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보지 말걸 그랬어
얼어붙은 듯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머리가 시키는 모든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지 않는다.
지환은 감히 다가오질 못한 채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씨 때문일까, 마음은 차게 식는다.
……그래, 언젠가 한 번쯤.
언젠가 한 번쯤.
“오빠…….”네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찾아오겠지. 설마하니 영영 찾아오지 않거나, 이대로 정말 끝이라거나, 그렇지는 않겠지.
무슨 일이 있겠지. 때가 되면 설명하겠지.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듯 허무하게 헤어지진 않겠지.
처음엔 기다렸고.
다음엔 불안했고.
“아…… 저기, 저기, 오빠…….”그다음엔, 웃음이 났다.
너의 결혼 발표를 TV로 보게 되던 순간. 모든 이가 박수치며 너의 결혼을 축하하던 TV 프로그램의 영상을 바라보며 나는.
너를 놓았고, 나를 버렸다.
오래된 이야기지. 너와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빛바래고 희미해진 이야기.
이대로 너와 나마저 잊고 지내도 좋을, 그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멈춰 있다가, 바라보다가, 불어 드는 바람을 버티다가.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떼어냈다.
붙잡혀 있고 싶지 않은 발길마저 떼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 있는 곳과 아주 가까이에 주차된 차량을 향해 그는 뚜벅뚜벅 굽소리를 내며 걸었다.
자신에게 오나 싶어 잠시 표정이 밝아지던 그녀를 스치고ㅡ
지금 이 모든 감정을 숨겨줄 차량 앞에 섰다.
“아…… 오빠, 오빠!”“…….”그가 차에 올라타려 하자 정신이 번쩍 든 희주는 다급하게 불렀다.
“하,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이 있어서……!”……잠자코 문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할 말! 급한 말인데!”운전석에 올라타려고, 몸을 낮췄다.
“남편이 자꾸 찾아요……!”그는 그대로 멈췄다.
지환이 행동을 멈추자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주지 않으리라, 예감한 그녀는 모든 것을 잘라내 앞뒤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뱉어냈다.
뭐라고 말하는 건지, 본인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무척이나 낮고 슬픈 음성으로.
“오빠를 자꾸 찾아요. 자꾸 찾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나는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이렇게 얽히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힘이 없고…….” “…….”“그래서…… 그래서 내가 오빠한테 뭐라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염치없지만…….”……염치없지만.
그는 그녀가 선택한 단어에 반응하듯 천천히 돌아섰다.
한층 낮아진 음성과 모습을 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단 한마디를 떼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고 거침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가 핸들을 움직이자 차는 빠른 속도로 그녀를 스쳐 지났다.
“아…… 오빠…… 오빠……!”룸미러로 그녀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아 지환은 룸미러의 위치를 헝클어트렸다.
소리도 그녀도 멀어졌다.
꿈이라고 생각하기 좋을 만큼.
……얼마나 달렸을까.
무작정 도로 위로 빠져나온 그는 숨을 몰아쉬다가 대로변에 멈췄고, 거칠게 핸들을 내리쳤다.
빠아아아앙ㅡ
내리친 주먹에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의 차량을 바라보았다.
그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꽉 사리 문 입술 사이로 약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감정은 참으면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이고 쌓이며 짓눌리다가ㅡ 결국엔 응축되어 더욱 단단해지고 마는 것이다.
“후…….”그는 참아왔다. 그래서 고였고, 쌓였고, 짓눌렸다.
응축된 감정은 몸 안 이곳저곳을 횡행했다.
심장으로 가면 미어졌고, 발끝으로 가면 저렸다.
[다음 뉴스입니다. 국민인권당 백인호 의원이 오늘 청소년 노동법 개정 관련 안건 발의…….]옥외 광고판에서 시작한 뉴스에 백인호 의원의 모습이 잡힌다.
지환은 천천히 눈을 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이렇듯 불시에,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
[끝으로 백인호 의원의 발언 영상을 함께 보시겠습니다.]차라리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일들.
영영 못 보는 셈 치며 가슴에 묻었으면 될 일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저 백인호는 국민 여러분들의 눈과 발이 되어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을 굳게 약속하며, 국민인권당을 바르게 끌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운전…… 할 수 있을까…….”지환은 눈을 떴다.
팔방에 울려 퍼지는 백인호 의원의 음성을 뒤로하며 다시 액셀을 밟았다.
그러곤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대로변에 차를 세우며 기어를 바꿨다.
운전을 포기하듯 시트에 상체를 깊숙하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애써 밀어 넣고 밀어 넣으며, 그는 깊은숨을 쉬었다.
“못 하겠다…….”더욱더 단단하게, 응축되어갔다.
“이거 먼저 먹어봐요. 맛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맛이니까.”정윤은 희원의 앞으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밀었다.
맛깔스러운 자태를 자랑하는 음식을 내려다보다가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윤은 여자 둘이 다 먹고 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음식을 주문하더니ㅡ
“희원 씨, 이것도. 이것도 먹어봐요. 진짜 너무너무 맛있어.”정작 본인은 먹지도 않고 모든 음식을 먹어보라며 권해왔다.
“어후…… 검사님, 잘 먹긴 하겠는데 너무 많이 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이게 많아? 어우, 무슨 소리예요.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보기보다 대식가이신가 봐요.”“나요? 대식가라기보다 미식가? 여긴 좀처럼 오기 힘든 집이라서 한 번 오면 먹고 싶었던 거 다 먹고 가야 해요.”정윤은 주문한 와인을 홀짝 마시며 어서 먹어보라 자꾸만 권했다.
희원이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자 기대에 만발한 눈빛을 빛내며, 정윤은 그녀의 음식평을 기다렸다.
“와, 진짜 맛있다.”“그렇죠? 맛있죠? 대박이지?”맛있다니 속이 다 시원하다.
정윤은 연신 와인을 홀짝였다.
“오늘도 혼밥하나 했는데 권희원 씨를 만났지 뭐예요. 나 너무 기쁜데.”“밥 친구 필요하셨나 봐요.”“항상 필요하죠. 혼자 살아서 다 좋은데 단 하나 안 좋은 점이 있다면 혼밥해야 하는 거. 난 누가 앞에서 맛있다고 해줘야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친구로 두면 정말 좋은 스타일이시네요.”“맞아. 나 같은 사람 친구로 두면 진짜 좋은데. 밥 매일 사줘, 맛집 데리고 다녀줘. 그런데 친구가 없네?”희원은 연신 젓가락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윤은 어딘가 모르게 쿨하고, 어딘가 모르게 친절했다.
“있잖아, 희원 씨. 나 잠시만 실례할게요.”“네? 네?”어어어어. 정윤이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일어나 손을 얼굴로 가져온다.
놀란 희원이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정윤은 희원의 코를 만졌고 이리저리 돌렸다.
“자연산이네.”“네?”“수술했나 궁금했어요. 코가 너무 예뻐서.”남의 코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다시 앉아 와인을 홀짝인다.
헐…… 놀란 희원은 정윤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와인잔을 들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희한하게 기분 나쁘지 않고.
“서지환 씨는 퇴근했나요?”“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본인 남편을?”“아…… 같이 일하시니까…….”“몰라요. 일벌레. 평생 죽어라 일만 할 팔자. 일하는 거 아니면 퇴근했겠죠.”흠. 정윤의 무심한 답변에 희원은 어쩐지 안도했다.
……처음엔 경계했지. 세련된 외모,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
검사라는 직업이 가지고 온 근사한 분위기. 여자로서 경계했고, 날을 세웠다.
“검사님은 애인 있으세요?”“아직 없어요.”“아…… 아직.”“네. 이혼한 지가 얼마 안 돼서.”풉ㅡ! 희원은 와인을 홀짝이다가 풉, 하며 와인을 뱉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희원을 바라보다가, 정윤은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을 지었다.
“딱지 싫어하는데 딱지가 붙었어요. 뭐, 이유는 노코멘트.”“아…… 네네. 죄송해요, 괜한 걸 물어서.”“면역됐어요. 괜찮아요. 이거나 좀 더 먹어봐요.”“네! 네네!”희원은 정윤이 내미는 그릇으로 젓가락질을 열심히 했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싹싹 먹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정윤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 남편하고는 동기시죠. 두 분 많이 친하다고.”“전 남편 소개해준 사람이, 서검이에요.”“아…….”희원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흥, 정윤은 코웃음을 치며 앞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천하의 원수. 서검만 아니었으면 내가 결혼도 안 했을 텐데. 그런 나쁜놈을 소개해줘선 결혼까지 했어.”에효. 곱씹어봐야 뭐 하나, 이미 끝난 관계인 것을.
정윤은 홀짝홀짝 와인만 삼켰다.
그 후로 희원은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였고, 정윤은 간간이 그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상한 식사 시간은 무르익어갔다.
“언젠가, 뭐라더라? 와이프가 싫어하니 가까이 오지 말래.”“지환 씨가요?”“네. 그 말미잘 같은 게, 나한테요. 접근금지? 아오, 그때만 생각하면 또 열받아.”와인이 한 병 비워지고ㅡ
정윤은 뜻밖의 말을 해왔다.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밀어 넣은 희원은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웃었다.
“희원 씨 입장에선 행복한 일이겠지만 난 되게 기분 나빴다고요. 여기서 분명히 말하는데 나 미워하지 마요.”“아…… 미워하지 않아요. 무슨 이유로 제가 검사님을.”“나한테 서검은 말미잘. 딱 말미잘 정도니까.”……말미잘은 무슨 죄인가.
알 수가 없다.
“검사님이 예뻐서 그래요. 예쁜 여자를 누군 경계하지 않겠어요.”“내 보기엔 그 댁이 더 예쁜데, 본인은 잘 모르나 봐요?”“……아.”희원이 민망함에 웃자 정윤은 피식, 웃었다.
소녀처럼 웃는 희원을 바라보자니 어딘가 모르게 청순한 매력이 느껴졌다.
“권희원 씨의 결혼생활은, 할 만한가요?”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뭐, 네. 할 만해요.”“처음엔 따로 사는 것 같던데. 지금은 조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는 것 같고.”“네?! 네에?!”“뭘 그렇게 놀라요. 난 이해하는데.”집들이를 하던 날.
현관 앞에 놓여 있던 하나의 슬리퍼, 하나의 가운.
화장실에 꽂혀 있던 하나의 칫솔, 걸려 있는 빨래란 모두 희원의 것.
남성용 제품이 아무것도 없는 화장대. 하나의 충전기.
“지네 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날 알았어요. 아, 따로 사는구나. 서검이야 원래 있던 오피스텔에 살았을 테고.”“관찰력 대단하시네요.”“뭐, 직업병? 서검한테는 아는 척 안 했어요.”홀짝, 와인을 마시며 편안하게 이야기한다. 희원은 무안함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실로 대단히 무서운 언니다.
“맞아요. 조카 때문에 당분간 합쳤어요. 이제 끝이 다가오고.”……끝.
공연히 가슴 저린 단어, 끝.
“검사님,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뭔데요?”“두 분 오래전부터 친하셨죠. 동기니까.”이번엔 정윤이 긴장한다.
침착하게 희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자의 감으로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지환 씨는…… 상처를 많이 받았나요?”“…….”“제가…… 아물게 할 수 있을까요?”질문 뒤 답이 이어지질 않는다.
정윤은 희원의 질문에 많은 것을 예감했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인잔만 빙글빙글 돌리다가, 정윤은 입술을 열었다.
“서검 본인이 아물어야죠. 타인은 해줄 수 없어요.”홀짝, 입술을 축였다.
“도움은 되겠지. 권희원 씨가 노력하면 일정 부분 회복은 되겠지만, 본인이 나아져야 해요. 결국은 본인의 의지니까.”곪아버린 상처. 터트릴 기회마저 없었던 시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을, 마음.
“하지만 의지만으로도 힘겨울 때가 있지. 낫고 싶다고 나을 수 있건 신밖에 없을 테니까. 인간에게 그런 능력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으니까.”“…….”“남의 관계에 껴드는 건 질색이에요. 난 여기까지만 말할래. 와인이 쓰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아, 죄송해요. 검사님.”“권희원 씨, 이만 일어날까요? 요 앞에서 디저트 딱 한 접시만 더 하고 가요.”……향이 날아가는 와인처럼 쓰고, 텁텁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정윤의 엉뚱한 말에 희원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 순간 부럽게도 정윤은 세상 참, 속 편하게 사는 여자였다.
“네. 검사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정윤과 헤어진 희원은 대리기사의 도움을 받아 집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대리기사를 먼저 보내고 잠시 차 안에 앉아 있던 희원은 조금 전 정윤이 제게 해준 말을 곱씹었다.
서검 본인이 아물어야죠.
타인은 해줄 수 없어요.
“맞는 말이네.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관심을 갖지도,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도 않은 답변으로 정윤은 상황을 종료했다.
희원은 가만히 앉아서 거듭 한숨만 내쉬다가 차에서 내렸다.
버릇처럼 지환의 차량을 찾아보는데, 가까이에 있다.
“어, 저기…….”운전석에 지환이 앉아 있다.
희원은 우뚝 멈춰 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부터 이곳에 도착해서, 저렇게 머물고 있는 걸까.
좀처럼 다가서거나 부를 수 없는 그의 분위기.
그는 시동이 꺼진 차량에 앉아 핸들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희원은 우뚝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겨우 고개를 들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질끈 감은 그의 두 눈이,
바라만 봐도 느껴지는 그의 굵은 한숨이,
처음 맞닥뜨린 그의 어두운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곳이 욱신거리며 쑤셔왔다.
그녀도 뿌리박힌 듯 멈춰 서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ㅡ
그는 차에서 내렸고,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장수의 걸음처럼 비장하다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지 두어 번 멈춰 서 각오를 다지다가.
그는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갔으리라.
“나…… 어쩐지 집에 못 들어가겠는데…….”희원은 그가 사라진 공간에 서서 중얼거렸다.
오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렇게 무거운 표정은 또 처음이라.
어떻게 그와 한 공간에 있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라 후딱 올라가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봐야겠다.”생각의 방향이 바뀌자마자 희원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가 지닌 거라면 무엇이든 나눠 짊어질 의지가 있었으므로.
“저 왔어요ㅡ.”희원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지런히 벗어둔 그의 구두를 응시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아, 왔습니까? 간발의 차로 들어오네요. 나도 조금 전에 들어왔습니다.”……응? 그의 목소리가 밝다.
희원은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리는 머리 자른다고 이모님이 미용실 데려갔어요. 엄마 아빠 볼 때가 되니까 꽃단장시켜야 한다나. 연습은 잘했습니까? 밥은 먹었고?”“아…….”그의 손엔 낯선 공구가 들려 있었다.
희원이 대답을 미루며 멈춰 서자 지환은 힐끔, 바라보고는 공구를 흔들었다.
“고쳐야 할 게 산더미입니다. 욕실 세면대도 손봐야 하고, 세탁실 빨래 걸이도 손봐야 해요.”장난기 어린 목소리.
언제 무거웠냐는 듯 가벼운 표정.
“진작 좀 고칠걸, 게을러서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오늘은 전부 손보려고 작정했죠. 권희원 씨도 도와요. 보고 배워두면 다 쓸모 있는 거니까.”“……괜찮아요?”“네? 뭐가 말입니까?”“…….”희원은 당황스럽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지환은 멀뚱멀뚱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다시금 공구를 흔들었다.
“이래 봬도 솜씨 좋습니다. 곱상하게 생겨서 이런 건 일절 못할 것 같아 보이지만 꽤 잘한다고요. 못 믿겠나 본데.”“아뇨, 그게 아니라.”당신, 방금 전까지 울 것 같았잖아.
희원은 차마 말을 뱉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지환이 다가온다. 언제나처럼,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알겠어요. 일단 내가 고치고 있을 테니까 권희원 씨는 먼저 씻고 야식 준비해줘요. 우리 마지막 날인데, 치맥 정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끊임없이 사소한 말들을 뱉어내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통렬한 깨달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나날, 그는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 가짜 웃음을 매달았을까.
마음에도 없는.
진짜 자신을 감추려고.
“권희원 씨, 뭐 합니까? 빨리 정리하고 나와요. 나 배고픕니다.”그는 지난날 동안 어떤 마음으로, 이 문을 통과했을까.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어떤 것들을 감추고 어떤 것들을 홀로 삭인 걸까.
“알겠어요.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희원은 중얼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얄팍하게 떨려오는 손끝을 모르는 척했다.
“치맥 하죠. 주문할게요.”“오, 좋죠. 오늘도 일인 일닭 합시다.”오늘, 나는ㅡ
진짜 그의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