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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각개전투 (47/98)

47. 각개전투

집으로 돌아온 백인호 의원은 서재에서 한참이나 비서와 대화를 나누었다. 

“언론 분위기는 어때.”“아주 좋습니다. 사모님께서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신 영상 조회 수가 이틀 사이 500만을 넘겼고 국민들도 호의적입니다.”아내 희주는 강진이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입은 최빈국으로 파견을 나섰다. 

벌써 열흘째,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구조 현장에서 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치인 부인들 중에는 유일하게 그녀가 발 벗고 나섰고 그러한 이야기는 백인호 의원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모두가 대단한 일이라고 그녀와 백 의원을 칭송할 때ㅡ

정작 백 의원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귀국 일정 알아봤어?”“사모님께서는 아직 미정이라고 전해오셨습니다.”“……미정이라.”대체. 

갑자기 그곳은 왜 간 걸까?

백인호 의원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최빈국의 지진 현장, 언제 또다시 강진이 덮칠지 몰라 모두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현장.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그런 열악한 구조 환경에 굳이 뛰어들어 솔선수범을 해 보일 만큼, 그녀는 의롭거나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인지도를 위해 목숨 걸고 파견을 청할 만큼, 자신의 정치 생활을 염려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마치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그, 저…… 말입니다, 의원님.”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백 의원은 고개를 들었다. 

비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데없이 뜸을 들였다. 

“뭔데.”“그…… 일전에 알아보라던 서지환 검사, 말입니다.”아아, 그래. 

백 의원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도가 낮은 서재의 안.

비서는 들고 있던 황색의 서류 봉투를 책상에 내렸다. 

“서지환 검사가 지금까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도맡아 처리했고, 특히나 이번 금괴 밀수 건은 서지환 검사가 담당을 하고 나서부터 검거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백 의원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서류봉투를 바라보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이런 놈들이 제일 골치였다. 

주제에 돈을 밝히지도 않고, 명예욕도 없으며, 그저 맡은 일을 처리한다는 소신만 분명한 자들.

신념을 이길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많지 않은 족속들.

“뭐라도 틈이 있어야 할 텐데. 틈. 좌천을 시킬 만한.”잘못 건드리면 누구라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길들여지지 않는 들개 같은 자들.

“저, 틈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이게 사모님…… 하고도 관련이…….”백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비서의 안색이 좋지 않다. 

“똑바로 말해. 뭔데.”“그……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사모님이 얼마 전에 중앙지검을 찾아가셨다고 합니다.”“중앙지검을? 왜?”“서지환 검사를 잠깐 만나신 듯합니다.”비서의 입술 사이로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 의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몇 개의 장면이 있다. 

사소하게 치부해서, 잊고 지냈던 이야기가. 

저는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강희주가 제 앞에서 처음으로 뱉어냈던 말.

제발 저를 그 사람에게 돌려보내 주세요. 제발……. 

결혼 전, 그녀가 제게 애걸복걸하며 지켜내고자 했던 사랑.

“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나?”“나누는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차장에서 만나고 헤어졌다는데,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그녀에게는 본인도 모르는 미행이 있었다. 

백 의원은 생각하는 눈빛을 했다. 

만났다, 서지환 검사를. 주차장에서.

그럼 강희주의 목적도 애당초 권희원이 아니라, 서지환이었나?

“그, 옛날 매니저 말이야. 지금 뭐 하지?”“사모님의 예전 매니저 말씀이십니까? 강릉에 거주하고 있습니다.”“물어볼 말이 있으니 한번 올라오라고 해. 직접 봐야 하겠으니까.”“예. 의원님.”……그렇다면 얼추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백 의원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온몸에 휘감기는 분노가 머리까지 뜨겁게 했다. 

이제야 모든 전말을 알았다는 것처럼 백 의원은 실소했다. 

그녀가 그렇게 쩔쩔매던 이유, 검사 내외와 자리를 만들어보라 했더니 지진의 현장으로 도망치듯 달아난 이유.

“강희주 통화 목록 좀 뽑아봐.”“예. 의원님.”그토록 숨기고 싶어하던, 그녀의 비밀을 알아냈다. 

백 의원은 깍지를 낀 손을 책상에 떨구며 헛웃음을 흘렸다. 

비서는 퇴장했고, 그는 어두운 서재에 홀로 남아 중얼거렸다. 

서지환 검사와 그녀를 함께 엮어 떠올리니 세상에 없던 방법도 생길 것만 같았다. 

“쇼는 이제 그만해야지, 강희주.”그래. 그녀에게 아름답지 않은 결말을 선물해줄 생각이다. 

감히 나를 돕지 않은 죄.

감히 나를, 기만한 죄. 

“지금부턴 내가 너와 놀아줄 차례니까.”물론 그놈에게도.

구언과의 약속 현장에 도착한 지환은 떫은 감을 가득 문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주차를 하고 로비로 올라오니 옘병, 저쯤 소파에 유구무언이 앉아 잡지를 보고 있다. 

슈트 재킷을 반듯하게 툭툭 털고 지환은 녀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털썩 그 앞에 앉았지만 구언은 평온하게 잡지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오셨어요?”“불렀으니까.”“아아, 부르면 오는구나. 쉽네.”뭐, 뭐라는 거야!

지환은 태연한 구언의 대꾸에 눈꼬리를 올렸다. 

정작 사람을 불러놓고 데면데면한 쪽은 구언이었다. 

“밥 먹자더니? 밥을 잡지책 사진으로 먹고 있나? 그것도 혼자?”“기다려봐요. 난 뭐 읽고 싶어서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아요? 다 전시용이라고요.”……뭐라고 냐옹냐옹 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지환은 구언의 이상한 행동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구언은 잡지책을 조금 더 들여다보다가 덮었다. 

이윽고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일어섰다. 

어디 가? 지환이 눈빛으로 묻자 구언은 따라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시다, 밥 먹으러.”“어디로?”“당신 와이프 있는 곳으로.”“……뭐?”지환이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구언은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서두르라는 듯 손끝을 움직였다. 

“당신 와이프 보러 가자고요. 여기 있으니까.”“여기…… 있다고?”“네. 지금 여기 있죠. 기절할 만큼 잘생긴 남자와.”따라와요. 구언은 앞장섰다. 

지환은 멀어져가는 구언을 바라보다가 헐레벌떡 일어섰다. 

모든 장면, 모든 말들은 다 잊어버리고ㅡ

“몇 층?”“8층.”‘기절할 만큼 잘생긴 남자’만 뇌리에 박혔다. 

두 사내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동시에 8층을 눌렀다. 

거침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처럼, 두 사내의 전투력은 급상승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네.”“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식당에 들어선 지환과 구언은 두리번거리며 희원을 찾았다. 

엇, 저기 있다. 

지환과 구언은 서로 바라보고는 약속이나 한 듯 걸었다.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네. 물론입니다.”그녀와 가까운 곳으로, 가깝지만 그녀는 발견할 수 없을, 사각지대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행동들이 민첩하다. 

자리에 빠르게 착석한 두 사내는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듯 들어 올렸다. 

“이거, 이거 주세요.”“저도 그렇게. 똑같이.”식사엔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거나 대강 찍어 밥을 시켰다. 

하필이면 펼쳐놓은 곳이 주방장 특선 메뉴라, 숨넘어가는 가격이지만 내가 낼 거 아니니까.

부른 놈이 내겠지.

와이프 있는 놈이 내겠지.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며 일단 메뉴 합의를 마쳤다.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사라지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테이블 염탐에 나섰다. 

“내 아내에게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중요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호텔에서.”희원의 뒷모습만 보이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음은 알 수 있었다. 

등이 파였거든! 하염없이!

“춥겠네.”지환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구언은 힐끔,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니스 한의 얼굴이 대각선으로 보인다. 

구언은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다시 급하게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얼마 전에 내한한 유명 에이전시 대표예요. 무용수들에겐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고. 한국엔 처음 내한했고.”“그런데 왜 저 새…… 저놈…… 저 사람이 내 아내와 둘이 있는 건지?”“한국 무용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한했다고.”……내 아내의 유명세, 이럴 땐 조금도 기쁘지 않다. 

지환은 범죄자를 가리는 눈빛으로 사내를 뚫어지게 보았다. 

기분이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잘생겼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로 사내의 얼굴을 총평할 수 없었다. 

서양 특유의 분위기에 동양의 색을 입혀놓은 것 같은, 사내의 얼굴엔 여러 가지 매력이 뒤섞여 있었다. 

이름값이 더욱 그의 가치를 높여놓았다고 여기고 싶지만 제길, 쉽게 눈을 뗄 수 있는 아우라는 아니었다. 

희원이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순간순간이 위태롭게 여겨질 만큼. 

“알아주는 재력가예요. 저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 한두 개가 아니고, 대부분은 모두 성공했죠. 우리 업계에서 저 사람은 신화예요.”구언은 들끓는 남편의 마음에 기름을 쏟아부었다. 

콸콸콸…… 기름을 들이부은 속내는 펄펄 끓어댔다. 

“혹시 그…… 오빠…….”지환이 중얼거리자 구언은 기억이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희원이가 오빠라고 하던데. 웃긴 게 뭔 줄 압니까? 둘이 알던 사이더군요.”“알던 사이…… 알던…….”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내와 무슨 수로 알고 지냈을까?

한국에 처음 내한했다면서. 얼마 전까진 한국 밖을 나가본 적 없는 내 와이프와, 대체 어떻…….

“아…….”지환은 미간에 힘을 주며 사내의 얼굴에 초점을 더욱 세게 맞췄다. 

최첨단 시스템도 울고 갈 집중력으로 사내의 얼굴을 분해해 하나하나 뜯어 맞춰보니,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구간이 있다. 

“그…… 선글라스…….”제대로 보지 못한 선글라스 속 익명의 투숙객이었지만, 지환은 지금 눈앞의 사내가 그때 그 사내임을 알 수 있었다. 

왜냐. 선글라스에 비친 사내의 얼굴을 퍼즐처럼 조각 맞춰보기를 하루종일 했었으니까!

“왜요, 서지환 씨도 아는 사람입니까?”“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당장 저 테이블로 갔지.”검사라는 직업은 이렇게 빛을 발한다. 

역시, 나는 훌륭한 직업 덕분에 와이프 앞의 낯선 사내마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괌에서 만났을 겁니다. 저 사람이 사진을 찍어줬을 거고.”“아…… 네, 맞아요. 사진.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훔쳐봤습니다. 아내의 SNS.”훔, 훔쳐봤다니……

나도 나지만…… 당신 팔자도 참…….

위풍당당하게 아내의 SNS를 살펴보았다 실토하니 구언은 짠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여기 찬물 좀 줘요. 

지환이 다가온 직원에게 요청을 하자 구언은 다시 뒤를 힐끔 돌아 데니스 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웃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두 사내의 심사는 묘하게 뒤틀린다. 

“그런데 대단하네요. 흐리게 나온 사진 한 장으로 사람 판별도 합니까?”“수도 없이 봤으니까. 외울 정도로. 길에서 지나가다 만나도 알아볼 정도로.”얼굴은 분명하지 않았으나 저 피지컬, 저 분위기,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

왜냐. 드럽게 잘났으니까!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루머가 있어요. 이혼을 밥 먹듯이 했다는데. 검증은 안 됐지만.”“저 자식 말입니까?”“저 자식이라뇨. 네. 저 새끼.”하…… 지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더욱 미간을 구겼다. 

여러모로 불쾌한 구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날 불렀습니까?”“네. 분하지만 뭐, 어쨌든 이런 상황에 서지환 씨만 한 지원군은 없을 테니까.”……오늘 좀 마음에 드는데?

지환은 시선을 돌려 구언을 바라보았다. 

기특하게도 자신에게 지원사격 요청을 해온 유구무언에게 오늘은 특별히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겠다. 

“그 대답 오늘은 좀 괜찮은데?”“뭐,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 그런 의미로 오늘은 페어플레이하죠.”페어플레이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밥값은 네가 내라. 유구무언. 

“식사 나왔습니다.”밥 먹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두 사내의 앞으로 주방장 특선 메뉴가 줄줄이 깔린다. 

두 사람은 영혼 없이 포크를 들었다. 

뭘 집어 입으로 넣고 있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이어가며, 간간이 저 앞의 테이블을 주시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귀를 기울여가며. 

저 잘나고 잘난 놈이, 그녀를 꼬드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한국의 문화 예술계는 정적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에도 인색하고, 또 지키는 것에도 미흡한. 문제가 많아요.”“맞아요, 맞아요. 저도 격하게 공감해요.”희원은 주혁의 말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이 바라보는 한국의 예술계의 전망은 슬프게도 밝지 않았다. 

“무용계 역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가장 기본엔 한국 무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중화를 넘어 세계화가 되어야 할 가치란 충분하니까.”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주혁이 말을 잇자 희원은 감동 서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저를 특이하게 바라봤어요. 전통을 보전한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니까요.”“그래서 현대무용과 믹스를 선택한 겁니까?”“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한국 무용의 대중화를 위해서, 장벽을 낮추자는 생각이었죠.”“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권희원 씨는 그대로, 하던 대로 그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누구도 제게 쉽게 하지 못했던 말.

조언을 얻을 만한 사람도, 이 길의 끝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던 현실.

“정말…… 저는 그래도 되는 걸까요?”나 혼자 발버둥 치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던 나날.

“물론. 말했듯이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난 봤습니다, 권희원 씨의 가능성을.”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의 말 몇 마디 앞에.

그가 보았다는, 가능성이라는 희망 앞에.

“감사해요. 대표님 말씀을 듣다 보니 용기가 저절로 생겨요.”“대표님이라니, 오빠라니까.”“……죄송해요, 잘 안 나와서, 생각만큼.”희원은 민망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주혁도 따라 웃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는 것 같지만, 느낌 탓이겠지.

“권희원 씨, 대화는 어떤가요. 즐겁습니까?”“그럼요. 물론이죠. 제겐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별로 없었어요. 여러모로 외로운 길이죠.”“굿. 좋네요. 목표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행운입니다.”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당신은 행운이고.”별것 아닌 말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희원은 그를 따라 와인잔을 들었다. 

빙그르르, 잔을 돌리니 빛깔 좋은 와인이 춤을 추듯 일렁인다.

잘 못 마시는 와인의 텁텁한 맛도 달게만 느껴진다. 

나의 고됨을, 나의 신념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새로운 방식의 행복이 찾아왔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대표님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아요.”“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길 원한다기보다, 내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가려고 하죠.”의외의 대꾸가 돌아온다. 

희원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어떤가요? 저는 대표님께 원하는 것이 있어 보이나요?”“있다면 말해봐요. 먼저.”주혁은 꽤 많은 양의 와인을 털어 마셨다. 

주저 없이 잔에 와인을 따르는 손길에 박력이 있다. 

“말해봐요. 무엇이건, 원하는 게 있다면.”또다시 의외의 답이 돌아오자 희원은 웃었다. 

여러모로 예측할 수 없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내이다. 

“생기면요. 생길지 모르겠지만.”“생겼으면 좋겠군요.”그래서 나누는 모든 대화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쩐지 자꾸만 마른 주먹을 말아 쥐게 만들었다. 

눈앞의 사내는,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 

“한국에서 만난 첫 번째 친구인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희원은 주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없이 바라보자 주혁은 그런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와인을 쭉, 삼켰다.

순간 묘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흘렀다. 

그의 눈빛은 굳이 무얼 담지 않아도 강렬했다. 

잠시 후, 주혁은 침묵을 흩트리듯 잔을 내리며 입술을 열었다. 

“지금껏 세계적으로 수많은 무용수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성장 과정을 보아왔습니다.”“…….”“그중의 소수가 성공합니다. 성공하는 무용수들의 눈엔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게 있어요.”“뭐가 담겨 있던가요?”“열정, 갈증, 욕망.”“…….”“자신이 지닌 예술적 신념에 대한 확고함.”주혁은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진 간격 사이로, 시선을 맞췄다. 

“당신의 눈에도 있어.”희원의 눈동자는 그의 강렬함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렸다. 

“당신은 열정이 많은 사람이군요. 현재에 안주하기 싫은,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은.”“…….”“그런 눈빛, 마음에 듭니다. 그런 목마름은 예술가에게 생명과도 같으니까.”“한국무용엔, 특별한 것이 숨어 있어요.”희원은 그의 말끝을 이었다. 

주혁은 상체를 조금 뒤로 무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한국 고유의 정서이기도 해요. 모든 것에 깃들어 있죠.”“그게 뭡니까?”“한(恨).”한. 주혁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아마 무용수 권희원의 눈빛에 가장 많이 서려 있는 것은 한일 겁니다. 열정, 갈증, 뜨거움을 이기는.”“한이라는 건 경험에서 쌓이는 것 아닙니까?”“그래서 한 많은 여자가 되려고 하죠. 아직은 경험 부족이라, 눈빛으로 많은 것들이 표현되지는 않을 거예요.”그녀가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하며 대화의 매듭을 짓자 주혁은 턱을 괴었다. 

눈앞의 권희원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묘한 향취를 자아내는 무용수였다. 

“권희원 씨와 나누는 무용에 관련된 이야기는 끝이 없겠네요.”“그럼요. 저는 밤도 샐 수 있어요.”“그럼 밤을 지새워보죠. 대화가 끊길 때까지.”주혁은 손을 가볍게 들며 직원을 호출했다. 

이미 텅 비어버린 와인을 한 병 더 주문했다. 

자꾸만 귀가 가렵고 얼굴이 따가웠지만 이유를 종잡지 못한 채.

자리는 열정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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