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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는 동지 (6/98)

6. 우리는 동지

어쩐지 익숙한 멜로디의 클래식은 전통 악기와 믹스되어 국악의 느낌으로 재탄생했다. 

굵직한 소리의 찰현악기는 첼로의 것이었고, 느리게 퉁겨지는 발현악기는 가야금의 것이었다. 

각자가 지닌 힘차고 풍부한 성량으로 저역을 수놓으니ㅡ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악기들이 한데 모여 특별한 향취를 자아낸다. 

……조화(調和).

♬♪♬♬♩ㅡ ♪♬♬♪♬♩♩ㅡ

지환은 유리창 너머 보이는 희원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벼린 발끝으로 리듬을 타고 노니는 희원의 모습은 다분히 현대적인 동시에 고전적이었다. 

한국무용은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라 했던가. 

빠르고 다양한 움직임으로 극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으슥한 가운데, 묵직한 움직임이 있는 것. 

그녀는 고유의 정서는 지키되 지루할 틈 없는 전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ㅡ ♪♬♬♪♬♩♪♬ㅡ

굳이 분류를 하자면 ‘지인’보다는 ‘타인’에 가까운 희원의 춤사위가 익숙할 리 없다. 

아니, 사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용수의 춤사위를 보고 있다. 

낮술을 즐겨하며 집안의 통금시간을 갑갑해하는 인간 권희원의 무기력은 어디에도 없고ㅡ

숨의 찰나까지 계산되어 보이는 무용수 권희원은 압도적인 몰입을 선사했다. 

인간의 몸이란 게 저토록 가벼울 수 있나. 마치 홀로 무중력에 놓인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몸짓.

지환은 눈을 감았다가 뜨는 법도 잊은 사람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ㅡ♪♬♬♬♪♩♩ㅡ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가 돌아가고, 시선은 바쁘게 움직였다. 

평정심을 가진 채 바라보려고 해보지만 폭발적인 그녀의 에너지에 심장이 뛰었다. 

“……거 참 거슬리네.”한참이나 희원을 바라보던 지환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진다. 

아무리 못 본 척, 안 본 척하려 해도 은근슬쩍 시선에 잡히는 유구무언의 춤사위가 못마땅한 것이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덥석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또 잊을 만하면 짜잔ㅡ 하고 나타나 그녀의 몸에 과감한 터치를 한다. 

아무리 예술은 숭고한 거라지만 지환의 시선에 유구무언이란 굉장한 음흉함을 감추고 예술이라는 명목하에 과도한 스킨십을 하는,

사심 충만 나쁜 손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수갑을…….”지급 받았으면 좋겠다. 

지환은 유구무언의 드러운 손에 의하여 몰입이 깨진 것이 불쾌한지 더욱 미간을 좁혔다. 

이젠 그녀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보이질 않고, 저 새…… 저 유구무언이 그녀의 어디를 터치하고 사라지는지 중점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랍쇼? 

음악의 클라이맥스가 흐르자 두 사람이 다시 엉겨 붙는다. 

춤을 추나 싶더니 몸의 대화를 하고 있다. 

스토리 상 서로 아프게 이별한 남녀가 뜨겁게 재회를 하는 장면이지만 알 게 뭐냐.

얼씨구. 그러다 입도 맞추겠다?

유구무언이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비튼다. 코끝이 닿을 것처럼 내려간다. 

안 돼! 이 드럽고 음흉한 유구무언이 뭘 하는 거야, 지금!

지환은 저도 모르게 유리창을 쾅쾅 쳤다. 

실제 입이 닿을 리 없는 안무의 끝을 달리던 두 사람은 누군가 유리창 깨질 것 같은 소리에 돌아보았다. 

“어머.”희원은 눈을 둥글게 떴다. 

거친 숨을 내쉬며 구언도 따라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그제야 멈춘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표정이 무척 일그러져 있음을 깨닫고는 표정을 풀었다. 

침착해야 한다. 대인배는 무슨 상황에서도 여유 있게 웃어야 하는 법이니까. 

구언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고, 희원은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지환은 가져온 브런치를 들어 보였다. 

“권희원 씨, 식사 배달 왔습니다.”그녀는 빠르게 음악을 껐다. 

*

희원은 창문 밖에 서 있는 지환을 향해 웃었다. 

그가 브런치 박스를 들고 식사 배달을 왔다고 한다. 

희원은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문을 열었다. 

“언제 왔어요?”“얼마 안 됐습니다. 조금 전에?”“아아. 그러셨구나. 어서 와요.”그동안 많은 지인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습실을 방문했지만, 마치 연습실에 찾아온 사람을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희원은 몹시 어색해했다.

연습하는 모습을 보았을까? 좀 민망한데. 

내 표정이 이상하진 않았나? 아직 몸이 덜 풀려서 완벽하지 않았을 텐데. 보고 있는 줄 알았다면 더 신경 써서 할걸. 

희원은 자신의 모습을 되감기하며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희원아, 손님 오셨는데 밖에 계속 세워둘 거냐?”“아아. 맞다. 내 정신 좀 봐.”지환의 표정을 살피던 희원은 구언의 타박에 정신을 차리듯 눈을 크게 떴다. 

경쟁자를 배려하는 것 같은 유구무언의 기백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환은 대인배의 여유를 잃지 않기로 한다. 

“죄송해요. 어서 들어오세요.”“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희원이 들어오라 하자 지환은 연습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구언은 꿀꺽꿀꺽 생수를 마신 뒤 들어서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원하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제 통화했던 유구언이라고 합니다.”“서지환입니다.”지환은 구언이 내민 손을 꽉 잡았다. 

어쭈. 꽉 잡으니까 지도 꽉 잡는다. 

핏줄이 설 정도로 서로 손을 힘주어 잡으니 각자의 손이 하얗게 질린다. 

누구도 먼저 놓을 생각은 없어 보이고, 눈싸움을 시작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소인배들의 싸움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희원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았다.

구언은 손이 저린지 마른 주먹을 움켜쥐었고 지환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장구를 쳤다. 

흥. 내가 이겼다. 

손이 저리지만 잼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지환은 다가온 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에 휴대폰을 두고 내리다니. 제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다행이네요, 잃어버린 건 아니니까.”“그러게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서로는 약간 어색하게 웃음을 주고받았다. 저 눈치 없는 유구무언 때문에 사실은 더 어색한 것 같다. 

눈치라고는 메추리알 노른자만큼도 없어 보이는 유구무언은 자리 좀 비켜주면 좋으련만.

“어우, 맛있는 거 사 오셨네요. 여기 줄 엄청 긴데.”유명 맛집의 브런치를 사 왔다며 유구무언이 본격적으로 자리에 껴든다.

희원은 그런 구언을 바라보다가 지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지환 씨, 차 한 잔 드릴까요? 커피? 홍차?”“좋죠. 주시는 걸로 받아 마시겠습니다.”“원아, 그럼 나는 홍차. 뜨겁게 우려서.”“알겠어. 알겠네요. 그럼 우리 셋 다 홍차로 통일해요.”구언이 익숙하게 차를 청하자 희원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앉으세요. 의자도 많은데.”구언이 의자를 가리키자 지환은 앉았다. 

아직은 두 사람의 열기가 배어나는 연습실. 햇살이 가득하게 내려와 구언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원아, 내가 도와줄까?”“됐어. 물만 끓이면 되는데 뭐.”저 유구무언은 이 시간에 저 의자로 햇살이 내려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거다. 

소인배 지환은 별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리 선정도. 희원을 ‘원’이라 부르는 것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표정을 짓는 유구무언의 얼굴에 정량 초과의 보톡스를 놓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후, 더워.”덥다더니 웃통을 홀랑 벗는다. 

지환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우, 웃통을 벗어? 권희원 씨 앞에서?

“아우, 몸이 영 찌뿌둥하네. 원아, 너는 안 그래?”“스트레칭 좀 더 할걸 그랬어. 나도 그래.”찌뿌둥하다는 명목하에 팔을 쭉 늘리며 잔근육을 과시한다. 

무용수답게 잘 만들어진 몸은 과하지 않은 근육들이 씰룩거렸다. 

지환은 코웃음을 쳤다. 

벗어? 벗었어? 해보자는 건가? 

망나니처럼 바지만 간신히 입은 구언의 앞에서, 완벽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는 지환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희원이가 괜히 시간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유구무언이 배려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빨리 꺼지란다. 

“권희원 씨는 시간을 뺏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충분히.”헛소리 말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뵈니 서지환 씨 상당히 훤칠하시네요. 훈남이십니다.”유구무언이 이번엔 작전을 바꾸어 칭찬 모드로 돌입한다. 

어서 나도 칭찬해달라는 작전이 분명하다. 

“그런 말 종종 듣습니다.”“아…… 네.”“…….”흥. 내가 너의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칭찬 따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빈말로 한 칭찬을 덥석 물고 지환이 뻔뻔하게 답하자 구언은 씩 웃으며 말을 아꼈다. 

굉장히 한심하고 쓸데없는 기 싸움이지만, 서로는 묘한 승부욕을 자극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기를 끌어올렸다. 

심정엔 사력을 다해 이기고 싶은 스포츠 결승전 같은 느낌이다. 

기 싸움을 하는 별 이유도 없이. 이상하게도. 그냥. 

종종 듣습니다. 물론 조카에게.

희원은 맞선 자리에서 지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 웃음을 터트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희원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엉망진창의 자세로 편안하게 앉아 햇살을 즐기는 구언. 

바른 자세로 앉아 무릎에 깍지 낀 손을 떨구고 있는 지환.

두 사람은 다른 성격만큼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자, 홍차 나왔습니다.”희원은 차를 내왔다. 웃통을 벗고 씰룩씰룩 근육을 움직이는 유구무언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지 희원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어, 얼마나 자주 웃통을 까발렸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냐……?

지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희한하게 앞에 앉은 유구무언이 신경 쓰이고 거슬린다. 

“드세요. 마트용 티백이지만 꽤 마실 만하거든요.”희원이 차를 내밀자 지환은 차를 바라보다가 그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굴을 만질 것처럼 가까이 손을 가져가더니, 머뭇거리며 이마를 가리켰다. 

“희원 씨 이마에 머리카락이.”“아…….”희원은 지환의 손길에 잠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고, 머그잔을 들던 유구무언은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붙었어요. 여기.”“아…… 여, 여기요?”희원은 지환이 가리키는 부근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땀에 젖은 머리칼은 수시로 얼굴에 달라붙어 귀찮게 했다. 

이후, 한동안 말없이 홍차 마시는 소리만 공간을 울렸다. 

지환은 희원과 자신, 그리고 유구무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느끼다가 입술을 열었다. 

이제 곧 일어나야 하는데. 돌아가 할 일이 태산인데.

“아, 맙소사.”“네? 왜요?”어쩐지, 여지를 두지 않고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권희원 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유구무언과 함께할 수는 없다. 절대로. 

“아…… 아 이런…….”지환이 난데없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수색하며 엉성한 탄식을 터트린다. 

희원은 홍차만 마시다가 의심 없이 고개를 들었다. 

지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어떡하죠, 권희원 씨.”“왜요? 무슨 일 있어요?”“권희원 씨 휴대폰을 깜빡하고 안 가져온 것 같은데.”풉ㅡ! 유구무언이 뜨거운 홍차를 주룩 뱉어낸다. 

어처구니없는 맞선남의 변명에 기도 안 찬 모양이다. 

“아, 정말요? 놓고 오신 거예요?”“그런 모양입니다. 아침에 나올 때 식탁에 두고 나온 것 같은데.”“아…… 그러셨구나. 괜찮아요. 사실 전화도 잘 안 오거든요. 필요 없어요.”구언은 눈꼬리를 올렸다.

저놈이 어디서 수작질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지 말고 잘…… 찾아보세요. 있을 것도 같은데.”거짓말하지 마. 있잖아. 그치? 있잖아. 가져왔잖아.

“아뇨. 없습니다.”아닌데? 없는데? 없는데? 없는데?

허, 직접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구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무슨 개수작이지 싶은 얼굴이다. 

“권희원 씨.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집에 가서 당장…….”“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휴대폰 없어도 지장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집에서 연락 안 오니까 오히려 편해요.”지환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희원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쩐지 휴대폰을 다음에 건네받을 수 있는 생각은, 그녀에게도 기대로 다가왔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긴 거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못 챙겼나 봐요.”“괜찮아요. 그리고 웬걸요. 이렇게 맛있는 브런치도 직접 가져다주셨는데요. 천천히 받을게요.”“그러지 마시고 서지환 씨,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아오…… 또 이 망할 유구무언이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르며 껴든다. 

제발 좀 닥치라는 텔레파시를 쏘았다.

“권희원 씨, 잠시만.”지환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처럼 재킷 속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이거 받아요.”“……아?”꺼내 든 자신의 휴대폰을 희원에게 넘겨주었다. 

“인질 맡깁니다. 권희원 씨 휴대폰 돌려드리려면 연락이 필요할 것 같으니 제 휴대폰 두고 갈게요.”“어, 괜찮아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받아요. 연락은 닿아야 하니까.”이젠 가봐야 하는 애석한 시간. 지환은 가보겠다며 씩 미소 지었다. 

“휴대폰 찾아서 저녁쯤 뵙겠습니다.”“아…… 제가 오늘 저녁엔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희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쯤…….”내일은 주말이다. 

친구 결혼식이 있어 외출이 예정되어 있으니, 예식이 끝날 시간쯤 맞춰 만나면 되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휴대폰 가져가셔도 돼요. 가져가시고 괜찮으시면 내일 봬요.”“내일 시간 괜찮고, 휴대폰은 두고 갈게요. 통화합시다.”“……네.”희원은 그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고 부드럽게 웃었다. 

맞선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명분이란, 마음이 아닌 사건에 기대야 하는 두 사람이었다. 

서로는 생각했다. 엉뚱한 사건을 만들어서라도.

“연락드리겠습니다.”“네. 서지환 씨.”당신을 한 번쯤은 더, 만나고 싶다고.

희원은 친구의 결혼식장을 찾았다. 하객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지환과 맞선을 보았던 호텔이기도 하다. 

예식이 조금 남은 시간. 

희원은 불편한 눈빛을 한 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친분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희원과 껄끄러운 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을 올리는 오늘의 주인공 은정은 희원과 다른 대학 무용과 출신이었고, 그 대학은 희원의 무용과와 치열한 경쟁 구도에 있는 학교였다. 

무용단에 머물며 은정과 친해진 희원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사실 희원을 잘 모르는 은정의 대학 동기들은 희원을 은근히 경계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어머, 주경아. 너 결혼하더니 예뻐졌다? 뭐 했어?”“이마 라인 정리하고 입술 필러도 맞고 시술 좀 했지. 어때? 괜찮아 보여?”“완전 잘됐는데? 어디야? 어디서 했어? 나도 소개해줘.”“거기 괜찮게 잘해. 내가 주소 알려줄게.”은정의 대학 동기들은 둥글게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못 본 사이 예뻐졌다? 남편 잘 지내지? SNS에서 봤어. 남편이랑 여행 자주 다니더라?

“야, 너 또 가방 샀어? 너는 가방 좀 그만 사.”“아아, 이거? 남편이 요번에 출장 다녀오면서 선물이라고 사 왔어. 됐다는데도 사오는걸 어떡해.”“부럽다. 신상이네. 나 이거 파리 컬렉션에서 봤어.”“사실 이거 말고도 하나 더 사줬다? 그건 아직 개시도 못 했어.”……남편 자랑.

각자들 밀린 자랑을 쏟아내기 바쁘다. 

대화에 끼고 싶지 않은 희원은 불 꺼진 지환의 휴대폰만 내려다보았다. 

다른 학교 출신, 그리고 미혼. 희원은 낙동강 오리알처럼 동떨어졌다. 

“희원아, 너는 소식 없어?”“응? 무슨?”자랑이 끝났는지 멀뚱멀뚱 서 있는 희원에게 시선이 모인다. 

“우리 국수 안 먹여줄 거야? 넌 매번 이렇게 축의금만 내고 회수는 언제 해?”“야, 희원이 결혼 안 한다잖아. 비혼주의. 비혼. 몰라?”“원래 비혼 외치던 애들이 결혼해서 더 잘 살더라. 애도 잘 낳고.”“우리 희원이 인기 많았는데. 남자들이 쟤만 엄청 따라다녔잖아.”“그것도 옛날 얘기지. 권희원 전성기는 옛날 옛적에 지났어요.”그녀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이야기로 다시 대화가 시작된다. 

희원은 익숙하다는 듯 지환의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끼어들어봤자 기력 낭비고, 자신을 변호해봤자 변명거리로 들릴 게 뻔하다.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에 하나하나 반응하며 열을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쟤는 통금이 문제야. 아홉 시에 들어가는 애가 무슨 연애를 해. 나라도 못 하겠다.”“왜? 나도 희원이처럼 통금 있었어. 열두 시. 그래도 연애 다 했다?”“야, 아홉 시랑 열두 시랑 같냐? 신데렐라도 열두 시였다. 희원이네 집 너무해.”“희원아. 내가 신랑 친구 소개해줄까? 신랑 아는 형들 중에 번듯한 사업하는 사람들 많아.”“니 신랑 나이 많잖아. 신랑보다 형이면 희원이보다 몇 살이나 더 많다는 거야?”“야, 나이 많은 게 뭐 어때서? 너 우리 신랑 디스하냐?”“야야, 그만해. 여기까지 와서 너네는 싸우고 그래? 그나저나 너네 축의금 얼마 냈어?”……피곤하다.

희원은 아직 연락이 없는 지환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생각에 빠졌다. 

예식이 끝날 때쯤 만나기로 했으니 아마도 그는 출발했으리라. 

생각에 빠진 희원의 귓가에 그녀들의 이야기가 흐려진다. 

호텔 결혼식이라 축의금을 빵빵하게 냈는데, 식사는 못 하겠다. 

서지환 씨 만나서 같이 식사해야겠네. 뭐 먹지? 호텔 레스토랑 갈까? 근처 맛집을 검색해볼까?

“참, 오늘 부케 누가 받아? 누가 받는지 알아?”“글쎄? 모르겠는데?”“희원이가 받는대. 아까 물어보니까 그러던데?”“희원이? 야, 독신주의가 부케는 왜 받아?” “줄 사람이 희원이밖에 없더래. 그리고, 독신주의는 부케 받지 말라는 법 있어?”주말이라 차가 많이 막힐 텐데. 엇갈리진 않겠지? 

내 휴대폰 잠금 패턴 알려줄걸. 통화가 안 되니 영 불편하네.

“어쩐지. 그래서 희원이가 오늘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온 거구나? 희원아 너 부케 받고 6개월 안에 결혼 안 하면 3년 동안 결혼 못 한 대.”“희원이 평생 결혼 안 할 거라는데 그런 얘기는 왜 해?”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사는 게 불쌍해서 그러지. 예쁜 시절 다 가고, 멋진 남자는 전부 다 남의 사람이고. 그런다니까?”“내가 연애를 안 한다고는 안 했는데?”아무리 기다려봐도 자신의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아, 강제종료를 위해 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이래서 부케를 받기가 껄끄러웠던 거다.

“오랜만에 만나서 내 얘기 말고는 할 말들이 없어? 듣자 듣자 하니 끝이 없네.”……결혼이 인생의 완성이라 믿는 그녀들에게 희원은 아직 인생의 미완성. 

꿈만 먹고사는 철없는 어린아이.

“결혼이랑 연애는 엄연히 다른 거야. 난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연애를 안 한다고는 한 적 없어.”“그거나 그거나야 희원아. 우리 나이에 결혼 전제 아니고 사람 만나기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너, 그거 되게 이기적인 거다?”“왜 우리 희원이 몰아붙여? 연애는 하고 싶다잖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래? 희원아, 그런데 연애 경험은 진짜 필요한 것 같아.”“글쎄 연애 경험이고 나발이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고. 니들 인생은 누가 설계해줬어? 왜 이렇게들 남의 인생 설계 못 해서 난리야?”모두는 희원이 발끈한다고 여겼다. 

연애를 하지 않는 희원에게 연애란 그녀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본 사이니까, 그런 부분을 건드려도 된다고 정의 내렸다. 

“에효, 희원아, 나이 먹고 하는 연애 쉽지 않다. 진짜로. 점점 남자도 없고 괜찮은 남자는 더 없고.”“맞아. 희원이는 맨날 춤 연습만 하고 아홉 시면 집에 들어가니까 더 하겠지. 난 이해해.”“그러지 말고 우리 희원이 연애할 수 있게 플랜을 좀 짜보자. 주변에 지인들을 좀 모아볼까?”“권희원 씨?”그때였다. 

엄숙하고 숭고한 친구의 결혼식에 깽판을 놓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희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홱,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시선은 한데로 모이고ㅡ 모두의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주차가 오래 걸려서,”“아…… 서지환 씨.”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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