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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법의 눈빛 (9/98)

9. 마법의 눈빛

“어후, 무슨 비가 이렇게 무식하게 내려.”식당 뒤편에 마련된 주차장에 주차를 끝낸 지환은 비바람에 무용지물이 된 우산을 들고 뛰다시피 안으로 들어섰다. 

걸어오는 짧은 시간 재킷이 젖어버릴 만큼, 비는 강력하게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ㅡ.”급하게 식당 문을 열었다. 

비에 흠뻑 젖은 우산과 재킷을 추스르며 맞선녀를 찾아보자니, 저쯤 희원이 앉아 있다. 

“……어?”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발견한 지환은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희원도 적잖이 놀란 눈빛을 하고 있다. 

놀란 단계를 빠르게 지나 반가운 마음이 찾아왔지만 지환은 우뚝 멈춰 서 있기만 했다. 

어쩐지 반갑게 다가가 아는 척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녀는, 맞선을 보고 있다. 

어느덧 지환의 시선은 그녀의 맞선남을 빠르게 살피고 있다. 

지도 맞선보러 온 주제에 희원의 맞선이 썩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환을 발견하고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희원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를 잠시 떠올리니 그가 등장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신기한 상황인가.

희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저쯤 시선을 고정하자 맞선남 의사 선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흐음.” 의사 선생은 길목에 멈춰 서 희원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권희원 씨, 아는 분인가요? 저분이 계속 쳐다보고 계신데.”희원은 지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열었다. 

“네. 알아요.”심장은 뛰었다. 별 이유도 없이. 이상하게도.

“이차 저차, 아는 사람이에요.”그냥. 

지환의 맞선 상대는 이미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다. 

지환은 힐끔, 시선을 들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맞선녀를 바라보았다. 

휴대폰에 시선을 빼앗긴 맞선녀의 테이블은 희원의 테이블과 아주 가까웠다. 

더 이상 서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지환은 희원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희원도 그의 묵례를 받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맞선을 보러 나온 상황에, 구구절절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윤영원 씨 맞으시죠?”아뿔싸. 희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스쳐 저 멀리 걸어가나 싶었던 지환이 바로 옆 테이블에 멈춰 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여성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환을 반겼다. 

“아, 네. 윤영원입니다. 서지환 씨?”뭐야……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건데…….

희원은 의도적으로 지환의 반대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지환입니다. 제가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아녜요. 저도 막 왔어요. 오시는 길에 차는 안 막혔나요?”“비가 와서 좀 막히긴 하더라고요.”“비가 많이 오죠? 제가 출발할 때는 이렇게 많이 오지 않았는데.”듣고 싶지 않아도 저들의 대화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온다. 

……제길. 희원은 찬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과는 달리, 어느덧 당나귀 귀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권희원 씨?”“아, 아! 죄송해요!”아차차. 저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눈앞의 맞선남을 잊고 말았다. 

희원은 물잔을 내리며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저 옆 테이블의 다정하고 온화한 분위기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

“죄송해요. 제가 잠시 결례를.”“아닙니다. 권희원 씨가 물을 많이 드셔서요. 물 좀 더 시킬까요?”“네. 감사합니다. 무척 친절하시네요.”지환은 힐끔 희원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하하호호, 희원의 얼굴엔 시종일관 웃음꽃이 펴 있다. 

선보기 싫다던 여자 맞나? 아주 꽃밭이네, 꽃밭. 웃음 꽃밭.

“식사할까요? 메뉴 고릅시다.”“네. 서지환 씨.”지환은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맞선녀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마치 외국어 영역 듣기 평가를 하듯 희원의 테이블에 온통 집중한 지환은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다. 

서로 바라보며 반가웠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운명은 개뿔, 서로는 서로에게 휘발성으로 끝난 맞선 상대일 뿐인 거다. 

어느덧 지환의 테이블로 식사가 나오고, 희원의 테이블로 후식이 나왔다. 

분위기는 거지같았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5학년 담임을 맡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큰 어려움은 없고요.”“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참된 스승님은 오래 기억되는 법이죠.”“교권이 붕괴되었다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희원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홀짝 삼키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듣자하니 지환의 맞선녀께선 학교 선생님이란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정했고 가식 없는 웃음이 감도는 여성이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선하게 생겼을 것만 같았다. 

학교 선생님. 좋지. 아주 좋지.

희원은 분주하게 시선을 옮기며 슬쩍 지환을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여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허,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지환의 모습을 확인한 희원은 탄식을 터트렸다. 

내 이야기는 진정성 있게 들어준 적 없으면서, 선생님께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표정이네?

희원이 커피잔을 내리자 이번엔 그녀의 맞선남이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지환의 귀가 쫑긋 선다. 

“커피를 좋아하시나 봐요. 커피를 좋아하면 카페 운영도 편할 것 같은데.”“아, 네. 저는 커피를 무척 좋아해요. 곧잘 내려 마시기도 하고요.”“제 건물 1층 카페 운영권을 희원 씨께 드려야겠는데요? 원 없이 희원 씨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실 수 있게.”“어머머, 농담도 참. 제가 카페를 운영할 실력은 아니거든요. 맛은 장담 못 해요.”하하호호, 희원이 웃자 지환의 이마에 실핏줄이 터진다. 

못 들은 척하려 해도 자꾸만 그녀 웃음소리가 거슬린다. 

“제가 아무래도 성형외과를 운영하다 보니 미적 기준이 좀 확고하긴 한데, 이런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어랍쇼. 건물주에 의사?

다 가진 놈일세 그려?

하! 하! 지환은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씰룩씰룩 웃었다. 

“권희원 씨는…… 정말 미인이십니다.”“아……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지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예쁘다고 하면 진정성이 없네 뭐네 발끈하던 그녀가 저토록 수줍게 웃는 얼굴이라니.

“저, 서지환 씨.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해 보이시는데.”“예? 아, 예.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하하. 하하하하. 지환은 심하게 구겨져 있던 인상을 펴며 시원하게 웃었다. 

맞선녀는 종갓집 차남이라는 지환의 환경을 이미 듣고 나온 듯했다. 

조심스럽게, 맞선녀는 입을 열었다. 

“서지환 씨는 차남이시죠?”“네. 그렇습니다.”“사실 종갓집이라고 해서 무서웠어요. 저는 그런 거 싫거든요. 그런데 차남이시라니 조금 안심이 되네요.”“아…… 하하, 네. 차남입니다.”“제사를 제가 받아와야 한다거나, 명절에 밑도 끝도 없이 여자들만 일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죠?”“네. 물론 아닙니다. 평등하게 하고 있습니다.”“질문이 무례했더라도 민감한 문제라서요. 워낙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이다 보니 이해해주세요.”맞선녀는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이민을 가고 싶다고.

모든 대화를 순조롭게 이어가던 지환은 맞선녀의 발언에 물을 마시다가 멈칫, 했다.

“이민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교육자 입장에서 보면 교육 환경이 엉터리예요. 이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어…… 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그런 건 차차 의논해보면 될 것 같아요. 아마 서지환 씨도 제 계획을 듣는다면 이민에 찬성하실 거예요. 그리고 일단 신혼집은 제가 지목한 동네, 아파트였으면 좋겠어요.”지환은 할 말이 없어 웃었다. 

희원의 테이블도 대화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권희원 씨,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결혼 후 경제활동은 남자가 하고, 아내는 내조와 육아에 신경 써줬으면 좋겠습니다.”“아…… 아? 내조와 육아요?”“네. 저희 집에서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도 제 주변 환경이 안정되었으면 하는 것에 있으니까요. 사실 경제적인 문제가 없다면 아내가 나서서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경력단절을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다니, 놀랍네요. 그리고 사회활동이 재화창출 목적만은 아닐 텐데요.”“대신 남부럽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부족함 없이 평생 하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전부 다 완벽하게 맞춰줄 자신이 있어요.”“……제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으시군요.”희원은 머그잔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러곤 친절하게 웃으며 남은 말을 더했다. 

“저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습니다. 내조에 전념할 의사도 없죠.”“아…… 예? 그게 무슨?”“경력단절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무용은 제 인생의 전부이거든요.”희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무리를 짓던 지환이 일어서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오늘 식사 자리 즐거웠습니다. 부디 좋은 반려자를 만나시길 진심으로 바랄게요.”“아…… 권희원 씨, 그러지 마시고 다음에 본격적인 만남을…….”“제 공연 보러 오세요. 저는 제 몸이 허락하는 내내 무용과 함께할 거니까요. 언제라도, 언제든지 환영할게요.”희원은 웃었다. 먼저 일어나는 미안함에 식사 값은 계산하겠다고.

지환은 미련 없이 나서는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젠 그도 일어서야 할 때이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민은 제게 타협되지 않는 구간인 것 같습니다.”“아…… 괜찮아요. 서지환 씨. 차차 생각이 바뀔 거예요. 서지환 씨의 생각은 곧 바뀔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제가 확신을 못 해서요. 죄송합니다.”지환은 일어섰다. 맞선녀의 당황함이 서린 시선이 따라온다. 

무슨 말이라도 더 보태고 싶어 하는 맞선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씩 웃었다.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더 보채봐야 여기가 끝이라는 것을 알아챈 맞선녀는 따라 그에게 인사했다.

남겨진 두 사람의 맞선 상대는 각자의 자리에서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을 짧은 시간에 알려야 하는 만남.

오늘도 맞선은 쉽지 않다고.

식당 문을 열고 나서니 비가 대차게도 쏟아진다.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은 희원은 주차장까지 뛰어갈 생각으로 가방을 머리 위로 올렸다. 

예상하기를 주차장까지 뛰어가면 흠뻑 젖을 게다. 

“차에 수건이 있나? 저번에 집으로 가져간 것 같은데.”희원은 중얼거리며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후드드득 젖는다. 희원은 종종종종 달렸다. 

“으아아, 너무 많이 내린다.”희원은 얼마 못가 바로 옆 건물로 피신했다. 몇 걸음 안 걸었는데 벌써 홀딱 젖어버렸다. 

미친 듯이 비를 퍼붓는 하늘이 원망스러워 희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가방을 들고 머리를 가려봐야 부질없는 일. 희원은 가방을 내렸다. 

“그렇게 노려봐도 안 그칩니다. 기우제를 지낸 사람이 있거든요.”우산을 쓰고 나온 지환이 희원의 앞에 멈춰 선다. 

희원은 시선을 내려 앞으로 다가온 그를 바라보았다. 

쏴아아아ㅡ 빗줄기는 시원하게 쏟아지고ㅡ

“보다시피 공간 좀 남는데, 옆자리 대여해드릴까요?”혼자 쓰기도 버거워 보이는 작은 우산 안에 억지로 공간을 만들며 그가 물어온다. 

희원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우산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젖어든다. 

“어어! 젖어요!”그의 행동에 놀란 희원은 우산 속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그는 우산을 다시 자신의 방향으로 꺾었다. 

“그러니까 오랄 때 와야지, 뭐하고 있습니까?”“우산이 너무 작으니까 염치가 없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왜요.”“확실히 우리는 썸 타기 글렀네요. 우산이 작으면 좋아해야지, 망설이기는.”“시답잖은 농담도 여전하시네요.”얼떨결에 작은 우산 하나로 가까워진 간격.

그를 올려보자니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희원은 머뭇거리다가 그를 올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을 건네 온다. 

“또 보네요. 권희원 씨.”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그녀를 향해 기울어진 우산.

우산 속 공간을 대여받지 못한 그의 한쪽 어깨는, 이미 물바다가 되었다. 

“잘 지냈습니까?”

주차장으로 이동하던 두 사람은 주차장 옆 작은 카페를 찾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잔 마시자고, 두 사람은 쾌히 합의를 본 것이다. 

그녀는 따뜻한 유자차를 주문했고.

그는 따뜻한 허브차를 주문했다. 

“비가 엄청 와요.”희원이 물기를 털며 중얼거리자 그는 슈트 재킷을 벗었다. 

털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저 우산 씌워주시느라고 다 젖어서 감기 걸리겠어요. 어떡해요?”“뭘 어떡합니까? 아프겠죠. 별 수 있나.”“확실히 우리는 썸 탈 위인들이 아니네요. 걱정해주면 좋아해야지, 솔직하기는.”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지환이 웃는다. 

쳇, 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지환은 그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가 감기 걸리면 권희원 씨 책임이 상당하니 약 들고 사무실로 찾아와요. 알약 힘듭니다. 물약으로.”“네네. 서지환 씨는 유아용 감기약이 어울릴 정신연령이긴 해요.”“오케이. 사 온다는 말로 알고 접수. 그리고 이 손수건도 접수.”쳇. 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환은 그런 그녀의 얼굴이 반갑다는 듯 둥근 미소를 지었다. 

“선봤습니까?”“네. 뭐, 보셨다시피. 요즘 우리 집은 맞선이 월간 행사예요. 서지환 씨도 선 봤죠?”“저야 주간 행사이니까. 으레 있는 일이죠.”따뜻한 차가 나오고, 두 사람은 약간의 물기가 있는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 들었겠네요. 제가 하던 이야기.”“들었죠. 물론 권희원 씨에게도 제 이야기가 들렸겠고.”……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하면 저한테 카페 차려주신다지 뭐예요. 그것도 100평. 노른자 땅. 저 같은 소시민의 심장에 해로운 이야기를 들었어요.”“청소하기 힘들겠습니다. 저는 이민 갈 뻔했네요.”하, 쉽지 않다. 두 사람은 탄식 같은 웃음을 쏟아내며 못한 말을 삼켰다. 

잘 지냈느냐, 나는 잘 지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그리고 나는 오늘 당신 생각을 했다. 

“아까는 권희원 씨가 동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도요. 적군 속 아군이랄까, 저도 그랬어요.”이렇게 만나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표현을 다 바쳐, 

“따뜻할 때 마셔요. 권희원 씨,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진심으로 당신이 반가웠다. 

구태여 술이 없어도 사사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속 썩이고 싶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만 그건 힘드니까, 선이라도 보라면 보는 거죠.”“저도 그렇습니다. 나 하나 굽히면 모두가 편한 일이니까. 집안 어른들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맞아요. 맞아요.”작은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맞선을 강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사연까지 닮아 있다. 

아, 하면 어, 하고 받아주는 서로가 편안한 건 당연할지 모른다. 

희원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참 편해요. 서지환 씨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닮은 구석이 많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편하거든요.”에효, 희원은 턱을 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결국 서지환 씨의 집도 우리 집도 포기하는 날이 올까요?”“글쎄요, 저도 가장 바라고 있는 일이긴 한데.”차라리 결혼 적령기를 어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면 집안의 독촉과 염려가 조금 덜 할 것도 같은데.

“그냥 아무나 만나서 결혼할까 봐요. 그럼 최소한 자유는 얻을 수 있을 텐데.”중얼거리며, 그녀는 점점 다가오는 통금 시간을 확인했다. 

통금 시간만 아니면 그를 졸라서 막걸리와 파전이라도 한잔하고 싶은 날씨.

하지만 꿈도 못 꿀 일이다. 

“오늘 알게 됐는데, 제가 해외여행도 한 번 못 가봤더라고요. 맞선 보다가 깨달았어요.”가보고 싶은 나라도 많은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해외가 뭐야,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갔어요. 인생 너무 슬프지 않아요?”비가 내려서 그런 걸까, 기분이 조금씩 내려간다. 

내 인생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 

어쩌면 그래서, 무용에 더더욱 집착하는 걸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춤을 추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니까.

진짜 아무나 붙잡고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걸까.

그럼 결혼이라는 제도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희원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결혼. 자유.

자유. 결혼.

희원은 천천히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그녀 입술 사이로 뜻 없는 탄식이 흐른다. 

희원이 바라보자 그녀의 허전하고 허탈한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려주던 지환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반응했다. 

그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폭주한다. 

그를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은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허황된 일이라, 정리를 하기 바빴다. 

결혼.

자유.

서지환.

“무슨 생각합니까?”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 얼굴 오래 보면 질립니다. 그만 봐요.”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느 때처럼 농담을 던지는 그를 보면서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별생각이 없는지 지환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죠. 권희원 씨 통금 시간 다 돼갑니다.”먼저 일어서며 지환은 재킷을 입지 않고 들었다. 

희원은 천천히 일어서며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다시금 비가 오는 거리로 나선 순간에도, 그녀는 간간이 그를 응시했다. 

주차장에 들어섰고 두 사람은 그녀의 차량 앞에 섰다. 

비는 물 폭탄 수준으로 내리고 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비 오니까 운전 조심하고!”“서지환 씨도요!”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빗소리. 

희원을 차에 태운 지환은 옆 좌석으로 걸어가 자신의 우산을 접어 그녀 차 안에 넣었다. 

무방비로 비를 맞는 지환을 보며 희원은 놀라 소리 질렀다. 

“맙소사! 우산! 우산 가져가요!”“손수건 값이니까 우산은 가져가요!”“어어? 그거 손수건 엄청 비싼 건데! 우산으로 퉁 치는 거예요, 지금?!”“그럼 받으러 오든가! 잘 가요!”지환이 자신의 차로 뛰어간다. 

희원은 빗속에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녀의 생각 끝엔 자꾸만 지환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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