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괜히 물어봤어
아주 어릴 때부터 늘 혼자 잠들고 일어나던 버릇을 가진 침실에, 누군가가 있다.
그녀는 침실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아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이했다.
희원은 이불을 꽁꽁 감은 채 얼굴만 내어놓고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지환이 보인다.
“어쩜 한 번을 안 깨고 진짜 잘 자네.”이불은 발로 감아 두르고, 팔은 대(大) 자로 뻗은 채ㅡ
잠자리를 가리는 성격은 아닌 듯 너무도 태평하게 자는 모습.
희원은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풉, 자는 모습 사진이라도 찍어놓고 싶다.”어제, 그 밤ㅡ
그는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단둘만 남았다는 어색함이 시작도 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침대 반대편으로 등을 돌리고 팔짱을 낀 채 빠르게 잠이 든 그는, 보다시피 나는 깊은 잠을 잘 거고, 따라서 권희원 씨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요ㅡ
라며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침대 생활만 하다가 바닥에서 자려니 등이랑 허리 아프겠다.”다른 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어둠 속 공간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잠결에 그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닐까 바라봤지만 누가 때려도 모를 것처럼 깊은 잠을 자더라.
“영락없는 애 같네.”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난다. 나이에 비해 동안인 그의 얼굴은 더욱 앳되게 느껴졌다.
어쩐지 눈을 감은 지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반듯하고 깔끔하게 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시선에 들어온다. 희원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꺾으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타인과 영위하는 삶을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고, 사람을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면서, 그는 왜 비혼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도 부족하거나 모자란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는 왜, 어쩌다가.
혼자임이 편하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어머, 깜짝이야.”희원은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척, 하며 지환이 눈을 뜬 것이다.
“그렇게 바라본다고 잘생긴 내 얼굴이 닳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아침부터 헛소리하는걸 보니 잘 잤나 보네요.”시선을 어색하게 돌리자니 이미 늦었다.
희원은 작게 웃으며 눈을 뜬 지환을 바라보았다.
“굿 모닝. 서지환 씨.”“흐아아암, 언제 일어났어요.”지환이 길게 하품하며 물어온다. 희원은 그의 하품에 전염되어 따라 하품하며 대꾸했다.
“흐아아아암, 잘 모르겠어요. 잤나? 안 잤나?”“혹시 내가 코 골았습니까?”“……조금?”“다른 일은 없었고?”“예를 들면요?”“이를 갈았다거나, 잠꼬대를 했다거나. 권희원 씨를 갑자기 덮쳤다거나. 과감하고 능숙하게.”그가 베개 밑으로 손을 넣고 몸을 틀며 중얼거린다.
희원은 실없는 지환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네요. 우린 정말 썸 타기 글러먹은 사이, 맞죠.”“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어찌 권희원 씨의 안타까운 마음을 해소해줄 의향은 있습니다.”“시끄러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요. 하리도 일어날 시간 다 됐어요.”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딱딱한 바닥에서 잤으니, 몸이 찌뿌둥하리라.
“지금 몇 시입니까?”“지금요? 지금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죠.”“하…… 일어나기 싫은데.”흐어어어어, 지환은 계속해서 하품했다.
영 일어나기가 힘이든지 누워서 시답잖은 농담만 연거푸 뱉어낸다.
희원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자고 일어나 세수도 못한 얼굴, 타인에게 공개하자니 민망했지만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주스 갈아줄게요. 괜찮죠?”“없어서 못 마십니다. 영광이죠.”희원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으며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자 지환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한 방을 쓰며 같은 시간에 일어나, 그녀와 아침을 맞이하는 지금 풍경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결혼하길 잘했네요.”문득 그는 그런 말을 했다.
일어서려던 희원은 잠시 멈칫, 했다.
“각시가 아침에 주스도 갈아주고, 일어나라 잔소리도 해주고.”아침 주스 한 잔에 뭉클해하는 지환을 바라보다 희원은 몸을 일으켰다.
청초한 얼굴로 맑게 웃었다.
“결혼 잘했다는 생각, 앞으론 더 하게 될 거예요.”“여어. 권희원 씨, 근거 있는 자신감입니까?”“그럼요. 나 같은 여자는 정말 흔치 않거든요. 사랑 빼곤 다 해줄 수 있죠.”“캬아.”“에이, 기분이다. 과일 주스 받고 토스트 올리고.”“크아아아아아. 최고네요.”“에잇, 인심 쓰는 김에 달걀 프라이까지. 콜?”“으어, 반하겠다, 반하겠어!”지환이 감동 서린 눈빛으로 연신 탄성을 내지르자 희원은 아침부터 활기찬 에너지가 솟아나는 기운을 느끼며,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싸운 적도 없고 화해를 한 적도 없는 것처럼 돌아갔다.
여타의 부부들이 그러하듯 간밤 자고 난 뒤, 아침밥 한 끼를 먹다가, 섭섭했던 일들은 건망증처럼 잊어버리고ㅡ
“서지환 씨, 어서 일어나서 이불 치우고 씻어요. 하리가 왜 바닥에서 잤냐고 묻기 전에요.”“알겠습니다. 알겠어요.”어떠한 의미로는 평범한, 그리고 아늑한 아침을 시작했다.
사실상 첫날밤이었지만 그런 표현마저도 우스운, 그런 아침이었다.
“서검, 일찍 왔네?” “와이프가 깨워줘서.”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일찍 출근한 지환에게로, 정윤이 찾아온다.
“잘됐다. 아침 안 먹었지? 오는 길에 애플파이 사 왔어. 같이 먹…….”“너 거기 서. 정지.”응? 정지?
지환을 향해 걸어가던 정윤은 우뚝 멈춰 섰다.
난데없이 손을 들며 멈춰 서라니, 애플파이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정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여기 서래? 너 혹시 안 씻었냐?” “거기 서 있어. 접근 금지.”“뭐? 뭔 금지?”얘가 아침부터 헛소리를 하네. 정윤은 무심하게 눈을 흘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환이 뒷걸음을 걸으며 다시 손을 올려 보인다.
“너 딱 거기 서.”“아, 왜 자꾸 서래! 브런치 먹자고 브런치! 혼자 먹기 싫단 말이야!”“난 아침 먹고 왔다. 너나 많이 먹어.”“……아침을 먹었다고? 니가?”“부인이 차려주었지. 나의 아침상을.”하…… 끓는다…… 스트레스 받아…….
정윤은 지환이 씰룩씰룩 입꼬리를 올리며 내뱉는 말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혼자 먹으면 입안이 까슬까슬한데.
누구라도 같이 먹어주며 맛있다고 해줘야 애플파이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데.
“서검. 이거 한입만 먹어라. 딱 한입만. 내가 너를 먹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나 지금 혼자 먹기 싫단 말야. 365일 중 360일 혼자 밥 먹는데, 동기한테 이 정도 선심도 못 써주냐?!”“선심 못 써. 싫어.”싫어. 배불러. 지환이 딱 잘라 말하자 정윤은 질색하며 종이봉투를 든 손을 내렸다.
“치사해. 드럽게 치사하네 진짜. 난 내가 사 온 거 누가 맛있게 먹어줘야 스트레스 풀리는데.”“다른 건 모르겠고 너 이제 나와의 간격 그 정도로 유지해.”“그러니까 그건 대체 뭔 소리냐고. 아침 먹었다더니 술 마신 거야?”“우리 와이프가 싫어해. 간격 좁은 거. 친하게 지내는 거.”“……뭐?”
나도 차정윤 검사, 별로라고요.
지환은 희원의 말을 떠올리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알아들었으면서 두 번은 묻지 말라는 표정을 했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정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것처럼 열을 올렸다.
“와…… 와나, 와…… 어처구니없다. 뭐? 권희원 씨가 그래? 나랑 친하게 지내지 말래?”“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그냥 싫어서.”
두 사람 친한 거 나는 뭐 좋은 줄 알아요?
“내 부인이 다른 남자랑 친한 게, 싫더라고. 그럼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미친 거 아냐? 너랑 내가 어딜 봐서 남녀야. 미쳤어?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해.”“어딜 봐도 남녀 맞지. 그리고 부인은 너와 나의 사이를 잘 모르니까.” “…….”“부인은 너와 나와는 다른 의미로 우리를 끔찍하게 여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가. 빨리.
지환은 바쁘다며 계속 정윤을 향해 가보라 말을 했다.
진짜 치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윤이 흘겨보자 지환은 이내 책상으로 걸어가 서류더미를 폈다.
그러더니 이윽고 배를 두드린다.
“아, 배가 부르네. 엄청 부르네. 아침을 먹으니 세상 이렇게 든든하네.”“아…… 서지환 재수 없어……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앞으로.”“잘 가. 수고하고.”희한하리만치 그의 머리 위로 음표 여러 개가 둥둥 떠다녔다.
“이제 맛있는 거 사 와도 너 한입도 안 줄 거야! 두고 봐, 서지환! 우씨!”“멀리서 줘. 멀리서. 그 정도의 간격에서.”“됐어! 꺼져! 갈 거야!”정윤은 신랄하게 욕을 하며 그의 사무실을 떠났다.
“공연요? 갑자기요?”희원은 자신을 찾아온 공연 관계자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공연이 잡혔다며, 관계자는 다소 상기된 표정을 했다.
“희원 씨, 이게 말이죠. 보통 공연이 아녜요. 예예. 보통 공연이 아닙니다.”“원래 모든 공연은 보통이 아니죠. 그리고 당장 다음 주가 공연이라는 통보도 보통은 아니네요.”희원은 조금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달력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갑자기, 느닷없이 공연 스케줄이 잡혀버리는 일은 달가울 리 없었다.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다소 들뜬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관계자의 모습도 영 탐탁지 않았다.
“대체 무슨 공연인데요.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희원이 팔짱을 끼며 턱을 들어 올리자 관계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응?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VIP요? 대통령님? 청와대?”“아뇨, 청와대 공식 공연은 아니고 그에 준하는 일인데, 사모님들의 모임이 있으시답니다.”이름 대면 알 만한 대한민국 거물급 정치인들의 사모들이 모인 사교모임이 있다고 한다.
“원래 미술품 전시회를 가실 예정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국 무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며 급하게 추진을 하셨어요.”“……그래요?”“예. 게다가 권희원 씨를 꼭 집어서 희원 씨의 무대가 보고 싶으시다고. 올림픽 개최 때 희원 씨 공연이 인상 깊으셨던 모양이에요.” “뭐, 네. 그럴 수도 있죠.”희원은 다소 불쾌했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단지 거물급 정치인들의 아내라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 무용의 발전을 위해 무엇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금 더 보편적인 한국 무용의 보급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슬쩍 물어보니 문화부 장관 사모님도 계시다고 합니다. 좋은 기회지 뭡니까?” “아아. 그렇군요. 좋네요.”“네. 그리고 이번 공연을 추진하시는 분이 백인호 의원님, 아시죠? 그분 사모님이신데 모임 회장님이시라네요. 그분이 권희원 씨를 강력 추천하시며 한국 무용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신다고 합니다.”“……그래요?”“네네. 그렇다네요.”평소 백인호 의원의 정치적 사상에 호감을 표하던 희원은 그 이름 석 자에 반응했다.
그녀가 차기 서울 시장으로 지지하던 의원이기도 하다.
그런 분의 아내가 한국 무용에 관심을 표해준다니 새삼 고맙고,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공연 전에 사모님들께 앞으로 공연장 확보나 무료 공연 홍보 같은 것도 저희 쪽에서 강력하게 어필을 해보려고 합니다. 희원 씨도 좋은 공연으로 힘 좀 써주십시오.”“준비 기간이 좀 짧긴 하지만 일단 알겠어요. 그런 분들이 공연을 보시고 나서 조금 더 우리 무용의 발전을 위해 힘써주신다면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니까요.”“예. 그럼 협의된 걸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문의사항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네. 알겠어요.”공연 일정은 다음 주.
그녀는 달력을 바라보며 다시 스케줄을 맞췄다.
“아, 맥주 마시고 싶다. 치맥.”모든 바깥 활동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희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리가 있다 보니 스케줄이 없는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그러다 보니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를 마셔본 게 조금 오래되었다.
결혼 전 그토록 갑갑해 했던 통금 생활을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맥주? 치맥? 오, 좀 당기는데요.”용케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지환이 넙죽 반긴다.
엇. 진짜?
희원은 눈을 빛내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한가한 저녁 시간.
서로 눈으로 맥주 콜, 치킨 콜을 외치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하리를 바라보았다.
아이에게 저녁 시간에 다른 걸 먹이지 말라던 사전 주의를 떠올리며,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목적은 하나.
“자, 하리야. 이제 우리 뭐 할까?”아이를 재워야 한다.
“하리 졸려어. 하리는 졸려어어어어.”“졸려? 어구구구구구, 졸리구나. 하리가 졸리구나.”아이가 자겠다는데 왜 행복한 거냐.
두 사람은 하리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우리 넨네하러 갈까? 숙모가 재워줄까?”서지환 씨, 지금이에요. 어서 시켜요. 프라이드 반 양념 반.
무 많이.
희원이 눈길로 신호를 보낸다.
“그래. 하리야, 숙모 따라가서 코 자. 하늘이랑 코 자, 하리야.”알겠습니다. 권희원 씨. 당장 주문하도록 하죠.
한 마리 가지고 되겠습니까? 일인 일닭 합시다.
지환은 눈을 번쩍번쩍하며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희원은 칭얼칭얼하며 눈을 비비는 하리의 손을 잡았고, 아이에게 곰돌이 인형을 안겨주었다.
“자, 하리야. 코 자러 가자.”“응, 코 자. 하리는 코오 잘 거예여.”하리가 급격하게 내려가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다.
잠이 그득그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마치 미션을 수행하듯 희원과 지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까이 다가섰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이젠 척척, 잘 달라붙는다.
“삼촌이랑 숙모 뽀뽀하네. 코코 인사하네.”“살앙해여?”“응. 사랑하지. 삼촌이랑 숙모는 사랑하지.”지환은 중얼거리며 희원이 내민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마음의 준비 단계고 뭐고, 서로 닿은 입술에 긴장을 하는 일도 없이 뽀뽀는 끝났다.
그러자 아이가 짧은 다리로 소파에서 내려온다.
숙모의 볼에, 삼촌의 볼에 뽀뽀를 하더니 혼자 종종종종 방으로 걸어간다.
문고리를 잡으며 아이가 돌아본다.
희원과 지환은 서로 찰싹, 달라붙었고 지환은 자연스럽게 그녀 허리를 감았다.
“잘 자, 하리야. 안녕.”“하리 안녕. 잘 자요, 우리 하리.”희원은 지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하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리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쏙 들어간다.
얼마나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을까.
아이가 잠들었음을 확신한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희원과 지환은 그제야 서로의 몸을 놓았다.
“서지환 씨. 시켰어요?”“물론이죠.”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없도록 미리 나가서 지환은 치킨을 받아들었고, 희원은 테이블 세팅을 했다.
맥주 한 캔씩을 놓고 닭다리를 손에 잡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리도 같이 먹으면 좋은데. 그렇죠?”“하리는 안 됩니다. 아토피가 좀 있으니 가급적 이모님이 해주는 음식이나 가정식 외에 다른 건 먹이지 말라고 형수님이 그랬거든요.”“알아요. 기름진 건 되도록 먹이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도 좀 미안하긴 하네요.”“그나저나 치킨이 뭐라고. 권희원 씨와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지환이 말하자 희원은 맥주 캔을 들었다.
“치킨이 뭐긴요. 치킨은 사랑이죠.”꿀맛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한 캔은 두 캔이 되고, 두 캔은 여러 캔이 되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각자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다지 강렬하지 않은 소소한 인생 이야기를 하다가.
저문 시간에 힐끔힐끔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있잖아요, 서지환 씨.”희원은 물끄러미 그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그는 답 대신 맥주를 삼켰다.
가만히 그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응시하다가, 희원은 물었다.
“서지환 씨는 왜, 결혼이 싫었어요?”완벽한 타인이라고 여기던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겨났다.
일절 없을 거라고 여겼던,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말았다.
“서지환 씨는 왜, 혼자가 편해졌는지 궁금해서요.”“말했듯이 종가의 차남이고, 대를 이어야 하고, 이래저래 복잡했죠.”“하지만 막상 제가 들여다본 지환 씨네 집은 생각만큼 보수적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많은 편의와 자유를 주셨죠. 며느리의 의무를 무겁게 주지도 않으셨고.”이번엔 그의 시선이 그녀 손끝으로 내려간다.
자신의 것과 꼭 닮은 그녀의 결혼반지를, 그도 바라보았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냥, 그런 생각이 들면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짐작하기에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닐 거다.
“궁금합니까?”사랑을, 해보지 않은 남자는 아닐 거다.
“궁금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해도 돼요.”희원이 답을 강요하지 않자 지환은 남은 맥주를 털어 마셨다.
이것만 마시고 자려고 했는데 실패인 모양, 그는 다시 맥주 새 캔을 들었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반복하고 싶지 않더군요.”“반복하고 싶지 않다…….”“실패했으니까.”“…….”언제나 다정하고, 장난스럽던 그의 얼굴 위로 처음 보는 종류의 그늘이 진다.
예감하건대 지금 그의 시간은 뒤로 돌아가고 있으리라.
“일련의 경험과 결과물로 습득한 게 있다면 타인은 믿는 게 아니라는 것.”사랑은 믿는 게 아니더라. 믿고, 믿고 싶은 건 나의 의지일 뿐.
그저, 그런 것일 뿐.
지환은 말끝에 웃었다.
“검사 일을 하면서 느낀 게 좀 있어요. 모든 사건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있었던 일의 실체란 결국 증거가 하는 거니까. 문서화 할 수 있는.”“…….”“그런데 감정은 그게 안 되는 거지. 말밖엔 증거가 없으니까.”말은 흩어지고, 너와 내가 나눠 담은 무게가 다르니ㅡ
결국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니. 결국은 달리 담아 다르게 간직하는 것이 아니겠니.
“정리하자면 증거로 남길 수 없는 건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나의 감정을 소비하는 건 뭐랄까요, 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고.”희원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예상한 대로 그는 지난 사랑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거였다.
그러한 일들을 홀로 상상하니, 술김 때문일까ㅡ
마음이 저리고, 속이 상하고, 그가 가여웠다.
“서지환 씨,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요.”그제야 그가 시선을 든다.
“나는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요? 우리는 결혼을 했고, 문서로 증거를 남겼는데.”“…….”“나는, 믿을 수 있나요?”예상하지 못한 질문인지 그가 웃는다.
아스라이 눈이 감기는,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고, 모순이긴 한데 믿습니다.”그녀 가슴이 뛰어오른다.
“권희원 씨는 나를 사랑할 리 없고, 그런 사실을 믿으니까 우리는 편안한 거죠. 이렇게.”그러다가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권희원 씨가 오늘 아침에 내게 한 말 기억나요? 권희원 씨는 사랑 말곤 다 해줄 수 있는 완벽한 아내라고 했던 말.”그는 진심으로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눈가에 담긴 따뜻함, 음성에 서린 다정함.
“나도 그렇습니다. 사랑 말곤 다 해줄 수 있어요. 권희원 씨니까.”그가 뿜어내는 친절함이, 결국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에 심장은 요동을 쳤다.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친절했다.
“우리 앞으로도, 잘해봅시다. 지금처럼.”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나를 향해 웃을 수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