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우 굴에 호랑이가
침묵이 내려앉은 객실.
희원은 의자에 앉아 있는 지환을 응시했다.
로비를 걸을 때 은연중 귓가에 매달렸던 팝 가수의 공연 노래도 지워지고,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을 붉혔던 부끄러움과 창피함도 사라졌다.
뇌리에 각인되고 가슴에 가라앉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
지금, 내 앞의, 저 사람.
“……뭐, 그래요. 좋아요.”희원은 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운을 뗐다.
아직 생각은 전부 정리하지 못했고,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몰랐지만 더 이상은 그의 눈빛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네, 뭐,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서지환 씨는 그냥 저와 구언이 일단 남녀, 그리고 음, 단지 남녀가 붙어 있는 게 싫고, 뭐, 그런 뜻이잖아요.”음성을 더욱 가볍게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몰랐다.
“거슬린다는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죠. 예술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신체적 접촉이 많은 작품이니까. 서지환 씨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편안하게 생각해보기로, 희원은 일단 갈피를 잡았다.
왜, 그렇잖아. 혼성그룹이 공연을 하면 바라보며 누구나 궁금해하는 일이니까.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 촬영만 해도 남녀 주인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잖아.
맞아.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곤 해.
그래서 저 둘은, 저렇게 붙어 있는데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한순간도 서로에게 끌려본 적, 없었을까?
“그래요. 서지환 씨 말, 충분히 이해해요. 거슬릴 수 있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꽤 많거든요.” 입으로 나오는 말은 머리를 거치지 못하고 빠르게 튀어나왔다.
자체 검열을 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의식의 흐름대로 과장된 손짓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지환은 묵묵히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 없는 결혼을 했다지만 이성의 등장이 즐거울 순 없죠. 그건 사심과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로 난 서지환 씨 이해해요.”“이해하는 거, 맞습니까?”“그럼요. 나도 사실 차정윤 검사와 서지환 씨가 동기라고 했을 때 그렇게 기분이 썩 좋진 않았어요. 이런 느낌 아닐까요?”느닷없이 희원의 입에서 ‘정윤’이 튀어나오자 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희원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그래요, 서지환 씨. 말 나온 김에 툭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나도 차정윤 검사, 별로라고요.”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동기라는 거,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두 사람 친한 거 나는 뭐 좋은 줄 알아요?”“차정윤 검사는 적어도 날 좋아하지 않습니다.”뜻이 담긴 강력한 말 앞에 희원은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그래, 지환은 알고 있는 거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랑한다는 단어로 말장난을 친 적도, 없죠.”“그 말의 뜻은 그러니까…… 구언이가…… 절 좋아한다는 말인가요?”지환은 희원의 힘없는 질문에 잠시 턱을 문지르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아닌가?”희원은 그의 짧은 예측에 마른 주먹을 쥐었다.
심장이 어딜 향해 뛰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매섭게 뛰어올랐다.
도저히 반박할 다음 말은 나오질 않고, 조목조목 따져댈 생각은 들지도 않고.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생각이 궁금해 그녀 얼굴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손을 내저었다.
이래저래 바라본들 한심한 시간이다.
“미안합니다. 내가 오늘따라 왜 이런지 조금 날카로운데, 제시간에 공연 도착하지 못할까 봐 마음 졸이며 운전한 탓이라고 생각해줘요.”“그렇게…… 정리될 얘기는 아니잖아요.”“지금 당신은 변명도 하지 않았잖아.”얘기 끝내죠. 지환은 일어섰다.
희원은 뭐라도 말을 붙여야 하는 까닭에 마른 입술을 열었다.
“서지환 씨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구언인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요.”어떻게든 구언의 마음을 감춰주고 싶었다.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숱하게 많은 나날 남아있는 공연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긍정해봐야 남는 거라곤 세 사람의 불편함.
구언이 힘들게 지켜온, 녀석의 마음에 대한 미안함.
“구언의 마음이 그렇게 보이는 건 서지환 씨의 착각이에요.”“……착각?”“네. 착각. 서지환 씨가 공연과 현실을 분리하지 못해서 생긴 정서상의 충돌일 뿐.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구언과 나는 좋은 동료니까요.”순순히 걸음을 재촉하며 나가려던 지환은 결국 못 참겠다는 것처럼 잠시 멈춰 섰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하…….
“권희원 씨는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아뇨. 이해했어요.”“공연과 현실을 분리하지 못하고 생기는 정서상의 충돌이라고 했으니, 그럼 하나만 더 묻죠. 공연과 현실을 분리하지 못하는 건 진짜로 나입니까.”“…….”“아니면 유구언 씨입니까?”어떻게든 구언과 그녀가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내 그런 생각만 반복했다.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말을…….”본인의 객실로 들어선 지환은 슈트 재킷을 침대에 던지며 시트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통이 오려는 이마를 짚으며 질끈 눈을 감고 조금 전을 회상하니, 질투에 엉망이 된 한심한 내가 보인다.
“엉망이네, 엉망이야…….”이만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하고,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꽉 다문 입술을 한 채,
등을 돌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객실을 나섰다.
후…… 지환은 한숨을 내쉬며 객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거슬리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만에 하나 희원과 구언이 사랑에 빠진들, 그것 또한 자신의 몫이 아닌 일이다.
“내 권한이 아니란 말이다, 내 권한이…….”뭐 하러 그런 말을 해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삶을 살든 절대로 관여하지 말자던 처음의 약속은, 어디로 날려버린 걸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예쁘래…….
그러니까 가운만 안 입었어도 됐잖아.
그런 걸 입고 유구무언 곁에 있으니 인간적으로 내가 돌아, 안 돌아.
어깨에 유구무언 재킷을 덮었으니 그걸 보고도 내가 화가 안 나? 안 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내가 웃음이 나오겠어? 눈이 돌지 안 돌겠어?
“……싸구려 변명이다. 정당방위가 안 되네.”에효. 아무리 속내를 곱씹어봐야 위로가 되질 않는다.
분명한 건 권한 밖의 말들을 뱉었고, 차가운 눈빛을 내보였고,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며ㅡ
“미친놈, 에라이 미친놈아…….”두 사람의 관계를 어설프게 틀어놓고 말았다.
에효, 지환은 털썩 뒤로 누웠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부턴 다시 한집에서 그녀를 보아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낫지 싶은데.
눈에서 안 보이면 차라리 신경도 쓰지 않고, 그게 더 낫지 않겠나…… 싶은데.
망할 한 달. 빌어먹을 한 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의 등장으로 붙어버린 그녀와의 삶.
“마음잡아라, 서지환. 정신 차리고 마음잡아.”지환은 스스로 다그치듯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조금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에게 그런 말들 따위 뱉어내지 않은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 진짜 용서가 안 되네. 미친놈, 서지환 이 등신, 하…….”그래. 앞으로는 거슬린다는 마음 자체를 지워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어차피 사랑할 것도 아닌데.
“기분이 뭐 이러냐, 휴…….”어차피, 사랑할 것도 아니면서.
아침나절 지환은 서울로 돌아갔고 그녀는 구언과 함께 남아 마지막 공연까지 혼을 태웠다.
내내 그와 나눈 말들이 잊히질 않아, 멀미 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가 구언과 자신을 신경 쓰고 있음이 분명했던 눈빛, 음성, 말들을 떠올리다보면 맥이 빨라지곤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감정을 방관할 자신은 없고.
어느덧 다른 말들은 전부 지워지고ㅡ
이런 말들, 당신은 원하지 않을 것 같고.
유일하게 가슴속에 살아남은 말들만 곱씹고 있었다.
희원은 공연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이나 문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지금 시간이면 하리와 지환이, 이 안에 있으리라.
어쩐지 쉽게 문을 열지 못하고 희원은 가만히 서서 문을 응시했다.
“뭐야, 사람 헷갈리게…….”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잖아. 아니라며.
언뜻 들어보면 그의 말은 좋아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었지만, 한참이나 곱씹고 나니 미묘하게 그러한 맥락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아…… 어떡하지, 얼굴을 못 보겠는데.”희원은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자꾸만 망설이게 되는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생각보다 감정에 솔직했고,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사랑한다’던 구언의 공연 멘트에 화가 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누구라도 화가 나리라. 그건 결혼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그래.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화가 안 나면 바보지. 나라도 화가 나지.”실제로 구언의 돌발 멘트에 나도 화가 났었고.
그래. 구언이 무례했으니까. 기분 나빴겠지. 그런 생각, 할 만도 하지.
……휴, 희원은 결심한 듯 비밀번호를 눌렀다.
불편함이 가득 섞였을 그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하나, 희원은 근심을 한가득 안고 문을 열었다.
“숭모오오오!”“하리야, 안녕?”애착 인형을 안고 하리가 기다렸다는 듯 뛰어온다.
희원은 신발을 벗기 전 현관에 몸을 수그리며 하리를 반겼다.
“하리야, 잘 지냈어? 숙모 안 보고 싶었어? 숙모는 하리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헤헤. 하리도 숭모가 보고 싶었어여. 하늘이도 숭모가 보고 싶었대여.”“하늘이 안녕? 하늘이 하리랑 잘 지냈어?”“삼쵼도 숭모가 보고 싶댔어여.”“……응?”응? 희원은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애먼 하리만 붙잡고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저기 지환이 서 있다.
“삼쵸이여어, 숙모가 엄청엄청 보고 싶다고 했어여.”“이제 옵니까?”“삼쵼은여어, 숭모가여 세상에서 제일제일 좋다고 했어여.”아이의 말과 그의 얼굴이 합쳐져,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내려앉는다.
……보고 싶었다.
물론 그는 아이의 순수하고 고집스러운 질문에 마지못한 답을 내어놓은 것이겠지만ㅡ
“네. 저 이제 왔어요.”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슴이 뛰는 것까지 막을 수가 없었다.
희원의 등장이 마냥 반가운 하리는 방방 뛰며 하늘이를 꼭 안고, 희원은 그제야 무릎을 일으키며 신발을 벗었다.
문 앞에서 망설였던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그의 다정한 얼굴.
“냉장고에 있는 것 전부 때려 넣은 정체불명의 볶음밥, 어떻습니까?”그의 질문에 희원은 웃었다.
지금 이 순간, 지환의 표정 하나로 감정을 지배받고 있음을ㅡ
“그거 좋은데요? 공연 끝나고 바로 오느라 마침 배고팠거든요.”“손만 씻고 나와요. 거의 다 됐으니까.”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바탕 아이와 놀아주고, 씻기고, 머리를 말려주며 시간을 보냈다.
약간의 어색함이 남아 두 사람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먼저 말을 꺼내 어제 일을 해명하고 싶은 마음은 서로 굴뚝같은데, 선뜻 기회를 잡지 못해 어물쩍 시간을 흘려보냈다.
“자아, 하리야아. 이제 뭐 할까? 뭐하고 놀까?”그런 와중에 취침시간이 도래했다.
그 말인즉슨 뽀뽀타임이 다가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리는 이제 졸려여어. 졸려어.”“아…… 하리가 자야 하는구나. 그럼 더 못 놀겠다. 그렇지?”어떻게든 그 시간을 조금 더 미루고 싶은 희원은 자고 싶다는 하리 앞에 난색을 표했다.
아이를 재워야 하는데.
그럼 서지환 씨와 뽀뽀해야 하잖아! 이 어색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럼 하리야, 오늘은 숙모랑 같이 잘까?”“하리는 하늘이랑 자여. 하리는 하늘이랑 코코넨네해여.”“아…… 그렇지. 하리는 하늘이랑 코~ 하고 넨네하지.”어쩐지 아이를 유인하여 방으로 데려가면 순간을 모면할까 싶었는데, 망했다.
아이는 반쯤 눈을 감고 눈가를 비비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이제 자야 하는데 너네 뭐 해? 이런 표정이다.
“코오 인사. 넨네 인사아.”하리가 중얼거린다. 후,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질 리 없는 시간.
약속이나 한 듯 희원과 지환은 동시에 일어섰다.
엄격한 관리 감독, 지휘자인 하리의 감시 아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
“하리야, 봐봐. 숙모랑 삼촌이랑 넨네 인사해요.”이리 와요. 해치우게.
컴온.
지환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희원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지환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이게 말이다. 싫고 기분이 나쁘고 빨리 해치우고 싶은 게 아니라.
“잘 자요, 서지환 씨.”가슴이 떨려서 못 살겠단 말이다!
희원은 인사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 눈을 꼭 감자, 지환은 그런 희원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녀 입술이 긴장했는지 씰룩씰룩 움직인다.
지환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꽉 눌렀다.
……지금 권희원 씨의 이 표정,
하리보다 더 귀엽다.
“잘 자요.”지환은 그녀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입술 면적이 그녀 입술에 닿는다.
놀라 화들짝 눈을 뜬 희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뗐다.
미묘한 두 사람의 분위기까지 알지 못하는 하리는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다가와 두 사람에게 뽀뽀를 했다.
아이가 방으로 사라지고, 우두커니 둘만 남은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의 온기는 선명해지고, 각자의 심장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것만 같은 시간.
“자, 자러 갑니다.”지환은 홱, 뒤로 돌았다.
“그래, 그래요. 잘 자요.”희원은 그와 반대로 돌아섰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서려고 의미 없이 찢어지는 그때ㅡ
갑자기 난데없이 방으로 들어갔던 하리가 튀어나온다.
“긍데여 있잖아여.”각자의 방 문 앞에서 멈춰 선 두 사람은 일제히 하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하리가 저렇게 부르면 무서울 지경이다.
“삼쵼이랑 숭모는 왜 따로 자여?”하리는 몹시 천진한 눈빛과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여, 같이 넨네해여. 하리도 하늘이랑 같이 넨네하는데.”두 사람의 등줄기로 공포와도 같은 오한이 밀려들었다.
얼떨결에 희원의 침실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아이의 질문을 이길만한 현명한 답을 찾지 못한 처참한 결과다.
“휴.”“휴.”과격한 웃음소리와 함께 보란 듯 다정한 자세로, 아이 앞에서 침실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람은 문을 닫으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했을 땐, 이런 상황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리가 참…… 관찰력이 좋네요.”희원이 둥글게 표현하며 지금의 심정을 탄식처럼 읊자,
“똑똑합니다. 영재 검사를 해봐야겠어요.”지환이 눈치 없이 고슴도치 답을 내어놓는다.
“어떡해요?”문 앞에 붙어서 희원이 그를 올려보자, 그는 뚱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뭘 어떡합니까?”“이제 어떻게 하냐구요. 한 방 써요?”“하리가 잠들면 나가겠습니다. 금방 잘 거예요.”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다가도 혼자서 화장실을 몇 번 가는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우리?”“…….”“하리가 혹시라도 나중에 시댁이나, 아주버님한테 말하면 어떡해요? 우리 각방 쓴다고?”“아아, 그런 문제가 있군요.”아아. 그런 문제가 있군요?
혼자서만 그렇게……
“뭐요? 아아,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게 답인가요?”침착한 척하지 마!
이건 당신 문제기도 하잖아!
“소문나면 서지환 씨한테도 좋을 거 없잖아요. 아닌가요?”“그렇죠. 신혼 초부터 각방이라니, 안 될 말이죠.”“어쩌냐구요.”“뭘 어쩝니까? 그럼 같이 쓰면 되겠네.”뭐, 뭐요? 희원이 지환을 힘껏 흘겨보자 지환은 쓱, 시선을 내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좋은 답, 있습니까? 있으면 말해봐요.”“없으니까 지금 노려만 보고 있는 거잖아요.”“그리고 분명한 건 하리를 이 집에 데려온 것도 권희원 씨고, 나를 이 집으로 들인 것도 권희원 씨입니다.”“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이를 꽉 깨물고 후회하고 있는 거잖아요.”희원의 답이 귀엽다는 듯 지환은 피식 웃었다.
지환은 포기가 빠른 사람인 것처럼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단출한 침실은 침대 하나 화장대 하나, 붙박이 이불장이 전부였다.
“자, 저는 어디서 자면 되겠습니까?”“뭘 어디서 자요. 뻔한걸.”희원이 중얼거리자 지환은 홱, 돌아서며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나와 같이 누워 잘 생각이라면 그 생각 당장 멈춰요.”“뭐, 뭔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거든요!”“그러고 싶은 생각이 나는 있어서요. 당신이라도 없어야 할 것 같으니까.”그…… 그런 농담하지 마!
“나는 보기보다 위험하거든요.”설레!
나는 설렌다고 이 남자야!
“자, 잔말 말고 가위바위보 해요! 지는 사람이 바닥에서 자는 걸로!”“애 듣습니다. 권희원 씨. 목소리 낮추죠?”하…… 열 받아……
열 받아서 심장 뛰어…….
희원은 빨리 가위바위보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지환이 힐끗 바라보다가 바닥을 툭툭 친다.
“내가 여기서 잘게요. 침입자가 난데 그 정도의 양심은 있습니다. 이불 있죠?”여기에 이불 펴면 되겠네요. 지환은 눕기 적당한 곳에 섰다.
하…… 미치겠다…….
희원은 지금의 기분이 절망적인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불 있어요. 차고 넘치니까 걱정하지 마요.”망할 심장은 미친 듯이, 자꾸만, 하릴없이 뛰어올랐다.
정신이 없어 미처 몰랐지만 얼굴을 붉혔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