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래오래 행복하게
소야는 요즘 어깨가 으쓱했다. 가금산의 공식적인 ‘선녀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녀님!”
“선녀님, 소야 선녀님!”
다섯 살 먹은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달려와 소야의 품에 매달렸다. 다른 가신들도 아이들을 무척 예뻐하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소야였다. 어머니를 흉내 내어 소야를 늘 ‘선녀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무척이나 명랑하고 활기찼다. 특히 3초 늦게 태어난 동생 쪽이 그랬다.
“만년설산 신령님은 정말 혼자 아버지를 낳은 거예요?”
동생인 샛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곧잘 하곤 했다. 이런 질문을 하도 받다 보니 이제는 그리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그럴 리가요. 당연히 혼자 낳으신 게 아니죠.”
“그럼 우리한테도 할아버지가 있어요?”
“당연하죠. 멀리 계셔서 잘 못 오시는 거예요.”
“왜 멀리 계시는데요?”
“음…… 그건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선녀님도 모르는 게 있어요?”
“선녀님도 모르는 게 있어요?”
동생 샛별의 말을 오라비 백선이 똑같이 따라 했다. 소야는 애기 신부님을 닮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짐짓 아쉬운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는 왜 이리 모르는 게 많을까?”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먼저 나선 건 샛별이었다.
“어른들도 모르는 게 많댔어요!”
“맞아요,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는 게 많대요!”
“우리가 이유를 알아낸 다음에 선녀님한테 말해 줄게요!”
“말해 줄게요!”
종알종알 외친 샛별과 백선은 소야를 한 번씩 꼭 껴안아 주었다. 물론 소야를 안아 주기에 그들은 좀 작았지만 말이다. 아직 어린 그들이 어디서 이런 포옹을 배웠는지 알 만해서, 소야는 남몰래 웃었다.
“알겠어요. 그럼 꼭 말해 주세요.”
“약속!”
샛별은 야무지게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보였다.
함께 멀어지는 아이들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개처럼 부풀었다. 소야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금산을 거닐었다. 요즘만큼 행복한 때가 없었다.
* * *
지신은 오래전 도란이 피어났던 연꽃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다. 꼬맹이 하나가 아래서 연꽃 줄기를 마구 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화들짝 놀라서 깬 지신은, 자기가 다디단 낮잠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뭐야? 쌍둥이냐?”
“지신니이이임!”
“지! 신! 님!”
“어휴, 시끄러워.”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지신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샛별과 백선 모두 도란의 능력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신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존재가 되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안 날에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신은 연꽃 아래로 훌쩍 내려갔다. 아이들은 정신 사납게 지신 주위를 빙빙 돌아 댔다.
“지신님, 지신님은 소야 선녀님보다 더 오래 살았죠?”
“오래 살았죠?”
“우리 할아버지가 왜 멀리 계시는지 아세요?”
“아세요?”
“이놈들아, 한 명씩 말해!”
“으악, 괴물이다!”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원에서 때아닌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지신은 바람처럼 빨리 달릴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어울리느라 느릿느릿 이동했다. 결국 샛별과 백선을 모두 잡은 후에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하, 하긴. 진사해에게도 아버지는 있겠지.”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별로 관심이 없…… 아니, 너희 할아버지 일은 잘 모르거든.”
“으응? 지신님은 오래 살았으니까 다 알 줄 알았어요.”
“오래 살았다고 뭐든 다 알지는 못해.”
“그렇구나.”
샛별은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백선도 동생의 말을 반복했다. 보통 오라비가 동생을 가르치는데 이쪽은 동생이 오라비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쌍생이니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아버지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지 그래?”
“아버지랑 어머니는 같이 놀러 나가셨어요.”
오늘 아침에만 해도 도란이 화원에 왔었는데, 그새 어딜 갔다는 걸까. 하여튼 요즘 진사해는 도란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한동안 둘 다 외출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좀 살 만하다 그건가. 지신도 아이들만 돌보는 도란이 걱정스럽던 참이라 진사해 하는 짓이 밉지만은 않았다.
“그럼 다른 가신들한테 물어보든지. 만년설산에 연통을 보내도 되겠네.”
“와, 지신님은 역시 똑똑해!”
아이들은 당장 만년설산에 편지를 보내야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아이들이 멀어진 뒤, 지신은 다시 한가하게 연꽃에 몸을 파묻었다.
예전에 이 화원은 참 황량하고 쓸쓸했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손님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다니.
못다 잔 잠을 청하는 지신의 입가에 그녀조차 모를 미소가 깃들었다.
* * *
석춘과 설연은 도란의 벗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둘끼리 친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도란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샛별과 백선이 태어난 뒤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도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아주 좋아한다는 것. 오죽하면 쌍둥이가 소야와 지신 다음으로 자주 본 이가 석춘과 설연일 정도였다. 가금산의 다른 가신이 아니라 말이다.
그날도 그들은 쌍둥이를 보러 함께 가금산에 방문했다. 신궁 곳곳을 살펴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기에 화원에 갔나 걸음을 돌리던 중이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뛰어오던 아이들과 마주친 건 행운이었다.
“어, 설연 언니!”
“석춘 형!”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두 사람에게 매달렸다. 설연과 석춘 역시 수백 번 해 온 일인 듯 아이들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어서 편지를 써야 한다고 봄날 참새처럼 요란하게 재잘거렸기 때문이다.
설연과 석춘은 편지를 쓰는 아이들 옆에 앉아 틀린 글자를 고쳐 주며 시간을 보냈다. 설연은 샛별을 맡았고 석춘은 백선을 맡았다. 어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아이들은 수월하게 편지 쓰기를 마쳤다.
“이제 할머니한테 보내야 하는데 어쩌지? 어머니랑 아버지가 안 계시잖아.”
“오라버니, 해범 삼촌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중대한 일이라도 하는 양 분주한 쌍둥이는 설연과 석춘을 뒤로하고 또 자기들끼리 달려 나갔다. 갑자기 아이들 방에 남게 된 설연과 석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이들이 금방 자라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내내 외롭게 지냈던 설연은 시끌벅적하고 명랑한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도란도 있고 인세의 벗도 있지만, 순수한 애정을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퍼부어 주는 아이들은 역시 특별했다. 당장은 혼인할 사내도 없고 혼인할 마음도 없는 설연이 가끔 이름 모를 미래의 신랑을 상상하는 건 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석춘에게도 쌍둥이는 특별했다. 재능이 출중한 형들 아래 막내로 자라 누군가를 챙겨 주는 기쁨을 알지 못했는데, 샛별과 백선은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배움과 행복을 주었다. 아이들을 두 팔에 안고 빙빙 돌리며 놀아 줄 때는 멋진 거인이 된 느낌마저 들었다. 백선이 검에 관심을 보여서, 석춘은 수련에도 더 성실히 임했다. 어차피 백선에게 검술을 가르칠 사람은 진사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각자의 심회를 품은 채 한동안 아이들 방에 머물렀다. 타고난 성정이 달라 절친한 사이는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마음을 나눈 벗이었다.
* * *
해범은 소야가 유난스럽다고 타박할 정도로 신령 부부에게 깍듯했다. 진사해야 본래부터 높은 신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도란에게는 조금 편히 대할 법한데, 해범은 언제나 점잖게 예의를 갖췄다.
자연히 그는 가금산에서 쌍둥이를 ‘아가씨와 도련님’으로 대하는 유일한 가신이 되었다. 쌍둥이와 만나면 반드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후에야 인사했고, 뺨을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도 일절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매달리면 얼른 안아 올리기는 했으나 진사해나 도란이 오면 도로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쌍둥이가 가장 편히 여기는 가신은 해범이었으니, 아이들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삼촌!”
“삼초오온!”
심지어 그들은 해범을 꼭 삼촌이라고 불렀다. 누가 시키거나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그냥 이름을 부르시라고 누차 청했던 해범도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도란과 진사해가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뒀으니, 나서서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편지를 쓰셨네요.”
늘 그랬듯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은 해범이 아이들 손에서 종이를 받아 들었다. 물론 나름의 예의를 지켜 내용까지 보지는 않았다.
“어디로 보내는 편지인가요?”
“할머니한테!”
“만년설산으로 보내시는 거군요.”
“으응, 근데 예전에 어머니가 삼촌한테 이런 거 부탁하지 말라고 했는데.”
샛별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백선이 살곰살곰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따뜻했지만 가끔은 엄격했다. 지난번에 진사해를 찾아온 해범을 졸라 인세 구경을 갔을 때도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해범에게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첫째 잘못이고, 공무로 온 해범을 방해한 것이 둘째 잘못이라고 야단치는 어머니의 얼굴이 어찌나 무섭던지. 아이들의 거짓말에 깜빡 속았던 해범은, 별다른 죄도 없이 쩔쩔매며 옆에서 같이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 뒤로 도란은 아이들이 해범에게 필요 이상으로 응석을 부리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아이들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가 학을 불러 만년설산으로 편지를 전하게 하죠.”
해범은 두 장의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먹이 이리저리 번진 서툰 편지였지만 백청요는 무척 기뻐할 것이다.
“삼촌, 나 다리 아파.”
여기까지 잘 뛰어온 샛별이 별안간 칭얼거리며 해범의 목에 답삭 매달렸다. 해범은 자연스럽게 샛별을 안고 백선도 다른 팔에 안아 주려 했다. 그런데 백선은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않았다.
“어머니한테 혼나면 어떡해?”
“오라버니는 바보. 어머니랑 아버지는 오늘 늦게 오셔. 삼촌만 얘기 안 하면 모른다고. 삼촌, 말 안 할 거지?”
“……물론입니다.”
어쩐지 휘둘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안아 달라는데 엄격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해범은 샛별과 백선을 안고 천천히 신궁으로 돌아갔다. 다섯 살 아이를 둘이나 안고 있는데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 * *
도란과 진사해는 백청요와 함께 있다가 쌍둥이의 편지를 받았다. 그들이 할머니에게 쓴 편지 말이다.
“이런, 이런.”
백청요는 아들 부부를 앞에 앉혀 두고 편지를 읽은 후 웃음을 참으며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읽는 둘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말년의 행복이 이것인가 싶었다. 화목한 아들 부부, 재롱을 피우는 손주들……. 물론 백청요는 살날이 영원히 남은 신이라 ‘말년’의 행복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지만.
“아이들을 바위산에 한번 데려가야겠구나. 아주 어릴 때 말고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그녀의 남편은 먼 남쪽 바다에 있는 외로운 바위산이었다. 바위산은 움직일 수 없으므로,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 백청요는 매일 남쪽 바다 끝까지 가 남편을 만나곤 했다. 지금도 사흘에 한 번은 만나러 가지만.
백청요는 아이들에게 보낼 답신을 써서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벌써 글씨를 아주 잘 쓰는구나. 틀린 글자도 전혀 없고.”
“아마 옆에서 누가 도와줬을 거예요.”
도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가 많음을 아는 백청요도 그렇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금산으로 돌아가는 길, 진사해는 도란을 학에 태워 주었다.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은 행동이었다.
“신기하지 않아요?”
학에 앉은 도란이 진사해의 손을 살짝 붙들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일까, 그녀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만년설산 신령님이 매번 먼바다까지 가신다는 거요.”
“저도 한동안은 어머니의 마음이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백청요는 남편을 만나러 다닌다는 얘기를 떠들어 대지도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상처럼 홀연히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도란이 혼인 후에도 진사해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서늘하고 단단한 분이었으니 그런 열정이 있는 게 신기했는데.”
“…….”
“부인을 알게 된 후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할지…….”
진사해가 도란의 자그마한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꼭 꽃잎이 닿는 것처럼 간지럽고 부끄러웠다.
“그럼 제가 멀리 가면 매일 만나러 오실 거예요?”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만약에 멀리 가면요.”
“그럼 따라가야겠습니다.”
진사해는 학에 앉은 도란을 바라보았다. 만년설산의 차가운 바람 때문에 붉어진 뺨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흩어져 아름다웠다. 몇 해를 부부로 산 지금도, 그는 예전처럼 도란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곤 했다. 도란에 대한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할 때, 충동에 이끌려 그러했듯이.
매일 함께 살아도 이 지경인데 떨어져 살면 견딜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있잖아요, 여보.”
이제는 익숙해진 호칭에도 때때로 마음 언저리가 떨려 온다.
“아이는 세 명 낳고 싶다고 했는데…… 기억하세요?”
아, 진사해는 정말로 이 여인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산새처럼 갸웃갸웃 움직이는 고개도, 팔랑거리는 속눈썹도,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아리송한 어조도, 연꽃보다 말갛게 피어나는 미소도.
“물론 기억하죠.”
“그럼…….”
“어서 돌아가야겠네요.”
진사해가 훌쩍 학에 올랐다. 부부를 태운 학이 포근한 구름 사이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그렇게 노을 진 하늘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평화로운 집으로.
<애기 신부님> 외전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