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옅게 찾아오나 봐.
문이 잠겼다.
하하, 내가 이렇게 생각이 없어요. 어쩜 카드키도 없이 그냥 나왔어.
문이 잠겼네. 헷,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아…… 뭐야…….”웃기시네! 뭐가 그럴 수도 있어!
문이 잠겼다! 문이 잠겼어!
철컥철컥, 아무리 손잡이를 붙잡고 돌려봐도 열릴 리가 없는 문 앞에 서서 희원은 눈을 크게 치떴다.
“아…… 이런 객 같은 신발, 크레파스 십팔 색…… 십팔…… 시 십팔 분…….” 이 빌어먹을 시 월…… 십팔 일 같은…….
평소엔 쓰지도 않는 육두문자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희원은 의식의 흐름대로 아는 욕지기를 다 끌어다가 닫힌 객실 문 앞에 바치며 눈을 깜빡거렸다.
얼마나 절망적인지, 이 정도의 충격은 실로 그녀에게 오랜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나왔으니 휴대폰도 없음이요, 가운 속은 휑한 알몸이다.
젖은 머리는 아직 말리지 못해 물기가 번질번질하고ㅡ
“오우, 쉣. 나 진짜 이거 어떡해? 이러고 지금 로비까지 가야 하는 거야?”신발도 객실 전용 슬리퍼다.
완벽한 실내 복장으로 우두커니 복도에 서 있던 희원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구언의 객실 문을 바라보았다.
“잠깐 저기 들어가서 프런트에 전화만 하고 나올까……?”그녀는 꽤나 강렬한 유혹 앞에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아주 잠깐 들어가서 호텔 직원과 통화만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럼 아무 일도 아닌 건데. 아주 쉽고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이윽고 천천히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머리, 간신히 걸친 가운 하나.
이런 복장과 상황으로 구언을 마주한다는 건 무척 위험하게 느껴졌다.
객실 안에 지환이 없다는 사실을 구언에게 또 어떻게 설명하고?
“안 돼, 안 돼…….”흑, 일순 무슨 상상을 했는지 희원은 주섬주섬 앞섶을 더욱 끌어모아 당겼다.
이런 정신 나간 차림으로 로비를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구언의 방으로 들어갈 순 없다.
속옷도 안 입었단 말이야. 씨잉.
“와아, 돌아버리겠네, 진짜. 이러고? 로비까지?”호텔에 버젓한 남편이 머물고 있지만 당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게 다 망할 결혼반지 때문이다.
이런 건 뭐 하러 끼고 다녀서 이런 사달을 맞이했나, 괜한 원망이 결혼반지에 서린다.
“……가만.” 그러고 보니 서지환 씨는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던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나만 끼고 다니는 것 같던데. 끼지 말까 봐.”가지가지 억울해진다.
애꿎은 결혼반지만 내려다보던 희원은 에휴, 긴 한숨을 내쉬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 있다고 닫힌 문이 저절로 열리겠나. 신세 한탄을 하며 서 있을 바엔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희원은 고개를 최대한 푹 숙인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제발 빈 승강기가 도착하길 바라며.
띵동,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희원은 시선만 슬쩍 들어 안을 바라보았다.
“느그 즌쯔 므츠긋드…….”내가 진짜 미치겠다…….
희원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더욱 고개를 수그렸다.
간신히 그녀 한 명 올라탈 수 있는 공간만 남겨둔 채, 승강기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리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걸.
아까보다 더욱 신랄한 욕지기가 마음의 소리로 가득 찼다.
너무너무 쪽팔려서, 발가락까지 오그라들고 말았다.
호텔 로비 좌측에선 투숙객들을 위한 팝가수의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았나 했더니, 공연을 보러 가는 모양이다.
꽤 많은 숫자의 소파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간단한 음식과 샴페인을 곁들인 채, 투숙객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시작된 공연을 맞이했다.
우르르르 내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희원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걸음을 옮겼다.
“오빠, 저 여자 좀 봐. 왜 저러고 나왔을까?”“글쎄. 본인 마음이겠지.”내 마음 아니야……
내 마음 아니라고…….
“보아하니 객실 문이 잠긴 모양이네.”“어머, 그럼 객실에 혼자 있나 봐. 혼자 왔나?”그리고 내 얘기하지 마……
내가 지금 쪽팔려서 못 들은 척하는 거지…… 사실은 다 들려 이것들아…….
아오. 희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최대한 좁힌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기분엔 모든 사람들이 가운 속을 투시하는 것만 같다.
행여 가운 끈이 끌러지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가운 끈을 꽉 붙잡고 앞섶을 붙들었다.
쪽팔려도 이렇게 쪽팔릴 수가 없고, 누가 자기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싶은 마음에 고개는 더욱 바닥으로 내려갔다.
쿵, 그러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아, 죄송합니다.”흐엉. 바닥만 보고 다니다가 결국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다.
희원이 잽싸게 옆으로 비켜서자 방향이 맞물린다.
어엇, 다시 반대편으로 걸음을 비틀자 다시 타인의 방향과 일치한다.
쭈뼛쭈뼛 앞섶을 붙잡은 채 희원이 우왕좌왕하며 어떻게든 타인을 비켜서려 할 때ㅡ
그녀 어깨 위로 커다란 재킷이 내려온다.
……찰나가 찰나로 쪼개지는 시간.
그 짧은 시간 안에 쏟아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수많은 생각들이 그녀를 덮쳐온다.
운명이란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멈춰 선 사람이 그대라면, 거짓말처럼 내 앞에 그대가 나타난 거라면.
그대와 내가 운명이라는 생각 앞에 가슴이 떨릴지도 모르고,
고개를 들어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 피어날지도 모르고.
위기의 순간이란 그런 거니까.
극적인 만남이란 감정을 증폭시키는 거니까.
어쩌면 당신이, 특별해질지도 모르겠다고.
“뭐야, 왜 이러고 돌아다녀.”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인의 발끝에서부터, 무릎을 지나, 허리, 가슴, 울대.
“무슨 일 있어? 차림이 대체 이게 뭐야.”결국 마주한 얼굴, 눈빛.
그녀는 상상에 매달렸던 두근거림을 모두 멈췄다.
이곳에 당신이 서 있기를 기대했던 막연한 바람을 지웠다.
구언이었다.
“잠도 안 오는데 혼자 뭐 하냐, 이 시간에 공연한다니 노래나 들으려고 내려왔지.”“아아, 그랬구나.”프런트에서 간단하게 문제 해결을 한 희원은 구언과 함께 로비를 걸었다.
“멍청아, 카드키를 챙겼어야지. 그냥 나오면 어쩌냐?”“그러게 말이야. 반지 들고 찾아와준다니 미안해서 내가 순간 아무 생각도 못 했다니까.”칵테일 한잔 주문해놓고 가수의 노래를 듣는데,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가운 차림으로 터덜터덜 로비를 걸어가더라.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희원이었다.
“문이 잠긴 건 그렇다 치고 남편은? 안에 남편 있을 거 아냐.”엘리베이터 앞에 선 구언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희원은 눈을 번쩍 떴다.
“펴, 편의점 갔어. 편의점.”“아아, 편의점. 그냥 룸서비스 시키지, 이 밤에 사람 귀찮게 하냐?”“내가 좀 출출한 것 같다고 했더니 뭐 사러 갔지 뭐야. 라면, 라면이 좀 먹고 싶었어.”우리 그이가 이렇게 자상해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희원이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구언은 별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녀가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라도 그럴 테니까.
“……에효.”운명은 개뿔. 개뿔이나 운명.
구언이 걸쳐준 재킷을 갑옷 삼고 종전보단 힘 있는 걸음으로 걷던 희원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지환이 나타나주길 기대했던, 운명처럼 그가 서 있기를 기다렸던 자신의 마음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타나주기만 한다면 어쩐지 사랑에 빠질 것만 같던 그러한 순간에, 하필이면 구언을 마주하다니.
희원은 어쩐지 구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더 많은 생각을 확장시켰다간 마음이 복잡해질 것만 같았다.
“남편은 내일 올라가냐?”“그러겠지, 몰라.”“응? 몰라?”“아, 아냐. 내일 올라가. 일해야지. 아침에 간댔어.”구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제일 먼저 들었던 마음은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아닌,
난처함을 덜었다는 반가움이 아닌,
그가 아니라는 서운함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다가왔던 감정이라 부정도 할 수 없어, 희원은 당황스러웠다.
서운했다. 서운할 일이 전혀 아닌 상황 앞에서 그런 마음을 느꼈다.
지환과 운명이 아닌 것만 같아서, 그게 서운했었나.
아니면 처한 위기를 모르고 있을 그의 평온함이, 서운했었나.
“모르겠다…….”휴, 희원은 작게 중얼거렸다.
구언이 힐끔 바라보지만 어느덧 녀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지워져갔다.
별것 아닌 일 앞에 운명론까지 튀어나와 그녀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지금.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구언과 희원은 복도에 내렸다.
그래. 운명은 무슨, 그저 비즈니스에 지나지 않는 결혼 관계에 오지랖이다.
희원은 이상한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곤 구언을 바라보았다.
“구언아, 재킷 고마워. 덕분에 덜 창피하게 올라왔어. 객실 앞에 직원분 오신다고 했으니까 넌 먼저들…….”구언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아있지 않고 먼 곳에 있음을 느낀 희원은 말꼬리를 흐리며 복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의 객실 앞에 서 있는 모습.
“아…….”직원은 아니었고.
“저기, 남편 왔네.”심장은 뛰어올랐다.
희원은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던 복잡했던 마음이 터져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 주먹을 꾹 쥐었다.
저쯤 객실 앞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의 손엔 놀랍게도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지환은 표정으론 무엇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희원은 움찔했다.
달려가 그를 반기고 싶은,
“라면, 사 왔는데.”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을 당장이라도 풀어내고 싶은, 그러한 마음을 간신히 추슬렀다.
……이런 생각, 이런 마음, 자고 나면 희미하게 사라질까.
“나 없는 사이 일이 좀 있었던 것 같네요.”어쩌죠.
당신과 나, 운명 같은데.
“한국 무용수…….”희주는 비서가 가져다준 희원의 자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쉽게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희주는 그녀의 무용 동영상을 찾아보며 건조한 시선을 했다.
그녀 ‘공연’을 보고 있는 눈빛이 아닌, 그녀 ‘얼굴’에 집중한 눈빛.
“예쁘네…….”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그녀 정보 아래 SNS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대부분은 지인 공개로 되어 있는 게시글. 희주는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그녀 사진들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었다.
몇 개 전체 공개로 되어 있는 사진 중,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것처럼 심장이 뜨거워 온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의 얼굴과 분위기. 맥이 뛰다 못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여타 SNS를 하지 않는 지환을 알지만 때때로 찾아보곤 했다.
어떻게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갖은 노력을 다 해왔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만난 그의 사진은 다름 아닌 결혼사진.
“권희원…… 권희원…….”좀처럼 과거가 되지 않는 그와의 시절을 붙들고, 희주는 휘감긴 질투와 부러움에 숨을 짧게 끊어 내쉬었다.
이렇듯 비참한 결혼생활을 참고 버틸 수 있었던 건ㅡ
당신이 나의 기억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고, 바라지 않으며 기억 속, 온전하게 버텨주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사모님, 저예요. 희주.”희주는 들여다보던 SNS를 닫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어머, 강 회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전화를 직접 다 주시고.“갑자기 사모님 생각이 나서요. 의논 드릴 것도 있고 해서.” 현 서울 시장의 아내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고위공직에 머무는 남편들을 따라, 아내들의 모임도 만만치 않았다.
희주는 올해, 모임의 회장이 되었다.
“사모님, 저희 다음 주에 모임 있잖아요.”ㅡ네. 다음 주. 회장님이 아주 좋은 장소 마련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기대가 커요.“사모님들 불편하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번 모임은 조금 더 취지를 확실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ㅡ취지? 어떤?“해외 미술 작품만 둘러볼 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도 좀 챙겨야 할 것 같아요. 저희가 앞장서지 않으면 누가 앞장서겠어요? 사모님 생각은 어떠세요?”ㅡ어머나, 강 회장님 생각 깊으신 게 감탄만 나와요. 그래요, 우리 한국 문화 너무 좋죠. 접할 기회가 흔치 않잖아요? “제가 그럼 기획 잡아볼게요. 우리 사모님들께 좋은 공연 보여드리고 싶으니까요.”희주는 상냥한 목소리로 통화를 끝까지 다 마쳤다.
미술 작품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하며, 그녀는 난데없는 한국 무용 공연을 선택했다.
희주는 비서를 호출했다.
“한국 무용 협회에 연락해서 다음 주 공연 좀 잡아달라고 해줘요. VIP들 모시고 하는 공연이니까 격 있게 준비해달라고.”“네. 사모님, 알겠습니다.”“무용수 권희원 씨 공연 보고 싶다고 전해줘요. 무조건. 무조건이라고.”“네. 사모님. 알겠습니다.”희주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남편의 권력이란 이런 데에 유용하게 쓰였다.
허울뿐인 아내라 해도, 이런 권력이 그녀를 숨 쉬게 했다.
남들이 모르는 불행을 견디는 조건이었다.
“카드키를 놓고 그냥 문을 닫았지 뭐예요. 정신이 나갔나 봐요.”찾아온 직원이 열어준 객실로 들어서며 희원은 공연한 음성을 높였다.
재킷을 구언에게 돌려주고 들어온 터라, 어쩐지 어깨가 시리게 여겨졌다.
지환은 아무렇게나 라면이 든 편의점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로비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후.”자그마한 라면이 먹고 싶었다던 그녀 말이 떠올라, 편의점을 다녀온 길이다.
형편없이 질투하고 나섰던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고,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자신의 얼굴이 후회되기도 하고.
라면이나 나눠 먹으며 내일 공연도 잘하라고, 따뜻한 마무리를 지어볼 생각이었다.
문을 두드려도 말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니 씻나 싶어 잠긴 문 밖에서 기다리던 때ㅡ
“서지환 씨는 언제 찾아왔어요? 나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는데.”그녀가 등장했다.
당연하다는 듯 이번에도 구언과 함께였다.
지환의 시선에 가장 먼저 걸린 것들.
가운.
“아아, 전화도 했었구나. 그런데 진짜 라면 사 올 줄은 몰랐어요.”젖은 머리.
“아까 구언이가 남편 어디 갔냐고 물어서 라면 사러 갔다고 둘러댔는데 어쩜 이렇게 딱 알고 라면을 사…….”어깨에 걸쳐놓은, 남자의 재킷.
“유구언 씨는 어떻게 알고 만났습니까?”당신은 혹시 그런 차림으로 유구언의 객실을 찾아간 건가?
“구언이가 로비에 있더라고요. 지금 로비에 팝 공연이…… 있어서…….”희원은 저도 모르게 낮아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지환을 발견하고 음성이 한껏 올라갔음을 느끼며 애써 들뜬 기분을 다스렸다.
그의 표정은 이 방을 나설 때와 다름없이 서늘했다.
“서지환 씨. 나는 단순히 결혼반지를 찾으러 나갔다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이건 실수지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표정 왜 그렇게 쌀쌀맞아요? 마치 내가 잘못한 것처럼?”희원은 눈꼬리를 올렸다.
지환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 예감에, 자신의 기분도 따라 내려가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타인의 감정으로 자신의 기분이 흔들리는 것.
위험했다.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보냐구요. 서지환 씨.”“맞춰봐요. 시그널이니까.”뭐, 뭐요? 희원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지환을 질색하며 바라보았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쉰 지환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온몸에 휘감긴 이 염치없는 감정들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은지 모르겠다.
“서지환 씨. 나 이제 기분이 좀 나빠지려고 하는데요. 상황 종료하죠. 내가 지금 더 기분이 나빠지면 꽤 오래갈 것 같거든요.”얼굴은 엉망이 되었으리라.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권희원 씨가 바라보고 있을 자신의 표정이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권희원 씨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누군가는 잘못했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잘못은 이쪽이죠.”지환은 자신을 가리켰다.
가리킨 곳은 그의 심장 부근이다.
“내 잘못입니다. 권희원 씨 과실은 아니고.”“나는 지금 서지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난데없이 지 잘못이란다.
희원은 경계가 가득 담긴 눈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 선 모습이 섭섭한 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권희원 씨.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말해요.”“유구언 씨와 공연은 언제까지 하는 건지?”희원은 예상하지 못한 지환의 질문에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그는 공연 날짜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이 공연, 꼭 해야 합니까? 앞으로도? 많은 나날?”구언과 언제까지 ‘함께’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은 게 분명했다.
“궁금하다면 알려줄 순 있지만 서지환 씨가 날을 세우며 물어볼 카테고리는 아닌 것 같지 않아요?”“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생각하는데.”지환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희원을 바라보았다.
그녀 가운 차림이 여전히 시선에 가시처럼 여겨지는 건ㅡ
“질투가 좀 나는데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고.”“……네?”화장기를 지운 그녀 얼굴이 너무 예뻐서. 매력적으로 보여서.
이런 모습을 구언이 보았다는 생각에, 실없이 화가 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권희원 씨가 유구언 씨와 함께 있는 게, 거슬리지 않았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아…….”솔직한 말을 뱉어낼수록 지환의 심장 쪽으로 뜨거운 기운이 몰려온다.
당황함이 서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더욱.
“이쯤 되면 내가 두 사람을 신경 쓰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은데, 인정하고 나면 뭔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가 흘러갈 것 같고.”희원은 지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떤 말도 붙일 수 없었다.
“단지 법률상 남편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하는 건지, 아닌 건지. 이 거슬림을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건지.”“…….”“감정의 종류에 대한 확신, 아직은 없습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떠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 그대로.”그가 하는 말은 어지러워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희원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도 긴장했는지 약간 말아 쥐고 있는 그의 손.
“질투는 어디까지 괜찮을까요. 어디까지 거슬린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내가 여기서 질투를 더 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위험할 것 같은데.”한 번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아 몰랐던 사실.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감정을 방관할 자신은 없고.”“…….”“그렇다고 브레이크를 걸자니 이런 말들, 당신은 원하지 않을 것 같고.”나와 같은 결혼반지가 있었다.
어색하지 않게.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