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내 주변 모든 길이 너야 (16/98)

16. 내 주변 모든 길이 너야

햇살이 쏟아진다. 

완벽하게 차단하지 않은 창가의 커튼 사이로 아침이 찾아온다. 

솜이 빵빵한 이불을 한껏 몸에 휘감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희원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아침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겠고.

한껏 늦잠을 자도 깨우러 올 사람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겠다. 

아침 일곱 시면 조식을 드시던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눈을 떠야 했던 고충은 사라졌다. 

“흐응…… 좋다…….”보드라운 이불을 한껏 끌어올리며 희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 연습이 없는 오늘, 원 없이 늦잠을 자보리라. 

희원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진즉 깨어 있었던 까닭에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아, 더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오네.”아무리 늦잠을 자보려고 해도 눈꺼풀이 견디질 못하고 위로 올라간다. 

부모님과 살 때는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그렇게 잠이 쏟아지더니.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잠이 오질 않는다. 

희한한 일이다. 

“아아, 물이나 좀 먼저 마실까.”으자자자자…… 희원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 슬리퍼를 신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슬리퍼는 감촉이 좋아 신고 걸으면 기분도 따라 좋아졌다. 

이 집 안의 모든 것ㅡ

공간을 가득 채운 가구부터 이런 사소한 슬리퍼까지, 그녀의 절대적인 취향으로 꾸며졌다. 

예의상 걸어놓은 결혼사진만 뺀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

모든 것은 그녀의 뜻대로.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선식을 좀 사야겠다. 없으니까 허전하네.”기지개를 켜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주방으로 들어선 희원은 정수기에 컵을 내리고 찬물을 가득 받았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며 거실을 바라보니 테이블 위엔 미처 치우지 못한 와인 병과 와인 잔, 그리고 치즈 그릇이 그대로 있다. 

“하, 시원해.”물컵을 내린 희원은 슬리퍼를 끌며 거실로 나왔다. 

들고 있던 휴대폰 단축번호를 꾹 누르자 엄마에게 연결이 된다. 

스피커 모드로 해놓은 희원은 텅 빈 와인병을 치우려고 들었다. 

ㅡ여보세요, 희원이니?“응. 엄마. 굿 모닝.”ㅡ이제 일어났어? 목소리가 잠겼는데?“와, 우리 엄마 귀신이네. 지금 일어났어. 더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ㅡ지금이 몇 신데 잠을 자, 이것아. 일어나서 청소도 좀 하고 환기도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밥은 먹었어? 엄마는 의식의 흐름에 입각하여 질문을 던진다. 

아직요. 희원은 먹다 남은 치즈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ㅡ서 서방은 출근했고? 별일 없지?“별일은 무슨. 지환 씨는 출근했지.”희원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출근을 했어도 진즉 했을 시간.

뭐, 출근했겠죠. 나는 알 수 없지만. 

ㅡ어때. 신혼은 재밌어? 하기야, 소꿉놀이하고 있겠지 뭐. 서 서방이 잘해줘? 안 싸워?“응. 재밌어. 잘해줘.”지환은 검찰청 앞, 원래 살던 오피스텔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지금 신혼집은 희원이 들어와 혼자 살기로 원활한 협의를 마쳤다. 

그와는 간간이 메시지나 주고받을 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ㅡ얼마나 잘해주는데. 응? 말해봐. 서 서방이 엄마보다 잘해줘?“에이, 그게 말이 되나. 엄마보다 잘해주는 남자가 어디 있어.”그는 약속한 대로 무한한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그녀는 홀로 만끽하는 자유로움에 취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ㅡ어제는 일찍 잤어? “음. 영화 보다가, 그냥 그냥 잠들었어.”물론 혼자였지만. 영화를 본 건 사실이니까. 

어제는 새벽까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홀로 와인을 마시며 4인용 소파를 점령했다. 

대체 그 사소한 일이 뭐라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더라. 

ㅡ바빠도 밥은 좀 해 먹어. 음식도 해봐야 느는 거야. 이렇게 갑자기 갈 줄 알았으면 엄마가 좀 가르치는 건데.“됐어. 요즘 인터넷에 요리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요. 해서 먹을게요.”ㅡ그러지 말고 엄마가 반찬 좀 가져다줄까? 서 서방 불편하면 엄마가 낮에 잠깐 가서 몰래…….종량제 봉투를 들고 일어서던 희원은 엄마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아냐! 아냐 엄마! 내가 그냥 알아서 해 먹을게!”ㅡ……알았어. 엄마 가는 거 불편한가 보네. 그렇게 재밌어? 엄마 안 보고 싶을 만큼?“엄마 보고 싶지. 왜 안 보고 싶겠어.”음. 희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스피커를 끄고 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다른 일과 병행하며 통화는 자신과는 달리.

엄마는 지금 휴대폰에 매달린 채 딸아이의 음성만 기다리고 계시리라.

“엄마. 그러지 말고 내가 오늘 저녁에 갈게. 나 밥해줘.”ㅡ그래? 올 거야? 오늘? 뭐 먹고 싶어. 말만 해.간다니까 엄마의 목소리가 금세 변한다. 

자유를 얻어 행복한 딸과는 달리 엄마의 삶은 회색으로 변한 것 같아, 희원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ㅡ그럼 서 서방이랑 시간 맞춰서 같이 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지환 씨? 지환 씨는 오늘…… 저기, 나 그냥 혼자 가면 안 돼요?”꼭 같이 가야 하나? 딸이 엄마 보러 집에 간다는데?

굳이 지환에게 불편한 부탁을 하고 싶지 않은 희원이 혼자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안 된다며 아우성이다. 

ㅡ둘이 올 거 아니면 오지 마. 너 벌써부터 혼자 친정 다니는 거 보기 안 좋아.“어머, 엄마는 무슨 그런 말을 해? 지환 씨 바쁘면 혼자 갈 수도 있는 거지. 내 집도 마음대로 못 가?”ㅡ여기가 왜 네 집이야. 네 집은 지금 네가 있는 곳이지.헐. 희원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는 절대로 올 생각하지 말라니, 엄마와 대강 전화를 종료하고 끊었다. 

“아, 서지환 씨한테 이런 부탁하기 좀 민망한데.”서로는 양가의 최소한의 도리를 다 하기로 약속했다. 

최소한의 도리. 

“에이, 그냥 다음에 가야겠다. 다음에 근처 볼일 있어서 왔다가 잠깐 들렀다고 하면서 집에 가야지.”희원은 지환에게 부탁하기가 껄끄러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여보세요?”ㅡ어라? 전화 바로 받네요?지환의 전화다. 

생각만 하면 전화가 오니, 이 정도면 전생에 양반은 못 되는 정도가 아니라 망나니 수준이다. 

“엄마랑 통화했거든요. 출근했죠?”ㅡ그럼요. 지금 몇 시인데. 실로 오랜만의 통화다. 

희원은 갑작스러운 지환의 전화에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통화를 하며 움직인 것 때문일까, 심장이 조금은 두근두근했다. 

ㅡ장모님은 잘 계십니까?“뭐, 대외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제가 집에 없으니까 빈자리가 크긴 할 거예요.”ㅡ아아, 그렇겠네요. 권희원 씨, 잠깐만.“네네.”지환이 통화 도중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희원은 잠자코 그의 대화가 끊기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걸려온 그의 전화, 그의 목소리는 익숙하다 말하기엔 조금 낯선 감이 있어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ㅡ권희원 씨, 오늘 저녁에 뭐 합니까?“오늘 저녁이요? 글쎄요. 연습은 그리 늦게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ㅡ그럼 오늘 저녁에 장모님 뵈러 가죠. 장인어른도 뵙고, 어르신도 뵙고.“엇, 진짜요? 정말?”……어쩐지 그와는 통하는 것이 많다. 

하필이면 오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어떻게 알고.

함께 가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 어려워 엄마 얼굴도 보러 가지 못하는 씁쓸함을, 또 어떻게 알아내고.

“뭐 먹고 싶어요? 말만 해요. 우리 엄마 요리 진짜 잘하거든요.”공연히 신이 난 희원의 음성이 높아진다. 

소파 위에 펄쩍 뛰어 올라가 팔랑팔랑 점프를 뛰었다. 

집에 가자는 말이, 이렇게 감사하게 들릴 줄이야. 

ㅡ가리는 거 없습니다. 평소 드시던 대로 차려주시면 감사하죠.“알겠어요. 그럼 내가 몇 시까지 사무실 앞으로 갈까요? 만나서 가야 하잖아요.”ㅡ내가 갈게요. 권희원 씨가 있는 곳으로.“아…….”내가 갈게요. 

권희원 씨가 있는 곳으로. 

“그럼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ㅡ그래요. 오랜만에 보겠네요. 이따가 봐요.단출한 전화통화는 끝이 났다. 

희원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엄지손톱을 물었다. 

“뭐지 지금 이 기분? 심장에 해로운데?”두근두근 뛰어오르는 심장. 

희원은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더욱더 열성적으로 소파 위를 방방 뛰었다. 

그래. 소파 위를 뛰어다녀서 덩달아 심장도 뛰는 거다. 

다른 이유는 없는 거다. 

“으아아 엄마한테 당장 전화해야지, 엄마. 우리 엄마아아아!”단순하게 생각을 마친 희원은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희원은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켜며 리듬에 맞춰 빙글빙글 춤을 췄다. 

커다란 음악. 자유로운 몸짓. 

“여보세요? 엄마! 엄마 나 희원이!”이 결혼, 

아무리 생각해봐도 완벽하다. 

“검사님, 오늘 처갓집 가십니까?”“네. 결혼하고 처음 방문합니다. 너무 내외했지 뭡니까.”“하하, 처음 가시는군요. 친정 방문할 생각에 사모님께서 무척 좋아하시겠습니다.”……사모님.

최 계장의 단어 선택에 지환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슬쩍 자신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결혼반지를 응시했다. 

“처가에 처음 방문하시는 거니 두 손 무겁게 해서 방문하셔야죠. 봉투 두둑하게 준비하시고.”“그래야겠죠.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야겠습니다.”지환은 바라보고 있던 반지를 둥글게 돌리며 생각했다. 

나는, 결혼을 했다. 

이렇듯 주입식 암기가 아니면 상기하기 힘들었다. 

결혼식 이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 것이다. 

결혼 전과 조금도 변한 것 없는 생활. 

아아. 물론 맞선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강력한 장점이 생기긴 했지만.

“사모님께서는 잘 지내시죠?”“그럼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그녀는 잘 지내고 있으리라. 

허락된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며.

“사모님께서 공연 준비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아…… 네.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지환은 훅, 치고 들어오는 최 계장의 질문에 서둘러 서류더미를 끌어당겼다. 

“얼마 전에 사모님 인터뷰하셨던데요. 제가 사모님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팬이 되었지요.”“아…… 그러시구나. 하하하, 하하.”끌어온 서류더미를 펄럭거리며 지환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희원이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니, 최 계장과의 대화가 자연스러울 리 없다. 

항시 긴장하지 않으면 위기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계장님, 공두철 송환 일자는 나왔습니까?”하여 급격하게 화제 전화를 시도했다. 

사생활 이야기가 불리할 땐 업무 이야기가 최고다. 

“예. 홍콩에서 이번 주 안으로 송환하겠다고 합니다. 오전에 대사관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네. 알겠습니다.”지환은 금괴 밀수 수사를 피해 해외 도피를 선택한 공두철이 현지에서 체포되었음을 확인했다. 

공두철은 모집한 금괴 운반책을 통해 방대한 양의 금괴를 밀수하는 사회악이었다. 

홍콩에서 밀수한 금괴는 한국을 거친 뒤 일본으로 넘겨졌고, 그사이 엄청난 차액이 발생했다. 

피해 예상금액만 5조가 넘어서는 지금. 

공두철은 예측하기로는 금괴 밀수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다. 

“매번 운반책만 잡아들이다가 이번엔 실세를 잡았으니까, 뭐가 좀 나올 것 같은데요.”“조사해봐야겠죠. 우리가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있는 건지 귀를 만지고 있는 건지, 이젠 알아야 하니까요.”“그러게 말입니다. 싹 다 잡아들일 수 있다면 좋은데. 매번 가지만 치고 있으니 뿌리는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금괴 밀수 조직은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치밀하고 은밀하게 몸집을 불린 조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괴를 유통했다. 

세금을 부과하지 않은 홍콩발 금괴를 일본으로 밀수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한 한국을 경유했다. 

운반책들을 잡아들여봐야 그 위로 포진된 자들의 신상정보를 알 수 없는 일. 

인천국제공항 개항 이후 최대 규모의 금괴를 들여오던 밀수범이 검거되며, 수사 당국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계장님, 이번에야말로 뿌리를 뽑아봅시다. 전 피라미드 최상단에 누가 있는지, 정말 궁금하거든요.”“예. 검사님. 이번엔 검사님께서 좋아하시는 소탕작전이 성공하기를 제가 열심히 바라겠습니다. 양 차장님께 예쁨 좀 받으셔야죠.”상명하복이 매서운 보수적인 검사 집단. 양병목 차장 검사는 죽어라 말을 듣지 않는 지환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양 차장은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지환을 점찍었으나, 정작 지환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 

“힘내십시오. 검사님.”최 계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치자 지환은 따라 파이팅을 했다. 

“계장님. 물론 차장님께 예쁨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오늘 저녁 처갓집에서 예쁨 받고 오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로 응원해주십시오.”“예예. 그것도 같이 응원하겠습니다. 힘내십시오.”두 사람은 결연한 파이팅을 했다. 

매사 쉬운 일이 없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마치고, 처갓집에 가져갈 선물을 준비한 지환은 그녀 연습실 앞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1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어디 보자…….”연습실 안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그녀가 나오기로 했으니 기다려보기로 한다. 

지환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점검했다. 

오랜만에 희원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긴장감이 웃돌았다. 

면도가 잘 된 건지, 머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하게 자가 검열을 마친 지환은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권희원 씨.”흠, 너무 상투적이다. 

“부인. 오랜만입니다.”인사가 아까랑 뭐가 달라! 상투적이잖아!

“왔어? 갈까?”……에효, 됐다. 

그녀에게 건넬 첫인사를 중얼중얼 연습하던 지환은 관두기로 한다.

어차피 연습한다고 연습한 대로 될 리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누구도 우리가 오랜만에 재회한 것이라 여기지 못할, 자연스러운 인사로 맞이하면 된다. 

그녀는 내 부인이니까. 

“왔다고 연락을 할까.”지환은 희원에게 도착했다고 연락을 할까, 휴대폰을 들었다. 

구아아앙ㅡ 씩씩한 소리를 내며 휘황찬란한 외제차가 연습실 앞에 도착한다. 

억, 소리가 우습게 나는 외제차는 무척 부드러운 핸들링으로 주차에 나섰다. 

지환은 휴대폰을 들며 뜻 없는 눈길로 앞을 바라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고,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차체가 낮은 외제차에서 내리는 한 남성. 

“……뭐야.”저기 저, 저기 저, 저기 저놈!

유구무언이다. 

지환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팽개치며 전방을 주시했다. 

연습실 앞에 도착한 유구무언은 어쩐지 들어가질 못하고 한참이나 연습실을 바라만 보고 있다.

또 너냐? 또 너야?!

매번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유구무언이 어쩐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정도 마주침이면 유구무언하고 나하고 인연인 거, 아닌가.”그날, 그 호텔엔ㅡ

분명 그가 있었다. 

한국에 없다고 희원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이 정도 알리바이면 유구무언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랍쇼, 들어가네.”한참 망설이는 듯하더니 긴 한숨을 내쉬고는, 유구무언이 연습실로 향한다. 

걸음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지환은 핸들만 붙잡은 채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주저주저하며 연습실로 들어가는 유구무언의 뒷모습, 연습실로 들어가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보이던 유구무언의 긴 한숨.

기분은 묘하게 불쾌했다. 

유구무언에게 용기가 필요한 이유ㅡ

그녀 때문인 것 같았다. 

“도착했을까? 이제 올 때가 됐는데.”지환의 시간에 맞춰 연습을 끝낸 희원은 집에 갈 차비를 마쳤다. 

오랜만에 집에 가기 때문인지, 혹은 오랜만에 그를 보아서인지. 

아침부터 연습을 마칠 때까지 시종일관 그녀는 웃고 있었다. 

통유리 앞에서 멈춰 서서 희원은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보톡스를 맞았는데, 왜 그런지 요번엔 좀 부었어요.’문득 결혼식 당일 커다란 선글라스를 장착한 채 나타났던 정윤의 말이 떠오른다. 

가만히 정윤을 떠올리던 희원은 자신의 눈가를 꼼꼼하게 살폈다. 

“보톡스 같은 거 맞으면 진짜 효과가 있나? 나도 상담 한번 받아볼까?”정윤은 같은 여자가 보아도 무척 세련됐다. 

자신을 꾸미는 일에 탁월했고, 무엇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오른 정윤의 도도함이 괜스레 멋져 보이던.

“보톡스 안 아픈가? 나도 이제 슬슬 관리해야 하는 거 아냐?”“안 해도 예쁘다. 하긴 뭘 해.”“……유구언!”혼잣말을 누군가가 듣고 답을 하니 희원은 홱 고개를 돌려 등장인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 눈은 커다랗게 변했다. 

구언은 문턱에 비스듬히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뭐야! 언제 왔어! 야, 연락도 없고 너!”그녀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대체 뭐 하다가 이제 연락한 거야! 전화도 안 받고!”하긴. 

그 짧은 시간 안에 너의 무엇이 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지. 

그래도 난 조금은 네가 변해 있기를, 바랐는데. 

“나, 찾았어?”“그럼! 찾았지! 연습 때문에 내가 너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연습.

희원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연습’이라는 단어에 구언은 피식 웃었다. 

도저히, 도저히 그녀를 만날 용기가 생기질 않아 몇 날 며칠 허송세월을 보냈다. 

연습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은 일이고 마음은 마음이라고 아무리 다그쳐봐도.

잘 안 되더라. 

그녀를 만나는 일이, 두렵더라. 

“미안해. 집에 일이 좀 있었어.”“그럼 계속 해외에 있던 건 아니었어? 하긴, 로밍이 안 돼 있더라.”“미안해. 개인 사정이라 말하기가 좀 곤란하다.”대충 집안일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얼버무리자 그녀가 둥근 눈망울로 올려본다. 

그 눈빛에 심장이 발악하듯 날뛰어 오르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돌아왔으면 됐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돼.”“그래. 고마워.”희원아,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해 미치겠다.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천 번 만 번 그르쳐도 뭐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여전히 나는,

네가 좋다. 

“못 본 사이 더 예뻐졌네. 신혼 좋은가 봐.”구언이 씽긋 웃으며 말하자 희원은 돌아섰다. 신혼 이야기를 듣자 지환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 우리 일단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나 지금 나가봐야 하…….”“밥, 먹을래?”희원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가방을 챙겨주는 구언은 어딘가 모르게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자상함이지만 조금 더 강한 힘이 담긴?

희원이 멈춰 서 가만히 바라보자 구언은 그녀 가방을 들고 입술을 열었다. 

“밥, 먹자.”“구언아, 저기, 내가 오늘…….”“설마 결혼했다고 나랑 밥도 안 먹어주는 건 아니지?”“…….”“우리, 친한 동료잖아.”구언의 눈빛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건, 느낌 탓일까. 

희원은 선약이 있다, 집에 가봐야 한다는 대꾸를 하지 못한 채 길게 그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녀석은 수척해진 것도 같고, 야윈 것도 같았다. 

대체 집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마른 눈빛을 가진 사내가 되었나 싶어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시려오는 것 같았다. 

누구도 함부로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바라보고만 있을 때ㅡ

“그 밥, 저하고 함께 드시죠.”이젠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구언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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