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지피지기 백전백승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넓은 호텔 스위트룸.
호텔 피트니스클럽에서 이른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주혁은 객실에 딸린 사우나를 즐기고 나왔다.
쉐이빙 크림을 턱 주변에 부드럽게 올린 뒤 예리한 눈빛으로 면도를 시작했다.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섬세하게 날을 밀자 쉐이빙 크림이 밀려 오르며 반듯해진 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굿.”평소보다 면도가 잘됐다는 생각에 주혁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만족스러워했다.
한동안 거울 앞에서 관찰하듯 얼굴을 바라보던 주혁은 익숙하게 머리를 손본 뒤 샤워실을 나섰다.
미리 주문해둔 조식 테이블 아래 놓인 조간신문을 하나 집어 들고 드레스룸으로 향한 그는 여러 장 걸린 셔츠를 하나하나 밀며 힐끗, 간간이 셔츠로 시선을 주었다.
“흠, 오늘은 이걸로 할까.”손끝으로 밀어내던 셔츠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뒤 거울에 비춰보며, 주혁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타고난 감각과 센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패션을 선보였다.
어디서나 이목을 끌었고, 주목을 받았다.
한 손엔 신문, 다른 한 손엔 셔츠를 꺼내 든 주혁은 이내 슈트를 고르고 거울 앞에서 옷을 입었다.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듯 아침마다 같은 순서를 따르며 일과를 준비하는 그는, 오늘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줄곧 희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여심을 홀리기에 적당한 향수를 골라 가볍게 뿌리며 주혁은 중얼거렸다.
오늘. 그녀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
부드러운 권유가 통하지 않는다면 강렬한 인상으로 끌어당겨볼 생각이다.
그녀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사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냥 포기하고 말 일은 아니었다.
아까운 인재였고, 그의 입장에선 놓치면 손해였으니까.
“놓칠 수 있겠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지.”어쩐지 한동안 느낄 수 없었던 승부욕마저 활활 불타올랐다. 묘하게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을 오랜만에 마주했고, 그것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 흥미로웠다.
“자, 이제 준비는 다 된 것 같고.”갖고 싶은 것을 탐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로는 삶을 뜨겁게 했으므로.
무조건 갖고 싶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다.
토끼는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부터 도망치는 것이 당연했으며, 그것이 본능이라면ㅡ
“그럼 가볼까.”사자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향해 미친 듯 달려드는 것이, 본능이었으니까.
언제나 사자는 빨랐다. 도망치는 것이 빠르게 멀어질수록.
사력을 다해 피하려 들수록.
“원아, 오늘 끝나고 뭐 하냐?”“나? 오늘 저녁에?”희원은 다가온 구언을 바라보며 돌아섰다.
각자 스케줄이 바빠 한동안 뜸하다가, 오늘 오랜만에 마주한 녀석이다.
구언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같이 밥 먹자. 오랜만에.”“밥? 오늘?”희원은 느닷없이 밥을 먹자는 녀석을 뚱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구언은 툭툭 머리를 털더니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뭘 그러고 보냐? 얼마 후에 너 생일이잖아, 인마.”“아, 내 생일. 그렇지, 얼마 안 남았네.”“생일 당일이나 앞뒤로는 밥 먹기 힘들 거 아니야. 남편도 있고 가족들도 있으니까.”무심결에 기억이 난 것처럼, 녀석은 말을 이었다.
“스케줄 보려고 달력 보다가 이맘때쯤 뭐가 있었던 것 같아서 보니까 네 생일이 있더라고.”“아, 그랬구나.”“작년에야 뭐, 너도 할 일 없고 나도 할 일 없어서 밥을 생일날 먹었다고 하지만 요번엔 힘들 테니까.”……별스럽지 않은 기억이 두 사람 사이로 스친다.
혹독한 통금시간에 시달리던 그녀는 생일 파티도 훤한 대낮에, 점심식사로 대신하곤 했다.
때때마다 녀석이 있었던 시절.
“뭐, 설마, 아직도 나랑 둘이 밥 먹기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설마? 설마?”“아, 아냐. 그런 거.”희원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녀석의 마음은 지금쯤 어디를 달려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었지만, 표정만큼 편안해진 거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그래, 구언아. 밥 먹자. 오늘 시간 괜찮아.”“콜. 그럼 내가 아는 곳으로 예약해둔다?”……느껴진다.
과거를 해치지 않고, 미래를 엮지 않으며, 현재에 공존할 수 있는 방법.
그런 것들을 내내 고민하고 연구했을, 녀석의 마음이.
“저, 구언아.”“아? 왜?”휴대폰을 꺼내며 돌아서는 녀석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서며 눈빛으로 궁금증을 내보이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사실은 그보다 더 큰 미안함이 있지만.
“뭐가 고마워. 밥 한번 사준다는 게 옷자락까지 붙잡으며 고마워할 일은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아니, 든든해서.”“별소리를 다 듣는다. 이따 봐. 나 예약해야 해서 바빠.”녀석은 마음에 담지 않은 채 다시금 돌아서고 멀어졌다.
희원은 휴대폰을 들고 사라지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멀어지는 너의 그림자가, 더는 무거워 보이지 않아서.
“휴, 서지환 씨는 뭐 하는데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다시 전화해볼까?”……희한하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한꺼번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인하면 전화 오겠지. 바쁜데 괜히 들들 볶지 말고 기다려야겠다.”문득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습은 닮지 않았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과도 같은 사이.
각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하나의 공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난 운명과도 같은 사이.
빼고 더할 필요 없이 언제나 한 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거라고.
그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어? 서지환 씨!”연습을 끝내고 구언과 이동을 하려는데 연습실 밖에 지환이 기다리고 있다.
희원은 걸음을 멈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가 오지 않기에 바쁜가 보다, 기다렸더니.
야근인가, 오늘 아주 많이 늦는 건가 싶어 내심 걱정했더니.
“연락도 없이 언제 왔어요?”“그냥. 서프라이즈.”……웬 거지 같은 서프라이즈를 하고 있다.
희원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타박하듯 말을 꺼냈다.
“연락을 해야지, 연락을. 엇갈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연락도 없이 와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어요?”“연락을 하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뭘 모르네.”“이렇게 서 있어도 하나도 안 놀랍거든?”“웃기시네. 눈은 토끼 눈을 하고 종종 걸어왔으면서.”희원은 그제야 자신의 눈이 커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지환은 멋쩍게 웃으며 이실직고를 했다.
“사실 볼일이 있어서 근처 지나가다, 계속 일이 바빠서 연락은 못 하고 끝날 시간인가 싶어서 왔는데 당신이 나온 거야.”이제 전화하려고 했어.
“그랬구나, 메시지라도 주지 그랬어요.”“아아, 공무집행 중이라.”……공무집행.
내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너무 낯설어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보다 조금 더 늦게 연습실에서 나오던 구언은 지환을 발견하고는 우뚝 멈췄다.
지환과 구언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친다.
“뭐야, 저 할 말 없게 생긴 놈은.”“누구? 아, 구언이.”희원이 힐끔 돌아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떡하지? 난 구언이 하고 약속이 있는데.
“아, 맞다. 서지환 씨하고 구언이, 두 사람 친해졌다고 하지 않았어요?”“내가 언제? 내가 왜 저 할 말 없게 생긴 놈이랑…….”……아. 그랬지.
친하다고 했지.
지환은 문득 데니스 한을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사이 구언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놈 저놈 같은 마음을 품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마주 섰다.
“오셨, 와, 왔, 왔어. 형.”어색한 인사가 공중을 떠돈다.
“에, 네, 에, 어, 응. 왔다, 구언아.”서로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영혼 없는 친한 말들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희원은 두 사람을 멀뚱멀뚱 보다가 구언의 곁에 다가가 섰다.
왜 그리 가? 내 옆으로 와야지? 지환이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자 희원은 웃었다.
“어떡하지? 나 오늘 구언이랑 둘이 밥 먹기로 했는데.”“아…… 밥…… 둘이…….”유구무언 이 자식……
지금 내게 총이 없다고…….
“서지환 씨가 연락이 없어서 구언이랑 먹고 집에 들어가려고 했죠.”“아…… 그렇구나…… 우리 와이프가…… 선약이 있구나…….”지환은 세상 서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구언은 미래를 보고 왔다는 것처럼 겸허하게 눈만 감았다가 떴다.
제길. 그녀에게 무슨 사심이 남아 밥을 사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 같으…….”구언은 마지못해 웅얼거리다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접었다.
옘병, 정말 데려가기 싫다.
“어? 뭐라고? 같이 가자고?”그렇게 말꼬리를 흐렸건만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지환이 아는 척을 해온다.
저, 저, 같이 가자니까 속도 없이 웃는 낯 좀 보소. 그녀의 남편이지만 정말이지 너무너무 꼴 보기 싫다.
“진짜? 서지환 씨도 같이 가도 돼? 정말?”그녀마저 반가워하며 덥석 물자 구언은 긴 숨을 불어 내쉬었다.
몰래 쉬고 싶지만, 입김이 살벌하게 흘러나온다.
“저번에 형이…… 비싼 걸 사주기도 했고…… 신세 갚아야지…….”“그래. 맞다. 내가 그날 쓴 밥값을 아직도 갚고 있어.”지환은 하하하, 하하하하, 크게 웃으며 희원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으로 끌었다.
그래. 밥을 둘이 먹건 셋이 먹건 중요한 건 아니다.
생일 밥 정도는 사고 싶었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니까.
남편이 있다면 그녀가 더욱 마음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겠지.
“그럼 우리 일단 이동할까?”구언은 마음속에서 일련의 정리를 마쳤다. 정말이지 접시에 코 박고 밥이나 실컷 먹어야겠다.
가자고, 구언은 차 키를 꺼냈다.
빠앙ㅡ
세 사람 사이로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세 사람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아파트 한 대 값은 우습게 뺨 때리고 지나갈 고급 차량이 멈춰 서 있다.
이윽고 운전석 문이 열리고 번질번질한 구두가 땅에 닿자, 지환과 구언의 얼굴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희원은 입술을 작게 벌렸다.
“권희원 씨, 이제 끝났습니까?”오늘 무슨 날인가?
찾아온 이는 주혁이었다.
“주문해요. 오늘은 내가 살 테니.”주혁은 호방하게 손짓하며 모두에게 주문하기를 권고했다.
자리가 이상해졌다.
희원과 단출하게 생일 밥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남편이 오더니, 이제는 세상 잘난 놈까지 껴들어 자리가 북적북적해졌다.
지환과 구언은 메뉴판 위로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봐, 유구무언. 저 자식 저거 진짜 잘난 거 맞아? 이제 보니 밥 먹을 사람 하나 없는 것 같은데?
지환이 눈으로 묻자.
정신 차려요. 지금 저놈이 진짜 밥이나 먹자고 여기 왔겠습니까?
구언이 눈으로 답했다.
“흠, 이게 좋겠는데. 권희원 씨는 어떻습니까?”주혁이 중얼거리며 메뉴판을 희원에게 보여주었다.
희원의 시선은 주혁이 내민 메뉴판에 머물고, 지환과 구언은 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일단 저 자식이 산다고 하니 난 제일 비싼 거.
“난 이걸로 해야겠다.”구언은 메뉴판을 대강 훑고는 제일 비싼 메뉴를 골랐다.
돈 잘 버는 잘난 놈이 굳이 사겠다는데 말릴 이유란 뭔가.
좋은 걸로 먹어주마. 상관없잖아, 어차피 잘 버니까.
“흠, 그럼 나는.”지환은 구언이 멈춘 곳을 힐끔 보다가 따라 멈췄다.
잘 모를 땐 남이 고르는 메뉴가 최고다.
오케이. 나도 이거.
손쉽게 메뉴 선정을 마친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희원과 주혁이 바라보고 있다.
“다 골랐습니까?”주혁이 묻자 조금 더 염치없는 구언이 메뉴판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식사는 이걸로. 와인은…….”“와인은 내 쪽에서 주문하죠.”엇, 와인까지 최상급으로 시키려는데 주혁이 제지한다.
그러더니 쏼라쏼라 하며 와인을 주문한다.
“가능하겠습니까?”“메뉴엔 없습니다만 특별한 때를 위하여 갖춰놓았습니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심지어 메뉴판에도 없는, 더 비싼 놈으로 주문을 하니 구언과 지환은 또다시 서로 힐끔, 바라보았다.
나도 해? 나도 돈지랄 좀 해? 나도 할 수 있어.
구언이 눈썹에 힘을 주며 움찔움찔하자 지환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해. 지는 게임은 하는 게 아니야.
그저 눈빛만 오고 가는데 말이 통한다.
두 사내는 주혁의 돈 지랄에 꽤나 열을 올렸지만 식사와 와인은 죄가 없음에 합의를 끝마치기로 한다.
희원은 멀뚱멀뚱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주혁은 그런 희원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자리였다.
“처음 밀라노에서 이 와인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날은 무척 특별한 날이었는데, 이곳에서 추억할 수 있게 되다니 재미있군요.”주혁은 와인 잔을 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 얼마 전에 과속했다고 딱지가 집으로 왔더라고. 뭐지, 생각해보니까 대리기사님이 딱지를 끊었더라.”구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일 대설특보가 내려졌던데, 출근을 평소보다 일찍 해야겠어.”지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 와인엔 꼭 곁들여야 하는 치즈가 있는데, 지금 이 치즈도 괜찮네요. 구성 자체로 너무 훌륭하군요.”“내가 과속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했어. 딱지를 끊을 줄이야.”“올해는 눈이 작년보다 많이 내리는 것 같은데, 느낌 탓인가?”……여전히 따로국밥이다.
희원은 차례대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서로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지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다.
끼어들자니 한 명의 이야기만 아는 체할 수도 없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정신이 산만해진다.
함께 식사하는 것 같지만 묘하게 따로 노는 세 남자를 바라보다가, 희원이 나이프를 내렸다.
그러자 동시에 시선이 따라오며 적막이 내려앉는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우리 통일된 대화를 좀 나눌 수는 없을까요? 너무 각자 떠들고 있는데.”“그게 좋겠군요.”주혁은 손가락을 부딪치며 소리를 내었다.
이제 지방방송은 정리가 되고, 자신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남은 두 사내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서로 지 말만 하려고 여전히 대기 중이었다.
“통일된 대화를 나누려면 통일된 주제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통일된 주제와 대화란 당신의 이야기뿐이라.”주혁이 희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구언과 지환의 입가로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거 좋지.
“제…… 이야기요?”희원은 머뭇거렸지만 구언과 지환은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가지고 있다고, 서로는 생각했으니까.
“권희원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무척 강렬했습니다. 그렇게 느리고, 고고한 춤사위는 처음이었으니까요.”주혁이 회상하듯 말하며 와인을 한 모습 삼켰고, 구언은 자신의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와인, 세 병째다.
“제가 희원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였고, 이후 다시 만난 게 스물네 살? 세 살? 하, 그때 권희원은 정말 날아다녔어요.”“궁금하군요, 유구언 씨. 그때의 권희원 씨는 여전히 오만했습니까?”“물론이죠. 오만하기 그지없는, 세상 혼자 사는 무용수였죠.” 주혁과 구언이 ‘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
“그녀의 춤엔 특별한 것이 숨어 있어요. 전율이 일었습니다. 무척 오랜만에 느껴 봤다고 할까.”“다른 건 몰라도 대표님의 안목은 확신합니다. 저도 희원이의 춤사위에 깃들어 있는 감정을 하나하나 존중하니까요.”옘병, 껴들 틈이 없는 지환은 조용히 와인을 삼켰다.
주혁은 와인을 연거푸 삼키다가 약간의 힘을 실어 잔을 놓았다.
타이를 비틀어 내리는 그 모습이 여간 섹시한 것이 아니다.
“권희원 씨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입니다.”남자의 섹시함. 드럽게 불쾌하다.
주혁이 입가를 섹시하게 닦자 지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희원이를 가장 오랜 본 사람이죠. 누구보다도, 더, 오래.”구언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희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이제 보니 여기, 묘하게 자기 어필하느라 정신이 없다.
“희원의 히스토리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가슴에 남습니다. 그런 의미로 전 오랜 시간동안 그녀와 친구로 지내며 영광의 시절을 보냈네요.”“사랑해.”풉ㅡ!
주혁은 구언의 이야기를 들으며 홀짝 와인을 마시다가 느닷없는 지환의 목소리에 주르륵 와인을 뱉었다.
섹시하게 닦고 말고 할 정신도 없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들자, 지환이 희원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헛소리를 나불거리고 있다.
이미 구언은 영혼을 탈곡했는지 이 세상 사람 아닌 표정을 짓고 있다.
지환은 다정하게, 그리고 낮게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아…… 어…….”미, 미쳤나 봐! 왜 이래요!
희원이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웃음을 매달자 지환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두 사내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고는 손짓했다.
계속해봐.
그렇게 니들끼리 계속 떠들어봐.
“두 분은 말씀 나누시죠, 편안하게. 잘 듣고 있습니다.”어차피 내가 이기는 게임이니까.
테이블엔 와인 네 병째 들어왔다.