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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원하지 않았던 (30/98)

30. 원하지 않았던

“뭐야…… 이젠 하다하다 짝사랑을…….”이튿날.

희원은 연습실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욕이다. 

“꼴좋다, 꼴좋아 권희원. 이제 어쩌냐? 응? 권희원. 너 이제 어떡할래?”난 지금…… 너무 슬퍼……

슬퍼도…… 너무 슬퍼…….

“에휴…….”쿵, 쿵, 희원은 뒤통수를 벽에 쿵쿵 찧으며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뱉어봐야 한숨이요, 떨궈봐야 막막함이다. 

가슴의 두근거림은 밤낮 가리지 않고 멈출 기미가 없다. 

다른 생각을 해본들 그의 생각이 덮어지는 것도 아니요, 외려 동시에 뇌리를 장악해 머리만 더 아플 뿐이었다. 

희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힘없이 일어섰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한편으론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나를 어떻게 좋아하게 만들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이는데.”사랑 같은 건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를 어떻게 구슬려야 하는지, 의지만큼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열과 성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고 싶지만 그게 노력으로 될 일인가.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결혼의 목적을 잊고 무시하며 내 마음을 강요해도 되는 건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해. 어후, 진짜 막막하네.”언제나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 뒤로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이제는 보이는 것만 같다. 

그를 향해 생겨난 제 마음이 원망스럽고, 결단코 해피엔딩은 아닐 것만 같아 어깨는 계속 내려가기만 할 때ㅡ 그때였다. 

텅 빈 연습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여보세요? 지환 씨?”그의 전화다.

ㅡ바쁩니까? 연습 중?“아뇨. 연습 끝났어요.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어요? 퇴근?”종전의 무거웠던 생각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 기분은 하늘 위로 올라갔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특별했다. 

특별해졌다. 

특권처럼.

ㅡ아니,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아…… 늦는다구요.”ㅡ일이 좀 있어서요. 저녁을 먹고 들어갈 것 같아서.“네. 할 수 없죠. 걱정 마요, 하리는 제가 잘 챙길게요.”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도 아닌데.

설마하니 일부러 늦게 들어오겠다는 것도 아닌데.

일 때문에 늦는다는 그의 말이 더럭 서럽고, 아쉽고, 서운하다.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묻고 싶지만 희원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런 사소한 질문조차 허락된 부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더 내려갔다. 

ㅡ지검장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셔서 어쩔 수가 없게 됐네요.그런 그녀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그는 먼저 늦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을 했다. 

ㅡ일찍 들어가고 싶은데 희원 씨도 알겠지만 상사 호출엔 거절이 힘들어서.“아, 그랬구나!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상사의 호출이라니 희원의 표정이 밝아진다. 

주책이다. 감정은 교육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멋대로 굴었다. 

웃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웃음이 났고, 이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음성은 올라갔다. 

ㅡ중간에 연락할게요. 그렇다고 너무 늦진 않을 거고.눈물겨운 짝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요. 알겠어요.”ㅡ그럼 끊어요.“저기, 서지환 씨.”희원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 석 자를 내뱉었을 뿐인데 지르르르, 심장 부근으로 통증이 밀려온다. 

ㅡ네. 말해요.“아…… 고마워요. 늦으면 늦는다고 말해줘서.”내가 당신을 기다리지 않게 해줘서.

아니, 

늦는다는걸 알게 되어도 나는 당신을 기다리겠지만.

ㅡ별게 다 고맙네요. 오늘 권희원 씨 좀 이상한데요.그가 웃는다. 

그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웃음소리에 그녀 마음이 뜨거움으로 물든다. 

ㅡ끊어요. 희원 씨. 집에서 봐요.“네. 알겠어요.”그의 음성이 끊어진 휴대폰을 들고, 그녀는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했다. 

작은 기기에 배어 있는 온기가 마치 그의 것인 것만 같아 빠르게 식어가는 것이 못내 마음 상했다. 

“별일이다. 내가…… 진짜 별일이야…….”그래, 이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향한 의미 부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로 시작해서 그로 끝나는, 길고도 짧은 하루는 이렇게 펼쳐졌다. 

비처럼 쏟아지니 젖고, 첫눈처럼 설레니 심장이 뛰고, 태풍처럼 몰아치니 휘청거렸다. 

희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예감했다. 그를 향한 이 감정은 감히 막거나 피할 수 없는,

“당분간은 되게…… 힘들 것 같다…….”천재지변이었음을.

“어어, 서검. 어서 와.”한적한 일차선 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다 보니 윤명국 지검장이 알려준 일식집이 나온다.

지환은 시동을 끄기 전 시간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어둠이 시작하는 공간에 내린 짙은 푸름은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지환은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장사가 안 돼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산한 느낌.

“어서 오십시오.”모든 직원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떼기도 전에 안내부터 해준다. 

지환은 지검장의 단골집이겠거니, 범상치 않은 이곳의 규모와 인테리어를 눈에 새기며 직원의 뒤를 따랐다. 

“이곳입니다.”직원이 알려준 곳에 멈춰 선 지환은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려다가 잠시 멈췄다. 

가지런히 옆에 놓여 있는 구두 두 켤레.

지환은 직원을 바라보았다. 

“여기, 지금 두 사람이 있습니까?”“네. 그렇습니다.”지금 이 방 안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지검장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이 구두의 주인일 것이라.

미리 알면 오지 않을 것이니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지금 이 구두의 주인은 위험하거나 은밀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환은 가만히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돌계단을 밟고 신발을 벗었다. 

직원이 때맞춰 문을 열어주고ㅡ

“여어, 서검. 잘 왔어, 어서 와.”제일 먼저 보인 사람은 그의 상사이자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윤명국 지검장. 

완벽하게 문이 열리고, 지검장 맞은편의 사람이 시선에 들어온다.

지환은 들어가려던 발길을 멈추며 우뚝 섰다. 

“뭐 해, 서검. 어서 들어와. 어서.”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눈앞은 깜깜해졌다가, 조금씩 환해졌다. 

발아래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위험하거나 은밀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둘 다를 가진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검장 맞은편의 사내ㅡ 

“어어? 이봐 서검, 얼른 들어와. 문 닫아야지.”백인호 의원이었다. 

“허허, 우리 서지환 검사가 의원님을 뵙고 아주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사전에 말을 안 했지 뭡니까.”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에 들어와 있다. 

딱딱하게 굳다 못해 날카로워진 지환의 표정을 살핀 윤명국 지검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 지검장이 어깨를 두드리자 현실감이 깨어난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백인호입니다. 서지환 검사님.”백인호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환과 눈높이를 맞췄다. 

팔을 쭉 뻗는 자세로 악수를 청하며, 백 의원은 지환을 응시했다. 

“…….”지환은 굳게 다문 입술을 한 채 백 의원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래저래 눈치를 본 윤명국 지검장은 빠르게 지환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허허, 서검. 이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응? 무슨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긴장했네? 허허.” 억지로 두 사람의 손을 엮으며 지검장은 애써 분위기를 중화했다. 

어찌 되었든 손이 엮이니 백인호 의원은 다른 손으로 지환의 손을 감싸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얼굴엔 사람 좋은 미소가 걸린다. 

“검사님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윤명국 지검장님께서 우리 검사님을 무척이나 훌륭하다고 칭찬하셔서, 제가 격려차 한번 뵙고 싶다 청했습니다.”“몰랐겠지만 서검, 내가 의원님하고 꽤나 막역하게 지내. 겉으로 드러낼 일은 아니라 쉬쉬했지만 의원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 행여나 오해할까 봐 하는 얘기야.”잡힌 손이 위아래로 흔들리건 말건,

이곳저곳에서 상황을 설명하기 바쁘건 말건,

지환은 말없이 백인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웃고 악수를 해도 차가움을 온몸으로 뿜어내니 백인호 의원은 힐끔, 지검장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찰나에 손을 뺐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중함을 담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그러곤 웃었다. 

“제가 상상도 못한 분이 계신 터에 잠시 놀라서, 결례했습니다.”“아, 아아. 하하하, 네. 이해합니다, 검사님.”“서지환입니다.”지환은 조금 머리를 숙인 인사로 묵례했다. 

도리가 없었다. 

“네. 서지환 검사님.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백인호입니다.”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자자, 통성명 끝났으면 앉읍시다. 의원님도 앉으시고 서검, 앉아.”지검장이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한다. 

백인호 의원은 표정을 풀었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음이 분명한 지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ㅡ

“앉으시죠, 검사님.”많은 것을 몰랐다. 

“하리야, 이거 줄까? 이거 가져가서 하리가 읽을래?”“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읽던 책을 하리가 어떻게 읽어요. 절반 이상이 한자잖아요.”“그럼 하리야. 이거 먹을래? 이거 줄까?”“할아버지, 아무거나 먹이면 안 된다니까요. 더욱이나 홍삼 절편은 하리한테 써요.” “그래? 그런가? 그럼 하리야, 뭐 줄까. 응? 뭐가 가지고 싶으냐?”“헤헤.”희원은 하리를 데리고 부모님 댁을 찾았다. 

하리를 봐주고 있다고 하니 아이가 궁금했는지, 부모님은 며칠 전부터 집에 오라 성화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하리를 데려오니 제일 안달복달하는 쪽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였다.  

하리는 객관적으로 봐도 사랑스럽게 생기기도 했거니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붙임성이 좋으니 어른들의 애간장이 녹아날 수밖에 없다. 

하리는 부모님 집에 오자마자 이 집안의 스타가 되었다. 

“서 서방 형 되는 사람이 교수라고?”“네. 대학교수님이요. 형님도 교수님이고.”“세상에, 이걸 두고 눈에 밟혀서 어찌 생활하고 있을꼬?”하리야. 부모님 안 보고 싶으냐? 

할아버지는 바라만 봐도 하리가 닳을 것 같은 근심을 담고 물었다. 

굳이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희원은 약간의 걱정을 담은 시선으로 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는 고개를 번쩍 들며 권 선생을 똘망똘망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여, 하리가 이케 이케 열 밤, 열 밤, 열 밤, 자면 온댔어여. 그리고 엄마 아빠는여, 훌늉한 사람들을 어, 어, 만들기 위해서 어, 멋찐 일 한다고 했어여.”“허, 애 똑똑한 것 좀 봐라. 희원아.”“할아버지, 혈압 조심하세요. 애가 너무 귀엽다고 갑자기 심장 막 뛰면 안 돼요.”권 선생이 심장 부근을 부여잡자 희원이 염려된다는 듯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했다. 

다 커 버린 어른들끼리 사는 집에 아이 물건이 있을 리가 있겠나. 

당장 인형의 집을 사 오겠다며 아버지는 마트로 떠난 지 삼십 분째.

엄마는 아이가 먹을 것을 만들어보겠다며 주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중심이 되어버린 집의 풍경.

……희원은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하리야, 멍멍이 좋아하냐? 멍멍이. 저기 너보다 나이 많은 멍멍이가 있는데.”“몽몽이?”“응. 멍멍이. 보러 갈래?”“몽몽이 무러여?”“안 물어. 물면 큰일 나지. 할애비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 뒤에서 구경만 해라.”“헤헤. 네에. 몽몽이 좋아여.”하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지 이번엔 뒤뜰로 나가시겠단다. 

할아버지에게 저런 표정이 다 있었나 싶은 희원은 할아버지의 상냥함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매일 밤 통금 전쟁을 치르며 무섭고 살벌했던 할아버지는, 저토록 웃음이 많은 분이었나.

“네 할아버지가 좋으신 모양이야.”아이를 데리고 강아지 곁으로 간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엄마는 곁으로 다가왔다. 

희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다. 

“하리가 예쁘긴 하지. 얼마나 착한지 몰라. 한번 울지도 않고.”“얘, 저 나이에 안 우는 게 칭찬 아니야. 어린 것이 속이 너무 깊은 건 다 사연이 있는 거지.”“그런가? 그런 생각은 못 해봤네.”“엄마 아빠가 바빠 남의 손에 자주 맡겨지니 애가 떼 안 쓰려고 노력하는 거야. 너도 그랬어.”“……저도요?”희원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유년시절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단편적인 것들이라, 그 시절 자신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엄마는 회상하듯 말했다. 

“네 아버지 매일 지방 공연 다니시고, 나는 그때 네 외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매일 거기 몸 닳았지. 아버님도 그땐 바쁘셨고, 너 하나 돌보기가 그렇게 힘들더라.”“아…… 그랬나…… 기억이 안 나네.”“니가 얼마나 착했는데. 안 우는 게 대견하다, 대견하다 했지. 그런데 살다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엄마는 그때의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먹고살아야 하는 일이 급해서, 너는 조용히 잘 자라주어서, 그때엔 그것이 최선이라 여겼는데ㅡ

“너 어릴 때 꼭 닮았다. 애기가 아주 이쁘네.”미안함은 어쩐지 날이 갈수록 커지더라고. 

엄마는 저 작은 아이에게서 과거 딸아이를 투영하듯 중얼거렸다. 

너도 저만한 때가 있었는데.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시간임을 알면서도 그때의 엄마는 왜 그렇게 네가 빨리 커주길 바랐을까.

“엄마, 있잖아. 나 궁금한 게 있어.”“뭔데.”“엄마는 아빠가 왜 좋았어? 선봐서 결혼했다며. 언제부터 좋았어?”“……엄마? 너 낳고 키우면서 그냥 산 거지 뭘 좋긴 좋니?”“그러니까, 처음부터 좋아서 결혼한 건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그런 게 어딨어, 그 시절에. 그냥 어른들이 하라니 결혼하는 거고 얼굴이나 보고 차나 마시고 날 잡아서 결혼한 거지. 그땐 다 그랬어.”“그럼 엄마, 살다 보니까 그냥 다, 전부 다 해결이 돼?”엄마가 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본다. 희원은 먼발치 하리를 바라보며 이어 물었다. 

“언젠간 좋아져? 한 쪽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면 그냥 그렇게 같이 늙어갈 수 있는 거야? 한쪽의 노력만으로 돼?”“무슨 일 있어? 서 서방하고 너?”“일은요, 무슨. 그냥 좀 궁금해서.”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만 그 사람을 사랑하면 이 결혼 문제없을까요?

그렇게 살면 될까, 궁금해서.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자신이 없어서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느 날 네 아빠가 그러더라.”엄마는 눈길에 과거를 담았다. 

“갑자기 결혼하고 시댁으로 들어오고, 엄한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내가 적응을 못하는 게 보였는지, 미안했던 모양이야.”“아빠가 뭐라고 했는데?” “이런 결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라도 잘할 테니 살면서 지켜봐 달라고.”“아빠가?”믿기질 않는다. 

그 뚱하고 무심한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그래. 그러더라. 당신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네 아빠가 그랬어. 실제로 기다려줬고. 그렇게 어영부영 살다 보니 언제 마음이 열렸는지도 모르게 열렸더라고.”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희원아, 살다 보면 둘밖에 없어. 누가 조금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그런 게 지금은 중요한지 몰라도 살다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야. 사람 마음이란 역전 당하기도 하고, 기습당하기도 하니까.”역전……

……기습.

“싸우지 말아라. 어지간하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 가슴에 못 박는 말은 애당초 하지 말고. 그렇게 살다 보면 저 몸이 내 몸 같고, 내 몸이 저 몸 같고, 그렇게 되는 거야.”“엄마. 있잖아.”희원은 별이 내리는 것만 같은 뜰에 서서,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나, 지환 씨가 좋아.”“그래. 누가 뭐라니?”“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좋아.”“얘 좀 봐. 결혼하더니 세상에 애가 이렇게 바뀌네.”“그러게요. 내가 이렇게 바뀌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네.”희원은 엄마를 흘깃,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엄마는 느닷없는 딸아이의 심경고백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행복하면 됐어. 지금이 행복한 줄 알면 잘 지켜나가고. 잘 꾸려나가고.”“……네, 엄마.”희원은 중얼거리듯 답하며 하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순간, 그 사람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매 순간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져, 나는 안달이 났다. 

“어머, 얘. 니 아빠 돌아왔나 보다. 하리 선물 뭐 사 왔나 보러 가보자.”“응. 알았어.”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지검장님,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백인호 의원이 잠시 통화를 하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지환은 지검장에게 가보겠다 말을 했다. 

“어허, 손님 모셔놓고 그게 웬 실례고 허물이야. 먼저 가겠다니.”“제가 있을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자네가 있을 자리야. 그러니 불렀고. 부른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이유, 잘 모르겠습니다.”“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백 의원 얼굴 잘 익혀둬.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이래? 나 원.”“죄송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그게 저와는 관계가 없을…….”“어허, 앉아. 뭐 하는 거야 지금.”지환이 일어서려 하자 지검장은 지환의 손목을 잡았다. 

회유가 되지 않을 땐 명령이 튀어나온다. 지환은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보다가 다시 앉았다. 

사내 셋이 모여 식사를 한들 다정할 리 없다. 

상대가 다정하게 군다 한들 받아줄 수 있을 리도 없다. 

지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백인호 의원을 금괴 밀수 사건 관련자로 수사 선상에 놓은 지 얼마 안 된 지금.

이러한 자리는 무척이나 위험했다. 

수사 종결 지시를 받은 마당에 그런 것을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이곳에 자신을 부른 이유가, 그런 것들에 속해 있을 수 있으므로. 

“죄송합니다. 전화가 와서.”다시 문이 열리며 백인호 의원이 들어선다. 

지검장은 괜찮다며 크게 웃었다. 오늘의 지검장은 무엇이건 과장되었고, 과격한 웃음이 따랐다. 

“검사님, 식사 도중 실례했습니다.”“아닙니다. 괜찮습니다.”백인호 의원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며 입을 열었다. 

“와이프한테 전화가 왔지 뭡니까.”지환은 숨쉬기를 멈췄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다고 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닥이 갈라진다.

지환은 당황함이 섞인 시선을 들었다. 

지검장의 호방한 음성이 물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다.

“아,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모님께서 오셔주시면 감사하죠! 뵌 지도 오래되었고, 제가 또 사모님의 팬이었지 않겠습니까?”“하하, 그러십니까? 제 아내가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하겠습니다.”“서검, 알지? 강희주 사모님. 알지? 알 거 아냐.”“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어어, 서검! 서검!”지검장이 강하게 부르건 말건, 백인호 의원이 당황했다는 듯 바라보건 말건 그는 거침없이 일어났다. 

……때마침 문이 열린다. 

“어어, 바로 왔네. 들어와.”백인호 의원은 뒤를 돌아보며 등장인을 향해 들어오라 손짓했다. 

문은 허락 없이 열렸고, 그곳엔 영영 보고 싶지 않은 그녀가 서 있었다. 

지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소리마저 끊긴, 적막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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