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할 말 없지?
희원을 집 앞까지 데려다준 지환은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집으로 내달렸다.
퇴근 시간을 조금 빗겨선 도로는 제법 달리는 맛이 있다.
지환은 불이 환히 켜진 강변도로를 따라 내달리며 음악을 틀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팝의 전주는 지금의 어둠과 곧잘 어울렸다.
힘들어요. 집이 너어어어무 엄해서,
할아버지가 너어어어무 끝판왕이라서.
“자유라.”
갑갑하고, 답답하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자유가 없어요.
지환은 문득 그녀가 취중에 뱉었던 말이 떠올라 곱씹었다.
차창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등으로 턱을 받치며 다른 손으로 편안하게 핸들을 움직였다.
……조부께선 무형 문화재,
부친께선 저명한 판소리 명창.
명맥을 이어받은 한국무용 전공의 손녀. 그 손녀의 엄한 통금 시간.
“종잡을 수가 없는 집안이네.”……자유를 꿈꾸며 술을 즐기는 그녀.
그런 손녀를 유치장에 잡아다 넣으라는 어르신.
“뭐, 우리 집도 만만치 않지만 그 집도 참, 사연이.”휴. 때마침 전화가 온다.
지환은 걸려온 전화를 블루투스로 받았다.
“아, 형.”형의 전화다.
ㅡ바쁘냐?“아니. 나 집으로 가. 아버지 오셨대서.”ㅡ그래. 들었다. “집이야?”ㅡ아니. 학교. 아직 볼 게 좀 남아서.형은 대학의 교수였고, 선 자리를 통해 지금의 형수를 만났다.
형수도 마찬가지로 대학의 교수다.
딸을 낳은 형수는 종가의 맏며느리라는 사명감에 아들을 낳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형은 형수의 건강을 위해 그러한 집안의 짐을 과감히 포기했다.
순조로운 과정은 아니었다.
“알았어. 나 운전 중이야.”ㅡ그래. 아버지가 너 결혼시킨다고 이번엔 작정하신 것 같던데 들어가서 이야기 잘하고. “그래. 또 통화해.”자연스럽게 지환은 대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복잡한 사정 속, 지환이 더더욱 비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
지환은 형과 간단한 전화 통화를 종료했다.
문득 희원이 생각난다.
오늘도 잘 들어갔다는 연락은 오지 않는다.
집안 사정이 이렇고 결혼에 뜻이 없다 보니 지환은 선 자리에서 만난 여성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없었다.
약간의 호감이 오간대도 어디까지나 호감일 뿐.
그러한 감정을 확장시키고 싶은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뜻 없는 연락을 취한다는 건 상대방을 향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전화 한 통 해볼까. 잘 들어갔냐고 정도는.”
먼저 하시면 되잖아요?
“전화 한 통 걸어본다고 의미 확장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번호, 물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지환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어 이어지는 노래는 하필 또 사랑스러운 기운이 담뿍 담긴 노래다.
걸어볼까, 말까, 걸어볼까, 말까.
그래도 되는 일인가, 아닌가, 되는 일인가, 아닌가.
어쩐지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맞선 상대에 대한 생각에 지환은 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들어가면 결혼 문제가 운운될 것이고, 아버지의 강한 압력 속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고.
권희원 씨의 엉뚱한 몇 마디를 듣고 나면 어쩐지 기운이 날 것도 같은데.
“휴대폰 연락 통금도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결심을 굳힌 듯 지환은 도로를 마저 빠져나와 적당한 주차구역에 차를 댔다.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목록에 찍힌 희원의 전화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터치를 하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
“어우씨, 뭐야.”난데없는 벨소리에 깜짝 놀란 지환이 행동을 멈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닌, 몹시도 방정맞고 시끄러운 벨소리.
근원지를 찾아 지환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그녀가 휴대폰을 두고 내린 모양이다.
“참 꼬리 길어. 진짜 꼬리 기네.”만날 때마다 하나씩 흔적이 생기는 희원을 떠올리며 지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인지 그녀의 휴대폰을 발견한 순간 안도가 되었다.
휴대폰을 돌려주려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짧은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쳤다.
이 와중에도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유구무언]
저장된 이름만으론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지환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혹 희원이 자신의 휴대폰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뭐, 일단 받아 봅시다.”지환은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터치했다.
“별 거 없었어, 진짜로. 그냥 검사님한테 감사해서 식사 대접한 것뿐이라니까?”씻고 나온 희원은 귀찮을 정도로 졸졸 따라오며 지환과의 만남을 캐묻는 엄마와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희원아. 진짜 아무것도 없어? 또 만나자 이런 약속도 없었고?”“없었다니까. 그러니까 선 자리 좀 그만 만들어요. 내 주변에 선보는 사람 한 명도 없어! 나만 이래!”“야, 니 주변에 결혼 안 한 친구가 어디 있어. 다 시집갔는데 누가 선을 보냐?”“하…… 좌우지간 나 시집 안 가. 평생 엄마랑 이렇게 살 거니까 엄마가 할아버지 쓸데없는 짓 좀 못 하게 해.”희원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렸고 엄마는 희원의 손을 붙잡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지 말고 희원아,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고 데이트하고. 응?”
데이트 중이거든.
“그러다가 연애 깊어지면 결혼도 하는 거지. 왜 이렇게 혼자 살겠다는 거야.”“아…… 나는요, 엄마.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다니까? 내가 무슨 누구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말이 돼?”“누군 처음부터 며느리로 엄마로 태어났어? 다 하다 보니 되는 거지.”“그러니까. 난 그게 싫다고. 난 나만 사랑하면서 살 거야.”물론 엄마는 예외.
희원이 헤실헤실 웃자 술 냄새를 맡은 엄마는 눈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혼나고도 술이야? 또 술이야?!”“얼마 안 마셨어. 딱 두 잔. 일찍 들어왔잖아요.”“검사님이 데려다주셨어?”“택시 타고 간다는데 데려다주더라. 가까웠으니까 뭐, 얻어 타고 왔지.”에효…… 딸아이의 고된 통금 시간을 모르는 것이 아닌 엄마는 희원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희원의 통금은 가족 누구에게나 편안한 제약은 아니었으나, 제약이 생긴 이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볼에 가져다대며 희원은 중얼거렸다.
“나는 시집 안 가고 이렇게 엄마랑 맨날맨날 보면서 살 거야. 그냥 엄마 딸로만 살게 해줘요. 응?”“희원아, 너도 시집가서 너 같은 딸 낳아야지.”“…….”“너 같은 딸 낳아서, 엄마처럼 행복하게 살아야지.”희원은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보았다.
볼에 가져다댄 엄마의 손바닥에 자잘한 주름이 느껴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시선으로, 엄마는 딸아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엄마는 태어나서 제일 잘한 게 우리 희원이 낳은 거야.”“……맨날 속만 썩이는데 무슨.”“진짜로. 진짜로. 너희 아빠 만나서 제일 감사한 게, 우리 희원이 낳아 희원이 엄마로 살 수 있는 거야.”어떠한 기쁨과도 널 바꿀 수가 없단다.
그 어떤 감동과도 널 견줄 수가 없단다.
“너무 겁먹지 마. 다 자연스럽게 되는 거니까.”“몰라. 나는 우리 임정순 여사님의 딸일 때가 제일 좋아요. 권희원일 때가 제일 좋고. 안 변할 것 같아.”으휴. 엄마는 오늘도 실패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세차게 뺐다.
눈을 가늘게 뜬 엄마는 얄미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딸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화상, 어후, 이 징글징글한 화상.” “헐?”“내가 어쩌다가 이런 화상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까. 에효.”“와, 태세전환 속도 보소? 엄마, 이래도 됨? 방금 전까진 내가 기쁨이니 감동이니 이래놓고?”“됐어! 씻고 잠이나 자!”엄마는 쌩하니 일어나 방을 나선다.
헐…… 잠깐 감동 받을 뻔했는데, 역시나 끝이 좋지 않다.
왜일까, 좀처럼 지환의 말이 지워지질 않는다.
“이차저차라더니, 데이트는 무슨.”에휴. 희원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고, 그녀 역시 전화번호를 내어주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냐는 말은 하지 않았고,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악수를 나누었을 뿐이다.
“연락을 해볼까? 데려다주셔서 감사하다고?”희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래. 그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할 수 있잖아.
꼭 애프터가 오가야 하지 않아도 가볍게 문자 정도, 보낼 수 있잖아.
감사했으니까.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아. 맞다. 아까 내가 전화 걸었으니 서지환 씨한테도 내 번호 남았을 텐데.”희원은 후다닥 일어나 걸어놓은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문자가 와 있으려나?
운전 중이니 문자나 전화는 안 했겠지?
정말로 운전 중이라 안 하는 걸까?
“근데 왜 휴대폰이 없냐.”아무리 뒤적뒤적해도 휴대폰이 없다. 희원은 우다다 달려 가방을 열었다.
자그마한 가방은 뭘 뒤져볼 의욕도 들지 않게 열자마자 한눈에 내용물이 다 보인다.
“헐. 내 휴대폰.”초밥집에서 계산을 할 때 꺼냈으니 분명 있었고.
카페에서 디저트로 차를 마실 때 꺼내어 시간을 봤으니 분명 있었고.
그렇다면.
“아…… 차에다 두고 내렸다…….”호우…… 맙소사…….
희원은 눈만 깜빡거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지금 전화하면 차 돌려서 오고도 남을 사람인데.”그럴 수는 없지.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면 안 될 일이다.
아…… 어떡하지…….
희원은 방 안을 서성였다.
하지만 이 순간 휴대폰의 생사보다 제일 궁금한 건ㅡ
“어떻게 하루도 사고를 안 치는 날이 없냐.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그가 내게 연락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사실이었다.
차 안.
지환은 희원의 휴대폰을 터치했고, 이어 귀에 가져다 댔다.
“여…….”말의 맺음을 하기도 전에 성격 급한 유구무언 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온다.
ㅡ야! 잘 들어갔냐? 이 오라비는 간만에 흥청망청 중이신데! 엇. 남자다.
지환은 당황했는지 턱을 문질렀다.
ㅡ우리 희원이 없이 이 시간에 나만 놀고 있으려니 영 미안하네! 뭐하냐?우리 희원이?
지환은 더욱 강력하게 턱을 문질렀다.
사랑의 마음을 담아 흘러나오던 노래가 끝나고,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은 록 음악이 시작된다.
지옥으로 가자! 지옥으로 가자!
나 말고 너! 너! 지옥으로 가자!
뭐, 노래 가사를 풀이했더니 대강 이러한 내용이다.
ㅡ여보세요? 희원? 희원? 원아~ 원아~ 뭐하느냐~ 오라비가 전화를 다 했는데~!음.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환은 흠, 헛기침을 뱉었다.
ㅡ어? 너 밖이냐?! 집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밖이야?! 뭐야, 야, 권희원! 아까 집에 간다며!그녀의 통금 시간을 걱정하는 이놈은 대체 누구인가.
ㅡ왜 말이 없어! 너 또 술 먹냐?! 맞선남이랑 또 검사실에 가고 싶어?!‘검사실’을 운운하자 지환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뭐야,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놈일세그려?
미주알고주알 이런 이야기까지 오가는 사이라 이건가?
ㅡ야!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권희원! 권희원! 너 내가 아까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검사라고 다 믿지 마! 검사도 남자야, 인마! 너 자꾸 그러…….“네. 권희원 씨 휴대폰입니다.”안녕하신가. 유구무언.
나는 남자사람 검사, 서지환이라고 하네.
ㅡ……누구세요?웅성웅성하던 소리가 뚝 끊긴다.
지환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상대는 통화에 집중하려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ㅡ권희원 씨 휴대폰 맞습니까? 맞죠?“네. 권희원 씨 휴대폰 맞습니다.”지환은 상체를 운전석에 기대며 본격적으로 통화에 나설 자세를 선보였다.
ㅡ실례지만 누구세요?“걸어온 쪽이 먼저 밝히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ㅡ아…… 저는 유구언이라고 합니다. 희원이 친구고요.“아아. 그러시군요.”친구. 친구라.
ㅡ전화 받은 쪽은 누구십니까?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는 말이죠.”지환은 무의식중 턱을 들어 올렸다.
“권희원 씨와는 상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비밀스러운 사연과 친분이 있는.” ㅡ은밀한 사연……?“물론 친구는 아니고, 이성 카테고리에 당당하게 놓인 사람으로.”ㅡ이……성요……?그래. 이성.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확대해서 판단해라. 유구무언.
“서지환입니다.”ㅡ아…… 그렇구나…… 예, 반갑습니다.너와는 계급 자체가 다른 ‘이성’의 사내이지.
어떠냐 유구무언. 이래도 할 말이 남았는가?
ㅡ희원이가 어디에 휴대폰을 두고 갔나요?“제 차에 두고 갔습니다.”ㅡ차……요……? 차에다 두고 갔다고요……?차에 두고 갔다니 상대방 목소리에 지진이 인다. 지환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렇다네, 유구무언.
또 멋대로 부풀려 크게 상상하시게나.
“흘리고 갔나 봅니다. 희원 씨가 가끔 보면 칠칠맞지 못한 구석이 있어서.”ㅡ아…… 네…… 칠칠…….잠시 말이 없다.
승리를 예감한 지환은 입꼬리를 씰룩씰룩 올렸다.
ㅡ죄송한데, 서지환 씨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그건 왜 묻습니까?”ㅡ제가 내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희원이와 연습이 잡혀 있는데, 괜찮으시면 지금 계신 곳으로 제가 가겠습니다. 휴대폰 찾으러요.지환은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뭐라는 거야! 유구무언!
별명이랑 행동이랑 맞질 않잖아!
“아아. 제가 지금 멀리에 있어서.”ㅡ멀어봐야 서울 아닙니까?“제가 일이 좀 바빠서.”ㅡ휴대폰만 받아올 생각인데, 잠시도 어렵겠습니까?하…… 주기 싫다.
어쩐지 건네주기 싫다.
지환은 눈꼬리를 잔뜩 올렸다.
ㅡ실례인 건 알지만 희원이도 휴대폰으로 스케줄을 잡아야 해서요. 일찍부터 없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제게 주시면 내일 전달하겠습니다. 보채지 마…….
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ㅡ계신 곳 말씀 주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죄송합니다만 유구언 씨, 개인의 소지품을 동의 없이 타인에게 양도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고.”유구무언이 조용히 경청한다.
“더욱이 제가 유구무…… 유구언 씨의 증언만을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내일 제가 직접 권희원 씨를 만나 전달하죠.”ㅡ아…… 뭐……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급한 마음에 생각이 짧았습니다.“익일 연습 장소를 알려주시면 그리 가겠습니다.”ㅡ직접 오신다고요? 연습실로요?“주인에게 급한 물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의적 책임이 있으니 돌려드리러 가겠습니다.”잠시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런 침묵이 어울리는 별명이지.
유구무언.
ㅡ그럼 연습실 주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바쁘시진 않은가요?지환은 씩 웃었다.
뭘 이겨 먹었다고 이렇게까지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바빠도 돌려드려야죠. 주인이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은 나도 원치 않으니까.”주소 주십시오. 지환은 주소를 받아 적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불이 꺼진 희원의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지환은 코웃음을 쳤다.
“친구? 오라비?”웃기고 있네! 친구? 친구?!
“어떤 친구가 이 밤에 술 마시다 말고 휴대폰을 대신 받으러 총알처럼 튀어 오겠냐. 웃기고 있네.”하! 하! 웃기고 있네!
지환은 분노의 눈꼬리를 정수리까지 끌어올리며 다시 차를 움직였다.
부우우웅…… 아까와는 조금 다른 엔진 소리가 도로 위를 장식했다.
“아아, 맞선봤다는 그 검사?”“그래. 그렇다니까.”희원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던 구언은 휴대폰 분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맞선남이 자신에게 남겼던 의미심장한 말을 정리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구언은 웃음이 나왔다.
몸을 풀던 희원은 힐끗 구언을 바라보았다.
“왜 웃어?”“아니, 그냥.”은밀한 사연? 친구 아닌 이성?
뭐, 그래. 전부 맞는 말이긴 한데, 나눈 말들을 곱씹다 보니 뭔가 개운하지 않다.
“내가 어제 휴대폰 찾아오려고 했는데 맞선남께서 됐다고 하시더라. 뭐, 당사자 동의 없인 양도가 불가하다나, 증언 신뢰가 어렵다 어쩐다 하면서.”허리를 유연하게 풀며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었던 희원은 고개를 돌려 구언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벽시계의 시간이 보인다.
“서지환 씨한테 아직 전화 안 왔지?”“어. 안 왔어. 아침에 연습실로 휴대폰 돌려주러 온다고 했는데 왜 소식이 없냐.”“바쁜 분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구언은 현대 무용 전공자로, 희원과 무대를 준비 중에 있었다.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이 결합된 공연은 얼마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파트너로 합을 맞추는 중이었고, 미묘하게 다른 서로의 무용을 이해하며 하나로 녹아내는 중이었다.
“야, 희원아. 맞선남한테 전화를 한 번 더 해볼래?”“됐어. 연락 오겠지. 놓고 온 주제에 보채기까지 할 수 있겠어?”희원은 연습실에 도착해서 구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지환은 받지 않았다.
차라리 끝나고 내가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은데.
만난 김에 식사까지 하고 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연락이 닿질 않으니 별수 없다.
부지런히 스트레칭을 하는 와중에도 희원은 힐끗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야, 희원. 몸 풀었으면 이제 맞춰보자.”“아, 응.”구언이 스트레칭을 끝낸 희원을 바라보자 희원은 시계를 바라보던 시선을 급히 돌리며 물을 마셨다.
……둘만 서 있는 넓은 공간.
그 앞을 가득 채운 전신 거울.
각자의 시작 위치에 선 두 사람은 노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찰나의 때를 맞추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장대한 음악이 시작되고 두 사람의 발은 가볍게 움직였다.
이윽고 지환에게 전화가 걸려왔으나 커다란 음악 소리에 묻혀 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올해는 넘기지 말고 인연 찾아서 결혼해라.
집안의 대가 끊기게 생겼는데 너는 언제까지 네 생각만 하며 살 거냐?
“기가 빨려 숨쉬기도 힘드네.”
집안이 안정되어야 바깥일도 무리 없는 법이다.
잔말 말고 올해 안에 무조건 결혼해라.
“휴.”지환은 아침까지 내내 시달린 아버지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이쯤이면 제발 포기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버지는 한시도 지치는 법이 없고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지환은 어제 유구무언 씨께서 알려준 연습실 주소로 찾아왔다.
운전 중이라 받지 못했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엔 상대 쪽에서 받질 않는다.
“그냥 들어가도 되나?”지환은 건물만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보조석에 놓인 샌드위치 봉투를 응시했다.
빈손으로 오기가 무안해 간단한 브런치를 포장해 왔다.
희원의 것만 사 오려고 작정했지만 소인배로 보이고 싶지 않아, 결국 유구무언 씨의 것도 함께 마련했다.
희원의 브런치를 들고 유구무언 씨의 브런치를 집으려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유구무언의 브런치를 가져가, 말아. 가져가 말아.
……하나의 몸을 차지하려는 두 개의 영혼이 서로 싸우는 중이다.
“휴, 소인배로 보일 수는 없으니까.”결국 승리하여 숙주가 된 대인배 지환의 손끝이 유구무언의 브런치를 집어 든다.
결심한 듯 그는 걸음을 옮겼고 연습실로 추정되는 공간에 다다랐다.
문이 닫혀 있으나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환은 유리 너머 보이는 그녀를 응시했다.
“여어…….”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전신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표현하는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잔 머리칼, 뛰고 돌 때마다 나풀거리는 치마, 곡에 완벽하게 이입된 눈매.
통렬한 아름다움에 지환의 입술이 벌어진다.
……그때였다.
그녀의 단독샷을 자꾸만 방해하는 웬 사내가 있었으니ㅡ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말다가.
허리를 감았다가 말았다가.
뒤에서 안았다가 앞에서 안았다가, 멀어졌다가 말았다가.
어느덧 지환은 희원의 춤사위에 집중하질 못하고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두 사람의 신체 접촉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환은 불타는 눈매를 한 채 중얼거렸다.
“저놈일세, 유구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