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모든 순간은 결국 마지막
곁에 지환이 누워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희원은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눈꺼풀에 반사되는 빛을 느끼며 아침이 왔음을 깨달은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아아, 이 방에 그가 있다.
맞다. 우리 같이 잠들었지.
희원은 지환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누우며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좀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가 힘들어, 그녀는 한참이나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눈을 뜨면, 그가 있을 것이다.
내 곁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든, 그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사이로 그의 모습이 맺힌다.
희원은 완전히 눈을 뜨고는 서너 초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이나 한 듯,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어둠에 잠겼던 시야가 환해지며 온통 그의 모습으로 주변이 꽉 차듯 보이자 희원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냐고.
왜 잠든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냐고.
그런 호들갑은 나오지 않았다.
“부인, 좋은 아침.”“응. 좋은 아침.”그녀는 살갑게 대꾸했다.
닫힌 창은 불어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ㅡ
“우리 이러고 5분만 더 누워 있을까?”“좋을 대로 해요.”함께 덮은 이불 속은 따뜻했다.
살결이 닿지 않아도, 마치 닿은 것처럼 여겨지는 눈 맞춤을 이어가다 보니 매일 이런 풍경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덜 깬, 심신이 따스한, 그의 모습에 취한 희원은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왔어.
어제ㅡ 그 어둠 속에서ㅡ
그가 남긴 말은 그녀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준비됐으면, 당신도 와.
어두운 가슴에 별이 된 듯 반짝였고, 근심이 고여 있던 자리를 밝게 비추었다.
많은 것들은 녹았고, 사라졌다. 다시 눈뜬 이 아침의 풍경이 다르게 보일 정도로.
“무슨 생각 해?”그녀가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으니 그도 마음 놓고 그녀를 응시했다.
눈빛엔 멍한 기운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1분 1초, 지나가는 모든 시간 속 그대가 궁금하다.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 알고 싶어졌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어요.”“예를 들면.”“아침은 뭘 해서 먹을까…….”……그녀의 대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하고 한 침대에 누워서, 아침밥 타령을 하고 있는 그녀의 대꾸는 허를 찌르듯 맥을 풀리게 했다.
“미안해요. 내 안에 로맨틱 유전자가 생성되지 않아서. 없어요, 그런 거.”“왜. 충분히 로맨틱했는데.”“당신 생각, 정도의 대답이 나와줘야 했던 상황인 건 나도 알겠는데 인간은 솔직해야 하니까.”“출근 전 남편의 아침밥을 걱정하는 와이프보다 더 로맨틱한 감동은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하니까.”“전부터 느낀 건데요. 서지환 씨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아.”“이게 다 정신건강이 좋은 이유입니다.”지환은 상체를 일으키며 아직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녀 방향으로 허리를 내렸다.
어어어, 희원은 갑자기 지환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두 눈을 꽉 감았다.
뭐, 뭐야. 설마 이 아침부터 뭐 하자는 거야?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뽀뽀! 뽀뽀를 하자는 건가 봐!
하지만 지환이 가까워졌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후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질 않는다.
희원은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으아,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다.
그는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허. 희원은 숨을 짧게 토해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아아, 문득 하리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각나서.”그녀 얼굴이 금세 붉어진다.
“당신 얼굴에 그 정도의 지분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권희원의 이마 정도는 점유할 수 있지 않나?”그는 빙그레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아침 안 먹어도 돼. 더 자.”훌쩍 방을 나선다. 희원은 잔뜩 붉어진 얼굴만 하고 있다가 그가 방을 나서자 긴 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의 온기가 여전한 것 같아 가만히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던 희원은 중얼거렸다.
“서지환 씨, 하리 선생님께 가르침을 잘못 전수받았네.”난 내 이마의 지분을 내어줄 생각이 없다고요. 서지환 씨.
“하리는 이마에 뽀뽀, 안 한다고요.”입술이면 몰라도.
“으으, 추워.”희원은 냉동고 같은 자가용에 올라타 시동을 켰다.
지환은 이미 출근을 했고, 그녀는 직장인보다 늦은 출근을 시작하고 있다.
집에서 미리 내려온 커피를 곁에 두고 그녀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을 출근 시간의 도로도 제법 한적해진 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했다.
여유가 있었고, 숨이 달가웠다.
“오랜만에 라디오나 들어볼까?”요즘 질리게 들었던 노래 말고, 오늘은 사람 소리가 듣고 싶다.
희원은 손을 움직여 라디오 채널을 찾았다. 적당한 채널을 맞추며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뭔가 추억에 잠기게 하는 날씨, 여러분은 이런 날씨에 무얼 하고 계시나요?]“이분 목소리도 오랜만이네.”보통 이 시간이 그러하듯 사연을 읽는 디제이의 음성이 활기차다.
희원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을 표시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고 계시나요? 아니면 향긋한 커피와 함께하고 계시나요?]힐끗, 희원은 시선을 돌리며 곁에 놓아두었던 커피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커피와 함께하고 있는데.”[어떤 것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날, 사연 하나 읽어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서른일곱의 남성입니다.]그녀는 보통의 날보다 조금 더 속도를 줄여 운전을 했다.
[삼 년 전 제게는 무척 슬픈 일이 있었어요. 제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하여 목숨이 위태로웠거든요. 몇 번이나 대수술을 해야 했고, 아내는 힘들어했습니다.]간간이 신호에 걸렸고, 멈췄다.
[하지만 저는 죽지 않고 버텨준 제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죠. 사고를 당하던 그날 아침에, 사실 아내와 다퉜거든요. 아내에게 당신을 만날 걸 후회한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지고 출근을 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제 탓인 것만 같았습니다.]……희원은 사연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마 그날, 아내가 잘못되었다면 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말들이 아내와 나눈 마지막 말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울컥합니다.]마지막, 말.
생각해본 적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마지막, 말.
[어찌 되었든 아내는 사고 이후 재활에 성공하여 지금은 조금 불편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까지 되었습니다. 지금은 매일매일 아내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고 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부부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건 예고 없이 온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그래, 누구나 그러겠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고마운 말들을 미루지 않았을 텐데.
순간의 감정이 만들어낸 진심 아닌 말들로, 상처 주지는 않았을 텐데.
똑바로 전하지 못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내내 후회하며 지내는, 그런 날은 오지 않았을 텐데.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명심하세요. 모든 말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좋은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오늘…… 오늘…….”희원은 중얼거리며 뜻이 담긴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연이네요. 아내분께서 건강을 되찾으셨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나는,
타인이 겪은 죽음과도 같은 경험으로 나의 오늘을 살린다.
[그럼 저는 노래 하나 들려드리고 다시 돌아올게요.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전해보는 건 어떨까 해요.]다시 신호에 멈춰 선 희원은 가지런히 달려오는 반대편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지환을 떠올렸다.
그녀는 블루투스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장은 공연히 불편하게 뛰어 밭은 숨을 뱉게 했다.
ㅡ여보세요.그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희원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안도했다.
“나예요. 출근 잘했나 해서.”ㅡ그럼, 잘했지. 당신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난 출근 중. 운전하다가, 그냥요.”ㅡ아아, 그래? 난 회의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야.사모님 안녕하세요ㅡ! 최 계장입니다!
최금호 계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장님께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감사합니다, 라고 전해줘요.”ㅡ알았어. 그런데 진짜 왜 전화했어? 혹시, 사고 났나?“아니, 그런 건 아니구.”희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 딱히 전화한 이유도 없고, 할 말도 없는 상황.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의 의아함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고민되었다.
“나 뭐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ㅡ뭔데?회의 준비를 하는지 그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옆에 사람들도 있는데. 회의 준비하느라 정신도 없을 텐데.
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내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있다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ㅡ무슨 말이야, 떠나? 하물며 진심을 전하는 법도 모르는 남자가.
ㅡ오늘이 마지막이야 우리?!“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만약에!ㅡ아, 무슨 만약인데 그렇게 살벌하고 무서워. 무서워서 어디 답하겠나?“그렇죠? 답 못 하겠지? 알았어, 안 해도 돼요.”희원은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대화를 접었다.
ㅡ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건데. 그것도 출근하다 말고.“아니 그냥. 신경 쓰지 마요, 별로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었으니까.”이게 다 라디오 사연 때문이다. 사람을 쓸데없이 감성적으로 만들었어.
우씨. 희원은 감성적으로 변한 자신과는 달리 메마른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지환의 입장을 떠올렸다.
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황당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끊어요, 회의 들어가야 한다며. 회의 잘하고…….”ㅡ만약에 당신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말이라면 종류가 많지는 않겠는데.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ㅡ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런 말을 해야겠어.마른침을 삼켰다.
서류를 툭툭 치는 소리가 난다.
그가 다음 말을 잇기 전, 아주 잠깐의 공백이었지만 기다리는 동안 무척 길게 느껴졌다.
ㅡ사랑해.“……뭐라고요?”ㅡ사랑한다고.희원은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그의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ㅡ나 이제 정말 회의 준비해야 해서.“아…… 아아! 응! 응응!”ㅡ답에 이상 없으면 이따가 다시 통화해.“네! 네네 알았어요! 끄, 끊어!”ㅡ끝까지 운전 조심하고.끊자. 지환은 전화를 끊었다.
종료되는 소리를 들으며 희원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사랑해
차 안을 가득 울린 그의 답은 또다시 그녀 가슴에 살아남는다.
사랑한다고
심장 부근을 점령한 말은 생각과 시간을 지배할 절대 권력을 쥐었다.
“아, 아니, 나는 또 그런 말을 원한 건 아닌데…….”예상도 못 한 말에 심장 폭행당했다는 듯 희원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불어 내쉬었다.
진정을 하려고 커피를 마셔보려는데, 손이 떨려 보온병을 들 수가 없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처럼 손은 바들바들 떨려오고ㅡ
“아…… 미치겠다…… 으아…… 미치겠어…….”시야는 좁아져 운전대에 상체가 바짝 붙어버렸다.
그녀는 다음 신호에 걸려 멈춰 설 때까지 줄곧 그 상태였다.
더운 기운이 와락 몰려와, 그녀는 히터를 꺼버리고 말았다.
“왜 그러고 서 계십니까?”회의 준비 안 해요?
희원과 통화를 마친 지환이 파일을 이것저것 챙기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최 계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
“계장님?”“검사님, 괜찮으십니까?”“네? 저 말입니까? 네. 괜찮은데.”“혹시 팔 다치셨을 때 머리도 조금…… 손상된 것이 아닌가…… 하는…….”“멀쩡합니다. 사물 인식에 문제없거든요.”지환은 회의에 필요한 USB를 챙기고, 결재를 받아야 하는 순서대로 서류를 정리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최 계장은 꽝꽝 언 떡을 문 것처럼 얼얼한 상태다.
“제 눈엔 지금 계장님이 더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아, 아닙니다. 너무 놀라서. 정신 차리겠습니다.”“……아.”난 또 뭐라고. 지환은 그제야 멋쩍게 웃었다.
최 계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도리질을 쳤다.
이제 살펴보니, 최 계장 뒤에 서 있는 사무관들의 넋 빠진 표정도 만만찮다.
“제가 표현에 인색에서 와이프가 고생을 좀 하더군요. 고쳐보려고 합니다.”“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검사님은 표현을 잘 안 하시니까요.”“계장님, 제가 그렇게 표현을 잘 안 합니까?”“아니,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는 않으시죠. 매사 좋다고만 하시니 사실 그 내면은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더 노력해야겠네요.”지환은 최 계장의 솔직한 답변에 수긍하며 허리를 폈다.
그래, 뭐든 애매모호하게 긍정하며 좋다고만 할 일도, 싫은 것을 참아 누르며 감출 필요도 없는 일이다.
솔직하게.
매사에, 솔직하게.
이제 회의장으로 떠날 시간이다.
“계장님, 이발하셨네요?”“아? 예. 엊그제 했습니다만.”“저번 스타일이 훨씬 좋습니다.”“……예.”“그리고 계장님, 파란색 안 어울려요.”“……예.”지환은 그럼 이만 떠나자는 눈짓을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어이, 서검! 서검! 같이 가!”회의장으로 향하는 정윤이 그를 부른다. 지환은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너 향수 뿌렸냐?”“어? 어어어! 뿌렸지! 어때? 너무나도 시원하고 상쾌한, 그런 향 아니야? 나와 잘 어울리지?”“그래, 잘 어울리네. 송진 냄새 같달까.”“이게 진짜! 우씨!”솔직해지는 법.
……연습이 필요한 때였다.
서울세계무용축제를 위해 각국에서 초대된 유명 무용수들이 하나둘 입국하기 시작했다.
각자 주최 측에 제출해야 하는 공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스케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총 열흘간의 일정이었고, 희원은 가장 첫날 제작을 하게 되었다.
“권희원 씨, 컨디션은 어떻습니까?”“어, 대표님!”그녀가 간단하게 몸을 풀며 차례를 기다리는데 주혁이 다가왔다.
희원의 곁에 서 있는 무용수와 간단하게 눈인사를 주고받더니, 바로 희원에게 시선을 돌리더라.
“일전엔 정말 죄송했어요. 남편에게 일이 있어서 제가 꼭 필요했던지라.”“죄송하다니요. 무리하게 부탁한 건 나였습니다. 사과는 오히려 내 쪽에서…….”“그럼 퉁 치죠. 대표님도 사과하지 않는 걸로.”……퉁? 주혁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희원을 갸우뚱하며 바라보았다.
어쩐지 며칠 전보다 훨씬 더,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정말 아쉬웠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님인데, 이렇게 기회를 잃어버려서.”“비록 브릭트먼 팩 감독이 일정 때문에 곧 출국해야 해서 권희원 씨와 만나지 못했지만, 기회는 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마음 써주신 점, 감사합니다.”“그래요. 우선 촬영 잘하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주혁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돌아서 공연 관계자들과 함께 사라졌다.
“권희원 씨, 대표님과 친한 사이예요?”희원의 곁에 서 있던 무용수가 물어온다.
이틀 전에 입국한, 세계적인 무용수 로리스 킴이다.
미국인 남편을 만나 평범하게 살고 있던 때 주혁의 발탁으로 인생이 통째로 바뀐, 무용계의 별.
“아, 뭐, 친하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요.”희원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자 로리스 킴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권희원 씨가 브릭트먼 팩 감독님과의 만남을 거절한 모양이네요. 아, 물론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비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들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사정이 있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요.”“대표님께서 브릭트먼 팩 감독을 만나자고 제안하셨다니, 사실 좀 놀랐어요.”“저도 놀랐죠.”“권희원 씨가 거절했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고요.”로리스 킴은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어 올리고 미끈하게 허리를 꺾어 몸을 풀었다.
몸 안에 뼈가 있기는 있나 싶을 정도로 유연하게 몸을 풀던 로리스 킴은 힐끔, 희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자세를 바로 했다.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권희원 씨.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보니 놀라워서요.”“모든 무용수들은 대표님의 부름에 열 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나요?”희원은 눈가에 힘을 주며 물었다.
주혁이 대단한 인물이고, 대단한 업적을 쌓아 올린 건 부정할 수 없지만ㅡ
어쩐지 그의 주변 모두가 그를 신격화하는 것 같은 느낌에 일순 거부감이 들었다.
“나의 개별적인 상황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그 사람이 원하면, 원할 때마다, 달려가야 하는 건지 물었어요.”“그래야 하는 법은 없지만 모두는 그렇게 하고 있죠. 데니스 한은 꿈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까.”“세상에 어떤 사람이 내 꿈을 쥐고 있을 수 있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능한가요?”“보기보다 어리석군요.”로리스 킴은 말끝에 웃었다.
“권희원 씨, 세상에 무용수들은 많고 공연의 수는 적어요. 그 없고 없는 공연 중에서 데니스 한이 만드는 공연은 거의 손에 꼽히고.”희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자, 로리스 킴은 다정하게 다가와 그녀가 몸을 풀 수 있도록 팔을 잡아주었다.
데니스 한을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하는지, 아마 희원은 알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거쳐야 하고,
몇 달 전부터 그와 약속을 잡으려 노력해야 하는지.
희원이 아무렇지 않게 그와 마주하고 흘려보낸 몇 분의 시간을, 타인들은 어떻게 얻어내고 있는지.
“난 권희원 씨가 엄청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워서 하는 말이에요. 오해 말아요.”기회란, 이렇게나 조금도 공평하지 않다.
“로리스 킴, 당신은 대표님을 따라 많은 공연을 다니죠?”“물론. 대표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죠. 난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어요.”“지금의 삶은 진심으로 행복한가요?”“당연하죠. 당연히. 진정한 나를 찾았으니까.”데니스 한에게 발탁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희원은 로리스 킴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간간이 로리스 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어쩐지 모든 순간, 살아 있음에 행복해 보이는.
그런 로리스 킴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서글픔이 맴돌았다.
그녀의 가슴 한 켠엔 여전히 날아오르고 싶은 꿈이 담겨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