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또 만날 일 있겠어?
언젠가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눈을 떴는데 전혀 모르는 세상에 서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짜릿할까? 무서울까? 난 어떻게 반응할까?
“권희원 씨.”아아. 짜릿하고 무서운 느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냥 쪽팔리고 더럽게 수치스러운 느낌이었어.
헷. 진짜 진짜 쪽팔리다.
“권희원 씨?”이런 옘병! 쪽팔려! 너무너무 쪽팔려!
내 이름 좀 그만 불러!
쪽팔리고 수치스러워서 돌아가시겠다고!
“물론 잠이 덜 깼다면 더 자도 됩니다. 되긴 하는데.”“…….”“잠시 후면 오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텐데. 괜찮으면 더 누워 있어도 됩…….”“깼어요. 깼답니다.”희원은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눈을 떴다.
사무실 풍경. 책상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지환과, 그 옆에 사이드로 마련된 책상에 앉아 자신을 보는 두 명의 사람들이 있다.
지환은 파일철을 툭툭 쳐서 정렬하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커다란 눈엔 당황함이 서려 있다.
“어제 먼저 취하셨는데 도저히 모셔다드릴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어흐…… 제가 또…… 이런 실수를…….”희원은 지환의 말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죽고 싶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여긴 제 사무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치장보단 검사실이 나을 것 같아서.”“네? 유치장……이요?”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유치장’이라는 단어에 폭주한 생각이 뒤엉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대체 유치장은 무슨 말이에요……
제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혹시 저, 기물파손…… 했나요?”“아뇨. 아닙니다.”“그럼 혹시…… 풍기문란……? 음주운전……?”불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예상 죄명을 읊는 희원을 바라보다 지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일 없었습니다.”“그럼 제가 왜 유치장을…….”희원이 울먹거리며 묻자 지환은 미소를 지었다.
지환이 앉아 있던 사무관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 말하자 두 사람은 커피나 한잔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일어나요. 이제. 다들 나갔으니까.”“아…… 진짜 정말, 진짜로 정말로 죄송해요…….”희원은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보니 지환의 재킷이 이불 대신 있다.
향이 좋다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질 않았나, 그러다가 잠결에 피식피식 웃질 않았나.
굳이 안 떠올라도 좋을 것만 같은 기억들이 떠올라 희원은 현기증이 일었다.
어흑…… 어흑어흑……
나 진짜…… 어흑…… 어흑…….
얼굴 상태가 어떤지 몰라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희원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지환은 연신 피식피식 웃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희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만 간신히 열어 웅얼거렸다.
“정말 유치장 갈 일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저의 죄목은 뭔가요……?”“아아, 뭐. 굳이 적용하자면 경범죄 적용이 가능할 것도 같긴 한데.”“결국 경범죄…….”“자연훼손이 있었고.”꺄아! 꺄아! 검사님! 이 꽃잎 좀 봐요! 흩날려요!
희원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벚나무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나무를 흔들어대던 자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이건 망상이야.
“불안감 조성이 있었고.”우쭈쭈쭈. 착하지~ 착하지~ 어구구구 예쁘다~ 예쁘다~ 이리온~ 해치지 않아요~
……트럭 아래 숨은 고양이를 보겠다고 쭈그리고 앉아 해치지 않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영상이 스친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것도 망상이야!
희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길거리 음주소란은 뭐, 당연했고.”“혹시 제가…… 노래도……?”“그건 ‘노동요’ 정도로 하죠. “…….”“부축하느라 힘들었는데 노래로 힘을 북돋아주시더군요. 인상 깊었습니다.”“아…… 아아…… 진짜로 죄송해요…… 미치겠다…….”희원은 결국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으아으으으아아아아…… 아으으으으…….
놀리는 재미가 상당한 희원의 반응을 보던 지환은 소리 없이 웃었다.
기억이 나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으나, 상당한 괴로움이 수반되고 있음은 잘 알 수 있겠다.
“검사님, 저 그럼 처벌받나요? 자연훼손에 불안감 조성에 음주소란이면, 처벌 받나요?”흐엉.
“물론 권희원 씨가 세금으로 조성한 나무를 흔들긴 했지만 튼튼한 나무가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훼손은 미수고.”“…….”“불안감 조성은 했지만 고양이는 권희원 씨의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적용 불가고.”희원은 슬금 시선을 들었다.
“음주소란이 좀 크긴 한데, 목격자나 피해자가 없었고 동행인에게 일정 시간 기쁨을 주었으니 일단락하죠.”흑…… 기쁨…….
아흑…… 죽고 싶다…….
희원은 제 머리를 쿵쿵 치며 탄식했다.
“권희원 씨, 노상…….”“그만! 제발 그것만은 제발! 제발 그만!”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노상! 노상이라니!
노상방뇨라니이이이이!
죽어버릴 거야아아아아!
“노상 그렇게 술 마시면 정신을 못 차립니까?”“……저 지금 놀리신 거죠. 혼자 재밌어 죽겠다고 지금 놀리는 거죠!”“한국말 끝까지 안 들은 건 권희원 씨입니다.”“하…… 진짜 노상방뇨까지 했다는 줄 알았잖아요.”“이 여자 수상하네. 전과 기록을 좀 봐야 하나?”“쳇. 그런 거 없거든요? 그리고 술 마시고 취하는 건 일상다반사이긴 하지만 어제처럼 무리하진 않는다고요. 어젠 대체 왜 그렇게 술이 잘 들어간 거야…….”“맞선 상대가 꽤 괜찮았나 보죠.”“뭐라고요?”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문이 열린다.
“서검, 바빠?”동료 검사임을 알 수 있는 복장으로 출입증을 목에 건 여성이 검사실로 들어선다.
편의점봉투를 들고 들어서던 여성은 희원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실례. 조사 중이었어?”“아니야. 들어와.”여성은 희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누웠다 일어났음이 선명한 머리로, 지환의 재킷으로 무릎을 덮고.
신발도 없이, 맨발?
“서검, 이분 누구셔?”어딘가 모르게 위풍당당한 여성을 바로 보지 못해 고개만 주억거리던 희원은 어서 지환이 자신을 소개해주길 기다렸다.
이 상황을 아름답게 포장해주길 은근 바라기도 했다.
“이차저차, 아는 사람이야.”이차저차라뇨! 이봐요!
“아아. 서검 아는 분이야?”“그건 그렇고 넌 아침부터 웬일?”그건 그렇다니! 말을 똑바로 해야지 이 양반아!
이차저차 아는 사람이라고 할 바엔 경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라, 차라리!
쳇. 희원은 지환의 어설픈 소개에 눈꼬리를 올렸다.
이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여성을 바라보며 묵례했다.
“권희원입니다. 서 검사님과는 이차저차 알고 있는.”힐끔, 지환이 희원을 바라보다 피식 웃는다.
“네. 반갑습니다. 서지환 검사 동기 차정윤입니다.” 차정윤 검사.
명찰에 적힌 이름을 빛의 속도로 스캔한 희원은 통성명을 마친 뒤 허리를 쭉 펴 세우며 턱을 들었다.
왜인지, 기죽고 싶지 않다.
“아, 맞다, 아침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내 거 사는 김에 서검 것도 샀어.”이거. 정윤은 생각에서 깨어난 듯 지환의 책상으로 걸어가 편의점봉투를 내렸다.
“방석홍 사망사건 목격자가 매수됐나 봐. 어제 사실 확인서를 작성했대. 다시 수사해야 할지도 몰라.” 에효. 정윤은 한숨을 내쉬며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환은 고개를 간혹 끄덕이며 계속 서류를 정리했다.
“원래는 조금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그거 보고받느라고 좀 늦었어. 아침 안 했지? 같이 먹자.”“아침이 아니라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다. 차검.”“무슨, 점심을 이렇게 빨리 먹……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정윤이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서류 정리를 다 끝낸 지환은 일어섰다.
휴대폰과 차키를 들고 소파로 걸어온 지환은 희원에게 일어서라 손짓했다.
“나가요. 해장합시다.”해장? 정윤은 뒤돌아 동그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럽시다! 나갑시다! 당장!
희원은 정윤의 시선을 의식하며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섰다.
“어제는 서지환 씨께 제가 대접 받았으니, 밥은 제가 살게요. 맛있는 걸로 먹죠.”어제? 대접? 밥?
정윤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환은 소파 끝에 두었던 그녀 신발을 가져다 내려주었다.
“신어요. 불편할까 봐 벗겨뒀어요.”“그럼 저 좀 잡아주실래요?”지환이 하이힐을 신으라 하자 희원이 지환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팔을 내밀었다.
어랍쇼? 정윤은 혼자 신어도 되는 하이힐을 굳이 지환에게 의지해 신는 희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희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가방을 들고 눈을 바로 뜨며 씽긋 웃었다.
어쩐지 단 한 순간도 저 여성에게 지고 싶지 않은 묘한 오기를 품고 희원은 정윤에게 고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또 봬요.”“아, 네. 안녕히 가세요.”정윤은 나란히 밖을 나서는 지환과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내 봉투 속 샌드위치를 뜯어 우적우적 먹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이나 하러 가자.”우유마저 뜯어 벌컥벌컥 마시며 정윤 또한 지환의 사무실에서 퇴장했다.
“점심치곤 좀 과한데요.”근처 한정식 집으로 이동한 지환은 밑도 없이 깔리는 반찬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Bar에서 마신 와인은 사려고 했는데 그 지경이 되어서. 이거라도 드시고 퉁 치죠.”퉁.
지환은 한 꺼풀 벗겨진 듯 더욱 자연스러워진 그녀 단어 선택에 미소를 지었다.
“업무 중에 접대는 위험하니 각자 계산하는 걸로 합시다.”“아아. 업무랑 관계없는 사람인데도 그래요?”“누구든 업무와 잠정적 관계가 있을 수 있으니까.”“뭐, 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다음에 만나서 은혜를 갚…….”아. 아아.
다시 만날 일은 없는 사람이지.
희원은 말꼬리를 흐렸다.
지환은 대꾸를 아꼈고, 국을 뜨며 입술을 열었다.
“신분증이나 면허증도 안 가지고 다닙니까?”“있어요. 왜요?”“없던데.”집엘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릎 쓰고 그녀 가방을 뒤졌다. 지갑이 없더라.
희원은 자신의 휴대폰 케이스 밑을 눌렀다. 쏙 하고 빠지며 신분증이 꽂혀 있다.
오. 지환은 미처 몰랐다는 듯 바라보았다.
“휴대폰에 그런 공간이 있다니. 신세계네요.”“하나 사세요. 편해요.”희원도 마찬가지로 국을 떴다.
반찬을 먹고 국을 먹는 와중에도 시선은 휴대폰에 가 있다.
집에서 전화가 올 때가 지났는데, 한 통이 오질 않는다.
기어이 파였나……
호적…….
“모친께서 아침에 전화 주셨습니다. 제가 받았는데, 검사실에 있다고 하니 일어나면 보내달라 하셔서.” “민폐가 많았습니다. 진짜 부끄럽네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위험한 세상입니다. 음주는 적당히.”“뭐, 네. 음주는 적당히. 술은 죄가 없으니까요.”흐…… 난 집에 가면 죽었다…….
희원은 걱정을 한가득 품은 채 부지런히 식사를 이어 나갔고, 두 사람은 빠르게 식사를 끝마쳤다.
단조로운 대화를 이어간 후 각자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호텔로 갑니까? 차가 거기 있을 텐데.”“네. 호텔로 가려고요. 끌고 가야죠.”“택시 잡아 줄게요.”“아뇨. 제가 그냥 잡고 갈게요.”희원은 지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척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만남이지만 끝맺음은 완벽해야 했으니까.
……결혼에 뜻이 없는 사람들끼리 만났던 어제, 그리고 오늘까지.
“그럼 내내 건강하세요. 이만 가볼게요.”여러모로 미안함이 크다고.
지환은 희원이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붙잡았다.
“도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와, 든든한데요? 현직 검사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빈말 아니니까.” “…….”“사소한 일이라도 생기면 연락주세요.”“네. 그럴게요.”다신 만날 일도, 엮일 일도 없을 두 사람은 편안한 시선으로 악수했다.
그럼 갈게요. 희원은 지환의 손을 놓았다.
이불을 발로 차다 못해 지붕을 뚫고 날아갈 기억들만 가득 안은 채, 희원은 집으로 돌아갔다.
별스런 선자리를 다 경험하는구나. 밑도 끝도 없이 한탄하면서.
이튿날.
“머리가 잘릴 뻔했어.”무용 연습을 끝낸 희원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를 서둘렀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동료 구언과 통화를 하며 그녀는 도로 위를 내달렸다.
ㅡ용케 안 잘렸네. 너 예전에도 통금 어겨서 할아버지가 머리 자른다고 하지 않았냐? 단발령?“아니. 아니아니. 머리카락이 아니고 이번엔 진짜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고.”ㅡ아아. 머리카락 아니고 머리. 참수형이네.“그랬다니까. 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다. 어흐.”스피커로 구언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구언은 그녀 집의 엄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답답해하는지도 잘 아는 벗이었다.
양쪽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집은 집대로 더욱 엄해졌고, 그녀는 그녀대로 부지런히 반항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는 집안이기도 했다.
ㅡ그나저나 맞선남은 무슨 죄냐? 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갔을 거 아냐.“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걸 깨닫지 않았을까?”ㅡ검사일 하면서 팍팍했을 텐데, 니가 재밌는 경험을 선사하긴 했네.“잠 한숨도 못 잤어. 진짜 이불킥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상상만 해도 웃긴지 녀석이 숨넘어가듯 웃는다.
그 웃음소리에 전염된 희원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따라 웃기 시작했다.
ㅡ맞선남한테 보은은 안 하냐? 그냥 이렇게 헤어지고 끝이야?“보은은 무슨, 상대도 원하는 것 같지 않고. 선이라는 게 원래 결혼 아니면 일회성이야.”ㅡ야, 너무 극단적이다.희원은 신호를 기다리며 멈췄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며칠은 나 죽었소, 하며 조용히 지내야 한다.
“하여튼 내일 연습 나오지? 내일 봐.”ㅡ알았어. 운전 조심하고. 들어가라. “응. 끊자.”희원은 통화를 종료했고 신호가 바뀌는 것을 확인하며 액셀을 밟았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희원이 출발하는 때, 갑자기 차가 끼어들었다.
“꺄아아! 엄마아ㅡ!”끼이익, 쿵ㅡ!
충격에 반동을 일으켜 앞뒤로 상체가 움직였던 희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들만 붙잡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앞 차량에서 중년의 남성이 뒷목을 잡고 내린다.
앞 차량은 고급 외제 세단.
“아아, 목이야. 아가씨, 뭐해! 나와!”“하…… 진짜 미치겠네…….”구언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지 1분도 되지 않은 상황.
대체 왜 고통과 수난은 한꺼번에 오는 것이냐, 희원은 절망하며 차에서 내렸다.
중년의 남성은 더욱 격렬하게 뒷목을 잡았다.
“선생님. 이거 제 과실은 아닌 것 같은데요?”차에서 내린 희원은 충돌한 부분을 바라보다가 남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좌회전 신호 받았고, 저는 신호 따라 가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차선 변경하셨잖아요.”“뭐? 내가 언제 갑자기 바꿨다고? 이 사람아, 그쪽이 무리하게 속도를 내니까 충돌한 거 아냐!”“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허. 작정했네. 작정했어. 희원은 차량의 훼손 상태를 살폈다.
“아…… 목이야. 아가씨, 주행 속도를 그렇게 올리고 다니면 쓰나?”“일단 블랙박스 확인하시죠?”“블랙박스고 나발이고 됐고! 아가씨 면허증 줘봐!”목소리 큰 사람이 어쩐지 이기는 것 같은 기분.
“그럼 보험사 먼저 불러요.”“어허! 일단 면허증 줘보라고! 아가씨 내가 누군지 알아? 보험사보다 내가 더 정확한 사람이라고!”허, 참. 희원은 실소했다.
“내가 아저씨가 누군지 알면 자리를 깔았지, 안 그래요?”“아…… 이거 재판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려는데 통 안 도와주네.”응? 재판?
희원은 멈칫 했다.
사내는 차량을 살펴보더니 이번엔 허리도 짚었다.
“새로 뽑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차량을 박살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아가씨 뭐 이렇게 뻣뻣해. 어?”면허증 줘봐! 사내는 재킷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주며 면허증을 요구했다.
……변호사다.
“내가 이런 일 전문이야 아가씨! 어? 그렇게 뻣뻣하면 내가 봐줄 수가 없잖아! 사람이 말이야, 잘못을 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아니 그게 그러니까요, 선생님.”“전방주시 의무를 다하지 않고서는 뭐 이렇게 대책 없이 당당한 거야, 아가씨! 운전이 미숙하면 차를 끌지 말아야지! 나라 법을 뭐로 보고!”“아…… 그게요, 선생님.”괜히 변호사라니 마음이 쪼그라든다.
“내 치료비, 휴업손해금, 차량수리비 다 더하면 얼만지 알아? 아가씨가 그거 다 감당할 거야? 나이도 어린 게.”아이고 허리야…… 허리야…… 사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산만하게 하자 희원은 또다시 단전에서부터 깊은 분노를 끌어올렸다.
“근데 이 아저씨가 나를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이야.”“뭐, 뭐야?”“당신, 변호사면 다야? 난데없이 끼어들어놓고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희원이 허, 참, 허! 참! 을 연발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당신 내가 아주 가만 안 둘 거야.”명함을 찾아 번호를 꾹꾹 누르며 희원은 불타는 눈빛으로 신호를 기다렸다.
제발. 제발 전화를 받아요.
제발…….
제발!
ㅡ여보세요.“아, 여보세요?”희원은 사내에게 다가서며 통화 속 지환을 향해 상냥하게 인사했다.
ㅡ권희원 씨?“네. 저 희원이에요. 검사님.”검사? 사내의 눈빛이 일순 변한다.
희원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했다.
“아니이, 제가 지금 접촉사고가 났는데요. 앞에 계신 분께서 자꾸 변호사시라며 저를 압박하셔서 하는 수 없이 검사님께 도움을.”ㅡ이제 막 퇴근했습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여기요? 여기 검사님 계신 곳에서 가까워요.”아아. 지금 바로 오신다고요? 희원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신다고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라고요?
“알겠어요. 그럼 빨리 와주세요.”전화를 끊은 희원은 중년의 사내를 보며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잠시만 기다리시죠.”“아, 아니 아가씨, 그게 아니라.”희원은 손을 들며 다음 말을 제지했다.
세상 이렇게 든든한 동지가 있을 수 없었다.
“대화는 잠시 후에 섞죠. 아저씨.” 어서 와요! 검사님!
정의구현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