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의 여자
“어디 가냐?”며칠이 흘렀다.
시간이 가는 동안 그와 그녀가 사는 집의 풍경엔 다소 변화가 있었다.
급격하게 두 사람은 말수가 줄었고, 서로를 피하다시피 하며 최소한의 접촉만 허용했다.
암묵적인 협의가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멀리 대했다.
“어이, 차검.”목적 없이는 말을 걸지 않았고ㅡ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 않았다.
서로를 터무니없이 가까이 대하며 곧잘 살갑게 굴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야 했었다는 것처럼.
“야, 차정윤.”“아, 왜! 왜! 뭐! 뭐! 왜!”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정윤을 발견한 지환은 앙칼진 정윤의 대꾸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하는데 사람이 불러도 듣지를 못해?”“못 들은 게 아니고, 안 들은 거거든?”“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디 가냐?”“어딜 가겠지. 가니까 걸었을 거고. 그런걸 질문이라고 하냐?”저쯤 우두커니 서서 노려보듯 바라본다.
그 눈빛에 피식, 헛웃음을 흘린 지환은 다시 정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허, 오랜만이네? 이게 아주 염장을 지르네. 니가 오지 말라며. 접근 금지라며!”“……아.”아아. 맞다. 지환은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더욱 크게 웃었다.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금세 씩씩거리며, 정윤이 눈을 더욱 치켜든다.
“아아? 아아아? 허, 쟤 봐라! 진짜 어이가 없네!”“어이만 없어? 정신도 없어 보이는데. 상실? 소멸?”“나한테 농담 치지 마! 재수 없어!”“하,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농담하지 말라는 사람이 많아. 여기나 저기나.”“뭐?”“됐고, 눈꼬리 힘 좀 빼라. 한 대 칠 거면 빨리 치고.”어쩐지 요즘 차정윤 코빼기도 안 보인다 했더니.
딴에는 피해 다녔던 모양이다.
“남녀가 대단히 유별하신 나으리께서 어인 일로 천한 소인에게 말을 다 걸어주십니까요?”“어쭈.”“님 아구창…… 아니, 나으리 구순에 심심함이 끼셨나이까? 놀아줄 마님께서 출타라도 하셨는지요?”“어랍쇼?”“꺼지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는 척이야, 기분 나빠. 퉤퉤퉤.”퉤퉤퉤. 정윤이 바닥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한다.
지환은 그 어색한 정윤의 비아냥에 쯧쯧 혀를 차다가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가리켰다.
“뭐야. 좀 나눠줘. 배고파.”“이거? 이거 요 앞에 새로 생긴 집에서 만든 치아바타인데 맛있…….”넙죽 지환의 말에 대꾸를 하던 정윤은 말꼬리를 흐렸다.
또 맛있는 치아바타를 사서 홀로 맛없게 먹겠구나, 쓸쓸해하며 걷고 있던 중이었는데.
거지 같은 서지환이 나타나 같이 먹어줄 눈빛을 하니 덥석 반가워지는 것이다.
“좀 줘봐. 배고프니까.”“나으리, 어찌하여 굶고 다니시온지요? 소인이 알기로는 배떼기가 터지도록 조식을 챙겨 드시지 아니하십니까?”“콱, 시끄럽다.”오늘은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했다.
어제 늦게까지 이어진 공연 연습으로 녹초가 된 그녀는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자더라.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왔다.
“아오, 얄미워. 서지환.”정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환을 노려보다가 터덜터덜 그를 향해 걸었다.
가까이 다가서지는 않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멈춰 선 정윤은 지환을 바라보다가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커피 사. 공짜는 없어.”“내가 자네 일감을 덜어준 것이 얼마인데 공짜를 운운…….”“가시죠, 나으리. 소인이 이깟 빵 쪼가리에 연연하겠나이까? 가시죠.”틈틈이 업무를 알게 모르게 도와준 지환이 생색을 내자 정윤은 금방 꼬리를 내렸다.
어정쩡한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걸었다.
“잘됐다. 이거 진짜 맛있는 거야. 말랑말랑하고 지금 갓 구워서 엄청 따뜻해.”“너 일은 안 하고 맨날 뭐 먹을 거 사러 다니냐?”“야, 먹어야 일하지. 먹기 위해 일하는 거야. 몰라?”“그래. 니 말이 맞다. 3층에서 먹자.”“콜.”막연히 같은 곳을 향해 걸었지만, 아무도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그, 말이야. 있잖아.”빵을 나눠 먹던 정윤은 아까부터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환은 해보라는 눈길로 커피를 한입 삼켰다.
“금괴 밀수 건으로 홍용석 기소했지?”“했지. 홍용석만 했나 뭐.”홍용석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밀수 조직의 큰손이었다.
핵심인물은 아니라 해도, 조직의 끝과 끝을 잇고 있는 인물임은 확실했다.
“홍용석 조사 과정에서 말야. 그땐 별거 아니라고 해서 그냥 넘긴 일이 있는데.”정윤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눈빛을 했다.
업무 이야기로 대체 뜸을 들일 게 뭔가 싶어 지환은 궁금증을 담은 시선을 했다.
“홍용석 고등학교 동창 중에 차민규라고 있어.”“그런데.”“그…… 백인호 의원, 있잖아.”커피잔을 들던 지환은 잠시 멈췄다.
그 이름 석 자에 전신의 움직임은 굳듯이 정지했다.
“차민규가 백인호 의원의 작은 고모 아들이더라고.” 전혀 연결하지 못한 연결고리가 탄생한다.
“원래 이름은 김용운인데, 그 고모가 재혼을 하면서 성을 바꾸고 이름도 개명을 했어.”“언제?”“3년 전.”연결이 될 듯 말 듯 한 작은 접점에 지환은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 운을 떼었다.
“우연 아냐?”“그럴지도.”정윤은 빵을 다 먹고 빈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고모가 재혼한 사람이 홍콩에 회사를 운영하고 있더라고. 3년 전부터.”버릇처럼 종이를 반듯하게 접었다.
“3년 전이면 총선이 있었던 때고. 백인호 의원이 재선에 당선된 때고. 출처 불명 선거 자금 유통으로 다음 해 온국민당에서 여럿 잘려나간 때이기도 하고.”“…….”“그 뒤로 쇄신하겠다며 당 이름을 국민인권당으로 바꾼 거잖아.”편지를 접듯 종이를 접은 뒤, 다시 테이블에 내렸다.
“최종적으론 금괴 밀수가 인천공항에 처음 적발된 해이기도 하지.”……드라마다.
지환은 정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나치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야, 웃지 마. 그게 더 무서우니까.”정윤은 그런 녀석의 표정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오늘은 먼저 찾아가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
녀석에겐 달가울 리 없는 그 이름 석 자.
백인호.
“네 생각 어때? 난 지금 여기까지 팠어.”지환은 마른 주먹을 말아 쥐었다.
드라마다.
드라마여야 한다.
“어떡할까. 더 팔까, 아니면 멈출까. 우연이야? 차정윤 표 시나리오?”“…….”“지검장님이 수사 종결하라고 했다며. 덮어? 우연이니까? 유력한 차기 서울 시장을 선상에 올려놔도 될까? 우연만으로?”하지만, 드라마이길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바람이고 기대일 뿐.
“가능성, 열자.”지환은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과 엮여있는 강희주의 얼굴이 끝끝내 스치고 말았지만 그런다고 덮을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열자. 모든 가능성. 충분하니까.”“오케이. 됐어.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나는, 서검 너한테.”현재의 백인호 의원을 사건에 엮는다는 건 시도부터 어떠한 무게감을 가져야 하는지,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이 접은 종이봉투를 지환의 방향으로 밀었다.
다 마신 커피잔도 지환의 방향으로 밀었다.
“일만 하자. 일터에선 일만. 서검, 네가 여기 있고 그 사람이 정치판에 있는 이상 지구 반대편에서 살듯이 살 수는 없을 테니까.”“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 알았어.”“그리고 이 와중에 이런 말까지 해서 미안한데.”정윤이 말을 끊자 지환은 긴장한 눈빛을 올렸다.
더 무슨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하는 불안함이 일순 그를 덮쳤다.
그런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정윤은 입술을 열었다.
“쓰레기는 네가 버려.”“아오…….”간다. 정윤은 쿨하게 사라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준 의상으로 공연 준비를 마친 희원은 다시 한 번 몸을 풀었다.
오늘은 지난주에 급히 잡힌 스케줄ㅡ
VIP 사모들의 모임 및 공연 관람이 있는 날이다.
“사람을 이 시간부터 오라 마라야…….”요 며칠, 무리한 연습이 이어졌다.
이왕이면 가장 수준이 높은,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볼 것이 풍성한 공연을 준비하고 싶었다.
우리 문화 예술계를 발전시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누구라도, 힘이 되어주길 그녀는 소망했다.
예술의 명맥을 이어가는 일이란, 단지 개인의 노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리허설 언제 들어가요?”리허설을 해야 한다더니 사람을 불러놓고 무작정 기다리란다.
희원은 막연히 앉아 시간을 죽이다가, 일어서 하염없이 몸을 풀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관계자를 불렀다.
안 그래도 바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계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툭툭 쳤다.
“희원 씨, 지금 바빠요. 나중에 얘기합시다.”“아니, 나중은 무슨 나중이요. 리허설 언제 하냐고요.”“지금 앞당겨졌어요, 시간이. 우리 지금 우왕좌왕하잖아요.”“……뭐라고요?”시간이 앞당겨져? 희원은 눈을 치켜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희원은 급히 돌아서는 관계자를 붙잡았다.
“공연 시간이 앞당겨졌으면 더욱이나 빨리 리허설을 해야죠. 그리고 공연자에게 언질도 없는 건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희원 씨, 잠깐만요. 우리도 지금 비상이에요. 잠깐만. 응? 잠깐만.”관계자는 무전을 받더니 다시 황급히 사라진다.
허, 희원은 황당함에 말을 잃고 관계자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뭐 이런 해외토픽에 날 일이 다 있어. 기본 매너도 없어? 이게 무슨 개판이야?”컨디션이 급격하게 내려간다. 밀도 높은 공연을 앞두고 감정 기복이란 상당히 위험했다.
빠른 동작에 스치고 말 것들이 아니라, 느린 곡조에 감정과 혼이 담겨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미쳤네.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하나.”후…… 희원은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 문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공연장에 들어서, 분주한 사람들을 제치고 무대 위로 당당히 걸어 올라갔다.
“리허설하죠! 시간 없다면서요!”짜증이 가득 섞인 희원이 말을 던지자 스태프들이 바라본다.
“하, 희원 씨. 잠깐만 기다리시라…….”“그럼 나 가요? 집에?”희원이 단정하게 묶어 놓았던 머리를 끌렀다. 머리끈을 팔목에 차며, 눈을 크게 떴다.
“갈까요? 이런 공연 백억을 준대도 하기 싫은데.”“아…… 희원 씨, 왜 그래요. 에이, 서로 바빠서 그러는 건데.”“공연에 공연자보다 더 바쁜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바삐 일들 보세요. 한가한 공연자는 돌아갈 테니까.”“예예. 리허설하죠. 바로 합시다.”급히 뛰어오는 감독이 급격하게 냉랭해지는 분위기를 바로잡는다.
“희원 씨, 미안해요. 지금 VIP들 비서진들이 먼저 도착해서 이래라저래라, 지금 아주 말도 아닙니다.”그제야 무대로 다가와 이해를 구하는 스태프의 말에 희원은 앙칼진 눈매를 들어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희원은 심호흡을 했다.
“아시잖아요, 희원 씨. 저 시커먼 양복 입고 온 사람들 아주 깐깐해서 뭐 말도 못…….”“다들 들으세요! 이 공연 서커스 아닙니다!”장내가 조용해진다.
그녀는 사색이 된 스태프 너머로 비서진들을 응시했다.
이제 보니 스태프들이 그곳에 묶여 이도 저도 못한 채 서류더미만 옮기고 있다.
……요구하니, 급조했을 것이라.
그랬으니 발이 묶였고.
“동물원 코끼리 구경 아니고, 장기자랑 무대 아닙니다! 해오던 질서 지켜주시죠!” 희원이 소리치자 비서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제지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룰이 있단다.
“절차가 모두 확인되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우리도 절차가…….”“됐고! 이곳은 이곳의 절차가 우선입니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 앞에서 최악의 공연 보여드릴 생각 아니라면 물러서세요!” “…….”“다들 리허설 안 할 거야, 진짜?!”희원이 다시 소리를 높이자 쭈뼛쭈뼛 스태프들이 자리로 돌아간다. 여간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다.
하…… 단전에서부터 급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비서들은 저들끼리 몇 마디 주고받더니 밖으로 퇴장한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묶고, 이제야 조용해진 앞을 바라보았다.
낯선 이들이 퇴장한 공간. 스태프들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 좀 멋있었어?”희원이 분위기를 풀며 웃자 스태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했어요, 희원 씨.”“멋있어. 우리 진짜 초조했다고요.”“반하면 곤란해. 나 유부녀인데.”……말끝에 희원은 잠시 지환을 떠올렸다.
눈을 뜨니 그가 없는 아침이었다. 고된 연습에 쉽사리 눈이 떠지질 않더라.
하리를 봐주시는 이모님이 차려준 누룽지 몇 수저를 뜨고 정신없이 달려 나왔다.
서지환 씨에게 연락을 해볼걸. 요즘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어색한 나날들.
“……집중.”희원은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
번뇌가 쌓일수록 그녀는 몸을 움직였다. 발산하는 에너지에, 복잡한 속내를 씻어냈다.
쌓이고 씻어내고, 쌓이고 씻어내고.
“시작할게요! 희원 씨!”“네!”요즘 그녀의 하루하루는 그러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무대까지 끝냈다.
앞당겨졌다더니 바로 들이닥치더라. 그때 리허설을 하지 않았다면 리허설도 못 했을 판이다.
스태프들은 일제히 등장한 VIP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비서진들과 협회, 예술계 관계자들까지 몰려 북새통이었다.
스무 명 남짓 와서 조용히 보고 갈 예정이라더니. 그게 어딜 봐서 스무 명이고, 그게 어딜 봐서 조용히 보고 간다는 말인지 정말 황당하더라.
갑자기 잡힌 공연치고 스케일이 컸다.
공연자가 가슴에 담을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기가 찼다.
갑질.
문득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후…… 하우…… 힘들어…….”대기실로 돌아온 희원은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실수 없이 공연을 끝냈다는 개운함이 아니라, 어쩐지 짜증이 났다.
“다신 내가 이런 공연 하나 봐라.”내가 다시 이런 공연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후, 후, 이를 갈며 물만 삼키던 희원은 화장을 지워내려고 클렌징 티슈를 잡았다.
두꺼워서 여러 번 지워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열심히 화장을 지워낸, 그때였다.
대기실로 누군가 찾아와 문을 연다. 모르는 사내다.
“누구시죠?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데.”가지가지 말썽이다. 공연자 대기실로 낯선 이가 등장하다니, 이게 웬 말이냐.
“관계자입니다.”“제게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요.”“…….”“신분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고.”사내는 조금 다가오며 명함을 꺼냈다.
희원은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본인이 걸어가 명함을 낚아채듯 받아 보니, 비서실장이라는 직함과 이름이 있다.
“그런데요.”짧게 확인하고 명함을 내린 희원이 고개를 들자 사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 사모님께서 권희원 씨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사모님이 누구신데요. 거두절미하면 제가 알아듣습니까?”“강희주 회장님입니다. 이 모임에 회장님이신.”강희주. 백인호 의원의 아내.
한때 잘나가던 슈퍼모델계의 스타.
“아아, 그래요. 마침 잘됐네요.”희원은 잘됐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면 화병이 날 것 같았는데, 회장님이라니 아주 잘됐다.
“오늘 공연 주최 측에 이하 직원들께서 얼마나 실례가 많으셨는지, 제가 보고서 작성엔 능력이 없어서요. 구두 항의가 딱 제격인 성격이라.”앞장서요. 만나러 가죠.
희원은 사내에게 앞장서라 고갯짓을 했다.
그녀의 까칠함이 달갑지 않은 사내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공연 후 한차례 인사 및 사진 촬영까지 끝낸 터라, 공연장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VIP들은 각자의 차량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희원은 사내를 따라 걸었고, 뒤돌아 서성이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여성이 뒤를 돌아선다.
“아, 권희원 씨.”두 사람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섰다.
희원을 안내해준 사내는 멀어졌고, 그 자리에 남은 두 여자는 눈빛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권희원입니다.”초면이라 하기엔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
희원은 TV로 그녀를 보아왔었고ㅡ
“반가워요. 저는 강희주라고 해요.”희주는 희원을 SNS로 보아왔다.
멀뚱멀뚱 서 있던 희원은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할까 생각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 희원의 손끝을 내려다보던 희주는 망설이다가 그녀 손을 잡았다.
“한국무용을 찾아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많은데 잠시 얘기 나누시죠.”서로 다른 뜻을 품은 만남이었다.
희주는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한 눈길로 응시했다.
사진과 꼭 같은 얼굴, 마디마디 힘 있는 음성, 거침없이 악수를 청하는 자신감 충만한 행동까지.
“이렇게 만나는군요. 권희원 씨.”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상상도 하지 못할 그의 여자를 바라보다, 희주는 웃었다.
“네?”애매한 희주의 말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희주는 고개를 슬쩍 가로 저었다.
입가엔 달갑지 않은 미소만 매달았다.
“정말 반가워요. 권희원 씨.”“아, 네. 반갑습니다.”“그래요. 우리 잠깐 이야기 나눠요. 저도 권희원 씨와 대화를 좀 하고 싶었어요.”웃는 일 말고는 지금 당장 희원의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면이건 아니건 간에.
진심이건 진심이 아니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