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사랑스럽다는 말이야
“……하.”희원이 떠난 자리.
그녀가 두고 간 계약서만 말없이 바라보던 주혁의 잇새로 탄식이 터졌다.
정신을 차려보겠다는 것처럼 마른 세수를 하더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말문이 막혀본 일도 처음이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그녀는 어느덧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막연히 변화를 두려워하는 눈빛도 아니었고, 가본 적 없는 미래에 대한 불신의 눈빛도 아니었다.
지금의 결심을 언젠간 후회할 거라는 것까지 내다본.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몫이라고 확정 지은.
그의 입장에선 쓸데없이 대범하고 겸허한, 그런 눈빛이었다.
“무슨, 이런…….”
대표님은 실수가 두려우신 모양이네요.
“겁이 없는 거야, 겁이 많은 거야, 대체 뭔데…….”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벼랑 끝에서 다음 발을 내디딘 사람뿐이에요.
……휴. 주혁은 긴 숨을 불어 내쉬며 그녀가 두고 간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높은 단가로 책정한 계약금도, 파격적인 대우로 마련한 다른 조건들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 진짜. 할 말 없게 하네.”야심 차게 만들어온 계약서를 바라보던 주혁은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을 토했다.
귓불까지 뜨거워올 만큼 자존심이 구겨졌고, 속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거절. 거절을 당했다.
“뭘 그러게 대단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고, 어떻게 이걸…….”벌써 두 번째 거절. 단 한 구간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거절의 이유.
주혁에게 성공이란 화려하지만 외로운 길이고, 그런 것들을 감수해야만 하는 길이었다.
제안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 길을 기꺼이 택했으며 따라서 당연한 길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따라 성공을 거머쥔 무용수들은 주혁에게 트로피가 되었고, 재산이 되었다.
그런데, 거절을 했다.
“말도 안 돼. 이깟 현실에 안주하고 살면서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미련하긴.” 주혁은 그녀의 선택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해서든 되돌려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거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내 사전에도 실패는 없다고. 데니스 한에게 그런 오점을 남길 수는 없으니까.”그에게 지금 이 상황은 실패였다. 그는 사실,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공궤도만 달려온 그는 실패를 끔찍하게도 두려워했다.
마치 그녀의 말처럼 벼랑 끝에 서 있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것만 같은 망상을 안고 있게 했다.
그녀를 붙잡고 싶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설득하고 싶다.
달아날수록 포기가 되질 않는다.
실패.
사실은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연락을 해야겠어. 이런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일이 힘들어졌어. 인호 너도 알듯이 단속이 심해져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백인호 의원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그의 사촌 형 ㅡ 차민규는 그의 집으로 찾아와 서재로 걸음 했다.
누구도 믿지 않는 백인호 의원은 서재 이외의 공간에서 차민규를 만나지 않았다.
제한된 장소,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은밀하게 친척이자 금괴 밀수의 중간책을 맡고 있는 차민규를 조우했다.
“인호야, 니가 힘 좀 써봐. 인맥은 뒀다 뭐해? 니 인맥이면 검사 한 명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잖아.”차민규는 껄렁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특유의 째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친척이고, 형이니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백인호 의원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편치 않다.
서로의 치부를 쥐고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만,
“모르면 가만히 있어. 검사가 그렇게 쉬운 상대인 줄 알아? 각자의 수사권이 있다고. 공론화도 어렵지 않고.”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보며 살고 싶지 않은 상극의 두 사람이다.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백 의원의 말에 차민규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아아, 그래? 그렇지. 난 별로 아는 게 없으니까. 가만히 있을게.”차민규는 바로 수긍하는 말을 하며 손을 들어 보였다.
동생인 주제에 사람 무시하는 백인호의 저 말투는, 언제 들어도 비호감이지만 어쩔 수 없다.
보통 동생은 아니니까.
대한민국을 쥐었다 폈다 하는 대단한 정치가였으니까.
“자금이 필요해. 눈치 보며 미룰 시간이 없어.”백인호는 차민규에게 자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항 검색이 까다로워져 대다수의 금괴가 발이 묶인 채 현금으로 돌지 않고 있었다.
무릇 정치란 돈이 있어야 가능했고, 돈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여드는 법.
“인호야, 돈이 필요하면 뭐 해. 움직일 수가 없다니까? 지금 공항 사정이 좋지 않아요. 알면서 그래.”“그게 형의 일이야. 몰라?”“인호야.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냐? 나 진짜 내 목숨 내어놓고 일하는 거야. 너 알잖아. 그런데 요즘은 어렵다고.”“어렵다?”“……그래. 어, 어려워. 좀 많이.”백인호의 날선 눈빛을 받아낼 깜냥이 없는 차민규는 높게 치켜들었던 턱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밑에 사람 부리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부려먹으려 하는 동생 백인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은연중 틱틱 거리는 말투가 나오지만, 그것도 금세 사라지고 만다.
어찌 되었든 한량으로 살아 별 볼 일 없던 자신에게 출처 남지 않는 거만의 부를 주었고, 자잘한 사고를 치고 돌아다녀도 가진 힘으로 금세 풀어주고 마는, 능력자였으니까.
“아, 알았어. 더 노력해볼게, 인호야.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하면 다 되는 거지.”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말해야지.”백인호는 깍지를 낀 채 책상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렸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SUC 방송국 사장에게 당과 관련된 호의적 뉴스를 청탁하며, 동시에 방송국 부지 선정에 힘을 써달라는 청을 받았다.
국토부 관계자들을 만나 손을 써야 했고, 따라 뻗어나갈 줄기에 하나하나 돈을 발라야 했다.
모든 것은 전부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이 난다.
“이만 가봐. 수고하고.”“어, 그래. 알았어.”그리 길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사람을 불렀나 싶어 차민규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저, 그런데 인호야. 이제 나 감시하는 거 그만해도 돼.”서류를 들춰보려던 백인호는 손길을 멈췄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난 있지, 그렇게 감시하는 똘마니 붙여놓고 있는 거 되게 불편하다? 너 그거 알아? 누가 너 24시간 감시한다고 생각해 봐. 편하겠어?”“감수해. 감수할 만하잖아.”“인호야, 나 좀 풀어줘라.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 애를 쓰는데.”“나를 위해 애를 쓰는 게 아니라, 형 본인을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거야. 말은 똑바로 해.”“…….”“그리고 말인데, 적당히 자중하면서 있어. 벌써 경찰서만 몇 번을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야. 이러려고 개명시킨 줄 알아? 사람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아, 그건 내가 술 먹고 작은 실수를…….”“그 정도면 병이야. 알코올 중독 센터에 가보든가.”“너, 넌 무슨 형한테 그렇게 섭섭한 말을…….”“술만 마시면 그렇게 사고를 치는데, 내가 그런 자잘한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야……!”……휴. 백인호는 끓어오르는 속을 잠재우려는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봐줄 거라는 것을 믿고 이름을 팔고 다니며 자잘한 사고를 끊임없이 치고 다니니, 조용히 수습을 하는 것만도 큰 스트레스였다.
“밖으로 소문 내지 않게 하는 것도 일이야. 잘하라고, 앞으로.”“……알았다. 동생 앞날에 누가 되는 형이라 미안하다.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차민규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동생 비유에 맞을 대꾸를 늘어놓고는 소파를 돌아 나왔다.
돈이 필요하다니 돈을 마련하러 떠나야 할 때.
잔재주가 비상하여 지금껏 들키지 않고 정체를 숨긴 채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시하는 눈이 많아. 더 조심하고.”“나도 알아. 걱정 마라. 동생.”차민규는 백인호를 힐끗 바라보고는 서재를 나왔다.
조용한 집을 걸어 나오는데, 희주를 만났다.
“여어, 제수씨.”“오셨어요.”“온 게 아니라 가는 중입니다. 제수씨는 얼굴 보기 참 힘들어요.”차민규는 응접실로 걸어가는 희주와 마주치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위아래로 훑는 시선.
희주는 숨을 꾹 참으며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뭐, 제수씨 신세나 내 신세나 크게 다를 것 없는데, 언제 한번 밥이나 먹읍시다. 내가 맛있는 걸로 제대로 대접할 테니까.”“……살펴 가세요.”“제수씨는 인호 서재 출입이 가능한가? 혼자서도?”묵례를 건네는 희주에게 차민규는 머리를 긁적이며 헛소리를 해댔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희주가 바라보자, 차민규는 이내 손을 저으며 비위 상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냥 물어봤어요. 서재 출입은 안 되겠지, 아마. 인호가 제수씨한테 그런 것까지 다 보여주고 말해주겠어요?”“무슨 말씀이세요?”“아니, 아니라니까.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 한 침대 쓰는 사이면 그런 말도 하려나? 한 침대에선 못 할 말이 없을까?”차민규는 말끝에 시선을 다시 희주에게 주고, 위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참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 올라왔지만 희주는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섰다.
정말이지 싫은 인간투성이다.
“갈게요. 제수씨. 잘 있어요, 우리 인호 잘 부탁합니다. 인호가 표정만 무섭지, 나랑 둘이 있으면 영락없는 애라니까요. 형 말이라면 껌뻑 죽고.”“네.”“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요. 내가 인호 혼내줄 테니까.”“……안녕히 가세요.”“그래요, 갑니다.”차민규는 껄렁껄렁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참고 밀렸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며 희주는 감정을 다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재.
문득 서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알고 싶어졌다.
희주는 먼 곳으로 시선을 주며 그의 서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언가 지환과 관련된 일들이 저 안에서 벌어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왈칵 밀려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을 그만두겠다는 소리가 서지환 씨는 그렇게 쉽게 나와요?”집으로 돌아온 희원과 다과를 준비한 뒤 지환과 식탁에 마주 보며 앉았다.
너 한입 나 한입, 과일을 먹던 희원은 지환을 향해 가늘게 눈을 흘겼다.
해외로 진출하게 되면 검사직을 관두고 매니저로 따라오겠다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진짜 대책 없어. 나는 나고 서지환 씨는 서지환 씨지. 어떻게 일을 그렇게 쉽게 관둘 생각을 해요.”“쉽다니. 누가 쉽대.”“3초 만에 튀어나오던데 뭘. 그만두고 따라오겠다고. 매니저로 취직시켜달라며?”“아아, 그거.”지환은 생각났다는 듯 웃었다.
“쉽게 말한 거 아닌데.”“그것도 농담이었어?”“농담도 아니었는데.”“…….”“물론 일을 관둬야 하는 건 어렵겠지만, 당신이 하는 결정보다는 쉬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건데.”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턱을 괴고는 둥근 미소를 지었다.
“그렇잖아. 아무렴 내 선택이 당신의 선택보다야 쉽겠지.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으른이다, 으른. 서지환 씨는 으른이네.”약간은 감동받았다고, 희원이 예쁜 얼굴을 하고는 웃자 지환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속이 쓰릴 텐데. 아마도 평생을 품어온 꿈일 텐데.
“후회 안 하겠어?”“뭐를요?”“계약서 보지도 않고 발로 뻥, 차버린 거.”“아아, 제안요.”흠. 희원은 짧게 숨을 끊어 쉬며 지환이 하고 있듯 턱을 괴었다.
“후회할 수도 있어요. 알잖아, 난 생각보다 신중하지 않고 뭔가 즉흥적이라는 거요.”“나 때문에 그런 결정한 것 같은데,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나 싶어서.”그의 염려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너를 가둬두는 형국이 된 건 아닐까. 내 곁에 남았음이 불행하게 되면, 어떡해야 하나.
“물론 당신이 잘 생각했겠지만 마음이 아주 편하지 않…….”“후회할지도 모른다니까? 아마도 내 성격에 살다가 분명히 후회할 거예요.”지환은 그녀의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요, 있잖아요. 후회하지 않을까 봐 이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결국 후회해도 서지환 씨가 곁에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아서.”“……나보다 더 으른이 여기 있네. 으마으마하네.”지환이 희원의 말투를 따라 하며 중얼거리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했어. 내가 대표님이 알아볼 정도의 뛰어난 무용수라면 결국 언젠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희원은 이번엔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상체를 스윽 앞으로 밀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세우고, 발돋움을 하며 팔꿈치로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듯 그에게 가까워져갔다.
별생각 없이 포크로 과일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지환은 움찔, 하며 손길을 멈췄다.
그녀는 턱밑까지 순식간에 얼굴을 들이밀고 다가와서는, 세상 다시없을 연약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한테 해줄 마지막 말이, 나 최고라고 했잖아요.”“아, 아, 그랬지.”조금 전까진 어른이었던 그녀가.
“그 말 진짜 좋았어요. 몰랐겠지만 그 말이 엄청 힘이 되었다고요.”아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눈빛을.
“내 사람에게 인정받는구나, 와, 인정받았구나. 나 그럼 성공한 거 아닌가? 막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즐겨보던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난 것 같은 수줍음을.
“물론 사랑한다는 말도, 좋았어요.”헤. 희원이 눈꼬리를 둥글게 하며 웃자 지환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딱딱하게 굳어선 부들부들 떠는 남편의 손을 힐끔, 바라본 희원은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포크 휘었어. 서지환 씨.”“……아, 아아. 어.”미안하다.
힘이 넘쳐난다…….
지환은 접시에 포크를 내리며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양손으로 턱을 괴고, 불편한 자세를 굳이 유지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 새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지금 분위기는 어린아이에서 금세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만다.
그게 뭐더라. 그게 뭐였지.
“있잖아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아아, 궁금한 거.”“나는 동물로 치면 뭐 닮았어요?”그래. 나도 지금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
지환은 지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점점 선명해져 가는 동물을 떠올렸다.
“여자들은 동물로 많이 비유하잖아요. 뭐, 강아지 상도 있고…….”희원은 고양이 같다는 말을 듣고 싶어 말꼬리를 흐렸다.
고양이. 고양이라고 말해줘요. 서지환 씨.
냐옹이. 냐옹이. 에옹. 에옹.
“삵…….”“뭐? 뭐요?”사아아앍?! 희원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지환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지금 내가 뭐라고 했지?”친애하는 판사님.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삵? 삵? 삵이라고 했어요 지금 나한테?”“내가 삵이라고 했어? 설마?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한 거야?”“이 남자가 진짜!”왜냐하면 여우에게 홀린 심신미약 상태이거든요.
지환은 여우라고 말할 뻔하다가 겨우 고양잇과에 도달했는데, 고양이까지 오지 못하고 삵에서 합의를 마치고 말았다.
다행이야. 하마터면 스라소니라고 할 뻔했어.
“와이프한테 삵 같대. 삵을 닮았대. 와, 대박사건.”“진정해. 삵도 새끼 때는 귀여워. 얼마나 귀여운데.”“내가 새끼냐 지금?! 새끼야?! 나 어른인데?!”“멸종 위기의 소중한 동물이야. 귀한 동물이지.”“됐거든요?! 고양이 두고 굳이, 굳이 삵이래. 참나.”희원이 이내 눈꼬리를 사정없이 끌어올리며 열을 내자 지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봐. 똑같이 생겼잖아.
털만 세우면 완벽하다.
“삵은 잊어버려. 과일 먹자. 아직 남았는데.”“됐고요, 댁이나 많이 드세요. 야생에서 나고 자란 저는 사냥이나 하러 가야겠네요.”쳇. 희원이 쌩하니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지환은 일어섰다.
총총총하며 걸음을 옮기는 희원의 무릎을 툭 치자 뒤로 꺾인다.
“엄마야!”지환은 금세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희원을 한 팔로 붙잡았다.
척, 받아서 척, 세우더니 척, 하고 깁스한 팔과 가슴 사이에 희원을 밀착시켰다.
“이 인간이 진짜, 뭐 하는 거예요 지금!”사냥.
“떨어져 있기 싫은데. 이러고 집도 치우고, 설거지도 할까?”“뭔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 이러고 무슨 집을 치워. 아, 놔요!”“같이 다니자니까?”버둥거려도 놓아주질 않는다.
포크 휘어지듯이 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원은 버둥대다가, 멈췄다.
어느 틈에 안긴 것이 나쁘지 않은지 금세 얌전해진다.
지환은 툭, 하고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오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뭔가 길들여지는 것 같은 기분은 그저 느낌 탓인가?
“서지환 씨, 나 청소 귀찮아.”“내가 하지 뭐. 나 청소 전문이야.”“설거지도 귀찮아.”“그것도 내가 하지 뭐. 사실 나 한 팔로 설거지 잘해.”뭐든 지가 하겠다니 희원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빨래도 귀찮아.
걱정 마, 내가 할게.
분리수거도 귀찮아.
걱정 마. 안 그래도 그것도 내가 하려고 했어.
……얼떨결에 모든 집안일이 지환에게 넘어간다.
그래도 좋은지 놓아주려 하질 않는다.
“농담이에요. 시간도 늦었는데 서로서로 도와 정리해봅시다. 서지환 씨.”“아냐. 다 귀찮다며. 내가 할게.”“됐다니까?”“씻는 건 안 귀찮아? 그것도 내가…….”희원이 고개를 위로 올리며 다시 삵으로 돌아가자 지환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거 놔줘요. 놔줘야 씻든지 설거지를 하든지 할 거 아냐.”그녀가 놓아달라며 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지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놓고 싶지 않고,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는 더욱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과 깁스 사이에 끼어, 희원은 편안한 숨을 고르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괜찮아. 원래 삵은 철망 사이에 껴서 노는 거 좋아하거든. 너도 여기 껴서 놀아.”“야이씨, 서지환! 죽을래?!”안녕하세요, 내 와이프는 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