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호감이 살짝살짝
조금 전.
주말 예식이 횡행하는 호텔 부근은 언제나 정체현상이 일어난다.
지환은 약속시간에 늦을 바엔 일찍 나가 일찍 도착하는 게 낫다고 판단, 집에서 일찌감치 나섰다.
어젯밤 희원은 오늘 친구의 예식이 있다고 말했다.
맞선을 보았던 그 장소, 그 호텔이었고 지환은 도착하면 적당한 곳에 자리하고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아, 이거 너무 빨리 왔는데.”도로 사정을 생각해서 빨리 나온다는 것이, 너무 빨리 나왔나 보다.
예식이 시작할 시간 때쯤 호텔에 도착한 지환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희원의 친구가 결혼하다는 곳은 호텔 2층.
결혼식 관련 안내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그냥 어디로 갈 것 없이 호텔 로비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려야겠다, 지환은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변에서 함께 기다리던 여성 두 명이 올라타며 2층을 눌렀다.
“들었어? 오늘 부케 권희원이 받는대.” “아? 정말? 걔가 왜?”“줄 사람이 없었나 봐. 그러니까 독신주의한테 주겠지.”뒤에 서 있던 지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엘리베이터는 한 층 올라가 다음 손님을 태웠다.
여성들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권희원, 걔가 결혼할 마음이 생긴 게 아닐까?”“야, 남자가 있어야 결혼도 하지. 결혼은 혼자 해?”“그렇긴 하다. 하지만 희원이 그 정도면 꽤 예쁘잖아. 남자가 없겠어?”“요즘 그 정도 안 생긴 애들이 어디 있어? 아무리 예뻐도 어린 애들 못 따라간다.”그사이 엘리베이터는 로비에 도착하고 여러 사람이 내리고 올라탔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다시 올라가 2층에 멈췄다.
“야야, 내리자.”“응. 밥은 맛있겠지? 호텔인데.”여성들이 번쩍거리는 가방을 앞으로 들며 내린다.
식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마지막에 남은 지환은 열린 문틈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던 지환은 문이 닫히기 전 2층에 내렸다.
어쩐지 그녀를 지금 만나고 싶어졌다.
권희원은 뛰어난 무용수다.
수많은 타이틀을 거머쥔 무용수였고, 무용에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 났으며 기질 또한 천부적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언론의 관심과 권위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남학생들은 희원을 좋아했고 곧잘 따랐다.
예쁜 얼굴과 서글서글한 성격이 만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희원은 학창시절 무용수들에게 선망의 대상, 따라잡고 싶은 경쟁자, 그만큼 부럽고 그래서 이겨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현역의 자리를 지키며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희원은 그녀들에게 묘한 질투심을 일으켰다.
희원이 미운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아직 현역 최고의 자리에 남아 있으므로 자랑스러웠으며, 대리만족을 하기도 했지만.
뭐라도 그녀보다 우월하고 싶은 서글픈 열등감은 곧잘 들었다.
“희원아, 누구셔? 응?”“그러게. 희원아, 누구야? 소개 안 시켜줘?”그런 희원을 찾아온 사내가 있다.
그녀들은 예의주시하는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고 희원은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마치 이곳에 오기로 사전약속이 되어있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요?
내가 부케를 받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안녕하세요. 서지환입니다.”“안녕하세요, 저희는 희원이 친구들이에요.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아아, 그러시구나. 반갑습니다.”지환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여성들도 이곳에 있다.
“희원이 남자친구예요?”훤칠한 얼굴, 큰 키, 옷맵시가 좋은 사내는 굉장한 호감형이었다.
그녀들이 지환에게 관심을 갖자 희원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여기서 맞선봤다는 말은 하지 마요! 제발!
맞선을 봤다고 하면 분명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비혼주의가 무슨 맞선이냐며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해!
희원이 눈에 힘을 주며 씰룩씰룩 웃자 지환은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그녀들을 등지고 선 채, 자신에게 무언의 압박을 하고 있다.
“남자친구는 아닙니다. 놓고 간 휴대폰을 돌려줘야 해서. 이차저차.”“아아. 그러시구나.”그녀들은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희원 씨, 여기 휴대폰. 늦게 돌려드려서 미안합니다.”지환이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내밀자 희원은 휘청이며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그냥…… 말을 말아라…… 인간아…….
희원이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며 지환의 휴대폰을 넘겼다.
오랜만에 듣는 ‘이차저차 아는 사이’란 반가움과 동시에 서운했다.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번거롭게.”“권희원 씨는 번거롭게 해도 됩니다. 충분히.”아니…… 내가 번거롭게 한 게 아니라……
니가 그냥 번거롭게 한 거잖아…….
아니지. 휴대폰을 돌려주러 나온 것 자체가 번거롭게 한 일이니까.
에효, 희원은 입술을 꾹 닫았다.
어쩐지 지환을 보고 반가웠던 자신의 마음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쓸데없이 매너 좋은 이 남자가 휴대폰을 돌려주러 여기까지 걸음 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치 나의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 가셔도 돼요. 가세요.”희원은 포기했다는 듯 손을 팔랑팔랑 휘저었다.
빨리 돌려주고 싶으니 여기까지 올라왔겠지 싶은 모양이다.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려고 맛집 알아보고 있었는데!
“가긴 어딜 갑니까, 권희원 씨 부케 받는 거 봐야죠.”“그걸 왜 봐요. 서지환 씨가.”“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부케 받을 땐 얼마나 예쁠까 싶어서.”헐…… 그녀들은 지환의 기름기 흐르는 멘트에 입술을 벌렸다.
희원은 미쳤냐는 표정을 지으며 질색했다.
“저는 지금도 예쁘지만 부케 받을 때도 예쁠 예정이에요. 변함없이. 상상과 꼭 일치할 테니 가셔도 됩니다.”“보고 가면 안 될까요?”“보고 가세요! 우리 희원이 부케 받는 거! 보고 가세요!”“보고 가세요! 이왕이면 식사도 같이하고!”그녀들이 지환에게 부케 받는 거 보고 가라며 아우성이다.
아무리 봐도 그냥 휴대폰을 돌려주러 온 것 같지 않은 모양이다.
지환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또다시 씩 웃었다.
“그럼 염치없지만 권희원 씨 부케 받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애인도 아니시라며 부케 받는 희원이가 왜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여성이 묻자 지환은 희원을 응시했다.
아마도 희원이 해석하기를 지금 지환의 눈빛은, 비혼주의 마음은 비혼주의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은 내가 잘 안다.
“제가 탐내고 있거든요. 권희원 씨 옆자리를.”어깨 펴요. 기죽지 맙시다.
“그러니 이런 순간을 놓칠 수는 없죠.”였다.
“서지환 씨, 거짓말 잘하시던데요.”“무슨 거짓말 말씀이십니까?”“아까요. 거짓말 엄청 잘하셨잖아요.”“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지환이 능청을 떨자 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대목에 질문 하나. 서지환 씨는 원래 이렇게 맞선 상대에게 잘해주세요?”“가급적 잘하려고 노력하죠. 맞선이라는 게 다 집안이 얽혀 있는 관계다 보니까. 문제 있습니까?”“없네요. 없어요.”쳇. 능글맞은 사람 같으니라고.
희원은 조금 전, 그녀들의 탄식을 귓가에 고스란히 담으며 식장을 떠났다.
도대체 저런 검사님을 만나려면 무슨 죄를 얼마나 어떻게 지어야 해……?
그는 떠나는 자리까지 완벽했다.
편히 일어날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었고, 재킷을 어깨에 걸쳐주었으며 예를 다해 에스코트해주었다.
부러움을 가득 담은 그녀들의 시선은 떠나는 순간까지 따랐다.
훤칠한 외모에 검사라는 직업까지 더해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권희원 죽지 않았어. 저런 남자를 안 받아주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진짜 부럽다…….
검사님과 식사를 하고 가라는 그녀들의 격렬한 애원을 뒤로 한 채, 희원은 쿨하게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절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거짓말은 심장에 해롭다고요.”“아아, 그거.”지환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으며 후루룩 면을 삼키는 일에 열중했다.
호텔 식사까지 포기하고 나온 두 사람이 찾아온 식당은 들깨 칼국수 집이다.
지환이 말하기를 이 동네 이 집이 그렇게 맛있다나 뭐라나.
뭐, 고소한 것이 걸쭉하게 들어가긴 한다. 속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희원은 말 없는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요.”“뭐가요?”“면 세워주셨잖아요. 친구들 사이에서 죽 쓰고 있던걸 어떻게 알고 그렇게.”“면은 세우는 게 아니라 먹는 겁니다.”“…….”“아, 밖에 나와선 아재 개그를 하면 안 되는데 자꾸 버릇이 돼서.”“안에서는…… 자주 하시나 봐요……?”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다.
희원은 지환이 조금 전 상황에 대해 말을 아끼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추기로 했다.
어쨌든 그가 자신을 도우려 했다는 건 알겠고.
자신을 정말로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
화제를 부케로 돌려보기로 한다.
희원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아름답게 부케를 받았고, 꽃다발을 증거물로 획득했다.
“부케 예쁘죠. 꽃은 참 예쁜 것 같아요.”“받은 사람이 더 예쁜데요.”“이거 봐, 이거 봐! 이렇게 사람이 진정성이 없어!”“칭찬은 주로 튕겨내는 모양입니다? 듣기 민망한가?”“……아오.”아오.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안 먹습니까? 권희원 씨 입맛에 안 맞아요?”“저 벌써 다 먹었는데요? 면 하나도 없어요.”오. 빠른데. 지환이 희원의 그릇을 살펴보니 다 먹은 게 분명하다.
지환은 입가를 닦으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속 좀 뜨끈하게 했으면 시작해볼까요?”“네? 뭘요?”“낮술. 좋아한다면서요.”지금부터 마시면 시간은 충분하죠.
지환은 이 집이 수육도 잘한다며 중얼거렸다.
그의 제안이 솔깃한 희원은 가볍게 테이블을 쿵, 치며 반색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 중 최고로 반가운 이야기네요.”“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잘 안다니까요. 진정성 있게.”희원은 내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봐, 이거 봐. 이쁘다고 할 때는 도끼눈을 뜨더니 낮술 하자니까 세상 환하게 웃네.”“쳇.”“웃지 마요. 심장에 해로우니까.”……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구분이 어려운 사내다.
“어쨌든 좋아요. 마셔보죠. 오늘은 서지환 씨의 사무실까지 가는 일 없도록 할게요.”“가도 됩니다. 주말이라 마음껏 늦잠 자도 눈치 볼 일 없을 테니까.”희원은 지환의 말끝에 남은 웃음을 마저 털었다.
하지만 판단이 어려운 사내라고 해도, 만나면 만날수록 편안한 사람이었다.
주말의 점심.
두 사람의 낮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권희원 씨가 이렇게 술을 잘하면 제가 면이 안 서는데.”“면은 먹는 거예요. 세우는 게 아니라.”유쾌하고, 즐겁게.
“하부지, 하부지, 이거 주세여어.”“뭘 줄까? 어디 보자. 어이쿠, 고래 과자를 잡아 왔구나?”허허. 허허허.
동네 작은 슈퍼 안. 꼬물거리며 들어선 여자아이가 과자 박스 하나를 들고 와 계산대 앞에 선다.
발돋움을 하며 계산대 위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는 주인장 할아버지의 마음을 녹아내리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 사장님은 과자 바코드를 찍는 시늉을 했다.
“오백 원입니다. 손님.”“헤헤. 여기이. 여기.”아이는 매고 온 작은 옆 가방에서 장난감 돈을 꺼냈다. 부자은행에서 발행한 천 원짜리 지폐다.
할아버지 사장님은 두 손으로 공손히 아이가 주는 돈을 받았다.
“손님께서 천 원을 주셨습니다.”“네. 하부지. 하부지. 과자 주세여어.”“거스름돈을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과자는 오백 원입니다.”으으응? 아이는 생각하는 눈동자로 고사리 같은 손을 접었다 폈다 하더니 네 개를 폈다.
“사백 원?”할아버지 사장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자신이 없는지 슬그머니 손가락 하나를 더 접는다.
“삼백 원?”“네!”“오백 원을 거슬러 받으셔야 합니다. 손님.”“헤헤.”아이가 부끄럽다는 듯 웃자 할아버지 사장님은 허허, 웃으며 계산대를 열었다.
진짜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아이 손에 쥐여주었다.
“아이고, 사장님! 사장님 죄송해요! 얘가 또 장난감 돈을 들고 와가지고!”때마침 아이의 엄마가 뛰어들어온다.
“엄마 나 과자. 과자.”거슬러 받은 돈보다는 과자가 좋은지 아이가 엄마에게 오백 원을 건넨다.
엄마는 아이가 사려던 과자를 보고는 급히 지갑을 열었다.
“이거 1400원이잖아요, 사장님. 돈 드릴게요.”“가져가세요. 아이가 계산한 건데.”“자꾸 이러시니까 아이가 다른 곳 가서도 장난감 돈을 줘요. 제가 아주 미치겠어요.”“허허, 아직 네 살도 안 됐는데 뭐. 슬슬 가르치면 되지.”가져가요. 난 돈 받았으니까.
할아버지 사장님은 장난감 은행 돈을 흔들었다. 그러곤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손님. 이 돈은 저희 가게에서만 받습니다. 다른 곳에 주시면 안 돼요.”“네에ㅡ.”“약속.”“냑속.”결국 안 받겠다는데도 엄마는 옥신각신 돈을 두고 아이 손을 잡은 채 사라졌다.
“아이고, 날씨 좋다ㅡ.”“날씨는 맨날 좋대? 먼지가 그득그득한데. 자네 눈엔 백날 천날 좋기만 하지.”어린 손님을 배웅한 할아버지 사장님이 슈퍼 문을 열고 밖을 서성이자 누군가 찾아온다.
누군지 알겠다는 듯 할아버지 사장님은 고개를 돌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희원의 할아버지, 권난섭 선생이다.
“어이 장사치, 손님 안 받아? 술상 안 내 오고 뭐해?”“정신 차려. 여기 슈퍼야. 식품위생법 위반하고 싶어?”슈퍼 사장님은 지환의 할아버지, 서곤 선생이다.
전직 대법관이었던 서곤 선생은 권난섭 선생과 오랜 벗이었다.
“옘병, 위생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위반해봐야 벌은 사장인 니가 받지 손님인 내가 받냐?”“아직도 인간이 덜 됐어. 그 나이 먹고도 인간이 덜 되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시끄럽고 가서 막걸리 하나 씹어 먹을 거 하나 가져와. 가져오면 니가 먹지 내가 먹어? 주인이 마시는 것도 법에 걸리냐?”“뭐, 이윤창출 목적이 아니라면 상관없긴 하지만. 그럼 손님, 온 김에 지난 외상값도 처리해주시죠.”“웃겨! 이윤창출 안 한다며! 그리고, 앉아서 지가 다 처먹어놓고 누구더러 값을 내래?! 난 한입 마셨구만!”“안주는 뭐. 마른오징어?”“좋지. 딱딱하지 않게 해서 가져와.”서 선생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막걸리와 마른오징어를 꺼내왔다.
사실은, 막걸리 한 잔이 절실했던 때였다.
“아범이 지환이 찾아가 결혼하라고 들쑤셨다는데. 소식 없어?”“자네도 모르는 자네 손주 소식을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손녀 소식도 모르는데.”“한집 살면서 뭘 그렇게 모르냐?”“한집 살면 뭐해. 얼굴 보기도 힘든데. 우리 손녀 바빠.”두 사람은 슈퍼 앞에 마련해둔 간이 테이블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마른오징어를 들던 권 선생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노인네 이빨 아파 죽겠는데 이게 뭐야? 딱딱해서 먹겠어?”“부실허냐? 틀니 했어?”“내, 내 거야! 틀니는 무슨!”“우리 나이에 틀니가 뭔 흉이냐? 아프면 제때 제때 치과 가라. 병 키우지 말고.”옘병…… 권 선생은 신경질적으로 오징어를 물어뜯었다.
아프다더니 잘만 씹는다.
“검사실에서 애를 재웠다며. 하여튼 정신병자야. 거기가 어디라고 사람을 재워?”“유치장에 넣으라니 자네 손주가 검사실로 데려간 거지.”“유치장은 아무나 가냐?! 정신머리 없는 노인네 같으니라고.”끌끌 혀를 차며 서곤 선생은 막걸리를 마셨다.
온 동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 선생을 보며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예에. 날씨가 좋습니다.”“선생님, 이거 막 담근 겉절이예요. 두고 드세요. 저번에 공짜로 상담해주셔서 감사해요.”“아이고, 제가 더 감사합니다. 왔으니 사과 좀 가져가요.”허. 권 선생은 탄식을 터트렸다.
사람 좋은 척하며 동네 주민들에게 환대를 받는 서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사 안 해? 다 퍼주고 뭐 남겨?”“그냥 슬렁슬렁하는 거지. 이 나이에 돈 벌어서 뭐하나?”“내가 진짜 자네 집안한테는 우리 손녀 주고 싶지 않았는데.”“허, 웃기는 노인네네.”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지환의 집안은 종갓집이었고, 지환의 어머니 ㅡ 서곤 선생의 며느리는 지환을 낳다가 명을 달리했다.
“이봐, 권 선생. 우리 집 종갓집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어. 내가 잘해줄게.”“그건 니가 하는 소리지. 우리 희원이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제사 많은 집에 놔두고 오나, 근심이 크다고.”“제사가 많건 적건 둘이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왜 나한테 와서 시비야?”“착잡해서 그래. 결혼을 시키자니 착잡하고, 안 시키자니 더 착잡하고.”에효. 권 선생은 희원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그 예쁜 것을 누구에게 넘겨주나, 생각하면 결혼하란 소리 안 하고 싶은데.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시키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둘이 만나기는 만나?”“엮일 인연이면 만나겠지. 우리 희원이가 보통 애가 아니라서 힘들긴 할 테지만.”“둬 보자고. 젊은 사람들인데 피가 끓어야지, 우리가 개입한다고 될 일은 아니잖아?”“막걸리나 내와. 오징어 말고 다른 것 좀 가져오고.”서곤 선생은 일어섰다.
“그런데 자네 손녀, 자네 얼굴 닮은 건 아니지?”“뭐, 뭐, 뭔 헛소리야! 우리 손녀 얼굴도 몰라? 얼마나 이쁜데!”“넌 안 닮았다는 얘기네. 듣던 중 다행이다.”종가의 집안에 시집을 오려는 여자가 요즘은 흔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손주 지환도 그러함에 결혼을 꺼린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 영감탱이의 콧대 높은 손녀가 결혼을 하려 들겠나, 서 선생은 편안하게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 둘이 만나서 데이트나 하면 오죽 좋을꼬?”“아야, 관둬라. 우리 손녀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단다. 데이트는 무슨.”“그치? 그렇겠지?”그럴 일은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술잔이 오고 간다.
희원과 지환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비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
지환은 쉽게 말해 종가의 무게가 버겁다고 했다.
내 아내에게 그런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의 가정이, 나의 아내가 종가의 무게에 소비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갓집이라니, 피부로 와 닿진 않았지만 잠시 잠깐 지환을 보며 그렸던 ‘결혼’에 대한 생각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지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니 마음은 더 편해졌다.
“권희원 씨는 왜 결혼이 싫습니까?”“저는 저를 사랑하거든요.”희원은 홀짝 술을 마셨다.
“타인을 어떻게 믿죠. 내 미래의 수십 년을 어떻게 장담해요? 한 사람만 보고, 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를 똑같이 사랑할 거라고 어떻게 믿어요. 난 그게 어려워요.”“네. 이해합니다.”“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이 행복 깨고 싶지도 않고요.”다만 답답하긴 한데…… 결혼 아니면 독립은 꿈도 못 꾸니까…….
“에효. 술이나 마시죠. 서지환 씨랑 이렇게 앉아 있으니 되게 웃기긴 하네요. 일도 많았고.”지환은 빙그레 웃었다.
때마침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지환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아버지.”집에서 걸려온 전화인 듯하다.
희원은 아버지라는 단어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쩐지 찍 소리도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밖에 있어요. 네. 네?”지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희원은 빠르게 변하는 그의 분위기를 느끼며 연신 홀짝 술만 삼켰다.
“또 선을 보라고요?”……선? 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황당함 반, 당황함 반이 묻어나는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부케는 어쩐지, 지금 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