 순간, 백청요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마침 나도 전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란의 부모님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혼을 찾았다고 해야겠지.”

백청요의 손에 들린 나무 비녀, 갑자기 도란의 부모 이야기를 하는 그녀.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진사해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일이 왜 어렵게 되었다고 하십니까. 도란이 기뻐할 텐데요.”

“둘 모두 환생하여 인세에 있더구나. 이번에도 부부의 연을 맺었어.”

진사해가 멈칫했다.

“그들의 소식을 알면, 또 그들이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걸 알면…… 도란이 인세로 떠나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백청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아들을 한참 응시했다. 그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어릴 때도 잘 보여 주지 않던 막막한 얼굴이었다. 진심이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백청요가 탄식하듯 물었다.

“아들아, 도란의 선택을 받을 자신이 있느냐?”

“…….”

“일단 나는 도란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와야겠다.”

돌아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진사해의 뒤에는 여전히 흰 종이 여러 장이 놓여 있었다. 도란과의 혼약을 알리는 글자가 가지런하게 새겨진 종이들이었다. 먹이 채 다 마르지도 않았다.

‘저희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그분들도 절 위해서 많이 울어 주셨을까 싶어서……. 편찮으셔도 좋으니 살아 계시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언젠가 도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얼마나 부모의 정을 그리워했는지 진사해도 잘 알았다. 그러니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할 도란을 떠올리며 함께 행복해야 하는데.

어쩐지 마음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 * *

연못 별채에서 백청요를 맞이한 도란은 두 손을 내밀어 비녀를 받았다. 방금 너무나 뜻밖의 소식을 들어 우두망찰한지라, 비녀를 품에 챙기면서도 자기가 무슨 정신인지 몰랐다. 백청요는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울 법도 하지.’

부모님의 혼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도란은 기껏해야 영혼 형태의 부모를 상상했을 것이다. 화원의 지신처럼 육신이 없는 부모와 감격적으로 재회하여 생전의 회포를 풀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터. 부모가 이미 다른 인간으로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말에 놀라고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래.”

도란의 얼굴에 명백한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백청요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은 전생을 기억하게 할 수 있단다.”

“네?”

“물론 신들의 법으로 금지된 일이지. 하지만 천제의 눈을 피해 내가 손을 써 볼 수 있다. 길면 한 시진 정도.”

“…….”

“인사라도 하겠느냐. 가금산에는 인세로 가는 길이 없으니, 내가 너를 데려다주마.”

도란은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백청요와 시선을 맞췄다.

“전생을 기억한다 해도, 그분들이 절 알아보실까요……. 제가 아기일 때 돌아가셨는데.”

“그건 내가 확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아도 좋겠지.”

백청요가 손을 내밀었다. 도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얼굴도 모르고 그리워만 했던 부모였다. 한 번이라도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그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그들의 살 내음을 맡고 체온을 느끼며 부모의 존재를 누릴 수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너무나 슬프겠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럼……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둘의 손이 겹쳐졌다. 백청요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몸이 지상에서 살짝 떨어졌다.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에 잠시 진사해를 떠올렸다. 잠깐 다녀오는 것이고 또 만년설산 신령님과 함께이니,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도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장승 앞에서 눈을 떴다.

“아…….”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선 두 개의 장승이 부리부리한 눈을 홉뜨고 도란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는 무서운 생김새라 하겠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도란의 눈에는 나무로 깎은 사나운 표정 너머의 온화한 미소가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하늘에서 오신 손님이네. 인간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만년설산을 다스리는 신령도 함께 왔어. 우리 마을 착한 인간에게 상이라도 주려고 왔을까? 정 씨네한테 상을 주면 좋겠네.”

“아니지, 정 씨네에게 상을 주려면 삼신할머니가 와야지. 왜 만년설산 신령이 온대?”

도란이 장승을 힐끔거리자 백청요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란의 어깨를 감싸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딘지는 내가 알고 있으니 함께 가 보자꾸나.”

“네. 어…….”

백청요를 돌아본 도란이 멈칫했다.

방금까지 백청요가 걸치고 있던 눈부신 백의가 평범한 무명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뿐인가, 고아한 머리 장식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비녀로 변한 뒤였다. 그녀의 분신인 듯 어깨에 앉아 있곤 하던 설조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놀라는 도란을 보며 백청요가 잔잔히 웃었다.

“인세에 오면 그에 맞게 변복을 해야지. 그래도 너는 가금산에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도란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가금산의 사랑받는 애기 신부님다운 곱고 눈부신 옷과 장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어디서 귀한 아가씨가 왔는지 궁금해하며 힐끔거릴 정도였다.

“저는 왜…….”

“부모님에게 고운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그렇게 말한 백청요가 도란의 옷깃을 매만져 주고 옷고름도 좀 더 단단히 고쳐 주었다. 깨끗하고 예쁜 옷과 청아한 낯빛을 본 그녀가 뿌듯한 듯 칭찬했다.

“그래, 꼭 선녀 같구나.”

그들은 좀 더 걸어 한 기와집 앞에 도착했다.

나무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같은 마을 사람을, 그리고 이 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환영하듯이. 대문 너머 마당은 조용했지만, 그 적막은 불길하다기보다는 아늑했다. 어질게 다스려지고 다복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공간 특유의 여유와 평온이 느껴졌다.

도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희 부모님이 여기 사시는 게…….”

말이 끝나기 전에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머리카락은 하나로 틀어 올렸고, 예상 밖의 손님을 보는 두 눈은 새벽처럼 맑았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복 있어 보였다. 도란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순하고 여리면서도 어딘지 야무진 데가 있는 인상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해 더 닮아 보였다.

백청요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 때문에 놀랄 법도 한데, 여인은 경계 대신 웃음을 건넸다.

“손님이 오셨네요? 저희 남편을 만나러 오셨나요? 아니면 저를?”

“그게, 저는…….”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마주친 어머니 앞에서, 도란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온 게 후회스러웠다. 적어도 무슨 말을 할지 정도는 생각해 뒀다면 좋았을 텐데.

도란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그때, 여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

갑자기 쏟아진 눈물에 당황한 건 도란뿐만이 아니었다. 여인 역시 자신이 왜 우는지 알지 못하는 듯, 손을 들어 젖은 눈가를 더듬거렸다. 그런데도 눈물이 멎지 않아서 여인은 소매로 뺨을 닦아 내야 했다.

“잠시만, 죄송해요.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프지…….”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눈물은 더욱 심하게 쏟아지고 흐느낌도 점점 애달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란의 마음도 넘칠 듯 일렁거렸다.

“부인, 누가 온 모양이지요?”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사내가 여인 뒤에서 쑥 나타났다. 키가 진사해만큼이나 큰 그는 울고 있는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내의 어깨를 감싼 그가 도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 손님이 왔기에 이렇게 울고 있습니까?”

도란을 본 남자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곧 그의 커다란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처럼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알 수 없는 괴로움과 그리움, 회한에 잠겨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아니, 이게 왜, 눈물이 왜…….”

나란히 우는 부부를 보던 백청요가 도란에게 나직하게 조언했다.

“비녀를 주어라. 그걸 매개로 잠시 전생의 기억을 돌려주마.”

도란은 곧장 그 말에 따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우는 부모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지난 생에 지켜 주지 못한 아이의 일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새로 얻은 생에서조차 아이를 잊지 못해 이렇게 울음을 토할까. 괜히 전생을 기억하게 해 더한 슬픔을 주느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도란의 망설임을 지켜보던 백청요가 긴 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한이 혼의 응어리로 맺혔을 거다. 풀어 주는 게 낫지 않겠니.”

도란은 겨우 품에 있던 비녀를 꺼냈다. 부모님을 부르며 수천 번, 수만 번 매만졌던 유품을 건네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입을 열면 곧바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도란은 아무 말 없이 비녀를 어머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 아…….”

비녀를 받은 여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꿈을 꾸는 듯, 혹은 꿈을 기억해 내는 듯 몽롱하게 풀렸던 눈에 머잖아 빛이 돌아왔다. 그 순간 여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인간, 전생에 자신이 기르지 못한 딸을 앞에 둔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내 딸아, 도란아!”

여인이 와락 달려들어 도란을 끌어안았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도란을 감은 팔은 나무뿌리처럼 단단했다. 다시는 딸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다시는 이 인연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도란은 어머니를 마주 안지도 못하고 얼떨떨하게 굳은 채, 아버지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줍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 딸, 내 딸……. 이렇게 자랐구나. 이렇게 자랐어. 갓난아이 때 두고 떠나야 했지만 이 어미는 너를 언제든 알아볼 수 있어. 네가 할머니가 되었어도 알아봤을 거야. 아, 내 도란아!”

어머니는 정신없이 도란의 얼굴을 매만지며 피맺힌 울음을 토했다. 자신과 꼭 닮은 아가씨를 닳도록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토혈할 듯 울어 젖혔다.

“도란아……!”

아버지의 손에서 비녀가 떨어졌다. 장대한 사내가 성큼 다가와 아내와 딸을 한 품에 안았다. 거세게 안겨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 막혔지만 도란은 몸부림치지 않았다. 대신 그 버겁고 아득한 힘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도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도란아, 너를 두고 가면서 내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없이 살아갈 네 모진 삶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어미도 아비도 없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족의 울음소리는 하나가 되어 높이 솟구치고 낮게 깔렸다. 그들 역시 잠시 한 덩어리가 되었다. 헤어져 살아야 했던 오랜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그리움과 통한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딸을 안은 채로, 또 남편에게 안긴 채로 풀썩 쓰러졌다.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어머니는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모진 운명을 원망하고,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는 천리에 감사하면서, 오래도록.

“도란아, 어미를 불러 보아라. 이 어머니를 불러 봐, 엄마라고 불러 봐……. 응?”

도란이 눈물 젖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혼자서는 엄마, 아빠, 하고 수없이 불렀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에 고개를 묻고 힘겹게 입을 벌렸다.

“어…… 엄마…….”

“내 새끼. 내 새끼……!”

어머니는 도란을 있는 힘껏 껴안고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외쳐 불렀다. 도란은 눈이 짓무르도록 울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아빠…… 아빠!”

아버지의 입에서 짐승 같은 대곡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울고 웃고 또 울고 웃으면서, 지난 생에서는 부를 수 없었던 이름을 마음껏 외쳐 불렀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백청요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며 뒤로 돌아섰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와 많이 무뎌졌다 여겼는데, 지금만큼은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본래 인간에게 전생의 기억을 돌려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지금도 천제의 눈을 피해 잠시 편법을 쓴 것이라 곧 기억을 다시 앗아야 하겠지만…….

지금의 이 광경을 본다면 천제도 한 시진 정도는 모르는 척 눈감아 줄 것이라고, 백청요는 생각했다.

* * *

도란의 어머니는 직접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 분주하게 상을 차려 냈다. 아버지 역시 능숙한 솜씨로 일을 거들며, 부엌 근처를 서성이는 도란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거듭 손짓했다.

“도란아, 가서 쉬고 있으래도.”

“여기 있고 싶어서 그래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다. 도란의 마음을 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식을 준비하는 그들의 손이 더욱 분주해졌다.

서둘러 만든 시금치나물과 애호박무침, 보기 좋게 덜어 낸 장아찌, 노릇노릇하게 구운 조기, 푹푹 끓인 된장찌개, 마른 김과 깨와 파를 뿌린 양념장, 윤기가 흐르는 흰 쌀밥 한 공기…….

상이 다 차려지자 그들은 도란을 안채로 데려갔다. 그런 다음 숟가락까지 손에 쥐여 주었다.

“우리 아가가 배고프겠다. 응? 어서 먹어야지.”

“같이 안 드세요?”

“우리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하지만…….”

도란은 바로 식사를 시작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만년설산 신령님은 딱 한 시진을 약속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으니 밥만 먹고 곧장 일어나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게 부모님과 함께 식사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우리 같이 먹어요, 네?”

“너 배고플 텐데 어서 먹어야지.”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도란아.”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혹시…… 돌아가야 해서 그러니?”

도란이 멈칫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말을 듣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을 찰싹 때렸다.

“당신은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이제 막 온 애가 대관절 어딜 간다고요. 도란아, 이 밥 먹고 자리 펴 줄 테니 한숨 푹 자야지. 이제 이 집에서 셋이 함께 살자. 너 살아온 곡절도 듣고 하려면 몇 년을 밤새 얘기해도 모자라.”

헤어지지 않을 미래를 얘기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란은 다시 치솟는 뜨거운 울음을 삼키며 겨우 숟가락을 들었다. 아무래도 밥상을 맛있게 비워 내는 걸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잘 먹네, 내 새끼. 내가 너한테 밥상 한 번 못 차려 주고…….”

“부인, 울지 마세요. 애가 슬퍼하잖아요.”

다시 눈물을 찍어 내기 시작한 어머니의 등을 다독거리며 아버지가 애써 웃음 지었다. 그러자 어머니도 금세 마음을 수습하고 젖어 드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래요, 이제 울 필요가 없지. 도란아, 우리가 혼인하고 몇 해가 가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근심했는데, 그게 다 널 못 잊어 그랬나 보다. 우리 집에 애기는 하나뿐이지. 암, 너 하나뿐이야.”

“엄마…….”

“어릴 때 못 해 준 것 다 해 주마. 좋은 옷도 사다 입히고 맛난 것도 해다 먹이고, 너 이렇게 예쁘고 곱게 길러 주신 분들한테 같이 인사도 가고 그래야지. 멋진 신랑감 골라서 시집도……. 아니, 아니야. 우리 여기서 같이 늙자. 엄마는 이제 너 어디에도 못 보내.”

차마 가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곧 전생을 잊게 되리라는 말도 목에 턱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도란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밥도 국도 반찬도 너무 맛있었다. 가금산에서 먹던 음식보다, 성샛골 곶감보다, 천상의 진미보다 맛나고 달았다.

빈 상을 한쪽에 치우고 도란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궁금해하는 얘기를 해 드렸다.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물론 뱀말에서 노예처럼 천대받으며 팔려 갈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신을 만나 그의 땅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무척 귀하게 사랑받았으며, 화원을 맡아 꽃도 피웠고, 좋은 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를 뵈러 왔다는 말만 했다.

뜻밖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도란의 말을 완전히 믿었다. 하기야, 전생을 기억해 낸 데다 도란이 공중에서 나타나 집을 찾아왔으니 믿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면 그분께 어떻게 인사를 드리나. 그 산으로 찾아가면 뵐 수 있을까? 우리 아기를 이렇게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꼭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엄마…….”

이제는 미룰 수 없었다. 도란은 서글픈 표정을 한 아버지와 한 차례 시선을 교환한 후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원래 이렇게 전생의 기억을 돌려주는 건 안 되는 일이래요. 절 도와주신 신령님도 한 시진…… 딱 한 시진만 약속하셨어요.”

“뭐? 그게 무슨 뜻이니?”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랑 아빠가 예전처럼 저를 잊어버리게…….”

“안 돼! 안 된다, 도란아!”

어머니가 발작처럼 상체를 세웠다. 아버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꼭 안아 진정시켰다. 남편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서럽게 헐떡거렸다.

“도란아,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 이제 겨우 따뜻한 밥 한 끼 먹였는데…….”

도란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잊힌 존재가 되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행복한 삶과 순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잠시 만나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엄마, 이제 제 걱정은 말고 잘 사셔야 해요. 아이도, 아이도 곧 가지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도란아!”

어머니는 도란을 안고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애통해서 도란도 겨우 추스른 눈물을 훔쳐야 했다. 백청요가 약속한 한 시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도란아.”

그때 아버지가 도란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밝은 표정이었다.

“우리가 너를 잊는다고 꼭 돌아가야 하니? 우리 옆에서 살면 어떨까, 응?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에는 네가 남아 있다. 이 집에서 함께 살자꾸나. 안 된다면 이웃집에서라도, 이 마을에서 같이 살자.”

어머니도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도란은 간절하기까지 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 * *

집 밖에 있던 백청요가 갑작스러운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사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게 바꾼 눈을 보며 백청요가 한숨지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말씀은 해 주시고 데려가셨어야죠. 놀라지 않았습니까.”

“결국 잘 찾아오지 않았느냐.”

“도란이는 제가 데려갈 테니 어머니는 먼저 가십시오.”

백청요의 눈썹이 살짝 솟아올랐다. 그녀는 집을 등지고 아들과 마주 보았다. 장성한 아들을 보는 눈에 의심이 맺혀 있었다.

“왜. 이 어미를 못 믿니? 도란을 다시 가금산으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봐? 인세에서 평생 살게 할까 봐?”

“……어머니.”

“아니면 불안해서 달려왔느냐.”

백청요가 진사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은근했다.

“도란이 네가 아닌 부모를 선택할까 봐?”

진사해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어머니와의 거리를 벌렸다. 백청요는 더 압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가십시오. 어차피 곧 기억을 거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도란이 하고 싶다는 대로 두어라.”

“…….”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 그게 연정이다.”

대답하기도 전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만년설산의 눈보라가 휘몰아친 듯한 착각이 인 후, 백청요는 완전히 사라졌다. 도란의 부모에게 잠시 돌려주었던 전생의 기억과 함께.

진사해는 못 박힌 듯 서서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귓가를 저몄다. 추위를 느끼며 꽤 오랜 시간 기다린 것 같은데 도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도란이 부모 곁에서 살고 싶지 않겠느냐고 묻던 백청요가 떠올랐다. 도란이 이대로 나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다렸다. 도란이 거절당하고도 마음을 접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도란을 데려올 수도 있었다. 싫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를 안아 가금산으로 갈 수도 있었다. 나와 혼인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천금 같은 약조를 저버리는 것이냐고 죄책감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사해는 그중 무엇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선택받기를 기다렸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므로.

칼바람이 불었고,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하늘에 빗금을 그으며 새들이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신령님?”

눈가를 붉게 물들인 도란이 대문을 넘어 걸어 나왔다.

숨이 턱 멎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가오는 도란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프다기보다는 후련해 보이는 그의 신부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 때까지.

“저 데리러 오신 거예요?”

진사해는 허공에 뜬 그 자그마한 손을 붙들었다. 이대로 가금산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도란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도란이 인세에, 부모의 곁에 미련을 두기 전에.

그러나 백청요의 말이 옳았다.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하는 것이 연정이었다. 그래서 진사해는 괴롭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머물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물론 그는 도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낮에는 부모님의 곁에서, 밤에는 내 곁에서 살아 준다고 약속한다면…….”

“네?”

“인세에 산다 해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한동안 진사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 그 잠시의 침묵이 진사해를 얼마나 두렵게 했는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

“부모님께 혼인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작별 인사도 했고요.”

도란은 진사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둘의 손은 여전히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부모님이 저를 못 잊어서 아이를 못 가지신 것 같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녀는 순리나 진리 같은 어려운 것은 잘 몰랐다. 그래도 금실 좋은 부모님이 전생의 한 때문에 새로운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환생하여 새 몸을 입었고, 이제는 새 삶을 살아가야 했다. 과거에 지켜 주지 못한 아이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일은 기억을 되찾은 잠시로 족했다.

“인사할 수 있어서, 엄마 아빠라고 불러 볼 수 있어서, 저는 그것만으로도…….”

도란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진사해는 팔을 뻗어 도란을 깊이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서 도란은 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애써 참았던 마지막 울음을 쏟아 냈다.

가지 말라고 슬퍼하는 부모님 앞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울면 부모님도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진사해의 품에서는, 그녀와 혼인할 신령님의 품에서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후련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수많은 감정에 파묻힌 도란은 진사해의 품에 의지했다. 진사해는 그녀의 울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차가운 바람을 막고 서서 오래오래.

“저를 데려가 주세요.”

울음으로 뜨거워진 도란의 이마가 진사해의 가슴에 닿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눈물이 덜 마른 눈을 들어 진사해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슬프지 않은 곳으로 가요.”

언젠가 진사해가 건넨 위로를 그대로 옮기며 도란이 웃어 보였다.

곧 둘의 몸이 하늘로 떠오르며 안개처럼 흐려졌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진사해는 지친 도란을 연못 별채의 침상에 눕혀 주었다. 가금산으로 오는 동안 깊이 잠들어 깨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침상에 눕자마자 바로 눈을 떴다. 감정을 쏟아 내느라 지쳤는지 고단해 보이기는 했지만 졸음기는 거의 없었다.

“좀 더 옆에 있어 주세요.”

도란은 옆으로 꾸물꾸물 움직여 진사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진사해는 잠자코 그곳에 앉아 도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눈물 자국이 덜 가신 뺨도 한 번 쓸어 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고였다. 진사해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깜빡거리던 도란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안 돌아올 줄 아셨어요?”

진사해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러나 도란은 미소 말고 답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 건가요?”

커다란 사내의 손이 도란의 손을 덮었다. 진사해는 그 모습 그대로 한참 말을 골랐다.

“부모님 옆에서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걸 원한다면 내가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인세와 가금산을 오가려고 하셨어요?”

“그래.”

아무리 신이라도 그건 힘들지 않을까. 도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사해가 덧붙였다.

“너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

“설령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도란이 빙긋 웃었다. 진사해의 손에 덮인 그녀의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마치 그의 마음을 두드리듯이.

“신령님도 그런 생각을 하세요?”

진사해가 도란의 손을 들어 보드라운 손등에 살짝 입술을 댔다. 따뜻했고, 어쩐지 조금 간지럽기도 했다.

“물론 하지. 너는 언제든 나를 택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선택할게요.”

도란이 진사해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밤하늘의 별이 쏟아진 듯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울음으로 붉어졌던 눈가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영원히 그럴게요.”

시선이 얽히고 숨결이 엮였다. 도란은 자신의 뺨을 감싸는 진사해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해처럼 달처럼 다가오는 그를 받아들였다.

진사해의 선택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선택 역시 영원하리라는 것도. 창밖에는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봄이 온 듯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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