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눈이 오는 거리.
내 마음 너의 마음을 모두 확인하고 난 뒤에야 두 사람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풍경과 단절되고 싶지 않은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둔 그녀의 승용차를 암묵적인 합의하에 지나쳤다.
뭐가 그리 좋은지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났다.
“주먹을 쥐어봐.”“주먹? 왜?”느닷없이 그가 주먹을 쥐어보라니 희원은 손을 말아 쥐었다.
그는 마치 작은 공을 말아 쥐듯 그녀 손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었다.
“장갑 하나 사줘야겠다. 손 시리겠는데.”“주로 차를 타고 다니니까 밖에 있을 일이 없어서, 괜찮아요.”“앞으론 종종 걷자. 어디든.”바람 한 점 뚫고 들어올 것 같지 않다.
희원은 의외의 곳에서 세심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말간 미소를 지었다.
……무심하게 바라볼 땐 알 수 없었던 것들.
그는 자신의 보폭을 타인에게 맞출 줄 아는 사람이었고, 타인의 느린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목적지 없는 갈림길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도록 은연중 기다렸고, 말없이 따라왔다.
자신의 어깨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모른 척하며, 그녀의 어깨에 눈이 내려앉을세라 연신 털어냈다.
그런 사람이었다.
“어? 서검!”목적지 없는 느린 걸음을 옮기고 있던 때.
바로 앞 베이커리 집의 문이 열리며 정윤이 나왔다.
지환과 희원은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췄다.
“어? 안녕하세요!”“오랜만이에요, 희원 씨. 두 사람 어디 가는 길?”“아, 우리요? 음, 글쎄요.”빵으로 대강 저녁 식사를 때우려던 정윤은 느닷없이 마주친 지환과 희원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녀도 정윤이 짓는 미소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아아, 두 사람 아직 갈 곳 안 정했구나.”“적당히 해라, 너도. 어? 차검.”“내가 뭘?”“뭐긴, 미안한데 난 지금 너를 우리 사이에 끼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내가 있어.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뒤로 가자.”지환은 희원을 홱, 끌며 돌아섰다.
“자, 잠깐만! 잠깐만 서검!”제길, 길이 미끄러워 뛸 수도 없다.
뭐, 뛰어봐야 차검 손바닥 안이겠지만.
정윤은 종종종종 걸어와 다시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았다.
두 팔을 널찍하게 벌리고 서더니, 푼수같이 웃는다.
……정말 싫다. 지환은 정윤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질색했다.
“희원 씨, 아직 저녁 안 먹었죠?”“네. 안 먹었어요.”“내 와이프의 식사 여부를 니가 왜 궁금해해. 대체 왜.”“아아, 희원 씨 아직 식전이구나. 나도 식전인데. 이건 마치 운명 같은데?”정윤은 지환의 괄시를 콱 씹어버리며 희원에게 살갑게 다가섰다.
저 거지 같은 서지환보단 희원을 공략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단 걸 아는 것이다.
“요 앞에 파 불고기 잘하는 집 있는데, 희원 씨 갈래요? 진짜 맛있어. 양도 많이 줘.”“진짜요? 맛있겠다.”“안 먹어. 안 먹는다고.”지환이 급하게 껴들어보지만 정윤은 지환을 아예 등으로 밀어버렸다.
“그럼 희원 씨, 안 먹겠다는 사람 버리고 우리 둘이 갈래요? 오붓하게.”오붓? 오붓?!
그 단어가 왜 그 입에서 나와?! 해도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지환은 눈꼬리를 올리며 파고들 틈을 연신 찾아댔다.
마치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윤은 지환을 기술적으로 밀어내며 희원과 분리시켰다.
“야, 지금 부부가 퇴근길에 만나서 데이트 좀 하겠다는데 너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시끄럽고 넌 이거나 받아. 너 줄게. 너 다 줄게.”정윤은 홱, 돌아보더니 방금 구매한 베이커리 봉투를 지환의 깁스한 팔 끝에 걸었다.
지환의 손가락 끝에서 빵 봉투가 대롱대롱 흔들린다.
집에 혼자 가서 이거나 먹으라는 뜻인 것 같다.
“희원 씨, 거기 사장님 엄청 잘생겼어. 서비스도 많이 줘요. 내가 단골이거든. 나랑 가면 메뉴에 없는 안주도 막 줘요.”그 불고기집……
“우와, 진짜 단골이신가 봐요.”“응. 맞아요. 난 초초 단골이거든.”내가 알려줬잖아!
아오. 지환은 희원을 꽉 붙들어 맨 채 자신과 저녁을 먹자고 꼬드겨대는 정윤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치한을 만난 것처럼 정윤이 빠르게 그 손을 붙들고 비틀어 돌린다.
날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야 인마!”깁스한 팔 때문에 균형도 못 잡고 지환이 휘청거린다.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정윤은 그런 와중에 활짝 웃었다.
외롭게 나 혼자 혼밥을 하느니 커플 지옥이라도 서슴없이 들어가겠다,
정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희원 씨. 파 불고기, 콜?”“놔! 놔 인마! 아아아아!”
“대박 푸짐하죠? 엄청 맛있지?”“네. 엄청 맛있어요, 달달하고.”“술을 절로 부르는 맛이라니까요. 여긴 정말 최고야.”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파 불고기 집에 셋이 나란히 앉아 있다.
지환은 연신 맛 평가를 하며 술을 마시는 정윤을 향해 눈꼬리를 올렸다.
인간이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껴들긴 왜 껴들어?
특급 호텔 스페셜 코스를 먹어도 시원찮은 판국에 파 불고기가 웬 말이냐?
오늘 우리 와이프가 나 받아준 날인데?
오늘 우리 1일인데?
지환은 빨리 먹고 자리를 파하자는 듯 희원의 팔을 툭툭 쳤다.
그러자 희원이 앙, 가득 문 파 불고기를 오물오물 먹으며 맛있다고 응답해준다.
“야, 빨리 가고 싶으면 너 먼저 가. 빵 봉투 챙기고, 희원 씨 두고.”“아오…….”“서지환 씨, 집에 빨리 가고 싶어요? 왜?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아니…… 없어…….”……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사정없이 눈꼬리를 끌어올리고 앉아 있지만 관심 가져주는 이 한 명도 없다.
서럽다…… 서러워…….
“자, 희원 씨. 우리 짠ㅡ”“짠ㅡ.”둘이 잔을 들자 지환은 급히 잔을 들고 희원의 잔에 가져다 댔다.
정윤은 그런 지환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서검, 아직도 삐졌냐?”“보다시피.”“어후, 삐돌이.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건데?”“영ㅡ원히.”“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서검. 정신 차리고 밥이나 먹어.”“싫어.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겸상은 더더욱 꿈도 꾸지 말고.”“그래, 그럼. 그렇게 계속 그림자처럼 있어줘. 나도 그게 편하니까.”옥신각신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희원이 웃자 지환의 눈꼬리가 이내 순하게 내려간다.
“왜 웃어?”“그냥요. 두 분 보기 좋아서.”“보, 보기 좋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내 프레임에 걸려야 할 인물은 저쪽이 아니라 당신인데.”지환이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자 희원은 적당히 음식을 들어 지환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흠. 정윤은 너 먼저 먹어라, 당신 먼저 먹어요, 하는 지환과 희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 관찰하니 두 사람, 묘하게 찰싹 달라붙어 있다.
“저기, 있잖아. 두 사람 내 앞에선 안 그래도 돼.”정윤은 홀짝 술을 삼키며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희원이 내려준 음식을 먹으며 지환이 묻자 정윤은 술잔을 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희원은 조용히 웃었고, 정윤은 다소 뱉기 힘든 말을 하는 것처럼 표정을 어둡게 했다.
“나 다 알아. 두 사람 관계. 그러니까 내 앞에선 그렇게 노력 안 해도 된다구.”“뭘 아는데?”“두 사람 쇼윈도잖아. 나 다 아는데?”“……아.”지환은 탄식처럼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러곤 정윤의 돌발 멘트에 희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지환은 빠르게 희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의외로 태평하다.
“희원 씨도 아는 얘기야. 내가 저번에 얘기했거든.”“얘기? 언제?”대체 이런 이야기를 언제 만나 언제 했다는 거지?
두 사람이?
지환이 이해를 못 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정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튼 편안하게 해, 편안하게. 서로 억지로 다정한 척하지 말고. 편안하게.”나 쿨해. 알잖아. 두 사람이 어떻건 난 관심 없어.
정윤이 읊조리듯 중얼거리자 지환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눈치가 빠르다, 관찰력이 좋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난 정윤이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는 가늠이 되질 않는다.
사무실에선 잘 숨긴다고 숨겼는데.
“뭐, 그래. 안다니 할 말은 없다.”“그래. 편안하게 있어. 그런다고 없던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 게…….
정윤은 빈 잔에 술을 따르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지환이 희원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깍지를 끼고는 흔드는 게 아닌가.
“서검 왜 이래? 미쳤어? 희원 씨 불편하게.”“우리 아까부터 계속 테이블 아래서 손잡고 있었는데.”“……왜? 혹시 너 변태야?”“와이프 손 테이블 아래로 잡으면 변태냐?”뭐…… 사실 아니라고는 말은 못 하겠는데…….
“하여튼 애쓴다, 두 사람 진짜 애써.”“우리 지금 보여주기 식 아니야, 차검.”“그럼 뭔데.”“진심인데. 이를테면 이런 거.”지환은 이번엔 희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득 찬 술잔을 들던 정윤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희원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입술을 작게 벌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신성한 파 불고기를 앞에 두고.”“이런 건 어때.”이번엔 희원의 어깨를 다정하게 붙잡더니 천천히 지 품으로 끌어당긴다.
다소 놀란 눈치지만, 거부하지 않는 희원의 모습도 충격이다.
“순서가 좀 엉망이긴 하지만 우리 이렇게 됐다. 차검.”“아…….”정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파 불고기를 먹다가, 맥주를 한잔 나눠 마시다가.
“내가 괜한 말을 해서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네…….”꿈에도 보고 싶지 않은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렇게 됐어요, 차 검사님.”“됐어요…… 말 안 해도 충분히 알 것 같으니까.”희원이 거들자 정윤은 그만 말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아, 방금 전까지 시원하던 맥주가, 드럽게 쓰게 느껴진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젠장 맞을 세상.”정윤은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서검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었는데.”“어쩌냐, 이제 내내 불행하겠다, 너.”“시끄러! 부채질하지 마! 특히 너! 특히 넌 더 안 돼!”서검을 향해 잔뜩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정윤은 희원에게 시선을 옮기며 활짝 웃었다.
아수라 백작 같다.
“뭐, 희원 씨. 심심한 위로를 보내요. 서검이랑 간간이 행복하게 지내요. 드문드문.”“네, 차 검사님.”“두 사람 잘됐으니까 내가 선물 하나 할게.”“엇, 진짜?”지환이 반기며 묻자 정윤은 저 멀리 사장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곤 우아하게 흔들었다.
“사장님! 여기 파 불고기 2인분 추가요! 여기 축하해줄 일이 있어서! 파 많이!”사실은 지가 더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지환이 잠시 자리를 비운 공간.
“아, 너무 좋다. 퇴근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거.”정윤은 우연히 만난 부부와의 시간이 즐거운지 턱을 괴며 미소를 지었다.
각자의 사연들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음식점 안.
다닥다닥 붙은 양철 테이블에 앉아 술을 따르며, 정윤은 희원에게 술을 권했다.
“희원 씨, 서검이 보기보다 무딘 면이 좀 있어요. 살면서 답답할지도 몰라.”“예를 들면요?”“희로애락 모든 면에 좀 무딘 편이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고, 이런 게 잘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공감능력 제로랄까?”“씁쓸한데요.”“…….”“얼마나 부딪쳤으면 무뎌졌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아…….”정윤은 의외의 답을 내어놓는 희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작게 벌렸다.
동료의 장점, 혹은 좋은 말을 꺼내기가 민망스러워 없는 흉이나 끄집어내려고 했는데.
돌아오는 아내의 답변이란 게 예상하지 못한, 따뜻한 말이었다.
“희원 씨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저도 종종 그런 생각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무딘 게 아니라 무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희원은 술을 홀짝 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전에 주신 충고, 감사했어요.”“내가? 희원 씨에게 충고? 어떤?”
서검 본인이 아물어야죠.
“상처는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는 거.”“……아.”
하지만 의지만으로도 힘겨울 때가 있지.
낫고 싶다고 나을 수 있는 건 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쩌죠, 희원 씨. 나 그날 집에 돌아가면서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후회했는데.”“네? 왜요?”“희원 씨라면 낫게 해줄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생각하다 보니까.”정윤은 후회했다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모두는 다른 거니까. 전부 다르게 사는 건데 너무 내 입장에서 말했지 뭐예요.”“누구나. 누구나 내 입장에서 설명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걸 원해서 질문했고요.”“그러게. 그런데 후회했어. 차라리 그냥 응원해줄걸, 하고.”……시간에 떠밀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실수투성이.
저질러 놓고 보는 후회 많은 어른 아이.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다.
“저도 매일매일 마음이 바뀌어요. 뭐가 옳은 일인지, 모르고 할 때가 더 많아요. 그냥 오늘 이끌리는 대로 다짐하고 생각하고. 철이 좀 없어요.”“다만 사는 거죠. 희원 씨도 나도, 서검도, 오늘을.”“……다만. 다만.”다만.
희원은 정윤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언젠가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과거를 담으면 후회, 미래를 짚으면 불안.
다만 오늘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차 검사님 만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언니 같아.”“언니 같아, 가 아니라 나 언닌데?”“아아, 그렇죠? 언니 맞죠.”나는 한 번도 ‘다만’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ㅡ
생각해보니 이토록 어른스럽고, 굉장히 멋진 말이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차분하게 만들어주며, 비워내게 하는.
오로지.
“언니라고 불러요. 차 검사님, 이런 호칭은 너무 매력 없어.”“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언니.”나는 다만 오늘을 산다.
다만, 그를 사랑한다.
“어후, 오늘 무슨 날이야? 사람 엄청 많네.”이슥한 시간이 되어서야 가게를 나선 세 사람은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의 행렬에 눈을 크게 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이냐 싶을 정도로, 먹자골목의 저녁 시간은 정신없었다.
“나 먼저 갈게! 두 사람 모두 안녕!”나오자마자 가겠다더니 정윤이 휙, 하고 사라진다.
인사를 나눌 경황도 없이 쿨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지환과 희원은 서로 마주 보았다.
“대리 기사님 부르려면 오늘 전쟁이겠는데.”“택시도. 눈이 많이 와서 엄청 대란이겠어요.”“천천히 기다릴까?”“좋지ㅡ.”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서두를 필요 없는 시간. 희원과 지환은 느긋한 마음으로 길가에 섰다.
눈발은 어느덧 희미해졌지만 희원은 간간이 그의 머리를 털어주었다.
짧은 머리 때문에 빨간 지환의 귀가 더욱 도드라져,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응? 뭐가?”“귀가 빨개서, 귀여운데요?”“내가 추운 게 귀여워?”“추워?”희원은 추워어? 물으며 지환의 허리로 쓱 손을 뻗었다.
나무를 감싸 안 듯 지환의 허리를 감싸 안자 지환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추워요? 난 하나도 안 추운데.”“아, 덥다. 이제.”“더워졌어? 더우면 떨어져야겠…….”그녀가 다시 손을 빼려 하자 지환은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았다.
“떨어지지 말고 이대로 있어.”그러자 그녀가 웃는다. 지환은 코트를 조금 더 넓게 벌려 그녀의 몸을 에둘렀다.
저 멀리, 한눈에 보아도 택시 승강장의 줄은 끝이 보이질 않고, 대리기사님을 부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고.
“뭔가 우리만 안전한 것 같아, 지금. 그렇지 않아요?”마치 TV 속 인파를 구경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엔 조바심이 없다.
서로에게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라지고 없어질 때까지.
이렇게 서서 기다리고 싶어졌다.
……어느 로드 숍에서 따뜻한 멜로디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나직하게 물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일까? 바람이 찬데.”“음, 조금만 더 있다가?”왜 이렇게 서 있는 건지 이유도 알 수 없는 때. 그냥 조금만 더, 서로에게 기대어 있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질 때.
헤어질 것도 아닌데. 함께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왜 이렇게 지나는 일 분 일초가 소중해지는 건지.
……풍경마저 아름다워지는 순간.
그는 시선을 조금 더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지는 까닭에 그녀도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봐요?”뜻 없이 묻자 그가 작게 웃는다.
“맞춰봐.”“…….”“내가 왜 이렇게 보고 있는지.”응? 그가 되물어오자 희원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천천히 그는 자신의 코트를 잡고 그녀의 얼굴을 덮듯이 가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지자 거리를 울리는 음악 소리만 그녀의 귓가에 고였다.
완벽한 그의 품이고, 바람은 비켜갔다.
그의 입술이 내려오니 천천히 눈이 감겼다.
희원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끝에 힘을 실었다.
찬바람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지환은 조금 더 코트를 끌어올려, 그녀와 자신의 얼굴을 모두 가렸다.
숨이 엉키고 달아 녹을 것 같은 서로의 입술이 마주 닿자ㅡ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엮고, 붙이고, 묶고 싶다.
오늘은 당신과 함께할 내일을 떠올리고, 내일엔 당신과 함께 했던 오늘을 곱씹으며.
……공간을 지배하던 소음과, 들려오던 노랫소리를 지웠다.
한동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