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대범하게 만드는 (10/98)

10. 대범하게 만드는

“콜록, 콜록콜록!”콜록. 지환은 굵은 기침을 쏟으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 선자리를 알아놓았다는 아버지의 메시지다.

“하, 돌겠네. 진짜.”콜록. 콜록콜록. 지환은 기침을 뱉으며 휴대폰을 내렸다. 

지금 때를 놓치면 아들의 결혼이 더욱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버지는 공격적인 자세로 선자리를 만들었다. 

제발 이 맞선만 없어도 인생이 더욱더 행복할 것만 같은데.

맞선을 거부하고 종료하면 장남인 형의 인생이 괴로워질 수도 있겠단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자신이 선을 보러 다니는 시늉이라도 해야 형제가 편안할 수 있었다. 

비혼의 삶을 연명할 수도 있고.

“콜록. 콜록콜록. 코오오올로오오옥!”찬바람 속에 비를 잔뜩 맞은 다음 날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다 싶더니, 기어이 감기가 찾아오더라.

“검사님, 감기 걸리셨습니까?”“아아, 네. 죽겠네요.”쿨럭. 지환은 기침을 쏟을 때마다 머리가 울리는 것만 같아 미간을 좁혔다. 

최 계장은 지환의 감기가 낯설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사님 감기 걸린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저도 오랜만인 것 같…… 쿨럭, 쿨럭쿨럭!”쿨럭! 쿨럭쿨럭! 코오오올로오오옥! 

검사님…… 

콜록콜록! 코오오올록! 콜오오록! 우웨엑.

여기서 죽지 마요…….

한번 기침이 터지니 연달아 쉬지 않고 기침이 나온다. 

지환은 하면 할수록 더욱 굵어지는 기침에 급기야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희원에게 갈취한 손수건이다. 

“병원은 가셨을 리가 없겠고. 검사님, 주말 내내 밥은 잘 드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최 계장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병원 다녀오십시오, 검사님. 무슨 업무를 보겠다고 일을 나오셨습니까? 하이고.”“하아, 죽을 뻔했네.”흐어.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지환은 거듭 숨을 내쉬었다. 

하도 기침이 나오니 헛구역질까지 한다. 

흐어, 흐어…… 숨을 고른 지환은 물기가 번지르르한 눈빛으로 최 계장을 바라보았다. 

세상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걱정 마세요, 계장님.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습니다.”“이러니 혼자 살면 골병드는 겁니다. 검사님. 밥도 못 챙겨 드시고, 혼자 끙끙 앓다가 출근하신 것 아닙니까?”지독한 몸살이 겹쳐 지옥 같은 주말을 보낸 건 사실이다. 

입가를 가렸던 손수건을 내리며 지환은 물끄러미 손수건을 응시했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정윤이 찾아왔다. 

“분위기 보아 하니까 일하는 것 같진 않고, 나 들어가도 되죠?”“차 검사님! 어서 오십시오!”최 계장이 그녀를 반긴다. 

최 계장은 정윤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고자질하듯 지환의 감기를 알렸다. 

감기? 

정윤은 지환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기? 웬 감기?”“글쎄 말입니다. 검사님이 저 대신 뭐라고 좀 해주십시오. 주말 내내 밥도 안 먹고 끙끙 앓았을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계장님. 저는 계장님께 들은 잔소리만으로 지금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쿨럭.”쿨럭. 쿨럭쿨럭. 

지환이 기침하며 줄곧 손수건을 응시하자 정윤의 시선 또한 손수건에 닿았다. 

여자의 것이 분명한 실크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는 감기 걸린 서지환은 정말이지 낯설었다. 

“서검, 얼굴이 퀭하니 사람 몰골이 아니네. 영장류 맞아? 네 발로 걷게 생겼는데?”“그래, 포유류다. 포유류. 콜록. 사람도 문다. 조심해라, 콜록.”“어우, 진짜 아픈 모양이네.”지환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는 정윤에게 가깝게 다가간 최 계장은 속삭였다. 

“차 검사님, 우리 검사님께 결혼을 하라고 해주세요. 제발 혼자 살지 말고 빨리 결혼을 하…….”“계장님! 결혼이라뇨! 결혼을 왜 해요 왜! 인생은 결국 혼자 사는 거라구요!”“……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 검사님!”최 계장이 잊고 있던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황급히 사과를 건넨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정윤은 밉지 않은 시선으로 최 계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지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서지환 검사는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돼요. 결혼과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거든요.”……본인의 이야기지만 본인만 관심 없는 이야기.

지환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정윤과 계장님의 대화를 건성으로 넘겼다. 

띵동. 

때마침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지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다음 맞선 일자와 장소가 적힌 아버지의 메시지다.

“에휴. 콜록.”“왜? 뭔데?”지환이 한숨을 내쉬자 궁금한 정윤이 물어보지만 답이 돌아오질 않는다. 

지긋지긋한 맞선. 진절머리가 나는 맞선. 

이젠 정말이지 끝내고 싶다. 

“하여튼 서검, 몸 잘 챙겨. 그놈의 맞선인지 뭔지 보러 다니면서 골병들었나 보다.”“검사님의 맞선을 끝내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결혼을 하셔야 한다니까요?”“최 계장님! 서지환의 결혼은 진짜 결사반대! 얘는 결혼해서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니까요?”……결혼. 

지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맞선. 결혼.

결혼, 맞선.

쳇바퀴 돌리는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결혼과 맞선, 두 단어를 곱씹다 보니 손수건의 주인이 떠오른다.

묘하게 닮아 있는 두 사람의 바람은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플 때 약 한 봉지 사다 줄 사람도 없이, 검사님이면 뭘 합니까? 검사님 인생이 너무 외롭습니다.”“서검, 병원 안 갈 거면 약이라도 먹어. 내가 사다 줄 테니까.”“됐어. 괜찮아.” 지환은 결심했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약 사다 줄 사람 있어.”정윤과 최 계장은 다시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감기도 걸렸겠다, 뜨거운 열에 정신마저 혼미하겠다, 미친 짓을 벌리기엔 최적의 날일지도 모른다고 지환은 생각했다.

띵동. 누군가에게서 답이 온다. 

지환은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인지 둥근 미소까지 짓는다. 

“검사님, 누가 약을 사 온다고 합니까?”“네.”열에 달뜬 그의 머릿속으로 ‘결혼’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입성했다. 

[연습 끝내고 약 사서 갈게요. 딱 기다려요.]“지금 막 생겼네요.”

“진짜? 유럽 일주? 한 달씩이나?”“네. 오늘 밤부터 짐 싸려고요. 설레서 잠도 안 와요.”“와…… 좋겠다…….”유럽이라니. 한 달이라니!

희원은 후배 무용수를 바라보며 부러운 눈빛을 했다. 

우연찮게 연습실에서 만난 후배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질문하니 그녀는 꿈도 못 꿀 대답이 돌아왔다. 

“한 달이나? 집에서 허락해주셨어?”“네? 집에서요? 집은…… 뭐, 네.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세요.”“와…… 와…… 진짜 부럽다…… 나도 가고 싶어…….”“언니도 이번 공연 끝나면 다녀와요. 돈도 많은 언니가 대체 여행도 안 가고 뭐 해요?”그러게 말이다. 난 뭐 하니…….

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자 눈치를 살피던 후배는 번뜩 생각이 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집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진짜 언니네 집 너무 엄해요. 말도 안 돼 진짜로.”후배는 앉아서 내내 염장을 질렀다. 

가고자 하는 곳의 리스트를 뽑았다며 그림 같은 관광지를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후배가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희원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나도 여행 가고 싶다. 혼자서 훌쩍. 발 닿는 곳으로 마음껏. 자유롭게.

“에효.”후배가 떠난 자리. 희원은 혼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때마침 연습이 잡힌 구언이 들어온다. 

희원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깐 채 힘없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나도 여행 가고 싶다. 나도 유럽여행. 한 달은 바라지도 않아. 보름. 아니, 열흘 만이라도.”“갑자기 무슨 여행 타령이야. 누가 여행 간대?”에효. 내 신세야. 희원은 대답 대신 탄식했다. 

그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구언은 또다시 시작된 그녀의 신세 한탄에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얼추 앞뒤 정황을 알 것 같다. 

그만큼 그녀를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결혼을 해. 결혼. 할아버지께서 니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그리고 그 결혼, 나랑 하면 좋겠다.

구언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꾹 삼키며 희원의 표정을 살폈다. 

전혀 듣고 있지 않은 표정이다. 

“결혼해서 자유를 얻고 여행도 다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얼마나 좋냐?”“야. 우리 할아버지도 안 주는 자유를 남편이 주겠냐?”응. 난 줄 수 있는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는데. 

“평범한 결혼생활은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결혼을 어떻게 해.” 휴, 희원은 꿈도 야무지다는 눈빛을 하며 일어섰다. 

구언은 할 말이 남은 듯 보였지만 정작 그녀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질 않았다. 

“혹시 모르지. 나처럼 목적이 있어서 결혼하려 드는 사람 아니면 절대로 결혼은 꿈도 못…….”머리를 묶으려던 희원은 말꼬리를 흐렸다. 

목적. 

결혼. 

“야, 권희원.”결혼.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너의 꿈을 실현해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생각보다, 가까운 곳. 

“뭐,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지. 이를테면 뭐, 너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랄까?”“아주 가까운 곳…….”희원은 번쩍 눈을 뜨며 허공을 응시했다.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자신을 어필하던 구언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아…… 가까운 곳…….”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희원이 바라보자 구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맞아! 나야! 이렇게 가까운 곳에 내가 있어! 권희원! 

애타는 구언이 눈빛으로 심정을 전달해보지만 그녀가 알아들을 리 없다. 

그녀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는 사람은 구언이 아닌 바로 지환이었으니까. 

띠링. 그때였다. 

희원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휴대폰이 있는 곳으로 팔을 뻗었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맙소사.”희원은 중얼거렸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우연이 겹치는 걸까. 

“누구 연락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굳었어?”“……그냥. 감기약이 필요한 사람.”[감기약 필요한데, 안 옵니까?]그리고 어쩌면 내게도 필요한 사람.

지환이었다. 

어느덧 희원과 구언의 마지막 연습이 끝났다. 

희원은 구언에게 밀착되어 있는 자세 그대로 호흡을 유지했다. 

음악은 끝이 났지만, 남아 있는 여운의 갈무리를 충실히 해야 했다.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동작이 끝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후…… 후…….”그녀는 밭은 숨을 내쉬며 뻗었던 손끝을 말아 쥐었다. 

허공에서 멈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완벽했던 시선 처리를 끝냈다. 

음악이 멈추니 텅 비었던 머릿속으로 잡생각이 스며든다. 

감기 걸린 지환을 위해 연습이 끝나는 대로 출동할 예정이던 희원은 수순처럼 그를 떠올렸다. 

이미 끝난 연습에 연연하는 기색 없이 희원은 강렬하게 붙잡았던 구언의 목덜미를 놓았다. 

구언의 허리춤을 감았던 한쪽 다리를 내리며 분리가 되려 했다. 

“아직.”아직이야. 구언은 먼저 끝내려는 희원의 동작을 제지했다. 

적막이 내려앉은 곳, 구언은 그녀의 허리를 받히고 그녀를 가깝게 바라보았다. 

체감에 끝을 내리는 순간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희원은 그의 여운이 가라앉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몰입했던 캐릭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권희원.”“응?”“권희원, 있잖아. 나 할 말이 있어.”희원은 그제야 몸을 돌리며 그의 손길에서 빠져나왔다. 

할 말이 있다는 녀석의 목소리에 가득 담겨 있는 무게감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할 말이 뭔데?”“그게, 그러니까.”구언은 잠시 뜸을 들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홀로 수만 번은 뱉어봤을 고백이 울대에 매달려 머뭇거렸다. 

너를 좋아한다고, 뱉고 나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편안한 동료 관계로도 남지 못할지 모른다. 

털털한 그녀는 거절 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을지 모른다. 

“할 말 있다며, 뭔데.”“그러니까, 그게.”구언은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말자며 몇 번이나 자신을 다그쳤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그녀에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도래하지 않았다. 

“무슨 말 하려는지 잊어버렸다. 나중에 생각나면 할게.”“뭐야, 싱겁긴.”결국 얼버무린 구언이 머쓱하게 웃자 희원은 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물통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고 구언도 동시에 뻗었다. 

물통을 잡으려던 두 사람의 손이 포개진다. 

구언의 손은 희원의 손을 덮었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잠시 멈췄다. 

쾅쾅, 또다시 유리창이 깨질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희원은 후다닥 손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감기 걸렸다고, 약을 공수해 오라던 지환이 이곳에 서 있다. 

“서지환 씨!”구언은 물통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물을 단숨에 마시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환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건넨 구언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귀한 곳에 누추한 분께서 어쩐 일로.”“…….”“아, 말실수를 했네요.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귀한 분께서 어쩐 일로.”실수인 척 포장하며 진심을 내비친 구언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쿨럭 기침을 했다. 

인내심을 발휘하여 가만히 연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이보게, 유구무언. 권희원 씨의 손은 왜 잡는 건지? 

잡았으면 바로 놓아야 할 게 아닌가? 응?

결국 쾅쾅, 유리창을 두드리고 말았다. 

“언제 오셨어요. 연습하는 거 계속 보고 있었던 거예요?”“네, 뭐. 눈을 뗄 수가 없어서.”눈을 뗄 수가 없더라. 

저 음흉한 유구무언이 권희원 씨의 어디어디를 터치하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희원이 연습하는 모습 보니까 어떠셨어요? 감상이 궁금한데.”또 유구무언이 끼어든다.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대단하던데요. 역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랄까.”지환의 감평을 들은 구언은 하, 헛웃음을 토했다. 

둘이 연습했는데 군계일학을 운운하면…… 

희원이가 당연히 일학일 것이고……

“희원 씨의 공연은 반드시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나는…… 군계란 소리냐…… ?

“제 공연 언제든지 보러 오세요. 실전은 더 괜찮을 테니까요.”허, 졸지에 작중 군계 역을 맡은 구언은 불타는 눈빛으로 물통을 다 비웠다. 

소심한 두 남자가 은근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별 관심이 없는 희원이 알 리 없다. 

“서지환 씨, 그나저나 어떻게 왔어요? 조금만 기다리지, 내가 약 사서 간다니까.”지환은 희원을 길게 바라보았다. 

열이 나는 이유 때문인지 시선에 다가오는 그녀는 따뜻하게 담겼다. 

……인생은 언제나 타이밍.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찾아온 기회를 붙잡아 성공하는 자가 있는 반면ㅡ

기회가 오는 줄도 모른 채 놓치는 자가 있다. 

“그냥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구언은 오늘, 기회를 놓쳤고ㅡ

“권희원 씨에게 할 말도 있고.”지환은 지금, 기회를 잡았다. 

약을 먹으려면 밥부터 먹어야죠. 희원은 아직 식전이라는 지환을 데리고 근처 콩나물국밥집엘 들어갔다. 

밥을 먹으라고 앉혀놓았더니 소주부터 찾는다. 

“감기엔 고춧가루 탄 소주가 최고라는데. 맞습니까?”“누구나 들어봤지만 누구도 입증하지 못한 속설이에요. 병 키우지 말고 약 드세요. 약. 그러다 죽어요.”말려도 들어먹질 않고 술을 시킨다. 

희원은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주인장께 얻은 국내산 태양초 고춧가루 종지를 옆에 두고, 소주에 고춧가루를 넣어 휘휘 젓는다.

“그렇게 넣어서 마시면 안 매워요?”“미각을 잃었는데 뭘 알겠습니까? 칼칼하네요.”으흥, 희원은 심기 불편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시다더니 술타령만 하고 있다. 

“검사님들은 세상 똑똑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그렇게 말꼬리 흐려봐야 소용없습니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다 알아들었으니까.”“멍청한 짓 그만하고 밥이나 드세요. 속 버려요.”희원이 눈짓으로 그만하라 신호를 보내자 지환은 답 대신 웃었다. 

“주말은 잘 보냈습니까?”“네.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엄마랑 목욕도 다녀왔고요.”“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한 모양입니다?”질문이 어처구니없어 희원은 헛웃음을 토했다. 

그러곤 비스듬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는 서지환 씨는 내 생각한 것처럼 말하네요?”“했는데.” “…….”“그것도 많이.”지환의 대답에 당황한 희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상대의 기분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농담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서지환 씨는 순간순간이 농담이에요. 그러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매사 진지하면 인생 재미없습니다.”그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며 유쾌하다. 

앞에 앉은 이가 굳이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 다른 맞선 상대였대도. 

“나한테만 특별하게 대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자들은 그런 거 싫어한다고요.”“남한테 그러는 거 봤습니까? 증거 있는 확신 맞아요?”“쳇.”……다 알고 있지만 어쩐지, 그의 농담을 자꾸만 듣고 싶다. 

조금은 내가 특별하다는, 그런 능청스러움을 보고 싶다. 

“서지환 씨.”“네. 권희원 씨.”약간의 관심, 일정량의 호감.

당신이 내게 가진 그 모든 것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정말로 내 체력과 기운이 허락하는 한 무용을 할 거예요.”“압니다. 또 제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결혼 이후 경력 단절된 동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비혼을 꿈꾸죠. 난 언제까지고 현역이고 싶으니까.”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무용이 아니고도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고.”희원은 자신의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각에 많은 꿈들이 스친다. 

대단하지 않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꿈들. 

“통금이라는 족쇄에 갇혀 이루지 못한 꿈을 펼치고 싶어요. 물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족쇄가 풀리겠지만, 그건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니까.”그녀는 다시금 천천히, 결심이 서린 눈빛을 들었다. 

많은 생각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 그녀 주변을 맴돈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말들 앞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서지환 씨. 서지환 씨에게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음. 약 잘 사주는 예쁜 맞선녀?”“……험한 말 나가요. 십 초 전.”“워워, 진정해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에효, 희원은 기운 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내렸다. 

무슨 말을 해도 진정성이 없는 저 남자를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 지금 진지하다고요. 진지하게 말해줘요.”“진지하게 듣지 않는 건 권희원 씨입니다. 난 진지한데.”……예쁜 사람.

“이래 봬도 아무에게나 약 얻어먹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관계없는 사람의 손수건이나 갈취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지환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원은 은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을 바로 응시했다.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진다. 

“권희원 씨는 다각도로 예쁜 사람입니다. 총평.”“서지환 씨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죠.”“……고민 중입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요. 나도 지금 막 할 말이 생겼으니까.”홀짝, 그가 술을 삼킨다. 

희원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밤새 생각을 했다. 

그러고도 결론이 나지 않아 생각을 미뤄도 봤다. 

이래도 되는 일인가, 과연 이렇게 인생을 내건 도박을 해도 되는 일이 맞는 걸까.

“그럼 할게요. 할 말.”하지만ㅡ

오늘 당신을 만나고 나니 확신이 섰다.

“서지환 씨.”희원은 결심한 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마른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소주잔을 들었다. 

유쾌한 제안은 아닌지, 그녀가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 기다려주기로 한 것이다. 

“우리 결혼할래요?”“쿨럭! 쿨럭쿨럭!”소주가 목에 걸려 지환은 생사를 오가는 기침을 쏟았다. 

얼굴로 피가 쏠려 붉어지고, 꽉 감은 눈에 물기가 번질댔다. 

급하게 휴지를 뜯어 입을 가리며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결혼해요. 우리.”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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