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두에게 놀라운
“서검. 지금 뭐라고 했어……?”정윤은 지환이 건네는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뭘…… 뭐를, 뭐를 한다고……?”“결혼.” 야무지게 흡입하던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이건 청첩장.”“헐…….”충격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윤은 청첩장과 지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더위를 먹었나, 그래서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검, 무슨 농담을 이렇게 인생까지 내걸고 해.”“농담 아니니까 받아. 팔 떨어진다.”녀석이 덤덤하게 내밀고 있는 청첩장 봉투를 어쩐지 받아들 수가 없어 정윤은 슬금슬금 뒷걸음을 걸었다.
지환은 그런 정윤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청첩장을 내렸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날짜 확인하고 별일 없으면 와서 밥 먹고 가.”“말도 안 돼. 결혼? 니가, 결혼을?”누구랑? 이거 실화냐?
정윤은 눈만 깜빡거리다가 홱, 청첩장을 집어 들었다.
선명하게 적힌 지환의 이름과 여자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권……희원?”지환의 주변 사람을 모조리 떠올려보았다.
이름을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이미 희원을 기억에서 지운 정윤은 쉽사리 그녀를 떠올리지 못했다.
“장난이지? 그렇지? 권희원이 누구야?”“기억 안 나? 이차 저차 알던. 초밥집, 데이트 중이라고 했던.”“……아.”아! 아아! 정윤은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 데이트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라고? 그 데이트가 진짜였어?” “그런 셈이지.”“그런데 그 이후로도 맞선은 왜 보러 다녔어? 말이 안 되잖아.”엇. 애매하게 얼버무리려다가 정곡을 찔렸다.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따져 묻는다.
“서검,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연애하면서 맞선은 왜 봐? 쓰레기야?”이럴 땐 쓰레기가 되는 게 상책이다.
“연애하면서 맞선 보면 안 되냐? 결혼한 것도 아닌데.”“헐.”“인연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맞선도 본 거지. 뭘 그렇게 개연성을 따지고 드냐?”“내가 지금 개연성을 안 따지게 생겼어? 너무 뜬금없잖아. 갑자기 니가 무슨 결혼이야.”정윤은 청첩장이라는 증거물을 획득한 채 격양된 음성을 했다.
결혼을 한다니. 서지환이 결혼을 한다니?
“연애를 하긴 했어? 결혼은 언제 정했어? 식장은 언제 잡고? 상견례도 한 거야?”“다 했다. 그래서 좀 바빴고.”“신혼집은? 집도 구했다고?”“구했지. 집값 비싸더라. 허리가 휜다.”“거짓말. 무슨 소리야 이게. 결혼?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이, 결혼?”허. 정윤은 고급스러운 청첩장을 펼쳐보며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그저 그런, 흔한 말들로 결혼 날짜를 알리는 문구.
날짜. 식장 위치.
“뭐야, 얼마 안 남았잖아. 서검, 진짜 결혼해 너?”“그렇게 됐다.”“허…….”정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환을 응시했다.
결혼을 한다는 폭탄 발언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결혼까지 이렇게 초고속으로 정했어. 너 무슨 일 있지.”“일은 무슨. 그런 거 없고.”“애매하게 말 돌리지 말고 말해봐. 너 연애하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결혼을 한다니까 이상하잖아. 니가 무슨 결혼을 해.”“난 결혼하면 안 되냐?”“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널 몰라?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해?”“그러게. 너도 나도 몰랐던 내가 있더라.”“…….”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의 들뜬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머쓱함도 없다.
녀석에게서 미묘하게 흘러나오는 어색한 기운에 정윤은 미간을 약간 좁혔다.
“원해서 하는 결혼 아니구나, 너.”“넘겨짚지 마.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괜찮아? 진짜로? 결혼을 해도 될 만큼, 너 이제 괜찮은 거야?”……괜찮니?
지환은 정윤의 질문 앞에 잠시 침묵했다.
앞뒤 모든 말을 제거한 추상적인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괜찮아. 결국 괜찮아지더라.”“허…….”“사람은 다 변하는 거야. 못 할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 앞에 변하더라.”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지난날의 쓰린 기억들이 지나간다.
조건이 많은 결혼이지만 그런 것까지 정윤에게 알릴 이유가 없는 지환은 씩 웃었다.
정윤은 묻고 싶은 말이 많다는 얼굴로, 그저 바라보았다.
“축하 안 해주냐? 그렇게 계속 울상하고 있을 거야?”“……축하해.”축하해. 정윤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입술을 열었다.
“축하해. 내가 해야 할 말이 이거라면, 축하할게.”그는 무슨 이유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걸까. 알 수가 없다.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그것 또한 알 수가 없다.
“그래. 언제까지 너라고 혼자일 수는 없으니까. 네 말대로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그래. 사랑을 하다가도 돌아서는 게 사람이니까.
사랑이 없다가도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래도 조금 섭섭하다.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시간 많았을 텐데.”“뭐, 정신이 없었어. 미안해.”……정윤은 다시 청첩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숱한 청첩장을 받아보았지만 이렇게 손끝이 따가운 청첩장은 처음인 것 같다.
많은 말들이 울대를 막고 앞다투어 튀어나올 것 같지만 정윤은 꾹꾹 참기로 한다.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ㅡ
“시간 되면 와. 시간 되면.”“무슨 소리야, 꼭 가야지.”아무것도 말해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아…….”긴 침묵 끝에, 구언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녀의 고운 손끝이 붙잡고 있는 청첩장을 바라만 보았다.
연습이 끝나 모두가 돌아간 텅 빈 연습실.
구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땀을 닦던 수건은 힘을 잃은 손이 내버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받아. 청첩장이야.”“……거짓말.”“거짓말 아니야. 진짜로. 진짜로 나 결혼해.”통렬한 충격에 눈빛이 떨렸다.
머리에서 맴맴 도는 모든 말들은 길을 찾지 못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혼? 결혼이라니?
누구와? 왜? 어째서?
“누구랑 결혼하는지 궁금하지? 너도 아는 사람이야.”언제, 이렇게.
“그…… 검사…….”“맞아. 서지환 씨.”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 입술 사이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지환과 희원이 얽힐 때마다 경계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결혼…… 같은 건 안 한다고 했잖아.”숱한 맞선남 중에 조금은 특이한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생각이 없다고. 결혼……은 안 한다고.”“그래. 그랬지. 그랬어.”“그런데 왜…….”간신히 물었다.
왜.
대체, 왜.
“모르겠어. 무슨 계시 같은걸 받은 기분이야. 정말 인연은 존재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하…….”“빨리 받아. 나 손 민망하단 말이야.”희원이 팔랑팔랑 청첩장을 흔든다.
구언은 숨을 가득히 뱉으며 청첩장을 받았다.
피가 뜨겁게 솟구치는 것 같기도 하고, 거꾸로 순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장의 박동이 가팔라 숨은 점점 짧게 끊어졌다.
“결혼을…… 하는구나…….”눈을 뜬 오늘 아침, 기분이 좋았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꿈이 괜찮았던 것만 같아, 시작이 좋았다.
매번 막히던 도로도 뻥뻥 뚫리고 신호도 무척 잘 받아 연습실까지 단번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몸도 가벼웠고.
“아…… 그래, 결혼을. 그래. 결혼, 결혼을…….”오늘의 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여뻤다.
고백을 하기에 적당한 날일까.
오늘만큼은 괜찮을 것 같은데.
매일 하는 생각을 오늘도 했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습실에 둘이 남기를 기다렸는데, 너도 나와 둘이 남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하…… 결혼, 아아…… 결혼…….”“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결정한 일이 아니라서, 정신이 없었어.”조금도 웃어지질 않는다.
“사실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비혼, 비혼 그렇게 외치다가 결혼한다고 하려니 민망하기도 했고.”축하를 해줘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러한 생각은 무거운 추를 담고 발끝으로 떨어져 내린다.
생각과 의지는 기능을 상실한 것만 같았다.
“나 이렇게 계속 세워둘 거야? 축하 안 해줘?”……축하.
구언은 감당되지 않는 표정을 애써 정리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마음을 추스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축하해.”아니야. 사실은 축하하지 않아.
내가 너의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어.
“야, 너무 놀랐다. 니가 결혼을 한다니. 내가 정신을 놓고 축하도 안 했네.”구언은 뛰는 심장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하고 울컥한 마음이 전신을 저리게 했다.
뱉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
어쩌면 지금이 내 마음을 전할 마지막 시간은 아닌지 판단도 하지 못한 채ㅡ
“축하해. 희원아.”되돌릴 수 없는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사랑은 시간과 비례하는 법이 없다.
어느 한쪽의 완성만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없다.
원하고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멋진 일은, 곧잘 일어나지 않는다.
“희원아, 나 먼저 가볼게. 약속이 있어서.”“아, 응. 그래. 조심히 가. 오늘 수고했어.”그의 운수 좋은 날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혼인서약 中
결혼을 준비하며 으레 벌어지는 그 흔한 잡음 한번 없이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일찌감치 준비를 끝낸 희원은 예식이 시작하기 전 신부 대기실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희원아, 결혼 축하한다. 못 가서 미안해.]“……괜찮다니까 뭘 또 미안하기까지.”희원은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내렸다.
동료 구언은 해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결혼식에 불참했다.
못 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구언은 잊지 않고 연락을 주었다.
휴. 희원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희원아!”“아, 어서 와!”낯이 익은 하객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고, 모두는 그녀의 결혼을 축하했다.
“야, 너 진짜 결혼하는구나? 진짜네?”“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어?”“혼자 산다며! 비혼주의라며! 거 봐! 혼자는 못 살겠지?”“맞아. 너네 말이 맞았어. 결국 나도 결혼을 하네.”지인들은 자신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의 경험담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모든 말을 튕겨내던 희원이 덤덤하게 긍정하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희원아,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너도 지옥문을 열고 들어선 거니까.”“맞아. 남편이랑 싸우기는 또 얼마나 많이 싸우고? 혼자 살 때가 그립기도 하다니까?”희원의 앞에서 결혼 찬양을 외치던 지인들은, 이제 태도를 바꾸어 결혼 비하를 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잔소리, 저래도 잔소리인 지인들을 바라보다 희원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진짜 이쁘다. 희원아. 너무 예뻐.”“그러게. 권희원 아직 안 죽었다. 진짜 예쁘네.”“난 아직도 안 믿겨, 얘 결혼한다는 사실이.”“나도. 나도 아직 안 믿겨. 내가 청첩장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것 같던 권희원의 결혼 소식은 주변 지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일이 되어서야, 이렇듯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는 희원의 결혼이 실감 났다.
신랑이 잘생겼다. 검사래. 너무너무 훈남이다. 연예인 해도 되겠다.
시할아버지가 전직 대법관이셨대. 집안도 빵빵해. 결국 대어를 낚아서 결혼하는구나, 권희원.
“권희원 씨?”그때였다. 희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인들이 둥글게 모여 두런두런 나누던 지환의 이야기에 귀가 따갑던 때였다.
“……어?”세련된 슈트 정장. 이너로 입은 흰 티셔츠.
깔끔한 가죽 클러치를 들고 얼굴을 덮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채.
“서검 동기 차정윤이에요. 저, 기억하시죠?”정윤이 신부 대기실로 들어선다.
희원의 지인들은 정윤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예의주시한 눈빛을 했다.
남의 결혼식에. 그것도 이렇게 해가 쨍한 날에.
웬 선글라스?
“네. 기억해요. 안녕하세요.”“결혼 축하해요. 권희원 씨.”희원이 신랑 동기면, 검사? 얼굴 좀 봐. 키는 저렇게 큰데 어떻게 얼굴이 주먹만 하지?
선글라스를 껴도 예쁜 얼굴인데? 눈이 부었나? 왜 부었지?
혹시. 혹시!
“감사해요. 안 그래도 차정윤 씨에게는 따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네요.”희원이 신랑을 좋아하는 여자 아니야? 울어서 팅팅 부었나?!
헐, 세상에.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일이란 말이냐?
희원의 지인들은 멋대로 소설을 써 내려가며 정윤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을 모를 리 없는 정윤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선글라스를 내렸다.
“눈가에 보톡스를 맞았는데, 왜 그런지 요번엔 좀 부었어요.”“아…….” “선글라스, 껴도 되죠?”누구에게 질문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두가 답을 미룰 때 정윤은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보톡스를 맞았다 고백하는 이상한 여자를 바라보던 지인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희원과 정윤, 둘만 남았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선글라스 낀 눈매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할 수 없는 희원도 멀뚱멀뚱 정윤을 올려보았다.
“예쁘네요.”“감사합니다.”툭 던진 말에 툭 하고 대답했다.
또다시 적막이 찾아든다.
대체 왜 안 나가고 저러는 거지? 희원은 계속 정윤을 바라보았다.
정윤은 공간을 살피듯이 주변을 탐색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여긴 조명이 좀 덥지 않아요? 조명이 좀 뜨거워서 덥던데.”“괜찮아요.”“신부대기실이 2층에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하더라고요. 홀이랑 같은 층에 있으면 좋은데.”흠. 정윤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는 씽긋 웃었다.
“친구분, 신부님이랑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때마침 사진 촬영을 해주겠다고 한다.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보시다시피 상황이 이래서.”정윤은 단칼에 거절하며 선글라스를 툭툭 쳤다.
“그리고 제가 신부 측 친구는 아니라서요.”“아…… 네. 알겠습니다.”가보겠다며 정윤은 희원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마주칠 때마다 유쾌한 만남은 아니다.
“예식이 끝나면 사진 촬영까지 하고 싶지만 눈가의 사정이 이래서. 아쉽지만 축하만 하고 돌아갈게요.”“네. 그러세요. 눈가의 사정이 그러시니 아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정윤은 희원이 귀엽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러더니 클러치를 열어 의외의 것을 꺼내 건넸다.
“혹시 많이 떨리면 먹어요. 도움이 되긴 하더라고요.”청심환이다.
희원은 가만히 정윤의 손끝을 내려다보다가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니 공복에 숨이 버겁던 때였다.
“감사합니다. 필요했는데, 잘 받을게요.”“그래요.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요. 서검과 잘 살길 바랄게요.”정윤은 흔한 축하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의 진짜 예식이 시작되었다.
[이제 신랑 서지환과 신부 권희원 양은 그 일가친척과 친지를 모신 자리에서 일생 동안 고탁을 같이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ㅡ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성혼선언문 中
어딜 가나 비슷한 맥락의 식이 이어지는 동안 희원은 멍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환이 서 있다.
갑자기 그의 옆모습이 무척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누구이기에 내 옆에 서 있는 건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철저한 계획 아래 위장 결혼을 시작하지만 제대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밀려들었다.
내가 정말로 집을 떠나서 잘 살 수 있을까?
엄마 아빠 할아버지가 없는 공간에서 홀로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나 진짜로 결혼하나? 결혼을 하는 게 맞나?
“신랑 신부는 이제 하객들을 향해 인사하겠습니다!”끊임없는 혼란 속에 결혼식이 끝나간다.
희원은 삐걱거리는 걸음과 굳은 얼굴로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앞으로 잘 살겠다는 의미를 담아 신랑 신부 인사ㅡ!”사회자가 하라니 하라는 대로 허리를 수그리며 하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커다란 박수가 쏟아진다.
어지러운 조명과 박수갈채, 숨이 막힐 만큼 긴장한 희원은 어지러움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잡아요.”지환은 낮게 중얼거렸다.
“나 옆에 있어요.”말끝에 손을 끌어다가 붙잡는 지환의 행동에 희원은 숨을 가득 삼켰다.
놀랍게도 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진정된다.
그래. 옆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나의 전우, 동업자, 동등한 인간 대 인간.
남편과 아내의 가면을 쓰고 평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어떠한 의미로는 삶의 동반자.
……그래.
나는 이 사람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마지막 행진을 하기 전에 끝으로 신랑 신부의 입맞춤이 있겠습니다ㅡ!”지환은 딱딱하게 굳은 희원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비주얼에 여기저기 탄식이 터진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눈으로 말하는 지환의 뜻을 알아챈 희원은 조용히 시선을 맞췄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입맞춤.
지환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로 얼굴을 내렸고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큰 환호성과 함께 폭죽이 터졌다.
희원은 부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