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모두 다른 공식으로
보장된 평화 속에 시간은 흘렀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일과에 한창이었고, 그녀는 연습에 한창이었다.
“삶은 달걀 먹고 연습한다고? 그거 가지고 밥이 돼?”ㅡ대충 먹는 거지 뭐. 동료가 달걀을 삶아왔지 뭐예요. 어차피 연습 중간엔 많이 먹을 수도 없어.“그래도 그렇게 먹으면 쓰나, 힘이 있어야 연습도 하…….”“이게 누구십니까, 서지환 검사님 아니십니까?”희원과 통화를 하며 걸어가던 지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 당신 연습 들어가.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ㅡ그래요, 수고.지환은 희원과의 통화를 종료하며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백인호 의원이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리며 지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백 의원을 응시했다.
어인 일인지, 그도 혼자였다.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오랜만입니다.”“네. 오랜만입니다.”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 쾌히 인사를 청해 온다.
그런 백 의원의 인사를 달갑지 않게 받은 지환은 묵례 끝에 돌아서려고 했다.
언제, 어느 때에 섞여본들 반가울 리 없는 관계.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이렇게 검사님을 다 뵙습니다.”“아, 네. 그럼 이만.”“언제 한번 식사 자리나 마련해달라고 제 아내한테 부탁을 했는데, 아직 아내가 검사님께 말을 못 전한 모양입니다.”……지환은 돌아서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백인호가 건네는 이야기의 맥락을 잡을 수가 없어, 잠시 눈길을 다른 곳에 주었다.
“언제 한번 사적으로 만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시간 좀 내주시죠. 격무에 바쁘시겠지만 말입니다.”“일개 검사가 의원님과 사적으로 엮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만 받겠습니다.”“이미 사적으로 충분히 엮인 걸로 압니다.”무슨, 뜻인가.
지환은 발끝이 따갑게 느껴지는 긴장감을 삼키며 백 의원을 바라보았다.
뱉는 말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백 의원의 얼굴은 만들어낸 웃음으로 가득했다.
백 의원은 손사래를 쳤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제 와이프가, 검사님 아내분의 팬이라고.”팽팽하게 당겼던 끈을 조금 놓는다.
백 의원은 조금 더 지환에게 다가갔다.
“제 아내가 요즘 한국무용에 관심이 많아졌으니 제가 모른 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해서 여러모로 공연 문화에 도움이 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굳이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아내가 오지랖이 넓어 검사님과도 연을 텄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언제 한번 부부동반 모임이라도 하시죠. 가볍게 말입니다.”“…….”지환이 침묵을 일관하자 백 의원은 짧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이렇게라도 한번 마주치길 벼르고 있었다는 듯, 그는 속내를 흘렸다.
“제 주변 탐색 열심히 하고 계신 것, 다 압니다. 오해와 의심은 정치인과 뗄 수 없는 부분이니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만, 저도 사람인지라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이해는 합니다. 검사님은 검사님의 일을 하시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뒤를 밟고 있음을 모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너무 열심히 하진 마십시오. 상실감이 클 수 있습니다.”“…….”지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일을 끝낸 그의 보좌관이 저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음을 확인한 지환은 다시 인사를 건넸다.
“피차 바쁜 것 같은데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반 모임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그럼 다음에 만날 곳은 검사님 사무실입니까?”편히 놓아주질 않는다.
지환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음성을 누르듯 낮게 답했다.
어차피 감춰봐야 서로 알고 있는 일.
“……장담은 못 하겠지만 바람은 가지고 있습니다.”“제가 뭘 잘못하길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더욱 조심하며 지내야겠는데요.”“그러셔야 할 겁니다. 더 조심. 더 더 조심.”“…….”“하늘은 넓고 가리는 손바닥은 작으니 말입니다.”지환이 대꾸하자 백 의원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방한 그의 웃음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주시했다.
호감형 정치인으로 정평이 난 백 의원이 웃고 있자, 주변인들도 빙긋 미소 지으며 흐뭇하게 시선을 주다가, 사라졌다.
“하, 검사님. 이러시면 제가 검사님 무서워서 어디 정치하겠습니까? 너무 미워 마십시오. 더 잘해보겠습니다. 제가 잘해야, 검사님들도 편안하십니다.”이만 가볼 요량인 듯, 백 의원은 보좌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보좌관의 허리가 약간 내려간다.
“뭐, 모쪼록 조만간 뵐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검사님 사무실이건.”“…….”“다른 어느 곳이건.”표정 뒤 무엇을 감춰두었는지 알 길 없는 백 의원이 돌아선다.
“검사님의 남은 검사 생활,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인사일까.
“더불어 아내분의 좋은 공연도 기대하겠습니다. 서울세계무용축제, 기대가 큽니다.”협박처럼 들려왔다.
유난히, 아주 유난히 몸이 가벼운 날이 있다.
서울세계무용축제 준비는 치밀하게, 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준비기간도 넉넉했고, 그만큼 이슈도 많았다.
연습량을 계획적으로 늘려가며 무용수들은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배고파…….”희원은 주린 배를 문지르며 다음 연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합을 맞춰야 하다 보니 대기하며 다른 무용수들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벌어졌다.
내로라하는 최고의 무용수들만 모여 있으니 묘한 경쟁의식도 생겨났다. 그만큼 치열했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 대표님께 연락이 없네.”희원은 문득 주혁을 떠올렸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 줘요.
당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실 텐데. 슬슬 연락을 드려야겠는데.”그는 예상했던 일정보다 더 오래 한국에 체류 중이었고, 떠나기 전엔 만나야 했다.
희원은 주혁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뭇거리게 되었다.
머리가 결정한 일을 마음이 시원하게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고ㅡ
마음이 이끄는 일은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랑 하나와 맞바꾸는 자신의 미래의 꿈을, 지금은 감당해도 나중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이미 결론을 지었으면서도, 혹시 후회하지는 않을까, 혹시 내내 후회하며 불행하지는 않을까.
어리석은 결정이었다며 후회하면 어떡하지? 나는 내 선택을 책임질 수 있는 걸까?
나 혹시,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이래도.
이대로?
“미쳐버리겠다. 왜 마음 하나를 못 잡고…….”터벅터벅 자신 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인적 없는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지환에겐 입도 뻥긋 못했다.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봐.
어차피 안 가기로 생각한 일, 내 안에서 스스로 정리하고 말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에효, 참, 인생의 기회란 이렇게 가혹해요. 좋을 때 오는 법이 없…….”그때였다.
[여보,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제발.]코너 뒤에서 들려오는 통화 소리에, 희원은 걸음을 멈췄다.
향하던 공간은 코너 뒤에 있지만 어쩐지 지금 그곳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곳에서 통화 중인 사람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제발 들어봐, 여보. 일단 내 얘기를 좀 듣고…….]로리스 킴이다.
희원은 목소리로 그녀임을 알아채고, 더불어 그녀는 남편과 통화 중임을 깨달았다.
슬쩍 고개를 빼고 로리스 킴을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짚은 자세로 남편과 통화 중이었다.
벽에 기댄 모습은 어쩐지 초라해 보였다.
[알잖아. 이건 내 꿈이라고. 난 이제 겨우 꿈을 이룬 사람이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통화 내용은 앞뒤를 잘라 들어도 알 것만 같았다.
인기척을 낼 수 없어 가만히 멈춘 희원은 들려오는 통화 내용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화려하고, 꿈을 이뤄 행복하다고 말하던 로리스 킴의 진짜 인생.
[여보, 난 당신 없으면 안 돼. 날 조금만 더 이해해줄 순 없는 거야?]화려하게 날아오르던 무용수 로리스 킴이 아닌, 무대 밖 혼자가 되어버린 그녀의 진짜 인생.
[여보, 전화 끊지 마, 제발, 내 얘기를 좀 들어봐, 제발. 제발…….]작은 음성으로 연거푸 한숨만 뱉어내던 그녀는 기어이 끊긴 전화를 붙들고 한참이나 숨을 죽였다.
그래. 그녀가 날아오르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행복하지 않았던 거다.
“아, 희원 씨.”마음의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는지 코너를 돌아 나오던 로리스 킴은 멍하니 서 있던 희원을 발견했다.
적잖이 놀랐는지 그녀의 눈이 커지고, 희원은 웃었다.
“미안해요. 휴게실로 들어가려다가 이렇게, 오도 가도 못 했어요.”잠시 마음을 추스르던 로리스 킴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와 남편과의 관계를 알았대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우리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거니까. 비밀만 지켜줘요.”“남편의 불행을 묵과할 만큼 로리스 킴, 당신은 정말 행복해요?”“행복해요.”완강한 대답에 희원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군요. 행복하군요.”“행복해요. 그렇게 생각해야 나는 나의 지금을 지킬 수 있으니까.”로리스 킴은 아주 작아진 모습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떨리는 어깨를 감추고 싶은지 그녀는 한 팔로 자신의 다른 팔을 붙잡았다.
더 이상의 말도, 설명도, 필요가 없어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로리스 킴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전 세계를 누비는 동안 남편은 매일 나를 기다렸어요. 이젠 지쳤대요. 나는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어요.”약간은 울컥한 마음이 드는지, 로리스 킴은 팔짱을 끼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얼마 전 뉴욕의 새로운 맨션으로 이사를 했죠. 거금을 들여 남편의 자가용도 새로 바꿔줬어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남편분이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닐 거예요. 로리스 킴.”“…….”“당신, 당신을 원하는 거지.”하…… 로리스 킴의 한숨이 낮게 퍼진다. 희원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 된 일이라고 하기엔 그저 꿈을 따른 일밖에 없는 지금.
“힘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가끔은 생각해요. 내가, 그냥 평범한 아내였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행복했겠지. 지금은 몰랐을 테니까, 그 사람과 함께, 행복했을 거예요. 충분히.”“후회해요?”“솔직하게 가끔은요. 가보지 않은 길은 미련이 남기 마련이니까요. 난 아직 남편을 사랑하거든요.”로리스 킴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을 말들과 눈길로 한참이나 로리스 킴의 어깨를 다독이던 희원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휴…… 내 속이 다 쓰리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고 온 것만 같아 심란했다.
누구라도 속 시원히 답을 내어줄 수 없는 현실임을 잘 알고 있어서, 위로조차 엉망이었음을 깨닫고는 긴 숨을 불어 내쉬었다.
“나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기다리는 입장 생각도 해야지.”희원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곤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생은 선택과 책임.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ㅡ네. 한주혁입니다.“권희원입니다. 대표님.”ㅡ네. 전화 기다렸습니다.책임을 지려 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권희원 씨.”“안녕하세요, 대표님.”먼저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주혁은 꼿꼿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희원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떤 각오에 단단히 물든 것만 같은 희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혁은 흔연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소소히 안부를 묻는 과정을 보내고,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그녀의 손끝은 자꾸만 물을 찾았다.
“괜찮아요. 편안하게.”주혁은 병원 앞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어떤 답을 가져왔는지, 즐겨보기로 한다.
“대표님의 제안을 듣고, 고민 많이 했어요.”“그래요. 많은 것이 변화할 제안이니 고민은 해야겠죠.”주혁은 서류 가방을 열고 계약서를 꺼냈다. 그녀 앞으로 밀며 읽어보라 눈짓했다.
“완벽한 조항은 아닙니다. 원치 않는 것들은 바꿀 수 있어요. 읽어보고 검토해줬으면 좋겠군요.”나눴던 이야기의 실물이 눈앞에 등장하자 희원은 재차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울대에 맺혀 있는 말들은 뒤죽박죽이고, 뱉어내는 순간까지도 어떤 말이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이 서류 안에, 나의 성공이 깃들어 있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거, 다 압니다.”주혁은 보여주었던 미소를 감췄다.
당신만큼 진지하다고, 표정을 바꿨다.
“어렵겠죠. 이런 삶의 변화는 겪어본 적 없을 테니, 기대되는 만큼 두려운 마음도 이해합니다.”그녀를 잡고 싶다.
키워낸 많은 무용수들처럼, 그녀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
오만하고 무지한 한국의 작은 무용수를, 세계적인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싶다.
“하지만 당신의 잠재된 능력,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 이런 것들을 묶어두고 살기엔 아까워요. 권희원 씨도 알 거라 생각하고.”당신이 옳았다며 변한 인생에 감동할, 무용수 권희원을 보고 싶다.
……말없이 계약서만 응시하고 있는 희원에게 말을 건네다가, 주혁은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남편 때문에 고민입니까? 그래서 쉽지 않은 겁니까?”그녀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깃든다.
주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남편이 그러던가요? 가지 말라고. 그건 욕심입니다. 누구나 자기 그릇이 있어요. 그 그릇의 크기를 억지로 줄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남편은 아직 모릅니다.”“……모른다고?”“네. 아직 말을 안 했거든요.”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부부가, 이 정도의 큰일을 상의하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남편의 의견도 필요할 텐데?”“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 인생을 거는 일이니까요.”“……이해가 되질 않는군요.”“나중에 후회한다 해도, 그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어요.”희원은 말끝에 계약서를 주혁의 방향으로 밀었다.
까칠한 종이 질감에 닿은 손끝이, 마비되듯 저리게 느껴졌다.
……내 손을, 떠난다.
“제안을 거절하려고 왔습니다.”“이봐요, 권희원 씨.”주혁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표님께서 보셨다는 제 미래, 기뻤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대표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특별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에요.”“이러지 말아요. 당장 계약하자는 건 아니니 가서 검토라도…….”“아뇨. 안 볼래요. 검토하면 계약서에 사인할 것 같아서.”희원이 웃자 주혁은 이마를 짚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무용수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당신, 세계 제일의 별이 될 수 있다는데.
“다시 생각해요. 이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제안이란 말입니다.”“전 엄한 할아버지와 함께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어요.”희원은 회상하듯 긴 시선으로 주혁을 응시했다.
……그래, 내게도 오랜 꿈이 있었다.
하나만 알고, 하나만 배우고, 하나만 바라보며 자랐으니 자연스럽게, 당연하게도.
“할아버지께선 가진 것을 지키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셨어요. 저도 은연중 그렇게 배우며 컸고요.”……처음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한국무용의 길로 들어선 나이, 세 살.
기타와 드럼 소리보다, 대취타와 가야금 소리를 더 좋아하던 소녀의 시절을 지나ㅡ
“그런 집의 문화가 싫고 답답해서 결혼을 선택했는데, 독립해서 살다 보니 저도 할아버지와 똑같이 살고 있지 뭐예요.”교복보다 한복이 편안하던 학창시절을 거치고ㅡ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순간마저도 지켜온 지금ㅡ
“가진 것을 지키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이곳이 내 자리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아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느려도 그렇게 가볼래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란 계승, 지키는 일이니까.”“변명입니다. 흔들리잖아. 날아오르고 싶잖아, 당신.”“그만큼 지키고 싶은 것도 많아서요.”결국 말을 뱉고 나니 현실이 되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래, 이 길이 옳다는 것처럼. 원했다는 것처럼.
“제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표님이 해주신 말씀, 잊지 못할 거예요.”희원은 일어섰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간 마음이 어떻게 흔들릴지 모를 일이다.
“권희원 씨, 권희원 씨.”“네?”주혁은 급한 마음에 따라 일어서며 그녀를 불렀다.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옮기려던 희원은 멈춰 서 주혁을 바라보았다.
불쾌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주혁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벽 보고 얘기하듯 답답한 모양이다.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이런 기회가 또 올 거라 생각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실수를 감당하려고…….”“대표님은 실수가 두려우신 모양이네요. 전 그렇지 않아요. 실수, 살면서 많이 했거든요.”“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건 여타의 실수와 비교도 할 수 없다고.”“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벼랑 끝에서 다음 발을 내디딘 사람뿐이에요.”“…….”“제겐 남은 길이 많아서, 넘어져도 괜찮아요.”주혁은 처음으로 할 말을 잃었다.
희원은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감사했어요. 괌에서도, 이곳에서도. 내내 성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무용수들의 꿈이 되어 주세요. 대표님.”자,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나는 나의 선택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여보세요? 어디예요?”식사 장소를 나서며 희원은 지환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이곳에 오기 전, 지환과 통화를 했었다.
ㅡ지금 앞에 와 있어. 약속 있다며, 벌써 끝났어?“그럼요. 벌써 진즉 끝났죠.”희원은 그가 이곳 앞에 와 있다고 말하자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전 통화 때ㅡ 약속이 있다고 하니, 데리러 가도 되냐고 묻더라.
당연히 된다고 말했더니 거짓말처럼 그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누굴 만났냐고, 뭘 했냐고 묻지도 않는다.
“나 지금 한주혁 대표님 만났는데.”그녀가 일순 걸음을 늦추며 말하자 답이 없다.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불만 있구나?”ㅡ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보다. 또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하고.“나 있지, 무시무시한 제안을 받았다고요. 대표님이 나 세계 스타로 만들어준다고.”ㅡ아아, 뭐, 어? 뭐라고?“어떡해? 나 스타 만들어준다는데? 그분 우리 업계에서 전설인 거, 알죠?”그의 말이 잠시 끊긴다. 희원은 걸음을 멈췄다.
그래, 놀랐을 것이다. 당황했을 것이고.
“나 어떡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ㅡ나야 뭐 할 말 없지. 당신의 미래인데, 당신이 선택해야지. 옳은 길로.그녀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린다.
“그런데 왜 말이 없었어? 잠깐? 무슨 생각 했어요?”ㅡ검사 일을 그만 두고 당신 매니저를 해야 하나, 그 생각 했지.“뭐어?”ㅡ설마, 나 떼어놓고 가려고? 나 데려가야지.“일은 어쩌고! 당신도 일해야죠!”ㅡ당신 매니저 해도 안 굶고 살 것 같아서. 내가 관둬야겠다. 괜찮아, 어차피 총도 없는데 뭐.희원은 황당한 그의 답변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걸음이 빨라졌다.
ㅡ다 좋은데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나도 지금 경황은 없으니까.……지금까지 쓸데없는 걱정을 했지 뭐야.
일말의 주저 없이 편을 들어준 그의 말 앞에.
그토록 싫다 말하며 놀려댔던 그의 농담 앞에, 그녀는 마음의 고삐를 풀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달렸다.
자신을 발견하고 휴대폰을 내리는 그를 향해 달린 희원은 다짜고짜 그를 끌어안았다.
“어, 왔어? 금방 내려오…….”그녀는 그를 꽉 끌어안고는 산소통을 낀 것처럼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꿈은 변하기 마련이고, 세워둔 공식이란 바뀌기 마련이다.
지금 그녀가 세운 공식의 답은 그였다.
“찾았다, 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