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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8/14)

후일담

진사해의 신궁이 있는 가금산은 물론이고 가온산맥 전체가 새로운 소식으로 술렁거렸다. 가신들은 모이기만 하면 신령님과 애기 신부님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모두 다가올 혼례식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점은 같았지만, 유별나게 구는 가신들도 없지는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표현 방식의 차이일 뿐 도란을 보아 온 가신들 대부분이 ‘유별나게’ 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가장 먼저 표현한 이는 진사해와 가까운 해범이었다. 작정하고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름난 포목상을 불러들여 도란의 혼례복을 지을 비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말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신령님.”

“왔구나.”

진사해는 보던 비단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해범을 맞았다. 해범은 긴 탁상을 채운 색색의 비단을 한 번, 싱글벙글 웃고 있는 포목상을 한 번, 중대한 문제라도 푸는 듯 심각한 진사해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네 부인과 함께 혼례식 준비를 도와주었으면 해서 불렀다.”

지난번에 살짝 떠보았을 때는 도란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정색을 하시더니. 소문을 퍼뜨린 자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말까지 하며 으름장을 놓던 그가 떠올라, 해범은 답지 않게 한마디 내놓고 말았다.

“일전에는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구름무늬가 좋을까, 꽃무늬가 좋을까 고심하던 진사해가 멈칫했다. 무례한 참견을 한다고 질책할지도 모른다 싶었는데 돌아온 답은 덤덤했다.

“그때는 실제로 아니었으니까.”

“…….”

“왜, 내가 도란의 짝으로 마음에 차지 않느냐? 너희의 애기 신부님을 도둑질하는 것 같아 못마땅한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니라……!”

해범이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진사해는 잔잔히 웃고 있었다.

“농이다, 해범아.”

“……왜 놀라게 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딸 훔쳐 가는 사내 보듯 하는 건 사실이 아니냐.”

해범이 지레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도란이 누구와 혼인했어도 가신들의 반응은 똑같았을 것이다. 그야 가온산맥 모두의 막냇동생처럼 자란 도란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도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신령님과 혼인한다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니, 다들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과격하고 경솔한 가신은 진사해가 순진한 애기 신부님에게 먼저 ‘수작을 부린’ 게 아니냐는 말까지 입에 담았다.

가신들끼리 나눈 이야기니 진사해가 거기까지 알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괜스레 불안해졌다. 해범은 조용히 진사해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나쁜 기색 없는, 깊은 물처럼 잠잠한 표정에 마음을 놓으려던 그때.

“너희 말대로 내가 수작을 부린 것도 사실이고.”

해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나 진사해는 비단을 보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수작이었다. 도란 앞에서 작정하고 검무를 선보인 것이나, 성샛골에서 손을 맞잡고 걸은 것이나, 함께 인세로 갔을 때 머리 장식을 선물하며 정인 놀음을 한 것이나.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도 그는 도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당분간은 떠들게 두어라. 악심으로 하는 말도 아니고.”

진사해는 구름무늬 비단을 들어 포목상에게 건네주었다. 포목상이 냉큼 허리를 구부리며 그 비단을 따로 챙겼다.

“도란을 아껴 주는 이들이 많으니 나도 좋고.”

해범은 한숨 돌린 표정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사해는 가신들이 떠들게 두라고 했지만, 해범의 생각은 달랐다. 진사해가 알게 모르게 다 듣고 있는 이상, 아무래도 입단속을 좀 해야 할 성싶었다.

* * *

진사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해범을 보냈더니 소야가 찾아온 탓이었다. 소야는 애기 신부님에게 풀지 못한 섭섭함을 제 신령에게 다 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못 받아 줄 거야 없었지만 이쪽은 해범과 달리 신을 어려워하는 성정이 아니라 말이 훨씬 더 많고 요란했다.

“제가 처음부터 알아봤지요. 기억하시죠? 애기 신부님을 안고 오시자마자 제가 그랬잖아요. 드디어 신부를 보쌈해 오셨다고.”

“…….”

“아니라고, 열다섯 살짜리 어린애라고 하시면서 버럭 화를 내시더니.”

그날을 떠올린 진사해가 피식 웃었다. 그때는 도란과 혼인할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애기 신부님’ 운운하는 가신들에게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는데,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말한 대로 되었다.

진사해가 말을 가로막지 않고 화도 내지 않자 소야는 좀 더 과감해졌다. 그녀는 진사해의 서안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며 재잘거렸다.

“애기 신부님도 참. 사내를 많이 안 만나 보셔서 실수하신 건 아닌지 몰라.”

진사해 정도의 사내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괜히 미운 소리가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발언이었는데도 진사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것보다는 낫지만요. 그래도 다들 애기 신부님이 혼인 안 하길 바랐나 봐요. 말들이 많아요.”

“그럴 만도 하지. 다들 손위 형제처럼 도란을 돌봤으니.”

“그렇죠.”

“그래서 너도 내가 성에 안 찬다고 투덜거리러 온 것이 아니냐.”

“……우리 애기 신부님이 아깝긴 하죠. 누구한테든 아깝지만.”

대체 누구의 가신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진사해는 달리 성을 내지 않았다. 신령님이 드물게 말을 다 받아 주자 소야는 작정을 하고 조잘거렸다.

“애기 신부님께 신령님 어디가 좋으냐고 물어봤거든요.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지?”

진사해가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멈칫한 소야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령님이 먼저 말씀해 보세요. 애기 신부님 어디가 좋으세요?”

“어여쁘고 착하고.”

“…….”

“용기 있고 다정하고.”

“…….”

“안 좋은 것이 하나도 없지. 너도 알겠지만, 도란은 도란이니까.”

소야가 입을 딱 벌렸다. 당황하고 쑥스러워하는 신령님이 보고 싶어 짓궂게 물은 것인데,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낯간지러운 대답을 했다. 심지어 당연한 말을 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재미는 없었지만 괜히 얼굴이 붉어지긴 했다.

“이런 면도 있으셨어요?”

“무엇이?”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소야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전 이만 갈게요. 할 일이 생각나서.”

“소야, 잠깐.”

일어나던 소야가 멈칫하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혼례식 때 네가 맡아 줘야 할 일이 있다.”

“혼례식 준비는 해범 님 부부에게 맡기신 걸로 아는데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해범보다는 네가 하는 게 더 좋을 일이라.”

소야는 아주 중요한 소임을 맡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까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허리를 곧게 폈다.

“혼례 날, 인세에 좀 다녀와야겠다.”

* * *

도란은 다 지어진 혼례복을 몇 번이나 쓸어 보았다. 붉은 비단으로 활옷을 만들고, 소매에는 청색, 황색, 녹색, 석죽색 비단을 새로 덧대 장식했다. 흰 한삼에는 모란과 나비, 새를 수놓았고 바다처럼 푸른 대란치마에는 금실로 무늬를 입혔다. 연꽃을 조각해 장식한 비녀에는 은은한 광택이 돌았으며, 그 비녀 양쪽에 늘어뜨릴 드림댕기에는 복(福) 자를 놓았다. 활옷 안에 입을 삼회장저고리는 봄날 산수유처럼 노란색이었고, 화려한 칠보로 장식한 화관은 보물이라 이를 만했다.

처음 받았을 때는 보기만 해도 닳을까 아까웠는데, 이제는 매일 바라보고 매만져 보는 지경이었다. 다가올 미래, 진사해와 함께할 삶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컸다.

“또 그거 보고 있어?”

기척도 없이 바닥에서 쑥 솟아오른 지신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도란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갛게 웃었다.

“봐도 봐도 좋아서요.”

“아주 입고 다니지 그래? 활옷이야 거추장스러워도 저고리 정도는 입고 다닐 수 있잖아.”

“중요한 날 입는 옷이잖아요.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신랑한테 새로 지어 달라고 하면 되지.”

“신랑이라니…….”

도란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초야를 앞둔 새색시 같은 모습에 지신이 끌끌 혀를 찼다.

“근데 그놈 혼인해서도 너한테 그럴 건가?”

“그러다뇨?”

“예의 없이 도란아, 도란아 할 거냐고. 반말이나 찍찍 하면서 말이야.”

혼인하면 부인이라고 부르겠다고, 말도 높일 거라고 하던 진사해가 떠올라 도란은 또 웃었다.

아주 무슨 말만 하면 좋아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구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지신이 도란의 팔을 콱 잡았다.

“너 혼인해서도 사내한테 네네 하면 큰일 난다. 응? 따박따박 대꾸도 하고 그래야 돼. 체통 없이 이름 불러 대면 도끼눈도 뜨고 그러란 말이야.”

“전 이름 불러 주시는 게 좋은데.”

뱀말에서 그녀는 항상 ‘도란이 년’이었다. 길섶의 애기똥풀이나 강아지풀도 그렇게 천하게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야 도란은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름은 내가 많이 불러 줄 테니까. 네 다른 벗들도 자주 부르잖아.”

“그건 그래요.”

도란은 지신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면서 보얀 뺨을 몇 차례 비비적거렸다. 지신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지만, 정답게 구는 도란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지신님.”

“갑자기 뭐가?”

“그냥…… 전부 다.”

처음 사귄 벗이었다. 듣는 이 있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댄 말을, 투덜거리면서도 전부 귀담아들어 준 존재였다. 진사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지신만은 목청을 높여서 욕을 해 주고 편을 들어 주었다.

“차, 참 나. 그래, 고마울 만도 하지. 결국 혼인할 거면서 거절당해서 슬프다며 울기나 하고 말이야.”

입으로는 타박하면서도 지신은 도란의 머리를 다독거려 주었다.

“아무튼 진사해 그놈은 시집살이 호되게 할 줄 알아. 나만 벼르고 있겠어? 가신들도 다 똑같을걸.”

처가살이도 아니고 시집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도란이 고개를 새처럼 갸우뚱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지신이 문득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니, 뱀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해야 하나?”

“네?”

“난 간다.”

지신이 휙 솟구쳐 사라졌다. 혼자 남은 도란이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으니 곧 목소리가 들렸다.

“도란아.”

기대하지 않았던 음성에, 도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폴짝 뛰어 문으로 다가간 그녀는 기쁘게 피어난 얼굴로 진사해를 맞이했다.

“신령님!”

진사해가 한쪽 팔로 부드럽게 도란을 감싸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나란히 걸터앉은 후에도 그는 도란을 잡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물을 준비하는 중인데, 받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예물…….”

어쩐지 혼례복을 쓰다듬을 때보다 혼인이 더욱 실감 났다. 분화구 화원에 봄꽃이 만개하면 정말로 진사해와 가약을 맺는 것이다. 도란은 진사해를 힐끔힐끔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 본 건 없어요. 신령님이 주시면 뭐든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성의껏 골라야겠구나.”

진사해는 재촉하지 않고 도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를 살피던 도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신령님. 저희 만년설산에 인사는 언제 가나요?”

“……만년설산에? 인사?”

“네. 만년설산 신령님께 인사를 드려야죠.”

“새삼스럽게 인사를 나눌 만큼 낯선 사이는 아니라 여겼는데.”

“그래도 도리라는 게 있잖아요.”

도란이 또랑또랑하게 주장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사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인사를 가도 어머니는 바쁘실 거다.”

“네? 왜요?”

“네게 줄 선물을 준비하시는 것 같던데, 정확히는 못 들었구나.”

“선물이요? 만년설산 신령님께서 저한테요?”

“어머니도 널 많이 아끼셨으니 특별한 걸 해 주고 싶으시겠지.”

“그래도…… 원래 제가 드려야 하는데.”

“네가? 어머니께?”

“예단 말이에요.”

열다섯 살에 인세를 떠났지만 도란도 알 건 다 알았다. 뱀말에서 예단이니 수공비니 하는 일로 몇 차례 싸움이 난 걸 보아서였다. 작고 가난한 마을인데도 혼인의 형식은 어찌나 꼬장꼬장하게 챙겼는지, 옆에서 보던 도란조차 진력이 날 정도였다.

도란이 뭘 걱정하는지 깨달은 진사해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그가 도란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거렸다.

“여기는 인세가 아니니 그런 형식에 너무 마음 쓸 필요 없다. 혼례 날 네가 기쁘면 되었지.”

그래도 도란은 지금이라도 예단 이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왠지 만년설산 신령님이라면 비뚤비뚤하게 바느질된 자국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웃어 버릴 것 같았다. 도란을 가리켜 다 자란 여인이 되었다고 하다가도 이 어린 걸 어쩔까 고개를 젓던 그녀를 생각하면, 얌전히 앉아서 선물을 받는 걸 더 기특하게 여기실지도 모른다.

“도란아.”

진사해가 풀어 내린 도란의 머리카락을 톡톡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요즘의 그는 가끔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곤 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또 혼인하면 이런 일이 더 많을 텐데, 도란은 이런 순간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야가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하더구나.”

“무슨 얘기요?”

“네게 내가 왜 좋으냐고 물었다던데.”

도란의 얼굴로 확 열이 올랐다. 소야가 하도 물어서 소곤소곤 말해 준 것인데 그 얘기가 진사해 귀에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아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

“응?”

잘 안 들린다는 듯 진사해가 몸을 가까이 숙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옆얼굴을 보자 도란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자, 잘생겨서요.”

“…….”

진사해는 이후로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도란은 괜히 한 뼘 물러나 앉았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진사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아니 괜히 장난기가 동했다.

“나는 네가 어여쁘고 착하고, 용기 있고 다정하여 좋다고 하였는데.”

“…….”

“네 모든 것이 좋다고 하였는데, 너는 얼굴이 가장 중요하구나.”

“그런…… 그건 아니고요.”

“앞으로 매일 미안수도 빼놓지 않고 바르고 입술도 그려야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네 마음이 식을지도 모르니까.”

낙담한 어조에 도란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웃음기가 덜 가신 진사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놀림당했음을 안 도란이 이파리 같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놀랐잖아요.”

“나도 놀랐는데. 네가 내 얼굴만 좋다고 해서.”

“신령님!”

도란이 다시 한번 진사해를 밀었다. 그런데 그때 진사해가 몸에 힘을 빼는 바람에, 둘은 한 덩어리가 되어 침상에 넘어졌다. 갑자기 진사해의 가슴팍에 기대게 된 도란이 서둘러 일어나려 하자 그가 가만히 등을 눌러 머물게 했다.

서로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가올 혼례를, 부부가 되는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봄이 오면 좋겠어요.”

진사해는 속삭이는 도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나도 그렇구나.”

둘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포근한 정적 속에 머물렀다. 봄은 머잖아 올 것이었다.

* * *

정 씨 부부는 장군 마을에서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어린 나이에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인했는데, 화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택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노복들마저 낯빛이 밝았다. 손대는 일마다 축복이라도 받은 듯 평탄히 이루어지니, 안 그래도 많던 재물은 더욱 늘어나 가히 천석꾼이라 할 만했다. 인심은 또 어찌나 후한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나 나그네를 위해 대문을 늘 열어 놓고 살았다. 같은 마을은 물론 이웃 마을에까지 미담이 전해졌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도 근심이 한 가지 있었다. 도무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들마저 하늘이 정 씨 부부에게 상을 내리려면 아이를 점지해야 한다고 수군거렸으니, 그들의 근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했다.

사람의 걱정이 얼마나 어둡고 무겁든,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돌고 도는 법. 목련이 단장한 여인처럼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이 찾아왔다. 아침마다 봄비에 젖은 흙 내음이 코를 간지럽혀 달콤한 재채기가 나는, 그런 유순한 계절이었다.

유난히 포근하던 그 봄날. 정씨 부인은 내당 창가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쪼이다가 깜빡 졸고 말았다. 부지런한 부인에게는 드문 일이었지만, 바람이 다가와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부인. 그리고 어르신.”

낯선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정씨 부인은 탁 트인 들판에 서서 남편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일곱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소녀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부부가 엉겁결에 아이에게 맞절할 정도로 정중한 인사였다. 마치 선녀처럼 곱게 차려입은 소녀는 당황하는 그들을 보더니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가실까요?”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어쩐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부부는 앞장선 소녀의 뒤를 한 발 한 발 따라갔다. 기이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고,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마치 무거운 육신을 잠깐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듯했다.

길섶에는 색색의 들꽃이 꼭 전생에 두고 온 아이처럼 어룽어룽 피어 있었다. 부부는 이유도 모르는 채 서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알지 못하는 슬픔을 위로하듯이.

긴 듯도 짧은 듯도 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궁궐보다도 아름다운 신궁 앞에 도착했다. 경쾌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큰 잔치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부부가 주저하니 안내하러 온 소녀가 커다란 대문을 열어 주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씨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들어가도 될는지요?”

“물론이죠. 오늘 가장 중요한 손님이신걸요.”

“하지만, 집에 있다가 급하게 와서 옷이 예의가 아닐 터인데…….”

“아니에요, 오늘 선녀처럼 아름다우셔요.”

의례적인 칭찬이라고 생각한 정씨 부인이 민망한 손길로 저고리를 쓸어내렸다. 차림새를 한 번 내려다보던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조화인지, 내당에서 입었던 옷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부인은 꽃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풍성하게 수놓인 흰 꽃잎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치마는 곱디고운 미색(米色)이었다. 놀라서 남편을 보니 남편도 같은 빛깔의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두 분, 어서요.”

잠잠히 기다리던 소녀가 둘을 이끌었다. 부부는 엉겁결에 대문을 지났다.

마당에 들어가자마자 혼례 잔치가 열렸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화려하고 풍성한 혼례상과 금실을 기원하는 병풍 덕분이었다. 상에 올린 음식이 하나같이 귀하여 이 세상 것 같지 않았다. 다정하게 마주 보는 목기러기 한 쌍 또한 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빛깔을 자랑했다.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졌고, 축하를 위해 모인 남녀노소가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하나같이 선남선녀인 데다 무언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풍겨 부부는 선뜻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그때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애기 신부님의 부모님이 오셨어요. 다들 인사 나누세요.”

아이를 낳기는커녕 태중에 품은 적도 없는데 부모라니. 어안이 벙벙한 부부에게 수많은 이들이 다가와 반가운 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참 이상도 했다. 평소라면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다고 얘기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설연이라고 해요. 도란이 벗인데, 이렇게 부모님을 뵙게 될 줄 몰랐네요. 언젠가 가신을 보내서 곶감이라도 한 상자 보내 드릴게요. 곶감 좋아하세요?”

“어머, 우리 애기 신부님 부모님이시구나. 저는 가금산 가신 계수인데, 애기 신부님이 인절미를 복스럽게 먹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누굴 닮아 그렇게 예쁜가 했더니 다 어머니를 닮아서였네!”

“해범입니다. 이렇게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혼례 날을 미리 알려 드리는 게 도리였겠지만 인세와 함부로 연통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갑자기 모시게 됐습니다.”

인사하는 모두가 친절하고 친근했다. 귀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부부 앞으로 장대한 사내가 나타났다.

“도란 낭자 부모님이세요? 와, 안녕하세요. 저는 석춘이고요, 도란 낭자 벗이에요. 그리고 가금산 신령님과 도란 낭자가 혼인할 것 같다고 제일 먼저 생각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응? 그게 정말이에요, 석춘 님? 미리 알았단 말이에요? 대체 어떻게?”

“전에 비 오는 날 도란 낭자와 연잎을 같이 쓴 적이 있거든요. 그때 신령님이 오셔서 비에 젖은 낭자를 데려가셨는데, 절 보는 눈빛이, 어우!”

그때 소녀가 부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흰 새를 어깨에 앉힌, 산꼭대기에 쌓인 눈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푸른 상의를 갖춰 입은 여인이 온화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애썼구나, 소야.”

“뭘요. 애기 신부님이 기뻐하시겠죠?”

“당연히 그렇겠지. 자, 곧 혼례식이 시작될 테니 함께 가실까요?”

아까 인사를 나눈 이들도 범상치 않았지만, 이 여인이야말로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정씨 부인의 팔에 눈꽃처럼 흰 손이 얹혔다.

“사부인, 어서.”

사부인.

이번에도 정씨 부인은 그 호칭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은 아이가 없으니 누구의 사돈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손을 꼭 붙들고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부부는 혼례상 가까이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부부와 신비한 여인을 위해 준비된 듯 꼭 세 개였다. 혼례상이 차려져 있는 만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갔으나,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색함을 안은 채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온다, 온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람처럼 일어났다가 금세 잦아들었다.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함께 비단길을 걸어왔다. 나란히 붙어 걷는 모습이 하늘이 내린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특히 신랑은, 큰 키와 신묘한 기운 때문인지 은은한 미소 때문인지 큰 산신령처럼 보였다. 그런데 신부는 좀 달랐다. 수줍은 기쁨으로 나긋나긋 걸어야 할 신부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꼭 누구를 찾는 모양새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와 부부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스친 순간 부부는 그들이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깨달았다. 하늘이 주었다가 하늘이 거두어 간 전생의 기억이 신들의 세상에서 완전해졌다. 인세로 가면 다시 사라질 기억이겠으나, 이곳에서만큼은 전생을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은 육신을 입은 인간이 아니라 혼이었기 때문이다.

죽어 혼백이 되었을 때도 잊지 못했던 딸이 곱게 칠보단장하고 혼례를 올리니 부부의 눈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슬픔 때문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 때문이었다. 딸이 찾아왔다가 고작 한 시진만 머물고 떠나갈 때, 그것이 영원한 작별이라 여겨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던가. 그런데 이렇게 혼례상 앞에서 맞절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되다니 꼭 꿈만 같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신랑과 신부가 샘물에 손을 씻고 합환주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부모를 향해 돌아섰다. 절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도란과 그의 남편이 될 사내가 허리를 굽혀 절할 때, 도란의 부모는 입을 틀어막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정씨 부인 옆에 앉은 백청요가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위로하듯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든 도란의 눈에도 기쁨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신랑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대로, 눈물에 흠뻑 젖은 부부의 손을 잡았다.

“한 점 슬픔도 없도록 지극히 아끼고 사랑할 것입니다.”

목소리가 꼭 깊은 산중을 쓸며 돌보는 바람 같았다. 옥 같은 얼굴과 태양처럼 또렷한 금빛 눈, 맑은 기백과 온아한 기품이 있는 사내였다. 딸과 혼인하는 사내는 부모의 눈에 차기 어려운 법인데, 진사해는 그렇지 않았다.

“꿈결에나마 자주 초대하여 모실 테니 부디 마음을 놓으십시오.”

다가온 도란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이제 눈물은 가시고 없었다. 오래 서러워 축축하던 마음을 햇살 같은 웃음이 보송보송 말려 주었다.

찬 서리 대신 샛말간 꽃잎이 축복처럼 쏟아지는 봄. 도란과 진사해는 성혼했고 행복만이 약속된 미래로 함께 걸어갔다. 분화구 화원뿐 아니라 온 세상이 향기로 가득하였다.

* * *

해 질 녘, 부부는 소야와 함께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안내를 사양하고 둘이 다정하게 보폭을 맞추었다.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침묵만으로도 족했다.

그때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이 떠나온 곳에서부터 부는 바람이었다. 그것이 꼭 딸의 인사 같아 정씨 부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한 동풍을 타고 분홍빛 연꽃 한 송이가 날아왔다. 탐스러운 꽃잎을 나풀거리며 날아오는, 모양도 색도 향도 고운 연꽃을 향해 정씨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꽃은 유순하게 그녀의 품에 안착했다.

“여보, 이걸 보세요. 갑자기 꽃이…….”

“참 고운 꽃입니다. 가지고 갈까요?”

인세의 꽃이 아니니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버릴 수가 없었다. 꿈의 끝까지라도 가져가고 싶은 마음에 정씨 부인은 단단한 꽃대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부에게 연꽃을 전한 바람은 다시 세상을 휘돌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갔다.

“잘 가져갔나 보네. 내가 삼신할망 찾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분화구 화원 가운데 우뚝 솟은 연꽃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지신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하늘은 꼭 홍련처럼 붉었다. 지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들인 듯 고운 빛깔을 감상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꽃다운 애기 신부님의 웃는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애기 신부님>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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