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데이트
“아아. 검사님한테 메시지가 왔네?”일단 차량을 밖으로 빼고 대화를 나누자는 중년 사내의 말을 냉큼 씹으며 희원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지환입니다. 차량 옮기기 전에 사진 먼저.]“아, 맞다. 사진 찍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 우리 검사님 말씀대로 사진 먼저.”흥. 희원은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메시지는 연달아 온다.
[상대 차량 번호판, 블랙박스 찍고][상대 차량과 자차 바퀴 선회 방향 자세히 촬영] [원거리로 차선이 함께 나올 수 있도록 촬영][파손 부위는 근접 촬영으로]희원은 지환의 설명 따라 촬영을 했다.
“아니, 내가 좋게 좋게 해결 보려고 했는데 무슨 검사씩이나 부르고…….”“어딜 봐도 좋게 좋게 해결 보려는 분으로 보이지 않아서요.”[촬영 끝났으면 차량 옮길 것.]“이럴 시간이 없어. 내가 바쁜 사람이라니까?”“저만큼 바쁘시겠어요? 전 머리가 잘리게 생겼는데?”이제 차량 옮기죠? 희원은 지환이 시키는 대로 차량을 옮기기로 한다.
[변호사 분께 말리지 말고 있어요.]“보나마나 5:5인데 아가씨, 그냥 6:4로 합의 봅시다. 내가 봐드릴게.”“기다려보세요. 전 잘 모르겠으니까. 말리기 싫거든요.”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다.
[지금 갑니다.]
차량을 옮기고 기다리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승용차가 다가온다.
상황을 살펴보는 듯하더니 이내 멈춰 선다.
“검사님!”지환을 발견한 희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허, 이게 무슨…… 중년의 사내는 중얼거리며 괜한 헛기침을 뱉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마친 지환은 차량에서 내려 희원을 향해 걸어왔다.
“다친 곳 없습니까?”“네. 저는 괜찮은 것 같은…… 아뇨, 잘 모르겠어요. 여기저기 아픈 것 같아요.”희원은 중년 사내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지환은 우선 차량의 상태를 살피며 중년 사내에게 걸어갔다.
희원은 주먹을 쥔 채 지환의 뒷모습을 응원했다.
어서! 어서 박살내 버려요!
정의를 구현해줘요! 선량한 시민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줘요! 검사님!
지환이 가까이 다가서자 사내는 더욱 시선을 회피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6:4면 크흠, 흠. 내가 뭐, 뭘 어쨌다고 이렇게 공권력까지…….”“저, 우병관 선배님 아니십니까?”중년 사내는 자신을 알아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어, 자네!”이내 눈빛에 환희가 물들며 목소리가 커진다.
영문 모르는 희원은 지환의 뒤에 서서 멀뚱멀뚱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환의 허리가 깊숙하게 내려간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서지환입니다!”“그래그래! 서지환이! 서지환 검사! 그래그래! 내 자네 알지! 알다마다!”헐…… 이게 뭐야……?
희원은 당황한 듯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정의구현을 하라고 불렀더니, 후배란다. 허리도 못 펴고 저러고 인사를 하고 있다.
중년 사내는 컬컬컬컬 굵은 웃음을 터트리며 지환의 등을 세차게 때렸다.
“반갑다! 반가워! 여기서 자네를 다 보고!”“하하, 개업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아니! 아니지! 바쁜데 무슨 일개 변호사 개업을 다 쫓아다니겠어! 중앙지검에 아직 있고?”“예! 그렇습니다!”헐…… 뭐야…….
희원은 스멀스멀 망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걸어갈 때까지 만해도 태평양처럼 넓어보이던 지환의 어깨가 이렇게 좁아 보일 수가 없다.
“근데 서검, 저 아가씨와 아는 사이인가?”“아…… 예. 이차저차.”또! 또! 또 이차저차!
내가 승용차냐?! 트럭이냐?! 이차저차 왜 자꾸 찾는 건데!
흠. 중년 남성은 괘씸하다는 듯 희원을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다시 목을 붙잡고, 허리를 두드린다.
힝…… 희원은 뭔가 잔뜩 낮아진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 수순을 몰라.”“죄송합니다.” 지환은 대신 사과하겠다는 듯 다시 허리를 굽혔다.
허! 뭐,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요! 나 대신 사과하라고 부른 줄 알아요?!
“선배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없겠어? 진단서 끊으면 최소 전치 8주 이상이야. 이건 무슨, 도로 위 김 여사도 아니고.”“식사는 하셨습니까?”“식사? 뭐, 재판 있어서 끝나고 막 먹었네. 자네는?”“저는 아직입니다.”“저런저런. 큰일 하는 사람이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예. 선배님.”……지들끼리 밥걱정을 하고 있다.
희원은 저토록 다정한 투샷을 바라볼 수 없어 잠시 눈을 감았다.
지환은 흠, 잠시 망설이다가 희원에게 다가섰다.
“권희원 씨.”척, 눈을 뜨며 눈꼬리를 올린 희원의 얼굴을 보다가 지환은 귓속말을 하듯 어깨 쪽으로 입술을 내렸다.
“왔더니 선배님이 계시네요. 이런 우연이.”“네네. 아주 잘 알겠네요. 아주 잘 봤습니다. 머리가 땅을 파고 들어가겠던데요?”“그러게 왜 버릇없이 굴었습니까?”“제, 제가 뭘요? 제가 무슨 버…….”쉿. 지환은 조용히 하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하…… 진짜 망신 망신 대 망신이다…….
희원은 입술을 꽉 깨물며 웅얼웅얼거렸다.
“저는 잘못 없다고요. 저 아저씨, 저 선배님께서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었단 말예요.”“선배님이 급하셨나 봅니다. 급하면 깜빡이는 깜빡할 수도 있죠.”뭐요? 이 작자가 진짜!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냐?!
“일단 내가 최대한 사과를 드리고 양해를 구할 테니 가만히 있어요.”“무슨 사과를 또 해……!”쉿. 지환이 또 조용히 하란다.
하…… 끓는다……
희원은 지환을 노려보듯 보다가 다시 웅얼웅얼거렸다.
“이제 보니 도움이라곤 조금도 되지 않는 위인이시네요.”“보기보다 쓰임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안 오시는 게 나을 뻔했어요. 사과 대행업체에서 나오신 줄.”“그러게 말입니다. 일정부분 동의하긴 하는데, 그것보단 권희원 씨.”“왜요!”“내가 힘이 없어 미안하긴 한데 경찰 좀 불러줘요. 난 안 될 것 같으니 다른 정의의 사도를 부릅시다. 조용하게.”그럼 일단 다시 선배님께 가보겠습니다.
지환이 소곤소곤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틀자 희원은 휘청였다.
“선배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제발 부탁인데…… 허리 좀 펴……
내가 다…… 쪽팔려…….
“서검. 저 개념 없는 아가씨와 이야기는 끝났나?”“네. 일단 양측 인사는 끝났으니 차량 상태 살피겠습니다.”지환의 말에 사내는 손사래를 쳤다.
“아아, 볼 것 없어. 볼 것 없어. 그냥 6:4로 정리하고 보험해결하자고.”“살펴야 해결하지 않겠습니까?”“볼 것 하나도 없다니까. 괜찮아.”“괜찮은 건지 아닌지는 살핀 후에 판단하겠습니다.”지환은 뒤돌아 희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권희원 씨.”뭐하냐는 눈빛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손가락을 까딱, 움직인다.
전화로 경찰서에 사고 접수를 마친 희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권희원 씨, 촬영 사진 좀 보죠.”
“6:4야. 더 들여다보면 뭐 달라져?”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내가 말을 보탠다.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환은 대꾸했다.
“일단 최대 속도 계산해봐야 할 것 같고, 바퀴 상태 보니 선배님께서 무리하게 끼어든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웃는 낯으로 할 말을 다한다.
사내는 느낌이 영 좋지 않다는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이미 교차로에 진입했기 때문에 후행 차량이 선행 차량의 주행 경로를 살피지 않았다면 과실인정이 가능하지. 전방주시 의무를 다하지 않았잖아.”서검, 과실 여부에 따라 5:5, 4:6도 가능하다는 거 알지 않나?
사내의 말에 희원은 번쩍거리는 사내의 차량을 바라보았다.
저 비싼 차량의 50% 수리비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보험료 치솟는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린다.
“선배님, 진로변경 차량이 방향지시기 작동 없이 다른 차마의 주행을 방해했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그러니까 내가 어느 정도 참작해서 6:4 하자는 거 아니야. 서검.”“스키드 마크도 없는 저속주행, 상대는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만 크다…….”“하…… 나 참…… 재수가 없어서, 그래, 방향지시등 미작동이 크지. 7:3로 해. 됐나?”지환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내는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흠. 지환은 다시 중얼거렸다.
“좌회전 차선에서 신호 받아 가는데 직진 차선 차량이 끼어든…… 방향지시등 없고 말만 많은 차가 있었다…… 이런 경우 도로교통법 제25조…….”“알았어, 알았어. 8:2, 아니, 9:1로 해! 내가 진짜! 하, 내가 진짜 서검이라 봐준다!”지환이 교통법을 운운하려들자 바로 제지하며 사내는 9:1을 외쳤다.
헐. 9:1?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 몇 마디로 5:5에서 9:1로 변하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아가씨!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오쇼! 합의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네? 아, 네네! 갑니다, 가요!”오 럭키! 9:1이면 횡재 아니냐?!
희원이 사내에게 걸음을 옮기려 하자 지환은 손을 뻗어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권희원 씨가 무과실 입증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블랙박스로 남은 내용 판단해보겠습니다. 선배님.”“이봐, 서검!”“헐, 진짜요? 나 무과실?! 진짜로?!”멀리서 지환의 이야기를 들은 희원이 냉큼 소리를 지르자 지환은 희원에게 차량으로 들어가 있으라며 또다시 손짓했다.
희원은 차량으로 사라지며 중얼거렸다.
“또 내 앞에서 멋있게 말하고 엄청 비굴하게 비는 거 아냐? 누가 그런 거 바란대?”의심의 눈초리를 한 채, 희원은 지환이 서 있는 자리를 계속 주시했다.
“아니 뭐, 나는 9:1 정도면 괜찮은데 뭘 또 무과실까지.” 아아~ 뭘 또 그렇게까지 팍팍하게~ 아이참~
선배님한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서검~?
“여보세요? 엄마, 나 차 사고 났는데 서지환 검사님께서 와주셨네? 작은 사고니까 걱정 말고 나 밥 먹고 들어가요~ 일찍 들어갈 테니 걱정 마세요~.”희원은 엄마에게 전화를 남긴 후 다시 상황을 주시했다.
헷. 어쩐지 그의 어깨는 조금 더 넓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많이 컸네, 서검. 뭐 이렇게까지 딱딱하게.”“죄송합니다. 과실은 과실이다 보니.”“됐고, 알았으니 이만 가봐.”“선배님, 약주를 좀 하신 것 같은데.”불쾌함을 담아 걸음을 옮기던 사내는 멈칫, 했다.
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눈빛은 무척 흔들리고 있었다.
지환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해합니다. 많이 드신 것도 아닌데요.”“아…… 뭐…… 검사를 어찌 속이나. 반주로 딱 한잔했어. 한 잔.”“크아, 반주 좋죠.”“집이 요 코앞이라서 말이야. 대리운전을 부르고 싶어도 워낙 가까우니 그것도 쉽지 않아. 알지?”“그럼요. 가까운 거리는 한잔 마시고 부르기가 영, 껄끄럽더라고요.”컬컬컬. 컬컬컬컬. 그렇지? 너도 그렇지? 사내가 웃으며 묻자.
캬캬캬. 캬캬캬캬. 그렇죠. 저도 그렇습니다. 지환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그래, 서검은 성격이 시원해서 좋아. 예전부터 그랬지만 말이 참 잘 통하고 말이야.” “선배님께서 워낙 예뻐해주지 않으셨습니까. 항상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그럼 일단 난 차로 들어가 있을게.”“어디 가십니까? 음주 운전은 중과실입니다.”사내가 휙, 돌아보며 눈을 희번덕거리자 지환은 뒷짐을 지고 바르게 섰다.
보기로는 군기가 바짝 잡힌 후배의 모습이다.
“서검, 그래서 어쩌자고? 말의 뜻이 뭔데 그래서?”“측정하시죠.”“자네! 이봐! 서지환 검사!”“예. 선배님.”후…… 사내는 깊은숨을 내쉬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딱 한 잔 마셨다니까?”“술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신 행위에 의의를 두니 측정은 필수입니다.”“그건 술도 아니야, 진짜 한 잔! 딱 한 잔!”“소주 두 잔 60ml 기준 처벌 대상 아니겠습니까? 한 잔 정도면 뭐, 편안하게 측정하시죠. 부담 없이.”“이 새끼가 근데……! 이봐! 서지환 검사!”그때였다.
사고 접수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도착한다.
사색이 된 사내는 경찰차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은 경찰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서지환 검사입니다.”“아, 네. 검사님. 안녕하십니까.”“사고 차량 운전자 음주 운전 혐의가 있으니 측정 부탁드립니다.”“예? 아, 예. 알겠습니다.”음주 측정과 보험사 관계자들까지 더해져 번잡해진 상황.
지환은 이를 가는 사내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마쳤다.
“무과실 입증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후에 이의 제기를 하시려거든 법원의 판단에 맡기시기를 권고드립니다.”“두고 보자 너, 서지환이.”“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선배님.”지환은 희원의 차로 돌아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머리를 내려 희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전투의 승리자.
“나와요. 내 차 타고 가게.”그녀의 시선에 그의 미소는 유난히도 빛난다.
“음주 운전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얼떨결에 지환의 차를 얻어 탄 희원은 전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옆에 있을 땐 그분한테서 술 냄새 전혀 안 났는데. 서지환 씨는 술 냄새를 맡은 거예요?”“아뇨. 못 맡았습니다.”신중하게 운전 중인 지환은 대꾸했다.
“평소 반주가 일상이신 분이거든요. 식사를 조금 전에 하셨다니 낚아본 거죠.”“아…….”“스스로는 술을 마셨다는 자각도 없었을 겁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을 만큼 멀쩡했을 거고.”그래도 마신 건 마신 거니까.
지환이 웃으며 설명하자 희원은 눈을 반짝거렸다.
헐…… 대단하다……
역시 검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고마워요. 서지환 씨 덕분에 해결 잘 봤어요.”“아깐 안 부르는 게 더 낫겠다더니?”“그, 그야 머리가 하도 땅을 파고드니까!”“…….”“밥, 맛있는 걸로 살게요. 아깐 정말 고마웠어요. 진심으로.”희원이 우물쭈물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지환은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우리, 또 보네요?”“그러게요. 또 뵙네요.”“잘 들어갔다고 문자 한 통은 보내줄 줄 알았는데.”“먼저 하시면 되잖아요?”“번호를 몰라서.”“번호,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저는 명함을 드렸는데 돌아오는 게 없으니 주기 싫은 모양이다 했죠.”“아…… 뭐, 선 자리에서 번호까지 드려본 적이 없어서요. 생각도 못 했어요.”“받기만 해봤겠죠. 이해합니다.” 부드럽게 코너를 돈다.
“어젠 별일 없었습니까?”“또 설명하자니 힘들긴 하지만 총정리하자면 머리가 잘릴 뻔했어요.”헤어가 아니고요. 헤드. 헤드가 날아갈 뻔했다고요.
희원이 손으로 목을 그어 내리는 시늉을 하자 지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장면, 어쩐지 상상이 되었다.
“집에 가는 길에 사고가 난 겁니까?”“네. 연습 끝내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려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됐네요.”차도 잃고, 시간도 버리고.
에효. 희원은 짤막하게 한숨 쉬었다.
그사이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초밥집 근처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아아. 여기서 좌회전이요. 좌회전하면 바로 보여요.”이 근처라고? 지환은 조심스럽게 그녀 말대로 좌회전을 했다.
“여기, 여기예요. 이 집 초밥 정말 잘하거든요.”“맛있다니 기대해보죠.”지환은 주차를 했고, 먼저 내려 희원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서비스가 상당히 좋으신데요?”“많이 먹을 예정이거든요. 이 정도는 해야 눈치 안 보일 것 같아서.”“네. 많이 드세요. 금색 접시로만 드셔도 눈치 안 줄게요.”두 사람은 편안하게 웃었다.
두 번째 만남이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7:40. P.M
많이 먹겠다던 말은……
“잘…… 드시네요……?”실화였구나…….
지환의 옆에 수북하게 쌓여가는 접시를 바라보며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몇 접시인지 눈으로 얼추 세기도 힘들 지경이다.
“초밥은 오랜만이라. 맛있네요.”“많이…… 드세요. 이미 많이 드셨지만 더 격렬하게. 더 힘차게.”“그러죠. 격렬하고 힘차게. 더욱더.”시원시원하게 입으로 밀어 넣는 초밥은 살살 녹는다는 명목하에 금방 사라진다.
마치 처음 나온 접시를 대하는 것처럼 그는 열정적으로 초밥을 먹었다.
쪼르륵, 희원은 사케를 따랐다.
“술을 좋아합니까?”“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탈이라서요. 술은 시공간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낮술은 생활이죠. 희원이 술을 홀짝 삼키자 지환은 웃었다.
“무용하신다며 낮술은 언제?”“춤과 함께 하는 낮술이라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낭만적이겠어요?”“아아. 그도 그렇겠네요.”어화둥둥 춤추며 술 마시는 희원을 떠올리자 디테일하게 상상이 된다.
지환은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술을 삼키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무용을 한 까닭일까, 별것 아닌 행동에도 고운 선이 드러난다.
꽤나 털털해 보이는 성격과는 달리 손끝엔 남다른 정서가 묻어났다.
“오늘은 권희원 씨의 귀가 시간 맞춰봅시다. 어르신 너무 무서웠거든요.”지환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운전대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네. 오늘도 늦으면 머리만 잘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지가 절단 날 수도 있어요.”“그럼 몇 접시만 더 먹고 일어섭시다. 잘하면 차도 한잔 마실 수 있겠네요.”“네. 그래요.”그가 초밥을 한 접시 비울 때, 그녀는 술잔을 비웠다.
자그마한 통에 든 사케는 혼자 마시기에 안성맞춤이다.
“어? 서검?”그때였다. 그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희원은 술을 따르다가 멈칫했다.
흰 살이 매끄럽게 보이는 초밥을 들던 지환은 젓가락질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집에 안 갔어?”일전에 검사실에서 마주쳤던 차정윤 검사다.
지환은 먹으려고 집었던 초밥을 내렸다.
“선약이 있어서.”“아아. 그래. 난 민 검사하고 밥이나 먹을까 하고 왔지. 민 검사 지금 화장실 갔어.”정윤이 가까이 다가오며 마주 앉은 상대의 얼굴을 보려는 듯 다가왔다.
희원은 등을 꼿꼿하게 폈다. 턱을 당기며, 눈에 힘을 주었다.
“우리 구면이죠? 안녕하세요.”정윤이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희원이 인사하자 다시 지환에게 시선을 돌린 정윤이 입을 열었다.
“서검, 집에 아버지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오셨어. 지금 계시고.”헐. 아버님이 오셨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희원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일찍 퇴근한 모양이다.
“아깐 집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튕겨져 나가더니 이런 미인분과 식사를 하고 있었네?”얘기를 듣고 있자니 공연히 미안해진다.
희원은 괜히 자신 때문에 지환의 스케줄이 틀어져버린 것 같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서둘러 일어나야겠다.
“서검 이거 안 되겠네? 이차저차 아는 분과 만나기로 했으면서 나한테 이제 거짓말까지 해? 실…….”“차정윤 검사, 미안한데.”정윤의 말을 뚝 자르며 지환은 팔을 뻗어 희원의 앞에 놓인 사케 병을 잡았다.
“남은 대화는 내일 사무실에서 합시다.”주변을 정리하던 희원은 지환이 자신의 술잔을 채우는 손끝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요, 서 검사님.
나는 닥치고 술이나 마시라 이겁니까?
이차저차 아는 사람 앞에선 차정윤 검사와 대화도 하고 싶지 않은 거요?!
“보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데이트 중이거든.”“미안. 미안 미안. 내가 눈치도 없…… 뭐라고?”데, 데이트……?
느닷없는 지환의 단어선택에 정윤은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어…… 놀란 건 희원도 마찬가지.
‘데이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온갖 총천연색의 상상이 희원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 사람과, 데이트?
둘 사이 혼자만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환은 어서 한잔 더 마시라며 희원에게 손짓했다.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시던 건 다 비우고 일어나죠.”……그 눈빛과 손짓.
“음식 남기면 벌 받습니다, 권희원 씨.”아직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