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전투력이 무한 상승
희원과 통화를 마친 지환의 사무실.
업무 관련 이야기로 잠시 정윤이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금괴 밀수 금액 중 일정 부분은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어. 가상화폐 투기조장 혐의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겠고.”
어…… 아뇨. 7층이요.
“공두철의 자백은 사실이 아니라기보다,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에 수사 방향을 조금 더 확…….”
저……도 7층이요.
“야, 서검. 내 말 듣고 있어? 얘가 요즘 따라 이상하네.”“정신이 팔려서 그런다.”“뭐?”“아냐. 아무것도.”그래도 니 얘기 다 듣고 있었어.
지환은 중얼거리며 미간이 다소 일그러진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쾌함이 묻어나는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정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환은 손목시계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열었다.
“공두철의 뒤를 봐주는 세가 생각보다 커. 연이 안 닿는 곳이 없어. 검찰 쪽 수사보다 더 빨리 정보를 수집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싶기도 한데.”녀석은 또다시 사무적인 얼굴로 돌아왔다.
정윤은 갑자기 분주해진 지환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만년필 뚜껑을 닫더니, 서랍을 잠근다.
“그 많은 돈이 도박 사이트와 가상화폐로만 흘러들어갔다는 것도 말이 안 돼. 주변 인물 관계도 다시 한 번 파악해야겠어.”“그건 그렇고 지금 뭐 해? 어디 나가려고?”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슈트 재킷을 입는다.
정윤은 녀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이상하다는 듯 궁금증 많은 눈빛을 했다.
지환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차검.”“응? 왜?”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정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지환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여자가 네 남자를 좋아해. 주변에서 자꾸 맴돌아. 너라면 어떡할래?”“뭘 어떡해. 난 내 남자 없는데? 없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생겨?”“……됐다. 못 들은 걸로 해.”“하지만 뭐,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내 남자는 끄떡도 안 할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내 사람의 마음 아닐까?”내 사람의, 마음.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정윤은 그런 지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턱 끝을 조금 더 들어올렸다.
지환이 세상 가장 꼴 보기 싫어하는 정윤, 특유의 오만한 표정이다.
“그리고 세상 어떤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말이 돼?”“……간다.”간다. 말 붙이지 마.
지환은 정윤이 풍겨내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지환은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다가 멈칫, 하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중요한 건 내 사람의 마음 아닐까?
이리 힐끔, 저리 힐끔.
세상 어떤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말이 돼?
“뭐, 하긴. 나 같은 남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어떻게…….”지 얼굴에 심취한 듯 이리저리 얼굴을 들여다보던 지환은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열 받는다는 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차는 출발했다.
“할 수도 있어. 할 수도 있지.”할 수도 있다! 그 다른 생각을!
제길. 아무리 정신승리를 해보려고 해도 소용없다.
내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건 나발이건 내 사람의 마음 하나 모르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내 사람.
그러고 보니 ‘내 사람’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다.
지환은 현재의 상황에 스스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뭐, 권희원 씨가 어떻게 될까 봐 가는 게 아니라, 유구무언이 싫어서 가는 거니까.”출발의 당위성을 만들며. 이렇게 열 일 제치고 달려가는 이유를 억지로 만들며.
유부녀를 사랑하는 유구무언의 더러운 속내가 불쾌하다는, 오로지 그 하나만의 이유를 곱씹으며.
“그래. 나는 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런 유구무언의 무례함이 싫은 것뿐이니까.”그래. 누구라도 이렇듯, 달려갈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건 내 아내를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고, 단지 사람 대 사람으로,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한 일침일 뿐이니까.
지금의 유구무언은 나를 도발하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생각 하나.
그래서 어쩐지 불안함이 잠식하는. 그 모든 이유를 뛰어넘어 가장 선두에 위치한.
어쩐지 호탕하게 넘겨지지가 않는, 그런 생각 하나.
“여기서 얼마나 걸리나…… 막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유구무언은 매력적이었다.
“사모님, 양 비서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들어와요.”뻐근한 두통에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누르던 희주는 찾아온 비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좁혀진 미간을 바라보자니 두통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여기, 사모님께서 요청하신 자료입니다.”비서는 공손한 손길로 서류봉투를 내렸다.
그녀가 집 안에서 따로 부리는 비서는 조곤조곤한 말씨를 가진, 수행 능력이 좋은 비서였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는 상징적 마크였다.
“하…… 머리야…….”희주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봉투를 열었다.
가슴의 통증도 조금 느껴지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이어졌다.
비서는 그런 희주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모님,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심이 어떨지요?”“병원? 무슨?”“며칠째 가슴이 답답하다 하시고 두통을 호소하시는 게, 염려가 돼서…….”“됐으니 불면증 약이나 좀 구해 와요.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으니까.”“체계적인 신경과 검진을 받아보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큰일이…….”“백인호 의원 사모가 신경정신과나 드나든다는 소문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희주가 눈을 쨍하니 날카롭게 뜨자 비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딴에는 위한다고 하는 말이지만, 돌아오는 반응이란 이렇듯 짜증이 담긴 시선일 뿐이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하라는 것만 해요. 하라는 것만. 수면제 처방이나 좀 받아오고.”“네. 사모님.”“나가 봐요.”“네. 알겠습니다.”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희주는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꺼내든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날, 백화점에서 정윤을 마주쳤던 날.
지환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마도 추측하기를 백화점 인근 어딘가에서 그의 결혼식이 있었으리라.
희주가 비서를 통해 받아든 서류는 다름 아닌 인근 결혼식장 및 호텔의 결혼식 정보다.
“……찾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손쉽게 지환의 이름을 발견했다.
“권희원, 권희원…….”지환의 이름 옆에 적힌 희원의 이름을 바라보며, 희주는 중얼거렸다.
몇 날 며칠을 참아 봐도 내려가지 않는 궁금증.
결국 희주는 지환의 결혼 상대에 대해 알아내기로 했다.
그녀는 어떤 여자인가.
그는 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는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희주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양 비서, 다시 들어와요.”ㅡ네. 사모님.다시 들어선 비서를 향해 그녀는 희원의 이름이 담긴 종이를 넘겨주었다.
“내가 아는 언니인가 싶어서 말인데, 확신이 서질 않아서. 이 여자 좀 알아봐요.” “권희원 씨, 맞으십니까?”“그래요. 권희원. 그 여자가 내가 아는 언니인 것 같으니까. 좋아했던 언니인데, 연락이 안 돼서. 동명이인인지 알고 싶어요.”“네. 알겠습니다, 사모님.”“사사로운 일이니까 괜히 의원님께는 알리지 말고. 알겠어요?”“네. 알겠습니다. 사모님.”희원의 이름 석 자가 담긴 종이는 양 비서의 손에 넘어갔고, 희주는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그의 사랑을 앗아갔을까.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다.
비록 주제에 허락된 궁금증은, 아니라고 해도.
어둠이 내린 무대.
구언이 사라진 자리로 희원이 등장했다.
오늘 총 2회 공연 중 저녁 공연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는 때였고 희원은 시작하는 음악과 동시에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조명이 켜지며 그녀를 밝혔다.
빼곡하게 차 있는 관중석이 스치는 그녀 눈가에 담긴다.
부채 하나를 손에 쥐고 조금씩 운을 떼듯 발을 내딛는 그녀를 사이에 두고, 대취타 소리가 청월하게 퍼진다.
홀로 이 드넓은 공간을 메우기엔 한국무용이란 것이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 혼자 감당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곡조가 중허리쯤 지나간다.
구언은 대단한 현대 무용수였다.
과감한 도전을 사랑했고 실패를 경험이라 여기는 담대함도 지녔다.
평소 성격답게 그의 안무와 음악은 시원시원했고, 힘이 넘쳤다.
그런 구언의 무대 뒤로 펼쳐지는 한국 고유의 무용, 고유의 음악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곧 이어질 구언과의 합동 공연은 이러한 두 가지의 작품이 만나 전혀 다른 장르가 된다.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희원은 전통 무용을 선택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부채를 펼쳤다.
정갈하다기보다 침작하고 웅대한 곡조는 그녀를 둘러싼 채 처량하게 퍼져 흘렀다.
각이 진 곡조 사이사이를, 그녀는 부드럽게 채웠다.
발끝으로 하여금 고운 선을 만들고ㅡ
손끝으로 하여금 감정의 선을 담았다.
현대무용, 유구언의 작품을 감상하러 온 관객들은 느닷없이 마주한 희원의 게스트 공연에 만취하듯 빠지고 말았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아닌, 마음을 하염없이 길게 늘어트리는 여백의 공간에 매료당한 것이다.
간혹은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고취되는 가락, 끝장을 디딘 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우아한 몸짓, 따라오는 구슬픔, 절제된 표현.
……모두는 내제된 깊은 한(恨)을 보았고, 느꼈고, 공기 중에 만졌다.
저절로 맞잡은 두 손을 가슴께에 올린 채 관객들은 희원의 손끝에 울고 발끝에 숨을 내쉬었다.
가히 으뜸이라 칭할 만한 무용수 권희원이 평생을 보고 배워온 것.
무용수 권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
한국 무용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특별하게 마련된 구언과 희원의 공연이 시작되고,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운 순간순간을 지나 절정에 다다랐던 몸짓과 사위는 어느덧 멈췄다.
혼을 쏙 빼어놓는 움직임을 끝나자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극에서 빠져나오니 이제야 가득 찬 관객들이 보이고, 쏟아지는 갈채가 들린다.
후, 후……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가득 안고 있던 팔을 내리며, 구언은 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하듯 그녀의 손을 받힌 구언은 조금 앞으로 걸어나갔다.
조금 전 단독 공연을 할 때보다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진 희원은 사뿐사뿐 중심, 좌, 우로 걸음을 옮기며 관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메인 공연을 잡아먹을 것 같은 전례 없는 합동 공연.
관객들은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또 이러한 눈 호강을 언제 해보겠는가.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을 동시에 즐기는, 특히나 한국무용엔 문외한이었던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실로 대단한 공연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무용수, 권희원 씨입니다.”스태프가 달려와 건네준 마이크를 잡으며 구언이 희원을 소개하자 박수 소리가 더욱 커진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용수 권희원입니다.”사전에 맞춘 대로 희원은 인사를 했고, 구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와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좌우 전광판에 잡힌다.
구언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 곁으로 당기며 마이크를 통해 입을 열었다.
“권희원 씨와 합동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권희원 씨가 요즘 현대무용까지 섭렵하며, 저를 위협하고 있죠.”객석에 웃음이 터진다.
희원은 장난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이 또한 계산된 연출, 계산된 멘트다.
“사실 권희원 씨를 게스트로 모신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빛나는 우정으로 여기까지 함께 찾아와 공연을 빛내준 권희원 씨께 다시 한 번 박수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유구언 씨의 남은 무대도 흡족하실 거예요. 앞으로도 무용수 유구언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모두 끝이 난다.
계산된 모든 말과 인사를 마친 희원은 마이크를 내리며 관객들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문득, 구언이 느닷없는 말을 꺼낸다.
“저는 권희원 씨를 사랑합니다.”예정에 없던 멘트.
희원은 흔들던 손을 멈췄다. 삽시간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너.
희원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되레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할 말을 다 했다는 덤덤함으로.
관중석이 술렁인다. 구언은 다시금 말을 곱씹듯 내뱉었다.
“권희원 씨를 사랑합니다. 오래되었죠. 무척 말입니다.”놀라 굳은 그녀는 관객도 무대도 모두 지워진 공간 속 구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에 엮인 장내는, 고요해졌다.
사랑합니다.
그의 고백은 느닷없었고, 때와 맞지 않아 서걱거렸다.
이런 말들, 합을 맞춰 본 적 당연히 없기에 희원은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놀란 눈빛을 했다.
한참이나 시간을 밀어내듯 흘려보내던 구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무용수 권희원을 말입니다.”그렇게 놀랄 것 없다는 것처럼.
부러 긴장감을 만들어냈다는 것처럼.
“무용수 권희원 씨는 제게 뮤즈입니다.”아아…… 하하하!
그제야 관객석에서 속았다는 웃음과 놀랐다는 웃음이 함께 터져 흐른다.
아마도 노련한 구언의 밀고 당기는 연출력이었다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훑었다.
구언은 그녀를 섬세하게 다시 소개하듯 말을 이었다.
대목 대목, 그가 얼마나 그녀라는 무용수를 존중하고 있는지 여겨졌다.
“무용수 유구언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영감을 주고, 또 많은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죠.”관객들의 시선에 따뜻함이 서려진다.
약간 당황한 희원은 자신의 얼굴이 크게 잡히는 것을 느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아, 뭐야. 긴장했잖아. 이런 건 사전에 얘기를 해야지, 이 멍청아!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단 생각이 이제야 밀려든 희원은 부러 크게 웃었다.
이 또한 연출인 것처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마음은 한없이 불편해져갔다.
“또한 권희원 씨는 인간 유구언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구언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언뜻 듣기로는 친한 동료들 사이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도 같고, 내막을 알고 들여다보면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친하다는 말이죠. 저는 권희원 무용수와 개인적으로 친합니다. 평소에는 원이라고 불러요. 지금은 공적인 자리라 풀네임을 부르지만요.”쥐었던 고삐를 느슨하게 푼다.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희원 씨, 저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권희원 씨도 저를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원아, 맞아? 맞지?”“아아, 물론이죠. 제게도 무용수 유구언은 무척이나 귀감이 되는 동료니까요.”그녀는 지금 말 한마디 한마디 진땀이 난다.
관객들은 희원의 마음도 모르고 둘 사이가 보기 좋다는 듯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토록 함께 있어 든든한 동료라니.
오가는 말들이 듣기 좋은 모양이다.
희원은 구언의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구언은 먼 거리를 응시하듯 거리감 있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권희원 씨, 그럼 제게 영원한 뮤즈로 남아주시겠습니까?”“아…… 물론이죠.”희원이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화답하자 관중 사이에서 다시금 박수가 터진다.
그가 내민 손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녀가 잡자, 구언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여러분, 들으셨죠?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 훗날 증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이렇게까지 시답잖은 농담을 이어가며 무용수 권희원의 퇴장을 늦추는 이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이어 붙이며 그녀의 마음을 찔끔찔끔 긴장하게 만드는 이유.
언제나 그녀를 배려하던 모습을 사라지고, 마치 심술 난 사람처럼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욱 삐뚤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도 주지 않은 상처를 홀로 입은 채, 나아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여 구언은 지금 자신의 공연의 흐름을 깨트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질투에 눈이 멀었는데 타인의 감정까지 귀히 여길 여유란 남아 있지 않았다.
……구언은 보았다.
“당신은 제 영원한 뮤즈입니다. 제가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도록 좋은 무용수로 남아주세요, 권희원 씨.”관중석엔, 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