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해석이 필요한 마음
“아이고, 잘 먹는다.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잘 먹는다.”하리야, 한입 더 먹어볼까?
“자, 아ㅡ 아 해, 아ㅡ 옳지 착하다!”“아아ㅡ.”지환의 할아버지 ㅡ 서 선생은 평소보다 일찍 슈퍼 문을 닫고 귀가했다.
꼬물꼬물한 증손녀 하리가 집에 왔다니 일이 통 손에 잡히질 않는 것이다.
하리를 옆에 앉혀두고 서 선생은 소화가 잘 된다는 누룽지를 끓여 먹이는 중이다.
시골 어드메 ㅡ 종가 집성촌에서 가마솥에 정성껏 눌러 만든 누룽지이니, 아이에게도 좋으리라.
“근데여 왕 하부지, 하리는 혼자 먹을 수 있어여.”“그래? 하리가 혼자 먹을 수 있어?”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손으로 먹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구나. 하리가 혼자 잘 먹는구나. 그래도 오늘은 왕 할아버지가 먹여주면 안 될까?”아이가 혼자 밥 먹는 일에 능숙한 편인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먹여주고 싶은 증조할아버지 마음.
“그러면 왕 하부지, 누눙지 많이 많이 주세여. 누눙지 많이 많이.”“어이쿠, 요 작은 입으로 얼마나 많이 먹으려고? 조금씩 천천히 먹어야지?”“많이 주세여. 하리는 누눙지 많이 먹을 수 있어여.”부드럽게 끓인 누룽지가 제법 아이 입맛에 괜찮은 모양이다.
숟가락에 적당히 누룽지를 퍼서 올려주니 아이는 괴상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아아ㅡ 하고 크게 입을 벌린다.
허허허, 누룽지 한 수저에 서 선생의 얼굴 위로 웃음꽃이 피고.
허허허, 꿀꺽하고 아이가 누룽지를 삼키면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하리야. 숙모네 집에 있어서 좋았겠구나?”“네에. 하리는 숭모 좋아여. 숭모는 예쁘고 음, 예뻐여.”“네 엄마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숙모가 그래 좋으냐?”“헤헤. 다 좋아여. 왕 하부지, 그냥 하부지, 삼쵼, 숭모, 아빠 엄마, 다 좋아여.”“아이고, 이쁜 것. 아이고 이쁜 것.”어디서 이런 게 나타났을까?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것이 태어나 늘그막에 기쁨을 주는 것인지?
서 선생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가의 장남이었던 서 선생도 결혼 후 아들을 낳아 대를 잇게 했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으니 지환의 형, 지석이다.
그리고 지금, 대를 이을 아들 대신 예쁜 하리가 세상에 태어나주었다.
서 선생은 많은 것이 맞물린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찌되었든 대를 이어야 하는 종가의 숙명이란, 태어난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종손이 문중의 일을 관장하는 일은 대를 거쳐 오며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인식 개선이 되긴 했으나 그렇다 해서 대가 끊기는 것까지 받아들일 만큼, 종가란 관대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서 선생의 근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하리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차선으로 지환이 대신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리라.
“그러나 그것 또한 하늘의 뜻이고 부름이지, 사람이 어찌 개입할까.”“응? 개미?”“아니다. 하리야, 더 먹을까?”“이짜나여. 왕 하부지, 하리가여. 숭모랑 삼츈한테 사랑해여 사랑해여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알려줬어여.”“응? 그게 뭐냐?”“이케여. 왕 하부지도 천사의 말을 해야 해여. 사랑해여, 사랑해여어어.”하리가 밥을 먹다 말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해요를 외친다.
“삼촌하고 숙모한테 사랑해요, 시켰다고? 하리가?”“녜에. 뽀뽀도 매일매일 해야 하는 거라고 하리가 알려줬어여.”“허허허허허허허! 우리 하리가 아주 큰 일 하는구나. 큰 일 했어! 잘했다, 하리야!”서 선생은 하리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증조 할아버지가 칭찬을 하니 하리의 어깨가 으쓱한다.
“하리야. 숙모 집에 있는 동안 하리가 숙모랑 삼촌에게 교육을 단단히 해 주거라. 알겠지?”“헤헤. 네에. 네에.”“그래그래. 삼촌이랑 숙모가 더 많이 표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리가 도와줘요. 알겠지요?”“네에. 네에.”하리의 마음에 왠지 모를 사명감이 생겨났다.
“아까 일, 뭐야. 설명해봐.”“일? 무슨 일?”공연은 순조롭게 막을 내렸다.
대기실에서 구언을 기다린 희원은 구언이 들어서자마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스태프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든 구언은 얼굴을 닦으며 잠시 그녀 말을 기다렸다.
희원이,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런 멘트는 예정에 없었잖아. 사전 통보도 안 해주고 그렇게 멋대로 진행하면 돼? 게스트 입장 고려 안 해?”“너 퇴장 시간이 예정보다 좀 빨랐어. 시간 맞추려고 그런 거야.”“아니. 딱 맞췄어. 그리고, 시간이 조금 떴다 해도 그런 막무가내식 진행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냐?”“뭐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대신 분위기 좋았잖아.” “너만 좋았지. 관객은 모르겠고. 난 아니었고.”“화났어?”“보면 몰라?”수건을 내리며 구언은 희원의 화난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단순히 시간을 끌었다고 해서, 예정에 없던 멘트들로 당황하게 했다 해서, 화가 난 건 아는 듯싶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야. 생각을 조금 더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갑자기 뮤즈니 사랑한다니,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넌 어떨지 몰라도 게스트는 당황…….”“쉽게 한 거, 아닌데.”“쉬웠어. 너.”“아닌데. 쉬웠던 건, 아닌데.”희원은 다시금 예고 없이 마주한 구언의 발언에 멈칫했다.
지금 녀석의 분위기는, 위험했다.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자. 내일 공연엔 돌발 상황 없었으면 좋겠어. 그걸로 마무리 짓자.”“쉽게 말한 거 아니야. 희원아.”“됐다니까? 이야기 접자니까?”녀석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희원은 급히 상황을 종료하려 했다.
그는 동료였고, 싫건 좋건 남은 공연들을 함께해야 하는.
……관계를 끌어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랑 얘기 좀 하자, 희원아.”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미안, 나 피곤해. 오늘은 나 먼저 들어갈게. 너한테 내일 공연에 실수 말라는 얘기하려고 기다린 거야.”“희원아.”“…….”문을 나서려는데, 그가 나직하게 부른다.
차마 말을 끊을 악독함이 생겨나질 않아, 희원은 멈춰 섰다.
녀석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언제나 그랬듯 산처럼 쌓인 하고 싶은 말들 앞에 고개를 떨구더니.
“미안하다. 내가 너를 난처하게 해서.”결국은 불리한 우정 앞에 속내를 포장하고 말았다.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미안해.”“……그만 사과해.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나 갈게.”희원은 대기실 문을 열고 나섰다.
누가 붙잡을까 봐 급한 걸음을 옮기던 희원은 대기실과 한참이나 멀어지고 나서야 자리에 우뚝 섰다.
“바보같이…… 남은 공연은 다 어쩌려고…….”그녀는 구언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 받아줄 자신이 없으니 아는 척을 할 수 없었을 뿐.
“하…… 유구언 진짜, 에휴. 모르겠다 나도.”아는 척을 먼저 해봐야 좋을 일이 없다.
엇갈린 마음을 확인하고 나면 남은 공연이 버거워질 것이란 게 자명했으니까.
그도 그런 이유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모든 나날, 고백을 삼켰으리라.
공연에 지장을 줄까 봐. 그러다가 어그러질까 봐.
희원은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구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려 지키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함께 지켜야 했다.
마치 버거운 숙제처럼 남아버린 구언과의 시간들.
둘 사이엔 남은 공연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익숙한 차량과 보닛에 기대고 있는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희원은 빠르게 걷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어?”“다 끝났습니까?”“지환 씨!”“타요. 목적지까지 데려다줄게요.”……지환이 서 있는 풍경.
지금껏 불어들었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한 장의 그림이었다.
지환의 차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이동하는 길.
희원은 힐끗, 지환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그는 왜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음성,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호텔이 가깝네요.”“아, 네. 가까운 곳에 잡았다고 하더라고요.”“김밥은 잘 먹었습니까?”“네. 공연 전이라 조금밖에 못 먹었어요. 컵라면 국물 한 입이 얼마나 그립던지.”공연을 봤느냐, 언제 왔느냐, 어쩐지 쉽게 물을 수가 없어 희원은 말을 삼켰다.
쉽게 말을 이을 수 없는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저 차량, 유구언 씨 차량 아닙니까?”“어디요? 아, 네. 맞네요.”비슷한 시간에 호텔로 진입한 차량을 가리키며 지환이 구언의 차량을 알아본다.
이윽고 주차에 나선 지환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입술을 열었다.
“저게 구언의 차라는 건 어떻게 알아봤어요?”“뭐, 이차저차.”짤막하게 끊기는 대화. 희원은 그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구언과 지환, 희원은 거의 동시에 차에서 내렸고 셋은 서로의 등장을 바라보았다.
점점 더 가라앉는 분위기. 구언이 바라보자 지환은 희원의 손을 잡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내일 집으로 올라갈 거니까 내일 봐…….”“저 오늘 서울 안 갑니다.”“……네?”그가 붙잡고 있는 손에서 열이 난다.
희원은 서울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손끝에서 흘러오는 가라앉은 그의 기류는, 팔을 타고 머리를 거쳐 그녀 마음으로 내려왔다.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갑니다. 권희원 씨.”뜨거웠다.
체크인을 마친 세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층을 나눠 누를 수고도 없이, 나란히 7층이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기운을 풍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 사람은 7층 복도를 따라 걷다가 각자의 호수에 맞춰 섰다.
갈라진 문. 그리고 둘과 하나로 쪼개진 공간.
“자고 갑니까?”구언이 문을 열기 전에 지환을 향해 처음으로 붙인 말이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그나저나 옆방이네요. 지환은 구언을 바라보았다.
구언은 자기도 몰랐다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와서 보니 그렇더군요. 뭐, 공연자들의 숙소를 가깝게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이 호텔 와본 적 있습니까?”“예전에 와본 적 있습니다. 하루 자고 가는 일엔 문제없을 겁니다.”구언이 마지못해 설명하자 흠, 그렇군요.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호텔, 방음은 잘됩니까?”“그건 잘 모르겠…….”뜻 없이 대꾸하던 구언은 말꼬리를 흐리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철컥, 카드를 문에 가져다대며 먼저 객실 문을 연 지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희원의 어깨를 감쌌다.
“다른 건 모르겠고 방음이 잘됐으면 좋겠군요. 보다시피 신혼이라.”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지환은 희원의 어깨를 감싼 채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쿵, 문이 닫힌다.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선 구언은 한참이나 자신의 객실 문을 열지 못한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부부, 신혼, 당연한 일들을 앞에 두고도 좀처럼 마음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 후, 구언은 거친 손길로 자신의 객실 문을 열었다.
“방 좋네요. 깔끔하고.”객실 안으로 들어선 지환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희원은 민망하다는 듯 서 있다가 다시 물었다.
“진짜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안 됩니까?”“아뇨, 안 되는 게 아니라…… 하리는요?”“본가에 안전하게 잘 있습니다. 걱정 마요.”그가 자연스럽게 재킷을 벗는다. 희원은 우뚝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덩그러니 위치한 침대. 두 개의 베개.
슬그머니 화장실로 눈을 돌려보자 샤워공간은 따로 분리가 되어 있고, 반투명 유리만 있을 뿐 사실상 실루엣이 다 비친다.
희원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서지환 씨를 두고 저기서 씻으라고?
“저기요, 서지환 씨.”저쯤 서서, 지환이 넥타이를 풀러 내린다.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저기…… 우리가 한 방에서 자는 건 좀…….”여기까지 말하며 희원이 머뭇거리자 지환은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 민망해하는 그녀 얼굴을 보다가 그는 입술을 열었다.
“정당한 요구를 하면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네?”“지금 당신 얼굴에 적혀 있잖아, 미안하다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침입자는 나고, 멋대로 하고 있는 것도 나고. 그러니 권희원 씨가 내게 가라고 할 이유는 충분하죠.”아…… 희원은 다시금 머뭇거렸다.
지환은 완벽하게 넥타이를 끌러 내리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
상체를 무릎 쪽으로 기울이며 팔꿈치를 무릎에 받힌 지환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십 분. 십 분만 있다가 내려갈 겁니다. 이 호텔에 있을 거지만 이 방을 쓰진 않을 테니 걱정 마요.”“어…… 방을 따로 잡는다고요?”“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이에.”그는 말했다. 한 방을 쓰는 걸로 알리바이를 성립하니, 잠시 후 객실 추가를 해서 머물겠다고.
희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굳이 그가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곳에서 자고 갈 이유는 없는 거다.
“올라가도 돼요. 상관없어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서지환 씨가 오늘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내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지환은 희원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마음이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그녀 곁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신경 쓰지 마요. 내키는 대로 하는 중이니까.”하여 그는 내키는 대로 하는 중이었고.
“십 분 뒤에 갈게요. 편하게 있어요.”화를 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미치겠다. 그 말뜻은 뭔데? 뭔데 대체?”
신경 쓰지 마요. 내키는 대로 하는 중이니까.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대체 어떻게?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구 어떻게.”지환은 약속대로 십 분 뒤에 사라졌다.
7층엔 객실이 다 차서 다른 층 객실로 들어갔다고, 지환은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겠다며 짤막하게 그녀가 씻는 동안 메시지를 남겼다.
샤워 가운을 입고 터덜터덜 샤워실을 나선 희원은 내내 지환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화장대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오늘,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평소처럼 맥 빠지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긴 뭘 그러고 싶어. 올라가서 편안하게 집에서 자면 좋을 것을 뭐 하러 굳이.”괜히 다른 객실에 그가 있다는 것이 개운하지 않다.
결혼식 당일에도 서로 다른 객실을 사용했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 것이다.
“아, 밥은 먹었나? 그것도 안 물어봤네.”맞다. 전화해봐야겠다.
희원은 부리나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지환에게 연락을 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전화가 온다.
스태프다.
“여보세요?”ㅡ아, 희원 씨. 저 강연이에요.“네네. 무슨 일로?”ㅡ구언 씨 매니저가 희원 씨한테 결혼반지 돌려드려야 한다고 하던데, 제가 받아왔거든요? 지금 드릴게요.“아. 맞다. 네네. 어디로 갈까요?”ㅡ7층에 계세요. 제가 문 앞으로 갈게요. 지금 엘리베이터 타요.여자 스태프는 문 앞으로 오겠다며 통화를 종료했다.
희원은 아직 몸이 덜 마른 관계로 가운을 입고 문을 슬쩍 열었다.
여자 스태프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싶어서 밖을 빼꼼 보니 아직 오지 않았다.
놓으면 자동으로 닫히는 문은 어지간히 무겁다.
“아, 저기 온다.”희원은 스태프를 발견하곤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몸을 뺐다.
여기까지 와주는 수고로움에 한 발이라도 먼저 맞이하고 싶은 거다.
몹쓸 상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ㅡ쿵.
문이 닫힌다.
희원은 다가온 스태프에게 반지를 받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반지는 내일 받아도 되는데. 번거롭게.”“에이, 결혼반지인데요. 저 그리고 이런 거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요.”“오늘 수고 많았어요. 푹 쉬어요.”“네. 희원 씨도 푹 쉬세요.”스태프는 간단명료하게 할 일을 마치고 퇴장했다.
희원은 가만히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다가, 약지에 꼈다.
그래. 너무 남처럼 지환 씨를 대할 필요는 없는 거다.
늦은 밤 간단하게 밥을 먹을 수도 있고, 같은 방에서 자잘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거다.
너무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며 지나치게 경계하는 눈빛은, 앞으로 하지 말아야겠다.
“너무 경계했어.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어서 들어가서 지환 씨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전화를 걸어서, 밥을 먹자고 해야겠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도 불러내야지. 내가 배고프다고 떼를 써볼까?
잠깐 더, 보고 싶은데.
여기까지 와줬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좀 아쉬운데.
“……뭐야.”희원은 아무 생각 없이 문고리를 돌리다가 멈칫, 하며 섰다.
망할 문짝, 망할 문고리는 꽉꽉 잠긴 채 돌아가질 않는다.
“헐, 카드키.”막 샤워를 끝낸 몸뚱이에 가운을 걸쳤으니, 휴대폰도 없는 마당에 카드키가 있을 리가 있겠나.
희원은 당황함에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사색이 되었다.
다시 문손잡이를 힘주어 돌려보지만 끄떡도 하질 않는다.
“아…….”가운 차림으로,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우워우.
“아…… 망했다.”나는 망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