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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19/98)

19.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여어, 서검. 좋은데 사네. 앞뒤로 뷰가 훌륭하구만?”“그러게 말이다. 좋구나, 좋아. 집이 아주 좋아.”어찌어찌 아파트 정문까지 도착했다. 

무슨 정신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지환은 터덜터덜 걷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양손 가득 편의점 봉투를 무겁게 들고, 녀석들이 해맑게 바라본다.

뭐 해? 어서 가. 이런 눈빛들을 하고 있으니 지환은 취한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권희원 씨. 지금 회식 중에 일이 꼬여서 동기들 데리고 집에 가고 있습니다.][제발 보면 연락 좀 줘요. 갑자기 미안합니다. 신혼집 비밀번호를 모릅니다.][권희원 씨, 권희원 씨.]……그녀에게 아무리 연락을 넣어 봐도 감감무소식이다. 

다 늦은 저녁에 연락을 해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녀가 이 시간에 무얼 하는지 감도 오질 않는다. 

비밀번호 정도는 공유하고 있을걸.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야, 서검. 덥냐? 땀 흘리네?”목덜미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야야, 서검. 기어가냐? 기어가도 너보단 빠르겠다.”꾸역꾸역 한 걸음에 1분씩 걸어 봐도 아파트 입구까진 금방이다.

“어어, 엘리베이터 빨리 잡아! 1층이다!”사람 속도 모르고ㅡ 

야속한 엘리베이터는 친절하게도 1층에 도착해 있다.  

우르르 달려가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선다. 

“서검. 신혼집 몇 층이야?”“……비켜. 내가 누를 테니까.”지환은 강제 탑승하다시피 해 무거운 마음으로 7층을 눌렀다. 

지옥은 땅 아래 있는 줄 알았더니, 아파트 7층에 있을 줄이야.

이 망할 놈들은 뭐가 그리 좋다고 승강기 내에서 어깨춤을 추고 있다. 

“집에 제수씨 없다고 했지? 그럼 편안하게 있어도 되겠네. 내 집처럼 편안하게.”“그래. 제수씨도 없다는데 편안하게 집 구경이나 좀 하자. 내년에 이사해야 하는데 이 아파트 좋네. 나도 이쪽으로 이사 올까 봐.”띵동. 뭐 이렇게 빠르냐,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다. 

7층에 우르르 내려 코너를 꺾자 견고하게 닫힌 지환의 신혼집이 자리하고 있다. 

지환은 현관문 앞에 섰다. 

차마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다가, 홱 돌아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제라도 나가서 먹는 건 어때? 집 앞에 괜찮은 선술집이 있어. 사케 어때.”제발!

“아니. 화장실에서 막걸리를 마셔도 너네 집에서 마실래.”그냥…… 죽여야겠다…….

지환이 마지막 회유를 해보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마당에 돌아설 위인들이 아니다. 

“서검. 너는 몰랐겠지만 오늘 우리는 너희 집에서 집들이를 하려고 모인 거야.”사실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정이란다.

일부러 오늘 모임을 지환의 신혼집과 가까운 곳에 잡은 거란걸, 지환은 미처 몰랐다.

“뭐 해? 빨리 비밀번호 눌러.”“나쁜 놈들…….”망했다. 

비밀번호…… 무엇……?

지환은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화려한 현관을 가만히 응시했다. 

권희원 씨라면 어떤 숫자로 조합을 해두었을까. 

혹시 묻어 있는 지문으로 비밀번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한참 도어록을 노려만 보았다. 

“휴.”옘병. 소용없는 일이다. 

“서검! 빨리 열어! 무거워서 팔 떨어져!”“그래! 무거워 죽겠다! 빨리 열어!”……물러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동기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 아우성에 못 이겨, 결국 지환은 도어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꾹, 꾹, 꾹, 꾹.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용띠용ㅡ! 띠용띠용!

아니면 아닌 거지. 도어록은 비밀번호가 맞지 않다며 침입자 대하듯 시끄럽게 발광을 한다. 

지환은 당황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뭐야, 똑바로 눌러. 취했냐?”권희원 씨의 생일을 조합해봤지만 비밀번호가 아니다. 

더 이상은 생각나는 숫자 조합도 없을뿐더러, 눌러보고 싶은 의지도 없다. 

……점점 더 숨을 조이는 긴장감. 

미칠 것만 같은 정적. 

거지같은 분위 속,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열린다. 

“어? 지환 씨.”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환은 황급히 뒤를 돌았고, 동기들도 따라 뒤를 돌았다. 

두 손 가득 장을 봐온 듯, 희원이 양손에 이것저것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 있다. 

지환의 얼굴로 엄청난 환희가 물든다. 

천국을 경험했다면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지환 씨, 여기서 뭐 해요?”그녀는 상황을 알지 못해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희원을 보자마자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안도감이 밀려든다. 

지환은 저벅저벅 희원에게 걸음을 옮겼다. 

희원은 당황한 듯 동기들을 바라보다가 가까워 오는 지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환 씨. 대체 언제 왔어요. 전화를 주…….”지환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어 팔을 쓰지 못하는 희원을 덥석 끌어안았다. 

헐, 동기들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전화를 했는데…… 희원 씨가 전화를 안 받아서…….”“아…… 전화했었구나. 미안해요,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휴대폰에 신경을 전혀 안 써서.”“상관없어요. 괜찮으니까…….”괜찮아요.

이렇게 나타나 주었으니까. 

“잘 왔어요. 희원 씨…….”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그가 자신을 품에 안으며 반기자 희원은 놀라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조금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잘 왔습니다, 아주 잘 왔어요…….”“아…… 네…… 지환 씨.”그는 잘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 순간, 지환이 그녀를 얼마나 반기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달려가 안을 수밖에 없을 만큼. 지금 등장한 그녀가 구세주처럼 보일 만큼.

지환은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품에 안았다가, 다시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잘 왔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어…… 아…… 네…….”“하…… 진짜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이렇게 당신이 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을 거다. 

지환은 그녀를 막무가내로 안은 채 탄식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저기, 서검. 미안한데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어. 봉지가 무거워서 팔이 빠질 것 같아. 하하. 하하하!”“그래. 제수씨가 아무리 반가워도 집에 들어가서 반가워하면 안 될까? 나 화장실 급한데. 하하. 하하하!”……이래서 신혼이라고 하는 건가. 

동기들은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애정행각을 펼치는 지환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 

매일 보는 아내의 얼굴을 마치 몇 달 만에 마주한 것처럼 반기는 서지환의 푼수 같은 꼴이라니. 

놀란 정윤도, 다른 동기들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지환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희원만 당황함에 애가 탄다. 

“저기, 지환 씨. 일단 이것 좀 놓고.”“…….”“지환 씨.”“잠깐만. 잠깐만 더 있어요.”동료들이 뭐라고 타박을 주어도 지환이 꿈쩍도 하질 않는다. 

우우우우. 녀석들의 야유가 따라와도 소용없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놓아줄게요.”……대강. 

아주 대강 상황을 이해한 희원은 자신을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곤 그의 등을 토닥이듯 감싸 안았다. 

그래요. 무슨 일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늦어서 미안해요. 지환 씨.”“아뇨. 아뇨. 와줘서 고마워요.”

하…… 저 닭살 부부를 어찌하면 좋을까?

아파트 현관 앞에서 아주 가지가지 한다. 

동기들은 야유를 보내며 어서 문을 열어라 호통쳤다. 

천천히 지환의 품을 빠져나온 희원은 해사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빨리 문 열어드릴게요.”“예. 제수씨. 지금이라도 서검을 떼어내줘서 감사합니다.”띡, 띡, 띡, 띡.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녀가 누르는 비밀번호를 바라본 지환은 예상하지 못한 숫자 조합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무척이나 낯익은 숫자의 조합. 

“자, 어서 들어오세요. 오시는 줄 몰라서 청소도 못 하고.”“어어, 괜찮습니다! 제수씨! 갑자기 찾아온 저희가 망나니죠!”“청소 시키세요! 제가 청소를 잘합니다!”자신의 생일이었다. 

“장 본 지가 좀 오래돼서 마트 가서 장 봤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휴대폰 좀 볼걸.”아휴, 정신이 없다. 

희원은 지환이 보낸 메시지를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숨넘어가는 간절함이 느껴져 괜스레 미안해졌다. 

이 시간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건 지환인데 말이다. 

“미안해요. 지환 씨 진짜 당황했겠다.”“살면서 그렇게 긴장해보긴 또 처음이네요. 괜찮아요. 희원 씨에게 내가 미안하죠.”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시원하게 웃었다. 

이제야 여유를 되찾은 지환의 표정에선 식은땀을 철철 흘리던 조금 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도어록 비밀번호…… 봤습니다.”동기들은 집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고, 손님 맞을 준비에 정신이 팔린 희원의 곁에서 지환은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인원수에 맞게 술잔을 꺼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서지환 씨 생일이에요.”“좀 감동인데요. 감동받아도 됩니까?”“비밀번호라도 해둬야 기억할 것 같아서 해둔 거예요. 생일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희원이 별일 아니라 언급하자 지환은 그녀가 잔을 내려놓은 트레이를 잡았다. 

고된 연습 끝에 쉬지도 못하고 손님맞이를 해야 하는 희원에게 미안한 마음에, 지환은 작게 속삭였다.

“일찍 보낼게요. 늦게까지 놀진 않을 겁니다. 다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신경 쓰지 말고 놀아요. 언젠가 한 번은 해치워야 할 일인데. 잘됐죠.”“뭐야, 두 사람은 집에서도 귓속말해?”이것저것 준비하는 두 사람 사이로 정윤이 다가선다. 

“서검, 저기로 가봐. 쟤들 막 서랍 열어본다.”“저것들이, 아오.”야! 만지지 마! 지환은 트레이를 들고 녀석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분주히 과일을 씻는 희원의 곁으로 다가선 정윤은 팔을 걷어붙였다. 

“제가 씻을게요.”“괜찮아요. 어차피 물 묻…….”정윤은 개수대로 손을 뻗어 과일을 잡았다. 

얼떨결에 옆으로 비켜선 희원은 정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신중한 손길로 과일을 닦더니, 깨끗하게 털어 그릇으로 옮긴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괜찮아요. 정말로.”“말릴 수가 없었어요. 서검의 업보가 좀 있거든요.”이거 저기로 가져가면 되죠? 정윤이 그릇을 들며 묻는다.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급히 말을 붙였다. 

“그때, 결혼식 때요.”“네?”“청심환 잘 먹었어요. 효과 좋던데요.”“……아. 그거.”정윤은 기억났다는 듯 웃었다. 

“시중에서 파는 거 아니고, 단골 한의원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효과 괜찮더라고요.”필요하면 말해요. 서검 통해서 더 가져다줄 테니까.

정윤이 쿨하게 답하며 거실로 사라진다. 

희원은 짓궂은 동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정윤을 길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자꾸만 시선이 가는 정윤은 어느 각도로 바라본들 매력적이었다. 

이목구비가 큼직해 시원시원한 얼굴, 그만큼 시원시원한 성격.

뭇남성들의 마음을 여럿 상하게 했을 것만 같은 매력의 소유자. 

“제수씨! 저희가 하겠습니다! 시켜주십시오!”“그냥 앉아 계세요! 앉아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랍니다!”서지환 씨의, 가까운 동료. 

문득 궁금하다. 

두 사람은 정말 친한 동료 사이인걸까? 

“제수씨! 집 좋네요! 깔끔하고 예쁘장하게 잘 꾸며놓으셨습니다!”“감사해요! 오실 줄 알았다면 더 예쁘게 잘해놨을 텐데!”그의 동료들이 집 구경을 끝냈는지 우르르 주방으로 몰려온다. 

혼자임에 익숙했던 집의 풍경이 처음으로 역동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소음과 웃음이 난무하다. 

희원은 정윤에 대한 궁금증을 지워내며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느닷없이 마주한 집들이 풍경이지만 희한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야, 서검. 넌 무슨 너네 집을 구경하냐? 아직도 신기하냐?”“그래. 아직도 신기하다.”지환은 동료의 타박에 대꾸하며 신혼집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이것저것 살폈다. 

그녀가 홀로 정리해두었을 신혼집은 아기자기했고 곳곳에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다. 

걸려 있는 사진이 낯설어 바라보다가, 즐비한 트로피와 상장 개수에 놀라 멈춰 섰다. 

요즘 혼자 짧은 여행을 다닌다고 하더니 최근 들어 찍은 게 분명한 풍경 사진도 제법 눈에 띄었다.

지환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몇 장의 사진이 말해주는, 그녀가 감동으로 바라보았을 풍경들이 몰랐던 근황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야! 빨리 와! 서검! 제수씨 안 돕고 뭐 해!”“맞아! 너도 빨리 와! 빨리 와서 나 좀 도와!”그녀는 예상대로 잘 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러한 사실은 무척이나 기뻤다. 

내가 없는 공간 속ㅡ 당신의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일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금 평범한 일상이 펼쳐진다. 

얼떨결에 해치운 것치고는 집들이도 훌륭하게 끝냈다. 

그는 그의 일터로, 그녀는 그녀의 무대로 되돌아갔고, 각자의 삶 테두리 안에서 안전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계절은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지환의 집안 식구들과 함께 저녁 모임이 있는 날. 

중간에 지환을 미리 만나 함께 온 희원의 앞으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다가온다. 

“하리야, 그건 뭐야?”“이거 선물이에요. 선물.”이제 막 다섯 살이 된 꼬마 아가씨는 지환의 형인 지석의 딸, 날개 잃은 천사이다. 

희원은 하리가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형 ㅡ 지석이 따라 나오며 웃는다. 

“제수씨 준다고 어제부터 손에서 놓질 않더라고요. 하리가 제수씨 오래 기다렸어요.”“와…… 이거 진짜 숙모 주는 거야? 진짜로?”희원은 무릎을 굽혀 앉으며 하리가 내미는 선물을 두 손으로 받았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장난감 립스틱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리가 이거 숙모 줘도 되는 거예요?”“웅. 네. 선물이에요.”하리는 부끄러운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곁에 서 있던 지환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리야, 이제 삼촌보다 숙모가 더 좋아? 삼촌 선물은 없어?”“없쪄. 오늘은 삼촌 선물 없쪄.”“하…… 질투 나는데. 하리가 숙모만 좋아해서 삼촌 막 질투 나는데.”지환이 하리를 번쩍 안아들고 일어선다. 희원은 활짝 웃으며 선물을 자랑했다. 

“봤죠. 하리가 이젠 저를 더 좋아한다고요.”그가 조카바보라는 사실은 처음 맞선을 봤을 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니, 놀려먹기 딱 좋다. 

희원은 립스틱을 흔들며 열과 성을 다해 자랑했다. 

“지환 씨, 이제 그만 하리를 포기해요. 하리 사랑은 제게 있어요. 사랑은 변하는 거거든요.”“다 뺏겨도 하리 사랑 못 뺏깁니다. 반드시 쟁취해오도록 하죠.”“그래요. 건투를 빌게요.”희원은 갈수록 사랑스러워지는 하리의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위장 부부의 삶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족이었다. 

“수능 출제위원? 이번에?”“그래. 그렇게 됐어.”가족끼리의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상이 놓였다. 

형수님은 먼저 잠든 하리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간. 

형과 마주 앉은 지환은 눈을 크게 떴다. 

“수능 출제위원이면, 칩거하잖아?”“그렇지. 그래서 문제야.”지석은 낮은 숨을 불어 내쉬었다. 

현직 교수인 지환의 형과 형수는 교육부의 호출을 받았다. 

수능 출제위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느닷없었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지만, 수능에 관련된 일들은 국가 기밀로 처리되다 보니 당연한 절차였다. 

“하리는 그럼, 형수님 처가에서 봐주는 건가?”지환이 묻자 지석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리가 태어날 때부터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하리의 외할머니는 아이를 곧잘 봐주곤 했다. 

혹은 지환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대신해 하리를 돌봐주었다. 

부모님이 아니라도 집안사람들을 곧잘 따르니 문제가 될 일이 있겠냐마는.

“장모님이 좀 편찮으셔. 얼마 전에 허리 수술을 받으셔서.”“아…….”“아버지가 하리 봐주시겠다고 하는데, 한 달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건 무리가 있는 것 같고.”희원은 형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하리를 떠올렸다. 

단발머리가 너무나도 귀여운 꼬마 아이. 

요즘 들어 더욱 자신을 따르는 하리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하리는 가족 모두에게 축복이자 천사였다. 

지환이 하리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두말하면 입 아픈 일이고. 

휴가 때 하리와 둘이 여행을 간 적도 있단다. 

미키마우스가 보고 싶다던 조카의 말에 곧장 비행기 표를 끊었다나 뭐라나. 

“대안을 마련하는 중이야. 아무래도 집사람이나 나나, 둘 중 하나는 출제위원을 못 한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지석의 말끝에 동생 지환은 흠, 낮은 숨을 내쉬었다. 

수능 출제위원이라 함은 통신 수단 아무것도 없이 통제된 구역 안에서, 수능이 끝날 때까지 지내야 했다.

수능 출제란 중대한 사안이었다. 

수능이 지닌 무게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었고. 

“아…… 그러고 보니 얼마 후면 수능이네요.”희원은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말을 꺼냈다. 

부부가 나란히 출제위원으로 뽑혔다니. 아주버님과 형님이 대단해 보였다. 

“아주버님, 저 질문이 있어요.”“네. 제수씨.”희원이 말을 트자 지환이 바라본다. 

희원은 과일을 포크로 푹, 찍으며 입술을 열었다. 

“낮시간에 하리는 누가 보나요?”“이모님이 계십니다. 하리 신생아 때부터 봐주시던 분이 계세요.”“아아. 하리가 집을 떠나 있는 것에 민감하진 않나요? 아직 어린데.”“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양가를 오가며 지낸 시간이 많아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잘 따르기도 하고요.”음. 잠시 뜸을 들이던 희원은 가볍게 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저희 집으로 하리를 보내주세요. 제가 봐드릴게요.”“희원 씨!”희원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환은 당황한 듯 희원을 바라보았다. 

커다래진 그의 두 눈이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희원은 웃었다. 

이토록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지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형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의 마음도 편안해지리라. 

“제가 아이를 본 적은 없지만 하리가 저와 있어도 문제없다면, 제가 봐드릴게요. 대신 제가 공연이 있거나 부득이 자리를 비울 땐 아버님께 도움 청할게요.”“제수씨, 아무래도 힘들 텐데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하리만 괜찮다면요. 괜찮아요. 노력해볼게요.”지석은 잠시 희원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희원은 과일을 우적 깨물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한 달이라는 숫자가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 희원을 바라보며 지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 씨, 이렇게 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을 잘해봐요. 가족 일이라고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도와야죠. 가족이니까요. 부담을 느껴서가 아니라 정말 돕고 싶어요.”지환은 그녀의 야무진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선뜻 조카를 맡아주겠다는 희원의 말에 감동이 뒤따랐지만.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이도 편안할 수 있다면 아주버님과 형님, 둘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장래 학생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요.”아마도 그녀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이를 한 달 동안 맡겠다는 건ㅡ

“낮 동안은 이모님이 봐주신다니, 밤엔 제가 있을게요. 하리에게 물어봐 주세요. 하리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자신과도 한 달 동안 함께 살아야 하는 일임을. 

평화롭던 위장 결혼 생활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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