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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어쩔 수 없이 (43/98)

43. 어쩔 수 없이

희원은 오늘 하루 알차게 관광을 마치고, 약속된 시간에 호텔 수영장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간에 수영장에 도착한 주혁은 약속대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희원은 까무러칠 것 같은 감탄을 연이어 쏟아냈다. 

“진짜 예술이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찍을 수가 있죠?”“말했듯이 모델이 8할을 했죠.”“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인생 사진 많이 건지고 가네요.”주혁은 별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권희원 씨의 표정이 자유로웠어요. 사진 찍히는 일에 익숙한 것 같던데.”“시선을 두려워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어서요. 카메라도 시선의 일부니까.”“배우?”“아뇨. 무용수.”“아, 무용수.”주혁은 무용수, 무용수,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은 희원이 수영장 안에서 자신을 올려보자 그는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주혁은 그녀의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커다란 타월을 가지고 왔다. 

그녀가 있는 곳 가까이, 바닥에 수건을 내려놓으며 그는 다시 허리를 세웠다.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네요. 나와요. 난 이만 가 볼 테니.”“아…… 뭐…….”사실 비키니를 입고 낯선 이를 대한다는 것이 영 쑥스러워 좀처럼 물 밖으로 나가질 못했는데.

사람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주혁이 말하니 희원은 당황함에 머뭇거렸다. 

그가 가까이 내어주고 간 수건을 팔을 뻗어 집으며, 희원은 멀어져 가는 주혁에게 외쳤다.

“정말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주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오른팔을 흔들었다. 

덕분에 건진 인생 사진, 영원히 간직하리라.

수영장 밖으로 나온 희원은 커다란 타월을 온몸에 두른 채 휴대폰을 들었다. 

적당한 문구와 함께 사진을 업로드하며, 희원은 언제나 다시 보겠는가 싶은 석양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다가ㅡ 

푸른 어둠을 몰고 와 자신의 빛을 함께 섞었다. 

“눈물 날 것 같다, 너무 예뻐.”그녀는 무릎을 세워 두 팔 안에 가두고는 한참이나 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고요함은 깊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의 말을 앗아갔다.

침묵하게 했고, 멈추게 했다. 

“바다 보러 오길 잘했다. 정말 잘한 것 같아.”……저물어가는 것엔 남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남은 힘을 다해 모든 것을 태우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혼자 사는 게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게냐? 기세등등해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니는 꼴이라니.”……나는 누구, 

“나이가 들면 철도 같이 들어야지. 대체 어쩌자고 나이만 들고 있어? 철은 어디에 처박아두고?”여기는…… 어디……?

정윤은 멍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그녀의 집. 앉아 있는 곳은 거실 소파.

마주하고 있는 분은 그녀의 아버지 ㅡ 굴지의 대형 로펌 대표직을 맡고 있는 차홍궐 대표이다.

“사는 꼴이 아주 가관이라, 참견을 안 하고 싶어도 어디 참견을 안 할 수가 있나. 아예 부모 자식 연 끊고 살 거냐? 집에 연락은 왜 안 해. 네 엄마 기다리는데.”“…….”정윤은 내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제길, 오늘은 배달음식 좀 시켜 먹어보려고 일찍 퇴근했는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니 집에 아버지가 와 계시더라. 

“우리 집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들어오셨어요?”“그게 궁금하냐?”“네. 완전 궁금한데. 비번도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빠 때문에.”하, 차 대표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바꿔봐야 별것 있어? 네 생일 아니면 내 생일, 그것도 아니면 니 엄마 생일. 돌려가며 쓰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다른 걸로 바꿀게요.”“뭐, 1234? 2580? 사람이 단순해도 정도가 있지. 쯧.”“…….”우씨. 다른 번호는 술 마시면 까먹어서 힘든데.

정윤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괜히 일찍 퇴근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네, 만들었어.

“네가 이러고 사는 게 부모 욕 먹이려고 작정한 거랑 뭐가 달…….”2차 폭격이 시작된다. 

정윤은 점점 눈에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줄곧 바닥만 응시했다. 

이제 보니 바닥에 홈이 좀 파였네. 저번에 소파 옮기다가 이렇게 됐나? 

저거 되게 거슬리네. 보수 공사를 해야 하나?

“이혼을 했으면 사람이 변하는 게 있어야지. 결혼도 네 멋대로 하더니, 이혼도 제멋대로 하고, 너는 도대체 부모 말을 어떻…….”어라? 이제 보니까 원목에 빗금 개수가 다 다르네? 그렇지, 다른 게 정상이지.

그럼 오른쪽이랑 왼쪽이랑 개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볼까? 

하나, 둘, 셋, 넷…….

“애비가 말하는데 너 지금 뭐 하냐?”“빗금 세는데요?”“…….”차 대표는 딸아이의 엉뚱한 대답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딸아이가 웬일로 시무룩한 표정을 한 채 눈을 내리깔고 경청하기에 너무 심하게 쏘아붙였나, 다소 미안해지던 차였다. 

그런데, 바닥재 빗금을 세고 있었단다. 

“하…… 끓는다…… 끓어…….”“그러니까 오지 마세요. 여기만 다녀가면 혈압이 오른다며. 약을 드시지 말고 우리 집 방문을 끊어요.”정윤이 중얼거리듯 대꾸하며 연신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차 대표는 열이 오르는지 타이를 비틀어 풀어 내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이라곤 이거 하나뿐인데, 드럽게 말을 듣지 않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차 대표가 끝에 묻자 정윤은 눈을 번쩍 떴다. 

“당연하죠. 먹었어요.”정윤은 거짓말을 했다. 

아무리 혼밥을 싫어한대도 지금 이 상황에 아버지를 붙잡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차 대표는 혀를 끌끌 차며 일어섰다. 

“냉장고에 네 엄마가 가져다주라는 거 몇 개 가져다가 넣어놨다. 냉장고 안이 그게 뭐냐? 변변한 거 하나 없이.”“굶어 죽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네 엄마한테 잘해. 그만치 불효하고 살았으면 됐지,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았으면, 이젠 철들 때도 됐어.”정윤은 아무 말이나 튀어나올까 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억울함은 입 밖으로 쏟아지질 못한 채 둥글게 말아 쥔 그녀 손끝에 머물렀다. 

차 대표는 이만 가보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바닥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찌 된 게 집에 남자 머리카락 하나가 없어? 연애도 안 하냐?”허! 정윤은 기가 막힌다는 듯 눈꼬리를 올렸다. 

“그러게요. 시시때때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어디 무서워서 누굴 데려올 수가 있나? 연애 잘하고 돌아다니니까 걱정 마시고요.”아오…… 한마디도 지지 않는 딸을 보다가 차 대표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가만히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고집이 매달린 딸아이의 눈매.

“더 늦기 전에 재가해야지. 둘 사이에 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 길게 한 것도 아닌데. 주변에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그런 줄 알아.”“또 그 얘기. 아빠, 내가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재혼 얘기가……!”“네가 택한 인생 아니냐? 너 이 결혼 실패하면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거, 잊었어?”“아빠, 제발요, 좀.”“약속 지켜라. 나도 너와 했던 약속은 다 지켰으니까.”차 대표는 신발을 신었다. 

정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툭 떨궜다. 

“진짜 다 지키셨어요?”현관문으로 돌아서던 차 대표는 멈췄다. 

“정말로 다 지키신 거, 맞아요?”“그래. 지켰어. 나는 적어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차 대표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정윤은 짧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의식주만 신경 쓰면서 살아보려고 했더니, 되게 안 도와주네.”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하며 살고 있는 많은 것들.

정윤은 괜한 입술만 물어뜯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혼 후 2년.

아직은, 완벽한 혼자가 되기에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와, 너무 예쁘다. 이것도 사야지.”쇼핑을 나선 희원은 카트를 끌며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된 쇼핑센터는 환한 불빛과 다양한 상품으로 그들을 유혹했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것들을 사려고, 희원은 이것저것 돌아보며 물건을 집었다. 

예뻐서 집으면 그다음 건 더 예쁘고. 그다음 것도 집어들면 그다음 건 더 예쁜 현실.

“이게 다 내 트렁크에 들어갈까?정신없이 카트에 담다 보니 싸 가지고 갈 짐이 걱정이다. 

희원은 차라리 여행용 가방을 하나 더 사야겠다, 생각하며 원 없이 담기로 결정했다. 

“엄청 무겁겠어. 그래도 예쁜 건 다 사 가야지.”평소엔 필요도 없어 보이는 병따개가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초콜릿은 왜 이렇게 눈이 가는지.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희원은 천천히 쇼핑을 했다. 

“앗, 저거. 서지환 씨한테 잘 어울리겠다.”그러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 

진열된 상품은 다름 아닌 넥타이.

유명한 브랜드의 것도 아니고, 점잖은 패턴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넥타이 앞에서 그의 생각이 났다. 

“가격도 저렴하네. 하나 사다가 줄까?”희원은 저도 모르게 넥타이로 손을 뻗다가 멈칫, 했다. 

……그는 여행 온 사실도 모르는데.

여행 상품을 선물이라고 내밀며 대화 나눌 분위기는 더더욱 아닌데.

전원이 꺼져 있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가서비스를 신청해두지 않은 까닭에, 희원은 지환이 전화를 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모르겠거니.

어제도 그제도 연락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연락이 없겠거니.

……넥타이 주변을 공허하게 맴돌던 손을 내렸다. 

희원은 흠, 크게 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비틀었다. 

동료들에게 나누어줄 초콜릿이나 더 사야겠다, 생각하며 카트를 힘껏 밀었다. 

쇼핑은 무르익어 갔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지환은 수시로 그녀의 SNS를 들여다보며 눈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먹은 음식, 다녀간 곳을 차례대로 올려주었다. 

그녀의 행선지를 알아낼 때마다 지환은 마치 악당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SNS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해맑게 사진을 올리는 거겠지. 

“아무리 도망쳐봐야 서지환 손바닥 안이라 이겁니다, 권희원 씨.”흥. 올 때까지 수시로 들어와 확인해주마. 어디서 뭘 하는지.

더 이상 확인할 사진이 없음에 지환은 휴대폰을 내렸다. 

와이프의 근황을 SNS로 확인하는 꼴이라니.

황당한지 이번엔 헛웃음이 작렬한다. 

지환은 비실비실 웃다가 휴, 숨을 내쉬었다. 

“무슨 찌질한 전 남친 같네.” ……누구의 전 남친이 되었을 때도 해본 적 없는 일. 

찌질한 남편이 되고 만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지만 별수가 없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일은 산더미고 출국은 꿈에도 꿀 수 없잖아. 

당장이라도 괌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나저나 대체 누구냐…….”그녀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꿰차고 있음에도 영 마음이 텁텁한 건, 사진 속 의문의 사내 때문일 것이라. 

그냥 지나가던 투숙객이 사진을 찍어줬을 것이라 유추하면서도, 희미했지만 알 수밖에 없던 사내의 남다른 자태가 영 못마땅했다. 

사진을 확대하고, 확대한 사진을 또렷하게 만들며 사내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보려고 애를 썼지 뭔가.

잘생겼더라. 옘병.

“누구냐고…… 대체…….”이거 이거, 나가서 미혼 행색하고 있는 거 아냐? 

지환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반지도 없겠다, 혼자 여행 왔겠다, 사실상 그녀만 입 다물면 그녀가 유부녀일 거라고 알 만한 정황은 없지 않은가?

설마…… 미혼인 척하며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눈꼬리는 더더욱 올라간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추측에 표정은 점점 더 썩어 문드러져 갔다. 

머릿속으로는 온통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지나가고 지환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2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의 SNS를 열었다. 

“사진 좀 올려라, 권희원.”올려. 올리라고 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올리라고!

시간은 날개를 달아놓은 것처럼 흘러가고, 그녀는 여행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호텔 bar를 찾았다. 

가볍게 칵테일이나 한잔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그녀는 평소 즐겨 마시던 칵테일을 주문해 홀짝거리다가, 엽서를 발견했다. 

엽서. 오랜만이다. 

한참 엽서를 바라보고 있자 직원이 다가오더니, 엽서를 쓰면 호텔 측에서 보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단다. 

다만 기한을 넉넉하게 둬야 할 거라고. 

아아? 구미가 당긴 희원은 엽서 한 장을 받아 들었다. 

볼펜을 쥐고 멍하니 한참 생각하다가, 누구에게 써야 하나 망설였다. 

……생각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

괜찮을까, 싶은 마음이 자꾸만 망설이게 했다. 

“쓰자, 써. 어차피 오랜 후에 도착할 텐데.”그녀는 결심을 했는지 볼펜을 움직였다. 

To. 서지환 씨에게. 

엽서는 처음 써봐요. 당신에게 쓰는 편지도 처음인데 말이죠. 

낯설다. 

희원은 생각만큼 글씨가 예쁘게 적히질 않는 것 같아 더욱 열중했다. 

편지처럼 길게 쓸 수도 없고, 봉인할 수도 없으니 중요한 말은 적을 수 없다. 

엽서가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러니 간결하게, 누가 보아도 이상하지 않게.

더 많이 행복해졌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당신만은 진정한 의미를 알아볼 수 있게.

누가 그러던데,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아름답게 바꿔갈 거라고, 나는 믿어요.  

나의 진심을, 알아볼 수 있게.

서지환 씨. 내가 바라는, 분명한 건 단 하나.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기로 하죠. 우리, 모두. 

그대라면 모든 말을 알아줄 거라 믿으며. 

희원이 지환에게 보낼 엽서를 완성한 뒤 칵테일을 마시고 있을 때, 그녀와 비슷한 생각으로 Bar에 걸음 한 주혁이 그녀를 발견했다. 

“여기 계셨네요?”“아? 오셨어요!”희원은 주혁을 올려다보고는 활짝 웃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많은 도움을 받은, 고마운 사람.

“마지막 밤을 자축하고 있었어요. 무사히 여행했고, 너무 잘 지냈고, 무사했으니까요.”희원이 웃으며 말하자 주혁은 기다란 의자에 앉으며 보드카를 주문했다. 

빠르게 나온 보드카로 홀짝, 입술을 축인 주혁은 그녀 앞에 놓인 엽서를 바라보았다. 

“그거, 꽤 오래 걸립니다. 잊고 살다 보면 도착하던데.”“이용해보신 적 있으신가 봐요. 그러고 보니 여기 처음은 아니신 것 같은데.”“곧잘 옵니다. 어릴 때 얼마간 괌에서 살았거든요.”“아…… 그러시구나.”희원은 궁금증이 풀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한다. 

시시콜콜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은 저물고, 바람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와 보드카를 마시는 그의 사이로, 침묵이 흐른다. 

애당초 많은 말을 섞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저, 뭐 하나 물어도 돼요?”침묵을 깨트리며 희원은 입술을 열었다. 

주혁은 홀짝, 보드카를 삼키며 그녀를 힐끗 바라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행할 땐 어떻게 해요?”……내 남편의 불행함이, 가엽기만 하다. 

“불행함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을 땐, 어떻게 이겨내죠?”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데.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데.

사랑했을 땐 더욱더 그러했겠지.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혹시 남들은 노하우가 있나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 이런 거?”희원은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만 움직였다. 

주혁은 그녀의 말에 생각하는 듯하다가, 잔을 내렸다. 

“그렇게들 말하잖아요. 불행해야 행복을 알 수 있다고. 인생이 행복하기만 하면 행복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없다, 라고.”“그런데 그런 말도 힘이 되질 않아요. 그 정도로 망가지고, 불행함에 희망도 사라졌다면.”“꽤나 유감인 상황이군요.”“……그러게요.”희원이 의미 없는 미소를 매달자 주혁은 한참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사람이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란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종종 어쩔 수 없이 불행해지니까.”“……맞아요.”종종, 

어쩔 수 없이.

“그러니 이건 어때요. 불행을 이기려 들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주저앉으라는 말씀인가요?”“아뇨. 그게 아니라, 어차피 선택 아닌 필수라면.”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행복해지는 날도 올 테니까.”“아…….”희원은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쏴아아아아ㅡ 멀지 않은 저 바다에선 파도가 부딪치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진다…….”타국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이의 발언에, 깊은 깨달음을 얻는 지금.

“불행도 선택이 아니듯, 행복도 선택은 아닐 테니까요. 오겠죠, 어쩔 수 없이.”“멋진 말이네요. 가슴이 징…… 하고 울렸어요.”“뭐, 언제나 말은 번지르르한 편이니까.”그의 태연함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무거움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불행을 극복하는 노하우 같은 건 존재할 리가 없다. 

감정이란 매번 새로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으니까. 

그저 인간이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내내 어느 한 사람의 불행함으로 마음 한쪽이 불편했는데, 돌아가면 그 사람한테 말해줘야겠어요.”“당신의 남편?”“……네.”“이토록 매력적인 아내를 두고 불행할 일은 뭐죠? 파산?”“어림없는 일이네요.”그녀는 웃으며 칵테일을 마저 마셨다. 

그래, 종종 불행해지듯, 종종 행복해지리라.

그것이 인생의 순리거든 기다려보면 될 일이라. 

침착하게. 조급해하지 말며. 모든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며.

“고맙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했어요.”희원은 그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네며 일어섰다. 

엽서를 직원에게 건네며 보내주기를 청하고는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혁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첫인사를 나눌 때처럼 악수를 했다.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한국으로 조심히 돌아가요.”“네. 한주혁 씨. 한주혁 씨도 내내 무사하길 바랄게요.”내내 무사하길.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동안. 

“다음에 다시 만나면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요.”“내가 누나일지도 모르는데요?”“어림없는 소리.”주혁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말하자 희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여행, 마지막 밤.

“잘 가요. 당신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네. 한주혁 씨, 당신의 미래에도요.”“인연이 닿거든 또 봐요.”“네. 저는 이만 들어갈게요.” 많은 것을 정리하며 나를 되찾은 시간 속 아름다운 밤이 지난다. 

종종 나와 그대에게 찾아올, 행복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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