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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계산 속 너의 안전 (17/98)

17. 계산 속 너의 안전

돌아본 수고가 무색하게, 틈을 주지 않고 저벅저벅 연습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지환은 구언의 손에 들린 희원의 가방을 가져갔다. 

이윽고 가볍게 그녀 허리를 끌며 가깝게 섰다. 

지환과 구언은 인사를 생략했다. 

합의하에 생략했다기 보다 그저, 아무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 식사 함께하시죠. 이래저래 제 아내가 유구언 씨에게 신세 진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신세는요, 무슨. 제가 오히려 원이에게 신세를 많이 졌죠.”“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정식으로.”……아내.

지환이 선택한 단어에 희원은 움찔했다. 

어딘가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듯, 지금 이 순간은 극 중 한 장면처럼 여겨졌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고. 

“오늘이라도 당장 대접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안 되겠네요. 제가 아내와 저녁에 볼일이 있어서.”……아내.

지환이 거듭 강조하는 단어에 구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지환의 말투는 자상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그녀와 단둘의 식사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동료라는 구색 좋은 표현으로 네 이기적인 마음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말라는 것처럼.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 결혼식에 오셨으면 했는데, 해외 스케줄이 있다 하셔서 아쉬웠습니다.”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내를 꿰뚫어 보는 지환의 눈빛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

그녀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남편과 대치를 하고 있자니 순간 웃음이 났다. 

그녀를 누가 먼저 알고 지냈느냐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녀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마주했느냐는 사실은 필요도 없이. 

“서지환 씨, 언제 왔어요?”“조금 전에 왔어요. 아아, 내가 좀 늦었나?”“아뇨, 그럴 리가요. 저도 이제 막 끝났거든요.”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눈앞의 사내는, 그녀의 남자가 되었다. 

그녀와의 밥 한 끼가 아무렇지 않을.

나누는 대화, 이끄는 손길이 자연스럽기만 한.

내겐 그토록 어렵던 그녀와의 모든 일들이, 사소한 일상이 되어 자리했을.

“구언아, 먼저 가볼게. 나 오늘 부모님 집에 가기로 했거든.”“아아, 그래. 어서 가. 부모님께 안부 전해드려.”……지금, 이 순간,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인 거지.

구언은 애써 뜨거워오는 마음을 감추며 웃었다. 

질투에 엉망이 된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런 마음도, 이제는 아무 소용없는 거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네. 조심히 가세요.”지환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가 드는 행동으로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그녀 허리를 다정하게 휘감은 채, 그녀의 가방을 들고.

두 사람이 다정한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연습실 문을 열고 사라지니, 잠시 후엔 견디기 힘든 적막이 구언의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휴…….”구언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사심을 버리고 공연 준비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내 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미 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갈피를 잃어버린 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버려야 하는 걸까. 

종이접기 하듯 네게 가 있는 내 마음이 반듯하게 접혔으면 좋겠다. 

깔끔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면 구겨서 버릴 수라도 있는, 그런 일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다가올 내일은 벌써부터 두려웠다. 

희원을 차에 태운 지환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휴. 시동을 켜며 안전벨트를 맨 지환은 잠시 핸들을 붙잡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유구무언의 얼굴은 무척 상해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보아도 육안으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구언이랑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집에 일이 좀 있었대요.”“집에, 말입니까?”“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주려 해서 그냥 묻지 않았어요.”……무슨 일인지 차마 말할 수 없었겠지. 

지환은 염려가 잔뜩 묻은 희원의 말을 곱씹다가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구언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음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그녀에게 구언이란 특별한 동료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권희원 씨.”“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서지환 씨.”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정말로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

그가 고백한 적은 정말로 없던 걸까? 

고백한 적이 없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티가 나는 그의 마음을, 그녀는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걸까?

“왜요? 왜 그렇게 봐요?”그녀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동료, 그 이상의 관계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까. 

그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마음이 없던 걸까.

이봐요, 권희원 씨.

“어어? 왜 그렇게 봐요. 나 진짜로 얼굴에 뭐 묻었어요?”“……그냥요. 그냥.”그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쁜 것 같아서.”“헐. 진짜 가지가지 하시네요.”지환이 낯간지러운 말로 얼버무리니 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눈 한번 깜빡 안 하고 저런 말을 하지? 그 성격 고쳐볼 생각은 없어요?”“우린 진짜 부부 되긴 글렀네요. 예쁘다고 하면 좋아해야지, 화부터 내기는.”“낮술 했어요? 운전대 잡은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낮술. 지환은 희원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머릿속에 내내 맴돌던 생각과 구언의 얼굴을 지워내기로 하며, 지환은 희원과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가볍게. 가볍게 생각하자. 

구언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이 구언에게 없으니 이루어지지 않은 거다. 

또한 구언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이 구언에게 있다면 축하해줘야 하는 거다.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야 할 일이니까. 

우리가 시작한 결혼의 취지란 그런 거니까. 

“뒤에 저건 다 뭐예요? 뭐가 저렇게 많아요?”“처음으로 권희원 씨의 집으로 가는데 빈손으로 가기가 뭐 해서, 이것저것 사 봤습니다.”“어우, 저렇게나 많이? 저게 다 우리 집으로 가는 거라고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그건 그렇고, 권희원 씨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것부터 얘기 좀 해봐요.”그래. 모든 것은 운명.

내가 깊게 생각할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거다. 

“아이고, 서 서방! 어서 오게, 서 서방!”“엄마, 나는 안 보여? 나 여기 있는데?”“비켜봐. 아유, 우리 서 서방, 잘 지냈지? 별일은 없고?”“네. 장모님도 잘 지내셨죠?”쳇. 희원은 제게 없는 엄마의 눈길에 입술을 불뚝 내밀었다. 

정작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엄한 사람만 붙잡고 반가워한다. 

“날 보고 싶었던 사람 맞아? 서운하네?”“얘는, 무슨 소리. 서 서방 안부가 니 안부지.”엄마는 평소엔 볼 수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뭘 이렇게 잔뜩 사 왔냐, 이게 다 뭐냐. 그냥 편안하게 오지 뭘 이렇게 많이 사 왔냐.

“이건 뭐야? 꽃이네?”“이건 장모님 겁니다. 희원 씨가 장모님께서 꽃을 좋아하신다고 해서요.”세상에, 바쁜 사람이 언제 또 이런걸 사 왔냐. 이런 거 안 줘도 된다. 다음부터는 그냥 가볍게 찾아와라. 아이고, 고맙다. 고마워.

“살다가 꽃을 다 받아보고…… 세상에…… 아이고 곱다…….”엄마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향이 좋은 듯 소녀처럼 웃으신다. 

내가 언제 엄마가 꽃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희원이 눈으로 묻자 지환은 아무 말 말라는 듯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떴다. 

좋아하실 거라 생각한 것뿐이다.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은 몰랐고. 

“언제까지 현관에 세워둘 거야? 들여보내질 않고.”“아빠!”마치 기다린 적 없다는 표정으로 아빠가 등장한다. 

희원은 제 편을 만났다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왔는가? 들어오게.”“예. 장인어른. 들어가겠습니다.”지환은 어색한 걸음으로 그녀의 집에 입성했다. 

“희원이는 할아버지 안에 계시니까, 서 서방 데리고 바로 들어가서 인사부터 드려라.”“네. 인사드리고 나올게요.”사위의 자격으로 들어선, 처갓집의 풍경이 비로소 펼쳐진다.

여간해선 긴장하는 법이 없는 지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긴장되었다. 

“그래서, 공두철 송환 일자는 언제입니까?”“이번 주입니다. 수사망이 좁혀오니 공두철이 지레 겁을 먹고 통신수단을 모두 없애서,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었습니다.”“그럼 현재 공두철과 연락이 닿을 방법은 없겠군요.”“홍콩 대사관 측에 긴밀하게 연을 넣기는 해봤습니다만, 대통령께서 직접 공론을 하신 상황이라 다들 몸을 사리는 터에 쉽지 않습니다.”“일처리가 생각보다 깔끔하지 않습니다, 윤명국 지검장님.” “……송구합니다. 백 의원님.”서울의 중심부를 약간 벗어난 외곽. 간판 없는 일식집이 있다. 

외관상 무엇도 예측하기 힘든 건물 안엔 VIP들을 모시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릇의 무늬가 비칠 정도로 얇게 뜬 복어 회를 한 점 올리며, 백인호 의원은 고개를 들었다. 

마주 앉은 사람은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지검장을 역임하고 있는 윤명국.

백인호 의원은 국회의원 재선에 성공한 정치인으로, 폭넓은 연령층의 지지를 받아 차기 서울 시장으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룬 것들이 방대해 능력, 재력을 과시하는.

게다가 스마트한 언변과 외모까지 갖춘. 

“지검장님, 공두철은 조직의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조직 자금의 흐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중간 유통단계를 책임지고 있었으니, 아마 그 지점까지는 박살 나지 않을까…….”“박살이 난다.”백인호 의원이 말꼬리를 붙잡고 새기듯 중얼거리자 윤명국 지검장은 고개를 수그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얽혀, 대규모 금괴 밀수의 최상단에 포진해 있었다. 

지환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인물은 생각보다 검찰청 안에 있었고, 흔히 아는 인물이었다. 

“의원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지검장님. 조금 전에 중간 유통이 박살 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얼마의 자금이 수장되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백인호 의원은 총명한 두뇌와 남다른 입담으로 정치 입문부터 탄탄대로를 달렸다. 

마치 영웅의 탄생 같은 히스토리를 언론에 주입했고,  

따라서 폭발적인 지지 세력을 등에 업은 채 여당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백 의원이 공중분해 되어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금괴 자금을 운운하자 윤명국 지검장은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의원님. 공두철이 중앙지검으로 송환되는 만큼 출혈을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무릇 정치판이란 돈과 권력의 시장.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정치자금만으로는 거대한 정치 조직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다. 

백 의원에게는 검은 돈이 필요했다. 

출처 없이 흘러와, 출처 없이 흘러갈 수 있는.

“그럼요. 믿습니다. 제가 윤 지검장님을 믿지 않으면, 또 누굴 믿겠습니까?”“예.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최소한의 출혈로 사태를 막아보겠습니다.”윤명국 지검장에게는 백인호 의원의 힘이 필요했다. 

막대한 자금으로 형성된 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저 멀리 있는 곳까지 날아올라야 했다. 

이것이 서로 상생하는 이유였다. 

“지검장님, 담당 검사는 누구입니까?”“서지환이라고, 양병목 차장이 아끼는 검사입니다.”“지검장님께서 적당한 때에 자리 한번 마련해주십시오. 사건이 길어지면 매듭이 필요하긴 할 겁니다.”“예. 알겠습니다. 의원님.”검은 잔, 검은 눈빛이 부딪쳤다. 

밤이 깊었다. 

고즈넉한 한옥이 줄지어 있는 동네는 개화기 어드메에서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그녀의 집은 청푸른 기와가 훌륭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역사가 느껴지는 하나의 건축 작품이었다. 

응접실과 이어진 바깥의 자그마한 뜰은 온갖 것의 풀냄새 진동을 하는 멋이 있는 공간으로,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희원은 뜰로 나가 기르는 강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간이로 마련된 평상에 느런히 앉아, 권 선생은 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손녀를 응시했다. 

다소 쌀쌀했지만 그러한 바람이 더욱 가슴 속을 시원하게 했다. 

“자네, 낚시를 해본 적이 있는가?”“어릴 때 몇 번 아버지를 따라 다녀봤습니다. 이후엔 없습니다.”“그렇구만.”권 선생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TV에선 낚시 전문 프로그램이 방영하고 있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귀로 듣고 있던 권 선생은 지환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저 예뻐하는 것은 잘 아니, 저 똥강아지가 희원이 없어지고 몇 날 며칠 사료를 안 먹더라고.”“허전했나 봅니다.”“그랬던 게지. 사람이나 짐승이나, 빈자리는 여실히 아는 거니까.”꽤 오래 키운 듯 보이는 강아지가 그녀를 곧잘 따르니, 그녀가 결혼을 하기 전 강아지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녀딸과 강아지가 뜰에서 함께 있는 광경.

이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보니 권 선생의 눈길이 길어진다. 

지환은 그녀 할아버지 곁에 앉아 마찬가지로 희원을 바라보았다. 

때 묻지 않은 그녀 미소가 어쩐지 살갑게 여겨졌다. 

“저 TV 소리 좀 더 켜보게. 요즘 잘 안 들려.” “예. 어르신.”지환은 리모컨을 찾아 TV 볼륨을 높였다. 

중계를 하듯 낚시꾼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는, 낚시 관찰 프로그램이다. 

권 선생은 듣고만 있다. 

“어르신, 낚시를 좋아하십니까?”“젊을 땐 취미가 없었지. 세간에 낚을 것이 얼마나 많은데 고기를 잡고 있었겠나? 늙으니 혼자 다니기엔 그만 한 일이 없어서 낚시에 취미를 좀 붙여보았지.”언제 한번 같이 가세. 권 선생은 지환에게 낚시를 함께 가자 말을 했다. 

거절의 이유가 없는 지환은 꼭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서 선생은 오늘도 슈퍼에 있나?”“예.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열고 계십니다.”“대단한 양반이야. 그 높은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영명에 신경 쓰지 않으니, 사람 참 근직한 면이 있어.”지환의 할아버지, 서 선생은 대직에서 물러서자마자 자그마한 슈퍼를 열었다. 

오며 가며 골치 아픈 주민들의 법률상담을 무료로 해주기도 하고, 흥정을 하면 흥정을 하는 대로 슈퍼의 물건값을 치르게 해주었다.

“막역하게 지내며 오래 봤지만 자네 할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일세. 그러니 자네에게도 신용이 생겼지.”지환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를 우리 손녀에게 소개해주었다가 잘못되면 나하고 서 선생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봐, 제일 미루고 미루던 선 자리였네.”어어, 어어어어. 권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며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 낚시꾼이 드리운 낚싯대가 찔끔 움직인다. 

권 선생은 마치 자신이 고기를 낚는 것처럼 손을 움찔움찔했다. 

손녀는 강아지와 뜰을 노닐고, 부모님은 대과를 즐기시며, 조부께선 낚시 채널을 즐겨 보신다. 

안채와 뜰이 연결되어 각자의 숨을 보전하는, 평화로운 집안의 풍경이다. 

“낚시의 묘미를 아나?”중요한 장면이 지나갔는지 권 선생은 다시 뜰로 시선을 돌렸다. 

지환은 어르신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아직은 어리게만 여겨지는, 사랑하는 손녀의 배우자. 

권 선생은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내리며 미소 지었다. 

“불확실한 것을 붙잡고 싶어서 가장 확실한 미끼를 끼워 던지지. 미끼만이 낚시를 가능하게 하니까.”“아…… 예.”“결혼도 마찬가질세. 불확실한 미래의 안락을 위해 확실한 오늘을 결혼으로 묶어두는 거지. 함께하는 것만이 안락을 가능하게 하니까.”시선은 잔잔했다. 

“본디 인간이란 혼자라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거든. 무엇이건 확실한 것만이 시간에 커지는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본능으로 아는 것이오.” “…….”“그래서 남녀가 만나고, 정을 쌓고, 한 몸처럼 닥치는 세월을 견디는 거요. 먼 미래의 불안함을 잠식하려고.”불안함. 

“혼자는 절대로 불안함에 대한 면역이 생기지 않는 법이거든.”그녀와 그는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태초의 불안함. 

“어떠한가? 듣고 보니 인생이 낚시와 닮지 않았는가?”“무슨 말씀이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우리 애가 철이 없어. 생각이 깊지만 넓지 않고, 쾌활해서 담는 것이 없지만 그래서 비우는 법도 잘 모르고.”실금 같은 바람이 불어든다. 

풀이 내는 바람 소리는 청량하게 퍼져 울렸다.

이곳, 무척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아이가 저밖에 몰라 함께하는 일에 부족함이 많고 다소 성에 차지 않더라도, 흠이라 여기지 말고 아껴주게. 모진 뜻은 없을 것이니.”“제가 더 부족함이 많습니다. 노력하며 살겠습니다.”……말끝에 가슴이 찌릿한다. 

지환은 천천히 시선을 멀리 주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강아지와 놀던 희원이 이쪽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 웃음에 전염되듯, 두 사내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진다. 

“알겠지만 우리에겐 소중하고 귀한 아일세. 자네도 자네 집에선 귀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부디 잘 부탁합세.”“예. 어르신.”“저것이 집을 떠나도 저렇게 밝게 지내니, 내 마음이 한결 놓이네.”어쩐지 희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지환을 힐끔, 바라본 권 선생은 손을 뻗어 지환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하고, 그래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환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사랑에 취하고 행복에 취해서 두 사람의 인생이 즐거웠으면 하네. 이 말을 진즉 한다는 것이, 이제야 전하는구만.”“예, 어르신.”그녀가 가장 행복해할 삶을 평생 책임져주겠다고.

그렇게, 살게 해주겠노라고. 

……마음을 엿들은 걸까. 

그녀는 지금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더할 나위 없이 인생이 풍요롭다고. 

“우리 아이와, 내내 잘 살아주게.”“예. 어르신.”권희원 씨, 약속합니다.

그 행복 지켜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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