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집주인만 모르는 집들이 (18/98)

18. 집주인만 모르는 집들이

‘서검 오늘 결혼했어. 결혼식 다녀오는 길이야.’희주는 정윤의 차가운 음성을 곱씹었다. 

그날, 그 백화점에서 정윤을 마주친 이후로ㅡ

‘뭘 그렇게 놀라? 서검은 결혼하면 안 돼?’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 

‘너만 결혼해서 잘 살라는 법 있어? 서검 결혼했어. 정말 예쁘고 좋은 여자랑.’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밥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의 결혼 소식에 슬퍼하는, 치가 떨릴 정도로 이기적인 마음이 가증스럽기도 했지만ㅡ 

죄책감도 뻔뻔함도 뜨거워오는 울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내내 혼자일 것 같던. 

어쩌면 내내 혼자이길 바랐던ㅡ 

‘난 있지, 니가 평생 불행하길 바랄 거야. 너에게 남은 행복이 있다면 이젠 그거 서검 줘야 하잖아?’그가, 결혼을 했다. 

어떤 여자일까. 그는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을까. 

사랑이 가능했구나. 이별의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주었구나. 

이제는 날 미워하는 일도, 잊어버렸겠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침 밥상머리에 앉아서 재수 없게.”“……네? 아, 네. 죄송해요.”멍하니 초점 없는 눈길로 밥그릇만 응시한 채 지환을 떠올리던 희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신머리를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사람이 뭘 물으면 바로바로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죄송해요. 제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멍청하긴. 밥 먹고 할 일 없이 숨만 쉬니까 정신이 흐리멍덩하겠지.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네.”상쾌한 아침이라고 말하기엔 바닥이 갈라지는 것만 같은 삭막함이 서린 풍경.

희주는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남편 ㅡ 백인호 의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밥을 먹기엔 너무 넓은 식탁. 남편은 저 멀리에서 밥을 먹고 있다. 

“오늘 늦지 마. 알겠어? 당 지지율이 소폭 하락했으니 먼저 와서 기자들도 좀 챙기고 해.”“네. 안 그래도 일찍 가려고요.”“봉사 활동하러 가는데 손톱이 그게 뭐야. 당장 지워. 천박한 출신 자랑할 일 있어?”“네. 지울게요.”희주는 숟가락을 내리며 손을 슬쩍 내렸다. 

곱게 칠해둔 네일아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없이 백인호 의원은 식사를 마쳤다.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오늘은 일찍 나가시네요? 사무실로 바로 가시는 거예요? 어제는 좀 취하신 것 같던데, 속은 괜찮으세요?”아직 밥이 많이 남았지만 남편을 따라 부리나케 일어난 희주는 애써 상냥한 음성을 유지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무색하게 할 만큼 백인호 의원은 쌀쌀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쓸데없는 거 묻지 마. 누가 너한테 질문하라고 했어. 건방지게.”“어…… 그냥 저는 걱정이 되어서…….”타이를 다시 묶던 백인호 의원은 동작을 멈추고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차가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걱정? 계집질이라도 하고 다닐까 봐 신경 쓰는 건가?”“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긴, 돈이나 펑펑 쓰고 밥이나 축내는 니가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 안 그래?”대화를 이어나갈 의욕을 잃어버린 듯, 희주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무기력한 희주의 표정에 백인호 의원은 실소했다. 

“너는 하루하루 나한테 감사하며 살아. 너 같이 근본 없는 것을 거둬다가 의원님 사모 소리 들으며 살게 해줬으면, 납작 엎드려 충성을 해야지.”매일같이 반복되는, 인격 모독. 정서적 폭행. 

메말라가는 삶, 자존감을 상실한 인생.

희주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겨들어. 내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야. 너의 인지도지.”……나는, 누구인가.

“안팎으로 이미지 관리나 잘해. 그마저도 쓸모없어지면 넌 낭떠러지로 몰릴 테니까.”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삶을, 남편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희주는 버석거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자상한 애처가의 이미지인 백인호 의원이니까. 

백인호 의원은 나갈 채비를 마친 뒤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희주는 두 손을 모은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출근 잘하세요. 이따가 봬…….”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을 나서는 남편은 그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쿵, 하며 문을 닫았다. 

홀로 남은 희주는 한참이나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시선을 내렸다. 

“저…… 사모님, 식사를 마저 하셔야죠. 한술도 못 드시는 것 같던데.”어쩌다가 이렇게 불행한 삶을 선택한 걸까. 

이런 삶을 원한 적도, 바란 적도 없었는데.

“사모님…….”“치워주세요. 생각 없으니까.”지난날의 나를 아무리 미워하고 증오해보아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

희주는 표정을 가린 채 침실로 들어서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메마른 자신의 눈빛을 응시하며 매일매일 간절하게 바라는 일.

난 있지, 니가 평생 불행하길 바랄 거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너에게 남은 행복이 있다면 이젠 그거 서검 줘야 하잖아? 

다시금 정윤의 음성이 환청처럼 귓가에 고인다. 

차갑고 시렸던 정윤의 음성을 새기듯 곱씹던 희주는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정윤은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손톱…… 지우러 가려면 예약해야 하는데…….”이미 내겐, 남은 행복이 없다는걸. 

[다음 소식입니다. 국민인권당 백인호 의원이 오늘 서물 모처의 재래시장과 아동 복지관을 찾아 지역 경제 및 사회 복지에 대해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백인호 의원의 지지자들이 대거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모처럼 동기 모임이 있어 운전을 하던 지환은 높은 빌딩에 설치된 옥외 광고창에서 흐르는 실시간 뉴스를 바라보았다. 

애석하게도 신호에 걸려 차는 멈추었고, 시선도 따라 그곳에 본능처럼 멈췄다. 

앵커의 설명과 오버랩되며 백인호 의원이 등장한다. 

깔끔한 인상의 백인호 의원은 시장 상인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시종일관 웃고 있다. 

수더분한 손길의 시장 상인이 떡을 먹여주어도 호쾌하게 받아먹고, 생선을 다듬던 상인의 손을 먼저 가서 붙잡으며 허리를 낮추었다. 

……장면이 바뀐다. 

아동 복지회관 내부에 백인호 의원이 함께 있는 장면.

무릎을 낮춘 채 여러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고 있던 백인호 의원은 아내 강희주를 다정하게 이끌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지환의 손끝에 힘이 실린다. 

가족처럼 아이들을 끌어안고 웃고 있는 강희주의 얼굴.

워낙 진하게 생긴 그녀의 이목구비는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아도 화려했다. 

일부러 편안하게 입은 듯 보이는 청바지 차림은 화려한 그녀 얼굴과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슈퍼모델 출신. 단숨에 주연 배우로 입지를 굳혔던 그녀의 연예계 생활.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 물밀듯 쏟아진 광고, 그리고 그녀에 대한 언론의 관심. 

그녀는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짧게 정리한 뒤 백인호 의원과 결혼을 했다. 

“신호는 왜 이렇게 길어.”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 두 달 만에, 뉴스 보도로 접하게 된 그녀의 결혼 소식.

지환은 난데없이 바라본 영상 속 희주의 얼굴이 당황스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길었던 뉴스 영상은 끝이 나고 다음 소식이 들려올 때쯤, 신호가 바뀌었다. 

ㅡ여보세요? 서검 어디야?때마침 정윤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동기 모임에 먼저 도착한 정윤은 차례대로 도착하지 않은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고 있어. 얼마 안 걸려.”ㅡ알았어. 그럼 미리 식사 주문한다.“그래. 알겠다.”ㅡ……여보세요?별생각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바닥으로 치달은 감정.

지환은 애써 생각을 지우며 들려오는 정윤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듣고 있어. 말해.”ㅡ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정윤은 지환의 불편한 심기를 귀신같이 알아낸다. 

지환은 별일 아니라고 짧게 대꾸하며 전화를 종료했다. 

……희주. 강희주.

지환은 자신의 인생을 스친 그녀로 인하여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잔인한 동물이라는 것.

타인의 감정을 믿는 것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는 것.

“휴…… 더워…….” 변하지 않는 감정은 없다는 것.

오늘의 감정을 신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또한 미련한 일이라는 것. 

“가을인데 뭐 이렇게 더워.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러워도 되는 건가.”사랑은, 없다는 것.

“야야, 서검. 결혼하더니 신수 훤해졌다?”“그러게 말야. 신혼 좋냐? 꿀이 막 떨어져?”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자연스럽게 지환의 신혼에 대해 운을 떼었다. 

결혼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지환은 늦은 답례를 하는 중이다. 

“그래. 결혼하니까 좋다. 안 좋을 건 또 뭐냐?”지환은 진작 준비해두었던 결혼 답례품을 동기들에게 돌렸다. 

선물이라니 눈을 빛내던 동기들은 일제히 포장지를 뜯고는 질색했다. 

이런 걸 결혼 답례품이라고 전해주다니. USB다. 

“야, 선물도 꼭 너 같은 걸 해. USB가 뭐냐? 책상에 널리고 깔린 게 USB인데. 차라리 제수씨한테 고르라고 하지.”“와이프가 고른 거야.”“USB를 많이 쓰긴 하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물건이긴 해. 제수씨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네.”희원이 고른 선물이라고 하자 금세 태도를 전환하며 동기들은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운 말보단 험한 말이 편한 사이라고 해도, 가족 욕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의 선물 센스가 돋보인다며 모두는 잘 쓰겠다고 인사를 했다. 

“야야, 다 익었다. 먹어, 먹어.”“먹기 전에 한잔해야지. 다들 잔 들어, 잔 들어!”현직 검사 동기들이 모인 자리.

메뉴는 삼겹살이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불판에 익어가는 고기 소리가 환상인 이곳.

다들 재킷을 벗어두고 조금은 느슨해진 표정을 한 채, 모처럼 만난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만담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대부분은 사건 이야기고.

“요번에 인천공항에서 홍콩발 금괴 밀수 양이 최다라며.”“장난 아니야. 김해 국제공항에서도 후쿠오카로 들어가면서 이번에 판금, 몇 개더라? 60개?”“밀수단 총책 홍콩에서 잡혔다고? 사건 누가 맡았어?”“서검이 맡았어. 그리고 총책은 아니고, 중간 운반책이야.”또 업무 이야기였다. 

“캬, 서지환 열일하네. 덩어리 굵직굵직한 건 죄다 맡는구나.”“양병목 차장님이 서검 대놓고 갈구잖아.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더니, 딱 그 격인 듯.”“서검이 자기 말 안 들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뭘 미워하냐? 양 차장님이 서검 예뻐하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쓸데없는 소리들 한다.”지환은 화제를 뚝 잘라내듯 대꾸했다. 

“맞아.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 다 타잖아, 이것들아!”정윤이 앞 접시에 고기를 내려주자 동기들은 다시금 술잔을 들었다. 

“하여튼 몸 사리면서 해, 서검. 그런 밀수단이 몸집 불리는데 뒤 봐준 세력이 없겠어? 파다 보면 어디까지 나올지 모르는 거야.”“그런 사건은 판도라의 상자야. 잘못 열면 어떻게 되는지, 서검 잘 알지?”현직 검사들의 예감은 심상치 않았다. 

단순 조직폭력배, 또는 지하 금융만이 가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배후가 숨어 있을 거란 것.

“맞다, 서검. 너 신혼집이 이 근처라고 했지?”“가깝긴 하지.”그러다가 갑자기 화제는 전환되었다. 

“잘됐다. 2차는 서검 집에서 하자. 집들이해야지.”“……뭐?”뭐를 해? 지환은 술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순간 당황한 지환의 놀란 눈을 바라보던 동기들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야, 쟤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놀랄 줄도 아네.”“서검. 집에서 간단하게 2차 하자. 제수씨 얼굴도 좀 보고.”“아, 안 돼! 집은 안 돼!”안 돼! 나도 이 시간에 가본 적 없는 집을 니들이 왜 가!

지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동기들은 녀석이 놀란 얼굴을 음흉하게 즐겼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행복.

뭐, 그런 거니까.

“2차 다른 곳으로 가. 내가 살 테니까.”“니가 왜 사 인마, 우리도 돈 있어. 2차 너네 집으로 갈래.”“글쎄 안 된다니까!”안 돼!

안 된다고, 이 망할 넥타이 부대 놈들아!

“나도 찬성. 나도 놀러 갈래.”어랍쇼, 정윤까지 손을 들며 기습 집들이를 찬성한다. 

하, 지환은 어쩔 바를 몰라 마른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했다. 

시간은 오후 여덟 시 반.

“야, 시간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서 거하게 먹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빼?”“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할게. 정식으로.”“됐어. 1년에 한 번 다 같이 보기도 힘든데 언제 정식으로? 말 나온 김에 가자.”캬캬캬. 캬캬캬캬. 동기들은 음흉하게 웃었다. 

대부분이 유부남인 동기들은 지금 지환의 당황함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늦은 저녁. 예고 없이 쳐들어오는 남편의 친구들만큼 와이프가 싫어하는 일이 없으니까. 

“서검. 지금까지 행복했잖아. 이제 우리로 인하여 불행할 때도 됐지.”“이 망할 것들…….”“서지환. 너 기억 안 나? 나 결혼했을 때 니가 동기들 끌고 선동해서 우리 집 쳐들어 왔잖아. 나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감자만 먹고 살았어. 아냐?”“그래서 세상엔 멋진 말이 있잖냐.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서검한테 당한 놈들이 어디 한 둘이야?”캬캬캬. 캬캬캬캬. 모두는 복수의 날이 다가왔음에 기뻐했다. 

모든 것이 서툴던 신혼 초. 느닷없이 쳐들어온 지환과 동기들로 애를 먹은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자자, 서검 집에 가야 하니까 다들 일어나자. 여긴 내가 계산할 테니 내일 일괄 입금해주십시오.”“그래그래. 가자가자!”이럴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 정확하다.

촤라락 옷을 입더니 일사불란하게 밖을 나선다. 

서검 집에 뭐 사 가지? 제수씨는 뭐 좋아할까? 일단 보이는 대로 살 수 있는 건 다 사자.

지환은 터덜터덜 재킷을 들고 밖을 나섰다. 

희원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질 않는다. 

급기야 무엇이 떠올랐다는 듯 지환은 앞서가는 동기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아! 맞다! 우리 부인이 오늘 연습이 늦게 끝나서! 오늘 집에 없다!”“그럼 더 좋지 뭐. 우리끼리 신나게 놀자. 상관없어.”아…… 저것들을 죽여 살려……. 

“설마하니 제수씨가 외박을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기다릴 수 있어 얼마든지.”그걸…… 나도 장담 못 한단 말이다…….

재차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집에 들어갈 예정인지도 알 수 없다. 

지환의 멘탈이 바스락거리는 사이 동기들은 편의점에 우르르 들어갔다.

세간살이에 도움을 주겠다더니 닥치는 대로 골라 담는다.

“야야, 이런 건 꼭 필요하지. 이것도 사줄게.”옷핀…… 필요 없어…….

“이건 어때? 이런 것도 두고 있으면 언젠가 쓸 일이 있어요. 이것도 사자.”순간접착제는 더더욱 필요 없어…….

“야, 이거 맛있겠다. 이거 사가자.”“이거 개 간식이야. 정신 차려.”“아아? 그러네? 야, 서검. 집에 혹시 개 키우냐? 간식 사줄까?”“키우는 개는 없지만 개 같은 동기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지.”“야, 서지환 말하는 꼬라지 좀 봐라. 지금 불행한가 보다.” 캬캬캬. 캬캬캬캬캬. 다들 즐거워한다. 

지환은 다시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재다. 

“서검. 이거 필요해? 하나 사줄까?”이것들아…… 대체 나한테…….

“야야, 서검한테 이게 필요하겠어? 아닌가? 필요한가?”콘돔이 왜 필요해! 

“아오, 저것들이 진짜.”“일단 나가 있자. 알아서 사겠지.”정윤은 지환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마치 메뚜기 떼가 휩쓸 듯 동기들은 편의점을 휩쓸었다. 

지들이 먹고 마실 것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실과 바늘, 순간접착제와 옷핀까지.

“권희원 씨 연락 안 돼?”정윤이 힐끔 바라보자 지환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망했다. 이걸 어떡하지. 

나도 안 가본 내 집을, 어떻게 소개하지.

권희원 씨 오늘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저 망할 것들이 끝끝내 집에 안 가면 어떡하지.

“야, 서지환.”“아직 연습 중이라 와이프가 전화를 안 받네.”“그래? 연습 되게 늦게까지 하네.”지환은 정윤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빛을 하며.

“차검. 니가 저 개떼들 좀 말려봐.”“내가 무슨 수로? 저렇게 세간살이까지 다 샀는데 뭘 어떻게 말려? 아까 인과응보, 못 들었어?”하…… 미치겠네…….

편의점 안에서 계산을 마친 동기들은 부스럭거리며 봉투에 오만 잡동사니들을 쓸어 넣는 중이다. 

피가 마른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따라올 상황이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설마. 비밀번호도 바꾼 건 아니겠지? 

“아…….”“왜?”지환은 생각 끝에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신혼집을 구할 때 비밀번호가 초기화되어 있었으니, 지금은 변경되었으리라. 

오 쉣.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자기 집 비밀번호도 모르는 사람이라니. 이걸 대체 어쩐단 말이냐!

애석하게도 희원에겐 연락이 오질 않는다. 

“자, 다 됐다! 가자, 서검!”“서검의 집으로 출바알!”“자자, 제수씨 보러 가자! 제수씨! 제수씨! 제! 수! 씨!”두 다리가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입술이 버석버석하게 말라 뜯어질 것 같았다. 

오늘, 저 간사한 악마 같은 동기들 때문에 최악의 집들이가 예상되었다. 

지환은 희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권희원 씨, 나 좀 살려줘요.]“야! 서지환! 빨리 와! 우리 택시 타야 하지!”“차례대로 타자! 주소 찍어줘!”“서지환이 앞장서 출발해! 가자! 택시ㅡ!”이런 빌어먹을. 

나도 모르는 신혼집으로, 동기들을 데리고 출발한다. 

비밀번호도 모르고 아내의 행방도 모르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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