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서둘러 안녕
“시간 참 빠르네요. 내일이면 벌써 하리와 서지환 씨가 돌아갈 시간이라니.”“그러게 말입니다. 오긴 오나 싶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미용실에서 머리를 귀엽게 자르고 온 하리가 잠에 취한 시간.
두 사람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청했다.
치킨은 두 마리나 시켰는데 아무도 딱히 손을 대지 않아, 그대로 남았다.
누구도 왜 먹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필요한 건, 술이었던 듯.
“그동안 권희원 씨에게 고마웠습니다. 여러모로.”“구체적으로 말해봐요.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어…… 아침밥도 차려주고, 저녁밥도 차려주고, 옷도 잘 챙겨주고.”말해보라니 또 줄줄 말하고 있는 지환을, 희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그녀는 가슴이 욱신욱신 저렸다.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웃으면 웃을수록.
“하리와 저를 잘 보살펴줬잖아요. 고마울 따름입니다. 진심으로.”“무슨요, 가족인데. 당연하죠.”외려 당신이 나를 보살펴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어려운 일도 아니었네요. 이렇듯 시간이 빨리 가고.”“…….”“내가 좀 아쉬운 걸 보면요.”희원이 말끝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자 지환은 맥주를 삼켰다.
차가운 것이 자꾸만 밀려들어가는데, 속은 자꾸만 뜨거워졌다.
“저, 서지환 씨.”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한참이나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그녀는 결심이 선 듯 맥주캔을 응시하며 그를 불렀다.
“말해요. 듣고 있어요.”
“나 때문에, 힘들었죠.”그녀 말끝에 맥주캔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길이 멈춘다.
오늘 하루가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경황이 없었던 그는 다 감춘 채 평소처럼 행동했다.
부러 목소리를 키웠는데.
부러 더욱 장난을 섞어가며 그녀를 대했는데.
“내가 더, 서지환 씨를 힘들게 한 거 맞죠.”그녀는, 무엇을 읽어낸 걸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힘들게 하다니.”……묻는 말에 그녀가 웃는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듣지 않아도, 이미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냥요. 나라면 힘들 것 같아서. 내가 서지환 씨라면, 나한테 미안해서 힘들 것 같아.”……다 떠나서 행복 먼저 찾고 싶었던, 이기적인 마음.
나보다 더 나를 원하지 않는 갈증에 대한, 서러움.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고 전전긍긍했겠죠. 지켜보는 것도 못 할 일인 것 같고, 서지환 씨는 이래저래 힘들었을 것 같아요.”이 작은 마음하나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나의 서툰 사랑.
……접힌다.
“나는 전부 끌러놓아서 오히려 편해졌는데, 당신은 그로 인해 감정 규제가 더 심해졌을 테니까. 나를 위해서.”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떤 말도 하려 들지 않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이제 보니 그의 눈빛은 감춰도 휑했고, 어딘가 모르게 구슬펐다.
……천천히 아물어요.
“내가 아직은 당신의 과거와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인간 권희원은 결국 나 이외의 타인을 오래도록 사랑할 위인은 안 되는 것 같아.”나는 괜찮으니까.
“그리고 결국 당신의 과거와 싸워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걸, 깨달았어요.”“…….”지환은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너무나도 편안하고, 또 많은 것을 비워내고 있어 반문도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모든 일은 갑자기 벌어지지만ㅡ
당사자가 아닌 이상 생각이 도달하는 과정은 알 수 없으므로.
“결국 당신 몫이에요. 과거와 싸워 이기고 지는 건 당신의 몫. 나는 절대로 해줄 수 없는 일.”마음은 온갖 종류의 이유로 흔들리는데.
정리하지 못한 머리는 입술을 열지 못했다.
한꺼번에 연달아 터지는 폭탄에 눈을 뜨기도,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것처럼.
“뭔가 정신이 돌아온 기분이 들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취했었나 봐. 서지환 씨가 이 집을 나설 때가 되니 비로소 깨어나지 뭐예요.”그녀는 말했다.
돌아갑시다. 각자의 삶으로.
그리고 꿈꿨던, 서로가 만들어주는 귀한 자유의 시간 속으로.
처음의 목표, 처음의 이상향 그대로를 간직한 채로.
“뭐, 인사는 다시 내일 하겠지만 요 근래 서지환 씨와 함께 있으면서 즐거웠어요. 기뻤고.”그래.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요, 우리. 쉽게. 예전처럼 편하고 즐겁게. 그게 우리에겐 제일 잘 어울리고 좋은 것 같아.”희원은 맥주캔을 앞으로 내밀며 건배를 제안했다.
장난스럽게 지환의 맥주캔을 자신의 맥주캔으로 툭툭 치며,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다.
당신이 사력을 다해 웃고 있으니ㅡ
나 역시 사력을 다해 웃어 보리라.
“그동안 나한테 냉정하게 굴지 않아서 고마워요. 덕분에 상처도 모르고, 이렇게 잘 지나갈 수 있게 됐으니까.”……당신, 아물어봐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면 더 많이, 더 길게 미래를 내다보며ㅡ
온전히 당신만의 힘으로, 당신만의 의지대로.
지켜볼게, 그렇게 싸워봐요.
행여 끝끝내 이기지 못한대도 괜찮아, 그런 사랑도 있는 거니까.
“건배해요. 우리 지난날 무사히 잘 지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줘야 하니까.”희원은 억지로 지환의 손에 맥주캔을 쥐여 주고는 건배했다.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도 뱉어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끄는 대로, 손을 내맡겼다.
캔은 부딪쳤고,
“건배. 서지환 씨의 앞날과, 나의 앞날을 위해.”그녀는 웃었다.
……지금의 나는 감정을 쉽게 생각했다.
주면 받는 거라고, 수순처럼 여겼다.
살며 받아본 적 없는 상처라, 당신의 상처를 쉽게 보았다.
이런 나는, 비로소 형체 없는 감정이란 녀석의 크기와 무게를 실감한다.
아프고 서럽지만 아마도 한 뼘 더 자라는 중일 거라고. 부지중에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일 거라고.
“고마워요. 서지환 씨.”……당신이 아물기를 바라며.
모든 것은, 많은 것은, 그리고 나 역시도.
괜찮을 거라고.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모든 건 덕분이었어요. 우리, 이쯤에서 멈춰요.”약간의 신의 가호가 따르기를ㅡ 빌고 빌며.
며칠이 흘렀다.
그와 하리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애당초 이곳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치 꿈을 꿨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워져갔다.
지독하게도 휑할 것 같던 집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그녀만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일상에서 그가 지워진, 나만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여기 숙소 대박. 평점 엄청 높아, 여기로 갈까?”희원은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미친 듯이 매달렸다.
연습량은 배로 늘었고, 끝난 시간엔 즐길거리들이 생겨났다.
하리가 오기 전 그토록 바라던 혼자만의 자유, 시간을 만끽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중이었다.
이번엔 여행을 계획했다.
“구언아, 여기 봐봐. 여기 되게 좋아 보이지?”“이번엔 또 뭐냐. 여행이냐?”“응. 나 여행 가보려고. 혼여. 혼자 여행 가는 게 꿈이었단 말이야.”어때? 숙소 좀 봐줘.
희원은 해외 체류 경험이 많은 구언에게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덥석 해외로 떠나겠다며 그녀가 숙소를 보여주자 구언은 건성으로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참견할 거리는 아니지만.
“혼자 위험해. 해외 나가본 적도 없잖아.”“야, 반은 한국 사람이래. 그리고 뭐, 한국 사람 없으면 어때. 부딪치면서 경험하는 거지.”차라리 그와 살던 권희원이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사진에 속지 말고, 인마. 후기를 봐. 절반 이상이 별로라는데 넌 뭘 보고 여기가 좋다는 거냐?”“어디? 아…… 그러네. 사진이 엄청 잘 나와서 좋을 것 같았어.”나 일정도 다 짰다. 볼래?
희원은 주섬주섬 프린트한 종이를 꺼내 구언에게 보여주었다.
……몸이 열두 개쯤 되어야 소화할 만한, 엄청난 일정이다.
“여행 초짜 티 난다, 티 나. 이걸 니가 다 할 수 있어?”“왜 못 해? 응당 어디든 갔으면 거길 다 돌아보고 와야지.”구언은 가볍게 희원의 이마를 때렸다.
“인마, 여기서 여기는 끝과 끝인데, 경로 확인을 하고 일정을 짜야지. 이래서 이거, 초짜는 어쩔 수가 없다니까?”“아…… 그래? 난 가까울 것 같았는데. 끝과 끝이구나.”다시 짜야겠네. 흠.
희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종이를 건네받았다.
구언은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권희원, 충격이 꽤 큰 모양이다?”“무슨?”“지금 봐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처럼 움직이잖아, 너.”그녀는 눈을 흘기며 종이를 곱게 접었다.
“뭔 소리야. 난 이제야 제대로 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인데.”“내 눈엔 그저 남편한테 차이고 정신줄 놓은 딱한 아낙네로밖에 보이질 않는다.”“야! 죽을래? 아니거든?! 남편한테 차이…….”희원이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구언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남들 듣겠다.” 지, 지가 먼저 말 꺼내놓고!
우이씨. 희원은 희번덕거리며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구언은 다시 사방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여행, 나랑 갈래?”“와…… 유구언, 제정신이 아니네.”“내가 뭐 너한테 흑심이 있어서 이러겠냐? 가이드. 가이드 몰라?”“됐거든요? 필요 없거든요?”“와, 얘가 또 뭘 모르네. 내가 여기만 열 번을 넘게 다녀왔어. 나 같은 베테랑이 또 있는 줄 알아?”……어억, 혹한다.
희원은 내심 기대 반 걱정 반이던 차에 잠시 눈을 빛냈다.
하기야, 유구무언 같은 가이드가 곁에 있다면 세상 무엇이 부럽겠는가.
“아, 나 순간 유구언한테 혹해서 낚일 뻔했어. 위험했다, 흐어.”……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구언이 웃는다.
그래. 혹하고 넘어오면 권희원이 아니지.
“야, 아무리 따로 사는 허울뿐인 남편이래도 내가 결혼을 했는데 어떻게 외간 남자랑 단둘이 여행을 가냐?”“그냥 해본 말이다, 해본 말. 나 그때 바빠. 니가 가자고 매달려도 못 가, 인마.”구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원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사이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구언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어떡하지. 그럼 일정 다시 짜고 숙소 다시 알아봐야겠네. 아…… 또 일이 산더미네.”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냥 비행기 끊고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준비하는 것도 엄청 힘드네. 여행 자주 다니는 사람들 대단하다. 그렇지? 구언?”아니면 괜찮은 척하는 걸까?
“그러게, 대단하네.”……시작도 못 해본 사랑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무척이나 태연했다.
“그런데 구언아, 나 있잖아. 준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막 설레. 이렇게 설레는데 막상 여행 떠나면 얼마나 설렐까?”너무나도 태연해서 그것이 더욱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너의 씩씩함을 믿고 싶다. 너는 금세 제자리를 찾아온 거라고, 믿고 싶다.
어쩌면 너는 정말 괜찮은 걸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렇겠다. 설레겠네.”“역시, 난 자유롭게 살아야 해. 자유로우니까 너무너무 행복해. 잠시 잊고 있었던 나를 되찾은 기분이야.”그녀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다시 숙소 찾기에 열중했다.
서툴러 버거운지 간혹 질문을 이어가며 그녀는 최초,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으으으, 빨리 떠나고 싶다. 으으으으.”“여기 말고 다른 곳도 알아봐. 가볍게 가기 좋은 곳도 괜찮으니까.”“그래야겠어. 여긴 첫 도전치고 좀 빡세지?”마치, 이게 나인 것처럼.
이게 진짜, 권희원의 삶이라는 것처럼.
연습을 끝내고 없던 약속도 기어이 잡아 늦게까지 저녁을 먹고, 못하는 와인을 곁들였던 희원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원래부터 혼자였던 집인데.
그토록 원해서 혼자 얻은 집인데.
어쩐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어렵고 불편하기만 한, 요즘.
“통 연락도 없네…….”취중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리와 그가 돌아가고 난 이후, 잘 들어갔다는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던 이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연락이 없었다.
“못 해보겠네. 서지환 씨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물론 그녀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데 못 한다기보다,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 더 지내다보면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오기가 매일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누구보다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나쁜 놈…….”그러다가, 툭 하며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이가 지긋하신 택시 기사님이 힐끗, 룸미러로 바라보다가 둥근 미소를 짓는다.
시선을 의식한 희원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나쁜 놈.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봐. 나라면 걱정돼서라도 먼저 연락해보겠다.
손가락이 부러졌어? 목소리를 잃었나?
“나쁜…… 놈…….”……분노는 점점 치밀어 오른다.
그냥 나랑 살던 모든 순간이 다 불편했던 거지? 어? 어? 하루하루 떠날 날짜만 세며 지냈던 거, 맞지?
정색하면 싫은 티가 날까 봐 맨날 실없이 웃고 있었던 것도 맞지? 나 다 안다구. 우씨.
드럽게 치사한 인간…… 두고 봐…… 내가 꼭꼭 다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다 왔습니다. 손님.”“아, 네네. 여기요, 카드.”희원이 이를 갈며 분노의 눈빛을 활활 태우는 순간,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카드 결제를 마친 그녀가 대충 짐을 들고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기사님께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았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겉옷을 제대로 입으려는데ㅡ
어인 일인지 기사님은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뚱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서, 희원은 겉옷 단추를 잠갔다. 그러곤 택시 기사님을 주시했다.
잠시 몸을 풀고 가실 요량인가 했더니 느닷없이 휴대폰을 꺼내 하늘 위로 올리더라.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보니 희원은 멈춰 서 기사님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찰칵. 찰칵.
“아, 이거 어렵네.”기사님은 중얼거리며 느린 손길로 휴대폰을 만졌다.
희끗한 머리, 깔끔한 복장의 기사님은 한참이나 서서 무언가 헤매는 듯했다.
“저기,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아. 아직 안 가셨어요? 이거 사진을 좀 찍으려고 하는데.”그녀가 묻자 기사님은 뒤를 돌아보며 반겼다.
요지는 이러했다.
달이 구름 사이로 둥글게 뜬 것이 예뻐 사진을 좀 찍으려고 하는데, 너무 멀어서 사진으로는 잘 안 나온다고.
“아…… 줌을 당기면 되는데요, 제가 해드릴게요.”“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또 제가 해야 하니까요.”“그럼 알려드릴게요.”희원은 서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늘 위로 고정하고, 손가락을 좌우로 뻗어 줌을 당겼다.
달이 시원하게 보이자 오오오오, 기사님의 입술 사이로 탄성이 터진다.
찰칵. 사진을 찍자 비로소 원하는 만큼의 풍경이 휴대폰에 담긴다.
“야아, 이거 그림이네. 고맙습니다, 손님.”“무얼요. 달이 예쁘게 뜨긴 했네요.”“그렇죠? 예쁘지요? 우리 아내에게 보내주려고 해요.”……희원은 재킷을 여미던 손길을 멈췄다.
기사님의 표정은 이미 아내를 떠올리는 듯, 인자했고 푸근했다.
“우리 아내가 참 좋아하거든. 둥근 달도 좋아하고, 꽃도 좋아하고 나무도 좋아해요. 지금은 무릎이 아파서 거동이 좀 힘들어.”“아…….”“직접 보기가 힘드니까 내가 이렇게 틈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줘요. 실제로 보느니만 못하겠지만 그래도, 눈요기라도 하라고.”허허, 허허허. 기사님은 다시금 투박한 손길로 문자함을 열어 사진을 전송했다.
[달이 예쁩니다. 당신 생각이 나서.]기사님은 몇 마디 말을 덧붙여 보내며 휴대폰을 내렸다.
희원은 감동받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모님께 정말 다정하시네요.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로.”“무얼요, 생각이 나서 하는 것뿐이지. 생각이 안 나면 못 하는 거고.”……생각.
“매일매일 생각이 나고 한시도 잊지 않으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노력해서 하는 건 아니지요.”“……한 수 배우고 들어갑니다. 선생님.”“나도 좋은 손님 만나서 배우고 갑니다. 그동안 멀어서 못 찍은 것들이 많은데, 이젠 찍을 수 있겠어요.”기사님은 연거푸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텅 빈 공간.
희원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남아 눈만 감았다가, 떴다.
‘사무실 근처에서 사 왔습니다. 맛있다고 해서.’‘빵 좋아합니까? 먹어보니 맛있어서 사 왔는데.’‘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좋아할까 싶어서 사 왔는데.’“아…….”그녀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렀다.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언제나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그의 행동이 생각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퇴근길마다 봉투를 들고 있었다.
좋아할 것 같다며 사 오던, 생각이 나서 사 왔다던.
“아…… 나 어떡하면 좋냐…….”……사소함.
순간순간 나를 떠올려 그가 행해주었던, 그 사소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지금.
그녀는 참고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진짜…… 돌아버리겠다…….”그는 매 순간순간 나를 생각해주었다.
언제나 궁금했던 그의 하루 중 어느 한 부분에, 내가 있었다.
그런 그의 사소함이 그리워, 나는 길거리에 서서 한참이나 울고 말았다.
……그때의 난, 뭐가 그렇게 급하고 두려워 그를 믿지 못했을까.
과거와 싸워달라는, 그 말은 어쩌면 간절하고 절실한 부탁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뭐 해…… 다…… 끝났잖아…….”그와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더욱 절실하게 그가 보고 싶어졌다.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이젠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남보다 더욱 먼 나의 남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