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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진심은 어때 (49/98)

49. 진심은 어때

“오른손 다치지 않은 게 어딘가요. 그냥 그렇게 생각해요.”“위로되는 말이긴 하네. 양쪽 다 부러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어.”호텔 측은 신속하게 구급차를 불렀고 그는 응급실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희원이 지환을 다시 만났을 땐, 그는 단단한 석고 붕대를 감은 뒤였다. 

“아프죠. 되게 아프겠다.”희원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지환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괜찮아. 참을 정도는 돼. 아이는?”“아이 엄마랑 돌려보냈어요. 무슨 일 생기면 연락 달라고 명함 주고 가셨어요.”“잘했어. 애도 많이 놀랐을 텐데.” 한사코 자리를 지키겠다던 아이 엄마를 돌려보낸 희원은 근심스러운 눈길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깁스를 한 채로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왜 이렇게 측은해 보이는지.

“우리도 가요, 이제.”“그럼 호텔로 다시 가야 하나, 차 가져가야지.”“차는 내일 찾고 택시 타고 가요. 호텔 측에 말해놨어요.”희원은 일어서라며 지환을 부축했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부축을 하는 모습이 귀여워 지환은 피식 웃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어? 진짜?”“혼자 있으면 불편할 거 아냐, 그러니까 조심을 좀 했어야죠.”희원이 퉁퉁 부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지환은 눈썹을 추켜 올렸다. 

팔을 내어주고, 그녀의 집을 얻었다. 

오오…… 팔 따위…… 부러질 만한데…….

“아니, 나는 그냥 질척거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혼자 가도 돼…….”“나 두 번은 말 안 해요. 서지환 씨 집으로 갈 거예요?”“택시 잡자. 빨리 가야지, 피곤하다며.”지환은 빠른 걸음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이것저것 짐을 들고 있던 희원은 그의 속도에 탄식을 흘렸다. 

최소 몇 주는 저러고 다녀야 할 텐데. 불편해서 어쩌려고…….

아이 엄마가 이미 병원비를 지불하고 떠난 까닭에 두 사람은 별다른 절차 없이 병원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탔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 앞 편의점을 들러서 이것저것 좀 사야겠어요. 먼저 들어가요.”“같이 가. 말했지만 다리를 다친 건 아니라서.”“그래요, 그럼.”물론 함께.

이튿날 아침.

일전에 그녀가 하리 때문에 마련해두었던 간이 침실에서 눈을 뜬 지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팔 하나가 묶였을 뿐인데,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씻고 나온 지환은 그대로 옷 방에 들어섰다. 

“뭐야, 빨래하고 잤나?”깨끗하게 다려놓은 와이셔츠, 편의점에서 구매해 세탁까지 끝내놓은 속옷과 양말. 

아마 희원은 어제 늦게까지 빨래를 하고 잔 모양이다. 

공연한 미안함에 지환은 가만히 셔츠를 바라보다가 집어 들었다. 

“일어났네요?”“어, 깼어?”그녀가 눈을 비비며 옷 방으로 찾아온다. 

지환은 그녀의 단잠을 깨운 것만 같아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자도 되는데. 나 때문에 깬 모양이네.”“화장실에서 막 우당탕쿵쾅쾅 하던데. 난 또 큰일 난 줄 알았잖아요.”“아아, 씻다가 샴푸통을 떨어트려서.”그 샴푸통으로…… 발등을 찍을 뻔했지…….

지환은 남은 말을 삼키며 셔츠를 집었다. 

“서지환 씨, 옷을 먼저 벗어야 셔츠를 입을 수 있지 않을까?”“그렇지. 똑똑하네.”지환은 다시 셔츠를 내렸다. 일단 입고 있는 잠옷부터 벗어야 하는데, 순서가 엉망진창이다. 

그는 잠옷 단추를 끌렀다. 벗으려는데 영 마음 같지 않다. 

“내가 해줄게요.”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원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팔을 쉽게 뺄 수 있도록 도와주며, 희원은 속으로 거듭 주문을 외웠다. 

지금 이 사람은 환자다. 아픈 사람이다. 

아픈 사람. 환자. 환자.

……잠옷을 벗은 그의 상체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환자다. 아픈 사람이다. 

측은지심, 측은지심.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 

차마 남편의 상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희원은 재빠르게 셔츠를 들었고 입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팔을 끼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간격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헙. 희원의 시선은 자꾸만 발 아래로 내려간다. 

환자. 환자. 아픈 사람. 아픈 사람.

“거꾸로 입힌 것 같은데.”“아! 죄송! 죄송해요!”“죄송할 것까지야.”희원은 다시 다급하게 옷을 벗겼다. 으아, 좀처럼 침착해지지 않는다. 

숨을 멈추듯이 참으며 희원은 지환에게 다시 옷을 입혔다. 

팔을 끼우는데 깁스 한 쪽이 퉁퉁해서 잘 들어가지 않는다. 

“미안요. 불편해요?”“……전혀 문제없습니다.”억지로 팔을 끼운 희원은 그의 셔츠 단추를 잠그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희원은 마치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표정을 수습했다. 

이 순간, 나는 나이팅게일이다. 

……단추를 여미려다 보니 그의 살갗에 자꾸만 손끝이 닿는다.

“으아! 죄송해요! 죄송! 고의는 아니에요!”“섭섭하네. 고의면 좋겠는데.”미안하다는 말도 아닌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희원은 잔뜩 긴장한 채로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단추를 하나하나 여밀 때마다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어찌어찌 단추를 모두 여며 그의 살갗을 덮고 나서야 희원은 밀린 숨을 불어 내쉬었다. 

차마 그를 올려다볼 용기는 없다. 

“됐죠?”“선심 쓰는 김에 타이도 좀.”“아, 남자 넥타이 매는 법은 모르는데.”“내가 알려줄게.”희원은 그의 말을 따라 타이를 들었다. 

목덜미를 둘러 타이를 매려니 어쩔 수 없이 그의 얼굴을 올려보게 되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은 다정하게 변했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알려줘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교차해서 한 바퀴 두르고.”“이렇게?”“그렇지.”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쉬지근했나. 희원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설프지만 완성이다. 

“좀 모양이 이상하긴 하지만 출근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도착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요.”“괜찮은데 왜. 잘했네.”희원은 애먼 곳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어쩐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점심쯤에 서지환 씨 오피스텔에 잠깐 들를까 해요. 필요한 거 내가 대충 옮겨둘게요.”“내가 해도 되는데.”“합리적으로 움직이죠. 혼자 해도 되는 일에 둘 다 에너지 쏟지 말자고요.”그는 무엇이건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홀로 계획표를 세웠는지 그녀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분주히 일과를 읊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다가.

그는 툭, 하고 말을 뱉어냈다. 

……그대가 어떤 날에 내게 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늦어서, 미안.”“아? 늦었어? 지금 출근해도 늦은 거예요? 아아, 내가 지금 말이 너무 많았죠. 미안. 아침은 못 먹고 가겠네.”들끓은 조급함에 그대 걸음을 재촉하지는 않으려고 해.

이렇게 그대를 기다리는 순간도, 나쁘지 않으니까. 

늦된 깨달음만큼이나, 지금이 소중하니까. 

“당신 때문이 아니고. 내가 멍청해서 늦었네, 이렇게.”“기다려봐요. 그렇게 늦진 않은 것 같은데. 아침은 샌드위치 사다놓은 걸로 대신해요. 가방에 넣어줄 테…….”희원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말과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의미심장해, 생각을 돌려보게 했다. 

그녀가 사뭇 긴장한 표정을 짓자 지환은 웃었다. 

“바지는 어떻게…….”“그, 그건 알아서 해요! 그냥 그대로 출근하든지!”희원은 화들짝 놀란 채 빠르게 뒤돌아 방을 벗어났다. 

“치사하네! 도와주는 김에 끝까지 좀 도와주지!”지환이 목청을 높여도 돌아오는 대꾸가 없다. 

그는 불편함 움직임을 이어가며 바지를 갈아입었다. 

“아, 벨트 하는 게 제일 힘드네. 이거 만만치 않은데.”……그대, 언제고 천천히 와주기를.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

“서검 기사 났네? 아이를 구한 현직 검사. 현대판 히어로.”오…… 정윤이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야유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지환은 질색했다. 

어제 사건으로 기사를 좀 쓰고 싶다며 사무실로 전화가 오더라.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걸어왔는지 모르겠다만 정중히 거절했는데.

기사가 올라오고 말았다. 

“오…… 히어로…… 오…… 현직 검사 히어로…….”“미치겠다, 히어로는 무슨. 히어로 팔 부러지는 거 봤어?”아파 죽겠고만. 지환은 혀를 끌끌 차며 불편하게 움직였다. 

정윤은 그 모습이 웃기다는 듯 깔깔 웃으며 휴대폰을 내렸다. 

“그 정도로 팔 부러지면 골다공증 아니냐? 관리해라, 서검. 뼈는 튼튼해야지.”“계단 모서리에 팔을 찧었는데 그 위로 애가 무게를 실으며 떨어졌어. 설마 했는데 부러졌네.”“당분간 고생 좀 하겠네.”“어쩔 수 있나, 할 수 없지.”덤덤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지환을 향해 정윤은 다시금 야유를 보냈다. 

의로운 일을 했다는 덤덤함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지환의 표정은 사뭇 즐거워 보였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지환을 텁텁하게 바라보다가 정윤은 업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금괴 밀수범들은 여전히 공항을 빠져나가다가 단속에 걸렸다. 

지속적으로 단속에 걸려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수범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건, 그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득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민규, 아무래도 꼬리 밟기가 어려운 모양이야.”경찰 협조로 용의 선상에 올려놓은 차민규의 뒤를 밟은 지 꽤 되었지만 이렇다 할 꼬리를 밟지 못한 상황.

“사람이 실없어 보여도 교묘하게 잘 빠져나가. 백인호 의원하고는 접촉도 하지 않고, 주로 유흥가만 전전하고.”하필 성은 왜 또 차씨야. 열받게.

정윤은 자신과 같은 성씨에 발끈하며 중얼거렸다. 

중간책인 차민규를 잡아야 백인호 의원을 잡을 수 있다. 

지환은 포기는 이르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백인호가 단속하고 있겠지. 아마 차민규는 백인호의 득과 실을 전부 쥐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정 안 되면 이 몸이 직접 나서보는 수밖에 없겠어.”“네가? 어떻게?”지환이 한쪽 팔을 움직이며 서류를 만지자 정윤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기다려도 말이 없기에 힐끔, 고개를 들어 정윤을 바라본 지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가. 알겠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가.”“왜?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몰라. 모르겠는데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나가.”“쳇. 눈치 하난 드럽게 빨라요, 하여튼.”정윤은 배시시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지개를 켜듯 쭉 팔을 하늘 위로 뻗었던 그녀는 이만 나가보겠노라 말했다.

“그럼 갈게. 아빠가 선보래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너의 불행을 보고 나니 행복해졌어.”“……선보라셔? 대표님이?”“그러게나 말이다. 선보러 다니는 거,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내 일이 되네.”에효, 간다. 정윤은 손을 팔랑팔랑 저으며 퇴장했다. 

정윤이 사라지고 난 자리. 지환은 텁텁한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무엇 하나 평탄한 것이 없던 정윤의 결혼은, 모두의 예상대로 빠르게 끝이 났다. 

그 시작과 과정, 결말까지 모두 보아온 지환은 본격적으로 선 자리에 내몰리게 된 정윤의 현재가 다소 안타깝기도 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걱정하냐.”그러다가, 누굴 걱정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닫고는 다시 서류더미를 뒤적였다. 

제길 할 일은 태산인데 팔이 불편해서 못 살겠다. 

지환은 눈꼬리를 잔뜩 올린 채 불편한 움직임을 이어갔다. 

……부러진 팔 덕분에 그녀와의 시간을 획득했으니, 원망만 늘어놓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여보세요? 저예요, 희원이.”ㅡ알지. 점심은 먹었습니까? 부인?“네네. 먹었습니다.”희원은 유쾌한 컨디션으로 돌아온 지환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운전 중인 그녀는 지금 지환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이다. 

“연습 중간에 잠깐 나왔어요. 서지환 씨 오피스텔로 가는 길이고.”ㅡ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청소를 깨끗하게 해두는 건데.“괜찮아요. 야한 잡지 몇 권 나와도 모르는 척해줄게요.”ㅡ발견하면 봐도 돼. 내 취향 정도 알아두는 거, 대환영이니까.“아오, 진짜.”희원은 블루투스로 연결된 그와 통화를 하다가 실제로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큰 소리로 웃는다. 왠지 모르게 편안해진다. 

신호에 멈춘 희원은 룸미러를 통해 집에서 가져온 텅 빈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저곳에 지환의 짐을 챙겨올 생각이다. 

“당장 입을 옷만 좀 정리해서 가져올게요. 오피스텔 비밀번호 뭐예요?”ㅡ아, 비밀번호.희원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커피를 들었다. 

ㅡ당신 생일.그러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그의 말이 이어진다. 

ㅡ설마, 본인 생일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어쩐지 가슴이 콩닥거려 희원은 말꼬리를 흐리며 딴청을 피웠다. 

대체 언제부터 내 생일을 비밀번호로 해둔 거예요?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ㅡ나 회의 있어. 운전 조심히 하고, 잘 다녀와.“아…… 네. 아! 이따가 몇 시에 끝나요? 셔틀 갈게요.”ㅡ셔틀?신호가 바뀌어 그녀는 액셀을 밟았다. 

“팔도 불편한데, 끝나는 시간 비슷하면 맞춰서 들를게요. 같이 가요.”ㅡ이거 감동인데. 한쪽 팔마저 부러트려야 하나. “그럼 병원에 입원시킬 거예요. 마음대로 하시죠.”ㅡ당신 끝나면 연락 줘. 비슷하게 끝낼 테니까.“네. 이따 봐요.”희원은 회의가 있다는 지환과 가볍게 전화를 끊었다. 그의 오피스텔과 가까워지는 길.

“아…… 설레네. 왜 이러지?”어쩐지 뛰어오르는 심장 소리가, 전화를 끊었음에도 귓가에 울리는 듯한 그의 다정한 음성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한 따뜻한 공기.

“이런 모습이었구나, 당신은.”거침없이 다가오는 그의 변한 모습은 순간순간 적응이 되질 않아 어색하기도 했지만ㅡ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렇게 그가 전력을 다하여 제게 오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궁금하고, 여전히 묻지 못하는 한마디가 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과거와 싸워 이겼나요?

“그건 또 별개의 문제, 아닌가…… 모르겠다…….”쉽게 물을 수 없는 질문의 대한 궁금증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가 내게 마음을 열었으니 과거와 싸워 이겼을 거라는 확신을 서지 않았다. 

그건 그것과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고ㅡ

“가만있어 보자…… 주차를…….”그리 쉽지 않은 문제라는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지환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희원은 알려준 대로 자신의 생일을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사는 살림이 그러하듯 별거 없다. 

그녀는 곧장 그의 옷방으로 들어가 여벌의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접어 넣기 힘든 옷은 옷걸이에 걸어 그 상태 그대로 차에 실을 생각이다. 

“옷은 이만하면 될 것 같고.”흠. 이번엔 그가 챙겨 바르는 스킨로션을 챙기려고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바꾼다더니, 아직 바꾸지 않은 모양인 듯 다른 종류의 침대가 있다. 

희원은 침대에 슬그머니 걸터앉았다. 

여기서 혼자 잠들고, 일어나고, 그랬겠네요. 서지환 씨.

……기분이 이상하다. 희원은 공연히 침대 매트리스를 툭툭 치다가, 베개도 정리하고.

스킨과 로션을 챙긴 뒤, 향수병을 들었다.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향을 맡으니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그의 향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맡고 있다 보면 자꾸만 눈을 감게 만드는, 그의 향기.

“이것도 챙겨가야지.”희원은 향수도 챙겼다. 

빠트린 게 없을까 주변을 돌아보던 희원은 전화가 걸려오는 소리에 거실로 나섰다. 

휴대폰을 확인한 희원은 주혁의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세요?”ㅡ식사는 했습니까?“물론이죠. 대표님은요?”둥근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떡하니 걸려 있는 벽걸이 TV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집에 TV가 없어? 아오.

ㅡ연습실에 없던데, 어디에 있습니까?“잠깐 나왔어요. 볼일이 있어서.”차마 남편의 집에 와서 짐을 챙겨간다는 말은 하지 못해 그녀는 얼버무렸다. 

뭐, 아무래도 좋다는 듯 주혁은 언제 돌아오냐고 물었다. 

“곧 갈 거예요. 오후에 단체 리허설이 있어서.”ㅡ잘됐네요. 저녁 같이하죠. 시간 괜찮습니까?응? 저녁?

희원은 버릇처럼 시계를 힐끔 보았다. 

이미 정해놓은 약속이 있었으므로, 고민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선약이 있거든요.”ㅡ아하, 선약.목소리가 약간 달라지는 것이, 당황했다는 것 같다.

“끝나고 남편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저녁은 어려울 것 같아요.”ㅡ음. 그렇군요.“그런데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ㅡ아…… 일이 있다면 약속은 취소가 가능한 겁니까?……응? 희원은 별 뜻 없이 물었는데 진지하게 되물어오는 주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혁은 난처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ㅡ실은 권희원 씨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워낙 시간 내기 힘든 사람이라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네? 소개요?”ㅡ브릭트먼 팩 감독이 지금 한국에 왔습니다. 나도 지금 막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됐죠.“네에? 브릭트먼 팩…….”희원은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브, 브릭트먼 팩 감독…… 브릭트먼 팩 감독님이요?!”브릭트먼 팩 감독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대한 아르헤나’를 이끈.

현재는 주혁이 기획하는 모든 공연을 지휘하는.

“아…… 어떻게 한국에…….”ㅡ뭐, 그는 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려 하니까.“와…… 맙소사.”살아생전 데니스 한을 보기도 힘든데, 브릭트먼 팩 감독과의 만남이라니.

희원은 가슴이 쿵쾅거려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주혁은 마치 로또와도 같은 기회를, 당신에게 주겠노라 말했다. 

ㅡ갑작스럽긴 하지만 브릭트먼 감독을 독대할 기회란 흔치 않을 겁니다. 그 누구라도.허세라고 넘기기엔 너무나도 사실이다. 

기회.

누구에게나 함부로 주어지지 않을, 기회.

ㅡ그 기회를 지금 당신에게 주고 싶은데. 어떻습니까?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니 작은 티테이블 위, 웨딩 촬영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쇼윈도임을 누구도 알지 못할, 살가운 웃음을 서로 나누고 있다. 

ㅡ어쩌면 오늘 당신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어요. 희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린 어쩜, 저렇게도 천진하게 웃었을까. 마음 한 조각도 없이. 

ㅡ지금이 기회입니다. 미시즈 권. 아니,궁금하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ㅡ무용수 권희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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