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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ong time no see (8/98)

8. Long time no see

친근하게 잔을 비우던 조금 전의 분위기는 사라지고ㅡ

두 사람은 제법 조용한 눈매로 각자 잔을 비우기에 바빴다. 

함께 있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미래가 없다 보니, 의미 없는 말들만 쏟아졌고 그런 말들은 금세 허무하게 사라졌다.

상대를 궁금해야 할 이유도 없고.

상대에게 나를 알릴 이유도 없는 시간.

“좀 취하는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날까요?”희원은 마지막 잔을 들었다. 

지환은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잔도 들었다. 

요 며칠, 마주하고 있는 상대로 인하여 즐거웠던 것은 사실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서지환 씨에겐 정말 고마웠어요. 여러모로.”“저도 대화를 나누는 내내 즐거웠습니다.”하지만 호감이 생겼다 해서, 상대가 매력적이라 해서 더 이상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다 큰 성인 남녀가 친구라는 관계로 묶이기엔 무리가 따랐다. 

차라리 다른 장소에서 자유롭게 만났다면 참 좋았겠다. 

그런 게 아닌 이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맞선이니까.

집안과 집안이, 엮여 있으니까. 

지환은 귀가를 서두르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권희원 씨는 앞으로도 아홉 시 귀가가 따르겠네요. 답답하겠지만.”“서지환 씨는 앞으로도 선을 보러 다니겠네요. 집안의 독촉에 못 이겨.”둘은 서로의 말끝에 탄식 같은 웃음을 흘렸다.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쳤고, 마지막 잔을 털어 비웠다. 

……잠시 후. 

그녀는 그에 대한 총평을 내렸고. 

“서지환 씨는 썩 괜찮은 사람이에요.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요.”그도 그녀의 총평을 내어놓았다. 

“권희원 씨는 무척 좋은 사람입니다. 본인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미련 없이 일어서기 힘든 아쉬움이 자꾸만 주변을 감돈다. 

희원은 지환을 길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주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유쾌하게 식사를 하는 다음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권희원 씨를 내내 응원하겠습니다. 공연 한 번쯤 보러 갈게요.”“네. 그래요. 저도 서지환 씨가 정의를 위해서 열심히 달릴 수 있도록, 응원할게요.”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정말 마지막. 마지막.

지환은 가만히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부케를 들었다. 그러곤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가 준비한 꽃다발은 아니지만 받아요. 가져가야죠.”가방을 챙기던 희원은 고개를 돌려 지환이 내미는 부케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색감의 부케를 내미는 지환의 모습은 어쩐지 감미로웠다. 

희원은 마음의 번뇌를 지우며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제가 삼 년은 재수 없을 예정이에요. 부케를 받고 육 개월 안에 결혼을 못 할 테니까.”“삼재(三災) 정도로 합의 보죠. 너무 억울하니까.”또다시 이어지는 지환의 농담 섞인 위로에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젠 정말로 헤어져야 할 때이다. 

“건강해요. 서지환 씨.”희원은 손을 내밀었다. 

“권희원 씨도 행복하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하고, 씩씩하게.”지환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은 특별했던 맞선 상대와의 만남이 종료되는 순간. 서로는 웃었다. 

비혼의 동료를 만나 든든했다고. 조금은 위로받았다고.

당신의 인생 또한 내내 안녕하길.

“잘 가요.”“네. 잘 가요, 서지환 씨.”나는 바라겠다고.

일은 많고 몸은 바쁘지만, 그다지 의미가 깊지 못한 시간은 훌쩍 흘러버렸다. 

다시금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환은 쉴 틈 없는 과중한 업무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접수, 송치되는 건이 많다 보니 부지런하지 않으면 사건 처리가 어려웠다. 

“오늘 날씨가 안 좋은데요.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검사님.”“그러네요. 우중충하고 습하고.”“이런 날은 따뜻한 커피가 최곱니다. 커피 드시죠, 검사님.”검사실 참여계장인 최금호 계장은 지환의 책상에 봉투를 내렸다.

서류더미와 씨름을 하고 있던 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서린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베이글이다.

“여어, 계장님. 제 맘을 어떻게 또 아시고 이렇게.”“혼자만 마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검사님은 며칠 야근이다 뭐다 고생하시고 집도 제대로 못 가셨는데.”커피 한 잔에 온정이 깃든다. 

지환은 점심시간도 잊은 채 업무에 몰두했음을 깨닫고는 씩 웃었다. 

최 계장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거뭇해진 날씨를 반겼다. 

“비가 대차게 오려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라가 가물어서 큰일이었는데. 제가 아침마다 기우제를 지냈죠.”“하하, 기우제. 계장님 댁이 농사짓는다고 하셨죠?”“예. 안 그래도 오늘 퇴근하면 집에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일손이 부족하니까요.”오늘 집에 내려간다는 계장의 말에 지환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벌써 금요일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주말이네요. 월요일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매 사무실에서 일만 하시니까 그렇지요.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바쁘니까 잡생각 안 들고, 바쁜 게 나쁘지만은 않네요.” 누군가 제동을 걸지 않으면 시간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흘렀지만 지환은 외려 그러한 나날을 즐겼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과, 의로운 일을 한다는 정의로움이 합쳐져 만족감은 상당했다. 

어쩌면 검사일이 천직일지도 모른다고, 지환은 생각했다. 

“서검, 바빠?”“괜찮아. 들어와.”커피 한 모금을 삼킬 때쯤 정윤이 사무실로 찾아온다.

계장은 밖으로 나섰고, 정윤은 지환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잔뜩 쌓인 서류를 슬쩍 뒤져보던 정윤은 혀를 끌끌 차며 입술을 열었다. 

“너 요즘 밥은 먹고 일하냐?”“보다시피 베이글로 연명하고 있다네.”지환이 한입 베어 문 흔적이 있는 베이글을 들어 보이자 정윤은 가져온 브런치를 내렸다. 

“잘됐네. 윤검이 나 먹으라고 사다 줬는데 너무 많아서 좀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어.”그래? 지환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브런치를 대충 흘겨보다가, 다시 브런치로 시선을 고정했다. 

익숙한 브런치 가게의 로고.

“여기가 그렇게 맛집이래. 요즘 엄청 뜨는 브런치 가게라는데 줄이 엄청 길다네? 꽤 오래 기다려서 사 온 거라고 윤검이 그러더라.”언젠가 희원의 연습실을 방문했을 때 포장해 갔던 그 집, 그 브런치다. 

지환은 난데없이 희원의 얼굴이 떠올라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참 잊고 살았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그녀와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잘 있을까?

“서검, 지금은 커피 마실 거지? 그럼 밀크티는 이따가 마셔. 밀크티도 이 집에서 되게 유명하대.”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야, 서지환. 사람이 말하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아. 아아. 아니. 아무것도.”“그나저나 너 오늘도 선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일곱 시?” 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선 자리가 잡혀 있다. 희원과 헤어진 뒤 벌써 세 번째 맞선이다. 

정윤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서검 아버님도 정말 대단하시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귀한 처자들을 소개받아 오시는 거야?”“나도 모르겠다.”“아버님은 네가 선 자리에서 운명의 상대라도 만나길 바라시는 걸까? 서지환이 첫눈에 반할?”“당신께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난 그저 포기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물론 귀한 처자들과의 만남이 해피엔딩이었을 리 없다. 

“서검, 그냥 딱 잘라서 선 안 본다고 해. 결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선은 대체 왜 보러 다니는 거야? 왜?”“가족의 평화를 위한 길이다. 나는 뭐 좋아서 다니는 줄 아냐?”휴, 지환은 정윤과 심란한 대화를 나누다가 희원의 얼굴을 손쉽게 지워냈다. 

희원의 근황이 일순 궁금했지만 그 또한 가볍게 지워냈다. 

“됐고, 이거나 빨리 먹어. 밥도 안 먹고 무슨 일을 해. 빨리 먹어, 서검.”자신이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잘 지낼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유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야야, 진짜 맛있다. 맛있다는 게 괜한 풍문은 아니었네. 빨리 먹어봐, 서검. 빨리.”권희원 씨는, 아마도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연습실 안으로 옹글고 장대한 음악이 울려 퍼지다가 끝난다. 

여운이 남은 손끝을 천천히 내리며 희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구언은 그녀의 허리를 놓으며 빠르게 물통을 집어 들었다. 

후, 후…… 두 사람은 한동안 고르지 못한 숨을 쉬었다. 

“원아, 물 마셔.”“아아. 땡큐.”구언은 희원에게 물통을 내밀었고, 희원은 물통을 받아들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구언은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고야, 비가 오려나 보다. 삭신이 다 쑤시네.”“그래? 비 올 것 같아?”희원이 바라보니 창밖은 시간과 관계없이 어두컴컴하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이제 곧 쏟아질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구언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 몸뚱이가 기상청으로 가야 해. 다른 건 몰라도 비 오는 건 기가 막히게 맞추는데.”“맞아. 넌 진짜 비 오는 건 귀신같이 맞추더라. 몸이 기상청이야.”희원은 동의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 연습은 그만할까? 오늘은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서로는 대화를 나누다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연습을 끝마치기로 했다.

구언은 힐끔 시계를 보았다. 

“너 오늘 선본다며.”“아아, 말도 마. 나 안 그래도 그래서 지금 저기압이야.”“어르신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포기를 모르시냐? 대단하시다.”희원은 에효…… 앓는 소리를 내며 남은 물을 마저 다 마셨다. 

따분하고 느린 일상이 펼쳐지는 요즘, 희원은 어제 같은 오늘을 살고 있다. 

지환과의 맞선이 별다른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후에 알게 된 그녀의 할아버지는 내심 안타까워했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다. 

몇 번의 맞선 결과가 같았으므로 그저 인연이 아니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선을 또 보라고요? 저번이 끝이라고 했잖아요!’‘맞선 보다가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편하게 다녀오는 주제에 뭘 그렇게 펄쩍 뛰는 게냐? 잔말 말고 이번에도 편하게 다녀와라.’희원은 또다시 선 자리로 내몰렸다. 

아기 새에게 연신 모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처럼, 할아버지는 손녀의 선 자리를 끊임없이 주선했다. 

다신 맞선을 보지 않을 거라고 윽박지르고 합의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진짜 마지막. 진짜로 마지막!’통금을 어기고 술주정을 부린 죄명 아래, 희원은 이번에도 할아버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맞선 상대는 잘나가는 서울 모처의 성형외과 의사란다. 

돈을 쓸어 담는다나 뭐라나.

“요즘 들어 더 많이 보러 다니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나 지금 우리 집에선 맞선 성수기라니까.”“맞선 안 보면 안 돼?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맞선을 보는 이유는 뭐야?”“……통금 시간 연장을 위해서?”희원의 엉뚱한 대답을 들으며 구언은 답답하다는 듯 희원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어르신 마음도 알겠지만 너도 니 인생 살아야지. 강하게 밀고 나가. 맞선 보기 싫다고.”“안 돼. 우리 할아버지 속 썩이면 절대 안 돼. 우리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셔야 하거든.”“할 말 없네. 그렇게 얘기하니까.”“그리고 식사 한번 하는 건데 뭐, 밥도 맛있고. 그걸로 위안받는단다.”“권희원, 밥은 내가 사줄 수 있어. 얼마든지.”“알아. 그리고 나도 사 먹을 수 있지. 얼마든지.”맞다. 나 요즘 선 자리 나가면 더치페이해. 

희원은 중얼거리며 구언이 헝클어놓은 머리를 묶었다. 

씻고 정리하고 선을 보러 가려면 이제 슬슬 차비를 해야 한다.

여린 몸 위로 카디건을 걸쳤다. 

“나 이만 갈게.”“비 올 것 같은데 우산 있냐? 데려다주랴?”“걱정 마, 차 가져왔어.”희원은 씽긋 웃으며 구언을 향해 가보겠다고 손을 흔들었다. 

“유구무언 씨, 주말 잘 보내. 월요일에 보자.”“주말에 할 일 없으면 점심에 나와. 뮤지컬이라도 보러 가게.” “무슨 소리, 할 일 없는 점심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주말엔 찍소리 없이 집에 있을 거야.”수고! 나 먼저 갈게! 희원은 연습실 문을 열고 나서며 퇴장했다. 

“권희원이랑 맞선이라도 봐야 하나. 그래야 나도 권희원이랑 밥 한 끼 같이하려나.”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구언은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랑 선을 본다는데 데려다준다는 나도 참 물색없다.”못났다! 못나도 참 드럽게 못났다! 유구언! 

에효, 연습 외엔 도통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 희원을 생각하며 구언은 탄식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은 생각보다 컸지만 언제나 그녀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자에게 ‘친구’라는 출발점은 늘 불리했다. 

관계의 틀을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으니까.

……불리해서. 

“연습을 좀 더 해야 하나, 아니면 비 오기 전에 그냥 들어갈까.”쉽지 않아서. 걱정이 많아서.

빌어먹을 짝사랑 같은 건 오늘도 무리 없는, 슬프게도 건재한, 아쉽게도 끝이 없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땅값이 많이 올랐어요. 시세 차익만 해도 노후 설계가 충분히 가능하고도 넘쳐흐르죠.”“아…… 네. 그러시군요.”“일단 상권이 좋으니까. 신축까지 하면 그 가치란 뭐, 지금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마주 앉은 맞선남은 통성명이 끝난 이후 본격적인 집안 자산에 대해 입을 열었다. 

식사가 마저 나오기도 전의 일이다. 

“부모님께서 과거 매입한 빌딩은 지금 임대료만 억이 넘어요. 리모델링 계획 중인데, 1층 가장 메인 자리는 카페 하기 딱 좋겠더라고요. 지금은 식당이 자리하고 있지만.”“임대료만 억이 넘어요? 우와, 우와.”희원은 영혼 없는 리액션을 이어갔다. 

듣고도 믿기 힘든 금액의 시세 차익도. 

억, 소리 나는 임대료도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

“부모님께선 제 와이프에게 그 명당자리를 주시겠다고 했어요. 며느리가 취미 생활로 카페라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돈이야 소소하게 벌겠지만 돈이 목적은 아니니까.”“아…… 그렇구나…….”평당 수천을 호가하는 100여 평의 공간.

취미 생활로 시작하는 카페 사장.

소소한, 돈벌이.

“물론 제 와이프 될 사람이 부모님 건물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요. 제 건물에서 오픈을 시켜줄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물주 의사 남편. 

재력가 시부모님. 

“아무래도 제 병원이랑 카페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더 좋겠죠. 더 자주 볼 수도 있겠고.”“네…… 그렇겠네요…….”입이 쩍 벌어질 만큼 대단한 재력과 능력을 과시하는 사내 앞에서 희원은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관심 없는 척하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관심 있는 척하자니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고. 

“식사 나왔습니다.”오오. 나이스 타이밍에 메인 식사가 나온다. 

희원은 모처럼 생기 있는 눈빛으로 접시를 반겼다. 

방대한 연습량을 소화하고 나면 극도의 허기짐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희원은 냉큼 포크를 들었고 성형외과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사내는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식 앞에 전투적인 자세가 귀엽다는 표정이다. 

“주변 동료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고, 저도 이젠 제 인연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이것 좀 드실래요? 이거 꽤 맛있어요.”“감사합니다. 맛있네요.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주말엔 가족과 함께하는 동료들이 부럽더라고요.”“네. 맞아요. 부러울 때도 있어요. 아아, 그건 뜨거우니까 조심히 드세요.”“벌써 먹었는데 많이 뜨겁네요. 그리고 권희원 씨는 참 매력적입니다.”“……네?”희원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음식에 집중한 나머지 사내의 이야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죄송해요. 사실은 배가 너무 고파서 정신이 없어요. 연습을 끝내고 나면 엄청 허기지거든요.”“저런, 무용 연습을 오래 하시나 봐요.”“네. 오래 하고, 많이 하죠.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사내는 웃음을 터트리며 괜찮다고 말했다. 

단아한 얼굴, 청순한 미소. 솔직한 입담.

희원의 첫인상은 이미 오케이가 된 상태였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결정된 호감이다. 상대에게 반하는 시간은 3초면 충분했으니까.

“저의 형은 맨해튼에 있어요. 혹시 맨해튼 가보셨어요?”“아뇨. 사실 저 해외여행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집이 엄해서.”“아, 그러시구나. 안타깝네요.”“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사내는 자신의 음식을 덜어 그녀 앞에 내려주었다. 

“저는 입맛이 없어서요. 권희원 씨 많이 드세요. 아무래도 배가 좀 차야 대화가 되겠죠?”“아……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와인 한잔하실래요? 해산물에 좋은 와인 추천해드릴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연간 스무 병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는 최고급 와인이 이 집에 있거든요.”“괜찮습니다. 제가 실은 와인을 잘 못 해서요.”희원은 단칼에 거절했다. 

물론 최고급 와인은 궁금했지만,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아, 와인을 못 하시는구나. 아쉽네요. 권희원 씨에겐 뭔가 아쉬운 게 많은 것 같습니다.”“하하, 네. 죄송합니다.”“뭐, 아쉬움은 차차 해소하면 되니까요. 괜찮습니다. 이제 식사에 집중하세요.”사내는 그런 그녀의 시간을 존중해주었고, 희원은 부지런히 식사했다.

맛은 훌륭했지만ㅡ

음식은 식도를 통해 넘어가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권희원 씨는 식사 중에 물을 많이 드시네요.”“아…… 그러게요. 목이 좀 말라서.”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경찰차가 있는 걸 보니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래요? 어머, 그러네요.”식사에 열중이던 희원은 사내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말대로 대로변에 경찰차가 서너 대 멈춰 있다. 

강 건너 불구경이 재미있듯 창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간다. 

사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일까요? 궁금한데.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어어, 누가 잡혔다. 사내는 유심히 바라보다가 발견한 듯 중얼거렸다.

경찰들이 용의자를 잡았는지 부근이 혼잡하다. 희원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대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공무집행 중인 경찰들은, 우산도 우비도 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비도 오는데 경찰분들 고생하네요. 이래서 몸으로 뛰는 직업은 힘들다니까요. 아아, 권희원 씨도 몸 쓰는 일이지만 물론 경우가 다르긴 하고요.”……지환이 떠오른다. 

강렬했던 첫인상. 현행범을 체포하던 순간의 첫 만남.

“권희원 씨, 왜 웃으세요?”“아, 죄송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문득 떠오른 지환의 얼굴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고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와 있었던 일, 그와 나눈 대화들이 난데없이 생각나 희원은 눈만 감았다가 떴다. 

서지환 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변함없이 친절하고 유쾌할까?

아직도 의미 없는 선 자리에 끌려다니고 있을까? 

나처럼? 당신도? 

“……맙소사.”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희원은 헛것이 보이는 것만 같아 헛웃음을 토했다. 

그를 떠올렸더니 순간 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남자가 그로 보인 것이다. 

두어 번 고개를 흔든 희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물을 마시려고 움직이던 그녀 손은 허공에 멈추고ㅡ 

“……어?”우산을 든 채 어깨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던 그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동시에 같은 생각,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 우연이면, 인연일지도 모르겠다고.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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