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미안한 말
ㅡ알아요. 지금 내 말이 서지환 씨에게 어떻게 들릴지.어둠이 깔린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자신을 응시하며, 지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ㅡ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얼굴 보면서 말하게 될까 봐. “…….”ㅡ얼굴 보고 까이는 것보단 전화가 나을 것 같아서 그냥, 그냥 지금 말해요.이렇듯 불시에,
그 어떤 예고도 없이.
ㅡ물론 내가 서지환 씨에게 어떤 답을 원하거나,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떼쓰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고요. 난 그저 내 마음을 알려주고 싶은 거니까.“그게 무슨…….”ㅡ당신이 좋아졌어요. 언제부턴가.……누구도 웃을 수 없는 고백의 시간.
“권희원 씨.”ㅡ그렇게 됐어요. 나 이거 계약 위반 맞죠. 처벌 대상인가요?“처벌이라뇨.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ㅡ다행이네요. 처벌 대상은 아니라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부서진다.
지환은 차마 그녀를 따라 웃을 수가 없어 이마를 짚었다.
평소엔 그렇게 하지 말래도 곧잘 나오던 농담이 지금은 통 나오질 않고ㅡ
무슨 말을, 어떻게 뱉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꽉 막힌 울대로 짧은 숨을 내쉬었다.
정적만이 이어지고ㅡ
그는 아직 만만한 답을 찾지 못했을 때ㅡ
ㅡ난 지금 서지환 씨의 모든 답을 들은 것 같네요.그녀는 그의 마음을 침묵 속에서 읽었다.
포기가 빠른 건지 예상을 했다는 건지, 그녀 목소리는 상황만큼 무겁거나 구슬프지 않았다.
ㅡ뭐,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이 좋아하게 됐어요.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겠다. 남은 일 잘해라.
그녀는 할 말을 다 한 채 전화를 끊었다.
지환은 가만히 휴대폰을 들고 서 있다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또 너무나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었으니 모든 움직임은 정지했다.
좋아하게 됐어요.
그녀의 말을 곱씹다 보니 가슴은 뛰는데, 감정의 종류를 굳이 나누자면 기쁨은 아니었다.
“좋아한다니…… 어째서…….”언제까지고 좋은 관계로만 지내고 싶었던 상대의 고백이란, 어쩐지 슬프게 다가온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 진짜…… 이걸 대체 어떻게…….”지환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좋아한다는 고백이 자꾸만 귓가에 머물러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토록 착잡하고 그 귀한 마음이 애처롭게 여겨지는 건ㅡ
“검사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아닙니다. 이제 들어가려고요.”지금도, 앞으로도,
사랑을 하고 싶은 의지가 없는 까닭이었다.
“차였다…….”희원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고개를 수그렸다.
차였다. 그것도 남편에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변할 때까지 봐야 하는 남편에게!
“뭐,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한…….”그래. 그 사람의 거절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 불필요한 어색함을 만든 건 나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질러버린 것 또한 나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목소리에 미안함이 많아 들어주기 힘들었다.
그래. 그런 거다.
모든 것은 나의 탓,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도 나의 탓.
“몰랐던 것도 아닌데. 다 아는데…….”희원은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꾹 쥐었다.
……사랑이란 이토록 무모하다.
평생을 학습해온 많은 것들을 무지로 만들었다.
많은 것을 갖추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얻고 누리며 살아왔대도ㅡ
“아…… 거, 되게 안 웃어지네, 진짜. 휴…….”하염없이 무력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사랑을 하고 싶은 건지 받고 싶은 건지, 그것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한 채ㅡ
발을 디딘다. 그저 빠져든다.
오늘도 내일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끝은 어디쯤인지 좀처럼 확신할 수도 없는ㅡ
“그래도 얼굴 보고 차인 건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니까…….”뻔한 사랑의 잔인하고 아름다운 꾐에 빠져.
“저, 검사님.”“…….”“저…… 검사…….”“아, 네. 네. 말씀하세요.”십 분만 쉬자고 하더니 다시 들어온 검사님은 내내 멍한 상태다.
십 분 전과 십 분 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가. 조사 중인 가장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그들이 제게 뭘 얼마나 알려줬겠습니까?”“압니다. 그들은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는다는걸.”“예.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는 게 있다면 다 알려 드리고 싶어요, 저도.”“금괴 건네받으면서 간단한 교육 받으셨죠. 붙잡혔을 때 어떻게 하라는 행동 강령.”가장은 지환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환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전두용 씨가 입을 꽉 다물고 처벌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내일은 내일의 또 다른 전두용 씨가, 그다음 날은 또 제삼의 전두용 씨가 나타나 똑같이 처벌받을 테니.”“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릅……!”“최소한의 복기라도 해보세요. 전두용 씨는 지금 그것마저 하지 않고 있으니까.”“아…….”가장은 눈만 껌뻑껌뻑 감았다가 떴다.
속이 답답할 정도로 아는 게 없어 본인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그의 말대로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한다.
“근데 대부분은 검사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데…….”“더 생각해보세요. 그들의 인상착의라도.”“금괴를 전달해주러 온 사람도 모자니 마스크니 선글라스니,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어요.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 아…… 가장은 시선을 천장으로 들어 올렸다.
지환은 뭔가 왔다 싶은 마음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문신이…….”“문신, 말입니까?”문신. 큰 정보다.
“예. 문신이 있었습니다. 그, 긴팔을 입었는데 잠깐 팔을 걷었을 때가 있었어요.”“문신. 좋네요. 어떻게 생겼습니까?”가장은 왜곡된 기억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인상을 썼다.
최대한 정확하게 떠올려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은데.
내 기억이 맞을까? 신뢰할 수 있는 건가?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요, 십자가 모양 같기도 했고, 그 주변으로 뭐가 좀 더 있었는데.”“십자가라.”지환은 집중한 얼굴로 가장을 바라보았다.
가장은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얼굴을 했다.
“아, 더는 생각이 안 나네요. 이것도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십자가는 확실합니까?”“예. 그건 확실합니다. 십자가였어요. 십자가 주변으로 막 뭐라고 해야 하지, 낙서처럼…… 그것까진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그려볼게요.”지환은 가장의 말에 연필과 종이를 건넸다.
한참 이것저것 그려보고 지우고, 그려보고 지우고 하더니 엉성한 그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저……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검사님?”“몇 번의 조사가 더 있을 거고, 기소될 겁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거고. 법의 심판은 받아야겠죠.”“아…… 변호사…….”“구속 수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앙망문, 그러니까 반성문 같은 게 양형에 도움은 크지 않겠지만 시간 날 때마다 쓰시고.”“예…… 알겠습니다.” 가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환은 서류 더미를 툭툭 치며 정리하다가 힐끗, 가장을 바라보았다.
“사선 변호사 선임 어려우실 테니 국선 변호사 선임 받으실 수 있도록 처리하겠습니다.”“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검사님.” “누구나 하는 일이니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지환은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딱 잘라 인사를 거부했다.
가장이 손만 움켜쥔 채 말을 삼가자 한참 후, 지환은 입술을 열었다.
……이런 일 저런 일은 결국 다, 살자고 하는 일.
“아동 후원 및 봉사 단체가 몇 곳 있습니다. 전두용 씨 가족의 경우라면 그쪽에서 심사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아이의 일을 상담받아 볼 수 있게 하겠습니다.”“아, 정말이십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아, 아이의 일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가장의 눈이 번쩍 뜨인다.
지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두용 씨는 조사 중이라 어렵겠고, 단체를 아내분과 연결해드리죠. 어찌 되었든 아이는 치료받아야 하니까. 인계 형사를 통해 나머지 설명 들으세요.”“거, 검사님! 검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뉘우치세요. 반성하고. 협조하실 일 있으면 협조하시고.”“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시계를 들여다보며 지환은 밖을 나섰다.
이래저래 일을 처리하려면 시간이 없다.
그녀의 고백을 곱씹기엔 현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감정은 다시 0점으로 놓여야 했으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이렇게도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감사한 일이기도 했다.
희원은 약속대로 희주가 있는 세미나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세미나였다. 문화계의 권위자들이 모여 있었고,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희주는 희원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갑게 챙겼다.
전면에 내세운 한국 무용에 대한 다음 달 특집 기사를 내어주겠노라, 한 언론 잡지의 구두 약속도 받아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자리도 마련했어요.”자리에 착석한 희원은 희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받아온 명함을 이리저리 정리하며 희원이 인사를 건네자 희주는 웃었다.
“도움이 됐다니 진심으로 다행이에요. 분명 희원 씨를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오늘 이후로 메일을 주시겠다는 곳도 많았어요. 협회로 전화 주시겠다는 곳도 있었고요. 정말 기뻐요.”“다음에도 좋은 기회가 있다면 참석해주세요. 꼭이요.”“네. 사모님.”희원이 가방에 명함을 넣으며 웃자 희주도 따라 웃었다.
예쁜 얼굴 위로 미소가 그려지니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요, 희원 씨. 사모님 말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네? 이름을요? 아…… 다들 사모님이라고 부르던데.”“우린 친구잖아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줘요.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아…… 그래도 되나…….”희원이 머뭇거리자 희주는 다소 가깝게 붙어 앉았다.
“사실 이 나이에 사모님 소리 버거워요. 내 나이가 엄청 많은 것 같아요.”“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나일 때 가장 좋은 법이니까요. 누구누구의 사모님보다.”“……맞아요.”엄청난 지지 세력을 등에 업은 국회의원의 아내.
약간은 권위적이고 도도할 줄 알았는데, 외향 상 풍기는 이미지도 차가워서 실제로는 까탈스럽겠구나, 생각하기도 했는데.
“강희주 씨는 성격이 참 좋은 것 같아요. TV에서 볼 때보다 더.”“사실 제가 화면발이 좀 안 받아요. 다들 엄청 차가울 것 같다고 하는데, 사실 저 백치미도 좀 있어요.”희주가 한쪽 손을 가리고 웅얼웅얼하며 자기 험담을 한다.
그런 희주의 말끝에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그래요. 저도 한 백치미 하거든요.”나야말로 요즈음 백치미를 풍긴다. 내 남편에게.
“희원 씨, 우리 식사할까요? 여기 초청된 셰프님이 알아주는 분이래요. 많이 먹고 가요.”“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희원은 무슨 의도로 이렇게까지 친절한지 알 수 없는 희주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했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어, 두 분 너무 그림이신데요.”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사모님, 많이 드시고 가십시오. 권희원 씨도 많이 드세요.”유명한 애 옆에, 유명한 애.
“희원 씨, 결혼생활은 어때요?”“네? 결혼생활이요?”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가 오고 간 끝에,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희원은 뜨끔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어제 남편에게 차였고, 어제 남편은 외박을 했다.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소식이 없다.
“아…… 뭐…… 아직은 신혼이라. 하하, 하하하. 좋죠. 좋아요.”“신혼, 좋겠어요.”희주는 접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왜 이러고 그녀와 앉아 밥을 먹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부러움이 치솟기도 한다.
구태여 희원을 곁에 두고 고통받는 이유란 뭐란 말인가.
“희원 씨, 남편분이 잘해주세요?”……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수면제도 잠을 불러오지 못했다.
“그럼요. 잘해주죠.”답변이 가시가 될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희주는 물잔을 들어 가득 물을 삼켰다.
“제 남편은 너무 자상하고, 또 유쾌한 사람이에요. 정의가 살아 있는 사람이고, 또 적당히 밀당도 할 줄 아는. 검사일이 천직이라고 해요.”다른 여자의 입을 통해서 듣는 그의 이야기.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뛴다.
당신의 현재를 듣고 있음에 마음은 울렁거렸다.
“그 결혼이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네? 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미쳤다. 내가 미쳤지 뭐야.
결국은 이렇게 미치는구나, 희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희원을 바라보았다.
“SNS로 잘 보고 있어요. 종종 사진 올려주세요.”“네. 노력해볼게요.”그날, 남편의 호출로 발을 디뎠던 그 음식점 안에서ㅡ
지환을 다시 재회한 이후로 마음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혹은 붕괴할 것 같은 지금은 자극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검은 현실을 통과할 한 줄기 빛이었다.
나의 의지로 당신을 놓은 게 아니었으니ㅡ
뜨겁던 마음이 그 자리 그대로 남아 굳어버린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ㅡ
“희주 씨 결혼생활도 행복하시죠? 의원님이 너무 자상하시던데.”“……그럼요. 잘해주죠.”그의 아내, 권희원의 행복으로 나를 투영한다.
이 여자의 웃음으로 지금의 나는 대리만족한다.
“너무너무 잘해주세요. 우리 의원님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랑꾼이시거든요.”욕해도 좋아. 비난해도 좋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의 난,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어어, 왔어요? 일찍 왔네요?”일정을 마친 희원이 집에 들어서니 지환이 간발의 차로 돌아온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아서 일찍 들어왔습니다. 언제 왔어요?”“저도 지금 막 왔어요.”……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한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아…… 네네. 네. 그러세요.”슬리퍼를 신은 그가 그녀를 스쳐 지나며 방으로 들어선다.
희원은 그를 따라 몸을 돌리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침실이 아닌, 처음에 마련해주었던 그의 방으로 사라졌다.
희원은 행여나 들릴까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오늘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는 예상보다 일찍 들어왔다.
잠시 후면 이모님과 밖을 나선 하리가 돌아올 시간이고.
그 안에 뭐라도 해결하고 싶었다.
“저, 서지환 씨.”똑똑, 그녀는 그의 방을 노크했다.
완벽하게 닫히지 않은 문이 노크의 힘에 의해 스르륵 열린다.
“아, 미안요.”상의를 탈의한 지환이 고개만 돌려 바라본다.
“들어와요. 이 정도로 내외할 사이는 아닌 것 같으니까.”그는 덤덤히 벗은 셔츠를 테이블 위로 던졌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걸었다.
시계를 끌렀고.
“어…… 그럼 실례할게요.”반지를 뺐다.
희원은 긴장감으로 무장한 채 그의 방 안에 들어섰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굵은 선을 그리는 등 근육을 바라보자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기다려도 말이 없자 지환은 힐끔,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아, 아, 그래요. 할 말이 있어서 들어왔어요. 하리가 오기 전에.”“해봐요. 놀라지 않을 테니까.”“어제 말이죠. 어제 내가 한 말은, 그러니까, 부담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이미 부담됐는데.”“…….”“그것도 많이.”지환은 입을 티셔츠를 골라 꺼내 들었다.
입으려는 듯 팔을 끼던 지환은 가만히 멈춰 서 생각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답을 아직 못 한 것 같아서요. 나도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권희원 씨 말문이 막힌 거면 나부터 얘기할게요.”아뇨, 안 해도 돼요.
듣고 싶은 말이 없는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그리고 오늘 내내 생각했습니다. 뭐, 일이 바빠서 중간중간 시간을 그냥 보내기는 했지만.”희원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아서 손끝에 힘을 주었다.
말할 때 움직이는 그의 눈빛, 발아래 밟히는 것만 같은 낮은 음성.
웃음이 지워진 얼굴.
“정리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권희원 씨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생각, 마음.”……상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거절의 발언.
“우리 처음에 결혼할 당시의 약속들이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변함없이.”“…….”“그게 당신과 내가 오래오래 상생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봐도.”그의 반듯한 설명 앞에, 연설문처럼 준비해둔 그녀 말문이 막힌다.
반박의 여지가 없으니 회유란 꿈도 못 꿔볼 일이 되었다.
“나는 권희원 씨와 오래오래, 지금처럼 지냈으면 합니다.”“…….”“진심으로 부탁해요. 우리 앞으로도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죠. 안 하기로 했으니까.”희원은 아무 말도 떨어지질 않았다.
다만 그의 말들은 가슴속에 가득가득 쌓여 울대까지 뜨겁게 가득 찼다.
그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것ㅡ
“미안합니다.” 도리 없는 일이었다.
“미안합니다. 권희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