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노하우 전수
간단히 저녁만 먹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게 하려고, 대본을 짜듯 심심한 이야기들도 많이 준비했는데.
내 과거와 싸워서, 이겨봐요.
웃으며 흘려듣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말을 듣고야 말았다.
삼겹살을 먹다가.
소주를 기울이다가.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희원은 힐끔, 지환을 올려보았다.
그는 덤덤하게 버튼을 눌렀고 반듯하게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힐끔, 힐끔, 그녀는 연신 그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시선을 아무리 돌려보려고 해도 순간순간 그가 짓는 표정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렇게 훔쳐볼 거면 차라리 앞에서 봐요. 그게 더 잘 보일 것 같은데.”“아, 안 쳐다봤거든요?”“다 보입니다. 쪼끄매가지고.”지환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희원이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고 있다.
이런 제길. 희원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홱,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닳지도 않을 거면서 쳐다봤다고 되게 뭐라 그러네.”“아니 그러니까, 정면에서 보라니까? 정확도 떨어지는데 뭐 하러 그렇게 봅니까?”“원래 모든 건 훔쳐봐야 재밌거든요. 몰라요?”“아아. 설득이 바로 되네요. 그럼 조금 더 훔쳐봐요. 취향 존중합니다.”“아오…….”아오…… 얄미워…… 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환을 노려보았다.
내가 아무리 말이야, 지를 좋아한다고, 어? 저렇게 말이야, 자신감에 넘쳐서 말이야.
도도하고 거만하고, 어? 사람이 말이야, 글러 먹었어.
띵동ㅡ
“내려요. 문 닫혀요.”희원이 속으로 꿍얼대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지환이 먼저 내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따라 내렸다.
띡, 띡, 띡, 띡, 지환은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건 누를 때마다 감동이긴 합니다.”자신의 생일로 완성된 그녀의 집 비밀번호.
지환이 마음에 든다며 빙긋 미소 짓자 희원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집 비밀번호 바꿔야겠어요.”“왜? 어째서? 갑자기?”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들어선다.
“집 비밀번호, 내 생일로 해놓을게요. 순간 뭔가 좀 억울했으니까.”난 이미 당신 생일을 닳도록 외웠는데.
당신도 내 생일 눌러봐야지. 응?
“내 생일 비밀번호 꾹꾹 누르면서 내 생각해요. 난 이미 서지환 씨 생일 외웠으니까.”“그냥 두죠. 귀찮게 바꾸고 하지 말고. 손에 익어서 좋은데요. 본인 생일로 해두는 집 비밀번호는 위험하기도 하고.”우씨…… 희원은 꿍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술김일까, 자꾸만 더워지는 것이.
“서지환 씨, 물 마실래요?”“괜찮습니다.”벌컥벌컥 물을 삼켰다.
휴, 갈증이 가시는 것 같지 않아 희원은 재차 물을 마셨다.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겨달라던 말이 쉽게 지워지질 않고 뇌리에 남아, 자꾸만 가슴이 떨렸다.
두근거리는 것이 아니고, 저미고 아팠다.
……희원은 물컵을 내리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리가 없는 집. 둘만 남은 공간.
밤이 되었고.
“슬슬 씻고 자야죠. 서지환 씨가 먼저 씻을래요?”사심은 충만하고.
“먼저 씻으라는 말이 왜 이렇게 협박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네요. 나 오늘 안전한 겁니까?”“아, 진짜! 자꾸 도발할래요? 협박 좀 당해볼래, 진짜?!”뜨끔한 희원이 버럭 하자 지환이 피식 웃는다.
저 웃음,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아서 희원은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왜 자꾸 괴롭히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권희원 씨가 버럭버럭할 때마다 웃음이 솟아서, 자꾸.”“……어린애 같네요. 괴롭히면서 즐기는.”“보통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그러던데.”지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장난을 쳤다간 한 대 얻어맞지 싶다. 이럴 땐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
“그럼 먼저 씻으러 갑니다.”“같이 씻을래요?”“이 여자가 진짜!”지환이 홱, 뒤를 돌아보자 이번엔 희원이 웃는다.
“놀려 먹는 게 당신만 즐거운 줄 아나 본데, 나도 즐거워. 왜 이래?”“말은 왜 짧은 겁니까?”“뭐, 술김?”희원은 그에게 다가갔다.
마치 어린아이 엉덩이를 토닥이듯 지환의 엉덩이를 토닥토닥했다.
“어구구, 깨끗하게 씻어요. 양치도 꼭꼭 하고.”“어, 어딜 만져요!”“그러니까 항상 경계하라고요. 뒤는 언제나 안전하지 않으니까.”으어으…… 지환은 희원의 손을 피해 후다닥 걸음을 빨리했다.
당황해서 피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운지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된통 당하지 진짜! 내가! 어? 내가! 진짜 막 무섭게!”지환이 사라지며 바락바락 소리치자 희원도 따라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 말이! 언제쯤 무섭게 해줄 건데!”…….
조용하다.
희원은 그가 사라진 자리로 눈을 흘기다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주 그냥 귀여워서 못 기다리고 내가 무섭게 달려들게 생겼어.”그의 엉덩이를 토닥였던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귀여워.
정말이지 그는 너무 귀여웠다.
“뭐,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네.”그래. 짝사랑이면 어때.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 따위, 이기지 못하면 어때.
“이렇게라도 계속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내가 먼저 등 돌리지 않는 이상ㅡ
당신이 내게 등을 돌릴 리가 없는데.
“거기, 나 좀 봐.”“네? 아, 네.”희주는 머그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때아닌 남편의 호출.
‘거기’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남편에게 한 번의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즉각 반응했다.
남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서재로 와.”“네. 알겠어요.”희주는 백 의원의 뒤를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의 분위기는 남편의 성격을 닮아 몹시도 냉한 기운이었다. 숨 막히는 무거움도 함께 있었다.
“거기 좀 앉아봐.”“네.”자신을 소파 의자에 앉히곤 본인은 서재 책상으로 걸어가 책상 의자에 앉는다.
가까이 마주 앉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명확한 상하관계의 풍경.
“요즘 만나는 사람 중에 권희원이라고 있지.”“네? 네? 아, 어, 아…… 어…….”“…….”“……네.”대단할 것 없는 한국 무용수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렸더니 아내가 기겁을 한다.
백 의원은 그런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편안해 보이지 않는 아내의 표정.
예감에 단순한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어…… 만나고 다닌다는걸…….”“……하.”백 의원은 아내의 질문이 황당하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몇 년을 살아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너에 대해서?”“…….”그는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렸다.
팔꿈치로 책상을 받치고 손등에 턱을 괴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 남편이 서지환 검사라던데.”희주는 일부러 놀라지 않으려는 듯 눈만 깜빡였다.
조금 전과 다른 그런 침착함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몰랐나?”“어…… 잘은…….”“그래? 잘 몰라?”“…….”“보고받았다고 하던데. 니가. 직접.”희주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눈만 감았다가 떴다.
남편의 질문은 취조처럼 여겨져 단순한 답도 어렵게 되었다.
뭘 알고 묻는 건지, 모르고 묻는 건지. 안다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묻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심장은 가파르게 뛰었고, 때문에 입을 뗀다면 목소리가 갈라질 것만 같았다.
남편의 시선이 따갑다는 것을 깨달은 희주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빙긋 웃었다.
“보고받긴 했었는데 그 여자 남편의 이름까지 기억할 수는 없었어요. 검사라고 했던 것 같긴 한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그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곁에 둬도 괜찮은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만 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신상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요.”희주는 일어서 남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그때 식당에서 만난 젊은 검사가 권희원의 남편이라는 거잖아요? 맞죠?”우연히 겹친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그를 모른척하는 지금.
“몰랐어요. 그냥 당신이 아는 검사라고만 생각했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거라곤.”그녀는 남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자신을 올려보는, 남편의 날카로운 눈빛에 마음이 찔리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
“뭐, 그래.”남편의 말이 이어진다.
“모를 수도 있지. 난 니가 나한테 뭘 숨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제가 뭘 숨기겠어요. 그런 거 없어요. 있을 리가 없잖아요.”“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사력을 다해 숨겨.”“…….”“나는 반드시 찾아낼 거고, 결국 내가 알고 나면 결말이 아름답지는 않을 테니까.”눈빛을 조절하는 것도, 표정을 잃지 않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희주는 가만히 숨만 내쉬며 남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팔이 떨려오는 것 같아 간신히 왼팔로 오른팔을 붙잡고 서서 남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쨌든 지금은 그 무용수를 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제일 중요하니까, 일단 다른 얘기는 접자고.”“왜…… 권희원 씨가 중요한지 물어봐도 돼요?”“필요해.”“…….”“그 무용수가 아니라 그 남편이.”희주는 바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루를 버티고 나면, 그다음 하루는 더욱 버겁다.
간신히 버티고 버텨 그 하루를 살고 나면, 그다음 하루는 그 이상으로 버거워진다.
“그날 봐서 알 거 아냐. 서지환 검사가 맡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내가 그 사건을 좀 주물러야 해.”“자세히 좀…… 말씀해주시면…….”“자세히는 알 것 없고.”백 의원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수사는 좁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확대되어가는 중이었고, 윗선의 지시와는 별개로 검사의 단독 수사권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들어가려던 금괴가 공항에서 다량 압수되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니가 자리 좀 만들어봐.”“아…….”아…… 제발…….
“어떻게든 서지환 검사, 내 앞에 데려와. 무용수를 구워삶든지 잡아먹든지 알아서 하고, 데려와.”“제가 어떻게…… 어떻게 남의 집 남편을…….”“부부 동반, 취지 좋잖아.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나?”희주는 잔 숨만 끊어 내쉬었다.
간절함에 시작한 희원와의 인연은 독이 되어 지금 자신의 숨통을 거침없이 움켜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나를 도와. 촉박하니까 빠른 시일 내에 자리 만들고.”이런 속도 모르고, 남편은 오로지 명령만을 반복했다.
“나가 봐.”
씻고 나온 희원은 머리 위로 수건을 감은 채 화장실을 나섰다.
거실로 향하니 지환이 소파에 앉아 평소에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놓고 있다.
인기척을 들었을 텐데 격렬하게 모르는 척하며 열심히 시청하는 척, 하고 계시니 희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자요?”“먼저 자요. 난 이거 마저 보고 잘게요.”“그래요, 그럼.”희원은 아무 생각 없이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밑에 이불이 깔려 있지 않은 것을 본 희원은 문고리를 잡고 멈췄다.
이 시간쯤이면 시키지 않아도 이부자리를 잘 펴놓는 지환이기에.
“한 방 쓰는 거, 민망한 모양이네.”하리가 없으니 침실에서 자기가 어려운 모양.
희원은 고개를 돌려 다시 거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베개 하나를 등받이처럼 쓰고 있다.
TV를 보는 척하다가 소파에서 그대로 잠을 잘 생각인 것 같다.
쳇. 희원은 꿍얼거리며 눈꼬리를 올렸다.
화장대에 대충 앉아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며, 그녀는 연신 꿍얼꿍얼 투덜거렸다.
“과거와 싸우긴 개뿔, 싸울 시간이나 줬어?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거 아냐?”싸우고 싶어 죽겠는데.
혼자만 열 낸다고 싸움이 되겠나.
“그래, 소파에서 자라, 자, 치사해. 하리만 없으면 아주 내외하기가 말도 못 하지.”크림을 치덕치덕 바른 희원은 머리를 감싸놓은 수건을 끌렀다.
드라이기를 켜고 불같은 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머리를 말리는데ㅡ
“왜 들어왔어요?”그가 들어온다.
“보던 게 끝나서.”보던 프로가 끝났단다.
흥, 희원은 눈꼬리를 있는 대로 끌어올린 채 열심히 머리를 말렸다.
베개를 한쪽 팔에 끼고 들어온 그는 침대 위로 베개를 던지고는 이불장을 열었다.
소파에서 자려는 주제에 이불까지 가져가려는 모양일세?
흥, 그럴 거면 차라리 지 방에서 자면 그만이지, 뭐 하러 소파에서 자려고 해?
“지금 뭐 해요?”그러다가 그녀는 드라이기를 껐다.
바닥에다 이불을 펴고 있는 게 아닌가?
“자려고 준비하는데요?”“소파에서 안 자고?”희원은 홱,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가 이불을 툭툭 펼치며 입을 연다.
“소파에서 자는 걸 바라는 모양입니다?”“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 난 또 그런 줄 알고.”“왜? 언제는 침대에서 같이 자자며?”“…….”쿵, 하고 심장에 돌덩이가 떨어져 내린다.
지환은 묵묵히 이불을 마저 다 펼치더니 딱딱하게 굳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말만 번지르르한 그녀는 막상 자신의 말 한마디를 이기지 못하고 저렇게 얼어붙었다.
……귀엽다.
“머리, 말려줄까요?”“네? 네?”“줘봐요. 덜 마른 것 같은데.”지환은 멍청하게 드라이기만 쥐고 있는 그녀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왔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그녀 뒤에 서서, 드라이기 전원을 켰다.
조금 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바람이 밀려나온다.
“여자들은 귀찮겠습니다. 머리를 말리려면 일정의 노동이 필요하니.”다소 투박한 손을 조심스럽게 흔들며 머리카락을 말린다.
두피가 상할 것 같은지 다소 드라이기를 멀리한 채,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거울로 반사되는 그를 응시했다.
그의 손길이 머리칼을 스칠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 일어나 반응하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사랑 빼곤 다 해줄 수 있겠다던 이 남자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항상 곁을 지켜주었고.
“뜨거워요? 중간 바람인데.”“네. 뜨겁네요. 그것도 아주 많이.”혼자만 뜨거운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세심한 관심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미안하지도 서글프지도 않게.
욕심낼 수도, 떼를 쓸 수도 없게.
“얼추 다 마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좋아요. 그것도 아주 많이.”당신을 이토록 좋아하는 일에,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결혼씩이나 해버린 무척 큰 어른이, 감정 하나 잡지 못해 흔들리고 싶지는 않다.
“하리도 없는데 서지환 씨, 이 방에서 자도 되겠어요?”“무슨 뜻입니까?”“그냥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불편하잖아요. 하리가 없으면 우리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익숙한 감정이 되어 바람에 시리지 않은 내가 되고 싶다.
당신 마음을 붙잡지 못해 하루하루 메마르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여기서 자고 싶어서 들어온 건데요. 금세 익숙해졌는지 편해서.”“…….”“하리가 없어도, 있어도,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나는 설렐 것 같아서요. 서지환 씨가 내 침실에 있다는 이유로. 자발적이니까.”그녀가 눈을 맞춰오며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이자 지환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드라이기를 내렸다.
사랑을 하고 말고의 문제와는 별개로ㅡ
이렇듯 속에 있는 마음을 모두 꺼내 그녀가 보여줄 때면ㅡ
“내가 자다 말고 침대 위에서 폴짝 내려와 덮치면 어쩌려고, 무슨 남자가 이렇게 겁이 없어요?”마음은 허락도 받지 못한 채 뛰었다.
깊은 눈을 응시하기가, 조금은 어려워졌다.
“방심하지 말라고요. 난 언제든지 서지환 씨를 꼬실 준비가 되어 있는 여…….”지환은 드라이기를 화장대에 내렸다.
“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그러곤 두 팔로 화장대를 붙잡았다.
“어떻게 꼬셔볼 건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두 팔에 갇힌 듯 사방이 막힌 희원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움직였다.
“어…… 어…… 음…… 뭐…… 아까도 말했듯이 어…… 뭐, 덮쳐요. 내가 막, 음. 막. 무섭게.”“그리고?”그리고?
아니, 그다음은 생각 안 해봤는데?
“어…… 뭐…… 그렇죠…… 어…… 막 뭐랄까요, 내가 그러니까 막.”생각해!
생각해보라고, 권희원!
“육탄전. 그러니까, 응. 육탄전.”“육탄전?”지환은 반대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더욱 얼굴을 그녀 쪽으로 내렸다.
으아어으어으어. 희원은 고개를 슬그머니 뒤로 빼며 그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말로만 하는 육탄전도 있습니까? 내가 아는 육탄전하고는 조금 다른데.”“…….”“내가 아는 육탄전이란 이렇게 가깝게도 오고.”훅, 그가 다시 가깝게 얼굴을 들이댄다.
희원은 더 커질 리 없을 만큼 크게 뜬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희번덕거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입술도 탐하고.”눈빛을 맞추던 그는 시선을 조금씩 내리며 그녀 입술을 바라보았다.
희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속으로 숨기며 마른침을 삼켰다.
“입는 일보단 벗는 일에 능하고.”“으어으어어어어…….”지환의 눈길이 조금 더 내려가 쇄골 즈음에 닿자 그녀 입에서 감당 못한 탄식이 터진다.
그런 탄식에도 표정을 풀지 않으며, 지환은 조금 더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천천히 올렸다.
그의 눈길을 따라 몸에 선이 그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아는 육탄전과 당신의 육탄전이 같았으면 좋겠는데.”아찔했다.
“꼬시려거든 그 정도의 깨우침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알아두라고.”지환은 간격을 조금도 멀리하지 않으며, 그녀의 시선을 묶었다.
“마, 말은 왜 갑자기 짧아졌는데요. 사람 노, 놀라게.”“그냥 뭐, 술김?”그녀가 거품 물기 직전까지 가는 듯한 표정을 짓자, 비로소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 머리를 쓸어내렸다.
머리를 말린 뒤 약간 엉켜있던 부분들이 풀려나갔다.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덮치든 때리든 당신 뜻대로 하라고. 난 먼저 잡니다.”“…….”그는 돌아서며 웃었다.
“잘 자요. 권희원 씨.”그녀는 예상대로 숙맥이었다. 귀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