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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누구냐고 (42/98)

42. 누구냐고

그녀가 환상의 섬, 괌에 도착하여 픽업 버스에 올라탔을 때쯤.

“아…… 그게, 그러니까.”이곳 한국, 그녀의 연습실 앞, 지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식은땀만 철철 흘리고 있다. 

여기에 왜 왔냐며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니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 우다다다 떠오르는 말이라곤 전부 헛소리밖에 되지 않는 변명이다. 

“제가 여기를 왜 왔냐면…….”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할 말이 없는 거냐.

지환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희원이 지금, 한국에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여행 가는 것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것도 남편이.

아…… 영혼을 팔고…… 시간을 건너 뛰고 싶다……,

“형!”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일동 뒤를 돌아보았다. 

지환은 옹기종기 모여 있던 무용수들이 뒤를 돌아보자 따라 시선을 들었다. 

“형! 여기!”아…….

저쯤, 구언이 자신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든다. 

지환은 기쁨과 환희에 젖은 눈빛으로 구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전에 예상한 대로, 그대로다. 

이쯤 되면 유구무언은, 희원이 아닌 자신과 인연인 거다. 

“이제 왔어? 뒷정리하고 문 잠그고 나오느라 난 좀 늦었어.”구언은 잰걸음에 다가왔다. 마치 이런 상황을 꿰고 있었다는 것처럼.

“아아, 두 분 친하세요?”딱딱하게 굳어 지환이 삐걱거리자, 무용수들은 이제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환이 구언을 만나러 왔다고 결론지은 모양이다. 

구언은 무용수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왔으면 연락을 하지. 형, 여기는 희원이 동료들이야. 인사했어?”“아…… 네. 어…… 응.”저놈이 갑자기 말을 놓으니 혼란하지만, 지환은 일단 장단을 맞춰보기로 한다.

지금 아쉬운 쪽은 유구무언이 아닌 본인이었으므로. 

유구무언이 형이 아니라 아우라 불러도 예, 형님, 하며 달려갈 판이니까.

“구언 오빠, 희원 언니 형부랑 친해요?”“그러게 말이야. 이 오빠 친화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야? 밑도 끝도 없네.”무용수들이 종알거리자 구언은 더욱더 지환과 가깝게 섰다. 

“희원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형 불렀지, 와이프도 없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럴 때 안 놀면 언제 노냐?”“참 나. 희원 언니 오면 다 일러야지. 구언 오빠가 형부 꼬드겨서 놀았다고.”“야, 비밀 유지해. 치사하게 일러바치지 말고.”“오빠 하는 거 봐서.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지나친 음주는 감사한 일이랍니다.”희원의 후배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연신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던 지환은 시야에서 금세 사라진 희원의 동료들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구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편한 시선이 마주친다. 

지환은 그러다가 천천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원이 여행 갔어요. 지금 들으셨겠지만.”구언은 마치 두 사람의 쇼윈도 관계를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고, 말하며,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별 여행, 그런 거 아니니까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전부터 가고 싶다고 했던 거니까.”있었던 일들.

나눴던 말들.

이런 일 저런 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급한 일 아니면 올 때까지는 그냥 둬요. 희원이 첫 여행이고 나름 힐링도 필요했고.”“난 지금 아무 말도 안 했는데.”“…….”“안 해도 그쪽이 다 알고 있어서, 상당히 당황스러운데.”구언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다가 힐끔,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 수밖에 없죠. 희원이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간에, 자연스럽게.”“…….”“희원이가 지금 하루 중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차마 제 입으로는 답을 할 수 없어, 지환은 침묵했다. 

“나는 생각보다 당신 와이프를 잘 압니다. 표정 변화, 분위기 변화, 그리고 오랜 친구죠. 통하는 것도 많은.”“발언이 좀 아슬아슬한데. 오랜 친구라도 덮기엔 그쪽 마음이 아름답지 못했고.”이번엔 구언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지환도 자신의 마음을 꿰고 있었던 거다. 

“요즘은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사이도 친구라도 일컫나? 난 아닌 걸로 아는데.”“알면 이러지 말았어야죠.”“…….”“나한테 틈도 주지 말고 똑바로 잡았어야지. 당신 와이프가 당신을 원한다는데.” “…….”“아, 이젠 과거형인가? 원했었으니까.”파바박ㅡ!

전기가 흐르듯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친다. 

구언은 지환을 조금 지나쳤다. 뭐, 이쯤 되면 이판사판이지.

“두 사람의 결혼, 의무만 있을 뿐 권리는 없습니다. 희원의 마음이 이제 어디로 널을 뛰든, 그건 서지환 씨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요.”“우리 관계가 어떻건 당신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 부부의 일에 어디까지 끼어들고 참견하는 겁니까?”“…….”“혹여 오지랖이 넓어 당신이 한없이 참견한대도 법적 부부를 뛰어넘을 수 있을 만한 관계는 앞으로도 없어. 기억 좀 하시죠.”……부부. 

이래도 저래도, 당신들은 부부.

구언은 지환의 일갈에 어쩔 수 없이 미소 지었다. 

어떻게든 발악해봐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은 이렇게나 매력이 없다. 

“그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길 빕니다. 당신도, 당신 와이프도.”“…….”“그런데 그거 압니까? 희원이는 법 없이도 사는 여자라,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그럼 이만.

구언은 희미하게 고개 인사를 그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뒤로 돌아섰다. 

“참, 희원이 어디로 여행 갔는지는 알아요? 남편인데, 그 정도는 알아야죠.”응? 알려주겠다고?

지환은 내심 궁금했던 것을 알려주려는 구언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빛은 온순해졌다. 

구언은 그런 지환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시간도 많을 텐데, 혼자서 잘 맞춰봐요. 그럼 잘 가요.”“저…… 아오…….”사내들의 유치한 싸움은, 계속될 전망이었다.

“미치겠다, 이 느낌 뭔데? 이 자유 뭔데? 이 해방감 뭔데에에에!”우와아아아아아!

객실로 들어선 희원은 짐을 내팽개치고는 후다닥 달려 테라스로 나아갔다. 

이미 어둑해진 세상의 빛.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가깝게 위치한 바다를 알려주었다. 

“와아…….”시선을 돌려보니 조명을 밝혀 수영장 물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희원은 시선을 사로잡는 영롱한 풍경에 연신 탄식을 터트렸다. 

야자수가 잔뜩 심어진 길목 길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국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았다.

“진짜…… 미치겠다…….”뭐 이런 하늘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세상을 가득히 수놓은 별들.

내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눈을 비비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밤하늘.

희원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커다란 감정을 마주했다. 

“이렇게 예쁜걸…… 그동안 못 보고 살았단 말이지…….”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일상.

여행이란 그저 남의 일처럼만 여겨지던, 갑갑했던 삶.

소소하게 불어 드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니 그녀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신선한 ‘자유’의 느낌을 마주했다. 

……그래. 앞으로의 난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게 나야. 이게 권희원.”자유롭게.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지구 곳곳에 나의 발자국이 찍힐 수 있도록.

사랑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불행함에 물들이지 않으며.

형체 없는 감정에 스스로를 볶아대며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맞아. 난 이런 자유를 원했어. 이런 걸 원했던 거야.”세상은 넓고, 아름답다. 

그녀는 무척이나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질척거렸던 짝사랑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결혼도, 보고 싶어 몸 닳던 그의 얼굴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잊는 일이란 이토록 쉬운 일이었나.

모든 번뇌란 외려 시시해졌다.

이, 광활하고 웅장한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여행…… 대체 어디로 간 거야…….”지환은 중얼거리며 불안하다는 듯 손가락 사이로 볼펜만 현란하게 굴렸다. 

한숨도 못 잔 얼굴은 퀭하고, 생각이 많은 듯한 눈빛은 초조했다. 

그녀가 한국에 있건 아니건, 이러나저러나 못 보는 건 매한가지인데 마치 외딴섬에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지금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그래, 권희원 씨에게 힐링은 필요했을 테니까.”마치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들던 시간들.

숙제처럼 부딪치던 입술. 사랑한다 말하던 눈빛. 

같은 방에 누워, 내뱉는 숨 끝에 이어지던 그녀의 숨.

이유 없이 웃어주던 얼굴. 좋아하게 되었다던 목소리.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겠지. 내가 뭐, 참견할 주제나 되나…….”……그런 그녀는 증발해버린 것만 같다. 

지환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자꾸 이렇게 아른거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온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들은 하나로 매듭지을 수 없는 잡다한 것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편안해졌고, 언제부터 불편해졌고, 언제부터 이렇게 전화 한 통이 힘들어졌나. 

……굳이 하나로 매듭을 짓자면 온통 그녀 생각이라는 것.

지환은 천장을 올려보던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심장은 왜 자꾸 불안하게 뛰고, 발끝부터 올라오는 이 조급함은 대체 무엇이고.

“이런 기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저 과거 어딘가의 나와 마주한 것 같은, 그래서 썩 유쾌하지 않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 열고 싶지 않았던 마음 한편이, 나도 모르는 사이 허물어져버린 것만 같은.

지환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을 말아 쥐고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인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사랑스럽다는 것 또한. 

함께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고, 물들다 보면 한없이 나를 놓게 된다는 사실 또한.

그래서 두려웠다. 

그녀가 적극적일수록 좋아한다고 마음을 꺼내놓을수록 무섭고, 겁이 났다. 

“휴…….”다시 반복할까 봐.

미련하게 온 마음을 다 주게 될까 봐. 

다 주고 결국 내가 텅 비어버리게 되고 나면, 없던 일처럼 되돌아갈 것 같아서.

그러다가 너도 변할까 봐.

“이건 뭐, 휴…….”……또다시, 혼자가 될까 봐.

그 자리 그대로 남겨질 것 같아서. 

함께 나누었다 믿었는데, 결국엔 혼자 수습해야 할 것 같아서.

나를 다 가져간 그대가 사라지고 나면 지금보다 더 많이, 마음이 망가질 것 같았으므로. 

“이젠 나도 모르겠다…….”사랑 없이 살아 행복하지 못한대도 이별 역시 없을 테니 불행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린 걸까. 

……휴. 지환은 의미 없는 시선만 멀리 주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닫은 마음 뒤로 커다란 바위가 굴러와 쿵, 쿵, 문을 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안간힘을 쓰며 막아본들 조금씩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금이 가는 것을, 신랄하게 느끼고 있다. 

그는 예감했다. 

아마도, 뚫릴 것만 같다고.

인력으로는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다고. 

“날씨 진짜 좋다. 으아아아…….”희원은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고 객실로 올라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점심쯤의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호텔 수영장에서 한껏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친구들의 SNS를 통해서나 보던 풍경들이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니 숨만 쉬고 있는 시간도 아까웠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싶었고, 부지런히 눈에 담고 싶었다. 

기왕이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사진도 많이 찍어야지.

“역시 혼자는 좀 민망해.”수영장으로 내려온 희원은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여길 보아도 커플, 저길 보아도 커플.

“정신승리해야지, 정신승리. 나는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않아.”커플지옥에 빠져 있지만 이 순간 나는 승리자다. 

희원은 물속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커플들을 바라보다가 따라 들어갔다. 

으으, 잠깐 차갑더니 금세 적당한 온도로 변한다. 

“아아, 사진 찍어야 하는데. 사진.”희원은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다시 나와 셀카봉을 찾았다. 

지금 이 비키니를 사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사진 한 장 못 남기면 되겠어?

그녀는 셀카봉을 길게 빼고는 이리저리 찰칵, 찰칵, 사진을 찍었다. 

흠. 얼굴 중심으로 찍히다 보니 영 별로다. 

“남들은 이런 곳에서 인생 사진도 건지던데, 나는 어쩜 이렇게 사진을 못 찍어…….”현실 비율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나오는 사진에 희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에효, 사진은 무슨 사진이냐. 때려치우고 개헤엄이나 치며 커플들 사이를 훼방 놓고 다녀야겠다.

“보통 이런 곳에서 인생 사진을 찍으려면 셀카봉으로는 어렵죠.”그때였다. 

희원은 목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금세 상대를 알아본 희원은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굿모닝. 또 보네요.”희원이 아는 척을 하며 웃자 상대는 손을 내밀었다. 

어제 공항에서 픽업 버스를 알려준 사내다. 

“휴대폰 줘봐요. 사진 찍어줄 테니까.”“사진 잘 찍어요?”“뭐, 댁보다는 나을지도.”“그럼 몇 장만 부탁드릴게요. 혼자 여행 오니까 이런 게 불편하네요.”“이런 것만 불편하죠. 감수할 만하고. 저쪽으로 가요, 찍어줄게요.”“네.”뭐 얼마나 잘 찍겠는가, 대충 몇 장 찍어주겠지. 

희원은 고분고분 사내의 말을 따라 물속을 걸었다. 

다만 사내의 호의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헐.”희원은 휴대폰 속 사진을 확인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이것이 다 무엇이냐.

“이거 저 맞아요?”“수영복 디자인을 보아하니 맞는 것 같은데요.”“헐, 대박. 대애애애박.”믿을 수 없다는 듯 희원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전문 카메라도 아닌 휴대폰 카메라로 이렇게 고퀄리티 사진을 찍을 수 있단 말이냐?

시키는 대로 서서,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 뿐인데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사진이 탄생했다. 

허. 희원은 사진 한 번, 사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내는 갸우뚱했다. 

“별로입니까? 최선 다했는데.”“아뇨. 너무 놀라서요. 이렇게 잘 찍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색깔이 와…….”“날씨가 잘 따라줘서, 색감이 좋네요.”그것도 그런데, 이것이 정녕 나의 뒤태란 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어.

희원은 파란 물, 파란 하늘, 그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100점짜리 사진이다. 더할 나위 없이 예쁜.

“감사합니다. 사진 정말 잘 찍으시네요.”“모델이 8할 이상은 했죠. 카메라는 거들 뿐.”희원은 웃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라 웃었다. 

어쩐지 시선을 끌어당기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희원은 입술을 열었다. 

듣다 보니 약간은 어색한 억양, 한국인이라고 보기엔 다소 이국적인 마스크.

각진 눈썹 아래가 들어간 특유의 눈매.

“한국에서 오신 분은 아니시죠?”“맞습니다.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죠.”“그러시구나. 눈이 아주 멋져요, 근사하게도.”그는 뜻밖의 칭찬이 멋쩍은지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한국 이름은 한주혁입니다. 잠깐의 틈을 타 혼자 여행 온.”“권희원이라고 해요. 남편을 떨어트리고 혼자 여행 온.”“아아, 그거 참 멋진 일이네요.”“네. 멋진 일이 좀 필요했거든요.”희원은 물속에서, 그는 물 밖에서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짧은 악수 끝에 희원은 손을 놓았다. 

사내 ㅡ 주혁은 까딱, 고개 인사를 마쳤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미시즈 권.”“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그는 일어섰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가리키듯 손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지금 사진도 좋지만 이곳에서 석양이 질 때 찍는 사진은 환상입니다. 한 장 남기고 싶으면 오후 여섯 시 반까지 이곳으로 와요. 한 장 찍어드릴 테니.”“어, 진짜요?”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정 때문에 시간을 조금 밖에 낼 수 없으니 늦지 말고 와요. 늦으면 없습니다.” “네! 기억해뒀다가 꼭 맞출게요! 감사합니다!”여행지의 모든 것은 친절했고, 아름다웠다. 

환상의 시간이었다. 

세모꼴로 올라간 눈매를 한 채 온종일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던 지환은 바빴던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옘병, 오늘따라 되는 일도 없고, 손에 잡히는 일도 없다.

휴대폰은 손에 붙어 있는 것처럼 쥐고 다닌다. 

그러면 뭐 하나, 연락도 한 통 오질 않는걸.

……대체 몇 박 며칠인 거냐! 그것도 알 수가 없다!

“아오…… 진짜…….”어디로 갔는지도 모를뿐더러, 몇 박 며칠인지도 모를뿐더러.

“세계 일주…… 그런 건 아니겠지…….”지환은 눈꼬리를 더더욱 올렸다. 요즘 배낭여행이 유행이라는데.

숙소 같은 곳은 제대로 알아보고 다니는 건가? 

처음 하는 여행이라며, 사전 조사는 제대로 하고 간 건가? 

걱정이 하나둘씩 적립된다. 

지환은 눈꼬리를 더더욱 끌어올리며 PC를 켰다. 

희원의 공연 검색을 해본 지환은 보름 뒤 그녀의 공연이 있음에 잠시 안도했다. 

……보름 뒤에나 있단 말이냐!

그럼 그 안에 언제 오는 건데!

지환은 쿵쿵, 의자 뒤로 머리만 찧다가 잠시 눈을 껌뻑껌뻑했다. 

“그렇지, SNS.”언젠가 희원이 SNS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지환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고, 처음으로 휴대폰에 SNS를 깔았다. 

드럽게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지나 가입에 성공한 지환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헤매다가 희원을 검색했다. 

그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색 중에도 그녀 이름은 상단에 떠 있고, 떡하니 무용복을 입은 자신의 얼굴을 프로필로 해두었으니까.

“찾았다.”지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꾹 눌러 그녀 SNS에 들어가자마자 여행 중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리고 있음이 포착되었다. 

“이거 봐, 이거 봐. 휴대폰 들고 다니면서 연락 안 한다 이거지.”그녀를 찾았음에 어쩐지 누그러진 기분으로 지환은 그녀의 SNS를 들여다보았다. 

괌으로 갔다. 숙소는 호텔이네. 안전하겠지. 밥도 잘 먹고 다니는 모양이네.

“잘 있네, 괜히 걱정했네.”……다행이다.

지환은 복잡했던 마음이 삽시간에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 SNS를 종료하려고 했다. 

뒤로 돌아가는데 언뜻 못 본 사진이 지금 바로 올라왔다. 

“뭐야.”그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은은한 석양, 텅 빈 수영장 한가운데에서 그녀가 아름답게 서 있다. 

아찔한 비키니의 뒤태는 현역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요한 건 그녀가 아름답게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고, 아찔한 비키니를 입었다는 사실도 아니다. 

“그래서, 누가 찍었는데 이걸…….”혼자 찍었을 리는 없는 사진. 

지환은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같이 올라온 사진 한 장 더. 선글라스를 낀 채 석양을 뒤로하고 그녀가 웃고 있다. 

이 역시 누군가 찍어준 사진. 

지환은 그녀 사진을 크게 확대했다.

그녀 선글라스에 찍어준 상대가 언뜻 비친다.

지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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