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나도 불러줘 (45/98)

45. 나도 불러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뿐인데.

익숙한 냄새, 익숙한 나의 집, 익숙한 풍경,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지금…… 뭐라고 했어요?”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 것만 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뭘…… 찾으러 와요……?”희원은 잘 못 들었다는 것처럼 재차 물었다. 

어느덧 웃음을 지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실없는 소리 그만해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농담 말라 눈꼬리를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으리라.

“권희원을 찾으러 왔습니다.”그의 말은, 진심이라는걸.

“나, 나, 나를 왜, 그러니까 왜, 내가, 내가 뭘…….”하도 당황하니 말도 잘 나오질 않는다. 

희원은 멍청하게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차라리 말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는 대답을 해줄 용의가 있어 보였으니까.

그는 심경이 복잡하다는 것처럼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가질 않더군요.”어느덧 그녀 시선에 다른 것들은 날아가고ㅡ

덩그러니 그의 모습만 남아버렸다. 

“당신이 내게 고백했을 때, 한편으로는 기뻤던 것도 같고.”준비를 잔뜩 해온 말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었다. 

뱉고 있는 음성엔 자신이 없으므로. 

“내내 다짐했었습니다. 마음 주지 말아야겠다, 선을 긋고 지내야겠다,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그런데 다짐을 했던 순간들을 되돌려보니 전부 내가 마음을 주고, 선을 넘고, 흔들렸던 때라.”그래. 그랬겠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마음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

마음을 주게 되니까, 주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겠지.

자꾸 마음을 주고 싶어지니까. 

자꾸, 마음이 흔들렸으니까.

“갑자기…… 갑자기 왜…….”“당신이 마음을 거둬간다고 하니까 덜컥 겁이 나던데.”“…….”“그때 느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어쩔 수 있는 지경은 아니구나. 하고.”겁이 나더라. 당신이 돌아서는데, 두려웠다. 

당신과 내가 마음을 합친 뒤 벌어질 저 미래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고 두꺼운, 두려움이 내 앞에 떨어졌다. 

“나를 좀 보고 얘기해요. 서지환 씨.”“……후.”희원의 대꾸에 지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종일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완연한 사내의 눈빛을 한 채 다른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쏟아져서 정신을 차리기가 좀 힘들었고,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는데.”“지금은 어때요. 생각은 정리가 되던가요?”“충분히.”“…….”“마음이 흔들렸으니까.”희원은 느린 속도로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무릎을 가두었다. 

고해 같은 할 말은 끝이 났는지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시선만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이런 상황이 황당한지 희원은 헛웃음을 토하고 말았다. 

“되게 웃긴다, 그렇죠. 남들은 연애 때 하는 일을, 우리는 결혼을 하고 나서 하고 있네.”듣고 보니 황당한 것 같아 그도 따라 웃었다. 

“하…… 미치겠다…… 뭐예요. 내가 고백했을 때도 서지환 씨, 이렇게 당황스러웠어요?”“충격이 꽤 컸죠.”“그러네요. 충격이 꽤 크네. 기분이 되게 씁쓸하고.”내게 줄 마음이 조금도 없을 것만 같던 남자는, 꺼내보니 이만큼이나 있더라 고백하고 있다. 

희원은 머리를 쓸어 넘겼고 지환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다시금 그의 입술이 열린다. 

“나는 신중한 편이고, 선택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고 믿는 주의라 내 마음을 내가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돌고, 돌아서.

“인생은 타이밍이라던데, 내가 이렇게 운이 없어요.”그의 자책 같은 말에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그와 나의 마음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속도가 달랐을 뿐. 

“나 있잖아요. 여행 가서 진짜 나를 만났어요.”그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진짜 원하던 삶은, 그곳에 있더라고요. 낯선 땅, 새로운 것들, 완전한 자유.”“…….”“깨달았어요.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걸 말이죠. 난 앞으로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졌어요.”지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엔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내 말, 서지환 씨는 이해하죠.”“물론.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맞아요. 난 변했고 지금의 나를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또다시 기분에 따라 흔들리는 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버스, 떠났습니까?”“진작요.”휴, 지환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예상했던 결말, 그녀는 모든 정리를 끝마쳤다. 

SNS에 의미심장하게 올리던 문구 그대로, 진짜 자신의 삶을 찾은 모양이다. 

지환은 크게 기지개를 켜듯 팔을 쭉 뻗다가 일어났다. 

그러곤 고개를 더욱 높이 올리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내 차례군요.”“뭐가요?”“당신을 기다리는 일.”……쿵, 하고 희원의 마음에 바위가 떨어진다. 

흔들리는 눈빛을 고정하지 못해 그녀는 표정 그대로 마음을 내비쳤다. 

지환은 패대기쳐둔 타이를 들고, 그녀가 사준 타이를 다시 한 번 동여매며, 재킷을 들었다.

“원하는 대로 살아요. 이번엔 내가 쫓아갈 테니까.”“어…… 힘들걸요. 난 이미 이렇게 살기로 마음 먹…….”“알겠다고.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요. 원대로. 이번엔 내가 기다려보죠.”이만 가보겠다는 것처럼 그는 그녀를 지나쳤다.

희원은 몸을 비틀며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녀는 약간 음성을 높였다. 

“나 안 잡힐 건데? 죽어라 쫓아오면 막 도망갈 건데? 결국 당신도 포기할걸?”“두고 보면 될 일. 난 마음먹기가 힘들지, 마음먹으면 누구처럼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우씨…….”“문단속 잘해요. 오늘은 이만 갑니다.”지환은 간단하게 눈빛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끝낸 뒤 사라졌다. 

……남편에게 고백받은 부인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아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잠을 자고 일어난 것인지 고문을 당하다가 일어난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퀭한 아침을 맞이한 희원은 연습실로 향했다. 

가는 동안도 얼마나 넋이 나갔는지, 희원은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 평소보다 긴 시간을 할애해 출근했다.

졸려서 그런 건 아니었고.

“미치겠네, 아후…….”그냥 잡생각에 산만했다. 

연습실 앞에 주차를 마친 희원은 차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시동이 꺼진 차는 천천히 온기를 잃어갔고, 핸들만 붙잡고 앉아 있던 그녀는 입김 나오는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은 마음이란, 이토록 씁쓸한 일이다.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했다는 기쁨보다, 결국 내게 마음을 내어주었구나 하는 기쁨보다.

“이것도 못 할 짓이네…….”내 고백에 이런 시간을 보냈을, 그의 지난날이 먼저 다가왔다. 

이렇게 씁쓸하고 이렇게 우울할 줄이야.

“나도 웃긴다,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거절이 그렇게 쉬워…….”그가 싫어진 건 아니지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해진 것도 아니지만.

혼자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불과 엊그제의 일.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 보이고 싶지 않다. 더는.

……그 역시 단번에 내가 받아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니ㅡ

“뭐, 그럼 어디 한번 해보라고요.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얼마나 내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기대나 해봐야겠다. 

생각을 바꾸고 나니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지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너도 당해봐라. 짝사랑이 어디 사람 할 짓인 줄 알아?

해보라고. 열심히. 그런다고 내가 어? 넘어갈 줄 알아?

흥흥, 희원은 코웃음을 치며 차에서 내렸다. 

그가 자신을 맹렬하게 쫓아올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해. 제게 애걸복걸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만.

희원은 내내 그를 떠올리며 연습실을 향해 잰걸음을 걸었다. 

입김이 미친 듯이 흘러나오자 희원은 놀란 듯 몸을 웅크렸다. 

“헐, 대박 춥네 진짜.”……나조차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나의 인생이 흘러간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명제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닌.

“으으으, 추워. 진짜 춥다 올겨울…….”……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

정답도 오답도 없는, 몇 가지의 단어로는 현재를 정의할 수 없는.

“으으, 추워. 다치지 않으려면 오늘 스트레칭 엄청 해야겠어.”우리는 다만, 처음 사는 인생이라는 끈을 서툴게 엮고 있을 뿐이었다.

이 生을 대하며 엮고 있는 누구나 그러하듯.

“굿모닝! 좋은 아침! 다들 일찍 왔네?”희원은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며 연습실에 들어섰다. 

“언니 오셨어요?”“원이 누나, 굿모닝!”“그래그래, 다들 좋은 아침!”희원은 활짝 웃으며 동료들과 인사했다. 

“야아, 너무 춥다 추워. 몇 걸음이나 걸었다고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아.”으으으으, 추워. 희원이 손을 비비다가 가방을 내리자 먼저 와서 몸을 풀고 있던 동료들이 웃었다. 

춥다, 언제 왔어? 간밤 별일 없었니?

희원이 종알종알 인사를 하며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자 동료 한 명이 다가왔다. 

“원이 누나 오늘 좋은 일 있어요?”“나? 아니? 왜?”“기분이 좋아 보이는데?”“나? 그래? 좋아 보여?”쪼르륵 따른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며 희원이 멋쩍게 웃자 남은 동료들이 거들었다. 

맞아. 언니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 

그러게. 며칠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은 쌩쌩하네요?

……감정이란 굳이 일부러 표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희원은 대강 우린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더욱 활짝 웃었다. 

“글쎄, 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오늘은 기분이 좀 괜찮네.”“왔냐?”“아, 구언. 굿모닝.”희원은 들어오는 구언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구언은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들어선 문을 돌아보았다. 

“우리 사무실로 손님이 오셨어.”“응? 손님?”누구? 희원이 물으며 차를 한입 더 삼켰다. 

동료들도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몸을 풀다가 자리에 멈췄다. 

이윽고 사무실 관계자가 들어오고, 뒤로 낯선 사내가 들어섰다. 

희원을 포함한 모두는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구언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옆을 비켰다. 녀석은 이미 전달을 받은 것 같았다. 

들어선 관계자 곁으로, 낯선 사내가 선다. 

차를 삼키던 희원의 손길이 점점 느려지고ㅡ

“오늘 우리에게 굉장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낯선 사내의 시선은 여러 동료들을 지나, 그녀에게 멈췄다. 

“다들 아시죠? NK에이전시의 데니스 한 대표님입니다.”“헐.”“와! 진짜요?”유명한 이름만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데니스 한의 등장에 동료들은 눈을 크게 치떴다. 

내한한 데니스 한이 우리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던 농담 같은 소원을 주고받은 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의 많고 많은 무용단 중에 그가 이곳을 알아내고 찾아주었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데니스 한입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대표님 안녕하십니까!”전설과도 같은 사내의 등장에 연습실은 환영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모두가 입을 모아 데니스 한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을 때, 전용 머그컵을 쥔 채 희원은 놀라 입술만 멍하니 벌렸다. 

데니스 한은 일찍부터 발견한 희원을 향해 반갑다는 손짓을 했다. 

동료들은 일제히 희원과 데니스 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내의 매력적인 웃음이 희원을 향한다. 

가지런하게 들어가는 보조개는 다시 보아도 황당할 지경이었다. 

“권희원 씨, 또 보네요.”“한…… 주혁 씨……?”괌에서 만난, 같은 호텔 투숙객이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데니스 한은 따로 희원과 면담을 청했다. 

연습실을 벗어나 사무실로 올라간 희원은 그와 마주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혹스러운 그녀가 놀란 눈빛을 지우지 못하자 주혁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한주혁 씨가, 데니스 한이었어요?”“한주혁이라는 이름은 사실 가족끼리만 쓰고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아…… 맙소사. 어떻게, 말도 안 돼.”그토록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던 대표를 사석에서 마주했음에도 몰라본 것이 새삼 안타깝다. 

비키니를 입고 인생사진이나 찍어댄 사실이 이제야 민망하게 떠오른다. 

“아 그런 줄도 모르고…… 아흑…….”희원은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듯 도리질을 쳤다. 

하필이면 또, 그런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을 줄이야.

“대표님, 그럼 괌엔 왜 오셨어요? 그것도 혼자?”“한국 일정을 두고 휴식을 좀 취하려고 괌엘 갔었죠. 육 개월 만에 가진 휴가였습니다. 머리 식힐 겸 혼자가 편해서.”“아…… 그러셨군요.”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날 밤, 나란히 앉은 그에게 고민 상담을 했던 기억이 스친다.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감사한 기억이 있어서, 메일 주소라도 받아올걸. 감사 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었는데, 하면서 후회했어요.”“그런 권희원 씨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서 방문했습니다.”“아…… 하하하하하하. 마음의 소리, 하하하.”희원이 시끄럽게 웃자 주혁이 따라 웃는다.

그는 본론을 꺼냈다. 

여러 나라의 전통춤에 대해 수집하고 있던 과정에, 한국무용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몇 해 전 올림픽 개막식에서 당신의 공연을 보았다. 

무척 인상 깊었다.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권희원 씨가 무용수라고 해서 찾아봤는데, 당신이 그때 개막식의 주인공이더군요. 나도 놀랐죠.”“아…… 그러게요. 제가 맞긴 한데.”그가 뜻밖의 말을 뱉어내자 희원은 민망하다는 듯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올림픽 개막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단 것만도 큰 영광인데, 이렇듯 기억을 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럴 때 그녀는 에너지를 얻었다. 자긍심이 생겨났고, 무용에 대한 열정이 더욱 솟았다. 

“한국무용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관심이 생겼습니다. 결국에 한국이란 나의 뿌리이기도 하고, 현대 무용이라는 것은 결국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는 거니까.”“네네. 이해합니다. 한국무용을 사랑하는 제겐 대표님의 말들이 특별하게 들리기도 하고요.”“설명은 차차 더 하는 걸로 하고, 아직 시간 많으니까.”주혁은 다리를 꼬아 앉으며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불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해결이 되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이 행복해지는 날도 올 테니까. 

“아…… 불행……은요, 잘 해결되고 있어요.”“과정 중에 있군요. 여전히.”“네, 뭐. 네. 인생은 언제나 결과 없는 과정이니까.”희원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얼버무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길, 이렇게 다시 만날 줄도 모르고 속내를 꺼내 보인 그날의 말들이 후회된다. 

때로는 친한 사람보다 먼 타인이 편할 때가 있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이 외려 쉽게 나올 때가 있었다. 

타인은 나의 말에 동요하지 않고, 기억 속에서 금세 지워버릴 테니.

“아찔하네요. 대표님인 줄도 모르고 가정사를 떠들어댄 꼴이라뇨.”“아뇨. 그렇게 생각하면 서운한데요. 전혀 문제없습니다.”그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는 유달리 섹시하게 생긴 얼굴에 묘한 생동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가지가지 잘난 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다시 만나면 오빠라고 불러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네에? 어우, 안 될 말이죠. 그건 그냥 그때,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했지만.”“한국 정서로 따지자면 내가 오빠 아닙니까? 나는 그 말이 참 좋던데. 따뜻하고 친근감 들어서요.”좀처럼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말 중 ‘오빠’라는 말이 그렇게 들어보고 싶었단다. 

“불러봐요. 친구라고 생각하고.”“네, 오빠.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그녀가 말끝에 웃음을 터트리자 주혁은 테이블을 가볍게 치며 따라 웃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오빠’라는 소리가 굉장히 근사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만난 첫 번째 친구라고 생각해도 됩니까?”“물론이죠. 저야말로 영광인데요.”그녀는 흔쾌히 주혁의 청을 받아주었다. 

“시간 괜찮으면 점심 식사 어때요. 한국무용에 대해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이곳 대표님과 약속이 있거든요.”“안 그래도 얘기 들었어요. 가겠다고 했고요. 한국무용 이야기에 제가 빠질 순 없죠.”“굿. 좋네요.”희원은 미리 사무실 대표에게 저녁식사를 주혁과 함께 하자는 부탁을 받은 터였다. 

그녀가 주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 되는 일이었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해요.”“고마워요.”열흘 남짓 체류하게 될 예정이라는 그가 이 땅을 벗어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만 심어주고 싶었다. 

큰 깨달음을 안겨준, 그에게 신세를 갚을 감사한 기회였다. 

“뭐예요, 또 왔어요?”집으로 귀가한 희원은 초인종 누르는 소리에 택배인가 싶어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찰나의 순간,

혹시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아무리 내가 싫어도 문전박대는 좀.”“아아, 들어와요. 미안요.”희원은 칼바람이 매섭다는 것을 깨닫고는 문을 활짝 열어 그를 맞이했다. 

거실로 돌아서는 그녀의 입가에, 잠시 희미한 미소가 왔다가 사라진다. 

“웬일이에요, 연락도 없이?”“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와보니 여기네요?”“……술 마셨어요?”희원이 홱 돌아보며 묻자 지환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차 키를 흔들었다. 

“안 마셨습니다. 아쉬우면 지금부터 마시든가.”“쳇, 안 돼요. 안 마실 거예요. 내일 중요한 일들이 많다구요.”“공연 아직 남았잖아요. 중요한 일들이라면, 가령?”지환이 희원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묻자 희원은 귀찮다는 듯 손을 팔랑거렸다. 

“하나하나 읊어봐야 서지환 씨는 이해 못 할 일들이니 패스하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내한했는지 알려줘도 실감할 수 없을 테니까.”말하다가 희원은 주혁과의 인연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해주질 않고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가 웃으니, 지환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웃음을 뚝 그친다. 

그게 뭐라고 또 되게 서운하다. 

“이젠 타인 취급하기로 아예 작정한 겁니까?”“나 아닌 모든 이는 타인이죠. 그런 의미에서 타인, 맞긴 하네요.”하! 타인이란다! 타인이란다!

지환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충격에 휘청였다. 

타인이라니. 거 참 말이 심하네!

“밥 줘요. 배고픈데.”“맡겨놨어요?”“맡겨놓으면 뭐든 주는 겁니까? 그럼 맡겨놓고. 내 마음 정도.”“맡겨놓을 정성이면 집에 가서 해 먹어도 되겠네요. 서지환 씨 혼자.”“당신이 있는데 내가 왜 혼자?”“그, 그걸 말이라고 해요?!”희원이 눈을 희번덕거리자 지환은 딴청을 피웠다. 

환대를 받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밥 한 끼도 안 먹어주려고 하니 앞날이 되게 막막하다. 

“집에 간단한 것들밖에 없어요. 기다려봐요, 그럼.”“사실 먹고 왔습니다. 권희원 씨가 밥을 안 먹었을까 봐 해본 말이고.”“……싱겁긴. 나도 연습실에서 간단하게 먹었어요.”희원이 어깨를 으쓱 올리자 지환은 은근슬쩍 소파에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시계를 가리켰다. 

꺼지란다. 

“서지환 씨, 나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단 말이죠. 스케줄이 꽤 많아졌다고요.”“그래서?”“쉬고 싶단 말인데.”“지금 쉬고 있잖습니까. 충분히.”“그러고 서지환 씨가 서 있는데 내가 쉬겠어요?”“왜 못 쉽니까? 설레서?”“열 받아서!”그녀가 분노 한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수치스러워 물러나고 싶지만, 어쩐지 더 머물고 싶다. 

1분이라도. 

“쉬어요. 난 온 김에 TV나 좀 보고 갈 테니까. 혼자 사는 집엔 TV가 없거든요.”“…….”“종종 TV 보러 와야겠어요. 요즘 재미있는 드라마를 발견해서.”나는 당신의 사소함이 그리우니까. 

“TV 떼줄게요. 가져가요, 집으로.”“마음만 받겠습니다.”“아뇨. TV도 받아요. 내가 인심이 좀 후하거든요.”“난 눈치가 없어서, 사양합니다.”지환이 떡 버티고 앉아서 리모컨을 들자 희원은 눈을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환은 TV를 틀며 제목도 모르는 드라마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틀어놓고 멈췄다. 

“아, 이게 요즘 그렇게 핫해요. 엄청 재미있는데, 같이 볼래요?”“주인공 직업이 뭔데요?”“……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줄거리는요?”“스포일러는 안 합니다. 직접 봐요, 권희원 씨가.”하…… 희원이 한숨을 쉰다.

더욱 수치스러워졌지만, 지환은 이왕 없기로 한 눈치 끝까지 없애버리기로 한다. 

그때였다. 희원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허, 지환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상냥한 음성에 코웃음을 쳤다. 

저 보소, 저 보소, 사람이 저렇게 이중인격이야. 나한테는 시베리안 눈보라처럼 냉랭하더니.

“아, 대표님? 아, 오빠? 네! 저 희원이에요!”빙판 위 미끄럼틀 타는 펭귄처럼 웃으면서 오빠란다. 

…….

오빠? 오빠아아?!

지환은 홱, 고개를 돌려 통화 중인 희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낯선 단어. 

지환의 눈꼬리는 사정없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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