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멈춰버린 시간 (31/98)

31. 멈춰버린 시간

그녀가 열린 문틈으로 바라보기엔 다소 시린 광경이 펼쳐진다. 

중요한 접대를 해야 하니 와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라는 남편의 부름을 받고, 희주는 오래전부터 이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하여 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때 남편이 주로 쓰는 방식이었기에 별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곳까지 걸음 했다. 

계산된 연출이었고, 경험치가 어느 정도 쌓여 긴장감 없는 등장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가 서 있다. 

“뭐 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남편의 음성이 공기 중에 소각된다. 희주는 자리에 우뚝 선 채 지환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눈두덩이 뜨거워오고, 두 다리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떨려왔다. 

당신이, 

당신이 왜 여기에.

“어허, 사람 참. 빨리 들어와. 어서.”멈춘 아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인호 의원은 일어섰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의 모습. 

백인호 의원은 그녀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걸음을 도왔다. 

서둘러 문을 닫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은 공간에 서서 예고 없는 재회를 했다. 

희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제 집사람입니다. 아직 식전이라기에 밥이나 먹고 가라고 불렀습니다.”그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저 기억하십니까? 윤명국입니다.”“당신, 기억나지. 윤명국 지검장님.”“아…… 네. 안녕하세요.”“하하, 사모님을 이렇게 또 뵙다니요. 잘 오셨습니다. 아주 잘 오셨어요. 어쩜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십니다.”백인호 의원은 그녀를 가까이 끌었다. 

“이쪽, 당신 어서 인사드려. 서울중앙지검 서지환 검사님.”……심장에 못이 박힌다. 

터질 것처럼 거센 통증이 연달아 밀려들며 숨을 막아선다. 

입을 열면 뜨거움이 쏟아질 것 같아서, 희주는 연신 입술만 사리문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겁게 매달린 눈물을 지우는 일만도 버거워 그녀는 마른침만 연신 삼켰다. 

“뭐 해, 인사 올리라니까.”……그리워 한 번쯤 보고 싶다던 나의 바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남편의 옆에서, 

남편의 손님으로 당신을.

“아…… 안……녕……하…….”“안녕하십니까.”목소리는 허락 없이 갈라지고, 그녀의 마음처럼 시원하게 인사가 나오지 않을 때ㅡ 

깔끔하게 암묵적인 관계를 정리한 건 지환이었다. 

그는 그녀를 바로 응시하며 눈빛으로 태연히 요구했다. 

“서지환입니다.”……고개 들어. 

어깨 펴고 시선에 힘주며 당당하게 굴어.

편안하게 대해. 차라리 미친 척 웃어넘기고 말아.

너와 나의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없고, 

따라서 너와 나는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사모님.”외워둬.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

사랑한 적 없었던, 사이라고.

“왜 이렇게 잠이 안 와…….”흠, 하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희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중간에 연락을 주겠다던 그는 생각보다 일찍 전화를 주었다. 

‘일이 좀 생겨서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그는 오늘 집에 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일이 생겼다고. 늦을 것 같으니 자신의 오피스텔로 가거나 사무실로 가겠다고. 

“그냥 늦어도 괜찮으니까 오라고 할걸 그랬나…….”알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조금 전을 끊임없이 회상하며, 희원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의미 없는 포털 사이트만 뒤적거리다가ㅡ

SNS에 들어가 남이 살아가는 인생이나 들춰보다가ㅡ

“이제…… 얼마 안 남았네…….”지환이 이 집을 나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곧 있으면 수능이 시작될 것이고, 하리는 부모님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도 떠나겠지. 

서로 가족의 특별한 날에나 그 얼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얼굴을 안 보면 좀 낫지 싶은데…….”그렇잖아. 예고 없이 이 마음 시작했으니까, 또 어느 날 예고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지.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고 좋아할 수 있는 건지, 그것도 자신할 수는 없으니까. 

변덕스러운 성격에 내일 아침 식어버린 마음을 깨달을 수도, 있는 거니까. 

“나도 내 마음을 못 믿겠다. 못 믿겠어…….”하유…… 희원은 휴대폰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엎드린 채로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게선 더 이상 연락이 오질 않고, 아직도 일이 끝나지 않았냐는 질문은 뱉어내기에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괜한 간섭으로 여겨질까 봐.

“에효…… 잠이나 자자…… 잠이나…….”이젠 그가 없는 이 침실마저 휑하게 여겨진다. 

침대 아래 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이 못 견디게 외로웠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닌데, 당장 내일 아침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이 얼마나 간사한가.

“숭모. 숭모오.”“아, 하리야!”그때였다. 차 안에서 내내 자면서 돌아온 하리가 깼는지 방으로 찾아왔다. 

넋 놓고 엎드려 있던 희원은 벌떡 일어나 하리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얼굴은 영 울상이다. 

“왜 그래, 하리야 울었어?”“힝, 숭모오. 하리 무서워여.”“꿈꿨구나. 그렇지?”자다가 꿈에 놀랐는지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번질거린다. 

희원은 하리를 품에 꼭 안고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얼마나 아이가 놀라 달려왔는지 늘 안고 있는 곰인형도 가지고 오질 않았다. 

“하리, 오늘 숙모랑 같이 잘래?”“웅. 하리 숭모랑 있을래여.”“그럼 하늘이 데리고 와서 코 자자.”희원은 아이의 인형을 챙겨 가지고 와 하리를 눕혔다. 

침대 끄트머리에 누워 발을 침대 밖으로 내어놓고 자는 버릇이 있는 아이는 희원의 침대에 올라와 희원의 오른편에 누웠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훌쩍훌쩍 거리며 잔숨을 내뱉는다. 

“코오, 자자. 괜찮아. 숙모가 하리 괴롭히는 나쁜 꿈 쫓아내줄게.”은은하게 수면등을 켜놓고 희원은 하리의 팔을 어루만졌다. 

큰 소리로 울어도 할 말 없는데, 아이는 내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만큼 이상을 해결하려 들었다. 

크게 울지 않았고, 빨리 그치려고 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 하리야. 괜찮아.”“하리능 안 울어여. 울면 아기라고 했어여. 하리는 아기 아니예요.”“어른들도 울어. 숙모도 가끔은 엉엉 우는걸?”“으응? 울어? 숭모?”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희원은 멋쩍게 웃으며 아이의 팔을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잠이 오는지 아이의 눈이 점점 감기고, 곰인형을 잡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진다. 

희원은 아이가 깊게 잠들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에휴. 내가 하리보다 철이 없다, 어떻게 된 게 하리보다 철이 없어.”나는 언제까지 잘 참을 수 있을까.

잘 참았다고 스스로 칭찬할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

그래서 우리는ㅡ

“잘 자…… 우리 하리…….”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숨만 내쉬어도 어색함이 흐르는 시간.

희주는 남편의 곁에 앉아 불안한 시선처리를 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보라 불렀더니, 외려 딱딱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백인호 의원은 아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는 아내를 보다가 의식적으로 그녀의 등을 쓸었다. 

화들짝 놀란 희주는 고개를 들었고.

“당신, 오늘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왜 그래.”지환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속이 좀 안 좋아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희주는 여러 가지 따질 사이도 없이 연거푸 사과를 했다. 

백인호 의원은 그런 희주의 격한 반응에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아니 근데 이 여자가 미쳤나.

“사모님. 속이 얼마나 안 좋으신 건가요?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보이긴 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아…… 네. 좀 나아지고 있어요.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지검장님.”남편의 일그러지는 얼굴에 잠시 놓았던 정신을 챙긴 희주가 지검장을 향해 묵례했다. 

긴장한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고, 바닥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멀미는 끊임없이 일었다. 

“서검, 자네도 강 사모님 알지? 유명하셨잖아.”말이 끊기자 대번 지환에게 질문이 돌아온다. 

지환은 물컵을 들어 홀짝, 물을 삼켰다.

“사모님, 그때 인기 참 대단하셨습니다. 데뷔하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톱스타 자리를 거머쥐셨지요? CF가 몇 개였더라…….”“제 아내가 그렇게 유명한 줄, 사실 결혼 전엔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대단했다고 하더군요.”백 의원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하자 희주는 상 아래로 손을 말아 쥐었다. 

그녀가 단숨에 올라갔던 그 자리는 백인호, 그가 올린 자리. 

따라서 그가 모를 리 없는 일.

……백 의원은 치밀했다. 

지환은 어느덧 빈 물 잔에 다시 물을 따랐다. 

지검장은 곁에서 지환의 팔을 툭툭 쳤다. 

“서검, 사모님 몰라? 대한민국 남자 중에 사모님 팬 아니었던 사람도 있어?”“압니다.”그는 물컵을 내렸다. 

“TV에서 뵀던 기억이 있습니다.”미치지 않고 이 자리를 버틸 수 있을까, 희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가 더 미인이시지? 나는 처음에 사모님을 뵙고 아주 깜짝 놀랐다니까.”“미인이십니다.” “…….”“실제로 뵙고 보니 더.”지환은 생기가 없는 음성으로 기계처럼 답했다. 

백인호 의원은 지환의 빈 잔에 술을 채웠고, 윤명국 지검장은 말꼬리를 이어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부럽습니다, 의원님. 우리 백 의원님이 대단한 애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그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허허허허.”“부끄럽지만 인정하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아내가 흠잡을 곳이 없다 보니.”백 의원은 다시 희주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남편의 손끝이 스치는 자리마다 소름이 끼쳐 올라 희주는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윽고 희주의 식사가 나오고, 본격적으로 자리가 시작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쯤 지환은 다시 일어섰다. 

세 번째, 탈출 시도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하…… 서검, 진짜 이러기야?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야지 말이야. 내가 의원님 앞에서 어떻게 되겠어?”“미리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도 갈 때가 늦은 것 같고 말입니다.”지환은 재킷 단추를 잠갔다. 

바로 서서 백 의원을 내려다보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시 볼 일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럴 상황이 온다면 그때 다시 뵙죠.”……출두.

“검사님, 이렇게 가시면 섭섭합니다. 이제 막 이야기를 좀 나눌까 했는데 말입니다.”백 의원이 분노로 쌓인 속내를 감추며 인자하게 웃자 지환은 건조한 눈만 감았다가 떴다. 

“나눌 이야기가 있다면 장소는 여기가 아닐 겁니다. 만나 뵙는 일 없기를 바라겠습니다.”지환은 희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의원님께서 사모님을 챙기시는걸 보니 저도 집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나서요.”……최악의 하루.

“아내가 지금 혼자 있을 텐데,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저도 의원님 못지않은 애처가라서요.”“이봐, 서검. 서…….”“지검장님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내일 듣겠습니다. 그럼 이만.”지환은 자리를 나섰다. 

걸음을 옮기는 지금 그의 표정은, 누구라도 다가와 말을 건다면 눈빛으로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차가운 표정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희원은 습관처럼 휴대폰을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한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무서웠던 꿈 자락에 뒤척이던 하리도 편안해진 숨을 내쉬고ㅡ 

삑ㅡ 삑ㅡ 삑ㅡ 삑ㅡ

느리고 힘겨운 기계음이 들렸다. 

삐용삐용삐용삐용ㅡ!

희원은 눈을 떴다.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아 생긴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하리가 소리에 깨어날까, 희원은 급하게 일어서 침실을 나섰다. 

삑, ……삑. 삑.

끊어지고 끊어지며 힘겹게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희원은 잰걸음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이제 와요? 못 온 다더니, 연락도 없이 지금이 몇 시…….”어어어! 희원은 무작정 앞으로 고꾸라지는 지환을 붙잡았다. 

“지환 씨, 서지환 씨. 괜찮아요?”아이가 깰까, 희원은 최대한 조용하게 그를 부축했다. 

그가 답 대신 긴 숨을 한번 내쉬자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후, 술 냄새. 정신 좀 차려봐요. 대체 집까진 어떻게 왔대?”몸도 가누질 못하고 답도 하질 못한다. 

희원은 가까스로 그의 구두를 벗긴 뒤 갖은 애를 쓰며 부축했다. 

헝클어진 타이, 머리, 그리고 반쯤 감긴 눈빛.

“정신 좀 차려 봐요. 서지환 씨. 서지환 씨. 일단 지환 씨 방으로 가요.”“택시 좀 부탁합니다. 아내가 기다려서 가야 하는데…….”“허.”그 아내…… 여기 있네…….

희원은 집에 온 줄도 잘 모르는 것 같은 지환의 멘트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일단 끌고 방으로 들어가야겠다. 더 이상 말을 걸어봐야 의미가 없구나, 판단한 희원은 그를 힘껏 부축했다.

“아아, 권희원 씨.”“그래요. 나 여기 있어요. 정신 좀 들어요?”“오락가락합니다. 미안해요, 술이 좀 과해서. 끅.”“알면 됐어요. 일단 내일 얘기하고 걸어봐요. 어서.”희원은 원래 지환이 쓰던 그의 방문을 열었다. 

그의 허리를 붙잡고 안겨가듯 부축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이 로맨틱하게 다가올 리 없다.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한다는 건, 여러모로 고된 일이다. 

“들어와요. 어서 조금만 더…… 더…….”조금만 더 가면 침대가 있다. 

희원은 어떻게든 저기 눕혀볼 요량으로 걸음을 뗐다. 

그러자 어느 순간 지환이 멈추더니 버틴다. 희원은 낑낑거리며 그의 허리를 이끌어보지만 역부족이다. 

“왜 안 와요. 빨리 와요.”“여기…… 아니잖아.”“뭐가 아녜요. 여기 집 맞아요. 지환 씨 방이고. 누워서 빨리 자야죠.”다시 한 번 끌어보지만 꿈쩍도 하질 않는다. 

그는 잠시 후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침실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 후로 지환은 빠르게 휘청거렸다. 

“어어어! 서지환 씨!”휘청거리는 그를 간신히 받아들고 그녀 역시 휘청거렸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벽에 기댔다. 

어지간히 무거워야지, 지환을 끌어안고 간신히 벽에 기댄 채 버티고 있자, 그는 고개를 떨궜다.  

“가자…….”그녀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는 중얼거렸다. 

온통 어둠뿐인 그의 방 안에 서서 희원은 온몸으로 기대오는 그를 지탱했다. 

“가자…… 가…….”“응. 가요. 알았어요.”그녀는 그를 이끌고 방문을 나섰고, 이어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하리가 쌔근쌔근 자고 있는 침대에 지환을 힘겹게 눕혔다. 

“하…… 미치겠네…….”이곳에 눕혀놓으니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다. 

희원은 지환을 내려다보다가 허, 기가 막혀 헛웃음을 토했다. 

“어후, 화상. 어후…… 화상…….”연락이 한 통 없다 싶더니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다. 

연어야? 거꾸로 돌아오게?

“그 상사 되게 못됐네. 남의 집 귀한 남편한테 이렇게 술을 먹였어?”희원은 중얼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라고, 양발을 벗기고 슈트 재킷을 벗겼다. 

와이셔츠를 끌러주고 바지를 내려다보는데 차마 거기까지는 못 하겠다. 

“못살겠다, 진짜…….”한쪽엔 하리가 누워 있고, 한쪽엔 지환이 누워 있다. 

가운데 눕힐걸. 힘에 부쳐 가장자리에 지환을 눕힌 게 다소 마음에 걸린다. 

“그럼 난…… 가운데서 자야 하나…….”조카와 삼촌이 세상모르고 잔다. 

저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게 최선인가, 희원은 재미난 광경이라도 보듯 한참 들여다보았다. 

내일 팔자에도 없는 해장국을 끓이게 생겼다. 

이런 게 싫어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자발적으로 시행하게 생겼으니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어쩐지 자는 모습조차 힘에 겨워 보이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니 마음에 크게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별일은 아니었으면. 부디 속상한 일이 생긴 건 아니었으면.

희원은 조심히 침대 중심으로 들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지환에게도 잘 덮어주고, 하리에게도 잘 덮어준 희원은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맞이했다. 

그와 살결이 닿는, 아주 가까운 간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