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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랑, 이 한마디 (21/98)

21. 사랑, 이 한마디

“하…….”지환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경기하듯 한 눈빛으로 도리질을 치더니, 이윽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최금호 계장은 왜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다소 들뜬 것처럼 보이더니.

“검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오늘은 하루 종일 저런 상태이다.

뭐랄까, 약간 맛이 간 상태라고 해야 할까?

“검사님?”불러도 듣지도 못한다. 최 계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환을 심도 있게 바라보았다. 

“흥응, 흐으응.”그는 이상한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하…… 답이 없네…… 답이 없어…….”뜻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애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검사님.”“아, 네. 계장님.”몇 차례 연거푸 부르자 그제야 반응한다. 

지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답하자 최 계장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오늘 영 불안해 보이시는데요.”“저…… 지금 불안해 보입니까?”“네. 무척. 많이. 상당하게.”휴…… 지환은 볼펜을 붙잡고 현란하게 돌렸다. 

범죄 수사에 동물적 감각이 있는 최 계장은 지환의 심리상태를 금방 간과해냈다. 

징그러울 만큼, 최 계장은 촉이 좋았다. 

“검사님 무슨 일 있으시죠? 예를 들어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거나. 집안 일?”“허어, 이런 귀신같은 사람. 계장님. 저는 최 계장님이 무섭습니다.”“저는 지금 검사님이 더 무서운데요. 혼자 웃고 혼잣말하시고.”“…….”“그리고 지금 검사님의 모습은 제가 아닌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그냥, 집안에 조금 웃픈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응이 다채로운 거니까, 이해해주십시오.”

뽀뽀해야 하는데. 그래야 코오오오 자는데.

어제, 그 밤, 사랑스러운 조카 하리 앞에서ㅡ

당황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삼쵼이랑 숭모는 왜 뽀뽀 안 해여? 

맞선으로 만났지만 형과 형수님은 금슬이 좋았다. 

다소 차가운 인상의 형이었지만 형수님 앞에서는 한없이 멍청한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그렇다 해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형에 대한 사실들을 어제 알았다. 

형수님과 주야장천 뽀뽀를 해댄다는걸. 

시도 때도 없이 하며, 낮과 밤도 없다는 것 또한.

“결국…… 해버렸어…….”후…… 지환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이의 강력한 주문을 피할 도리가 없고, 논리적인 반박은 힘을 잃어버린 때.

그 땡글땡글한 아이 눈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지환은 슬그머니 희원에게 다가섰다. 

희원의 질색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권희원 씨, 어서 와요. 어서. 

피할 수 없다면 즐깁시다.

눈빛으로 호소하며, 지환은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최대한 길게 뺐다. 

자신을 바라보는 희원의 표정이 더더욱 흉측해졌지만 모르는 척해보기로 한다.

왜냐. 수치스러우니까.

어서. 어서 와요. 권희원 씨. 

이런 거지같은 상황은 빨리 끝내버립시다. 

……눈을 감고 그녀 입술을 기다리자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그녀 입술이 다녀간다. 

감촉만으로는 입술인지도 모를 만큼 슬쩍.

그녀는 슬쩍 가져다 대고는 ‘쪽’ 소리를 기술적으로 크게 냈다. 

와아아아ㅡ!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리의 박수를 들으며 지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희원은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이용해서 씰룩씰룩 웃고 있었지만, 그녀가 갖은 노력을 다해도 눈은 웃지 않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외면했다. 

왜냐. 무서우니까.

마치 의식을 치르듯 하리는 지환과 희원의 볼에 뽀뽀를 하고, 볼에 뽀뽀를 받고 퇴장했다. 

두 사람은 어색한 기운을 남긴 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뻘쭘하게, 아침이 왔다. 

아침 출근시간에도 하리의 진두지휘 아래 뽀뽀타임은 진행되었다.

“대체 뭔 뽀뽀를 그렇게 많이 해, 집에서.”아…… 형…….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에휴. 금슬 좋은 형네 부부 덕에 지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하리는 아빠 엄마의 애정표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좋다. 다 좋은데, 그게 자신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오늘은 집에 가기가 좀 무섭네요.”“벌써 무서우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멀었습니다.”휴…… 지환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 

자꾸만 심장이 긴장한 듯 뛰었다. 두근거림을 자각한 지환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사실 그는 즐겼던 것도 같다.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피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 미치겠다. 미치겠다.”연습 도중 희원은 자꾸만 탄식처럼 혼잣말을 했다. 

땀을 닦던 구언은 힐끔 희원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 보였고 긴장한 것처럼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다.

“아, 아냐.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니긴. 얼굴에 무슨 일 있다고 크게 써 있구만.”뭔데. 무슨 일인데?

구언은 최대한 힘을 뺀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선에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아…… 맙소사. 아…… 어떡하지.”나는 서지환 씨와 한 달 동안, 매일매일 뽀뽀를 해야 하는 건가?

더한 일이 있으면 어떡하지?!

희원은 온종일 그와의 스킨십 상상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했다. 

비즈니스 차원의 입술 접견이라고 아무리 스스로 인식을 시켜 봐도 익숙해질 리 없는, 입맞춤.

……휴, 짧은 한숨을 내쉰 희원은 잊고 있었던 구언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나 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알면 됐어. 말도 안 해주고, 정신 빠진 사람처럼 혼잣말이나 하고.”아, 맞다. 구언은 수건을 내리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몇 날 며칠 연습했던 말이지만 이 역시 최대한 힘을 뺀 채.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원아, 나 이번에 지방 공연하잖아.”“알지.”“너 게스트로 와줄 생각 없어?”……응? 게스트? 

희원은 구언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태평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 게스트로 와 달라 부탁하고 있다. 

“아, 게스트. 언제지?”“얼마 안 남았어. 게스트 섭외가 다 되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네. 다시 구할 시간은 안 되는 것 같고.”“아…….”어…… 희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구언은 그녀의 표정을 훑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번에 너 내가 게스트 서 줬잖아. 빚 갚아. 언제든지 출연해준다며.”“맞네. 그랬지? 알았어. 너도 나 도와줬는데 나도 너 도와야지.”구언은 때때마다 희원의 공연 게스트를 자청했다. 

쉽지 않은 일을, 흔쾌히 해준 것이다. 

“그래. 회사에 말해서 다시 얘기할게.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다?”“알았어. 무슨 딴말. 걱정 마.”“고맙다, 밥 살 테니까 기대해.”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며 구언은 실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확답을 받은 구언은 잊은 말이 있다는 것처럼 말을 보탰다. 

“근데 희원아, 그거 1박 2일 일정이야. 공연이 이틀 일정이거든. 참고해줘.”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 게스트 말입니까?”“네. 구언이가 제 공연을 많이 도와줘서 저도 한 번 도와주기로 했는데, 이번 게스트가 갑자기 일정 취소가 됐다고 해서.”식사 후 과일을 잘게 잘라 하리에게 디저트를 먹이며 희원은 운을 뗐다. 

아기새처럼 잘도 받아먹는 하리는 집에서 가져온 소리 나는 그림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환은 그런 하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가는 거죠?”“다음 주요. 1박 2일 일정이에요.”“아아.”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할 말이 있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평온함을 되찾았다. 

사실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자신이 이 집에 없었다면 사실 알지 못했을 일이기도 하다. 

조카가 와 있고, 자신이 이 집에 있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녀가 공연을 떠나는 것에 문제는 없다. 

굳이 문제를 꼽자면 구언의 마음이 희원에게 있다는 것뿐.

“유……구언 씨는 만나는 사람이 없습니까?”“글쎄요. 워낙 바쁘고, 공연이 많은 친구라 잘 모르겠어요.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당신을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지환은 남은 말을 삼켰다. 

어쩐지 공연을 빙자한 구언의 사심이 느껴져 스멀스멀 불쾌한 기운이 올라왔다. 

순수하게 공연을 돕겠다는 희원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은 교묘함도 느껴졌다. 

“1박 2일이면, 숙소에서 자겠네요?”“그렇겠죠? 숙소는 구언의 회사에서 마련해준다고 하니까요. 공연장 근처 호텔이겠죠.”“출퇴근은 어렵겠죠?”“네?”하리에게 주었던 시선을 옮기며 희원이 고개를 들자 지환은 손사래를 쳤다. 

쓸데없는 말을 뱉고 말았다.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인데, 쓸데없이 괜한 참견을.

“저도 출퇴근하고 싶은데, 너무 멀어요. 하리 때문에 그러시죠?”아니! 그게 아니고!

“저도 좀 걱정이에요. 하리 봐주기로 했는데, 공연을 가야 하다니.”하리가 문제는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이 문제요! 문제!

“하리는 걱정 마요. 하루쯤 아버지가 봐주셔도 괜찮은 일이니까.”“하리는 하부지 보고 싶어여. 하부지.”아이는 고새 자기 이야기를 하는걸 알고 쫑알쫑알 껴든다. 

순간순간 아이가 귀여워, 무방비 상태로 심장폭행을 당한다. 

지금 죽으면 사인은 심쿵사다. 

“하리는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할아버지도 하리가 보고 싶대.”“하부지 좋아여. 하부지는 하리랑 잘 놀아줘여.”아아…… 이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멍청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는 어찌나 영롱한지 옥구슬 굴러간다는 말이 무언지 알 것 같다.

“자자, 과일 다 먹었으면 치카치카 하고 일찍 자야지?”……드디어 심판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지환이 자러 가자고 말하자 희원은 잔뜩 긴장했다.

또 서지환 씨와 뽀뽀를 해야겠지. 아아, 왜 이렇게 떨려? 

“그런데 있잖아여.”어른들을 쥐었다 폈다 하는 하리의 음성.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하리를 응시했다. 

무척이나 천진한 눈빛으로, 하리는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요,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해여.”아…… 형……

제발 좀…….

“삼쵼이랑 숭모는 왜 안 해여? 사랑한다고 왜 안 해여?”“아…….”“아…….”또다시 어제와 같은 진한 탄식이 흐른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여도, 관찰력이 뛰어났다. 

“사랑한다고 해야 해여. 사랑한다는 말은 쑥쑥 자라서 더 커진다고 했어여.”“형님하고 아주버님…… 정말 금슬 좋으시네요.”희원이 웅얼웅얼 말하자 지환은 슬쩍 눈을 감았다. 

형이 이 정도로 애처가인 줄은 몰랐다. 

뭐, 집에서 부부끼리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

종갓집 장남으로 자라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근엄한 면이 있어 상상도 못 했다. 

가족 모임엔 어른들이 계시니 티를 내지 않아 더더욱.

“사랑한다고 해야 해여. 사랑한다는 말은 천사의 말이에여.”“맞아. 하리가 똑똑하네.”지환이 긍정하며 답하자 하리는 뿌듯하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래서 아이 앞에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모양이다. 

모르는 것 같아도 생각하고 있었고, 아는 사실과 다른 것들을 이상하게 여겨 더욱 관찰했다.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

“희원 씨.”“아, 네. 지환 씨.”뽀뽀 타임보다 더 긴장된다. 

희원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포크를 더욱 세게 쥐었다. 

얼마나 제대로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하리가 집중하는 표정을 짓는다. 

지환은 힐끔 하리를 바라보고 크게 심호흡했다. 

이어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원을 만들며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차마 제대로 된 하트를 그리기가 민망하다. 

“스릉흡니다.”“…….”말끝에 하리를 바라보니 표정이 좋지 않다. 

이어 그렇게 팔을 하는 게 아니라는 듯, 하리는 손수 시범을 보이며 팔을 들어 예쁜 하트를 만들었다. 

지환은 삐걱삐걱 팔을 움직이며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이 순간 바닥으로 꺼져 내리고 싶은 희원은 민망함에 발가락까지 힘을 주었다. 

“사랑합니다.”범죄자에게 체포 전 고지를 하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는, 말과 입이 따로 논다. 

영혼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강제적 고백에 희원은 응당 화답을 해야 했다. 

깐깐한 하리 선생님의 부부 훈육 시간. 

아이의 시선이 희원에게 닿는다. 

희원은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환은 그녀가 쥐고 있는 포크를 바라보았다. 

흉기로 쓸 생각 아니면 내려놔요. 

지환이 눈짓을 보내자 희원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희원은 지환의 행동을 따라 팔 위로 손을 들었다.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그녀 역시 입만 웃었다. 

“사랑합니다아.”“헤헤.”만족스러운지 하리가 웃는다. 

사랑합니다. 말끝에 찌르르 진동이 인다. 

그 놀라운 감정에 희원은 깜짝 놀라 지환을 바라보았다. 

단어가 가진 힘은 무엇이기에 가슴이 더욱 거세게 뛰어오르는 걸까.

“이제 쑥쑥 자라여. 사랑하는 마음이 쑥쑥 자라서 예쁘고 커다란 나무가 대여.”……사랑합니다.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아 한동안 머리 위로 올린 팔을 내려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딱딱했던 눈빛은, 낯선 단어와 함께 조금씩 누그러졌다. 

“뽀뽀는 왜 안 해여? 우리 아빠 엄마는여, 이렇게 말하고 뽀뽀해여. 코오오 자야 하니까여.”“아…….”“아…….”하리 선생님의 부부 훈육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공연 당일.

리허설을 앞두고 공연장에 들어선 희원은 동선 체크를 했다. 

본디 게스트란 공연 주인공보다 화려하지 않아야 했고, 압도적이지 않아야 했다. 

공연 주인공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의 여백을 채우는 정도로만 쓰임을 다 해야 했다. 

희원은 적당한 작품을 골랐고 무대 감독과 상의를 했다. 

아무래도 갑자기 정해진 까닭에 사전 협의를 할 게 많았다.

“두 분 원래 같이 공연도 하셨잖아요.”“네. 그렇죠.”감독이 다소 아쉬운지 골똘히 생각한다. 

희원을 게스트로 모셔 단발성 공연으로 끝내기가 다소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럼 제가 유구언 씨하고 얘기를 해볼 테니까 희원 씨, 공연 작품 하나 해주실 수 있을까요?”“……제가요? 그럼 두 개를 하라는 말씀이세요?”“아아, 좀 무리한 부탁이긴 한데, 아무래도 볼거리가 더 풍성하면 소문도 좋게 나는 법이니까요.”희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 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 공연자하고 협의해주세요. 유구언 씨가 된다면 저야 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네. 알겠습니다.”이래저래 동선 체크를 마친 희원은 대기실로 들어섰다. 

전달을 받은 구언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괜찮아?”“상관없어. 몸이 닳는 것도 아니고.”희원이 편안하게 웃자 영 미안한지 구언은 미간을 좁혔다. 

……딱히 할 말이 사라진 자리.

“아. 너 숙소 배정받았지?”“응. 받았어. 근처더라. 난 712호던데 넌 몇 호야?”“난 713호. 스태프들은 4층이고 너랑 나만 7층이더라.”“……아? 옆방이네?”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구언은 도착해서 알았다며 웃어넘겼다. 

그렇게 잡아달라고 사전에 부탁했으면서. 모르는 척.

“밤에 심심하면 맥주나 한잔하자.”“공연 앞두고 무슨 술이야…… 는 헛소리고, 한 잔은 괜찮겠지?”희원이 좋다며 시원하게 웃는다. 구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뛰는 가슴을 모르는 척했다. 

우린 언제나, 이렇게 잘 지냈는데.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마주 보며 웃었는데.

“아, 전화 온다. 잠깐만.”여보세요? 희원이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구언은 무대 준비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거울로 비치는 희원을 바라보니 웃고 있다. 

“저는 지금 막 리허설 끝내고 왔죠.”……그 사람의, 전화인 것 같았다. 

“아아. 정말? 오늘은 그럼 본가 가서 자려고요? 하리랑 같이?”하리? 누구지?

구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지환의 목소리가 들릴 듯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유추하기를, 그녀가 집에 없으니 지환은 부모님의 댁으로 간다는 것 같았다. 

“네. 숙소 정해졌어요. 좋은 곳으로 잡아줬더라고요.”아내의 잠자리가 걱정인 모양이다. 

구언은 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감췄다. 

ㅡ좋은 곳이라니 다행이네요. 함께 일하는 분들과 같은 층입니까?“어…… 아뇨. 듣기로는 스태프들은 4층?”맞지, 구언아? 4층? 희원이 통화 도중 묻자 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후, 저 바보 권희원.

대충 둘러대면 될 것을 저렇게 자세하게도 이실직고하네.

“4층이래요.”ㅡ유구언 씨 옆에 있습니까?“네. 이제 메이크업 들어가요.”ㅡ유구언 씨도 그럼 4층?“어…… 아뇨. 7층이요.”희원이 뭘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구언은 마른 주먹을 쥐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ㅡ권희원 씨는 몇 층입니까?“저……도 7층이요.”잠시 묵음이다. 

지환의 반응이 궁금한 구언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붓질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서지환의 질투심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묘한 성취감이 들기도 했고, 어쩐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구언은 침착해지기로 한다. 같은 방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층이 같을 뿐인데 뭐. 

ㅡ밥은, 먹었습니까?“아직요. 작은 컵라면이나 하나 먹고 싶은데 아쉽게도 김밥이네요. 이제 조금 먹어야죠.”마음은 불편하고, 편안했다. 상반된 온도의 감정이 구언을 침착하지 못하게 했다. 

몸과 따로 노는 마음.

너는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불행했으면 좋겠다. 

그녀의 결혼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도 하루에 수백, 수천 번씩 변하고 굳어지며 구언을 괴롭혔다.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한다. 인정해야만 한다. 

ㅡ그래요. 공연 잘하고.“네. 서지환 씨.”사실은 구언, 스스로도 스스로가 뭘 어쩌고 싶어하는 건지 잘 몰랐다. 

그녀의 통화는 싱겁게 종료가 된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지 희원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야, 거기다 놓지 말고 나한테 맡겨. 공연 들어가면서 무슨 휴대폰.”“그래, 여기 있어. 보관해줘.”구언은 희원의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따로 매니저가 없는 희원을 대신해 구언은 자신의 매니저에게 귀중품이 합쳐진 가방을 맡겼다. 

대기실에서 귀중품 분실 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녀의 귀중품은 안전하게 보관해야지. 

“그럼 보관해주는 김에 이것도 보관해주라.”희원은 결혼반지를 빼서 건넸다. 

한참 바라보던 구언은 손바닥을 펼쳐 받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매니저에게 건네줬다. 

“잘 보관해. 희원이 결혼반지니까.”“네, 형.”첫 번째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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