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나는 이렇게도 널
“봤어요? 지금 저 테이블, 와인 한 병 더 시켰습니다.”하! 하! 또 시켰어! 또!
구언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지환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사가 끝난 테이블로 간단한 디저트와 와인이 세팅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다는 것처럼, 분위기는 새롭게 변했다.
와인…… 못한다더니…….
지환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눈빛으로 표출하며 계속해서 아내가 있는 테이블을 염탐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중간중간 그녀는 끊임없이 웃었고, 저 드럽게 잘생긴 놈과 시선을 맞췄다.
지나치게 등이 파인 그녀의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혈압이 급상승하는 것만 같다.
아내의 등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보는 내가 다 추워 죽겠네, 진짜로.”지환이 중얼거리자 구언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열었다.
“식사가 끝났으면 재깍재깍 일어날 일이지, 무슨 얘기를 대체 저렇게.”“내 말이.”지환은 추임새를 넣었다.
“하긴, 일생에 한 번 만나기 힘든 사람인 건 분명해요. 나라도 쉽게 못 일어났을 겁니다.”“…….”“그래도 말이야, 와인 두 병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내 말이.”긍정과 부정이 명확하다.
구언은 지환의 추임새를 듣다가 흘깃, 지환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썩어 문드러진 것을 보고 있다 보니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난다.
“이 대목에 어울리는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지환 씨에게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뭡니까?”“희원이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보면서, 질투가 나긴 납니까?”“안 나면 내가 지금 여기 왜 있겠습니까?”“언제는 안 좋아한다며?”“…….”“희원이가 좋다고 다가갈 땐 뿌리치더니 이제 와 웬 뒷북입니까?”“그럼 나는 여기 왜 불렀습니까? 질투하라고 부른 것 아닙니까? 뒷북 좀 쳐보라고. 둥둥둥.”“아니, 뭐, 아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좀 이상하잖아요. 상황이.”지환은 침묵하며 다시 찬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서지환 씨 지금 희원이 하고 밀당하는 겁니까?”“허, 밀당은 무슨. 과대평가는 회사에서만 받는 걸로 하죠.”다 마신 잔을 내려놓으며, 지환은 엄지로 입술을 닦았다.
구언은 말꼬리를 흐리는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좋아해요? 희원이?”“내가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합니까?”“나한텐 중요한 일인데. 지금 저 대표보다 내게 더 위험한 인물은 서지환 씨니까요.”“아깐 아군이라더니?”“그러니 혼돈의 연속 아닙니까. 나도 혼란스럽다고요.”“와인이나 한잔하죠. 끝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저 테이블.”지환은 직원을 불렀고, 그녀의 테이블에 있는 와인과 같은 와인을 주문했다.
구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간다.
“지금 그 와인 얼마짜리인 줄 알고 시킨 겁니까?”“월급쟁이는 비싼 와인도 못 먹습니까?”“아니, 그런 말은 아니지만 진짜 비쌉니다. 알고 마시라고.”두 사내가 옥신각신 다투는 사이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귀한 와인이 테이블에 놓인다.
지배인이 직접 와인을 개봉한 뒤 전용 보틀에 따라주었다.
지환은 희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와인잔을 들었다.
제길, 얻어먹으려고 했는데 사게 생겼다.
벌컥벌컥, 지환은 찬물 들이켜듯 와인을 마셨다. 그러자 구언이 질색한다.
“이거 포도주스 아녜요. 무슨 와인을 그렇게 무식하게.”“이 와중에 교양 따지게 생겼습니까?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지환은 막걸리 따르듯 와인을 잔에 따랐다.
구언은 격 있게 와인을 삼키며 힐끔, 지환을 응시했다.
그의 반응이 내심 궁금했는데.
그녀가 어디서 누굴 만나건 간에 관계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주기를, 은근 바랐는데.
그는 진심으로 들끓었다. 질투했고, 반응했다.
“글쎄 이거 포도주스 아니라니까요? 벌써 다 마셨어?”“그냥 두죠. 댁이 계산할 거 아니면.”질투에 눈이 먼 지환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러니하게도 구언의 마음에 묘한 안도감이 일렁였다.
막상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나니 지환이 그녀의 현재를 모른 척하지 않아서ㅡ
“아, 나도 그럼 급하게 마셔야겠네. 좋은 와인 한입이라도 더 마시려면.”고마웠다.
“어어어, 저 자식이…….”와인을 홀짝거리던 구언은 지환의 탄식에 다시 시선을 돌려 희원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앉아 와인을 마시나 했더니 대표놈이 그녀에게 자신이 매고 있던 스카프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녀가 추워 보였던 모양이다.
지환과 구언은 동시에 눈을 희번덕거렸다.
“서지환 씨, 혹시 총 있습니까?”데니스 한, 미안하게도 이쯤에서 죽어줘야겠어.
“검사는 총기소지 권한이 없습니다. 애석하게도.”“검사도 별거 없네요. 총도 없다니.”“내게 총이 없어서 댁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지?”두 사내는 불타는 눈길로 서로 흘겨보다가 다시 앞을 주시했다.
대표놈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끌러 건네자 희원이 손사래를 친다.
그렇지! 잘한다!
두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사양하자 주혁이 테이블에 스카프를 내려둔다. 두 사내는 멍청한 미소를 지었다.
“봤나? 내 와이프는 저런 사람이야.”“알면 좀 잘하지 그랬습니까? 뒷북이나 치고 있으면서 무슨.”“나는 뒷북칠 주제라도 되지. 본인은 그럴 주제도 못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그런데 말은 왜 짧아집니까? 기분 나쁘게?”“기분 나쁘면 먼저 태어났어야지.”“이런 꼰대…….”“형이라고 부를 자신 있으면 댁도 말 놓든가. 난 너그러우니까.”“아, 안 놔요! 형은 무슨!”쉿. 목소리가 크다며 지환은 구언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옥신각신 다투며 계속해서 힐끔힐끔 현장을 주시했다.
마치, 범행 현장을 미행하듯이.
그녀에게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권희원 씨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군요.”아까부터 한 잔을 따라놓고 빙글빙글 돌리며 입술만 축이는 그녀를 향해 주혁이 물었다.
“아…… 네. 실은 와인을 좋아하긴 하는데, 금방 취해서요. 여기서 취하면 안 되니까.”희원이 웃자 주혁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주로 주혁만 마셨지만 와인 두 병은 쉽게 동이 났고, 어느덧 자리를 파해야 할 시간이 왔다.
“와인 잘하시네요.”“와인만 한 친구도 없죠. 탄생부터 매력적인 술이니까.”그는 마지막 잔을 가볍게 털어내며 입술을 닦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리를 끝내야 한다는걸 알고 있었다.
“모처럼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끝이 아쉬울 만큼.”“저도 그래요. 인상 깊었어요.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무용수들을 발굴해서 키워내는 게 나의 임무죠. 오늘은 보석을 발견한 것 같고.”……마음이 덜컹하며 떨어져내린다.
희원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자 주혁은 긴장 말라는 것처럼 편안하게 웃었다.
“고민해봅시다. 우리가 상생할 수 있는 길. 충분히 열려 있을 테니까.”상생.
그가 뱉은 단어가 너무나도 무겁고 대단한 까닭에 희원은 웃음도 잃어버렸다.
표정에 그대로 마음이 드러나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주혁은 일어섰다.
맺고 끊어야 하는 타이밍이 있다면, 오늘은 지금이 그때였다.
“다음엔 조금 더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보죠. 오늘은 이상향을 보았다면 다음엔 현재를 논해봅시다.”“네. 기회가 된다면요.”너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생각에 희원은 다급히 그를 따라 일어났다.
다가와 그가 의자를 조금 더 빼주고, 희원은 자리를 벗어났다.
“당신의 친구도 꽤 재밌는 사람인 것 같네요.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네?”주혁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희원은 주혁을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았다.
“어?”희원이 바라보자 허겁지겁 반대편으로 돌아앉는 두 사람.
상상해본 적 없는 조합의 사내들.
“맞죠, 권희원 씨의 친구.”“아…… 네…….”지환과 구언이었다.
희원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옘병, 걸렸다, 걸렸어.
지환과 구언은 최대한 고개를 비틀어보지만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둘이서 뭐 하는 거예요?”아뿔싸.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 부인!”지환이 시치미를 뚝 떼며 그녀를 불렀다.
‘부인’이라는 소리에 느릿하게 따라오던 주혁이 멈춰 서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편인 모양이다.
“뭐 해요. 둘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아니, 둘이 왜? 어쩌다가?”“아아. 설명은 이쪽에서 할 거야.”지환이 선수 치며 구언에게 손을 뻗자 희원의 시선이 구언에게 닿는다.
불리한 진술을 도맡은 구언은 입꼬리만 씰룩씰룩 움직이다가 하하하, 크게 웃었다.
“아니, 지환이 형이 밥을 혼자 먹게 생겼다고 해서!”“지환이…… 형……?”언제부터 니가 서지환 씨를 형이라고 불렀어……?
희원이 눈으로 묻자 구언은 더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하, 형! 여기 희원이가 있었네! 이런 우연이!
하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나도 깜짝 놀랐네! 하하하하!
……만담을 주고받듯 구언과 지환이 대화를 나눈다. 그러더니 척척 달라붙어 어깨동무를 한다.
“우리 친해! 친해졌어! 하하하!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어!”“맞아! 부인! 우리 이제 친해! 몹시! 피를 나눈 형제처럼!”“…….”희원이 떨떠름한 표정만 짓고 두 사람을 응시하자 멍청하게 흘리던 웃음을 지웠다.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 이래서 운명인가 우리는.”“아, 맞다. 소개해줄게요.” 헛소리 말라는 듯 희원이 말을 자르며 뒤를 돌아본다.
주혁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한 희원은 지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개해줄게요. 그…… 어제 설명했던, 내한한…….”“아아, 그, 그분. 알지. 당신이 어제 말해줬잖아.”제대로 설명하기도 전에 지환은 아는 척을 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고 주혁에게 다가갔다.
주혁은 풀었던 스카프를 다시 목에 둘러매고는 지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니스 한입니다. 반갑습니다.”“서지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니스 한 씨.”“……데니스 한, 입니다.”“아아, 죄송합니다. 데니스 한.”악수를 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환은 악의적인 파워가 솟아날까 싶어 서둘러 손을 뺐다.
아무리 심사가 뒤틀려 있다 한들 그녀의 비즈니스를 망칠 수는 없지.
옘병, 가까이서 보니 더욱 광채가 흐른다.
“아, 잠시만요. 대리 기사님 전화가 와서.”희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주혁은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힐끔 보더니 다시 지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토록 매력적인 아내분을 두고 계시다니, 행복하시겠습니다.”“네. 행복합니다. 저토록 매력적인 아내를 두지 않은 사내들은 가늠조차 못 할 정도로.”지환의 허세에 주혁은 웃었다.
옘병,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는 얼굴이 너무나도 핸섬하다. 상당히 불쾌한 작자이다.
“가늠은 안 되지만 매력적인 아내는 불안하단 걸 잘 알고 있죠. 남들 눈에도 매력적일 테니.”“와이프가 생각보다 철벽이라 말이죠. 아무리 추워도 다른 남자의 스카프는 두르지 않는. 그래서 불안은 없습니다.”지환이 말끝에 웃자 주혁은 약간 당황스럽다는 듯 얼굴을 굳히다가 힐끔, 시선을 내렸다.
자리를 내려다보니 자신이 선택했던 와인과 같은 종류의 와인을 마시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다.
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남편은 이곳에서 한동안 아내를 주시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고도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때마침 통화를 마친 희원이 다시 걸어왔다.
“미안요. 지금 기사님 오고 있대요.”“대표님하고 대화는 잘 나눴습니까? 부인?” “아, 네. 대표님이 한국무용에 대해 관심을 표하셔서 대화 나눴어요.”……오빠에서 대표로 돌아선 호칭.
지환은 이상한 구간에서 안도하며 그녀의 곁에 가깝게 섰다.
“그래, 좋았겠다. 당신은 그런 대화 나누는 거 좋아하니까.”주혁은 지환과 희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객관적으로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여기 있는걸 알았다면 같이 식사하는 건데. 아쉽다.”지환이 의자 뒤에 걸어두었던 자신의 목도리를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별생각 없는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사실 춥기도 했고.
“밖에서 보니까 오늘은 더 예쁘네, 우리 부인.”“아…… 어…… 네. 고마워요.”지환의 기름기 흐르는 멘트에 희원은 얼어붙었고, 구언은 메스꺼움을 토로했다.
얼굴에 단단하게 철판을 깐 지환은 조금 더 그녀를 끌어 곁에 세우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혼자 떠나도 된다는 암시다.
“제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하시는 모든 사업 번창하길 바랍니다.”“사업이 번창하려면 권희원 씨 같은 무용수들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권희원 씨를 만난 건 제 쪽에서 감사한 일이죠.”주혁은 가보겠다는 것처럼 다시 꼿꼿하게 섰다.
이쯤에서 홀로 퇴장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으므로.
“권희원 씨,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주혁은 희원과 구언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 다시 지환을 보았다.
마치 영역을 지키는 늑대처럼 지환은 그녀의 곁에 가깝게 서 있었다.
“행복에 겨워 괜한 불행을 잡는 경우도 있죠. 그런 어리석은 일은 두 분 사이에 벌어지지 않길 바랍니다.”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를 나불거리더니 떠난다.
지환은 영문 모르는 주혁의 마지막 말을 곱씹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셋이 남아버린 자리.
“아, 취하네. 난 먼저 가야겠다.”구언은 치고 빠질 때를 알겠다는 것처럼 빛의 속도로 자리를 떴다.
비로소 둘만 남은 자리.
그의 목도리를 두르고, 희원은 사방을 살피다가 입술을 열었다.
“서지환 씨, 진짜 나 여기 있는 줄 모르고 온 거예요? 구언은 알고 있을 텐데, 나 여기 있던 거.”“글쎄, 말을 안 해줘서.”“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둘이 밥 먹는 사이가 됐는지? 왜 친해졌어요?”“뭐, 동병상련이랄까.”지환은 웃었다. 입고 왔던 코트마저 그녀에게 걸쳐주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그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우리도 이만 가자며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뭐야, 난 눈사람처럼 만들어놓고. 서지환 씨 추워요. 목도리라도 해야…….” “그냥 갑시다. 난 지금 후끈하니까.”온통 그의 것으로 돌돌 감긴 그녀는 약간의 취기가 있는 지환을 올려보았다.
여러모로 이상한 시간이었다.
“저는 대리 기사님 불렀으니까 서지환 씨도 어서 대리 기사님 불러요.”“……따로 가나?”“당연하죠. 엄연히 집이 다른데 숟가락 막 얹지 맙시다? 나 오늘도 많이 피곤하거든요?”사무실에 차를 두고 올걸, 제길.
지환은 호텔 로비에서 각자 헤어지자 말하는 희원을 야속하게 바라보았다.
사는 집이 다르다는 건 이토록 서글픈 일이다.
합쳐 살아야겠다. 방법을 연구해야겠어.
“나 여기에 차 두고 가도 되는데.”“알아요.”“내일 찾으러 와도 되는데.”“알아요.”“그럼 오늘은 같이…….”“아뇨.”어어, 알겠다. 지환은 희원이 단칼에 거절하자 무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보았다.
“되게 질척거려요, 지금. 본인은 알고 있나?”“지, 질척이라니! 질척이라니!”하! 하! 질척이라니! 나더러 질척이라니!
“진짜 질척질척한 게 뭔지나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보여줘? 질척질척?”“충분히 보고 있어요. 지금.”……할 말이 없다.
질척대는 거, 나도 인정.
“우리 집은 지금 서지환 씨가 잘 수 있을 환경이 아니라고요. 양말 한 짝도 없는데 출근 어떻게 하려고 자고 간다는 거예요. 셔츠도 갈아입어야 할 텐데.”“그거야 사면…….”아니야…… 노려보지 마…… 알겠으니까…….
희원이 노려보자 지환은 손사래를 쳤다.
힐끔, 시선을 내려 대리기사를 기다리는 희원의 손을 바라보자니 결혼반지가 없다.
오케이. 잘 걸렸다.
지환은 희원의 손을 덥석 잡아 위로 올렸다.
“반지 어딨어.”“집에요.”“왜 여기 없냐고.”“없을 만하니까 없겠죠.”하! 진짜!
지환이 눈꼬리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자 희원은 홱, 손을 놓았다.
여행 가서 잃어버릴까 봐 빼고 갔는데, 다시 끼는 걸 잊어버렸다.
그러는 지는 얼마나 잘 끼고 다니길…….
희원이 슬쩍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바라보자 결혼반지가 있다. 공연히 미안해진다.
“내일부터 끼고 다닐게요. 미안요.”“난 죽을 때까지 안 뺄 거니까. 협조하시죠, 권희원 씨.”“참나, 씻을 땐 빼야죠. 평생 안 뺀다는 게 말이 돼요?”“빼더라도 절대 내 몸을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새겨들으시죠, 권희원 씨.”“아오…….”희원은 어서 대리기사를 부르라며 손짓했다.
이제 난 갈 때가 되었단 말이오! 꾸물대지 말라니까?
“그럼 일단 전화를…….”지환은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옘병, 왜 이렇게 아쉽냐.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을 만큼 아쉽지만 꺼지라니 꺼져야 한다.
……하리를 다시 불러와야겠다.
“여보세요, 대리기사님 좀 부르려고 합니다만. 여기가 어디냐면…….”지환은 연결된 콜센터와 통화를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 자연스럽게 시선을 뒤로 돌렸다.
“어, 잠깐만!”로비 중앙 계단. 손잡이에 올라탄 아이가 미끄러지며 내려오다가 휘청, 계단 방향으로 몸이 기울었다.
괴성을 지르듯 콜센터 직원에게 ‘잠깐만!’을 외친 지환은 빛의 속도로 튕겨 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희원이 뒤를 돌았을 땐, 이미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아이를 받쳤다.
“꺄악! 서지환 씨!”계단을 두두두두두두두 굴러 내려온다.
아이의 머리와 등을 꼭 감싼 채 두두두두두…… 바닥까지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희원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휴대폰은 액정이 깨진 채로 나뒹굴었다.
“서지환 씨! 서지환 씨!”잔뜩 웅크렸던 아이가 품에서 꼼지락거린다.
지환은 눈을 뜨며 아이가 괜찮은지 먼저 살폈다.
“괜찮아?”2층에서 잠시 통화 중이던 아이 엄마는 로비의 소란스러움에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기함했다.
“세상에! 영준아! 영준아아!”지환은 아직 품에 있는 아이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놀란 아이는 벌게진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계단 쪽으로 다시 달려간다.
“영준이 너! 거기 그대로 있어!”엄마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희원은 지환을 근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서지환 씨, 괜찮아요?”아이가 정말 무사한 건가, 지환은 고개를 약간 들어 앞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껌뻑껌뻑하는 눈으로 천장을 주시하더니, 피식 웃더라.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피식피식거린다.
희원은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요? 미친 건 아니죠? 머리 다친 거 아냐?”“아아, 괜찮아. 뒤통수가 좀 욱신거리기는 하는데.”“아후…… 놀래라. 머리 안 다쳤으면 됐어요. 어서 일어나요. 일으켜줄게요.”“잠깐만. 머리는 괜찮은데 그것보다.”지환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천장만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모르게 그의 몸짓은 불편해 보였다.
아이의 엄마와 호텔 직원들은 로비에 뻗어 있는 그에게 달려왔다.
그 부산한 상황 속에서, 그는 확신했는지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팔 부러진 것 같다.”희원은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