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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두 다리가 멈춰 (38/98)

38. 두 다리가 멈춰

“야! 여기 술 가져와!”쾅쾅 울리는 음악 소리가 모든 사물의 소리를 삼키는 클럽.

리드미컬한 DJ의 손끝에서 퍼지는 사운드는 모든 사연과 상황을 묻어버렸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클럽 안은 이미 흥에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요즘 가장 핫한 클럽답게 유명인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칭 셀럽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람의 급은 돈과, 얼굴과, 몸매로만 평가되는 어두운 공간. 

각자가 지닌 무기 같은 돈과 얼굴로 한껏 자신을 치장했다. 

“야! 술 더 가져오라고!”……VIP 중의 VIP들만 모신다는 클럽 안의 룸.

이미 동이 난 술병을 들고, 웬 사내가 흐트러진 행색을 하고 있다. 

걸치고 있는 옷 값이야 듣기에 헉, 소리가 나는 금액이었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투 따위 너무나도 저렴해 보이는 사내였다. 

룸의 문이 열리며 직원이 헐레벌떡 들어선다. 

사내는 취한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부르면 빨리빨리 쳐 와야 할 거 아냐!”“죄송합니다! 바로 즉각 대령하겠습니다!”“빠져가지고, 당장 가져와! 여자는 왜 없어! 술맛 안 나잖아!”“아…… 예! 바로바로 시행하겠습니다!”……혼자 다 처먹어놓고는 술맛이 없단다. 

직원은 속으로 온갖 욕을 끌어다 바치며 굽신거렸다. 

“비켜! 여자 볼 줄도 모르는 것들이, 꺼져! 내가 간다, 내가 가!”테이블을 휩쓸 듯이 비틀거리며 사내가 일어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직원은 쩔쩔매는 눈빛을 했다. 

사내는 클럽의 오랜 단골이었고 VIP였지만 클럽주의 입장에서나 고마울 뿐, 실질적으로 사내를 치다꺼리해야 하는 직원들은 언제나 죽을 맛이었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졌고, 손님들은 무례하고 막무가내인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백인호 의원의 친척.

“어디 보자…… 끅.”대한민국 실세 정치인의 가족이었으니까. 

사내는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서서 무거운 눈꺼풀을 연신 힘들게 들어 올렸다. 

사냥하듯 아래를 내려다본 사내는 제법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했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쟤 괜찮네. 음. 좋아.”목표를 정한 발걸음이 아래로 향한다. 

사람들과 거칠게 부딪치며 걸어간 사내는 다짜고짜 여성의 손목을 잡았다. 

클럽 직원이다. 

“꺄악! 소, 손님!”놀란 직원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사내는 무작정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쿵, 쿵, 거리는 음악에 음성이 들릴 리 없다.

“가자! 오빠가 술 사줄게!”“이, 이거 놔주세요! 놔주세요!”간신히 짧은 말들만 이해하는 상황. 직원은 소리치며 사내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비틀거리며 직원의 팔목을 놓친 사내 ㅡ 차민규는 간신히 제 몸을 지탱하고 서서 직원을 노려보았다. 

“야! 올라가자고! 술 많다고!”직원이 자리를 피하려는 듯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차민규는 다시 쫓아가 직원의 손목을 잡았다. 

거칠게 앞으로 끌며, 차민규는 직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야, 너 나 몰라?”“놔, 놔주세요. 놔주세요…….”“날 몰라? 내가 누군지 알면 더 깜짝 놀라.”“아…… 놔주세요…….”주변에서 힐끗힐끗 이쪽을 바라보니 무안해진 차민규는 실성한 듯 웃다가 지갑을 꺼내들었다. 

“하…… 얘가 또 끅, 사람 웃기게 만드네. 야, 오빠 돈 많아. 어? 돈 많다고.”지갑 안 빽빽하게 가득 찬 오만 원권과 수표. 

돈의 사용 출처를 남기지 말라는 백 의원의 말에, 차민규는 현금만 사용하고 있었다. 

“너 돈 좋지. 응? 좋아하지? 올라가면 이 돈 다 너 줄게.”비틀거리던 차민규는 수표 몇 장을 지갑에서 뽑아 직원의 가슴팍을 향해 붙이려는 행동을 했다. 

“꺄아악!”놀란 직원이 몸을 웅크리자 광경을 내내 주시하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달려왔다. 

급히 울음을 터트린 직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일터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없는 슬픈 상황. 

차민규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내가 뭐? 내가 뭐 잘못했어?”“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걔 데려와. 내가 돈 준다니까? 너 나 누군지 알지. 어? 알지?”직원들이 어르고 달래며 차민규를 이끌었다. 

간신히 그가 머물던 룸으로 끌고 들어와, 감금하듯 문을 닫았다. 

야! 여자 데려오라고! 여자…….

룸 안에선 반쯤 넋이 나간 차민규가 잠이 들며 중간중간 소리를 질렀고, 직원들은 룸 앞에 모여 긴장된 얼굴을 했다. 

“저 새끼 면상 좀 안 볼 수 없나? 토가 나올 지경이야. 돌아버리겠네.”“백인호 의원, 저 새끼 때문에 언젠간 피 보지 싶다. 저런 또라이가 친척이라 골치깨나 썩겠어.”“그래도 차민규가 몇 번 경찰서 갔을 때 백 의원이 빼줬잖아요. 나 같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은데 또 그런 걸 보면 이상하긴 해요.”“에효, 일단 정리나 하자. 밖으로 새어 나가봐야 우리한테 좋을 일 없어.”피해 직원을 대피시킨 직원들은 다시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으니까.

클럽 안은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다시 음악만이 쏟아졌다. 

술과 어둠이 공존하다 보니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했다. 

모두는 익숙했으니 금세 잊었다. 

“남 형사, 이제 그만 가자. 고막 터지겠다.”“예.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이제 곧 고막이 터질 것 같았어요.”오늘 하루 종일 차민규를 따라다니던 형사들은 저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척 그를 주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민규, 뭐라도 걸리기만 걸려라.

형사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주문을 외고 있었다. 

덮치는 법.

희원은 연습실에서 주변을 살피다가 포털 사이트에 ‘덮치는 법’을 검색했다. 

“설마 있겠어?”헐. 덮치는 법을 검색하자 같은 질문이 줄줄 쏟아진다. 

[남친 덮치는 법 좀 알려주세요.]

희원은 이미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질문을 했음에 질문을 꾹 눌러 지식인 창을 열었다. 

“너는 남친이야? 나는 남편이야…….”중얼거리며 열자 덮치는 법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답변이 달려 있다. 

[일단 분위기를 잡은 뒤에 야한 옷을 입으세요. 향수도 뿌리고 술을 마시는 게 좋습니다.]

“야한 옷…….”야한…… 희원은 곱씹으며 답을 마저 읽었다. 

[누워서 밀착하듯 안겨 있으면 십중팔구 다 넘어옵니다. 그래도 안 넘어오는 남자는 헤어지세요.]

“헤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혼을 해야 하는데…….”

[둘 줄 하나입니다. 성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남자를 좋아하거나.]

“아…… 남자…….”남자를…… 좋……아……하…….

희원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치명적인 이별의 사유. 치료되지 않는 마음.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에이, 설마. 만약에 사실이면 이거 진짜 사기다. 나 사기당한 거지.”희원은 홱, 홱,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하니 남자를 좋아했겠나. 

……그런데 성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그게 더 슬픈 거, 아닌가?

“밀착. 밀착. 야한 옷, 야한…….”“뭐 하냐?”“아무것도 안 해! 내가 뭘 해!”희원은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허둥지둥 대며 숨겼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드니 구언이 다가왔다. 

휴, 다행이다. 검색 내용까지는 못 본 것 같아.

“그런 거 이론으로 배워봐야 하나 소용없다. 인생은 실전이야.”“아오…….”이 자식…… 봤나 봐…….

“봤어?”“보였어.”구언은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기가 차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토했다.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어진 희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프지 않게 그녀 이마를 툭, 치며 구언은 탄식을 흘렸다. 

“서른 넘어 남편 덮치는 법이나 검색하는 네 팔자도 참, 기구하다.”“야. 그런데 나 같은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있어. 그게 더 웃기지 않아?”“뭐라는데?”“일단 술, 야한 옷, 밀착. 그럼 다 넘어온대.”“하이고…….”구언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결연한 각오를 다지는 희원의 눈빛을 바라보자니 이걸 슬프다고 해야 하나, 웃기다고 해야 하나.

“내가 알려줄까? 내가 잘 알려줄 수 있는데.”“경찰서 가고 싶냐? 당장이라도 데려다줄 수 있어.”“내가 또 그쪽으로는 타고났거든. 어때. 배워볼래?”“경찰서 가기 전에 내 손에 죽고 싶어? 소원이 그런 거야?”희원이 눈을 부릅뜨자 구언은 손사래를 쳤다. 

좋아했던, 아직은 좋아하는 것도 같은 여자가 앞에 앉아서 남편 덮치는 방법이나 검색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하…… 내가 참, 살다 살다 이런 꼴을 다 보고. 내가 바보냐, 아니면 권희원 니가 바보냐.”“서지환이 바보야. 결론은 그거.”에효. 희원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을 뱉자 구언은 그녀를 응시했다. 

“남편이 나더러 자기를 꼬셔보래. 그런데 되게 막막해. 알아?” ……한편으로는 그가 눈물 나게 부럽기도 하고. 

“그 사람은 사랑하는 일이 제일 어렵고 힘들대. 그런 사람을 무슨 수로 꼬셔?”이런 너의 사랑, 한 번이라도 내가 받아보았으면. 

하는 끊지 못할 바람이 생겨났다. 

“드럽고 치사해서 확, 그만둘까 보다.”“그래. 관둬라, 너.”……어떤 사랑을 하건 상처를 받는다. 

“내가 못 보겠다.”때로는 너무 많이 사랑해서. 혹은 마음이 생각만큼 크질 못해서.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에 빈틈이 보여서. 

더러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대의 마음이 버거워서.

“너,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러니까 이런 노력 같은 건 하지 마라.” ……시작이 미약해서.

그보다도 더 미약한 끝이, 보여서. 

“그대로의 너를 봐주지 않으면 물러서. 너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상처받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와,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네.”희원은 구언의 낮은 음성에 그만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사실은 듣고 싶었던 말. 

누구라도 제게 해주었으면 했던 말을 지금 구언이, 나를 사랑했던 남자가 해주고 있다. 

네가 나를 사랑했던 시간도, 이렇게 회색빛이었겠구나. 

희원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언을 바라보았다. 

“내가 노력하는 건 구언아,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무슨 말이야. 너를 위한 길이라니.”“후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서. 뭐라도 해볼걸, 하는 미련 같은 것도 남기지 않으려고.”“…….”“어쩐지 우리 금방 끝날 것 같거든. 그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마음이 없으니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거든.”나는 나를 위해 사랑한다. 

내 마음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아, 지금의 그를 성심성의껏 사랑한다. 

“생각해봤는데, 만일 서지환 씨가 나를 먼저 좋아한다고 했으면 난 달아났을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이 충분히 이해가 돼.”희원은 웃었다. 진정으로 편안한 웃음이었다. 

“내가 또 언제, 나를 이렇게 던져가며 사랑해보겠어? 할 수 있을 때 해보려고. 남들도 다 해봤다는 그런 사랑, 나 지금 하는 거니까.”너도 하고, 그도 해봤을 사랑.

난 이제 시작한 것뿐이니까.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넌 응원해줘. 그거면 돼.”닫힌 문을 열기란 이다지도 힘든 일이다. 

열어달라는 애원으로 열리기엔 잠금장치가 너무나도 많았다. 

주인도 열쇠를 잃어버려 차마 열지 못하는ㅡ

“구언아, 연습하자. 연습.”어쩌면 평생을, 아무도 열지 못할지도 모르는.

“검사님,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하십니까?”“정리하고 일찍 들어갈까 합니다. 지금도 늦긴 했는데.”지환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점심경에 미리 사둔 베이커리 봉지가 책상 위에 있음을 바라본 계장은 웃었다. 

“사모님 드리려고 사셨지요?”“이거요? 아, 네. 차검이 맛있다고 해서. 차검이 맛있다고 하는 건 대체적으로 아내도 좋아하더군요.”“자상하십니다. 안 그러실 것 같았는데.”“……그렇습니까?”지환은 멋쩍게 웃었다. 

먹기 위해 태어났다는 정윤은 사무실 근처 구석구석 맛집을 잘도 찾아냈다. 

한 입 두 입 얻어먹다 보면 희원이 떠올랐다. 

가져다주면 좋아하겠거니, 사소한 마음이 곧잘 생기곤 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탈출해야겠어요.”“춥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검사님.”지환은 일어섰다. 책상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챙겨 나왔다. 

유야무야 시간은 흐르고ㅡ

내일은 하리가 형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이렇다 할 변화 없이, 부부의 동거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네.”……사랑을 받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힘겹게 마음을 열고 나니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언제고 없던 일처럼 사라지고 말까 봐.

자유를 원하는 그녀를 구속하게 되고, 욕심을 부려가며 본질을 헝클어트릴까 봐.

어느 날 갑자기 왔듯.

어느 날 갑자기 떠날까 봐.

“……뭐야.”그녀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니까.

걸음을 옮기던 지환은 우뚝 멈췄다. 

자신을 발견하곤 차에서 내리는 한 여성은 어두운 계열의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누구라도 알아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환은 무의식적으로 좌우를 살폈다. 

누가 볼세라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일종의 버릇.

지워지지 않고 남은, 무의식의 버릇.

“오빠…….”아주 희미하고, 아주 작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내 아내에게 가져다줄 베이커리 쇼핑백을 들고 선 채, 지환은 발끝부터 올라오는 지난 기억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앞의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ㅡ

“아…… 오빠…….”소름 끼치게 익숙한 음성으로 자신을 불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익숙한 호칭으로.

온몸으로 버티기엔 굉장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그 여자, 희주였다. 

“오래간만에 나왔더니 살 게 많네. 아후.”희원은 이것저것 떨어진 개인용품을 사려고 시내로 나왔다. 

단골집에 들러 연습복과 공연복을 구매하고, 평소 애용하는 편집숍에 들러 겨울옷 몇 장을 사서 나왔다. 

쇼핑백을 들고 터덜터덜 걷던 희원은 피식 웃었다. 

“서지환 씨 옷을 더 샀어.”정신없이 사고 나니 지환의 옷이 더 많다.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사이즈가 맞아야 할 텐데. 

희원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 옷도 파는 곳이 있을 텐데.”하리 옷도 사주고 싶다. 같이 오면 좋겠지만 하리가 내일 떠나니 선물로 주고 싶은 거다. 

아이 옷을 사본 적이 없으니, 어디에 매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마치 처음 온 동네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하며 아이 옷 매장을 찾는데ㅡ

“저, 길 좀 물을게요.”허름한 복장의 여자가 다가와 길을 묻는다. 

“네. 어디 찾으세요?”자주 오는 동네는 아니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대강 안다. 

희원은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여기를 좀 가려고 하는데요.”여자는 휴대폰 지도를 보여주려는 듯 희원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제가 짐 들어드릴게요. 좀 봐주세요.”자연스럽게 희원의 손에 있던 쇼핑백을 가져간다. 

희원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여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리 길치라도 금방 찾을 수밖에 없는 대형 건물을 찾아달란다. 

초행길인 모양이네. 희원은 뒤를 돌아 손을 쭉 폈다. 

“이 길을 쭉 따라가시면 돼요. 꺾을 필요도 없고, 버스 정류장으로 두 정거…….”“그런데 혹시, 가족 중에 무릎이 아프신 분이 있으신가요?”네? 희원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뿔싸. 걸려들었다. 

희원은 ‘도를 아십니까’의 최신 버전에 걸려들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을 묻는 것처럼 다가와, 자연스럽게 짐을 덜어가고는 본격적인 영업에 착수한다. 

모든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의심을 해볼 여지도 없었다. 

“아가씨 앞에 오니까 갑자기 내 무릎이 너무 아픈데. 아가씨 기도 보통이 아니고.”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사내가 다가와 밀착 영업을 한다. 

“그런 사람 없어요. 쇼핑백 주세요.”“아픈 사람 없어요? 조상님 중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이 있는 것 같은데.”“없다고요. 달라고요, 내 쇼핑백.”희원이 팔을 뻗자 여자가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짓는다. 

사내가 지금이다 싶은지 말을 보탠다. 

치고 빠지는 구간이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아가씨는 잘 모르겠지만 아가씨 조상님 중에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이 있어요. 업보가 있네, 아가씨한테.”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희원은 어찌나 황당한지 헛웃음이 나왔다. 

달라는 쇼핑백은 주질 않고 말은 끊을 새도 없이 이어진다. 

“들어나 봐요. 이거 안 들으면 아가씨 손해예요. 지금 아가씨한테 조상님이 어깨 위에 있어. 조상님이 하도 억울하니 구천을 떠도는 거예요.”하…… 돌아버리겠네. 

희원은 발끝부터 천천히 치미는 분노를 장전했다. 

“저기요, 쇼핑백 달…….”“한을 풀어드리지 않으면 집안에 재앙이 옵니다. 편안할 수가 없어요. 아가씨는 아가씨 조상님의 넋을 기리…….”사내는 방언이 터진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고 희원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던, 그때였다. 

“어머, 여기 있었어?”희원은 자신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늦었지. 미안해. 그런데 이 사람들 누구야? 아는 사람?”“아…….”“설마 뭐, 조상님이 어쩌고, 뭐, 기도를 드리네 마네 어쩌고, 도를 아십니까, 어쩌고. 그런 거 아냐?”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처럼, 살갑게 다가온 여자.

“맞네. 사이즈가 딱, 그쵸? 아줌마 아저씨, 맞죠?”“가자, 가.”여자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가잔다. 

등장한 정윤은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아섰다. 

여자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내려다본 정윤은 턱 끝으로 쇼핑백을 가리키고, 희원을 바라보았다. 

“이거 쇼핑백, 자기 거?”“네. 제거요. 달래도 주질 않고, 어서 줘요. 내 거.” “여, 여기요. 가져가요.”여자는 황급히 쇼핑백을 희원에게 던지듯 건넸다. 

또다시 사라지려는 발길을 정윤이 막아섰다. 

“아줌마. 왜 남의 물건을 갈취하는 거죠?”“가, 갈취라뇨! 무슨! 길 묻다가 잠깐 들어준 건데!”“아닌데? 주인이 달라고 하는데도 안 주던데? 나 다 보고 있었는데?”정윤이 맞지? 하는 얼굴로 희원을 바라보자 희원은 응. 맞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정윤은 입을 열었다. 

“다중의 위력으로 집단적 공갈행위를 하면 특별법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2조에 의거,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져요. 알겠습니까?”“무, 무슨…….”“지금 속임수를 써가며 재물을 제3자의 점유로 옮겼잖아요. 달래도 주지도 않고. 철컹철컹해요. 아시겠어요?”어, 어서 가자. 가자. 

여자는 남자를 이끌며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지, 정윤은 목을 길게 빼며 어느덧 사라진 두 사람의 자취를 보다가 잠시 후 어깨를 내렸다. 

“나한텐 한 번 오지를 않더라. 나도 내 인생 궁금한데. 난 뒤 봐주시는 조상님도 없나.”정윤은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쇼핑백을 쥐고 선 채, 희원이 어색하게 눈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차 검사님.”고개를 까딱 흔들며 정윤도 따라 인사했다. 

“잘됐다. 개미지옥에서 구해줬는데, 고마우면 나랑 밥 좀 같이 먹어줘요.”정윤의 인사 방식이었다. 

개미지옥 같은 정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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