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천꽃밭
도란은 화원 구석구석을 다니며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됐지?”
지신의 심술 때문이었다. 진사해와 지신, 그리고 해범이 나름대로 애를 써서 복구하긴 했으나, 어릴 때부터 화원을 돌봐 온 도란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건의 전말도 몰랐으니 의아한 것은 당연했다.
“지신님, 여기 큰방울새난이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도란과 함께 걷던 지신은 모르는 척 헛기침을 했다. 도란은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아 큰방울새난을 찾았다. 자그마한 분홍빛 꽃을 피우는 큰방울새난은 이름 그대로 줄기 끝에 새가 날아든 듯 보여서 도란이 무척 정답게 여기던 차였다.
“흠, 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네, 정말……. 흙도 조금 들뜬 것 같고.”
“봄비가 내려서 그렇겠지.”
“봄이 몇 번이나 왔었지만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혹시 모르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나저나 너,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지신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도란이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화원에 나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도란은 큰방울새난을 찾아 기웃거리면서 대답을 주었다.
“오늘 서천꽃밭에 가거든요. 종일 못 올 테니까 가기 전에 한번 둘러보고 가려고요. 잡초도 뽑아 주고.”
“매일 뽑아서 있지도 않은데 뭘 뽑아.”
“그래도 매일 자라잖아요. 아, 여기도 이렇게 움푹 들어갔다. 혹시 짐승이 와서 파헤친 걸까요? 여기가 인간 세상도 아닌데…….”
“서, 서천꽃밭은 왜 가는데? 만년설산에서 돌아온 게 바로 어제잖아.”
지신은 아예 도란의 옷자락을 잡아끌어 자신을 보게 했다. 도란은 지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전에 해범 님이 서천꽃밭 꽃감관님과 만나셨대요. 새로운 종자가 나왔다고, 보러 오라고 초대의 말을 해 주셨더라고요.”
도란도 꽃감관과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분화구 화원이 메말라 있던 시절, 서천꽃밭에서 씨앗을 받아 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꽃감관과 스치듯 보았을 뿐이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꽃밭을 충분히 구경하지 못한 것도 도란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령님이…… 그러니까, 남편이 함께 가 준다고 해서 오늘 아침만 먹고 출발할 생각이에요.”
“해범이란 놈이 어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새 종자를 받으러 간다고?”
“그것도 있고요.”
“다른 건 뭔데?”
도란이 지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줍게 웃었다. 하늘에 빗금을 긋는 유성처럼 말간 미소였다.
“서천꽃밭에는 신비한 힘을 가진 꽃들이 많대요.”
“유명하기야 하지. 그래서?”
“지신님을 다른 사람 눈에 보이게 할 꽃도 있지 않을까 해서.”
“…….”
“저만 볼 수 있으면, 지신님이 너무 심심하고 외롭잖아요.”
지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작 자신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도란은 여전히 해결책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엉엉 울던 소녀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괜한 심술로 화원을 헤집은 행동이 어제보다 더 후회스러웠다.
“뭐, 이대로 계속 살아도 상관없어.”
“에이, 그래도요.”
도란이 지신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속삭였다. 꼭 그때 같았다. 지신이 도란의 품에 안긴 채 화원의 꽃을 피워 주기로 결심했던 그날.
“……난은 내가 찾아볼게.”
“정말요? 고마워요.”
“뭐, 뭘 고마워하는 거야? 나도 여기 신이라고.”
“당연히 알죠!”
도란은 한결 가벼워진 몸짓으로 일어났다. 지신은 공연히 얼굴을 붉힌 채로도 안아 주는 두 팔을 거부하지 않았다. 도란이 화원을 떠난 후, 지신은 한숨을 내쉬며 큰방울새난을 찾아 화원 바닥을 기어 다녔다.
‘젠장, 도대체 어디까지 날아간 거야?’
* * *
눈송이처럼 하얀 학 두 마리가 서천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진사해는 바닥으로 내려서는 도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잔뜩 들떠 신이 난 도란이 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더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이는 때로 상대를 아이처럼 여기는 법이었다.
“와, 오랜만에 오니까 더 좋네요.”
도란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진사해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천꽃밭은 화원보다 훨씬 더 넓었다. 워낙 여러 종류의 꽃이 있다 보니 관리하는 방식도 정말 달랐다. 도란의 화원은 다양한 식물이 조화롭게 섞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었지만, 서천꽃밭은 꼼꼼하고 철저하게 구획을 나누어 꼭 바둑판 같았다. 한 칸마다 다른 꽃들이 자라는 바둑판.
사실 진사해는 도란의 화원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너무…… 공장 같다고나 할까. 반듯하게 정리된 모습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고, 위험한 능력을 지닌 꽃도 많아 이렇게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쩌면 아주 많은 취향이 도란에게 맞춰졌는지도 모른다.
“제가 보기에는 부인의 화원이 더 정답네요.”
“그래요?”
“부인을 닮아 그런가.”
“…….”
다디단 말에 도란의 귓가가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꽃감관님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대답 없이 빙긋 웃는 진사해의 모습에 괜히 불안해지려던 그때, 뭔가 철퍽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등불을 밝힌 듯 샛노란 이름 모를 꽃들의 군락 사이에서 작은 아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도란은 이끌리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도란은 겨우 몸을 일으킨 아이를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통통한 뺨에 묻은 꽃잎을 떼어 주고, 가슴팍과 무릎의 흙도 아프지 않은 손길로 털어 냈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돌본 경험이 없음에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넘어진 아이는 이제 막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귀여운 소년이었다. 아주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반짝거리는 눈, 토실토실 젖살이 오른 얼굴.
“괜찮아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씩씩했지만 그래도 어린 느낌이 물씬 풍겼다.
소년은 바닥에 나뒹굴던 바구니를 들었다. 꽃을 꺾고 있었는지 바구니에 노란 꽃이 한가득이었다. 물론 반쯤은 쏟아졌지만 말이다.
“같이 주울까?”
도란과 소년, 그리고 진사해는 함께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도란은 계속 아이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 주었다.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 꽃인데.”
“저도 몰라요. 그냥 어머니가 꺾어 오라고 하셔서.”
“어머니?”
“꽃감관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진사해가 가만히 설명해 주었다. 꽃감관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도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묵묵히 꽃을 줍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러니?”
“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답하는 소년의 말투가 심히 부루퉁했던 것이다. 작고 귀여운 입술도 어째 아까보다 툭 튀어나온 게, 상황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꽃감관 아들이라고 모든 꽃을 다 알진 않아요.”
갑자기 덧붙여진 투덜거림에 도란이 멈칫했다.
소년은 부끄러워하는 듯도 했고 불만스러운 듯도 했다. 우기는 말투에 가까웠지만 거기에 아이의 진심이 녹아 있었다. 도란은 대무신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부담스러워 한동안 검을 놓았던 석춘을 떠올렸다. 요즘의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련하는 무인이 되었지만, 모두에게 어려운 시절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소년에게도 어려움은 있을 수 있을 테고.
진사해는 아이의 말에 그저 웃고 말았지만, 도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지. 난 이렇게 어른인데도 내 화원의 꽃도 잘 모를 때가 많은걸.”
“……그래요?”
“그럼. 아무리 공부해도 끝이 없어. 아마 꽃감관님도 모르는 꽃이 있을 거야.”
“맞아요. 근데 어머니는, 매일 나한테 공부가 부족하고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서러운 듯 말을 쏟아 내던 소년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도란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바닥만 노려보는 아이의 뺨을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아들이 게으르다니.”
장차 이 넓은 땅을 홀로 다스려야 하니 엄하게 가르치려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다. 도란은 노란 꽃을 들어 아이의 코 아래에서 흔들며 장난을 걸었다.
“어머니가 열심히 해 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그렇게 하셨나 보다. 그렇지?”
“……그래요?”
눈물을 매단 채 침묵하던 아이는 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에, 갑자기 나타난 여인은 선녀처럼 예뻤다. 뱀말에서 가금산으로 온 도란의 눈에 비친 소야가 그랬듯이. 또 고운 단장과 꾸밈없는 미소가 신비롭고 곱게도 보였다. 꼭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직 이름은 알 수 없는, 꽃 같았다.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소년은 도란의 손에서 꽃을 받아 들며 질문을 건넸다. 마지막 꽃이 바구니로 쏙 들어갔다.
“나? 도란이야.”
“도란…….”
아이는 동그란 조약돌처럼 반질반질 예쁘고 다정한 이름을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코끝이 간질간질하더니 재채기가 날 것 같았다.
“넘어지면서 다치진 않았어? 한번 봐 줄까?”
아이의 움직임이 불편한 것 같아 도란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아이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괘, 괜찮아요! 남녀 사이에 혼인도 전에 맨살을 보이면 안 되는 거예요.”
“……뭐?”
맹랑한 소리를 하는 아이가 귀여워서 도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진사해도 함께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년이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제가 나중에 누나랑 혼인하게 되면 마음껏 절 만지셔도 좋아요.”
도란은 깜찍한 소년이 귀엽고 기특한지 다시 한번 맑게 웃었다. 그런 다음 꽃밭에 선 소년을 번쩍 안아 주었다. 아이의 짧은 다리가 허공에 달랑달랑 떴다. 불편하지 않도록 엉덩이를 받쳐 준 도란이 물었다.
“그럼 다리가 아플 수도 있으니까 안아서 데려가 줄게. 괜찮지?”
“그건…… 좋아요.”
아이는 아예 본격적으로 도란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자리를 잡았다. 꽃이 든 바구니는 자연스럽게 진사해 손에 들렸다. 아무래도 아이를 얼른 꽃감관에게 데려다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진사해의 귀로 소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같이 온 사람은 누구예요?”
“응? 누구인 것 같아?”
소년은 도란의 품에 안긴 채 진사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탐색하는 눈빛이라면 아이를 상대로 과한 착각을 하는 것일까. 진사해는 조금 기가 막혔다.
“남편이면 안 돼요.”
“으응, 남편이면 안 돼?”
“당연하죠. 남편이 있으면 다, 다른 사람이랑 혼인할 수 없잖아요.”
“다행이네, 누나한테 아직 남편이 없어서.”
“…….”
진사해는 자신의 마음이 매우 급격하게 치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들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일은 워낙 흔하다. 어른들이 귀여운 마음으로 청혼을 받아들이며 장난을 치는 일도 흔하다. 그렇지만, 남편이 옆에 있는데 ‘아직 남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하다니!
진사해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사랑은 상대를 어린애처럼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어린애로 만든다는 것을.
* * *
“저런, 지금 막 나가려고 했는데.”
작은 거처에서 나오던 꽃감관이 다가오는 도란과 진사해를 보고 멈칫했다.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일하기 편한 옷을 걸친 그녀는 도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한층 더 놀란 것 같았다.
“선호와 만나셨습니까?”
“네, 아이가 넘어져서요. 무릎을 조금 다친 것 같아요.”
이름이 선호였구나, 깨달음과 함께 도란이 아이를 건네주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는 편안해 보였다. 엄한 교육을 받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믿고 따르는 게 느껴졌다. 다정한 모자를 보는 도란의 마음이 조금 술렁거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들이 번거롭게 해 드렸네요.”
“아니에요. 선호랑 얘기해서 저도 재밌었는데요. 서천의 꽃들도 만져 보고요.”
내내 조용하던 진사해가 바구니를 건넸다. 꽃감관은 선호를 바닥에 내려 준 다음 샛노란 꽃이 가득한 바구니를 받았다.
“말씀드린 새 꽃을 먼저 보셨군요. 이게 새로 개량한 해독꽃입니다. 큰 화원을 가꾸시는 분들께 나눠 드리고 있죠.”
“해독꽃이요?”
약이 되는 식물도 있지만 독이 되는 식물도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독을 품는 식물을 악독하다 여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많은 이가 드나드는 화원의 독초를 방치할 수는 없는 법이다. 독초를 잡초처럼 뽑아 죽이지 않고 화원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만든 꽃이 이 노란 해독꽃이었다.
“꽃은 금계국과 비슷하지만 뿌리가 멀리까지 뻗어 갑니다. 독초의 뿌리와 얽히면 독을 자기 안으로 흡수해 중화하지요. 그래서 해독꽃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굉장하네요.”
“얼마 전에 다른 화원에서 독초를 먹고 죽은 갓난아이가 있어서요. 아이들은 뭐든 입에 넣기부터 하니……. 조심할 일이 많습니다.”
도란은 가슴이 선뜩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꽃감관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땅을 다스리는 일은 정말 해도 해도 막막하고 어려울 때가 많지요…….”
전에 백청요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좋은 신이 될 수 있을지 몰랐다. 돌아와 진사해와 한참 그것에 대해 얘기했지만 마땅한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해독꽃의 탄생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세상을 전부 바꿀 수 없고 또 각자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나, 결국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간다면…….
“어머니, 이 누나는 부인이 아니에요.”
선호의 목소리에 상념이 달아났다. 선호는 꽃감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남편이 없다고 하신걸요?”
진사해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꽃감관 역시 그의 묘한 표정을 발견했다.
“선호야, 그런 실례되는 말을. 누나가 아니라 가금산의 부인이시다.”
“아닌데. 아니라고 했는데…….”
도란이 미안한 얼굴로 선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다음 선호의 조그마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진사해는 자기가 하던 행동을 따라 하는 부인을, 조금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란의 음성은 한없이 보드라웠다.
“누나 사실 혼인했어, 선호야.”
“……네?”
“미안해. 선호가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었던 건데.”
선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 그럼 누나랑 혼인 못 하는 거예요?”
“선호랑 혼인하기에 누나는 너무 나이가 많은데?”
“안 많아요! 하나도 안 많다고요!”
선호는 울면서 도란에게 안겨 들었다.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소심한가 싶었는데 이럴 때는 스스럼없었다. 도란은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꽃감관에게 미안한 눈짓을 해 보였다. 꽃감관은 아들의 어리광에 놀라서 이마만 짚었다.
그리고 진사해는.
“꽃을 받았으니 이만 가시죠, 부인.”
유치하게 굴고 싶진 않았지만, 일부러 힘을 주어 ‘부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앙!”
선녀님과 혼인을 꿈꾸었던 작은 소년이 앙앙 울음을 터뜨린 건 당연지사였다.
* * *
꽃감관의 거처를 뒤로하고, 도란과 진사해는 학을 타고 가금산으로 돌아왔다. 도란은 돌아오는 내내 생각이 많아 보였고, 그걸 모를 진사해가 아니었다.
“많이 신경 쓰입니까?”
“네? 선호 때문에요?”
“아니요, 지신 말입니다.”
선호가 눈물을 그치고 진정한 후, 도란은 꽃감관에게 지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신의 사연을 끝까지 들은 꽃감관은 서천에는 마땅한 꽃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기회가 닿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몸을 입혀 주는 꽃을 만들어 보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네, 조금……. 지신님도 내심 기대했을 거예요. 괜히 얘기했나 봐요, 말이나 하지 말 걸 그랬어요.”
“마음만으로도 고마울 겁니다. 어쩌면 분화구 화원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꽃이 태어날지도 모르죠.”
도란은 괜한 위로라 여기고 웃기만 했다. 그러나 진사해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또 애쓰면, 언젠가 땅은 응답하니까.”
“…….”
“같이 노력한다면 결실이 있을 겁니다, 부인.”
도란이 품었던 많은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어쩌면 진사해는 도란의 여러 고민을 하나하나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묵묵히 옆을 지켜 준 그가 고마워, 도란은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떠나가는 학 두 마리를 응시하던 진사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어른스럽게만 보였던 얼굴빛이 어쩐지 달라져 있었다.
“……부인은 내 부인입니다.”
“네?”
“아까 꽃감관의 아들에게…….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치졸하다 싶었는지 그가 붉어진 얼굴을 외로 틀었다. 멍하게 남편을 보던 도란의 입에서 방울 소리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예요. 토라진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선호가 너무 예뻐서 장난친 거예요.”
“알지만.”
진사해가 문득 시선을 똑바로 맞대 왔다. 늘 한참 어른 같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툰 신랑으로 보였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에, 진사해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너그럽게 웃으며 넘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혹은 예전의 설연에게 그랬듯 차갑게 얼어붙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지금의 진사해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토라지지 않은 척 다른 곳을 보며 귀를 늘어뜨린 강아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녀보다 훨씬 큰 사내를 보며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숨이 가빠질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랬어요?”
도란이 진사해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밝고 따뜻했다.
“전 선호 보면서 다른 생각 했는데.”
“다른 생각?”
“우리 아이요…….”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는 도란의 바람과는 달리, 둘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진사해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도란은 날짜를 헤아려 볼 정도로 아이를 기다렸다.
“전 아이보다 오래 살고 싶거든요. 아이가 세상에 혼자 남겨지지 않게.”
“…….”
“선호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마 아이가 늦는 이유는 도란의 몸 때문일 터였다. 그녀는 인간에서 신으로 변해 가고 있으니까. 이런 불안정한 몸에는 아이가 깃들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원하는 도란에게 무작정 참고 기다리라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금방 아이가 찾아올 겁니다.”
“그럴까요?”
“부인은 좋은 어머니가 될 테고…….”
저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테니까.
잦아드는 음성으로 덧붙인 그가 나긋하게 입술을 겹쳐 왔다. 바깥인 만큼 그리 농밀한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감각이 도란을 동요하게 했다.
“어서 들어가야겠네요.”
진사해가 도란을 안아 들었다. 품에 꽃씨를 안은 도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이 모습을 가신들이 본다면. 하긴, 그들은 이미 자주 보았지만, 그래도!
한편 지신은 마침내 도란이 찾던 큰방울새난을 발견했다. 한 시진 내내 화원을 이 잡듯 뒤진 후에야 연꽃 위라는 뜬금없는 곳까지 날아간 큰방울새난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날아오는 학을 본 지신은 반가운 마음에 그 난을 들고 가금산 입구로 마구 달려왔다가…….
진사해의 품에 꽃다발처럼 안겨 신궁으로 가는 도란을 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도. 도란의 걱정처럼 다른 가신들은 신령 부부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지신은 목격한 셈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진사해가 도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뭐라고 속삭이는 간지러운 꼴까지 전부 보았다.
“쟤들은 대낮부터…….”
몸도 없는데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지신은 난을 든 팔을 벅벅 문지르며 화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평화로운 가금산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