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나랑 싸우자 (36/98)

36. 나랑 싸우자

같은 곳에 서 있지만 각자 바라보는 풍경이 다른 시간. 

모든 것은 멈춰 있고 한마디의 말도 공중에 뿌려지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ㅡ

고백이 오고, 거절이 가는 시린 풍경. 

“……그랬죠. 맞아요. 사랑 같은 건 안 하자고 했었죠. 우리.”희원은 중얼거리며 마른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것도 내가 먼저, 서지환 씨에게 권했던 일이었으니까.”……받아들 생각이 없는 폭탄을 그에게 던져두고 후퇴한다.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그를 원망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나는 후회해야 하나. 

저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내 멋대로 마음을 끌러 놓은 건데.

그럼 나는, 후회할까.

알겠어요. 접을게요. 정리할게요, 라고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아무에게도 열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지켜줘야 할까. 

“하지만 싫어요.”엇, 희원은 지가 뱉고 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에서 아무 말 대잔치가 흘러나온다. 

뭐, 뭐라? 싫어요? 

지환은 천하무적의 답변이 돌아오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시 당황함에 멈칫하던 희원은 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갈 때까지 가보기로 한다. 

“내가 이 정도로 물러설 것 같으면 그런 말, 애당초 안 했어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에너지 허비하지 말아요.”“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꼬, 꼬셔볼 거예요.”……뭐? 지환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입으려던 옷에 두 팔을 끼워 넣은 채, 머리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꼬셔, 꼬셔볼 거예요.”희원은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말들에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환은 시선만 힐끗 내려 그녀의 말아 쥔 손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웃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어쩌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기만 한 그의 표정 앞에 희원은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난 이제 막 시작했거든요. 그러니 열릴 때까지 서지환 씨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넘어올 때까지 서지환 씨의 심장을 찍어보죠.”“이봐요, 권희원 씨.”“다음 이야기는 그 후에 하도록 하고.”희원은 척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인간 권희원은 끈기 빼면 시체거든요. 미안해요, 걸려들게 해서.”“하…… 무슨.”“잡히기 싫으면 도망가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맨살의 그의 등을 철썩, 때리고는 씩 웃었다. 

사랑의 꾐에 빠진 여자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건투를 빌게요. 서지환 씨.”쿵쿵쿵, 그녀는 평소보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그녀가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리자 지환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휘청였다. 

어지러운 것 같아 손은 저절로 이마를 향했다. 

“무슨 여자가 대체…….”냉정하게 굴어 보려고 단단히 애를 쓰며 들어왔는데.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인상마저 구기며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말했는데.

결국 돌아온 답이라곤. 

꼬셔볼 거예요. 

“꼬, 꼬셔보겠다니. 어떻게 그런 말이 잘도 나와, 이런 상황에서…….”하…… 지환은 연거푸 긴 숨을 뱉으며 더운 듯 손부채질을 했다.

약간은 붉어진 두 볼이 식을 줄을 몰라 그는 한동안 부채질을 멈추지 못했다. 

……매섭게 말해도 야멸차게 굴어도 당신이 돌아서지 않으면, 

그 끝의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 건가.  

나는 당신에게 줄 마음이 없는데. 그럴 의지도, 의욕도 없는데. 

“권희원 씨, 이렇게 씩씩하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내가 얼마나 마음을 다지고 돌아왔는데…….”그녀는 잘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웃고, 숨을 쉬고, 말을 한다고 다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걸. 

나는, 이미 고장 나버린 사람이라는걸. 

지환은 부스럭거리며 잠자리에서 연신 뒤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만 같다. 

좋아해요. 서지환 씨.

날 가져요.

날 가져……

어서 날……. 

“허억.”헉. 헉. 지환은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무거운 몸을 버둥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꿈속, 희원은 너무나도 공격적인 자세로 자신을 향해 돌진했다. 

허억, 허억, 굵은 숨은 연신 터졌고 지환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와씨, 꿈 좀 보게. 하…… 하아…….”지환은 그녀의 저돌적인 멘트와 도발에 놀라 잠에서 깬 지금도 밭은 숨을 뱉었다. 

얼마나 아찔했는지, 아직도 심장이 뛴다. 

“하…… 진짜, 하…….”꿈이었음을 확인한 뒤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금, 침대 쪽을 바라보니 희원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눈을 껌뻑껌뻑하며 희원이 왜 누워 있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몇 시지. 

그는 희원을 생각하며 동시에 휴대폰을 들었고, 시간을 확인했다. 

깜빡깜빡 눈만 감았다가 뜨던 지환은 헉, 소리를 내며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늦었잖아!”이런 제길! 지각이다!

지환은 헐레벌떡 일어났다. 

뭐부터 하지, 뭐부터 하지, 우왕좌왕하다가 부리나케 침실 문을 열었다. 

밤샘 근무를 했다고 몸이 그대로 늘어진 모양.

전부 나갔는지 아무도 없는 휑한 집, 그의 눈물겨운 출근 사투가 시작된다. 

대강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세면대에서 감는 둥 마는 둥.

“으어어, 늦었다. 늦었다.”우다다다 달려 끼이이익, 방문을 열고 옷장을 열어 눈에 보이는 대로 집었다. 

“으어어어어, 늦었어, 늦었어.”셔츠를 대강 껴입고 타이를 아무거나 들었다. 

동시에 바지를 꺼내 입고 벨트를 찾았다. 

시계 반지는 패스.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대강 휘저어 흔들고는 차 키와 서류 가방을 들었다. 

이것저것 들며 슈트 재킷도 함께 건졌고, 다시 우다다다 달려 현관으로 나갔다. 

어제 신었던 구두 그대로 신으려고 발을 집어 넣다가ㅡ

“아, 핸드폰.”다시 들어왔다. 

우사인 볼트가 서러울 정도로 달려가 침실 문을 부술 듯 열고 휴대폰을 찾았다.

“어어어, 늦어, 늦었다고, 늦는다고.”휴대폰을 낚아채고 다시 현관으로 달렸다. 

구두를 신으려는데 양말이 없다. 

“이런, 아오.”다시 들어왔다. 허겁지겁 양말을 찾았다. 

왜 이렇게 양말 신기가 힘드냐, 서서 신으려니 이리 쿵, 저리 쿵, 가관이다. 

지환은 자신의 침대에 엉성하게 앉아 일단 양말을 신었다. 식은땀이 난다. 

다시 허겁지겁 현관으로 나가 구두를 신으려는데, 현관문에서 하리가 뭘 흘렸는지 끈적한 요구르트 같은 게 잔뜩 묻어 있다. 

“아아, 바빠. 바쁘다고.”그냥 나가야겠는데 성격상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지환은 구두 한쪽을 들고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섰다. 

휴지로 닦는 것보단 빠르겠거니, 그는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물로 싹 씻어 내리면 금방 깨끗해질 것 같다. 

그래. 십 초 정도 여유 있어. 지금 구두만 닦고 집을 나서면 최소 세이브는 할 수 있으리라. 

철저한 시간을 계산하는 와중에 경황없는 한 손이 샤워기 버튼을 들어 올리고.

쏴아아아ㅡ

물은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무척 차갑고, 무척 강한 수압의 물줄기가 제철 맞은 폭포처럼 철철철 떨어져 내렸다. 

“아…….”구두 한쪽을 들고, 지환은 온몸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오롯이 받았다. 

차마 버튼을 다시 눌러 끌 생각도 들지 않고, 지환은 그저 눈을 꽉 감았다. 

“내가…… 샤워기 버튼 돌려놓으라고 했지…….”샤워기 버튼을 돌려놓지 않은 장본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휑한 집.

지환은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운 물줄기에 얼굴을 우악스럽게 비볐다. 

“하…… 돌아버리겠다. 권희원…….”최악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잘 잤냐?”“잘 잤겠냐?”연습실에서 마주한 희원에게 돌아오는 대답이 싸늘해, 구언은 웃음을 터트렸다. 

퀭한 얼굴을 하고는 연습실 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는 권희원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고, 그래서 더욱 인간미가 있었다. 

“권희원, 너도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이제 좀 사람 같네.”“놀리지 마. 나 어제 차였으니까.”“뭐? 차였어?”물을 마시던 구언은 화들짝 놀라 희원을 바라보았다. 

의욕 없는 자세로 벽에 기대고 앉아 쿵, 쿵, 머리만 뒤로 찧고 있는 그녀는 뜻밖의 말을 실토했다. 

“차, 차였다고? 서지환 씨한테?”“그래. 차였다고. 아니, 아주 제대로 까였다고 나.”“허. 고백을 했어? 벌써? 뭐가 이렇게 빨라, 브레이크도 없이.”“사랑에 브레이크가 어디 있겠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데 인간 권희원이 미적거릴 수 있겠어?”하는 말 좀 보게.

구언은 당황했다는 것처럼 희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어떻게 차였는데. 자세히 좀 말해봐.”“왜 남의 아픈 과거사를 자세히 듣고 싶은 건데 넌.”“아픈 과거사니까 듣고 싶지. 기쁜 과거사면 듣고 싶겠냐?”“아오…… 이놈 저놈 사람 염장 지르는데 일가견들이 있다니까.”어느덧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번 크게 부딪치고 나니 오히려 관계란 유연해졌다. 

본디 서로를 잘 알았고, 본디 서로를 잘 이해했고.

복잡한 감성 따위를 조금 지우고 나면 서로는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너도 까이는구나, 권희원. 세상에 너를 까는 사람도 있구나.”“그치. 니가 봐도 이상하지. 어떻게 나를 까? 어떻게 나를 거부해? 말이 돼?”희원이 덥석 말을 반기며 상체를 벽에서 떼자 구언은 그녀 이마를 손으로 눌러 다시 벽에 머리를 붙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왔어야지. 이거 봐, 이게 뭔 개고생이냐?”“그러니까. 너한테 갔어야 했나 봐. 이렇게 개고생할 줄 알았냐?”“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권희원. 난 준비된 남자거든.”“지금 많이 늦었어, 구언아. 난 그렇게 생각해.”“아오.”아오, 구언이 옅게 탄식하자 희원은 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쿵, 쿵, 다시 머리를 찧었다. 

짜증은 폭발하고 더럽게 서러운데, 뱉은 말이 있어서 뒤로 무를 수도 없다. 

“남편 꼬시기 되게 어렵다. 구언아.”“너 꼬시는 것도 어려웠어, 나는.”“하…… 벌받는다, 벌받아. 유구언 마음 밟고 가서 내가 천벌을 받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시끄러! 하나도 위로 안 되니까!

희원이 눈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연신 쿵, 쿵, 찧자 구언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벽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벽에 머리를 쿵, 찧자 구언의 손바닥에 닿는다. 

……그녀가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다.  

“이런다고 뭐 달라지냐? 가뜩이나 안 좋은 머리 뇌세포 다 죽는다.”“다정하게 굴지 마. 나 더 벌받을 것 같으니까.”“일어나. 연습해야지. 춤이라도 잘 춰야 니 남편이 봐줄 거 아냐.”“에효, 알았다, 알았어.”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은 했으려나? 

뭐, 칼같이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출근이야 잘했겠지.

그녀는 연습을 시작할 요량으로 몸을 풀었다. 

오늘은 예고를 다니는 아이들과 만남이 있는 날이기에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그는 궁금하지 않겠지만.

그래. 일. 일하자.

일할 땐 일만 해야지. 연습 열심히 하자. 

나, 인간 권희원은 사랑도 좋지만 일도 좋아하니까.

“아, 나 그런데 오늘 계속 귀가 가렵네. 누가 내 욕 하나?”“남편이 욕하는 모양이지.”“우씨, 아니거든! 욕은 안 하거든!”서지환 씨도, 상큼하고 가벼운 하루 시작해요. 

“여어, 서검. 지각? 지각했네? 인간이 완전 빠졌네? 굉장히 불성실하네?”“시끄럽다. 말 걸지 마라.”응? 정윤은 지환의 늦은 출근을 비웃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저기압 오로라를 모락모락 풍기며 녀석이 자리에 앉는다. 

정윤은 편의점 표 카스텔라를 한입 앙, 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이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더럽고 무거워?”“더럽고 무거운 일로 시작했으니까. 가, 빨리.”“왜? 무슨 일 있었어? 부부싸움? 각방의 시작? 설마, 별거?!”“안 나가냐?”“이혼은 하지 마라. 잘 생각해야 한다? 인생의 마그네틱이 손상되는 거야, 서검.”“너이씨…….”지환이 눈을 부릅뜨자 정윤은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아, 궁금하다. 남의 불행한 가정사. 너무너무 듣고 싶어.

“서검, 카스텔라나 먹어. 흰 우유를 꼭 한 모금씩 중간에 마셔줘야 해.”“빵가루 좀 튀기지 마. 제발 좀. 다 먹고 말 좀 해.”정윤의 입에서 가루가 튀기자 지환이 질색한다. 

본의 아니게 샤워도 다시 하고, 정제된 몸으로 새 슈트까지 걸쳐 입은 터라 오만가지 짜증이 폭발했다. 

“아, 자식, 드럽게 깐깐하네. 간다, 가. 으휴.”계장님, 이거 드세요. 

정윤은 몇 개 더 사 온 카스텔라를 계장 앞에 두었다. 

종종종종 검사실을 나서다가 정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맞다. 너 차장님이 찾았는데. 내가 너 지각 중이라고 설명드렸어.”“아오 저걸 진짜…….”“그리고 서검, 나 잘 아는 선배 중에 이혼 전문 변호사 있어. 원래 스님도 자기 머리는 못 깎는 법이니까 필요하면 얘기…….”“나가! 당장 나가!”지환의 불행은, 정윤의 행복이었다. 

“서지환 씨, 하리 잘 데려다줬어요?”“네. 잘 데려다주고 왔습니다.”하리는 일주일에 한 번, 지환의 본가를 찾았다. 

아이가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어른들 품에 하리가 폴짝 안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지환은 희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부러 바쁘게 움직이던 지환은 영 이상한 느낌이 들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희원이 멀뚱멀뚱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고 서 있습니까?”농담기를 지운 얼굴로 물었다. 

그녀 앞에서 웃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밥 없는데.”“괜찮습니다. 한 끼 굶어도 죽지 않아요.”“서지환 씨, 이건 나가서 먹자는 소리예요. 눈치가 그렇게 없어?”아아. 나가서 밥을 먹잔다. 

덥석 그러자고 반기려다가, 지환은 멈칫했다. 

자신의 농담과 친근함을 그녀가 어디까지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저녁 생각 없습니다. 권희원 씨.”“내가 생각이 있어서요. 나가서 먹어요. 배고프면 서지환 씨를 잡아먹을 수도 있거든요.”“뭐, 뭐?”화들짝 놀란 지환이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자 희원은 웃었다. 

“아,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배도 든든해야 사랑도 하고 거절도 하는 거 아닌가요?”“허…….”그녀는 낮 사이 더욱 강한 캐릭터가 되어 돌아왔다. 

지환이 어이를 상실한 표정을 짓고 있자 희원은 까딱, 고개를 흔들며 현관을 가리켰다. 

“삼겹살. 소주 한잔, 콜?”어억. 메뉴만 들어도 침샘이 폭발한다. 

지환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희원은 시원하게 웃었다. 

“가요. 요 앞에 잘하는 집 발견했어요.”그래. 삼겹살은 죄가 없다. 

지환은 시원하게 웃으며 먼저 현관으로 향하는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리 나와요! 맛집이라 늦으면 줄 서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요!”“갑니다, 가요.”물론, 소주 한잔도 죄가 없다. 

“잘 익은 고기 한 점에 소주 한잔이면 진시황도 부럽지 않죠.”먹어요. 희원이 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내려준다. 

오늘 아침. 지각할 뻔한 샤워기 사건을 곱씹으며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일찍 나갔던데, 오늘.”“아아. 네. 일이 좀 있었어요. 설마, 내가 안 깨워서 지각한 건 아니죠?”했다! 했어!

지환은 꿍얼꿍얼 입술만 움직이며 고기를 집었다. 

만나기만 해봐라, 매섭게 얘기해줄 테다. 

다짐다짐을 하고 왔는데, 막상 그녀 얼굴을 바라보니 샤워기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제 과실로 여겨진다. 

아침나절의 고충은 가볍게, 날아가고 만다. 

모든 것은 별일 아닌 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했단 말이죠. 이게 얼마나 힘들고 빡센 일이냐면요…….”고기를 굽는 내내, 술잔을 비우는 내내 그녀는 쉼 없이 종알거렸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는 건 그의 몫이었고, 술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술을 채워주며 지금을 이끌어가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지환은 물끄러미 그녀 얼굴을 응시했다. 

“……했는데, 와, 진짜 죽을 뻔했어요. 두 번은 못 하겠더라고요. 진심으로 힘들었어요.”작은 입술 사이로 사소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는 고기를 굽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시선 둘 곳은 마치 그곳뿐이라는 것처럼, 그녀는 불판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입술은 하염없이 움직이는데.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 

“아까부터 권희원 씨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뭔데요?”“왜 사람 얼굴을 안 봅니까? 말은 끊임없이 하면서.”……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칫, 한다. 

변명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고, 목을 축였다. 

“못 보겠어요. 서지환 씨 얼굴을.”“얼굴도 못 쳐다보는 남자를 어떻게 꼬시려고?”“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술김엔 가능할까 싶기도 한데. 흠.”수, 술김에 뭐,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지환은 느긋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희원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순간의 그녀는 무적이다. 

“꼬셔본 적, 있습니까?”“내가요? 남자를요?”오, 쳐다본다. 질문이 하도 거지 같으니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는 모양이다. 

“꼬셔본 적 없는데요. 한 번도.”“……쿨럭. 쿨럭쿨럭.”쿨럭. 지환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곤 급히 기침을 뱉었다. 

민망하니 술이 술술 들어간다. 

“집게 줘요. 내가 구울 테니.”“다 구웠는데 무슨. 서지환 씨는 먹기나 해요.”“지금부터 관리가 중요한 겁니다. 내놔요.”지환은 희원의 손에 있는 집게를 가져갔다. 

고기가 타지 않게 뒤적거리며, 그는 힐끗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째서, 나입니까?

그는 묻지 못한 말을 삼켰다. 

“어째서 서지환 씨여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지금 내가 혹시 입 밖으로 생각을 말했습니까?”“아뇨? 무슨 소리예요?”지환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녀에게 마음을 읽힌 것만 같아 더운 기운이 와락 밀려왔다. 

“오늘 종일, 생각해봤어요.”희원은 약간은 작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시선은 빈 술잔에 닿았다. 

“그런데 잘 모르겠는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당신 이야기에 웃고, 당신을 생각하면 웃고. 웃고. 또 웃고.”“…….”“기억나요? 서지환 씨가 사랑에 실패했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난 이후로 뭐랄까, 어떤 이상한 마음이 생겼어요.”“어떤…….”“당신의 과거와 싸우고 싶다…….”……그의 마음에 찌르르, 진동이 인다. 표정은 허물어지듯 긴장을 잃었다. 

지금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희원은 시선만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뭐, 현재일 수도 있겠어요. 아직 당신 마음속에선 진행형이니까. 그런데 내가 싸워서 이겨보고 싶더라고요.”이겨서, 당신의 과거와 싸워 보란 듯이 이겨서.

“그런데 내가 신중하지 못한 거죠. 그렇게 쉽게 열릴 마음 같았으면 서지환 씨가 닫지도 않았을 텐데. 그걸 몰랐어요.”당신이 나와 함께 행복해졌으면 했는데.

오만이었을까. 

“생각이 많네요, 내가 요즘. 서지환 씨 때문에.”마치 고해를 하듯, 그녀 말은 경건했고 엄숙한 구간이 있었다. 

진중한 표정과 더해지니 받아들기도 죄스러울 만큼 무겁고, 귀하게 여겨졌다. 

그는 술잔을 들었고, 비웠다. 작은 잔을 쥐고 이리저리 돌리다가.

“내가 미안해야 할 것 같아요. 서지환 씨에게 이런 고민거리를 안겨 줘…….”“해봐요.”“……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술잔에 닿는다. 

“해봐요. 이길지, 질지는 모르겠지만. 싸워봐요.”“당신의 ……과거와…… 싸우라는 말인가요?”“할 수 있다면. 해줄 수 있다면.”우리의 끝은 어디인가. 열리고, 닫히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권희원 씨의 각오 그대로 꼬셔봐요. 힘껏. 열심히. 내 과거와 싸워서, 이겨봐요.”“…….”“당신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으니까.”그는 아직 우리의 미래를 보지 못했다는 눈길을 들었다. 

……여전히 마음은 닫혀 있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사는 나이지만ㅡ 

나도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할 수 있다면 해줘요, 그렇게.”당신과 함께. 어쩌면.

어쩌면.

“건투를 빕니다.”그게, 당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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