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모르고 싶지만
“한숨도 못 잤어…….”휴. 희원은 화장실에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퀭한 시선을 응시했다.
실패했으니까.
“실패했다…….”왜일까. 그가 했던 말들 중 유난히 ‘실패했다’는 고백이 생각에 머물렀다.
타인은 좀처럼 구분하지 못할 약간은 까칠해진 자신의 피부를 바라보며, 희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쳇, 그럴 거면서 질투가 나네 마네, 나한테 그런 이야기는 왜 해?”웃긴다, 진짜.
희원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감정의 종류에 대한 확신이 없다던 그는, 아마도 확신을 끝마친 모양이다.
우리 사이에 오가던 미묘한 기류는 일회성, 휘발성.
그저 소모되고 말 순간의 기운이었다고.
……노력 아래 지워내야 하는 섭섭함이 잠시 다녀간다.
“서지환 씨, 보기보다 쫄보네. 겁쟁이.”그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대단히 힘겹게 끝냈기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걸까.
얼마나 대단히 마음을 다쳤기에 그런 사랑 일생에 한 번이면 족하다고, 앞으로의 모든 사랑을 종료했을까.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한다는 말도 있는데.
지난 사랑은 새로운 사랑 앞에 연멸한다는 말도 있는데.
“아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남이사 그러건 말건 내가 왜 이렇게 잠까지 설치면서 신경을 쓰는 건데.”……어떤 사랑이었을까. 가히 대단했겠지.
지나치다 못해 흘러넘쳤을 그의 사랑을 받으며 견디고, 행복해했을ㅡ
“나 좀 쿨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 왜 이래? 이 결혼의 의미를 벌써 잊은 거야? 지금 내가 서지환 씨보다 더 이상한 거, 맞지?”그녀는 어떤, 여자였을까.
희원은 흐린 초점으로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다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엄습하는 위기감을 애써 지워내며 그녀는 버릇처럼 세면대 물을 틀었다.
자꾸만 발끝부터 아찔아찔해지는 게,
자꾸만 손끝이 찌릿찌릿하고 가슴은 실없이 뭉근하게 저려오는 게,
“으으, 차가워. 으으으으, 정신이 번쩍 든다.”밤 사이 가위처럼 자신을 눌러대던, 실체 없는 그의 과거가 커다란 벽처럼 여겨지던.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이 느끼기에 지금 자신의 감정은 과도했다.
“……그렇지. 내가 괜한 걸 물었던 거지.”평소보다 과격하게 세수를 하던 희원은 세면대를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그래. 과도하다.
지워내고 지워내도 곧잘 생겨버리고 마는,
약간의 섭섭함과 서운함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나 역시, 과도했다.
“권희원 씨, 샤워 후에 버튼 좀 바꿔 놓으면 안 되겠습니까?”먼저 샤워를 마친 희원이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데, 지환이 들어와 뚱딴지같은 말을 한다.
희원은 드라이기를 끄며 시선을 돌렸다.
쳇, 저 남자는 출근 준비를 얼굴로 하나.
아침부터 씻은 얼굴 위로 잘생김을 흘리고 다닌다.
“무슨 소리예요? 버튼을 바꾸어놓으라뇨?”“물을 틀면 머리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달갑지 않거든요.”요지는 그러했다.
샤워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샤워를 하는 희원과 달리 지환은 손잡이가 있는 중간 샤워기로 씻기를 원했다.
그게 뭐 별거냐는 눈길로 희원은 대꾸했다.
“저도 서지환 씨가 버튼 바꿔놓아서 매일 바꾼다고요. 서지환 씨가 바꿔놓으면 되잖아요.”“잠이 덜 깬 상태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들겠습니까?”“나는 뭐, 곧잘 드는 줄 알아요? 불편한 사람이 행동하는 걸로 하죠. 수칙이 많아지는 건 질색이니까요.”지환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손을 내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희원의 표정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말없이 지환이 바라만 보자 시선을 의식한 희원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휴,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차마 토해내진 못하고 그녀는 더욱 눈꼬리를 올렸다.
저 멀끔하고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울화통이 터진다.
흥. 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람을 왜 그러고 쳐다봐요?”“혹시 잠 못 잤습니까? 컨디션이 저조해 보이는데.”“그러게요. 누구는 코도 골고 잠꼬대도 하면서 참 잘 자던데. 누구와는 달리 저는 참 잠이 안 오더라고요.”“지금 디스하는 겁니까?”“팩트 날리는 건데요?”절대로 절대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울화통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쓸모없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암! 그렇고말고!
“서지환 씨. 나도 막 생각이 나서 그러는데, 화장실 변기 뚜껑도 쓰고 내려주면 안 돼요? 불편하다고요.”“아깐 불편한 사람이 행동하는 걸로 하자더니?”“그리고 또 하나. 수건을 썼으면 새 수건을 걸어 놓아야죠. 기본 아닌가요?”하! 기본?
지환은 전투적으로 눈꼬리를 올렸다.
“내게 기본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왜 권희원 씨의 기본은 바탕이 되어야 합니까?”“잊었어요? 여긴 내 집인데.”희원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불리해질 땐 치사하게 나가는 게 최고다.
“서지환 씨는 보다시피 알다시피 임시 거주 중이죠. 게스트가 집주인을 불편하게 하면 쓰나?”“권희원 씨야말로 잊었나 본데 이 집 명의는 공동입니다. 다시 말해 내게도 권리가 있다는 말이죠. 권희원 씨와 동일한.”하지만 상대편의 치사함은 못 봐주겠단 말이다!
“무슨 수건 얘기하다가 명의까지 나와요?”“그걸 원한 건 아닙니까? 난 그렇게 알아들었는데?”파바박!
두 사람의 눈에 레이저가 쏟아져 나온다.
심란한 생각에 잠을 설친 희원이 심통을 부리자 지환도 봐주지 않겠다는 듯 눈꼬리를 잔뜩 끌어올렸다.
사소한 생활 습관이 삐거덕거리는 것이다.
함께 살기로 협의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집에서 나만 살아 거참, 드럽게 미안하네요?”“드, 드럽게라니. 깨끗하게 미안할 순 없습니까?”“없죠. 당연히 없죠.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라서요.”“그럼 나는 지금 누구와 살고 있는 건지? 난봉꾼 권희원? 칠푼이 권희원? 개념 상실한 무뢰한 권희원? 아니면 섹시한데 성격 더러운 권희원?”“뭐, 뭐요?”“골라 봐요. 지금은 어느 장단인지. 예쁜데 성격 까칠한 권희원? 아니면 귀여운데 성격 개조가 시급한 권희원?” 아. 또 말린다. 예고 없이 심장이 쿵, 떨어져 나간다.
“수식어 골랐습니까? 지금 권희원 씨의 인격은 어느 쪽인지 격하게 알고 싶은데?”으아. 희원은 홱,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서지환 특유의 신개념 욕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슬슬 풀려간다. 희한한 마법이 시작되는 주문처럼.
“아, 됐고. 사람이 미안하다는데 서지환 씨는 왜 시비예요? 사과를 하면 받아야지?”“아뇨.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감정 오래 가져갔으면 좋겠으니까. 가급적 드럽게 오랫동안.”우이씨! 얼굴을 붉혀가던 희원은 차게 식는 마음을 느끼며 지환을 노려보았다.
파바바박ㅡ!
종전보다 더욱 신랄한 레이저가 두 사람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
희원은 가슴이 들끓는 이유를 묵과하며 더욱 불툭 튀어나온 입술을 움직였다.
왜 이렇게 심보가 베베 꼬이는지 모르겠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미쳐 길길이 날뛰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럼 이 대목에서 협의 봐요. 버릇이 달라 발생하는 불편함은 각자 해결하는 걸로.”그녀는 말끝에 거울로 시선을 돌리며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이미 발라 놓은 영양크림 뚜껑을 열어 다시 얼굴에 듬뿍 올렸다.
사실은 그녀는 지금 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왜 안 나가고 그러고 있어요? 출근 준비 안 해요?”“나 뭐 잘못했습니까?”“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나 뭐 잘못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밤사이 온도차가 이렇게 심할 수 있나? 사람이?”“살면서 더 한 온도차도 겪어본 사람이 무슨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희원은 더 이상 스며들지도 않는 영양 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정. 나 지금 괜한 짜증을 부리고 있다.
“알았어요. 잠 설쳐서 좀 예민해요. 그럴 때 있잖아요.”“잠 설쳐서 예민한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예민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으휴, 직업병이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네.
“생활 습관 관련해서는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서지환 씨가 무슨 말을 해도 다 튕겨낼 것 같으니까.”정신없이 뱉어낸 말들에 다소 미안해진 희원은 급히 그를 피해 침실 문을 열었다.
일방적으로 툴툴대고 일방적으로 사과를 시도하니 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아침 차려줄게요. 출근 준비해요.” 아침을 차려준다니 금세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어후, 얄미워. 오늘따라 왜 저렇게 얄밉지.
“권희원 씨.”갑자기 그가 부른다.
마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생활 싸움하지 맙시다.” 사람 미안해지는 소리를 한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우리는 싸우면 안 됩니다. 싸우다가 정드니까.”아오…… 이 인간이 진짜…….
희원은 지환의 얄미운 말에 눈꼬리를 다시 올렸다.
머리를 툭툭 털며 지환은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틀림없다.
“이 와중에 아침을 차려준다니 고마운 마음은 드네요. 난 그냥 쫓겨날 줄 알았는데.”“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아침을 차려준다고 했지, 맛은 아직 결정 안 했으니까요.”메롱. 그녀는 혀를 쏙 내밀며 약 올리더니 쏙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오…….”그의 입에서 신랄한 탄식이 흘렀다.
얄밉게 사라진 그녀 얼굴을 곱씹다가, 지환은 닫힌 문 사이로 크게 외쳤다.
“국에 독만 타봐! 가만 안 둔다 진짜!”웃겨! 내 마음이지롱! 멀리서 그녀 음성이 들린다.
지환은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헝클었다.
“내가 뭐 단단히 잘못한 것 같은데. 샤워기 얘기를 괜히 했나.”되로 주고 말로 받는, 정신없는 아침의 시작이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는데?”출근한 지환은 잠시 커피를 마시며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아침에 희원과 있었던 일을 최금호 계장에게 이실직고하며, 지환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묵묵히 듣던 최 계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바가지 긁히셨네요. 이제 시작인 모양입니다.”“바가지?”“주무시기 전에 사모님 심기를 어지럽히신 모양이지요. 그러니 아침에 티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별일 없었습니다. 치킨 먹고 맥주 마시고. 좋았는데요.”“경우의 수는 너무 많지요. 닭다리를 하나 더 먹었다거나, 책잡힐 말을 했다거나.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었다 깨도 바가지 긁히는 이유를 모릅니다.”“하…… 뭐, 없었는데. 잘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
문득 지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얄팍한 문장이 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지만 어쩐지 뱉고 나서 개운하지 않던, 자백.
멍하니 어제 일을 회상하는 지환의 얼굴을 살피던 최 계장은 다시 크게 웃었다.
“곱씹다 보니 집히는 게 있으시지요? 사모님의 유도신문에 넘어갔다거나.”“계장님, 저희 집에 CCTV 달아놓으셨습니까?”“보통 그때쯤 싸우는 건 큰일이 아닙니다.”허허. 허허허허. 최 계장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웃어댔다.
아침부터 바가지를 잔뜩 긁히고 와서 한풀이를 하는 지환의 모습이 즐거운 모양이다.
“일하실 때 하곤 정 딴판이신데요. 검사님도 별수 없는 모양입니다.”“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가 없어요. 이런 적수는 처음입니다.”“칼 든 강도가 더 쉽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하…… 어렵다…….
지환은 희원과 어제 나눈 이야기들을 상기하며 짐짓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뱉은 말이 모두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떠한 ‘부분’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볍게 들었다.
뭐, 그럴 위인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여어, 서지환 검사.”그때였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지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지환과 최 계장의 허리가 깊숙하게 내려간다.
윤명국 지검장이다.
“지검장님. 안녕하십니까. 서지환입니다.”“그래그래, 한창 바쁘지. 만난 김에 잠깐 얘기 좀 할까?”윤 지검장의 말에 최 계장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둘만 남은 공간, 윤 지검장은 웃는 낯으로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보고서 봤어. 금괴 밀수 건 아주 밀도 있게 수사 진행 잘하고 있던데.”“안 그래도 인력 부족으로 충원 요청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됐어. 이만하면 됐지. 잡을 만큼 잡았잖아.”……예? 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허허, 윤명국 지검장은 연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적당히 하고 수사 종결해야지. 자네만 보고 있는 사건이 몇 개인데, 그건 다 어찌 처리하려고.”“일엔 순서가 있습니다. 임의 종결은 예상에 없습니다. 지검장님.”“어허, 그만하면 됐다니까. 줄줄이 엮어서 잘 데려왔잖아. 이번 일이 끝은 아닐 거고, 또 있어. 그때 다시 수사 시작하자고.”지환은 지검장의 회유에 입술을 굳게 닫았다.
“아아, 그리고 말이야. 조만간 나하고 식사 한번 하자고. 서검 결혼하고 나서 축하도 제대로 못 했으니 정식으로 자리 한 번 마련하지, 내가.” “예. 지검장님.”“그래. 그럼 수고하고.”지검장은 지환의 팔을 꽉 잡아 힘을 주고는 손을 내렸다.
느린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지검장을 길게 바라보다가, 지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검장은 권유를 한 것이 아니었다. 지나가다 마침 생각이 나서 흘린 권고도 아니었다.
수사 종결ㅡ
“덮으라니, 대체 뭘…….”압력이었다.
“어서 와요. 하리 잘 데려다줬어요?”“그럼요. 잘 데려다줬습니다.”아이를 집에 데려오라고 성화였던 본가에 하리가 출동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 웃음과 사랑을 전파하니, 이쯤 되면 어른들이 하리를 보살피는 게 아니라 하리가 어른들을 보살피는 게 틀림없었다.
지환이 하리를 본가에 데려다주고 들어오자 희원은 물끄러미 하리의 방을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왔는데 하리가 없으니까 썰렁하더라고요.”“나마저 없어지면 이 집은 시베리아 벌판이 될 겁니다.”“…….”“농담 참 안 받아주네요. 야박하…….”“인정해요. 서지환 씨도 없으면 되게 허전할 것 같아요. 당분간은.”희원이 씩 웃으며 긍정하자 지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냐. 지금 약간 가슴이 간질간질했는데.
“서지환 씨 이런 농담 좋아하잖아요. 나도 해봤는데, 싫어요?”“그거, 되게 해로운 농담이었네요.”“네?”“밥 먹읍시다. 출출해요.”지환은 그녀의 질문을 콱 씹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옆모습은 아침과는 사뭇 달라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가만히 보면 들었다가 놨다가 곧잘 하는 여자다.
“카레, 어때요? 만들어놨는데.”“실토하지 않아도 이미 집 안에 냄새가 가득해요. 냄새를 맡으니 배는 더 고프고.”밥은 두 공기 예약입니다.
지환은 희원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가만히 멈춰 선 지환은 천천히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집의 풍경, 냄새.
아침에 입었던 잠옷이 그대로 걸려있는 옷장,
없으면 되게 허전할 것 같아요.
당분간은.
모든 것이 두 개가 된 이 집,
하루가 정리되는 시간 끝에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허전하다라…….”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곤 생각했다.
사실 하리를 본가에 데려다주고 자신은 원래 살던 집으로 갔어도 되는 일이었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어찌 보면 그게 더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하리가 없으면 자신도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게다. 왜 이리 왔지, 내가…….”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인 것처럼.
다른 곳은 없는 것처럼.
“뭔가…… 이상한데…….”그녀도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곳으로 내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마치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것처럼.
“카레 다 태웁니까?”……아. 희원은 멍하니 대충 휘젓던 카레를 열심히 휘저었다.
온종일 아침 그대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내내 심란했던 차였다.
퇴근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심란함은 더욱더 증폭된 상황이었고.
“서지환 씨, 태운 카레 먹어봤어요?”“아뇨.”“그럼 오늘 먹어봐요.”휴. 심란해 죽겠다. 희원은 열심히 휘젓던 손길을 멈추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권희원 씨, 설마 카레에 소금 들이부은 건 아니죠. 아침 일로 내게 앙심을 품고.”지환의 말끝에 희원은 서랍장 여기저기를 뒤졌다.
뚱하니 바라보던 지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합니까?”“소금 찾아요. 그 생각을 못 했거든요.”아아, 여기 있네. 희원이 소금통을 잡자 지환이 정색한다.
“이 여자가 진짜, 농담 구분 못 합니까? 무서워서 못 살겠네!”놀란 지환이 소금통을 붙잡는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소금통을 따라 그녀가 홱, 돌아선다.
아차, 지환이 너무 세게 돌려세웠다는 생각에 눈썹을 씰룩거리자 희원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운 간격.
마음만 먹으면 조금 더 다가설 수 있는 좁고 좁아진 간격.
“서지환 씨.”……더는, 안 되겠다.
“앞으로 나한테 농담하지 마요.”가깝고도 아득한 간격 사이로 그녀 진심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나 좀 헷갈리기 시작했거든요.” “…….”“당신의 말이 어디까지 농담이고 진실인지 구분도 잘 안 되기 시작했고.”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헷갈림은 어디까지 괜찮을까요. 어디까지 헷갈린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내가 여기서 더 헷갈려하면 우리가 위험할 것 같은데.
“이 헷갈림, 방관할 자신 없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앞으로 농담하지 마요.”희원은 그를 올곧게 바라보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이 마음, 사력을 다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나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거 알죠. 서지환 씨.”그렇지 않으면 그도 나도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미 벌어졌나.
“밥 먹죠. 자리에 앉아요. 금방 줄게요.”아마, 그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