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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이 되어 가는 일 (10/14)

2. 신이 되어 가는 일

[도란이 보아라.

혼례 이후 너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구나. 무정한 시어머니라 너를 서운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년설산에 인사를 오겠다는 뜻은 고맙게 전해 들었지만, 새로운 봄을 맞이해 만년설산을 두루 다니며 돌보느라 편안히 앉아 환담을 나눌 시간이 없어 아쉬운 마음뿐이다.]

도란은 힘 있는 서체로 적힌 편지를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갔다. 백청요는 만년설산을 돌보는 분주함을 간략히 적은 후 새로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다.

[많은 고단한 일 중 산 끝에 똬리를 틀고 앉은 이무기 바위가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바위에 깃들어 산의 미물들을 상하게 하는데, 깃든 혼을 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너의 신이하고 출중한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은 바,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나를 도와주러 와 주면 좋겠구나.

진사해와 의논한 후 편안하게 답신을 보내 주길 바란다. 네가 응낙한다면 학을 보내겠다.]

편지를 접는 도란의 어깨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혼례를 올린 게 벌써 보름 전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만년설산에 인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진사해와 상의한 끝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답장이 돌아왔다. 만년설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적은 것일까, 종이에 아직도 한기가 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인.”

커다란 손이 도란의 어깨를 짚었다.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낮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야릇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도 몸이 부서지도록 해 댄 터라 도란은 그저 고개만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만년설산 신령님께서 답신을 주셨어요. 만년설산을 둘러보느라 바쁘다시네요.”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느새 익숙해진 존대로 나직하게 답한 진사해가 도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아직 신들의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한 도란이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소녀 도란이 빨리 자랐듯, 이 서툰 시기도 유수처럼 흘러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란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오늘은 같이 화원으로 갈까요. 새로 핀 꽃들도 보고.”

“그 전에 답장을 보내야 해요. 저, 만년설산에 가야 할 것 같거든요.”

진사해가 멈칫했다. 방금까지 어머니가 바빠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한 게 아닌가. 그의 혼란을 알아차린 도란이 백청요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내용을 확인한 진사해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 필요 없습니다.”

“왜요?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만년설산은 무척 추운 곳입니다. 물론 부인도 매해 갔으니 알겠지만, 신궁에 머물렀으니 큰 불편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산을 다니다 보면 몹시 추울 겁니다. 부인은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데 고뿔이라도 들면…….”

생각해 보면 도란이 그에게 안겼던 것도 모두 추울 때였다. 바늘 같은 가을비에 젖었을 때, 또 꽁꽁 언 연못에 빠졌을 때. 입술까지 새파래져서 떨던 그때의 도란을 떠올린 진사해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괜찮아요. 가고 싶어요.”

“혹시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그런 거라면, 내가 대신 답신을 쓰죠.”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도란이 엷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닌데요.”

“인간 세상의 시집살이는 참 악독하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런 문화 때문에 싫은 일을 거절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정말로요.”

“…….”

진사해는 그리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슨 말로 부인을 설득할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전에는 마음을 읽기 어려운 신령님이라 생각했는데, 혼인하고 나니 보는 눈도 밝아진 것일까. 도란은 고민하는 얼굴을 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들 저에게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화원이나 검 문제 말고는 그 힘을 쓴 적이 없잖아요. 잘만 사용하면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인간 세상에 가서 성샛골과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냈던 것처럼 말이죠.”

“맞아요.”

진사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에 앉은 도란을 응시했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본인의 주장을 펴는 모습이 낯설었다. 바리원에서만 해도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연정을 고백하던 서툰 여인이지 않았나. 그 이후로 많은 일을 겪으며 도란의 마음과 생각 역시 커졌겠지만, 가진 힘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싶다는 바람까지 품고 있을 줄이야.

해가 넘어가 도란은 스물한 살이 되었고, 스스로 입 아프게 주장하지 않아도 어른처럼 보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침착한 몸짓, 상대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

이렇게 되었으니 걱정을 앞세워 도란의 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귀중하고 신비로운 능력이 도란 안에 고여 썩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상대의 소망을 응원하고 그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게 돕는 것, 그것 역시 반려의 책무일 것이다.

“만년설산은 봄에도 많이 춥습니다. 소야에게 여장을 단단히 꾸려 주라고 일러야겠네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소야의 도움을 받을까요. 소야도 그 편을 더 좋아할 겁니다.”

소야를 위하는 척 말했지만 실은 도란을 위해서였다. 도란은 매듭을 짓거나 옷을 매무시하는 일에 조금 약했다. 옷과 관련된 일에 유독 약한 신부님의 모습이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짐은 제대로 꾸려야 했다.

다행히 소야를 좋아하는 도란은 더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며 수긍했다.

다음 날, 백청요가 보낸 학이 가금산에 도착했다. 털옷과 털신, 복슬복슬 어여쁜 털모자까지 쓴 도란은 학에 올라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사해는 자기를 기다리는 고난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만년설산으로 진입하자 바람이 거세어졌다. 털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머리를 꾹 눌러야 할 정도였다. 도란은 들이치는 바람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학이 나아가는 방향을 살폈다. 백청요가 보내 준 학은 험준한 봉우리와 싸늘한 골짜기를 지나 계속해서 전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밑으로 비죽비죽 솟은 소나무가 펼쳐졌다. 학은 눈을 뒤집어쓴 병정 같은 소나무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학에서 내리자 발밑에서 뽀득뽀득 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계절은 봄이지만 만년설산의 눈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신비로운 추위였다.

그때, 눈처럼 흰 설조가 창공을 가로질렀다. 백청요가 근처에 있는 것이다. 도란은 고개를 젖혀 멀어지는 설조의 꼬리를 눈으로 좇았다. 임무를 다한 학도 푸드덕 날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백청요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인지 도란보다 훨씬 가벼운 차림이었다. 하얀 옷 위에 짙푸른 망토를 하나 걸쳤을 뿐인 백청요와 털모자에 털신, 목도리까지 갖춘 도란은 서로 다른 계절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더 따뜻하게 입었어야지.”

봄 산에 나들이 오는 사람처럼 입은 백청요가 도란의 옷차림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도란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헐거워진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 주었다.

“그동안 평안하셨어요, 신령님?”

백청요는 제법 어른처럼 인사하는 도란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작년보다야 낫긴 했으나 백청요 눈에는 아직도 도란이 꼬마처럼 보였다.

“그래, 평안했지. 네가 내 청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오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지만 말이다.”

“네? 왜 그런 걱정을 하셨어요?”

“그야, 인간 세상의 사람들은 시어미를 어렵게 여기니.”

백청요는 그 얘기를 입에 담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너도 나를 멀리할지 모르는 일이지 않으냐.”

“아, 안 그래요.”

진심을 말하자면 백청요가 전보다 좀 더 어렵게 느껴지기는 했다. 신들의 세상에는 시집살이 같은 게 없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면서도, 아직 인간 세상에 살 때의 기억이 남은 탓이었다. 적응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도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 너도 이제 인간이 아니니…….”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백청요가 도란의 모자를 만져 주었다.

“어쨌든 진사해가 널 보내다니 의외구나. 편지를 보내면서도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또박또박한 대답에 백청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자신의 눈에나 어린아이지 이제 도란도 한 사람 몫을 하는 성인이었다. 아들도 그걸 아는 듯하니 다행이었다.

“고맙구나. 그럼 함께 올라갈까?”

“네!”

야무지게 대답하는 도란을 보고 백청요는 괜한 웃음을 꾹 참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평생 도란을 아이처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산길을 올라야 하는데, 쉬어 가야 하면 얘기하렴.”

“네, 신령님.”

둘은 나란히 눈 덮인 산길을 올랐다. 백청요의 걱정과는 달리, 도란은 잘 걸었다. 발이 푹푹 빠져 걷기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몸이 지금만큼만 따라 준다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그때, 백청요가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쉬었다 갈까? 힘들진 않으냐?”

“네.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백청요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걸음에 다시 속도가 붙었다.

“그래, 벌써 신이 되어 가는 모양이지.”

“……신이 되어 간다고요?”

“진사해가 설명해 주지 않더냐?”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요.”

“흐음.”

백청요는 눈앞을 가린 솔가지를 치웠다. 가지에 쌓인 눈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신과 혼인하고 합환주를 나누어 마셨으니 너도 점점 신으로 변해 갈 거다. 오래 달려도 숨이 차지 않고, 쉬이 늙지도 않겠지. 인간 세상과 우리의 세상을 누구의 안내 없이도 오갈 수 있게 될 테고.”

“아…….”

“네가 본래 가진 능력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활짝 피어날 거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아까 백청요가 ‘너도 이제 인간이 아니다’라고 한 게 이런 뜻이었을까. 도란은 새삼스럽게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눈 덮인 산을 한참 올랐는데도 심장이 거세게 뛰지 않았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몸이 무척 낯설게 느껴져 조금 두렵기는 했다.

“익숙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백청요는 그렇게 격려하며 작은 어깨를 다독거렸다. 다정한 손길에 도란도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다 왔구나.”

둘의 걸음이 커다란 바위 앞에서 멎었다.

도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눈앞에 돌로 빚은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생명 없는 조각상이기는 했으나 몸집이 어마어마해서 보는 이는 저절로 압도당했다. 한 번 꼬리를 치면 산의 삼분지 일이 잘려 나갈 것만 같았고, 한 번 포효하면 온 산의 미물이 벌벌 떨며 둥지로 굴로 숨어들 것 같았다.

“용…….”

“용이 아니다. 이무기지.”

도란은 백청요가 편지에 뭐라고 적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산에 똬리를 튼 이무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했었다.

“이게 편지에 쓰신 그 이무기인가요?”

“그래. 뭔가 보이는 게 있느냐?”

“아니요, 아무것도……. 잠깐만요.”

도란은 조심스럽게 돌로 빚은 이무기 앞으로 다가갔다. 이무기의 머리통이 도란의 몸보다 훨씬 컸다. 도란은 조심스럽게 돌 비늘에 손을 얹어 보았다. 설산에 묻힌 돌 표면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도란은 우둘투둘한 비늘을 한참 매만지며 들리는 소리가 없나, 눈에 보이는 형체가 나타나지 않나 기다렸다.

바로 그때,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가 도란의 귓전을 때렸다.

“썩 꺼져라. 내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마!”

도란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백청요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가만히 눈살만 찌푸렸다.

“뭔가 보이느냐?”

“목소리가 들렸어요. 남자 목소리…….”

“과연 이 바위에 뭔가 깃들긴 한 모양이군.”

백청요는 도란 옆으로 한 걸음 나아왔다. 그런 다음 이무기 바위의 눈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얼마 전부터 이 근방의 모든 생물이 둥지와 굴을 버리고 떠났다. 네발 달린 것과 날개 달린 것은 물론이고 땅을 기는 것들까지 자취를 감추었어. 네 책임이냐?”

“흥! 그것들이 알아서 달아난 게 어찌 내 책임이란 말이냐? 만년설산 신령이라 해도 내게 죄를 물을 순 없다!”

도란은 이 말을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렸다. 전해 봤자 괜한 싸움만 될 것 같으니 차라리 다른 질문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럼 생물들이 이무기님 때문에 떠난 건 사실이란 말씀이세요?”

“그것들은 내가 밤마다 내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불평하다가 떠났다. 위력으로 쫓아낸 것도 아니니 내 죄는 없어. 그렇게 전하고 둘 다 썩 사라져라!”

도란은 마침내 백청요를 돌아보았다. 단어를 고르는 입술이 조금 떨렸다.

“소음 문제인 것 같아요.”

“소음?”

“네, 이무기님이 밤마다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다들 떠난 거래요.”

“하긴, 소음 공해가 견디기 힘들긴 하지.”

“소음이라니, 난 소음을 낸 적이 없어!”

이무기가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당황한 도란의 시선에 그에게 박혔다.

“난 그저 슬펐을 뿐이다.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질렀을 뿐이야. 그게 어찌 소음이란 말이냐!”

“……우셨다고요?”

“울다니, 이무기는 울지 않아!”

고통스러워서 낸 소리라면 아무래도 흐느낌이나 절규일 것 같은데, 울지 않았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이 맺혀 운 모양이니 그 한을 풀어 줘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우셨는데요?”

“안 울었다지 않느냐! 건방진 것!”

“그, 그럼 왜 슬프셨는데요?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는 일이면 나서 볼게요.”

이무기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도란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백청요 역시, 이무기 석상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면서도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 나는 여기 뿌리박힌 몸이니……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어서 말해 보세요.”

“나는 내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 아내.”

“……인간 아내를 기다리신다고요?”

그때까지 잠자코 서 있던 백청요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언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무기는 절절한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승천하기 위해 도를 닦다가 만난 여인이었다. 그 여인 옆에 머물고자 천 년 수련도 포기했어.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고 산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여인이 떠난 것일까. 버림받은 것이 한이 되어 돌처럼 굳어 버렸을까.

“……내 아내가 죽었다.”

“네?”

“수명이 다한 것이지……. 내가 용이었다면 신격을 얻어 내 아내에게도 영생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아내와 함께 있는 것에 눈이 멀어 미래를 보지 못했어.”

도란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죽은 아내 때문에 슬퍼서 돌이 되었다면 그 마음을 어떻게 풀어 줄 수 있을까. 사별의 아픔은 타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이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지. 그래도 나는 내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돌아가셨다면서요?”

“인간은 환생을 해. 내 아내는 반드시 날 찾아올 거다.”

도란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환생하여 자신을 완전히 잊고 살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 애정과 그리움이 있긴 했지만, 그 감정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이무기의 아내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정을 간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기억을 찾아 여기까지 오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가서 내 아내를 찾아 다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 전생을 기억해 내기만 하면 아내는 한달음에 내게 달려올 거다.”

이무기의 눈동자가 번쩍 빛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돌로 굳어 버린 눈이니 빛이 날 리 없는데도. 집착과 슬픔으로 점철된 음성은 언뜻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무기 바위 주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도란은 그 기운이 주변의 풀을 전부 말린 것을 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백청요는 사연을 전해 듣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인간 아내가 있었고, 그 인간이 죽었고, 그래서 이 자리에서 망부석으로 변했다는 사연이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아내를 찾아다 달라고 하시는데요. 그런데 인간은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되찾을 수 없지 않나요?”

“그래, 그렇지. 고맙구나, 도란아.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마.”

백청요는 이무기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더니 커다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도란의 귀에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렸다.

“내 몸에서 손을 떼라! 아내만이 날 만질 수 있어! 아무리 신이라 해도……. 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도란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곧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백청요의 손 아래서 얼음 결정이 태어났다. 이무기의 콧잔등을 덮었던 얼음은 마치 스스로 자라나듯 이무기의 얼굴 전체를 덮어 버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이무기의 온몸으로 투명하고 차가운 병처럼 번져 나갔다. 도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채, 이무기의 비명과 애원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하지 마, 이게 무슨 짓이냐! 나를, 나를 부술 셈이야! 내 아내가 나를 찾아올 테니 난 여기서 기다려야 해, 내 아내가, 내 아내를……!”

피맺힌 비명에 도란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아무래도 백청요가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이무기를 죽이려 하는 듯했다. 말려야겠다고 다짐한 도란이 걸음을 뗀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이무기의 몸이 완전히 얼음에 뒤덮였다. 이제 이무기는 얼음덩어리에 갇힌 바윗덩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쩌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이무기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위를 뒤덮은 얼음이 안으로, 안으로 자라나 이무기를 부수고 있었다.

마침내.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끝으로 이무기의 몸이 부서져 내렸다. 얼음도 큰 덩어리로 조각조각 부서졌다.

이무기는 죽은 것이다.

도란은 참았던 숨을 토했다. 너무 놀라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백청요는 더없이 침착한 태도로 얼음 잔해 사이로 걸어갔다. 얼음 잔해가, 돌로 변한 이무기의 시신이, 그녀의 발에 챘다.

뭔가를 확인한 백청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다시 도란에게 오는 백청요의 낯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것 같았다.

“수고했다. 네 덕분에 일을 순리대로 처리할 수 있었구나.”

“저는…… 저는, 설득해 보려고…….”

“아가야.”

다정한 부름과 함께 백청요가 도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러나 도란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기다리며 매일 밤 목 놓아 울던 이무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백청요의 냉정한 결정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내 궁으로 돌아가자. 네 몸이 차가우니 차라도 먹여야겠구나.”

“…….”

“얘기는 그다음에 하고.”

언제 부른 것인지 커다란 학 두 마리가 날아왔다. 백청요가 도란을 이끌어 학에 오르게 했지만, 돌아가는 내내 도란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 *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그만큼 도란과 백청요 사이의 침묵이 깊은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침묵이라도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었다.

“도란아.”

“…….”

“내가 심했다고 생각하느냐?”

찻잔만 바라보던 도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녀는 얼어붙었다가 녹기 시작한 손을 꽉 맞잡으며 백청요와 시선을 맞댔다.

“이해가…… 이해가 안 가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도와 달라고 하셔서, 그 이무기님의 한을 풀어 주려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네가 화원의 지신에게 그러했듯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 처참하게…….”

아직도 이무기가 내지르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온 산이 울고 떨며 침묵하던 그 죽음의 순간. 백청요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을까. 아니, 도란이 보기에 그건 냉정이 아니라 매정이었다.

“내가 잔인했다 여기는구나.”

“……이유를 알고 싶어요. 제게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건 알지만…….”

“아니, 네게는 그럴 권리가 있지. 네가 날 도와줬으니 말이다.”

백청요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무기를 죽일 때와는 달리 그녀는 아주 온화하고 친절해 보였다. 그 간극이 도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 이무기는 아내의 시신을 품고 있었다. 이미 백골이 된 시신을. 결국 스스로 아내의 무덤이 된 셈이야. 그건 사랑보다는 집착과 고집에 가깝고, 그러니 다른 생명들이 그를 이기지 못하고 떠난 것이겠지. 심지어 그 이무기는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는 존재였어. 이미 원혼에 가까웠으니…….”

도란은 이무기의 시신 아래를 살피던 백청요를 떠올렸다. 그때의 백청요는 백골을 보고 한숨을 내쉰 모양이었다.

“시신을 품고 돌이 될 정도의 응어리는 누구도 풀어 줄 수 없다. 그 이무기는 거기서 가망 없는 소망을 품고 점점 괴물로 변해 갈 게 분명했어.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없애는 게 낫다고 여겼다.”

“…….”

“아마 진사해라면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너도 그랬겠지. 그렇지만 도란아, 다른 이들을 해치는 집착을 품은 존재를 계속 기다려 줄 수는 없다. 그것이 순리이고…… 또 땅을 다스리는 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진사해가 불태웠던 뱀말의 풍경이 도란의 눈앞에 떠올랐다. 창궐한 악이 스스로 반성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진사해도 도란도 잘 알았다. 때로는 불살라 멸할 악도 있는 것이다. 백청요의 선택도 그런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 이무기가 정말 악이었을까…….

“어려우냐?”

“……네.”

“그 어려움이 너를 신으로 만들 것이다. 능력을 가진 자는 책임을 져야 하고 땅을 맡은 자는 언제나 결정을 내려야 하지.”

“…….”

“진사해와 혼인한 너 역시 가온산맥의 주인이다. 오늘보다 어려운 일이 많겠지. 도란아, 그게 신이 되어 가는 일이다.”

백청요가 찻상 너머로 도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도란은 그녀의 얼굴에서 깊은 염려를, 또 다정한 격려를 읽을 수 있었다. 아까의 결정은 냉정도, 매정도 아닌 지혜였던 것일까. 백청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도란의 손등을 가만히 다독거려 주었다.

“익숙해질 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설산을 오를 때도 같은 말을 들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도란은 백청요의 손을 말없이 꼭 맞잡았다. 죽은 이무기, 원혼, 순리, 신이 되어 가는 일…….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했다.

다음 날, 만년설산에서 하루를 쉰 도란이 아침 일찍 학에 올랐다. 백청요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한 도란을 따뜻하게 전송했다. 많은 말 대신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학에 올라 멀어지는 도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백청요의 어깨에 앉은 설조가 여리게 울었다. 백청요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설조를 쓰다듬었다.

“도란이 걱정되느냐.”

도란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영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청요를 응시했다. 까맣고 영리한 눈에서 대답을 읽은 백청요가 빙긋 웃었다.

“저 아이는 좋은 신이 될 것이다.”

고민하고 흔들리는 시간 없이는 땅을 다스릴 지혜를 얻을 수 없는 법. 그래도 고단한 고민의 시간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있어 다행이었다. 백청요는 녹지 않는 아름다운 눈꽃 사이에 서서, 멀어지는 도란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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