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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왜 여기서 나와? (2/98)

2. 내가 왜 여기서 나와?

어수선했던 식당 안은 빠르게 정리되고 아무 일 없었단 듯 돌아갔다. 

첫 만남, 첫 인사를 강렬하게 끝마친 두 사람은 약속되었던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식사를 주문했다. 

함께 주문한 와인은 평소 그녀가 좋아한다는 취향 따라 선정되었다. 

그는 초면에 결례가 많았다 사과했고.

그녀는 할 일을 하신 것뿐이니 괜찮다 거듭 이해했다. 

“성함이 권희원 씨. 맞습니까?”“네. 서지환 씨, 맞으시죠?”“네. 맞습니다.”다시 한 번 통성명을 하며 서로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희원은 자신의 의자 뒤에 걸어두었던 지환의 슈트 재킷을 건넸다. 

“구겨졌을지도 몰라요. 아깐 너무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세게 움켜쥐었거든요.”“찢어졌어도 할 말 없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지환은 자신의 재킷을 건네받으며 무심하게 옆 의자에 걸쳤다. 

코끝에 감도는 향수 냄새가 나쁘지 않아, 희원은 향이 배어 있던 재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 지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검거를 앞 둔 까닭이었는지 아깐 굉장히 서늘한 인상이었는데, 다시 보니 그렇지도 않다. 

“할아버지께 나랏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검사님이셨네요.”“권희원 씨는 국가 문화 산업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계신다던데.”“그렇게 거창하게 포장해주시면 민망해서 소름이 끼쳐요.”“나랏일이라고 표현하셔서 사실 저도 부담스러웠습니다.”희원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서로 민망하고 어색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자연스럽지 못한 건 맞선 자리의 특징.

타인과 처음 만나 살아온 인생을 축약하여 공개해야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무용을 전공했고, 현재도 무용을 하고 있습니다.”“아, 그러시군요.”희원은 짧은 말로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이것 또한 맞선의 수순.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공개해야 하는 것.

나이, 직업, 가족 관계. 나아가 연봉, 비전, 꿈꾸는 가정의 이상향. 

목이 자꾸 마르다 보니 식사보다 먼저 나온 와인이 홀짝홀짝 잘 들어간다.

“서지환 씨는 선을 자주 보세요?”“뭐, 제 결혼이 집안의 숙원사업이다 보니 종종 생깁니다.”“그렇군요.”“의도는 아닙니다.”첫인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좌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것들을 빼면 마주 앉은 맞선 상대와 나눌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권희원 씨는 맞선을 자주 봅니까?”“이제 본격적으로 제 맞선 시즌이 시작되었는지 저희 집도 요즘 선자리를 계속 만드는 것 같아요.”“성수기군요.”“맞아요. 물론 전 비시즌을 선호하지만요.”지환은 희원에 대꾸에 가볍게 웃었다.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설명했지만 핵심은 동일했다. 

이 자리, 사실은 반갑지 않다는 것. 

어른들의 독촉에 못 이겨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했다는 것. 

“검사님이시면 하시는 일이 바쁘지 않으세요?”“바빠도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권희원 씨는 바쁘지 않으십니까?”“저도 물론 밥은 먹고 사니까요. 그리고 사실 내내 저기압이라 맛있는 것 먹고 즐길 틈이 좀 필요하기도 했고요.”때마침 식사가 나온다. 

뜨거운 접시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스테이크 소리가 환상이다. 

“잘됐네요.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말이 있죠.”지환은 접시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손짓을 하며 남은 말을 더했다. 

“권희원 씨의 저기압 해소를 위해서라도 우리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네. 그러죠.”“와인 잘하시네요?”“좋아만 해요. 잘 마시진 못하고요.”건배하듯 와인잔을 들며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그것을 시작으로, 꽤나 근사한 풍미의 스테이크를 가지런히 썰어나갔다. 

편수섭은 끌려나가는 마지막까지 악다구니를 썼다. 

아가씨! 도망가! 

저런 새끼 만나서 인생 조지지 말고 도망치라고오오!

희원은 편수섭의 일갈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소매를 걷은 뒤 찬물을 들이켜던 지환은 웃는 희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꿀꺽꿀꺽, 몇 모금 안에 많은 양의 물을 비워낸 지환은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왜 웃었습니까?”희원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까 잡혀 나간 범인이 소리 지르던 게 떠올라서요.”“아아.” 지환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편수섭을 떠올렸다. 

“편수섭이 권희원 씨에게 도망치라고 한 것 같은데.”“맞아요. 듣자니 서지환 씨가 피도 눈물도 없다고.”“흠. 뼈와 살이 되는 시간만 구형하다 보니 편수섭에게 피와 눈물을 전해줄 시간이 없었네요.”“편수섭이라는 사람과는 전생에 깊은 인연이었나 봐요.”“뭐, 굳이 인연이었다면 연산군과 김처선의 악연 정도.”“그럼 누가 연산군이죠?”“물론 제가. 어찌 되었든 구형을 하는 쪽이길 희망하니까.”풉. 희원은 미지근한 물을 삼키다가 눈꼬리를 둥글게 만들며 웃었다. 

이어 화제를 전환했다.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위로 형이 있습니다. 2남 중 차남이죠.”“아아. 차남분이시라고 들은 기억이 나네요. 형님께선 결혼을 하셨나요?”“네. 딸이 올해 다섯 살. 네 살이던가? 여섯 살인가?”“아이들 나이는 늘 헷갈리는 법이에요. 저도 매번 그렇거든요.”저는 외동이에요. 

희원은 질문 끝에 자신이 외동임을 밝혔다. 

지환은 희원의 식사 속도에 맞춘 식사를 이어나갔고 간간이 와인을 삼켰다. 

그러다가 힐끗 스테이크를 써는 일에 열중인 희원을 바라보았다. 

염색을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머리 스타일, 반듯하게 생긴 눈코입, 갸름한 턱선.

“가족 중 누굴 닮았습니까?”“저요? 음, 굳이 따지자면 엄마?”“모친께서 상당한 미인이시겠군요.”“그냥 제가 예쁘다고 하는 게 더 듣기 좋은데.”“바로 다음에 이어 얘기하려고 했습니다.”희원은 지환의 이야기에 흠칫,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민망하면 나오는 그녀의 제스처다.

“예쁘다는 말에 목이 말라 기다리질 못하고 선수를 쳤네요. 조금 더 기다릴걸.”“갈증 날 만큼 오래 못 들어본 분 같지는 않은데.”이어지는 지환의 민망한 말에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면전에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지환의 멘트에 놀란 것이다. 

희원은 연거푸 앞에 놓인 와인을 삼켰다. 

술을 마신 까닭일까, 심장이 조금 뛰는 것도 같았다. 

“예쁘다는 말, 자주 하세요?”“자주 하죠.”“…….”“조카가 어찌나 예쁜지.”지환의 대꾸에 희원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조카바보를 인증하는 지환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예뻐하는 조카 나이도 모르세요?”“돌 지나고 나니 걔만 유독 빨리 자라는 느낌이라 가늠이 잘 안 됩니다.”“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서지환 씨도 훈남이세요.”“그런 말, 저는 종종 듣습니다.”“…….”“물론 조카에게.”피식, 또 웃음이 터진다. 

그녀가 웃건 말건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지환은 말을 이어나갔다. 

희원은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와인을 홀짝홀짝 마셨다. 

“형수님이 조카에게 주입시켜놓아서 곧잘 하거든요. 조카 선물과 맞교환되는지라 멘트 값이 꽤 비싸긴 하지만.”자리가 지루하지 않고 꽤나 즐겁게 흘러가는 것이 그녀는 만족스럽다.

이 정도의 선 자리 분위기면 밥 한 끼 해결하는 것치곤 꽤나 성공적이다. 

식사도 맛있고, 와인도 훌륭하며.

앞에 앉은 맞선남도 편안하다. 

“재밌으시네요. 검사님이라 좀 딱딱할 줄 알았는데.”“편견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긴 하지만 딱딱할 것 같다는 첫인상은 좀 의왼데요.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해본 적도 별로 없는데.”“그랬나요? 하지만 만나자마자 사람 때리는 걸 봤는데 재밌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진 않죠.”“때린 게 아니라 제압, 제압한 겁니다. 마음으론 때렸지만 주먹은 쓰지 않았거든요.”“아아. 그랬나요?”“뭐, 이제라도 오해 풀렸다니 다행이긴 한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메인 식사가 끝났다. 

지환은 흠,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맞선 여성과 만나 마주 앉아 먹는 밥 한 끼. 

자신이 부여받은 미션은 어느덧 종료가 되었다. 

“그럼 우리, 식사도 끝났는데 여기서 커피까지 마시고 정리를 할까요?”……지환의 말끝에 희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오후 여덟시 십 분. 그녀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이곳에 앉아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비울 시간은 십 분이면 족했다. 

십 분. 통금 시간을 생각하면 십 분 뒤 떠나야 한다. 

“아니면 장소를 바꿔서 커피를 마실까요? 권희원 씨 편하신 대로.”“음…….”하지만 희원은 어쩐지 마주 앉은 맞선남과 십 분 안에 정리가 되는 건 아쉬웠다. 

다신 볼일 없는 만남이라면 오늘만큼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럼 커피 말고, 우리 여기 Bar에 올라가서 와인 한잔 더 해요.”희원은 어제 획득한 통금 열한 시 찬스를 오늘 쓰기로 한다. 

갑갑하고 빡빡한 일상 속, 지환은 그런 시간 안에 만난 동지처럼 느껴졌다. 

지환도 자신처럼 인연을 기대하고 나온 게 아니라니 외려 더욱 편하게 여겨진 것이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해도 되었고, 억지로 변명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시간 괜찮습니까? 아까 통금이 있다고.”“찬스가 있어요. 그 찬스도 서지환 씨 덕분에 획득한 찬스죠. 찬스 주신 주인한테 쓰려고요.”“그럼 바로 실행에 옮기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늦게까지 운영되는 호텔 Bar로, 만남의 장을 끝내기 위해 두 사람은 이동했다. 

“히끅, 서지환 씨는 히끅, 왜 비혼주의가 히끅, 되었어요?”달콤 쌉싸름한 와인의 맛에 취해 연거푸 들이켠 희원은 저도 모르게 취해갔다. 

마주 앉은 지환은 따라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비워낸 희원의 잔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답을 네 번 정도 한 것 같은데.”“어어? 진짜? 언제? 나 히끅, 안 취했는데, 히끅.”“괜찮습니까?”“아…… 사실 모르겠어요. 히끅, 이거 엄청 취하네요, 히끅.”발음도 영 시원찮고 몸은 점점 테이블로 기운다. 

불과 몇 분 사이 현저하게 행동이 느려지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손짓했다. 

“이만 일어나죠. 힘들어 보이는데.”“힘들어요.”히끅. 희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힘들어요. 집이 너어어어무 엄해서, 할아버지가 너어어어무 끝판왕이라서.”“…….”“갑갑하고, 답답하고 히끅,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히끅, 자유가 없어요.”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지환은 서둘러 일어나려던 행동을 멈췄다. 

잠자코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주기로 한다. 

“원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거든요. 히끅, 그냥, 그냥, 자유를 얻고 싶어요.”히끅. 날아가고 싶다. 날고 싶어어.

희원이 어설픈 날갯짓을 하듯 팔을 팔랑거리자 지환은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빈틈없는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시종일관 가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날고 싶다아…… 날고 싶어…… 자유…… 히끅.”그녀의 다른 모습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른 것만 같았다. 

여전히 두 팔을 파닥파닥거리며 날고 싶다는 말만 반복하는 희원을 바라보다, 지환은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지만ㅡ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 보이는 그녀가 보수적인 집안 속에 삶을 영위하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파닥거림이 멈추나 싶어 잠시 후 지환은 고개를 돌렸다. 

“……권희원 씨?”자냐?

“이봐요, 권희원 씨?”자냐!

테이블에 기댄 채 희원이 눈을 감고 있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지환이 테이블을 빙 둘러 걸어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권희원 씨, 권희원 씨. 괜찮습니까?”“…….”“권희원 씨. 권희원 씨.”아예 넋이 나갔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몸이 흐느적거린다. 

허. 지환은 당황한 듯 탄식을 터트렸다. 

때마침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 지환은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의 집이 분명한 수신자.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지환은 두 번째 전화가 시작되자 희원을 내려다보며 전화를 받았다. 

“네. 권희원 씨 전화입니다.”받지 말걸 그랬다.

“여보세요? 누구세요?”열한 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으니 희원의 집은 발칵 뒤집혔다. 

맞선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어 기다려보려 했으나 그녀 집안에서 생각하기론 천지가 개벽할 시간이다. 

그런데, 웬 남성이 전화를 받는다. 

남성의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며느리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거기, 누구인가?”ㅡ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저는 권희원 씨와 오늘 식사 약속이 있던 서지환입니다.상대는 다름 아닌 맞선남이다.

주변이 시끄러운 것을 보아 밖이라는 것을 인지한 권 선생은 차오르던 불안감을 잠시 내려놓았다. 

“아아, 그럼 서 선생 손주 되시는가? 우리 희원이는 어디 있고?”ㅡ그게 말입니다, 어르신. 옆에 있긴 합니다만.온 집안사람들이 침묵하며 휴대폰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ㅡ죄송합니다. 지금 권희원 씨가 술이 좀 과해서.“뭐? 뭐라? 술에 취해?!”아이고……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권 선생은 눈을 크게 치떴다. 

밥만 먹고 차만 마시고 들어오라 했더니 이게 웬 망신살이란 말이냐?!

상대는 이렇게 멀쩡한데 왜 우리 애만 이렇게 취해서!

“아이가 전화도 못 받을 지경인가?”권 선생이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지환의 목소리가 들린다. 

ㅡ죄송합니다. 제가 손녀분께 결례가 많습니다.“아니, 아닐세. 누가 먹으란다고 먹을 애도 아니고, 지 손으로 지가 먹겠다는 걸 말린다고 듣는 애도 아니고.”권 선생은 누구보다 손녀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멀쩡하다가 순식간에 취하는 손녀딸의 주사도 익히 알고 있다.

“해서, 지금 어디에 계신가?”ㅡ맞선 자리 건물 그대로 있습니다.“호텔인고?”ㅡ……크게 보자면 그렇습니다.희원의 부친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키를 찾으려는 것을 보아 딸아이가 있는 곳으로 직접 가려는 모양이다. 

일단 희원이 차는 그곳에 두고 와야겠어. 부친이 말하자.

그래요. 그게 좋겠어. 모친이 대꾸했다. 

“자네, 검사라고 했는가?”그사이 권 선생은 다시 지환에게 물었다. 

ㅡ예. 그렇습니다. 어르신.“그것참 잘됐구먼.”술만 마시면 정신 못 차리는 이 망나니 같은 손녀딸의 버릇을 단단히 뜯어고쳐야겠다. 

권 선생은 집을 나서려는 희원의 부친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기다리라 했다. 

“우리 애 술버릇 좀 고치게 자네 밑에 순사들 불러다가 감방에 넣어줘. 망신살을 뻗쳐야 고쳐먹을 위인이니까.”ㅡ예? 어르신. 그게 무슨…….끙. 모친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이마를 짚었다. 

딸아이의 술버릇에 언제고 사달이 나지 싶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그 화상은 내가 직접 내일 찾으러 갈 테니 번거롭겠으나 데려다가 가까운 유치장에 구겨 넣어주게. 그럼 수고합세.”ㅡ어르신! 어, 어르신!권 선생은 단호히 전화를 종료했다. 

“지금부터 희원이한테 전화하지 말아라! 내가 아주 이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놓을 테니!”“아버님, 그래도 상대방 입장이 있는데요…….”“입장은 무슨 놈의 입장! 이 시간까지 같이 술을 마셨으면 그만한 책임도 따르는 게지! 희원이한테 전화하지 마라!”권 선생은 호된 음성으로 단단히 이르며 방으로 사라졌다. 

통화를 종료한 지환 역시 희원의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르신, 끝판왕 맞는 것 같네.”술에 취했다고 손녀딸을 유치장에 넣으라니. 

하…… 지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와인을 마시면 금방 취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으니, 그저 관망한 대가란 상당했다.

“순사……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단어인데.”그나저나 일단 나가야겠다. 

손님으로 남은 테이블은 자신들뿐이고, 그녀는 표정을 보아하니 본격적으로 잠에 빠진 듯 한동안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지환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곁눈질로 다시 희원을 살펴보니 날아가는 꿈이라도 꾸는지 비실비실 웃고 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와중에 이 여자.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 손님.”참 잘 잔다. 

“검사님, 어제 요청하신 백업 자료 책상에 뒀습니다.”“네. 알겠습니다.”아득하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꿈인가? 희원은 반대편으로 몸을 뒤척였다. 

“검사님, 편수섭 구속 영장 나왔습니다.”“아아. 그렇습니까?”편수섭. 편수섭!

그 마지막까지 웃기던 그 악당 범죄자 아냐?

꿈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인상이 강렬하긴 강렬했나 보다. 

“흐응, 흐응…… 웃겨…….”흐응, 흐응. 희원은 편수섭을 떠올리며 잠결에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다보니 지환도 떠오르고, 어제 먹은 식사도 떠오른다. 

킁킁. 희원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며 풍기는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 뭔가 낯선데 익숙해. 뭐지? 어디서 맡았지? 

그래, 맞다. 어제 맞선남 재킷에서 맡아본 냄새랑 비슷해. 

“좋다…….”이건 무슨 향일까. 내 방에 이런 향이 있었나?

그런데 침대는 왜 이렇게 딱딱하지? 엄마가 매트리스 갈았나? 

“어…… 검사님, 노복구는 지금 구치소 이동한답니다.”“알겠습니다. 재판 일정 확인해주세요.”“네. 검사님.” 코끝에 이불을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며 피식피식 웃던 희원은 점점 미소를 지웠다. 

누워있는 공간이 낯설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눈을 뜨고 싶어지는 욕구가 점점 강렬한데, 그럴수록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꿈인 줄 알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명해져 희원은 경직되었다. 

뭐, 뭐지? 그녀는 어제의 기억을 애써 되돌렸다. 

가볍게 와인을 마시러 Bar로 올라갔고. 

마찬가지로 검사님과의 대화, 즐거웠고.

……그러고? 

그다음은……?

“검사님, 중국도피사범 검거 명단입니다. 공안부에서 은닉 재산을 파악하고 있다고 합니다.”“주세요. 바로 확인하겠습니다.”헐. 맙소사. 

여긴 대체 어디냐! 어디냐고!

희원은 슬금슬금 눈을 떴다. 

아주 살짝 떴지만 사무실 분위기라는 것을 단번에 확인한 희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에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깼습니까?”헐.

희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꽉 감았다. 

꿈이야…… 이건 꿈이야…….

꿈이라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은 드럽게도 쪽팔리고 미칠 것만 같은 상황.

심장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르내렸다. 

이윽고, 제발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깼으면 일어나요. 괜찮으니까.”애석하게도 실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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