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찾고 싶어 (44/98)

44. 찾고 싶어

여행을 끝마친 희원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환영홀로 나온 희원은 잠시 멈춰 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아주 혹시.

그럴 일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없네. 역시.”빙그르르 돌며 사방을 살폈다. 

어느 곳에서도 지환이 보이질 않자 희원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왔을 리가 없지. 내가 여행 다녀온 사실도 모를 텐데.

“아아, 시간이 아직 이르네. 일하고 있겠다.”캐리어를 끌며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평소라면 그가 아직은 일하고 있을 시간.

희원은 게이트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으, 추워…….”며칠간 따뜻한 나라에 있었던 까닭인지 한국의 날씨는 더욱 쌀쌀하게 느껴졌다. 

괌에서 떠날 때 비교적 얇게 입은 탓일 수도 있었다. 

“여행 다녀오셨습니까?”기사님이 묻는다.

희원은 활짝 웃었다. 

“네. 너무너무 좋았어요. 따뜻한 곳으로 다녀왔거든요.”“좋은 여행이 되었겠네요. 손님의 표정에서 느껴집니다.”“감사합니다. 평생 못 잊을 좋은 시간이었어요. 게다가 첫 여행이라 더욱.”“아아, 첫 여행. 멋진데요. 뭐든 처음은 오래오래 기억되는 법이니까요.”“맞아요.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하려고요.”……누구에게나 처음은 오래오래 기억된다. 

희원은 그러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처음.

그래. 뭐든 처음은 기억에 남는 거라고 하던데.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좀, 무섭고 두렵다.

정말로 뭐든 처음은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걸까?

그것이 추억이건, 상처이건?

“많이 춥지요? 히터 온도를 좀 올리겠습니다.”“아아, 네. 더 많이 추워진 것 같아요. 공항 빠져나오면서 깜짝 놀랐어요.”나는 여전히 그런 말들에 겁이 난다. 

어릴 적 나의 첫 공연 무대가 특별했듯이, 

이렇듯 나의 첫 번째 여행이 특별했듯이, 

내 감정의 첫 번째 그대가 특별했듯이.

“여행지에서 에너지를 듬뿍 받아오셨으니 감기는 걸리지 마세요, 손님.”“하하, 네. 감사합니다. 무척 친절하시네요, 기사님.”그대의 처음, 그대의 첫 번째 사랑이 끝끝내 특별할까 봐.

이기고 지는ㅡ 

지우고 비워내는ㅡ 

그런 문제가, 아닐까 봐. 

“피곤하다…….”희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다가, 의자에 머리를 완벽하게 기대며 손을 툭, 하고 떨궜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마음이 택시 안의 뜨거운 공기와 만나 일순간에 풀려버린 것이다. 

희원은 나른한 시선으로 지나치는 도심의 풍경을 응시했다. 

……어찌 되었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렇게 되어버렸으니까.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들과는 별개로 나는 나의 달라진 삶을 기대해보기로 한다. 

그의 인생은 그의 인생.

나의 인생은, 나의 인생이니까. 

“아? 진짜? 데니스 한이 내한한다고?”희원은 택시를 타고 달려 곧장 연습실을 찾았다. 

집으로 돌아가 봐야 오늘 하루가 몽땅 사라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짐을 정리하고 꺼내는 것을 반복하기 전에 동료들에게 줄 선물들을 여기서 몽땅 비워내고 집으로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동료들에게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데니스 한이면 내가 아는? 그? 맞아? 공연 관계자?”“네. 맞아요. 언니가 아는 그 사람. 데니스 한.”“오, 진짜? 내한을 한다고?”“원래는 비밀리에 내한하기로 했다는데 소문이 다 났어요. 왜 오는 걸까요?”글쎄다. 희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데니스 한. 그는 미국의 공연 에이전시 대표였다. 

그는 일반인에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고, 이렇듯 공연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전설이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추진하고 투자한 대다수 공연은 흥행에 성공했으니까. 

뮤지컬로 국한했던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뮤지컬, 발레, 현대무용, 오페라까지 투자처를 늘렸다. 

기존의 것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창작물을 무대에 올렸으니, 지금의 데니스 한이란 무용수들에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데니스 한이 한국에도 관심을 보이나 봐요!”동료들은 그의 내한 소식에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했다. 

희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 무용단에도 왔으면 좋겠다. 구언 오빠라면 혹시 알지 않을까? 해외 공연 많이 하니까?”“야,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의 사람인데. 알겠어? 구언 오빠를?”“그래서. 나는 데니스 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냐?”“아뇨. 오빠가 딱히 그렇다는 게 아니라.”“아오, 이것들이.”가만히 듣고 있다가 의문의 1패를 당한 구언은 눈꼬리를 올렸다. 

희원은 가방을 열어 초콜릿을 더 꺼내 들었다. 

“야야, 괜한 김칫국들 마시지 말고 이거나 받아. 당 떨어질 때 하나씩 먹어.”“우와, 맛있겠다! 언니 이 정도면 우리 한 달도 먹겠는데?”거물급 인사가 내한한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런 사람이 내한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희원은 가볍게 생각을 접으며 선물을 하나하나 동료들에게 나눠 주었다. 

“자, 난 이제 볼일 끝났으니까 집에 갈게. 다들 일찍 들어가. 내일 보자.”얼추 다 나누어주고 짐을 마저 정리한 희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언은 쓱 일어서며 그녀의 짐을 끌었다. 

“데려다줄게. 택시 타야 하잖아.”“괜찮아. 잡으면 되지.”“따라와, 귀찮게 입씨름하지 말고.”구언은 그녀의 짐을 끌며 연습실을 나섰고, 희원은 동료들에게 인사하며 그 뒤를 따랐다. 

찬바람이 매서웠다. 

무엇이건 따뜻한 것이 그리워질 만큼. 

“전화 한 통을 안 하더라. 그렇게 재밌었냐?”“계속 SNS에 사진 올렸잖아. 못 봤어?”“봤다. 그거라도 봤으니까 연락 안 했지.”“진짜 좋았어. 최고. 또 갈 거야.”얼씨구. 구언은 희원이 눈을 빛내자 힐끔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맞다. 사진 누가 찍어준 거야? 아주 대작을 남기고 왔던데.”“지나가던 투숙객이 찍어줬어. 사진 엄청 잘 찍지? 나 깜짝 놀랐다니까?”“잘 찍었더라. 배경이 예술이던데.”“찍은 사람은 모델이 8할 이상 했다고 하던데?”“립서비스까지 좋은 투숙객이었네.”우씨. 희원은 구언을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구언은 전방을 주시하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너 여행 가던 첫날 네 남편 왔었어. 연습실 앞으로.”“진짜?! 서지환 씨가 왔었다고?”희원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지극히 놀랄 만도 하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러니까 미리 말을 하고 갔어야지, 남편한텐.”“왜? 왜 찾아와 왔대? 나 찾았어? 왜?”“너 만나려고 왔지 뭘 왜 와. 타이밍도 참 못 맞춰. 인연은 아닌 모양이지.”“헐,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나 여행 갔다고 말했어?”“했지. 그럼 뭐라고 해.”뭐, 뭐야? 그럼 서지환 씨가 나 여행 간 거, 알고 있다는 말이야?

희원은 놀라 구언을 향해 틀었던 상체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약간은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여행 중에도 연락 한 통 없어서 모르는 줄 알았어. 알고 있었구나.”“싸웠냐?”“그런 건 아니구.”어느덧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구언은 차를 멈췄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갔고 언제 돌아오는지는 말 안 했어. 그건 너의 선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알겠어. 데려다줘서 고마워.”“짐 올려줄게.”“아, 아냐!”됐어! 희원은 부리나케 안전벨트를 풀었다. 

보조석에서 튕기듯 내려 뒷좌석에 두었던 짐을 꺼내 들었다. 

동료들에게 줄 선물을 빼고 났더니 한결 가벼워 들고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끌고 가는 건데. 나 혼자 올라갈게.”“별걸 다 경계한다. 내가 뭐 라면이라도 끓여달랄까 봐 내빼냐?”“무슨…… 끓여달라면 당연히.”“당연히, 뭐.”“요 앞의 분식집을 추천해줘야지. 어쨌든 데려다줘서 고마워, 구언.”간다! 희원은 손을 흔들며 아파트 현관으로 사라졌다. 

구언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듯 사라지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토했다. 

“저게 진짜,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데 뭐 있네.”……에라, 모르겠다. 구언은 대수롭지 않게 차에 올라탔다. 

쫓아가기라도 할까 봐 허겁지겁 캐리어를 끌던 희원의 뒷모습을 떠올리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남편이 눈이 삐었네. 저런 애를 어떻게 안 좋아하지.”구언은 시동을 켰고 이내 그녀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현관 앞에는, 눈 삔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뭐예요.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요?”구언을 피해 올라오니 지환이 기다리고 있다. 

희원은 짐을 끌다가 우뚝 멈춰 서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휙, 휙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지환이 맞다.

“여기서 나 기다렸어요? 지금?”나 언제 돌아오는지 당신은 모른다며?

그럼 여긴 언제부터 서 있던 건데?

“2박 3일째…….”“뭐, 뭐예요?”추위에 빨간코를 하고는 2박 3일 동안 이 앞에서 기다렸단다.

답변이 하도 기가 차 희원은 허, 오만상을 찌푸렸다. 

실로 오랜만의 재회이고ㅡ

나름 애틋한 감정도 없지 않아 있었건만ㅡ

“웃기시네. 2박 3일 기다린 사람 몸에서 무슨 향수 냄새가 이렇게 나요.”“몸에서 냄새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시끄럽고! 언제부터 서 있었냐고요! 내가 언제 돌아올지도 몰랐다면서요!”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시트콤이 따로 없다. 

지환은 희원의 질문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권희원 씨 여행 다녀온 사실을 내가 안다는 걸, 권희원 씨는 어떻게 알았습니까?”“그, 그거야! 그거야 뭐!”“오호라, 그새 유구무언을 만났나? 아니면 나한테는 전화 한 통도 없었으면서, 유구무언하고는 연락했다 이겁니까?”유구무언이란다. 

희원은 구언의 별명을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흠칫했다. 

추위에 빨갛게 물든 코,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 기운 빠져. 일단 들어가요.”구언이 짐을 올려준다고 한사코 따라왔다면, 볼만했겠다.

“들어가서 기다릴 일이지 왜 이러고 멍청하게 서서.”띡,띡,띡,띡. 그녀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그의 생일이다. 

지환은 빠르게 비밀번호를 스캔했고 이내 멍청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주인 없는 집에 무단 침입했다고 당신이 신고할까 봐. 난 매너 있는 사람이니까.”“참나, 이 집에 지분 있다고 눈꼬리 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헛소리를.”그녀는 빠르게 문을 열었고, 지환은 그녀의 짐을 대신 끌었다. 

오래 집을 비운 탓인지 한기가 느껴졌지만 두 사람 모두 춥지 않았다. 

“춥죠. 보일러 틀게요. 조금만 기다려요.”“됐어요. 난 이미 감각을 잃었으니까.”그냥, 춥지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그는 소파에 앉았다. 

나란히 앉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각자 따로 앉을 곳이 없어 앉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리가 없으니까 좀 이상하죠?”후룩, 그녀는 들고 있던 커피를 삼켰다. 

“그러네요. 우리도 굉장히 어색하고.”후룩, 그도 들고 있던 커피를 삼켰다. 

어색하다. 희원은 지환이 뱉은 말에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애먼 곳에 주고는, 커피만 마시고 있다. 

“왜 왔어요?”“꽃 찾으러.”“…….”“진짠데.”“더워요, 이제? 더위 먹은 거예요, 그새?”희원이 눈꼬리를 사정없이 올리자 지환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무슨 말을 해도 진정성 있게 들리지를 않으니, 이제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여행은 즐거웠습니까?”“네. 아주 즐거웠어요. 너무너무너무너무 너어어어어무 즐거웠답니다.”흥, 희원이 코웃음을 치며 커피를 마신다. 뭔가 단단히 틀어졌고, 단단히 삐진 느낌이다. 

억울해서 찾아왔더니 나보다 더 억울해하는 여자가, 여기 앉아 있다. 

“종종 다녀야겠어요. 힐링하는데 여행만 할 일이 없겠더라고요.”“그래요. 종종 다닙시다. 나도 여행 다닌 지 좀 됐고.”“…….”희원은 지환의 대꾸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애먼 곳만 바라보고 있다. 

“왜 이래요 갑자기. 어디 아파요?”“더위 먹거나 아프거나 하지 않으면 여행 같이 가자는 말도 못 합니까?”“우리가 어떤 사이로 끝났는지 잊었어요?”“편안해지자고 한 건 권희원 씨입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즐겁게. 아닙니까?”하! 희원은 지환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우리가 어떻게 예전으로 돌아가요, 말이 돼요? 할 수 있겠어요?”“할 수 없는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겁니까, 그럼?”“하, 하, 할 수 있…… 할 수 있……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땐!”“안 해본 걸로 아는데. 그때도. 지금도. 아직.”힐끔, 이제야 지환이 그녀를 바라본다.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희원은 느닷없이 마주친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심장은 또다시 미친 듯이 뛰어오르고, 그의 눈빛을 반긴다. 

……안 돼.

“난 짐 좀 풀어야겠어요. 빨래가 산더미라.”“뜻대로.”도저히 안 되겠다. 

희원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 같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작정 짐을 풀고 안쪽 지퍼를 열었더니 우르르르, 속옷과 비키니가 쏟아진다. 

“아, 아, 이게 여기다 넣어놓아서.”희원이는 다시 무작정 안으로 집어넣었다. 

고개를 슬며시 돌려 바라보니, 그가 쳐다보고 있다. 

“뭘 봐요!”“와이프 속옷. 문제 있습니까?”“진짜, 그걸 왜 보고 있냐고요!”“보여주려고 열었나, 해서. 그리고 매번 보던 속옷인데 뭘 그렇게까지 정색을.”……우씨. 희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에라 모르겠다, 다시 지퍼를 열었다. 

빨래통을 가져와 속옷을 일단 넣고 빨래망에 정리를 했다. 

“빨아주는 김에 내 와이셔츠도 세탁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양말하고.”“줘요. 지금 흰색 옷은 세탁할 수 있…….”희원은 빨래통을 들고 움직이다가 휙 돌아섰다. 

그러곤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뭘 세탁해달라고요?”“와이셔츠. 아까도 말했다시피 2박 3일째라. 나 좀 찝찝한데. 속옷도 영…….”“대, 댁에서 세탁해 입어요! 그거 세탁하면 여기서 뭘 입고 있으려고!”“내가 입을 옷이 없는 게 걱정입니까, 아니면 입을까 봐 걱정입니까?”“이 작자가 진짜!”……빨래를 하려다가 한 판 뜨게 생겼다. 

희원이 목청을 높이자 능청을 떨며 가만히 바라보던 지환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이나 영문 모를 웃음을 터트리며 시원하게 웃던 남자는, 천천히 웃음을 갈무리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좀 만난 것 같네요. 우리.”당신과의 어색함을 지우는 것.

“반가워요, 이제 만난 권희원 씨.”그가 지닌 첫 번째 목표였다. 

“아, 이걸 빠트리고 안 주고 왔네. 내일 가져다줘야겠다.”희원은 본격적으로 짐 정리에 나섰다. 

거실에 트렁크를 열어놓고 이것저것 빼서 정리를 하다 보니 미처 동료들에게 주고 오지 못한 잡다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내 건 없습니까?”멀뚱멀뚱 소파에 앉아 있던 지환이 물었다. 

희원은 짐을 꺼내려던 손을 멈칫, 했다. 

“설마 그 많은 짐 중에 내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동료들에게 이미 초콜릿도 잔뜩 주고 왔다던데, 내 건 하나도 안 사 온 건 아니겠지. 설마.”“…….”지환은 희원이 대꾸가 없자 상체를 슬슬 일으켰다. 

“뭐요. 진짜 없어? 초콜릿 하나도 안 챙겨왔어?”“나 여행 간 거 모르는 줄 알았다니까요.”“그래서, 없다? 없다고?”“…….”“허.”지환은 야…… 섭섭하다, 섭섭해, 를 연발하며 희원의 뒷모습에 연신 탄식했다. 

설마하니 초콜릿 하나도 안 사 올 줄이야.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너무 야박하고 인심이 어쩜 그렇게…….”“마음에 드는지는 모르겠고, 싸게 팔고 있어서 이거 하나.”희원은 뒤를 돌지 않은 채 불쑥 팔을 뒤로 내밀었다. 

지환은 연신 투덜거리다가 그녀가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넥타이네요? 무척 근사한?”금세 그의 목소리가 나근나근해진다. 

희원은 웃음을 꾹 참으며 어서 받아라, 손을 흔들었다. 

“오다 주웠다고 하고 싶지만 지불을 했네요. 단 거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초콜릿은 없어요. 하리 줄 것만 좀 샀으니까.”“초콜릿이 무슨 소용입니까. 넥타이가 있는데.”그래도 가격표는 좀 떼고 주지. 금액도 어쩜 운명처럼 18불이네.

지환은 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으며 하고 있던 넥타이를 단숨에 풀었다. 

그러곤 그녀가 사준 18불의 넥타이를 매고는 그녀를 다시 불렀다. 

“어때요. 어울립니까?”그녀는 건성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웃음이 나려는 걸 참으려니 표정이 엉망이다. 

“네네. 좋네요. 잘 어울리고.”예상대로 그와는 잘 어울렸다. 

하고 왔던 넥타이는 이미 패대기를 쳐놓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사지 않으려던 발걸음은 결국 실패가 되고.

그녀는 쇼핑의 마지막에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생각이 나서 하는 거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던 택시 기사님의 말이 문득 떠올라서.

당신도 나에게, 빵을 잔뜩 사다 주었으니까. 

“그렇게 좋아요? 넥타이도 많으면서.”“당신이 사준 거니까. 노느라 내 생각 안 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마음은 전염이 되어 그에게 퍼진 것 같다. 

희원은 뜨끔하는 마음에 둥근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천천히 뒤로 돌아앉았다. 

“말씨름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정말로 여기 왜 왔어요?”“오면 내 몫의 넥타이가 있을 것만 같아서. 없으면 드러누워 시위하려고 왔습니다.” “농담 말구요.”“진담을 말해도 믿지도 않으면서 맨날 농담하지 말라고 합니까?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으면서.”하…… 진짜…….

희원은 팔짱을 끼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나른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왜 왔냐구요.”“꽃 찾으러 왔다니까. 몇 번째 똑같은 답을 하…….”“아니 어쩜! 사람이 이렇게 한 번을 진지하질 못해요? 어쩜 한 번을!”희원은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지금 이렇게, 마주하는 건 아니잖아. 

“서지환 씨. 진지하게 물을 땐 진지하게 답할 줄도 알아야죠, 사람이. 난 진지하다고요.”“얼마나 더 진지하게 얘기합니까? 꽃 찾으러 왔다고.”그는 턱 끝을 약간 들어 올렸다. 

눈빛엔 웃음기가 없고, 목소리엔 거짓이 없었다.

“기사 보니까 당신이 한국 무용의 꽃이라던데.”분위기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그 꽃, 내게 좀 필요해서.”……빨래를 돌리다가. 

짐을 풀다가. 

아주 이상하고 요상한 타이밍에.

빨갛게 코를 물들인 채 집 앞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ㅡ

“할 말이 많지만 요약하고 정리하자면 대충 뭐,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대체…… 무슨…….”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며 대꾸하자 또다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다. 

그는 다소 뱉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있는 걸까. 

“당신 찾으러 왔다고. 내가.”미래에나 알 수 있을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